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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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장자 | 현암사 동양고전
장자 (지은이),오강남 (엮은이),오강남 (옮긴이)현암사2015-09-04 원제 : 莊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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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es Point : 530

9.0
100자평(36)리뷰(25)

종이책 페이지수 4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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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리뷰
<장자>의 묘미는, 풍성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 안에 깊이있는 철학이 자리하는 데 있다. <장자>는 이론서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상징과 비유가 풍부한 재미있는 이야기다. 다만, 거기 깊숙하게 들어찬 철학이 워낙 거대하기 때문에 그 이야기들이 진중하게 보일 뿐이다. 장자는 그만큼 뛰어난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도교철학의 두 태두인 장자와 노자는 평범하게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일상화되어 있지만 실제로 일반대중은 보통 `어렵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건 읽는이의 눈에 맞춰진 번역해설서가 마땅치 않았다는 말과도 통한다. 이런 번역이 까다로운 건, 단순히 쉽게 쉽게 풀어놓는 것이 아니라 원전의 의미를 해꼬지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를 달고 있기 때문이다. 오강남 교수는 이 일을 적절하게 해냈다.

고전은 시대에 맞춰 새롭게 번역된다. 고전을 고전 그 자체로 해석해내는 일도 중요하지만 시대에 조응하는 해석이 끊임없이 뒤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시대의 흐름은 학자들이 아닌 대중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면 새롭게 해석해내는 고전은 대중을 무시할 수 없다.

오강남 교수는 철학쪽에 의미를 두어 자칫 너무 진지하거나 딱딱하지 않도록 풀어 해석했다. 이 이야기들만 본다면 철학 우화의 단편들을 읽는 것 같다. 그러나 지나치게 풀어헤쳐 그 본뜻을 잃지 않는 번역은 책을 가치있게 만든다. 이로써 <장자>는 우리의 삶에 한 걸음 더 접근한다. - 임지호(1999-04-02)


책소개
동양적 지혜와 여유로움의 세계를 담은 <장자> 번역 및 해설서. 인문학 분야의 베스트셀러였던 <도덕경> 번역해설서를 낸 저자가 유려한 한글번역에 현대적 해석을 가미했다. <장자> 내편을 완역하고, 장자의 후학 및 추종자들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외편, 잡편의 중요 텍스트를 번역했다. 장자의 현재적 의미를 전하는 현대적 감각이 돋보인다.


목차


독자들에게 = 7
『장자』를 읽기 전에 = 17
제1편 자유롭게 노닐다(逍遙遊)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고 = 26
매미와 새끼 비둘기 = 31
다른 이야기 하나 = 35
자유의 네 단계 = 38
요(堯) 임금이 나라를 허유(許由)에게 = 42
막고야산의 신인(神人) = 45
송나라 모자 장수와 요 임금 = 49
큰 박과 손 트는 데 쓰는 약 = 51
쓸모 없는 나무? = 53
제2편 사물을 고르게 하다(齊物論)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 61
하늘의 퉁소 소리 = 65
지적(知的) 활동과 감정의 작용 = 69
참주인(愼宰) = 73
'굳은 마음(成心)' = 76
말을 한다는 것은 = 78
'이것'과 '저것' = 81
손가락과 말(馬) = 85
조삼모사(朝三暮四) = 91
세 가지 지극한 경지 = 94
'있음'과 '없음' = 98
털끝과 태산 = 101
도(道)에는 경계도 이름도 없다 = 105
요 임금과 세 나라 = 109
앎과 모름 = 111
사람과 미꾸라지 = 113
이해 득실에 무관 = 116
성인(聖人)의 경지 = 118
여희(麗姬)의 후회 = 121
꿈에 술을 마시며 = 126
논쟁이 되지 않음은 = 129
엷은 그림자와 본그림자 = 132
나비의 꿈 = 134
제3편 생명을 북돋는 데 중요한 일들(養生主)
삶에는 끝이 = 141
포정의 소 각뜨기(포丁解牛) = 146
외발 우사(右師) = 155
못가의 꿩 = 158
노자의 죽음 = 160
장작과 불 = 163
제4편 사람 사는 세상(人間世)
독재에 항거하기 = 168
섣불리 덤빌 수 없다 = 170
정치적 중비 태세 = 176
참된 준비-마음 굶김(心齋) = 179
심재(心齋)할 때 = 183
자고(子高)의 고민 = 189
공자의 조언 = 192
거백옥(거伯玉)의 충고 = 198
세 가지 비유 = 202
장석(匠石)과 사당(祠堂) 나무 = 205
거목(巨木)과 신인(神人) = 210
나무들의 재난과 점박이 소의 행복 = 212
곱추의 특권 = 214
미친 사람 접여(接輿)의 노래 = 217
제5편 덕이 가득함의 효시(德充符)
왕태(王태)와 공자 = 225
신도가(申徒嘉)와 정자산(鄭子産) = 231
무지(無趾)와 공자와 노자 = 236
추남 애태타(哀태타) = 241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 = 252
무정(無情)과 유정(有情) = 256
제6편 큰 스승(大宗師)
진정한 앎 = 262
진인(眞人) = 264
성인은 = 267
옛날의 진인은 = 269
죽고 사는 것 = 272
물고기는 물에, 사람은 도에 = 274
배는 골짜기에 감추고 = 276
큰 스승 = 278
도(道)란? = 280
도를 터득한 사람들 = 282
여우(女偶)가 가르치는 득도(得道)의 단계 = 284
사생존망이 일체임을 터득한 네 벗 = 292
세상 밖에서 노니는 세 벗 = 301
맹손재(孟孫才) = 307
"아! 내 스승" = 310
앉아서 잊다(坐忘) = 313
운명(運命)일 따름이겠지 = 317
제7편 황제와 임금의 자격(應帝王)
순(舜) 임금과 태씨(泰氏) = 322
무당 계함(季咸)과 열자(列子)와 그의 스승 호자(壺子) = 333
거울 같은 마음 = 344
혼돈에 일곱 구멍(混沌七竅) = 347
부록 외편·잡편에서 중요한 구절들
오리다리, 학의 다리 = 354
하백(河伯)과 북해약(北海若) = 357
우물 안의 개구리 = 359
진흙 속에 꼬리를 = 364
원추와 올빼미 = 366
물고기의 즐거움 = 368
장자 아내의 죽음 = 371
바다새의 행·불행 = 373
술취한 사람이 수레에서 = 375
내가 활 = 377
싸움 닭 기르기 = 379
귀신같은 솜씨를 지닌 목수 = 381
신과 허리띠 = 383
쓸모 없음과 쓸모 있음 = 386
빈 배 = 388
미녀와 추녀 = 390
참된 화공 = 392
의연한 손숙오(孫叔敖) = 394
송아지같이 = 396
도(道)는 어디에나 = 398
누구 발을 밟았느냐 = 401
다스리는 일은 말을 기르듯이 = 403
재주를 자랑하면 = 404
달팽이의 양쪽 뿔 = 406
약간의 물만으로도 = 409
쓸모 있는 땅, 쓸모 없는 땅 = 411
치질을 고쳐 주고 = 413
장자의 죽음 = 415
후기 = 417
참고 문헌 =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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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세이

