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02

Namgok Lee - 다음 글은 1992년 불교사회연구소 <서원과 연대 창간호>에 “새로운 세계를 향한 우리의...

(4) Namgok Lee - 다음 글은 1992년 불교사회연구소 <서원과 연대 창간호>에 “새로운 세계를 향한 우리의...



다음 글은 1992년 불교사회연구소 <서원과 연대 창간호>에 “새로운 세계를 향한 우리의 인식과 실천 방향"이라는 주제로 실은 글의 일부입니다.
많이 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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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새로운 문명의 길
(인류는 새로운 문명으로 전환을 통해서만 자유의 확대와 진정한 행복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과 그 후 계속된 과학기술혁신은 생산력의 비약적 향상을 가져 왔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무한히 전개될 인간의 능력과 그 결과로 나타날 높은 생산력이야말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확대하는 확실한 전제가 될 것이라는 신념을 보편화하면서 산업문명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근대 산업문명의 탄생과 확산은 인간의 삶과 세계의 운동 방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일대 비약을 의미하였으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의 지배적 질서로 되고 있습니다. 이 문명의 토대 위에서 세계자본주의의 자기 전개 과정에 따라 민족 문제와 계급문제 기타의 사회문제들이 야기 되었으며, 또한 이 문명의 기본틀 안에서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엄청난 희생과 노력이 자유와 평등의 제단 앞에 바쳐졌습니다.(세계대전을 비롯한 무수한 전쟁과 혁명 등)
이 시대에 있어서 사회진보의 중심고리는 사회구조의 변혁이었으며, 그 핵심은 높은 생산력을 보장하는 생산관계, 그러한 생산관계를 뒷밭침하는 체제(제도)를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오늘의 지배적인 경향도 크게 보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근대 이후 지금까지 세계를 지배하고 이끌어온 산업문명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그것이 점점 더 심각해 짐에 따라(실제적 삶의 영역에서) 근대 이래의 문명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새로운 문명을 지향하는 그런 요구와 노력들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지향이 앞으로 나타날 새로운 질서의 맹아인지에 대해(그것이 앞으로 질적으로 새로운 문명으로 발전할 것인지에 대해) 확언하기는 아직 어렵다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이러한 지향이 현대 세계의 제 조건이 근본적으로 제기하는 문제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대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근대 이래 진보(자유의 확대)의 근본 조건으로 생각되어 온 인간 능력의 무한한 전개와 생산력의 무한한 확대라는 바로 그 점으로부터 발생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속도로 발전해 온 인간의 행위능력과 그다지 변치 않는 인간의 가치이념체계 사이의 괴리는 무한한 생산력(대중의 무한 소비추구와 이윤동기와 서로 연관되어 끝없이 순환한다)의 추구가 이제 인류를 포함한 전체 생태계를 파멸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반(反)생산력으로 될 가능성을 크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괴리는 더 많이 소유(소비)할수록 더욱 심화되는 인간소외(물신에 의한 지배)라는 근본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현대의 이러한 근본문제들은 인간이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는 능력에 비해 자기 자신을 개조하는 능력이 지나치게 못미친다는 사실로부터 나타납니다. 만일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의 노력을 방기한 채 지금까지의 문명을 지속시켜 나간다면, 인류는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스스로를 멸망시키는 최초의 존재가 될지 모릅니다.(가장 큰 반론은 인간의 능력 즉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해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토인비가 확신을 가지고 예견한대로 예견되는 멸망을 피하기 위해 일부 부유한 국가에 의한 대다수 가난한 나라와 민족들에 대한 세계 독재체제의 수립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벌써 그러한 징후들은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진정으로 세계의 진보와 평화, 자유와 평등을 원하는 개인·집단·국가라면 이러한 최악의 함정을 피하기 위하여 새로운 문명으로 전환을 위해 진지하게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아직 공존하며 중층구조를 이루고 있지만, 점점 더 우리가 당면해야할 문제가 근대적 과제(기존 산업문명의 토대 위에서의 사회구조의 개혁)로부터 현대적 과제(새로운 문명으로 전환)로 이행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절이 아니고 연속성을 가지고 추구될 것입니다. 