사람들이 현세에서 구하던 복은 어떤 것이었을까? 자신들이 살아 있는 바로 이 현실에서 구하고자 하였던 것은 무엇보다 개인과 그 일족의 안녕을 구하는 일이었다. 집안 식구, 친족, 가정의 안녕과 평화를 바라는 것은 어느 시대이건 모든 이가 가질 수 있는 일반적이고 현실적인 바람일 것이다. 불교에 귀의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현실에서 얻기를 바랐던 소원은 바로 자신과 집안 권속(眷屬)의 무탈(無頉)한 번영이었다.
구복 신앙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 주는 것은 아무래도 관음보살이다. 인도나 중국에서 모두 일찍부터 가장 널리 신앙되었던 관음은 대승 불교(大乘佛敎)를 대표하는 보살이며, 관음 혹은 관자재(觀自在)로 불리기도 하였다.38) 위로는 진리의 길을 찾아 보살행을 닦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원한다(上求菩提 下化衆生)는 보살은 불타의 세계와 중생들의 세계, 그사이 어디쯤에 자리한 이질적인 존재이다. 보살의 본뜻은 수행자로서의 개념에 더 가까웠을 것이나, 동아시아에서는 그보다 부처님 다음 가는 신격(神格)으로 받아들여졌다. 대승 불교가 발달하면서 보살은 더욱 다양하게 분화되었는데 그 가 운데 현세 구복의 기원을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줄 수 있는 보살은 바로 ‘자비’를 중요한 속성으로 한 관음보살이었다.
대자대비(大慈大悲) 관세음보살이라는 말이 익숙할 정도로 중생들이 관음의 자비심에 기댄 신앙은 그 어떤 부처님이나 보살에 대한 신앙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속세에 사는 몽매한 중생을 가엾게 여긴다는 것은 부처님에게 직접 바라기는 사실 어려운 문제이다. 열반에 들어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난 부처님께 인간의 감정과 같은 ‘불쌍히 여김’이나 ‘가엾게 여김’, ‘측은하게 여김’을 바라고, 그에 기대어 어떤 희망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무래도 곤란한 점이 있다. 이때 중생들에게 친숙하게 여겨진 것이 관음보살이다. 관세음(觀世音), 혹은 관음보살은 그 이름부터 부처님을 대신하여 중생들의 소리를 들어준다는 의미가 아닌가.
대승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경전 가운데 하나인 『법화경(法華經)』의 관세음보살 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이하 보문품(普門品)으로 약칭)은 중국 남북조시대인 6세기에 이미 따로 『관음경(觀音經)』으로 독립되어 있었을 정 도로 널리 알려졌다. 보문품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백천만 중생이 온갖 고난을 받아도, 한마음으로 관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그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대목이 있다. 이어서 보문품에서는 인간이 살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다종다양한 고난의 예를 든다. 큰 화재를 만났을 때나 물난리가 났을 때, 바다에서 겪게 되는 해난(海難)과 같이 거의 천재지변에 해당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나찰(羅刹)이나 야차(夜叉)를 만났을 때, 산중에서 도적을 만나거나 옥살이를 할 위험 등이 있다. 여기서 언급한 고난은 현대 사회에서 부닥칠 위험이 별로 없는 것이지만 의지할 곳 없는 옛날 중생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위기에 처한 중생이 한마음으로 관음의 이름을 부르면 관음이 그를 돌아본다는 부분은 관음의 명칭에 대한 설명이 되기도 하였다. 즉, ‘관세음’이라는 이름이 세간(世)의 음성(音)을 본다(觀)는 뜻이며, 이는 중생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에 응답하여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보살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사실 중생이 보기에 보문품에서 거론한 재난은 불가항력이어서 피할 수 없는 옆면이 많다. 그런 재난을 만나 절망에 빠져 있는 중생을 단지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구원해 주는 관음보살은 얼마나 자비로운 존재인가. “대자대비하신 관세음이시여.” 하는 찬탄이 절로 나올 만하지 않은가.
한편으로 무수한 대중을 제각각의 고난에서 구원해 주기 위하여 관음은 또 다양한 분신(分身)을 내보인다. 관음을 부르는 중생의 목적이 서로 다른 만큼 그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다. 어떤 때는 자재천(自在天, 힌두교의 시바 신이 불교에서 천신의 지위를 얻은 뒤의 이름)이 되었는가 하면, 어떤 때는 부처님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때는 왕의 모습으로, 비구나 비구니의 모습으로, 소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관음이 다른 모습을 내보이는 것은 그만큼 중생이 겪는 어려움과 바라는 바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고, 관음보살은 모든 중생의 소망을 들어주고, 제도(濟度)해 주기 위하여 중생 개개인에게 적합한 모습을 내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불교를 믿는 중생이라면 누군들 관음보살을 믿고 싶지 않겠는가.