구만리 장천을 나는 붕새의 뜻은...

고대 그리스 문화를 수놓은 고전 철학의 시대에 중국에서는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출현하여 왕성한 지적 활동을 벌였다. 그리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하던 바로 그 무렵 중국에서는 장자(莊子, 기원전 365?-290?)가 자신의 사상을 펼쳤다.

묘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당시 일세를 풍미하던 플라톤의 철학에 대립했듯이, 장자도 당시 대세를 장악하던 유가 사상을 비판했다.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그만큼 당시 동서 문명의 수준이 엇비슷했다는 것으로 봐야겠다.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인류 사상의 기본 골격이 형성된 시기는 같은 무
렵이었던 것이다.

장자는 유가와 더불어 오늘날까지 동양 사상의 양대 축을 이루고 있는 도가 사상의 대표 주자격인 사상가이다. 도가 사상은 노자가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노자는 실존 인물인지조차 불분명할뿐더러 자신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남기지 않았으므로 보통은 장자를 도가의 고전으로 꼽는다.

도가의 태두답게 장자의 인적 사항에 관해서는 본명이 주(周)라는 것과 송나라(전국 시대의 나라) 출신으로 말단 관리를 지냈다는 사실 외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당시 중국의 사상가들이 그랬듯이 장자 역시 직접 책을 짓기보다는 제자와 후학들이 그의 사상을 문헌으로 남기는 일을 맡았는데, 그 책이 바로 <장자>이다. 모두 33편으로 이루어진 <장자>는 내편(7편), 외편(15편), 잡편(11편)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내편은 장자가 직접 썼고 나머지는 후학들이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내편이 되며, 그 가운데서도 맨 앞의 두 편인 소요유(逍遙游)와 제물론(齊物論)이 가장 중요하다.

장자의 시대, 전국 시대 말기는 극도의 혼란기였다. 이른바 '전국 7웅'을 비롯하여 중국 각지에 포진한 제후국들은 저마다 생존과 성장을 위해 무자비한 약육강식의 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난세에 어울리는 사상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시대에 부합하는 부류이다. 이를테면 처음부터 국가 통치 이념이 될 것을 겨냥한 유가나, 현실적인 권력 운용에 관심을 가지는 법가 같은 사상들이다. 다른 하나는 어지러운 현실에서 벗어나 참된 도리를 찾으려 하는 도가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유가와 법가가 주로 지배 집단에게 호소한 데 비해 도가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그러나 철저히 현실 도피적인 노자의 사상에 비해 장자의 사상은 훨씬 너그럽고 부드럽다. <장자>의 첫 구절은 날개 하나가 '하늘 한 모퉁이를 덮은 구름'만한 크기에 달하는 붕새가 구만리 하늘을 날아오른다는 '엄청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렇게 도입부를 정한 이유는 전국 시대에 횡행하던 수많은 사상들 간의 치열한 논쟁이 덧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데 있다.

아무리 복잡한 주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인다고 해도 더 크고 더 높은 관점에서, 즉 붕새의 관점에서 보면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장자는 당시에 이미 상대론적 사고를 취하고 있다.

"하늘이 푸른 것은 하늘의 본래 빛깔인가, 아니면 하늘이 멀고도 끝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아침에 났다가 저녁에 말라 죽는 버섯은 한 달의 기간을 알 수 없고, 여름에 나왔다 가을이면 죽는 매미는 봄, 가을이 있는 일 년을 알 수 없다."

진리를 찾는가? 그렇다면 그대가 찾는 진리가 진리인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뭔가? 장자는 바로 이렇게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궤변 같아 보이는 이런 주장에 발끈한 혜자(惠子)라는 사람은 그릇이 너무 크면 쓸모가 없다는 말로 장자의 사상을 비웃는다. 그러나 장자는 그렇게 큰 그릇이 있다면 거기에 술을 담아 강이나 호수에 띄워 놀면 될 게 아니냐고 호탕하게 대답한다. 큰 물건은 큰 물건답게 써야 한다는 얘기다.

"그대는 큰 나무를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 그 용도가 없음을 근심하는가? 그것을 들에 심어 아무 근심 없이 그 곁을 거닐며 그 아래 편안히 누우면 되지 않는가?"

바로 여기서 '소요유(거닐며 논다)'라는 말이 비롯되었다. 하지만 소요유는 아직 너무 추상적이고 공허하다. 그래서 '제물론'에서는 장자의 사상이 본격적인 철학의 옷을 입고 나온다. 소요유에서 '유(遊)'의 개념을 제시했다면 제물론에서는 '도(道)'의 개념을 제시한다. 이 두 가지 개념이 장자 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그저 거닐고 놀면(유) 세상의 이치(도)를 알게 되는 걸까? 세상 만사의 판단은 다 그렇게 상대적인 걸까? 그렇지 않다. 장자는 상대성 위에 절대성의 기준을 마련한다. 그것이 바로 '절대적인 명지(明知, 밝은 지혜)'다.