역사는 때로는 비약의 시기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과거의 축적된 유산 위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사회정의(자유·평등)를 추구하는 정치·경제·대중운동들은 변함 없이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운동이 지향하는 목표·운동방식·운동의 주체는 현대적 제 조건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 진보성은 면면히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문명이 담아야할 내용은 과거의 <좋은 생산관계-높은 생산력-고도 대중소비>라는 연관으로부터 <좋은 욕구-좋은 생산관계-좋은 생산력-좋은 소비-좋은 방법>의 연관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좋은>이라는 표현이 좀 애매하지만, 그것은 그 안에 내용을 부여함으로써 옳게 이해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는 대체적인 윤곽을 가설로 제시할 수 있을 뿐이며, 보다 전문화된 이론과 실천적 검증을 통해 구체성과 현실성을 획득해 갈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1) 좋은 욕구
좋은 욕구를 첫 번째로 드는 이유는 사회구조·가치이념체계·생활양식의 연관 가운데 새로운 문명을 위한 중심고리가 새로운 가치이념체계와 그에 부응하는 생활양식의 전환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구조의 변혁이 사람의 동기와 욕구의 질을 변화시키는데는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역사의 경험과 현대의 근본적 문제들이 인간의 행위능력과 가치이념체계의 괴리에서 비롯된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새로운 가치이념체계는 결국 인간의 행동을 유발하고 통제하는 원동력인 동기와 욕구를 변화시킬 때만 그 생명력을 갖습니다. 만일 머리 속에서 새로운 가치이념체계를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의 행동(실천)을 변화시키는 동기와 욕구를 변화시켜 구체적 삶의 양식을 바꾸지 못하면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삶의 동기는 욕구가 무엇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욕구가 없는 인간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욕구의 질입니다. 일찍이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욕심은 없앨 것이 아니라 도리어 키울 것이니, 작은 욕심을 큰 서원으로 돌려 키워서 마음이 거기에 전일하면 작은 욕심들은 자연 잠 잘 것이요, 그러면 저절로 한가롭고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리라”
이 말은 인간을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욕구를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라(결코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욕구를 보다 높은 차원의 질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보다 높은 차원의 큰 욕구를 우리는 <좋은 욕구>라고 부르겠습니다.
인간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굶주림·목마름·성적욕구 등이 충족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이며 본능적인 욕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말한 인간의 특이성에 비추어 볼 때 진정한 인간적 욕구의 충족을 위한 필요조건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의 산업문명을 비판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관점의 하나가 온갖 치장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근본적으로 인간의 능력과 앞으로 열려 있는 방향에 조화되는 인간적 욕구를 확대시키는 것보다는 동물적 욕구를 확대시키는 쪽으로 더 많이 작용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퇴영적인 욕구는 그의 높은 행위능력과 결합할 때 동물보다 못한 행위를 낳게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퇴영적 욕구는 소유욕과 이기주의와 결합하면서 물신의 지배를 확립해 가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대상의 유한성 때문에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라 경쟁하며 독점하려 하고 필연적으로 불의한 사회구조와 맞물려 악순환을 계속합니다. 이러한 악순환은 단절되어야 합니다. 더욱이 가공할 과학 기술능력은 이러한 악순환이 자타공멸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험한 상황을 만들고 있습니다, 욕구의 질이 변화되지 않는한 사회구조의 개혁만으로는 근본적인 치유책이 되지 못합니다. 이제 직접적으로 인간의 퇴영적 욕구를 <좋은 욕구>로 전환하기 위한 조건과 동력·방도를 찾아서 집중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인류는 그가 깨고 나온 자연과의 원시적 조화로부터 자연과의 새로운 조화를 향한 기나긴 여정을 가고 있습니다. 그는 되돌아갈 수 없으며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좋은 욕구란 바로 이 앞으로 나가는 방향과 그의 탁월한 능력에 조화되는 욕구를 말합니다.
