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22

박성용 - 갈등에 있어서 존중과 배려의 일관성



(2) 박성용 - 갈등에 있어서 존중과 배려의 일관성 작년 늦가을부터 연말까지 여러 학교에서 교내폭력 사건에 관련하여 도움...




박성용
Yesterday at 01:24 ·



갈등에 있어서 존중과 배려의 일관성

작년 늦가을부터 연말까지 여러 학교에서 교내폭력 사건에 관련하여 도움 요청이 있어서 바쁜 와중에서도 한 달에 두세 학교에 외부진행자로 들어갔었다. 물론 직접 관여한 것보다 직무연수 등으로 인연이 닿았던 분들이 전화로 자신들의 사례에 대해 상담을 하는 경우도 더 많아졌었다.

직접 들어간 사건들은 고교에서 교사와 학생들 간의 긴장 높은 상황에서부터 장애우 학생에 대한 비하의 동영상 사건 그리고 성폭력의 부류에 드는 사건들까지 다양했다. 상담의 경우 교감이나 부장교사가 학폭 관련 학부모들로부터 오는 비난과 욕설에 대한 무력감 그리고 가해학생에 대한 학급설문조사를 통해 가해 학부모에게 사실이야기 한 것이 더 큰 화근이 되어 담임을 힘들게 한 사건까지 다양했다. 장애우 학생의 통합학급 담임교사의 경우는 정말 딱한 처지가 되었는데, 그 학생의 이상행동에 대해 귀찮아하거나 힘들어하는 학생들에게 상대방을 이해하고 참아달라고 부탁했는데도 힘들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하니까 학생들의 볼멘소리에 대한 강제적인 말과 장애우 학생부모의 계속되는 요청사이에서 더 이상 배겨나지 못할 정도로 힘든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할만큼 하는 데도 학부모의 계속되는 요청으로 인해 이 애는 통합반보다는 치유가 필요한 아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니까 더욱 마음으로 힘들어지는 것이었다.

도전적인 학부모나 힘들게 하는 아이를 대면하게 되면 대부분의 교사는 “이 아이·학부모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마음속에 떠오르기 마련이다. “이 아이의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까?” 혹은 “상대방에게 뭐라고 말(대답)해줘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연한 듯 보이는 이 질문이지만 그 결과는 다르게 가게 마련이다. 그 질문이 일어나는 순간에 내가 감당하고, 처리해야 할 문제로 다가오게 마련이고, 그렇게 자신이 처리해야 할 문제로 인식하는 순간에 어떤 대답을 해 주어야하는지 의식하게 된다. 그래서 그 대답에 대해 상대방에게 뭐가 옳고 그른지 말해줘야 한다는 신념이 생기면서 일들이 커지게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1:1 대결구조가 되고, 문제로 인식하니까 옳고 그름, 정당성의 입장에서 설명해주기로 나가게 되는 데, 그렇게 되면 상대방은 그로 인해 자극을 받게 되어 사건이 더 불거지기 십상이다.

한 간단한 사례를 들어보자. 여러 학생들을 괴롭히는 한 (가해)학생에 대한 증거를 확인하기 위해 반학생들에게 설문을 돌렸다. 학급에서 힘들게 하는 학생이름과 그 내용을 적어내라는 설문이었고 결과는 그 한 학생에 대한 여러 학생들의 지목이 있었다. 그래서 그 사실을 학부모에게 알리고 그 학생의 행동에 대한 해결을 위해 학부모와 면담을 하였지만 돌아온 것은 그 학생 부모로부터 자기애만 가해학생으로 몰아간다는 거친 항의와 비난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 담임은 심각한 정서적 충격을 받게 되었다. 협조를 구하려 면담을 청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거친 말이어서 그 부모에 대한 두려움까지 생기게 되었고 그 학생에 대한 속으로 징그러움이 들어 학급에 들어가기 싫을 정도였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객관적인 사례나 증거들을 가지면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옳고 그름에 대한 증거로 사용하고, 정당한 논조로 말하면 상대방이 들을 것이란 기대를 갖는다. 그래서 자신의 정당한 이야기나 객관적인 증거들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상대방을 직면하게 되면 기가 막히게 되고 어찌할 바를 모르기 마련이다. 만나고 나서 오랫동안 수치심이나 불안이 올라오면서 힘든 시일을 보내게 된다. 심지어 더 세게 맞대응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자책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학폭사건에 대한 외부진행자로써 나의 경험으로 보자면 대부분은 정당성, 옳고 그름에 대한 마음의 상처나 불편함으로 일이 틀어져서 심지어 나를 만나는 것까지도 짜증이 나거나 환영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만나게 된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존중과 돌봄의 에너지이다.

존중과 돌봄은 단순히 도덕적인 가치가 아니다. 그것은 억울해 분노하고 있거나 상처와 혼란으로 힘들어 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은 당사자에 대해 가장 잘 작동이 되는 것은 바로 존중과 돌봄이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와 자신의 정당성에 대해 에너지를 소비하면 당사자들의 영혼은 왜소해지고, 부정적인 감정이 쌓이게 되면서 선한 것을 주고자 하는 의지를 박탈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에게 객관적으로 옳은 증거들이 많다고 해서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원하는 결과로 안내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바로 비극을 낳는다. 왜냐하면 원하는 결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기 위한 결과로 치닫도록 만들기 때문에 그 가속도가 붙은 열차에서 누구도 뛰어내릴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끝까지 가게 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학폭건으로 와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 대부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고 가게 된다. 내가 유일하게 의존하는 것은 내 에너지가 어떤 상태로 있는가에 대한 주목하기이다. 힘든 때는 상대방이 자기주장을 계속 굽히지 않고 강제전학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던지, 자기 합리화나 자기 방어처럼 들려지는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있을 때라든지, 거센 비난과 저항으로 진행자인 나의 역할까지 심지어 의심할 때를 만나는 순간 등이다. 그런 순간에 자발적인 참여를 원치 않기 때문에 내가 정당성이나 옳고 그름의 판단에로 기울기 시작하여 ‘말해주기’모드로 들어가고 있다고 느끼면 다시 정신 차려 존중과 돌봄의 에너지로 다시 돌아온다.