"성인(聖人)은 상대적인 설에 의하지 않고 만물에 널리 미치는, 그 생성의 유일한 근원인 하늘에서 절대적인 근거를 구하여 그것에 따라 생각한다. 이것이 인(因, 자신의 주관을 없애고 도에 따르는 것)이다."

제물론의 마지막에는 유명한 호접몽(胡蝶夢)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비가 되어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다가 깨어 보니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내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다. 다시 상대론일까? 아니다.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존재하는 것 같으면서도 정(定)함이 없는 것, 이것이 바로 사물의 끊임없는 변천이다."

상대성과 절대성이 무상히 오가는 것, 여기서 '유'와 '도'는 한데 합친다. - 남경태(전문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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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장자 (莊子) (지은이)
저자파일

장자는 성은 장(莊), 이름은 주(周), 자(字)는 자휴(子休)이다. 그는 송나라 몽(蒙) 사람으로 전국시대 제자백가 중 도가의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여러 문헌을 종합해 보면, 장자는 전국시대인 B.C.300년경부터 맹자보다 약간 뒤늦게 나타나 활약한 듯하다. 그는 고향인 몽에서 칠원을 관리하는 말단 벼슬아치로 근무하는 한편, 논리학파의 거물인 혜시와 친하게 지낸 박학다식한 학자요 논객이었다. 초나라 위왕이 그를 재상으로 맞아들이려고 했으나, 그는 자유를 속박당하기 싫어 이를 거절하고,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유유자적한 생애를 보냈다... 더보기


최근작 : <장자 3>,<장자 2>,<옛글의 향기 세트 - 전5권> … 총 106종 (모두보기)

오강남 (엮은이)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 종교학과 명예교수로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집필과 강의, 강연을 하고 있다. 북미 여러 대학과 서울대 등의 객원교수, 북미 한인종교학회 회장, 미국종교학회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노장사상을 풀이한 『도덕경』과 『장자』를 비롯하여 『오강남의 작은 도덕경』, 『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 『세계 종교 둘러보기』,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 심층을 보다』, 『또 다른 예수』,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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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예수는 없지만 예수는 있다 - 2002.12.03

오강남 (옮긴이)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 종교학과 명예교수로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집필과 강의, 강연을 하고 있다. 북미 여러 대학과 서울대 등의 객원교수, 북미 한인종교학회 회장, 미국종교학회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노장사상을 풀이한 『도덕경』과 『장자』를 비롯하여 『오강남의 작은 도덕경』, 『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 『세계 종교 둘러보기』,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 심층을 보다』, 『또 다른 예수』,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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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보리 2012-07-04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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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한테 물었다. ˝너는 날 왜 좋아하니?˝ 고양이가 답했다.˝바보야 좋고 싫고가 아니라 니가 지금 나랑 같이 있잖니. 야옹˝
KEATON 2017-03-05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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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게 잘왔음
dmsvlf3030 2009-12-11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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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2번 읽어도 제 4편 사람 사는 세상 중 곱추의 특권에 묘사된 모습을 그노자림으로 그려보려 해도 도저히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곱추인 지리소처럼 삶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싶습니다
jeong963 2016-09-24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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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장자..! 한 가지 아쉽다면, 장자의 전체 문장이 나오지 않는다는거..그래도 제일 중요한 내편은 완벽하게 나옵니다~
배가소 2012-12-21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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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송하다.

윤리시간이나 세계사 시간에만 들어본 장자를 봤다. 장자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도 없고, 직접 읽어본 사람도 딱히 없다는데 내가 딱 그랬다. 노자와 장자의 도가사상은 의외로 오랬동안 동양사회에서 살아남아 왔는데 유교적 가르침이 실용과 윤리를 강조한다면 도가사상은 그의 반작용으로 내면적 초월과 자유 및 이 살기 힘든 현세에서 벗어나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일반백성들이나 권력자들에게는 도교신앙의 변질된 육체의 장생불사에 대한 욕망이 한몫 했을 것이다.

책에는 노자와 장자의 차이가 먼저 등장하는데 노자 도덕경이 주로 간략한 어록이나 시, 산문으로 구성한다면 장자는 주로 이야기 형식이다. 그리고 노자 도덕경이 정치지도자를 위한 지침서 성격이라면 장자는 도가적 삶에 관심을 둔다. 마지막으로 노자가 도를 주로 만물의 생성변화의 근원이나 귀착점으로 본다면 장자는 도를 무궁한 생성변화 그자체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뭔가 장자가 보다 자유로운 부분으로 진일보 한것 같은 느낌이다.

저자는 장자는 체계적인 인식 내용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일깨움이 목적이라는데 그래서 책에서는 체계성이라곤 찾아보기 어렵고, 그래서 뭔가를 아는 것도 어려웠다.

장자에게 있어서 참다운 인간상은 신인인데, 이 신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망기와 망공, 망명인데 망기는 몸의 안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고, 망공은 공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요, 망명은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 욕망을 발현하는 모든 통로를 막아내는 셈이다.

장자는 내편과 외편으로 구성되는데 이 책은 주로 내편을 소개한다. 외편은 제자들이 썼다는 이야기도 있고, 마치 성경의 신약과 구약처럼 성격을 달리하는 부분이 많아서다. 주로 내편이 장자의 직접적 생각이 많이 담긴 것으로 보이는데 무수한 일화가 등장한다. 하나같이 뜬구름 잡은 신선놀음식 이야기인데 저자가 해석을 달아놓은 것을 보면 아 그렇구나 싶다.