퇴영적 욕구가 소유욕과 이기주의와 결합되어 있다면, 좋은 욕구는 존재의 확대를 추구하며 상생과 조화를 그 내용으로 갖게 됩니다. 존재의 확대란 예컨대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추구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율적이고 자각적인 인간이 되려는 노력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려는 노력이야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의 확대를 의미합니다. 그 과정에서 누구와 경쟁한다거나 그 기회를 독점하려 한다면 그것은 부처가 되는 길과는 반대의 길로 들어섰음을 의미합니다. 좋은 욕구는 경쟁적이거나 독점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나누고 베풀 때 더 큰 만족을 얻기 때문에 상생과 조화를 그 속성으로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의 전환이 특수한 소수에게만 가능하다면 앞서의 견해와 주장들은 현실성을 획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의 현대인들이(특수한 자질을 가진 소수가 아니다. 그러한 소수는 어느 시대에나 늘 있어 왔다) 그들의 구체적 삶 속에서 이러한 전환을 요구하고 받아들일 조건들이 점차 성숙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것은
첫째,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의 문명과 생활양식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을 생활을 통해 점점 심하게 느끼게 됩니다. 퇴영적 욕구, 끝없는 소유욕, 지배욕, 이기주의가 결코 그들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정신병과 스트레스의 증가, 생명경시풍조의 만연, 동양 사상과 종교에 대한 관심의 증가, 여러 가지 수행방법에 참여 확대 등이 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둘째 그는 이런 문명이 계속되면 어쩌면 모두가 살아남기 힘들것이라는 위기의식을 점점 더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현대과학이 제공하는 지식과 정보 그것을 전달하는 대중 매체의 발달은 그들이 피부로 느끼는 심각한 공해·환경문제 등과 함께 이러한 위기의식을 급속하고 광범하게 심화시켜 나갈 것입니다. 아직 자신의 욕구와 생활양식을 바꾸는데는 이르지 못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도 공해문제가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욕구의 질을 전환하여 생활양식을 바꾸는 일에 곧 바로 착수하여야 합니다. 사회구조의 개혁을 통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집단들이 먼저 이런 노력을 내면화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역사의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를 위하여 기여할 수 있는 진보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좋은 생산관계
좋은 욕구로의 전환은 좋은 생산관계로의 사회구조적 개혁을 위한 노력과 결합되지 않을 때 대중의 생활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공허한 구호로 그치거나 때로는 불의한 사회구조를 존치시키는데 일조할 수 있습니다. 의식문화의 개혁 운동은 반드시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구조개혁의 노력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기존의 생산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전통적인 정치·경제·대중운동 등과 함께 새로운 생산관계를 직접 창출하는 노력을 함께 수행하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근대 이래 좋은 생산관계란 다음의 두가지를 의미하였습니다.
첫째는 높은 생산력을 보장할 것, 둘째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수탈을 폐지할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상응하는 요소로 파악되었으며, 이 두가지 조건의 결합 위에 과학적 이론과 사회적 실천이 진행되었으나 그 중에서도 보다 규정적인 것은 높은 생산력의 보장이라는 조건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계자본주의와 그에 대응하는 사회주의 진영이 대립하여 갈등·경쟁·상호영향을 주고 받으며 이제 자신을 대폭 수정한 현대자본주의에 현존 사회주의권이 무릎을 꿇음으로써 20세기를 거의 지배해온 세계질서를 둘러싼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대립구도는 거의 그 의미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제 지배적인 세계경제질서가 당면한 문제들은 ① 아직도 의식주의 기본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많은 나라들과 많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존조건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와 ② 불균등이 지배하는 국제경제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국가 또는 블록 간의 갈등을 어떻게 해소시켜 갈 것인가하는 근대 이래의 전통적인 문제와 함께 ③ 무한 생산과 무한 소비를 추구하는 현대산업문명이 제기하고 있는 근본적인 인간소외와 자연생태계의 파괴 등에 체제가 무엇이든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하는 문제들입니다. 이러한 변화된 세계사적 조건과 현대적 과제의 제기는 좋은 생산관계를 높은 생산력을 보장하는 것으로부터 다음의 두가지를 더 충족시켜야 하는 것으로 파악하게 합니다.
첫째, 현대의 과학기술수준과 생산력은 자연을 무한한 자원으로 간주하던 근대적 성장위주의 관점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한한 자원과 무한 생산 추구 간에 발생하는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생산, 즉 자연의 생명력을 파괴하지 않는 생산을 보장하는 것으로 되어야 합니다.