언제 어디서나 중생의 부름에 응답하여 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 주는 관음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 관음삼십이응신도(觀音三十二應身圖)이다. 관음삼십이응신도라는 이름은 32가지 다른 모습으로 화현한 관음의 모습을 그렸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다. 1550년(명종 5)에 그려 전라남도 도갑사(道岬寺)에 안치되었던 그림이지만 현재는 일본 지온인(知恩院)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그린 다른 관음보살도처럼 관음삼십이응신도의 관음보살 역시 화면 중앙 바위 위에 앞면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편안하게 앉아 있다. 화면 윗부분에는 양쪽에 다섯 구씩 모두 열 구의 부처님이 있고, 중앙의 관음보살 바로 머리 위에 따로 두 구의 여래가 있어서 『법화경』에 기반을 둔 불화라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관음 머리 위의 세계는 부처님이 주관하는 불국세계(佛國世界)이자 천상이고, 관음이 앉아 있는 바위산 아랫부분은 속세의 중생이 살아가는 사바세계(娑婆世界)이다. 화면에서 관음을 중심으로 뾰족뾰족한 바위산이 솟아 있는 아랫부분은 마치 험난한 사바세계에서 고통스러운 윤회를 반복하는 인간사를 비유한 것처럼 보이며,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하늘은 역시 분란 없이 평온한 부처님 나라를 보는 듯하다. 이렇듯 중앙의 큼직한 관음상을 중심으로 화면을 상하 둘로 나누어 양쪽을 분명하게 대비시킨 것은 여느 보살이 그렇듯이 사바세계와 불국세계를 연결해 주는 중개자이자, 중생들을 교화하여 불국으로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하는, 중생의 지도자로서의 관음의 이미지를 명확히 드러낸다. 화면 하단에는 각양각색의 위난에 빠진 중생의 모습과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난 관음의 화신을 그렸다. 화면 중앙을 차지한 관음의 모습과 나머지 하단부에 가득한 관음의 여러 가지 변화신(變化身)은 그를 부르는 중생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관음의 자비가 한눈에 그대로 들어오도록 시각적으로 재현한 것이 아닌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만나게 되는 고통, 즉 재난에 빠지거나 위험한 상황에 처하였을 때, 한마음으로 관음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관음 신앙의 내용이다. 코앞에 닥친 현세의 고통 속에서 관음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보통 사람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갔음이 틀림없다.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만도 감사한 일인데 심지어 구원에 이르는 방법이 단지 관음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쉬운 방법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관음 신앙은 동아시아에 소개되자마자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사람들은 곧 눈에 보이는 숭배 대상을 만들기 시작하였고, 중국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불교 미술을 만들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관음상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세간의 소리를 본다(觀世音)는 관세음보살을 조형화하였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바로 관음보살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보았을까? 만일 어떤 보살상을 보면서 이를 관음보살로 믿고 숭배하였다면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보살상의 외적인 특징 가운데 그것을 관음이라고 인식시키는 징표들이 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징표들은 일종의 시 각적인 약속이 되었다. 미술사에서는 이러한 시각적 약속을 도상(圖像)이라고 한다. 도상은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 사이에 다양한 시각적 약속에 대한 암묵적인 합의가 있어야 의미가 있다. 예컨대 관음보살의 도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머리에 쓴 보관(寶冠)에 표현된 작은 부처상인 화불(化佛)이다. 때로는 손에 정병(淨甁)을 들고 있는 것도 관음의 상징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특정한 징표나 상징이 있는 것을 관음보살로, 또 다른 어떠한 특징을 갖춘 것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라고 믿게 만드는 시각적인 약속이 있었기에 불교에서는 무수한 신상(神像)을 만들 수 있었고, 이를 기초로 삼아 불교의 판테온(Pantheon)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삼국시대에 보살상 중에서 가장 먼저 만들기 시작한 것은 관음보살과 미륵보살이었다. 그런데 미래불인 미륵보살은 지금이 아니라 머나먼 미래에 이 땅에 내려와 중생들을 구원할 것을 맹세한 보살이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미륵 신앙은 내세와 관련된 신앙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현세 구복의 불교 미술을 다루는 이 글에서는 관음보살상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삼국시대의 관음상은 명문을 보고 관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개 도상적 특징을 보고서 관음으로 파악하고 있다.