재밌게도 일화에는 장자와 의견을 자주 다투는 혜자가 많이 등장한다. 이경우는 장자와 혜자가 이야기하는 식이다. 그리고 의의로 공자와 그 제자도 같이 나온다. 공자를 많이 다루는 것에 있어서는 공자사상을 비판하고 넘어서려 했기 때문이란 말도 있지만 공자의 유가사상을 토대로 더욱 사상을 발전시켰기에 공자가 자주 등장한다는 설도 있다.

하여튼 일화들의 주제는 모두 같다고 볼수 있는데 작은 미물이나 사물이 뭔가 거대한 것으로 변모한다던가, 내가 사실은 A라고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A가 아니라던지, 아니면 A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A라던지 하는 식이다. 예를 들면 쓸모없는 것이 사실은 더 큰 쓰임새가 있고, 쓰임새가 있는 것이 사실은 쓸모가 없다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이나 사물의 주측면보다는 인간인 오히려 바라보기 힘든 다른 면을 보고 그것을 깨달아가면서 우주만물의 이치를 깨닫고 그것과 하나가 되어 현세를 초월하자는게 주제인듯 하다.

이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래서 어쩌라고 그래도 우리는 현세를 살아가야하는 몸인데 그것을 마냥 모른체 하고 무관심하게 구는게 무책임한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다 싶을때 쯤, 장자의 인간세 부분이 등장한다. 이 부분은 처세법과 정치사회윤리에 관한 부분으로 결국 장자도 어느 정도 현세를 살아가는 인간의 고민도 다룬 셈이다. 장자는 사람이 처세를 함에 있어 우선 심제를 강조하는데 심제는 마음을 굶기는 것으로 자신의 세속적 마음을 비워 도와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한다. 앞서 말한 망기와 망명, 망공을 실현한 상태랄까? 실제로 이런 상태에서 정치를 한다면 공명정대하지 않을까 싶다.

장자는 윤리자체를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윤리 자체를 버리는 것도 아니다. 윤리가 지닌 한계성을 비판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핑계로 비윤리적인 것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 것을 더욱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불립문자라고 해서 도가 사상이나 불교에서는 진정한 깨달음은 문자로는 한계가 있고 어렵다고 말하기도 한다. 장자는 도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인의, 예악 같은 이치주의나 윤리지상주의 같은 구조를 버려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이 중요치 않은 것은 아니다. 이런것들에서 벗어나는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결국 우선 이런것들을 알고 통달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모르고 그 이상의 단계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사실 이런것에 관심이 없는 동물과 같다는 점에서 이런 지적을 그럴듯하다.

전체적으로 책은 뭔가 알것 같은 면을 주면서도 좀처럼 잡히지 않는 그런 느낌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럴수도 없었겠지만 뭔게 체계성도 부족하고 한 가지 주제로 꾸준히 뜬 구름 잡는 이야기로 동어반복을 하는 느낌이다. 그래도 장자니까, 그리고 우리는 속세에 메여 살면서도 벗어나길 희망하는 존재이니 읽을 만한 책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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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슈 2018-10-02 공감(2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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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서평이 있어 베껴 봅니다.(이정우: 철학 아카데미)

힘겨워도 웃어라 '초인의 힘'으로 토닥토닥

사람들은 때로 초인을 꿈꾼다. '초인적인 힘', '초인적인 능력'같은 말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선정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그래서 대중문화는 이런 식의 내용들을 즐겨 다룬다. 할리우드가 만들어내는 '-맨'부류의 작품들이 전형적인 예이다. 이것은 공상적인, 허깨비 같은 초인 개념이다.

초인의 진정한 모습은 플러스의 방향보다는 마이너스의 방향에서 더 잘 보인다. 삶의 가혹한 고통 속에서도 미소와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 자신을 해하려는 인간을 오히려 너그럽게 포용하는 사람, 타인들의 적대에 원한을 가지기 보다는 오히려 사랑으로 그 적대를 극복하려 하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서 우리는 초인의 모습을 본다.

초인은 어떤 현란하고 엄청난 일을 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고난을 초연하게 극복할 수 있는 사람, 원한을 사랑으로 덮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초인의 철학은 우리에게 이 힘겨운 세상을 미소 지으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장자>는 우리에게 이런 초인의 철학을 준다. <장자>는 눈앞의 작은 이익들에 집착하는 우리의 눈을 더 넓고 깊은 지평으로 돌리게 해 준다. 원망과 미움으로 가득 찬 우리의 마음을 호방한 용기와 기쁨으로 바꾸어 준다.

그러나 <장자>의 이런 호방함과 초연함은 깊은 체험이 결여된 들뜬 선언이나 호언의 차원과는 다르다. 우리는 이 책의 행간에서 처절할 정도의 비극적 눈길, 잔혹한 세상을 바라보는 젖은 눈길을 느낄 수 있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잔인무도한 현실에 대한 고난에 찬 시선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장자>는 이런 심연을 딛고 일어서서 초연함과 희망을 주기에 위대한 텍스트다.

장자의 사유는 철저하게 비사변적이다. 마니일 우리가 경험주의라는 말을 지접적 지각이나 실험, 사료의 확보 등과 같은 편협한 과학적 방법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사유의 근본 태도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장자는 철저한 경험주의 철학자이다. 이 때의 경험은 현실에 대한 외적인 지각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 인생이라는 것에 대한 가장 정직한 눈길이라는 의미이다.

"북녁 바다에 물고기가 있어 이름을 곤이라 한다. 크기가 몇 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변하여 새가 되니 이름을 붕이라 한다. 크기가 몇 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힘차게 날아오를 때면 그 날개가 하늘에 드리우는 구름과도 같다. 바다의 김운이 바뀔 때면 이제 남녘 바다로 날아간다. 남녘 바다를 일러 하늘못이라 한다."

장자는 박진감 넘치는 필치와 인상깊은 이미지들로 갑갑한 현실과 좁쌀같은 인간들의 세계를 벗어나려 한다. 장자의 사유는 변신의 사유이다.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사유이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포함해 일정한 동일성을 가진 존재들의 세계가 아니라 범주들의 칸막이를 허물고 다른 존재로 화하려는 사유이다. 그래서 장자의 사유는 반존재론적 존재론이다.