내가 존중과 돌봄의 에너지로 있는 순간에 뭔가 안전한 소통의 공간이 열리면서 저항과 자기 방어로 담을 쌓고 있던 상대방의 말문이 열리고, 지금까지의 습관적인 패턴과는 다른 가능성의 문이 살짝 열리는 것을 보게 된다. 존중으로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상대의 존재를 환대하며 듣고, 사건에 대한 성찰을 위해 존중으로 질문한다. 그리고 돌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의 말 뒤의 마음에 연결하며 있다가 보면 대부분의 경우 대화에 응하게 된다. 뭔가 잘못된 것에 대해 은연중에 가르치려 한다면 순식간에 상대방은 달팽이처럼 자기 방어선을 치고 뒤로 물러나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중과 돌봄은 단순히 성숙한 진행자의 윤리적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실재가 작동하는 실제적인 방식이자 원리이기도 하다. 특히 일진회 멤버를 만나거나 교사도 고개를 돌려버리는 품행이 어지러운 학생이나 고집스럽게 자기주장일색인 성인을 만나면 존중과 돌봄의 태도는 더욱 치열하게 일관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대화하기를 거절하는 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존중과 돌봄의 에너지가 더욱 필요한 순간이 그때이기도 하다.

나는 존중과 돌봄이 단순한 윤리적 덕목이 아니라고 말하는 정도를 넘어서 오히려 존중과 돌봄은 인식론적인 렌즈를 준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는 갈등과 폭력의 상황에서 대부분이 두려움과 불안, 정당성과 옳고그름의 프레임이라는 덫에 갇혀있게 되므로,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더 큰 실재(reality)를 볼 수 있는 인식의 열쇠를 지닌 것은 바로 존중과 돌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존중과 돌봄은 갈등의 무대에서 각자 부여된 역할을 넘어서 특정 연기를 넘어서 각각이 본래 그러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신뢰와 더 큰 실재 그리고 보고자 하는 미래의 가능성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선사한다.

무엇보다도 궁극적인 의미는 존중과 돌봄이 바로 그것을 상대방에게 줄 때, 비로소 그 주는 자에게 되돌려지는 자기 존엄과 삶의 신성함에 대한 자각이라는 보상이 있다는 점이다. 존중과 돌봄은 그것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상대방에게 줌으로써 뭔가 희생의 미덕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잘못이거나 비난할만한 타당성이 있다고 내 안에서 판단이 되는 순간에 그 판단은 이미 존재의 존엄성과 삶의 거룩성이 미치지 못하는 공간이 분명히 있다는 나의 신념을 세우고 나서야 남에게 언어나 행위 혹은 태도로 표현되는 것이다.

즉 먼저 나에게 납득되고, 나에게 그러한 비난이나 강제의 신념을 허락하고 나서야 남에게 표현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먼저 손상이 되는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내 정체성에 대한 구겨짐이다. 나를 먼저 훼손하지 않고서는 남에게 손상을 가할 수 없다. 손상에 대한 신념을 내가 받아들여야 남에게 손상을 입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비난과 강제는 그 정당성과 옳음의 객관성이 있다하더라도 내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은 남에게 닿기 전에 이미 내 안에서 일어나게 마련이다.

반면에 존중과 돌봄은 단순히 ‘남을 해치지 말라(No Harm)'의 원리를 넘어서서 자신의 존엄과 삶의 신성함을 지키고 세우며 풍성케 하는 원리로써 작동한다. 이것은 베풀수록 희생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오히려 선물을 되돌려받는 경험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는 황금률은 매우 중요한 영적 차원을 말해주고 있다. 즉, 남에 대접하는 존중과 돌봄은 내가 받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단순히 내가 뭔가 반대급부로서의 소유나 긍정적인 대접을 받는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그것은 내가 나에 대해 평소에 알고 있었던 영역을 넘어서 내 안에 있는 알지 못했던 잠재적인 존엄의 리얼리티를 불러내 내가 무엇이 더 될 수 있겠는지를 상기시켜준다. 이렇게 되면 갈등과 폭력에 대한 직면은 나의 존엄과 잠재적 미래가능성의 문을 노크해 주는 전령자로써의 방문객이 된다.

기적을 맛본다는 것은 예기치 않은 것을 선물 받거나 나의 한계상황에서 할 수 없었던 것을 이제는 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진정한 기적이라 생각되는 것은 내가 존중과 돌봄이라는 방식으로 남에게 다가갈 수 있는 능력을 주게 되는 성실성(integrity)과 영혼의 순수한 기쁨이 내 메마른 가슴에서 올라오는 것을 본다는 데 있다. 나에 대한 의심에서 나에 대한 신뢰로 점차 바뀌는 것이 기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존중과 돌봄의 치열한 일관성을 되찾고자 의식적으로 신경 쓰면서 일어나는 새로운 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