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4

함석헌 평전을 읽고

The Ch5 Studio


함석헌 평전을 읽고 작성일 2005-11-04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나에게 매우 큰 영향을 주었던 책이 4권 있다.

첫번째 책은 솔로몬의 저서로 알려진 서양 성경책에 수록된 "전도서".
나의 10대 시절에 지대한 영향을 준 기독교의 영향 탓이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그 첫 구절의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음악을 가까이 접하기 시작하면서 접하기 시작한
서양의 미학과 관련된 책들... 그 중에서 거의 필이 딱 꽂힌 책이
바로 톨스토이의 "예술이란 무엇인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톨스토이의 유명한 저작은 아니지만
당시에 이 책이 주었던 영향력은 대단했다.
한마디로 예술한답시고 개폼 똥폼 잡는 게 오히려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없고,
나아가 참된 예술은 단순하고 소박한 것 안에 있다는 얘기.
논리 정연한 듯 보이기는 하되 정작 내용이 공허한 여타 미학책들과는
그 접근 방식 자체가 다르고, 논리를 넘어선 어떤 아우라(aura)를 느끼게 된다.

그 다음으로는 "도덕경"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도덕경은 서양 철학책처럼 말 자체가 어려운 책은 전혀 아니다.
도덕경은 간결하다.
그렇기 때문에 도와 덕을 말하는 데 그토록 자연스러울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톨스토이란 분이 원래 도덕경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니
내가 도덕경을 전혀 몰랐던 상태에서도 톨스토이의 글을 읽고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 또한 이러 저러한 사정을 알게 되니 당연한 귀결인 셈이다.

그리고 이 책으로 인해 정신 활동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느껴
몸 수련으로서 무술을 시작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껸에 이어 태극권을 하게 된 이유 또한 도덕경의 영향을 배재할 수 없다.

도덕경을 몸으로 알고자 하는 것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말할 수준은 결코 아니지만 포기하지 않는 곳에
'길'이 있으리라 막연한 희망을 갖고 있을 뿐이다.

마지막 책은 "금강경"이다.
이 책의 내용은 내가 거의 이해할 수 없다.
단지 어떤 어렴풋한 이미지로 상상만 해 볼 뿐이다.
그러나 한가지... 강을 건넜거든 그 강을 건너기 위해 사용했던 뗏목을 버려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늘 염두에 두려고 노력하고 있다.

과연 내가 오랜 세월 갈고 닦은 그 무언가를 뗏목을 버리듯 과감하고
미련없이 새로운 길을 갈 수 있을지 나의 미래는 나도 모른다.

그런데, 김성수 지음의 "함석헌 평전"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가 깜짝 놀랐다.
그냥 기독교 교회의 목사님 같은 분인줄로만 알았는데
기독교로부터의 지대한 영향, 톨스토이의 사상, 유교 경전 및 도덕경 그리고 불경...
우연하게도 내가 영향을 받는 사상의 궤적과 거의 일치된 삶을 살다 가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기가 통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와 동시에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최소한 잘못된 길은 아닌가 보다는
안도감도 생긴다.

그의 평전으로 인해 기독교 중 퀘이커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고,
왜 한국의 교회가 그토록 지나친 친미 성향을 갖게 되었는지도 자연스럽게 정리가 된다.
여러가지 복잡한 시대적 상황이 얽혀 있으므로 짧은 글로는 모든 내용을 담을 수
없지만 어쨌든 일제 시대의 기독교는 전통적 유교 관습을 탈피할 수 있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였던 것 같고, 게다가 미국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관계로
일제의 간섭을 받지 않는 상당히 드문 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뛰어난 사상가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를 거쳐 한국의 여러 독재 정치를 거치는 동안
그가 보여준 행보 또한 깊이 머리를 숙이게 된다.
이런 인물을 여지껏 내가 이름만 간신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 미안할 지경이다.
함석헌이야말로 내가 생각해 왔던 바로 그런 기독교인인 것 같다.
기복신앙적 요소와 재정적 부패, 유일신 사상을 기본으로 한 원리주의에 의해
독단으로 치달아 버린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잣대로는 그를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함석현 평전에 두어번 반복해서 나온 듯 하여 기억에 남은 구절로
"평화는 할 수 없다고 안하고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어도 해야 하고 할 수 없어도 해야 하는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
개인의 입장에 따라 여러가지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한 말이 될 수 있을텐데
나는 이 말을 자신이 가려는 길의 최종 목표에 마음을 둘 것이 아니라
길을 가고 있는 그 순간 순간에 집중하고 늘 깨어 있는 정신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것이 정신을 자주 잃고 본질이 아닌 곳에 정신을 쉽게 빼앗기곤 하는
나에게 당장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