작은 인간들, 삶을 만들어내야 할 것으로 보기보다는 주어진 것으로 보는 인간들은 이렇게 변신을 꿈꾸는 인간들을 비웃는다. "우리는 힘껏 날아올라야 기껏 나무 위에 오르는 것이 고작이고, 그나마 못 올라 다시 땅에 떨어지는 데, 도대체 뭣하러 9만리나 날아올라 남녘으로 간담. 별꼴이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체제, 사믈들을 가르는 분절선들, 기호들의 체계, 제도가 부여하는 자리들/지위들, 현실이 요구하는 가치들, 분류의 범주들,...이런 틀을 당영한 것으로,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삶을 찾아 나설 용기가 없는 사람들, 이런 매미들, 비둘기들은 주어진 삶을 거부하고 또 다른 삶을 만들어나가려는 사람들을 비웃는다. 매미들, 비둘기들과 대붕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인식의 간격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는 자리들과 이름들로 구성된다. 자리들과 이름들의 체계는 위(+위치)를 구성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위의 체계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발버둥치고 산다. 그러나 대붕은 이 위를 거부한다. 그것은 무위(=위치가 없는)의 삶이다. 그러나 이 무위의 삶은 무엇인가 도드라지는 능력을 보여준다거나 현란하고 엄청난 무엇인가를 이룩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무위의 삶은 위가 강요하는 갈등, 경쟁, 질시와 시기, 인생의 허비, 피곤한 타인의 눈길들, 하망한 기쁨과 슬픔,...같은 것들에서 해방되어 소요하려는 삶이다. ㄱ러나 역으로 그러한 소요의 삶은 갖가지 히미겨운 고통들, 타인들의 피곤한 눈길을 가져온다. 무위의 삶은 그러한 고통들과 눈길들을 감내하는 삶, 아니 감냄를 넘어 빙그레 웃으면서 감내조차도 던질수 잇는 그러한 삶이다. 장자적 초이니은 위의 삶이 생각하는 초인이 아니라, 무위의 삶이 생각하는 초인인 것이다.

이런 무위의 삶을 철학적으로 근거지어 주는 것이 제동의 존재론이다. "사람은 습한 데서 자면 요통 때문에 죽기까지 하지만 미꾸라지는 그러한가? 사람은 높은 나무 위에서 벌벌 떨리지만 원숭이도 그러한가/ 사람, 미꾸라지, 원숭이, 이 셋 중에서 어느쪽이 올바른 거처를 알고 있는 것일까? 사람은 고기를 먹고, 순록은 풀을 먹으며, 지넨는 뱀을 먹기 좋아하고, 부엉이와 까마귀는 쥐를 맛있게 먹으니, 이들 중 어느 쪽이 진짜 맛을 알고 있다고 해야 하는가? 원숭이는 갈장과 짝이 되고, 고라니는 사슴과 교배하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논다. 모장과 여희는 미인으로 소문나 있지만, 이들을 보고 물고기는 숨어들어가고, 새는 날아가버리며, 군록은 달아나버린다. 이 넷 중 어느 쪽이 진짜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가/ 내 쪽에서 본다면, 인의의 발단이나 시비의 길은 어수선하고 어지럽다. 그러나 나라고 과연 그런 구별들을 쉽게 알 수 있겠는가?"

장자가 말하려는 것은 모든 사물들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이 아니다. 사람, 미꾸라지, 원숭이 각각의 거처 그 어느 것도 '올바른 거처'가 아니라는 것은 그 상대성을 벗어난 눈길을 가졌을 때에만 그 상대상을 진정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상대성의 내부에서는 상대성을 볼 수 없다. 상대성의 바깥에 설 때에만 상ㅇ대성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눈길은 사물들 위로 솟아올라 그것들을 굽어볼 수 있는 어떤 초춸적 눈길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의 아래로 내려가 그것들의 상대성이 무화되는 제동의 경지를 뜻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무화란 없어짐, 사라짐이 아니다. 오히려 사물들의 차별성의 사라짐, 존재의 평등이 성립하는 경지를 뜻한다. 장자는 이 경지를 기 개념으로 포착한다.

존재론적 평등이 성립하는 지평으로서 무(=없음)는 단순한 없음이 아니라 있음을 가능케 하는 없음이다. 없음은 있음의 안감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없음에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이론적 논증이 아니라 신체적 실천이다. 즉 자신을 가두고 있는 기를 넘어 존재론적 평등이 성립한는 지평으로서의 기로 다가가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적 수양과도 다르다. 내가 타자가 되려는 어떤 비상한 노력을 동반하는 실천적 수양이다. 미꾸라지가 되고 원숭이가 되어 봐야만 비로소 사람, 미꾸라지, 원숭이의 상대성을 넘어서는 제동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은 이론적 논증과는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된다는 것이 마치 만화나 영화에서처럼 인간이 갑자기 미꾸라지나 원숭이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상상의 문제이지 실재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장자가 진정 말하려 하는 것은 그런 제동의 경지에 머물라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 죽음만이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장자가 말하려는 것은 그런 제동의 경지에 들어섬으로써만 이 상대적인 구별이 판치는 이 세계, 위(=위치)의 세계 안에서(언제까지나 그 "안에서") 무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 서평자 추천 도서

(1) 안동림 역주, 현암사, 장자 (2만 5천)

(2)이강수, 이권 옮김, 길, 장자1(2만 2천)

(3)로버트 앨린슨 짓고, 김경희 옮김, 그린비, 영혼의 변화를 위한 철학(2만)

****** 끝으로 제 경험으로 일반인이 보기에 가장 좋은 것은 오강남 선생의 '장자'입니다. 현암사의 시리즈가 다 좋아요. 특히 오강남선생의 '장자'와 더불어 마쓰야 후미오의 '불교개론'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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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연못 2006-02-08 공감(4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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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도 유혹의 하나

평소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들 류가 있다면,

뭔지 모르게 초월한 듯한 말투로 , 도 닦는 듯한 이야기로 썰을 푸는데 자세히 들어보면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류가 그 중 한 부류다.

