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4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48] 난초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48>

난초

김지하 시인 | 2003-03-20

나는 난초를 '그리지' 않는다. '친다.' '침'은 '그림'과 달리 몸으로 보자면 일종의 '기운갈이'다. 땅인 왼손은 방바닥을 짚고 하늘인 오른손은 허공에 자유롭게 놔두어 사람인 몸과 마음의 중심 기운이 종이의 공간 위에 '신중'하고 '진득'하면서도 '가볍고' '날렵하게' 순간순간 뻗어나가게 하는 것이 바로 치는 것이다. 
그래서 '난치기'가 일종의 기수련(氣修鍊)이 되는 것이니 '사군자'라 이름하고 '먹참선'이라 높여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십여 년 전 그 무렵 이 '먹참선'을 내게 권한 분이 바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니 선생 자신이 난초치기를 하나의 수련으로 생각하시는 서예가였던 것이다.


"내가 말이야. 5·16 뒤에 3년간 옥중에 있다 나왔더니 말일세. 이상해! 좌불안석이야. 어디서 부르는 데도 없는데 갈 곳이 많단 말이지.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이 사람 만나 떠들고 저 사람 만나 떠들고 난리지. 난리야! 그러니 실수는 따놓은 당상이지 뭘! 그래 가만히 생각해보는데 그때 내 스승이신 차강(此江) 선생의 가르침이 기억난 거야. 그럴 땐 난초를 치라는거지. 그리지 말고 쳐라! 난초를 치면 여러 시간을, 때론 하루 이틀을 꼬박 궁둥이를 방바닥에 붙이게 돼! 그리고 '기운갈이'를 해서 마음이 텅 빈 가운데 난초만 계속 집중하게 된단 말이야! 그러니 어딜 가도 오래 있질 않게 되고 집에서 은둔하는 날이 많게 되지. 말도 적어지고 말이야. 난초가 잘 되면 친구나 후배들한테 나눠주고 잘 안 되면 될 때까지 치고……. 알아들었나? 그걸세!"

물론 나는 대학에서 사군자를 배웠다. 그러나 '먹참선'으로서의 난초치기를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선생님은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자네는 쉬운 일은 재미없어 못해. 그러니 사군자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난초부터 하는데, 난초 중에도 제일 어려운게 표연란(飄然蘭)이야. 바람에 흩날리는 난초지. 청(淸)나라 때 난초명인이 정판교(鄭板橋)란 이인데 그이가 왈, '표연일엽 최난묘(飄然一葉 最難描)'라 했어. '바람에 흩날리는 한 잎이 제일 묘사하기 어렵다'란 말인데 이때 한 잎(一葉)은 장엽(長葉), 가장 긴 이파리를 뜻하지.

난초는 이 긴 이파리부터 치는 거야. 이것이 바람에 흔들리게 하려면 '삼절(三折)'을 써야 돼. 삼전(三轉)이라고도 하지. '세 번 휘어진다'는 뜻인데 가느다랗다가 굵었다가 다시 가느다랗게 세 번 변하는 걸 말해! 바람에 흩날리는 느낌을 주지. 이게 좀 어려운데 이걸 해야 자네가 흥미가 붙을 걸세! 어려운 것부터 해서 쉬운 쪽으로 가란 말이야!"


표연란!

나의 표연란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표연란의 핵심은 운동과 위상을 동시에 측정 못한다는 불확정성원리에 거꾸로 가닿아 있다. 불확정성은 상상이나 직관에 의해 넘어설 수밖에 없으니 바람과 난초를 동시에 포착하는 것이 바로 예술로서의 표연란이며 표연란을 '바람의 항구'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부르는 곳 없는데 갈곳이 많다?

이 사람과 떠들고 저 사람과 떠들고?

실수는 따놓은 당상이라?

실수가 뭘까?

제1군사령부의 대령들이 경고해온 '다시 행동'이나 '다시 모의' 같은 게 아닐까? 더욱이 부르는 곳이 없는 게 아니라 부르는 곳, 즉 반정부조직의 수괴로 취임하라든가 대학에서 데모 직전에 선동연설을 하라든가 이렇게 부르는 곳이 많고 또 많았으니 거기에 일일이 응하다가는 뼈도 못 추리게 생긴 것이 그 무렵의 나의 상황이었다. 문제는 내 스스로 거길 가야 한다는 공연한 책임감에 붙들려 있음이었으니.

