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봉천, 무위당의 길
등록 :2015-12-15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그의 집엔 거지가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인기척이 나면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아가, 손님 오셨다.’ 정부가 토지의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침을 발표하자, 소작인들에게 부쳐먹던 땅을 무상으로 나눠준 할아버지였다. ‘땅값은 그동안 받은 소작료로 충분했다.’
선생의 사유는 인간에 의한 자연과 생명 파괴의 문제로 확장됐다. 그 결과로 태어난 게 1983년 10월 농산물의 도농직거래 조직인 한살림이었다. 평생 수천 점의 서화를 쓰고 그리고도 돈 받고 판 적이 없는 그였지만, 한살림의 밑돈 마련을 위해 처음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원주역 플랫폼에 들어서면 항상 반갑게 맞아주는 이가 있다. 역사 허름한 창고 회벽에서 밝게 웃고 있는 무위당 장일순이다. 선생을 기리는 이 지역 대학생들이 그린 벽화 속에서 선생은 언제나 그랬듯이 환한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나다.’
역사 왼쪽 해가 잘 비치는 자리였을 것이다. 노점상, 지게꾼, 행상, 건달 등 역에 터잡고 살아가는 이들로 항상 북적이는 곳이다. 언젠가 선생은 그곳에 자리를 깔았다. 노점에서 소주를 시켜놓고 아침부터 그곳 사람들과 술자리를 벌였다. 영락없는 노숙자였다. 기행은 계속됐다. 자초지종이 입에서 입으로 퍼졌다. …한 시골 아낙이 선생을 불쑥 찾아왔다. 딸 혼수 비용을 마련해 원주로 내려오다가 기차 안에서 몽땅 소매치기당했다는 것이다. 아낙은 선생에게 매달렸다. 찾아달라고. 선생이 역전에 자리를 깐 것은 아낙을 돌려보내고 나서였다.
선생의 노숙생활은 사흘이고 나흘이고 계속됐다. 그런 어느 날 한 남자가 조용히 찾아왔다. 그는 말없이 돈뭉치를 건넸다. 쓰고 남은 돈이었다. 선생은 그 돈에 당신의 것을 보태 원금을 채워 아낙에게 전했다. 그 뒤에도 선생은 가끔 역전에 갔다. 스리꾼에게 위로의 술을 건네려는 것이었다. “미안하네. 내가 자네 영업을 방해했어. 자 한잔 받으시고, 날 용서하시게.”
‘원주의 아버지’. 김지하는 선생을 이렇게 묘사했다. “하는 일 없이 안 하시는 일 없으시고/ …밑으로 밑으로만 기시어 드디어는/ 한 포기 산속 난초가 되었다.”
그의 말마따나 선생은 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서울공대 전신인 경성공업전문학교를 다니다 국대안 반대데모 때 제적당하고 다시 서울대 미학과를 입학했으나 중도에 귀향해 고등공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학교 살림이 어렵게 되자 아예 인수해 대성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당시 원주엔 고등학교가 없었다. 선생은 손수 교실을 짓고 교사 겸 재단 이사장 노릇을 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5·16 군사정권에 의해 반공법 위반으로 3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서 쫓겨났다.
원주 봉산동 자택엔 10명의 대가족이 살았다. 한 지붕 아래 안방엔 부모님, 옆방엔 동생들, 문간방엔 선생 내외가 기거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안방 앞에 무릎 꿇고 문안 인사를 드렸다. ‘밤새 평안하시었습니까.’ 내어놓은 요강을 뒷간에 비우고, 깨끗이 씻은 뒤 물을 가득 부어놓았다. 한번도 거르지 않았던 그 일은 사실 집안 어른의 가르침을 몸에 새기는 과정이었다.
그의 집엔 거지가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인기척이 나면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아가, 손님 오셨다.’ 어머니는 바가지를 들고 온 이들에겐 밥과 반찬을 가지런히 담아 보냈고, 빈손인 손님에게는 건넌방에 상을 차려주었다. 해방이 되고 정부가 토지의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침을 발표하자, 소작인들에게 부쳐 먹던 땅을 무상으로 나눠준 할아버지였다. ‘땅값은 그동안 받은 소작료로 충분했다.’ 어머니는 선생이 옥살이하는 동안 단 하루도 이불을 깔고 주무시지 않았다.
“쥐를 위해 늘 밥을 남겨 놓는다/ 모기를 염려해 등불을 붙이지 않는다/ 절로 돋아나는 풀을 위해/ 계단을 함부로 밟지 않는다.” 선생이 즐겨 소개한 묵암선사의 선시는 그런 가풍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석방된 이후 선생은 보안관찰 대상으로 묶였다. 골목 어귀에 파출소도 들어섰다. 선생은 그때 다시 붓을 들고, 할아버지(여운 장경호)와 차강 박기정 선생에게서 배운 글씨와 난을 다시 쓰고 치기 시작했다. 유홍준 교수가 훗날 조선의 마지막 문인화라며 ‘민초도’로 명명한 장일순 난은 이때 잉태했다.
언젠가 정현경 전 이화여대 교수가 물었다. “사람들은 흔히 선생님을 도인이라고도 하는데, 언제 수련하시나요.” “방축을 걷는 것이죠.” 자택에서 시내까지는 20여분 거리. 파출소를 지나 둑보다 낮은 동네를 가로질러 방축에 오르면 봉천이다. 개봉교를 지나 쌍다리에 이르면 건너가 시내다. 방축 밑 노천시장을 따라 중앙시장 쪽으로 가다 보면 밝음신협이 나온다.