차라리 순진무구하게 몰라서 내뱉는 어떤 (무식한)이야기들은, 때로 귀엽기도 하고, 반대로 내가 배우는 점이 있기도 한데,

이런 류와 맞닥뜨리면, 가장 큰 문제가 뭔고 하니,

으아...대화가 너무나도 지루하다는거다.

여기 장자만 해도, 그런 말들이 자주 등장한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 좋고 나쁨을 가리는 것, 이분법적인 모든 것, 상대적인 모든 것에서 벗어나야만 자유로워진다는 말.

그래서 세상에는 옳고 그른 것이 따로 없고, 이것도 옳지 않고 저것도 옳지 않으니 누군가 질문을 해도 해 줄 대답이 없다는거다.

옳거니, 바로 이런 식의 태도 때문에 내가 그런 사람들과 대화하면 지루했었구나 , 하고 장자님께 깨달음을 주신데 대한 마음 속 감사를 한번 드린다.

이 정도 감사면 나에게는 족하다. 원대한 도 닦기는 너무 큰 유혹, 즉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유혹일 뿐.

뭐, 나도 자유로워지고 싶고, 도 트고 싶지만, 어차피 태생적으로 안되는 인간이라는데에 크나큰 불만은 없다.

나같은 사람이 장자를 읽고 싶어한 이유란게 솔직히 도 닦기 위해서는 아니다.

속물스런 냄새가 뽈뽈 나는 처세술 책을 사 읽기는 싫지만, 어차피 처세라는건 좀 잘 하고 싶으니, 읽고 싶어한 심정이 많이 작용했을게다. 그리고 이런 책을 읽으면 왠지 명상도 될 거 같고 왠지 마음의 평화도 막 올거 같은 그런 심정도.

그리고, 어디 가서 이 책을 읽었다고 장자를 안다고 말한다면 더 웃기는 짬뽕이 되는 걸게다.

읽으려는 의도는 얄팍했지만, 그 정도로 타락하긴 싫다.

한번 읽어 알 리가 없고, 또 오강남 선생님이 너무 친절하게 해석해주셔서 오히려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된 구절도 있을게고, 또 무엇보다도 내가 아직 이런 책을 읽을만한 소양이 부족해서 소화는 10프로도 되지 못했을텐데,

아까 말한 그런 부류처럼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타입 까지 된다면,

으 정말 최악이 따로 없다.

그래서 장자님에겐 당분간, 나의 얄팍한 의도가 정말 얄팍했다는 걸 깨우쳐주신 걸로만 감사드리고,

노자님도 공자님도 열자님도 두루두루 다 시간이 되면 좀 더 읽어볼 작정이지만.

흑, 턱 없는 한자 실력 때문에 아무래도 시간은 무한정, 오독은 다반사일게 뻔하다. 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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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6-05-29 공감(44) 댓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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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노닐며...마음을 굶긴다




대학 시절 혼자 길을 걷다보면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있었다.이름하여 '도인'들.... 연인이나 친구들 처럼 우루루 몰려다니는 사람들에겐 잘 접근하지 않는다.좀 어수룩해보이거나 생각이 많이 보이면 슬그머니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 "도에 관심있으세요?"... 대개는 무시하면 피할 수 있었다.하지만 가끔 은근과 끈기가 힘인 사람들이 있다.이런 사람들은 몇 십미터를 졸졸 따라다닌다.언젠가 그런 사람을 한 번 만났다. 어떻게 떨칠까 고민하다 내가 꺼낸 말..."저 맑시스트거든요.아시죠..빨갱이?" .... 그 영업사원인지 도인인지는 벙찐 표정으로 가만히 서있었다. 나 역시 '이거 효과가 생각보다 대단한데..'라고 느끼며 내 잔머리의 영특함을 스스로 대견해 했다.그리고 내린 결론 "역시 대한민국에서는 호환마마,불법 포르노 보다 더 무서운건 빨갱이구나.. 도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군."

나는 옛글을 좋아하는 편이다.노자의 도덕경이란 걸 처음 읽었던 것이 대학교 1학년때였다.사실 뭐 잘 알고 본 것은 아니다.그후에도 논어니 맹자,채근담같은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가끔 한시도 뒤적이면서 앞뒤로 오고가며 해석도 해봤다.나름대로 재미있었다.일단 옛 글은 압축적인 멋이 있다.또 나름대로 사리에도 맞는 말들이고...거기에 속물적인 정서도 하나 작용했다.어디가서 그런데 나온 글 하나 외워서 이야기하면 좌중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그걸써먹는 나도 유치하지만 또 거기에 "와...." 하는 인간들도 다 똑같다.