삼국시대 관음의 도상으로 통상 거론되는 것은 보관의 화불과 손에 든 정병(淨甁)이다. 충남 부여 군수리의 목탑지에서 발견된 보살 입상은 아직까지 머리에 쓴 보관에 화불이 표현되지 않아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음을 말해 준다. 납석(蠟石) 혹은 활석(滑石)으로 만든 작은 불좌상(佛坐像)과 함께 발견된 이 보살상은 왼손에 하트 모양의 심엽형(心葉形)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우리나라에서는 보주를 들고 있는 보살상을 관음으로 단정 지을 만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지만 중국의 경우에는 심엽형 보주를 들고 있는 보살상 중에 ‘관음’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것이 적지 않다.39) 보주를 들고 있는 보살상 가운데 관음 이외에 다른 보살의 이름이 새겨진 예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보주를 들고 있다면 관음보살로 만들었다고 판단해도 무방할 것이다. 군수리 출토 보살상은 양식적으로 좀 더 오래된 고식(古式) 전통을 따르고 있어서 어깨에 걸친 스카프 같은 것이 X 자로 교차되었다. 이를 천의(天衣)라 하는데 X 자 천의는 장천 1호분과 같은 고구려 고분 벽화와 고구려 영역에서 발견된 금동 보살상, 평양 원오리 사지에서 출토된 소조 보살상 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이른 시기의 특징이다. 천의를 빼면 목걸이나 팔찌 같은 장신구도 없고, 화려한 보관을 쓰지도 않았다. 꾸미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관음상은 삼국시대 관음 조상의 초기 단계를 보여 준다.
오늘날 알려진 것과 같은 모습의 정형화된 관음의 도상을 보여 주는 것은 서울 삼양동에서 발견된 관음보살상이다. 배를 약간 내민 것처 럼 보이는 자그마한 보살상은 머리에 세 개의 화판으로 이루어진 보관을 썼다. 보관에는 부처님의 화신인 작은 화불이 양각되었고 손에는 제법 큰 정병을 들고 있다. 이처럼 보관의 화불과 정병은 전형적인 관음보살의 도상적 특징이다. 이 보살상은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관음상 가운데 이와 같은 도상을 보여 주는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보관에 화불을 표현하는 것은 원래 인도의 보살상에서 시작되었다. 간다라(Gandhara)에서는 터번(turban)에 화불이 있는 보살상을 만들었는데, 이에 대한 해석은 보살이 다음 생에 태어나면 깨달음을 얻어 불타가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는 징표로 화불이 표현되었다는 것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간다라와 서역의 보살상에서 화불이 표현된 것은 대개 미륵보살로 판단하지만 6세기 이후 중국을 중심으로 화불이 표현된 관음상이 만들어졌다. 아마도 여기에는 5세기경에 한문으로 번역된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관음보살에 대한 신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경전은 앞에서 거론한 『법화경』 외에 『관무량수경』을 비롯한 아미타 관계 경전과 『화엄경(華嚴經)』, 『천수경(千手經)』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관무량수경』이 주목을 받은 이유는 경전 중에 무량수불(無量壽佛), 즉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협시(夾侍) 보살로 관음과 세지보살(勢至菩薩)을 들고, 이들의 외형을 설명한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관음보살은 머리를 위로 묶고 화불이 있는 보관을 쓴 모습으로 나타난다. 『관무량수경』의 이러한 서술에 따라 보관에 화불이 있는 보살상은 관음보살이라는 것이 오랫동안 통설로 믿어졌다. 그러나 화불이 표현된 관음상은 생각보다 늦은 6세기 중엽경 중국에 등장하기 시작하며, 우리나라의 조각 중에서는 삼양동 출토 관음상보다 제작 시기가 올라가는 예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삼양동 관음보살상은 군수리 출토 관음보살상에 비하면 화 불이나 정병 등 새로 유입된 요소들을 수용하여 만든 조각이다. 또 양식적인 옆면에서도 새로운 점들이 보이는데, 천의가 두 줄로 짧게 U 자 모양을 만들며 흘러내린 것도 군수리 출토 관음상에서 X 자 모양으로 내려뜨린 것보다 새로운 방식이다. 삼양동 관음보살상은 얼굴이 지나치게 크고, 상반신에 입체감이나 양감이 결여되어서 전체 비례라든가, 사실성 면에서 얼핏 보기에는 엉성하게 조각되었지만, 나름대로 그 시대의 최신 유행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도상적으로나 양식적인 면에서 6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이 관음보살상이 출토된 삼양동이 속해 있는 서울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한강 유역에 자리하고 있어서 7세기 전반에 어느 나라에 속하였는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삼양동 관음보살상을 제작한 나라도, 제작 목적도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것은 세속의 온갖 염원을 자비로운 관음보살에게 빌었을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