둘째, 인간에 의한 인간의 수탈을 폐지하려는 사회구조의 개혁을 위한 노력과 함께, 사람 사이의 관계가 박애와 연대가 실현되는 공동체적 삶의 양식과 가치이념체계로의 전환이 그 안에서 발전하는 그런 생산관계이어야 합니다.
요컨대 오늘의 관점에서 좋은 생산관계는 높은 효율성과 함께 반드시 좋은 생산과 좋은 삶의 양식을 보장하는 것으로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대민족주의의 기치 밑에서 남과 북이 민족적 생명력을 이러한 방향으로 최대한 발휘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아마도 상당한 기간 남과 북에서 각각의 경제체제를 개혁하는 운동이 주류를 이루겠지만, 우리는 이런 전통적 방식과 함께 남북의 상이한 경제질서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매개할 수 있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직접 시도하고 확산하는 방식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는 협동생산을 제의해 보고자 합니다. 협동생산의 성공적인 사례는 외국의 경우에는 많지만(스페인, 이탈리아, 일본 등)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 역사의 냉혹한 조건들 때문에 어쩌면 우리 민족의 정서나 전통과 조화될지 모르는 협동생산이 거의 발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진취적인 사람들이 협동생산과 같은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에 진지한 관심과 노력을 집중할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외국의 예보다 더욱 발전된 형태의 좋은 생산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이렇다할 구체적 경험이 없으므로, 추상적 원칙이나 당위론에 그칠 우려가 있겠지만 적극적인 실천의지를 갖는 사람들에게 판단과 계획의 근거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몇 가지의 원칙들을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① 협동소유의 원칙입니다.
② 철저한 자발성과 민주주의 원칙입니다.
③ 협동체의 중심 가치가 협동과 자리이타(自利利他)이어야 합니다.
④ 무엇을 어떻게 누구를 위해 생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데 있어 철저히 <인간을 위하고 자연과 조화하는> 원칙이 관철되어야 합니다.
⑤ 기술혁신과 합리적 경영 등을 통해 전체 시장경제 안에서 다른 경제 단위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능력(효율성)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⑥ 소비자협동조합, 생활협동조합 등과 서로 긴밀한 보완관계를 형성하여 서로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요컨대 협동생산이 그 협동적 원칙과 효율성이라는 두 개의 기둥을 함께 세울 수 있을 때만 그것은 새로운 모델로서 현실성을 획득하고, 나라의 전체 경제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3) 좋은 생산력(좋은 소비)
앞에서 여러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현대의 과학기술수준, 생산력 수준, 행위능력과 가치이념체계의 괴리는 근대 이래 진보의 표지로 당연시해 온 무한생산과 무한소비에 대한 신념을 그 뿌리부터 흔들고 있습니다. 인간 상호 간의 관계(사회생활)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높은 생산력>의 추구가 선(善)으로 간주되는 사고는 이제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의 사실들에서 분명해집니다.
① 자연에 대한 약탈적인 그 동안의 성장지상주의적인 생산력추구는 이미 오존층의 파괴, 지구온난화현상, 산성비, 사막화현상 등 지구적 차원에서 심각한 생태환경위기를 낳고 있습니다.
② 생활의 풍요와 편의를 위한 각종 재화의 대량생산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는 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는 환경오염과 공해는 이제 우리 생존에 근원적인 숨쉴 공기, 마실 물, 일용할 음식에 대해서도 안심할 수 없게 하고 있습니다.