요즘도 마음이 혼란스럽고 세상사로 인해 감정이 울렁울렁 대면 옛글을 하나 찾아 읽곤한다.주로 법구경이나 숫파니파타를 본다.이 책 <장자> 역시 앞으로 그 목록에 들어갈 것 같다. <장자>의 내용이 선불교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는지 아니면 진리가 서로 닿아서 그런지 내가 알고 있는 몇몇 불교의 가르침과 상당히 유사했다. 우선 <장자>의 첫구절은 동물이야기로 시작한다.그 유명한 물고기 곤과 새 붕에 대한 이야기이다.노자 도덕경의 첫 구절 만큼이나 유명하고 또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이야기이다.세상사의 모든 것이 변하고 또 모든 것이 하나라는 말로만 이해된다만 정말 아는지는 알 수 없다. <장자>는 물고기와 새의 변화로 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우화와 풍자,반어를 통해 현실의 한 차원을 뛰어 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우리가 이것 밖에 없다고 믿는 그 모든 것이 '우물 속 세상'이므로 마음을 수련하여 대양으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선 해야하는 것은 "자신을 잊어라"는 것이다.<장자>제 2편 남곽에 사는 자기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이것이다. 본문에는 "지금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라고 하고 있다.여기서 자신이라는 것은 실존적 존재로서의 나뿐만이 아니라 나의 실존을 구성하는 기타 모든 환경까지 포함되는 듯하다.즉 나와 나를 만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면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것이다. 도는 버리는 것이라는 말 역시 같은 의미일게다.서양 철학에서 근대의 자아론이 탈자아론으로 변증법적 발전을 꿰하는데 <장자>에서는 이미 그것을 오래전에 말하고 있다. 하이데거나 니체,가깝게는 들뢰즈 이런 사람들의 말 속에 가끔 씩 선불교와 노장의 사상이 묻어나는것도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 속에 서있는 듯하다.광고에서도 자주 들려지는 말들은 자아정체에 대한 확실한 각인이다.흔히들 하는 '나는 나고 나는 세상의 중심이고' ...뭐 결국 소비주체로 당당히 서서 열심히 사서 쓰란 이야기인데도 괜히 그럴싸해보인다.특히 에고가 강한 젊은층에게 이런 메시지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장자>는 "내가 과연 나일까"하는 비판적 넘어섬을 또 넘어서라고 한다.불교에서 말하는 '백척간두 진일보'의 마음일 것이다.자아에 대한 비판적 사유 역시 결국 '나'라는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일 뿐 진정한 넘어섬은 '오상아'-즉 나를 잃어버림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세상이 하나이고 모든 것이 한뿌리에서 나옴을 깨닫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분별심'을 없애는 것이다.<장자>에서는 마음 굶기기-즉 심재-를 통해서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을 깨라고 일갈한다.비교종교학자 답게 역자는 성경의 말씀을 인용한다."마음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가난한 것이나 마음을 굶기는 것이나 같은 말일 게다.여기서 말하는 이분법이란 것이 '너는 여당 나는 야당'하는 것이 아니다.남과 여,기쁨과 슬픔,삶과 죽음 ....등등등 세상을 구성하는 여러요인들의 흐름을 분별하여 보는 것을 삼가하라는 뜻이다.선악미추 생사 고락이 모두 평등한 가치가 된다.선불교에서 역시 인간의식과 감각의 위계를 없애라라고 말한다.어디서 주워들은 말 중에 "양단" 이란 말이 있다.양쪽을 모두 자르라..라는 그런 말이다.여기서 양쪽이란 것이 바로 이분법적인 사고를 뜻한다.<장자>의 유명한 우화중 하나는 장자의 아내 장례식 대목이다.장례식에서 북치고 장구친 장자이야기이다.삶과 죽음을 같은 가치 equal value로 본다면 사실 아무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굳이 논리적으로도 어긋남이 없다.몇년전 책이 소개되어 큰 감동을 주었던 스코트 니어링의 죽음을 생각해보면 장자의 가르침과 다를 바가 없다.

어떤이들은 이러면 무슨 삶의 재미가 있을 것이냐고 반문한다.나 역시 한편으로 그말에 동의 하기도 하지만 장자가 말한바는 그런 1차원적인 것은 아니였을 것이다.세상사의 즐거움을 알고 관계의 유용함도 깨닫고 충만한 삶을 누리되 거기에 연연하여 큰 진리를 거스르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장자의 사상 중 큰 오해를 받는 것중 하나는 정치사상이다.장자의 사상이 현실은 비루한 것이니 연연해 하지말라는 것으로 파악했다.다른 말로 하면 있는 것은 있는대로....즉 가진자들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이런 무식한 말을 하신분들은 내가 대학다닐때 열심히 운동하시던 선배들이다.그들 역시 뭐 알고 말한 것은 아니였을 것이고 몇몇 책들에서 주워들은 걸 게다.20대초반의 어리숙함을 지금와서 욕해봐야 무슨 소용있겠는가.하지만 지금와서 생각해 봐도 경솔한 제단은 아니었나 싶다.장자의 사상은 다 소용없다는 허무주의는 아니다.유가의 가르침에 비해 적극성이 떨어지는 (특히 맹자)것은 사실이나 장자는 정치의 다른 차원을 지적하고 있다.큰 틀에서 사람을 다스리기 위해서 안으로의 혁명을 주창한다.장자가 제시하는 정치는 수신에 우선을 둔다.그리고 그다음으로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것을 진정한 다스림으로 본다. 이런 말이 나온다.

"명철한 왕의 다스림이란 그 공적이 천하를 덮어도 그것을 자기가 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변화시키는 힘이 만물에 미쳐도 백성들이 그에게 굳이 기대려 하지 않는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말을 기르는 일과 무엇이 다르겟습니까? 그저 말을 해치는 것을 없애는 것 그것뿐입니다."

무위의 정치이며 작은 정치이고 보이지 않는 정치이다.쉬워 보이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참 위대한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쉽게 재미있게 읽었다.한자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도 아니니 더욱 용이했다.내용중 일부는 이미 다른 책들을 통해서도 알고 있던 것이었다.그중 일부는 이미 나의 세계관의 한장을 구성하고 잇는 것도 있다.하지만 나는 책을 읽었으나 아직 읽지 않은 것과 같다.내가 읽고 느낀것은 글이지 <장자>의 세계가 아니다.내가 만약 열심히 닦아서 무위당 장일순 선생정도쯤 된다면 그때쯤 <장자> 한번쯤 읽었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몇가지 잡념이 떠올라서 마지막에 쓴다.