아아! 절집이나 산으로 가는 길도 막혀버린 속에서 난초 이외엔 내 마음을 잡을 길이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선생님이 주시는 종이와 붓과 먹과 벼루들 앞에 곧게 앉아 곧바로 '먹참선'을 시작하였다.

몽둥이 아니면 긴 작대기든가 뱀이었다. 그것은 난초가 아니었다.

잘 돼서가 아니라 잘 안 되어서, 그러나 그렇게 몇 시간이고 안 되다가 문득 난초 비슷한 선(線)이 나타나기도 해서 안달이 나 내내 포기를 못하고 더욱더 달라붙게 되는 그 이상한 집착의 날들이 시작되었다.

따로 떨어진 별채의 내 방에는 그뒤로 불켜진 밤이 많아졌다. 밤새 난초를 치다가 새벽 푸르름이 창호지에 묻어올 때 눈앞에 펼쳐진 텅빈 종이의 허공 앞에서 말라르메의 흰 원고지보다 더 지독한 외로움과 괴로움, 그러나 기이하고 기이한 웬 향기가 얼풋 코끝을 스치는 그런 밤샘의 나날들이 시작되었다.

때론 희한하게도 멋들어진 잎사귀나 꽃들이 불현듯 나타났으니 그럴 땐 벌떡 일어나 미친 사람처럼 덩실덩실 혼자서 춤을 추기도 여러 번이었다.

선생님이 가끔 오셔서 중요한 대목대목을 지도해주셨으니 시간이 흐르면서 내 난초는 어떤 꼴을 틀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괜찮다는 인가를 받은 뒤부터 벗이나 후배들에게 선물로 주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소문이 나서 민주화운동에 필요한 자금이나 사무실 비용을 염출하는 데에 내 난초를 팔아대는 것이 한 유행이 되었다. 그래 한꺼번에 열 장, 스무 장씩 쳐야 했다.

치는 것 자체가 피곤하기도 했지만 신경쓰이는 것은 그렇게 몇십장씩 가지고 가서 판 대가로 돈을 마련한 뒤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그 친구들이 내뱉는 비아냥이 즉시즉시 내 귀에 들어오는 일이었다. 그 무렵 원주는 이미 민주화운동의 전전선에 걸친 사통팔달의 허브 지역, 혹은 메카가 돼 있었던 것이다.

"제가 언제부터 선비가 됐다고 난초야, 난초가……?"

"우리가 도움받는 건 사실이지만 그 친구 이젠 완전히 반동이 됐어. 지가 무슨 양반이라고 난초야 난초가……?"


몹시 화가 나서 술을 퍼마시는 내게 선생님은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다.

"좋은 일 하는 것을 남이 알아주는 순간, 그 좋은 일은 이미 대가를 받는 것일세. 욕을 좀 먹게! 그러면 자네가 한 일이 하늘에서 표창받게 되네."

그 무렵 나의 견인력은 아마도 선생님 덕이 제일 클 것같 다. 인내, 또 인내! 나의 견인을 표현한 '코믹 달마(達磨)'도 많았으나 사람들은 못 알아보았다. 나는 난초 이외에 내 스타일로 변형된 달마, '코믹 달마'도 치게 되었으니 난초보다 도리어 그것이 더욱 인기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 난초와 달마가 안 간 데가 없었다. 국내의 도시, 도시들은 물론, 일본, 미국, 유럽에까지 안 간 곳이 거의 없었으니 치기도 어지간히 많이 쳤던 것같다.

언젠가 창작과비평사 사무실에서 고인이 되신 민병산(閔丙山) 선생을 뵈었을 때 그이는 거의 잡초나 다름없는 나의 초기 난초를 올려다보며 왈,

"아주 많이 많이 남들에게 주어도 시간이 흐르면 조금밖에 안 남는 게 그림이야. 많이 그려서 많이 주게나! 그러면 늘어! 어쩔 수 없어서 자꾸 그려주다 보면 저도 모르게 기량이 는단 말일세. 알겠는가?"

김지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