③ 이윤동기에 지배되는 시장경제원리는 무한소비와 무한생산의 상호 상승작용을 낳고(무한 소비를 부추기고 그러한 소비수요가 이윤의 원천으로 되는) 이러한 소비 문화는 인간의 퇴영적 욕구와 소유와 소비를 향한 경쟁을 증대시킴으로써 생활을 위한 소비가 아니라 소비를 위한 생활로 근본적인 인간 소외의 원인으로 되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높은 생산력에 의한 무한생산과 무한소비의 추구는 인간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나 자연과의 관계에 있어서나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담보하는 것으로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높은 생산력 대신에 <좋은 생산력>을 새로운 시대의 조건으로 파악합니다. 좋은 생산력은 <인간의 질적 향상을 추구하고, 자연과의 새로운 조화를 추구하는> 방향에 서 있는 생산력을 의미합니다.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이념체계와 생활양식을 고려할 때 이러한 전환은 지극히 어려운 과제임에는 분명하지만,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① 과학과 기술은 더욱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과학과 기술 그 자체는 몰가치적이지만 과학자와 기술자는 가치중립적일 수 없습니다. 선(善)한 과학과 깨끗한 기술을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의 생명력을 손상시키지 않는 생산을 추구해야 합니다. 최고의 첨단 과학기술과 생산력이 자연과의 새로운 조화를 달성하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② 대중의 소비문화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소비자대중(국민)은 그들의 욕구와 생활양식이 전환되지 않으면 자유와 행복의 확대는 고사하고 생존 자체가 위협 받는 사실을 직시하고 큰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생산과 소비문화의 대전환은 여러 분야의 종합적인 노력의 연관 위에서만 가능하겠지만, 최상의 지식(현대첨단과학)과 최선의 의지(고등종교)의 상호보완과 여러 형태의 시민운동이 그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4) 좋은 방법
앞에서 언급한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확보하기 위한 대민족주의와 인류의 생존과 번영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문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를 추진할 새로운 통합력이 요구됩니다. 새로운 조건에서 새로운 목표를 추구하는 새로운 통합력은 새로운 방법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새로운 통합력을 형성하는 과정에는 우선 다음과 같은 원칙들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사고와 태도를 단호하게 거부하여야 합니다. 목적과 수단은 둘 다 정당해야 합니다. 이것은 역사를 통해 우리가 경험해온 귀중한 교훈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들은 그 수단의 정당성을 그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심각한 부정의와 대중의 낮은 의식수준, 공공연한 폭력적 지배 등은 특히 급진적인 정의파로 하여금 정당한 목적이라면 어떠한 수단도 정당화될 것이라는 유혹에 빠지기 쉽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비록 일시적으로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앞으로는 일시적 성공도 불가능할 것) 길게 보면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그 수단이 목적을 변질시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용과 절차에서의 민주주의, 목적과 수단에서의 평화주의가 우리가 견지해야할 대원칙이라고 봅니다.
둘째,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실질적 부자유와 실질적 불평등에 반대하고 개혁하기 위한 전통적인 노력과 직접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그것을 확대해가는 창조적 노력이 상호보완하고 서로 영향을 주는 방법이 시도되어야 합니다. 예컨대 정치운동에서는 전통적인 방식의 정권획득을 위한 노력과 소단위에서의 직접민주주의에 의한 권력의 무화(無化)를 위한 노력이 병행되어야 하며, 노동운동에서는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전통적인 노력과 함께 협동생산 등의 새로운 생산관계를 추구하는 창조적인 노력이 병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조건에서 볼 때 새로운 통합력은 다원주의에 바탕을 두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중층구조의 운동형식의 연관 속에서 형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예견되는 구도는 정치 중심의 통합력이 아니라, 가장 저변에 의식문화의 개혁을 추구하는 국민운동(민족운동)이 전개되고, 그 토대 위에 여러 형태의 광범한 대중운동이 서고, 이러한 대중운동의 발전 위에 정치운동이 배치되는 그러한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런 배치는 기계적일 수 없으며 상황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컨대 국민운동이 직접적으로 정치운동을 규정하거나, 예상하기는 힘들지만 그 반대의 작용을 할 수도 있을 것이며, 시민운동과 같은 직접적인 이익이 아니라 간접적이고 잠재적인 이익에 바탕을 둔 대중운동은 바로 국민운동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새로운 통합력의 구심은 서로 충돌되는 집단 이익에 바탕을 둔 운동에서가 아니라 작은 이익을 포용하여 큰 이익을 추구하는 운동, 더 나아가서는 이익을 초월하려는 의지와 태도(새로운 문명)를 확산시키는 운동을 통해 형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의 원칙에서 여러 분야의 운동들이 새로운 문명을 지향하는 좋은 방법들을 개척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운동을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개인이나 집단들에 의해 구체화할 수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