내 생각에 결국<장자>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결국 "행"의 문제가 아닐까한다.장자가 실행의 문제를 딱히 지적한 바는 없다.하지만 모든 철학이나 사상의 중심은 행동이다.수많은 좋은 지혜와 세상을 꾀는 깨달음을 얻어도 자신의 손발이 그와 함께 가지 않는다면 이것을 어떻게 봐야할까? 또 한가지 생각은 이런류의 책에 감화 감동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요즘<장자>류의 책이나선불교,명상론,인도기행등의 책이 인기있다.하지만 이는 대중소비적인 '선사상''무위사상'이다. 여전히 자신의 삶은 분별과 자신의 이기로 가득차 있으면서 퇴근후에 도장에서 명상하고 마음을 비운다고 무었이 비워질 지 모른다.물론 아예 생각한번 해보지 않는 것보다야 훌륭하지만 취미가 되어버린 '도'라는 것이 과연 선인들이 찾던 그 '선'이고 '도'인지 모르겠다.그리고 가끔 만날 수 있는 어설픈 범우주적 세계관 역시 삽질한다고 생각한다.현실의 불의에 대해서는 별 말 못하고 또는 개입을 하려하지 않으며,늘 자신은 한차원 위를 바라본다는 듯 한 범우주론적 세계인들은 우습다.그런 고매한 분들에게 지상의 어설픈 시인 김수영은 "너의 중용은 비겁이다."라고 했다.스스로의 비겁을 형이상학이니 초월이니 하는 것은 고귀한 가르침으로 곡학아세 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분들이 뭔가 알고 있다해도 실제 아는 게 없을 수도 있다.불교에서는 스님들이 화두를 앉고 몇년수행 하다보면 어떤 스님들은 큰 가르침을 깨달았다고 큰 스님을 찾아온다고 한다.이제 다 알았으니 내려가겠다고.본인들은 진짜라고 믿지만 그게 아닌가보다.몇년 절간수행도 그러한데 그까짓 책 몇권보고 마치 세상사 부질없다고 하는 위인들도 경계해야한다. 전부 키치다.키치적 작가들에 대한 키치적 만족이며 키치적 취미에 대한 키치적 낭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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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5-05-16 공감(12)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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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문자는 죽이고, 영을 살리라!

나를 따라 독자들은 가장 빠른 직선코스로 장자라는 정상에 이를 수 있는 능선으로 올라설 것이다. 여타의 다른 봉우리들에 한눈을 팔 틈이 별로 없다. 아주 빠르고 경쾌하게 움직여야만 한다. 비록 힘들더라도 한발 한발 능선을 향해 집요하게 오르면, 능선에 올라 땀을 닦는 독자들은 이미 능선이 끝나는 저 먼 지점에서 구름에 덮인 정상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강신주

요건 최근에 나온 리라이팅 클래식 - 장자의 저자가 감히 한 말이다.
좀 우습다. 장자를 '가장 빠른 코스'로 그것도 '직선'으로, '정상'에 오르다니... 어불성설아닐까?
장자를 '빠르게, 경쾌하게' 움직여야 읽는 거?

장자는 속도의 개념이나 정도의 개념을 잊게 만드는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가장 빠른 코스로 정상을 오르려는 빨리 움직이는 경박한 자에게도 만병통치약이었던 모양. 저 책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심히 우려되는 바 크다.

다른 장자들이 지나친 설명으로 장황한 감이 넘치는 데 비해, 오강남 장자의 장점은 이야기를 듣는 듯, 그러나 그 풀이가 적절하게 궤를 지키고 있는 데 있어 보인다.

소요유를 '자유롭게 노닐다', 제물론을 '사물을 고르게 하다', 양생주를 '생명을 북돋우는 데 중요한 일들', 인간세를 '사람사는 세상', 덕충부를 '덕이 가득함의 표시', 대종사는 '큰 스승', 응제왕은 '황제와 임금의 자격'으로 풀면서, 전체적인 흐름들을 잘 설명해 준다. 설명이 역시 간명하면서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

고린도후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문자적인 것은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리는 것"이어서, 장자는 자구를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응제왕에서 <메아리처럼 민첩하고, 기둥처럼 튼튼하고, 사물을 뚫어보고, 머리가 명석한> 사람을 <고된 종>이요, 일에 얽매인 <재주꾼>에 불과하다고 일갈!

저 강신주란 사람은 이런 말 읽고도 저런 서문을 썼나 싶다. 안쓰러움. 기회가 되면 함 읽어보고 까든지 감싸든지 해야겠다.

우물안 개구리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 것만을 유일한 무엇이라 믿는 것까지는 자유이지만, 그런 잘못된 확신때문에 드넓은 바다처럼 훌륭하고 신나는 세계에 접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슬픈 일... 자기의 것을 최고라고 생각하고 딴 사람들을 보고 자꾸 들어와 보라고 강요하는 열성은 딴 사람들을 더없이 성가시게 한다."고 하는 대목을 읽으면서, 한국 교회가 과연 '선교'의 사명을 질 정도로 큰 덕을 지녔는지... 돌아보게 한다.

이름에 매이지 말고,
꾀의 창고 되지 말고,
쓸데없는 일 떠맡지 말고,
앎의 주인 되지 마십시오.

아, 쓸데없는 일 떠맡지 말고... 에서 나는 내 가슴을 여러 번 두드린다.
그리고, 다시 소크라테스를 떠올린다. 앎의 주인 되지 말라... 모르는 주제에...
오직 그분의 종으로 살 일이다. 그게 양생이고, 웰빙 아니냐?
내가 이런 말 하면, 믿는 사람들은 같이 교회가자고 하더라! 젬병이다.
하긴, 그분이 그분이지만... 그 사람들은 그분이 그분임을 모르고, 자꾸 가자고 한다.

장자를 읽는 일은, 소나기 소리를 듣는 일이다.
내가 사는 일은 소나기를 맞는 일이다.
소나기를 맞아보지 않고서는 소나기를 경험한 게 아니다.
그렇지만, 소나기 소리를 듣는 맛도 깊지 않은가? 소나기를 맞는 일이 시원할 적도 있지만, 고달플 적도 많으니...

이제 누글샘 2007-08-15 공감(6) 댓글(4)


가 장자를 묻는다면, '오강남의 장자'를 읽어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