“땅에 뿌리를 박고 밤낮으로 해와 달을 의연히 맞아들이는” 방축의 풀들이나, 가난한 노점상, 이발소, 구멍가게, 식당 사람들은 그를 일깨우는 스승이었다. 대성학원 설립자 시절부터 그가 선 주례만 2천여건. 서민들에게 그는 좋은 주례였다. 때문에 대개 인연이 닿는 이들이었다. ‘잘 지내셨느냐’ ‘건강하신가’ 따위의 인사가 오가고, 아이들 소식, 살림살이, 작황, 벌이 등으로 이야기가 넘어갔다. 그러다 보면 20분 거리가 두어시간 걸리기 일쑤였다. 선생은 그렇게 ‘물속을 천리라도 기어’ 갔다.
방축을 따라 돌아가는 길. ‘저 산 보이지.’ ‘치악산이요?’ ‘모월산이야. 하는 일 없는 것 같지만 안 하는 일이 없는 게 없는 어머니 달 같은 산이지.’ 그가 꿈꾸고 닮으려 한 것은 그런 산이었다. ‘오늘 또 내가 허튼소리를 많이 했구나.’ ‘이 못난 사람을 사람들이 많이 사랑해주시는구나.’ 반성이 뒤따랐다.
1968년부터 시작된 신용협동조합운동의 싹은 그 속에서 돋아났다. 농민이나 도시 서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저리의 융자와 남은 돈을 유익하고 안전하게 맡길 곳이었다. 지학순 주교와 함께 시작한 원주의 신협운동은 강원도 일대 농촌과 어촌 광산촌으로 퍼져나갔다.
1972년 남한강 지역을 휩쓴 대홍수 때 독일의 가톨릭 구호단체에서 가톨릭 원주교구에 거금 187억원을 보내왔다. 선생은 지 주교를 설득해 그 돈을 좀더 근본적인 사회 개혁에 쓰기로 하고, 기금은 각 지역의 농민회, 노동자회, 어민회, 영세시민회 등 풀뿌리 조직의 싹을 틔우는 데 썼다. 그 결과 유신시대, 원주는 반유신 민주화운동의 실질적 구심점이 되었다.
유신체제가 말기로 접어들면서 선생의 사유는 인간에 대한 억압과 착취에서 인간에 의한 자연과 생명 파괴의 문제로 확장됐다. 그때 함께 고민한 이들이 김지하, 박재일, 김영주, 최혜성, 서정록 등이었고 그 결과로 태어난 게 1983년 10월 농산물의 도농직거래 조직인 한살림이었다. 평생 수천점의 서화를 쓰고 그리고도 돈 받고 판 적이 없는 그였지만, 한살림의 밑돈 마련을 위해 그는 처음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그의 좁은 문간방은 방문객들로 북적였다. 전국의 활동가들이 충전이 필요하면 그곳을 찾아왔다. 1군사령부의 별 단 군인들도 왔고, 그를 회유하려던 5공 실세도 있고, 상지대의 김문기도, 교수협의회 교수들도 찾아왔다.
그런 그의 집에는 스승이 또 한 분 있었다. 하는 일 없이 바쁜 그를 오롯이 지켜준 부인 이인숙이었다. 서울대를 나온 재원이었지만 그와 살면서 밤낮없이 북적대는 손님들에게 따듯한 밥상을 내어놓았다. 뜰에는 꽃다지, 냉이, 제비꽃이 피고 지고, 배추와 푸성귀가 넘쳐났다. 뒷간에서 나온 거름을 먹고 잘도 자랐다. ‘찬은 없었지. 그저 된장찌개에 마당에 있는 질경이 뜯어 볶아내고, 울타리의 아네모네 이파리를 수도 없이 무쳐서 냈지.’ 선생이 옥살이를 할 때는 영치금을 마련하기 위해 평화시장에 납품하는 봉제공장에서 시다 노릇을 했던 아내였다.
그런 아내에게 선생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었다. 남향의 문간방은 여름이면 몹시 더웠다. 더위를 많이 타는 아내는 잠 못 드는 날이 많았다. 선생은 부채질로 아내의 더위를 쫓아 잠들게 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선생이 떠나고 집은 쇠락했다. 동생(화순)네와 함께 쓰던 마당이 중간에 길이 나는 바람에 더욱 옹색해졌다. 미수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아내는 집을 혼자 지키고 있다. 지팡이에 의지해야 할 만큼 다리도 불편하다. “힘들지 않으세요?” 빙그레 웃기만 한다. 또 묻는다. “나처럼 앞뒤 꼭 막힌 여자가 아니라 좀더 똑똑한 사람 만났으면 좀더 편하셨을 텐데….” 이번엔 딴소리다. “깊은 골 사람이 없다 하여 난은 그 향기를 그치지 않는다.”(幽蘭不以無人息其香) 이 화제와 난은 필경 선생이 부인을 그리며 쓰고 친 것 같았다.
곽병찬 대기자
곽병찬 대기자
선생은 1994년 예순일곱에 ‘제 몸 안으로 찾아온 손님’(위암)과 함께 세상을 떴다. 지인들은 병명을 사리암이라고 했다. 술을 못 하는 선생이 저희를 생각해 마신 술이 사리(암)가 되었다는 것이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721955.html#csidxbe25f755efd741da89ff3d092adb8a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