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31

[기의 세계] 45. 기수련과 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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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의 세계] 45. 기수련과 귀
[중앙일보] 입력 2000.01.12 00:00 | 종합 1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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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金容沃)의 TV '노자(老子)' 강의가 자못 화제가 되고 있는 모양이다. 난해(難解)한 '노자' 를 대중적 인기로 몰고 간 도올의 탈렌트도 탈렌트려니와 그 인기 속에 어떤 시대적 변화의 용틀임이 보인다.

한데 '노자' 를 제대로 알려면 이른바 기(氣)측면에서의 접근이 필수적이다. 우리나라의 현대사상가 가운데 기사상을 아우르면서 '노자' 를 완벽하게 풀이한 이는 다석(多夕)류영모(柳永模)였다. 다석은 '노자' 를 '늙은이' 라고 이름붙이고 도덕경 전문을 순우리말로 엮어냈다.

도올이 TV에서 '노자' 를 공개강의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다석은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에 걸쳐 YMCA에서 공개 강의했다.

물론 그때는 TV가 없던 시절이었지만 그곳에서 청강한 이들은 함석헌(咸錫憲)을 필두로 재재다사(才才多士)였다.

다석은' '노자' 를 강의하면서 조금도 자세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기는 수련을 통해서 몸으로 터득하는 것이지 머리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를 터득하면 기운을 쓸수록 더욱 기운이 왕성해진다. 강의나 설법을 하면 할수록 입안에서 침이 샘솟는다. 그 침을 일컬어 금진옥액(金津玉液)이라고 한다. 다석의 입속은 금진옥액으로 충만했다.

'노자' 의 성은 이(李)이고 이름은 이(耳), 자(字)는 담(聃)이다. 흔히 노자는 '노담' 이라고도 불린다. 한데 노자의 이름이 귀를 뜻하는 한자인 '이(耳)' 로 지어졌다는 것은 그렇다 치고라도 자(字)까지 귀를 뜻하는 '담(聃)' 이 붙여졌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담' 이라는 한자는 귀가 두툼하여 귓바퀴가 없을 정도의 모양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노자 귀의 생김새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선도의 세계에선 특히 귀를 중시한다. 성인(聖人)이란 말에서 '성' 이란 글자도 귀(耳)가 전제로 된다. 노자의 귀는 이름 그대로 성인을 상징하는 셈이다.

선도에서 귀를 중시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귀가 선천성(先天性)을 상징할 뿐더러 생명기능(生命機能)의 근원과 직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람의 귀는 개나 고양이의 귀처럼 움직이지 않는 게 특징이다. 물론 예외적인 사람도 있지만 그런 부동성(不動性)은 유전적인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귀가 생명기능의 근원과 직결되는 것은 그것이 신장(腎藏)과 심장(心臟)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호흡에 맞추어 귀를 매만지면 신장이 튼튼해지고 나아가 심장의 기능이 강화된다.

이규행 <언론인.현묘학회장

도올 김용옥 1 박정진 | 불교춘추사 | 2001

도올 김용옥 1 - YES24

도올 김용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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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 1
박정진 | 불교춘추사 | 2001년 05월 31일


도올 김용옥 2

일시품절

 

도올 김용옥 1

일시품절

출간일 2001년 05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293쪽 |

책소개

10년 전에 『무당시대의 문화무당』(1990)이란 책을 통해 이미 김용옥에 대한 글을 썼던 경험이 있는 저자가 최근 TV 강의로 크게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김용옥에 대한 지식인들과 언론의 비판을 다루면서 그를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여러 신문에 실린 김용옥에 대한 글들을 싣고 있으며 인류학자적인 입장에서 김용옥이란 인물과 그의 사상에 대해 소개한다.
목차
1. 김용옥신드롬의 정체
김용옥의 1차, 2차 신드롬
김용옥과 나의 인연
요한인가, 광자인가?
김용옥의 이해를 위한 짧은 개괄
불교강해 : 도올서원 제12림에서
그가 존경하는 서양철학자 화이트헤드

2. 김용옥 비판에 대한 비판
사이비 지식인 '향원'들의 왜가리 소리가 아니길!
서지문 교수의 비판
이기동·성태용 등 제 교수의 비판
문화일보와의 논쟁
일반인의 논쟁가세
종합적인 김용옥의 해명
김용옥신드롬의 문화적 의미와 승화
김용옥신드롬의 사회적 생산성

3. 김용옥의 불교에 대한 비판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 대하여
김용옥의 번역론과 나의 문화체계론의 만남과 소통
나의 역동적 장의 개폐이론과 신화조작
나의 인류학적 지식의 실존적 재구성
김용옥의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의 비판
『화두, 혜능과 셰익스피어』에 대한 비판의 비판
세계 4대 생불, 숭산스님

4. 김용옥이 넘어야 할 과제
김용옥도 향원으로 전락할 수 있다
새마을운동은 진정한 바람
무당적 한풀이 그룹에 끼어선 안돼
김용옥은 학자무당인가! 설익은 원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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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자 : 박정진
대구에서 태어났다. 한양대 의과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생각한 바 있어 국문과로 옮겨 공부했다.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며 주로 문화 관련 글을 쓰는 한편 영남대학에서 문화인류학 석사, 박사 과정을 마쳤다. 「현대시」를 통해 등단하여 시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이 땅의 문화현상에 대한 독특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세계일보 논설위원을 마지막으로 언론계를 떠난 뒤 한양대와 서울교대에서 인류학을 강의하면서 국선도 수련과 자유로운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다. 현재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부 3학년에 재학중이다. 저서로 「한국문화 예술인류학 (1992)」,「아직도 사대주의에 (1994)」,「어릿광대의 나라, 한국 (1998)」,「인류학자 박정진의 밀레니엄 문화읽기 (1999)」, 시집「해원상생, 해원상생 (1989)」,「시를 파는 가게 」(199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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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비판자들의 대부분이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왜곡하고 내용보다는 태도를 문제삼고 해석이 다른 정도의 것을 마치 김용옥이 터무니없이 왜곡하고 수준 이하의 강의를 하고 있는 것처럼 풍기고 있다. 내가 볼 때는 문제삼을 것이 오히려 없다. 김용옥의 담론이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면 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비판자의 일부 중에는 그렇지 않은 자도 있지만 사회 전체적인 변동으로 볼 때는 별 생각없이 한마디하는 그들의 조그마한 비판이 보수권력을 편드는 것이 될 수 있다.
--- 2001년 5월 월화산 박정진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학자같지는 않단 말이야. 차라리 광대같더구먼."
"광대, 맞아. 광대야. 지식인 광대."
"아니야, 무당이 더 맞아. 무당말이야. 말을 할 때 보면 어디선가 누가, 하늘에서 가르쳐주는 것 같더란 말이야.
일사천리로 나오는데 그게 무당이 아니고 뭐가 무당이야. 무당도 그런 무당이 없제. 신들린 것 같단 말이야.
"맞어, 맞어. 전기가 통하는 것 같더구먼. 전기말이야!"
--- p.12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학자같지는 않단 말이야. 차라리 광대같더구먼."
"광대, 맞아. 광대야. 지식인 광대."
"아니야, 무당이 더 맞아. 무당말이야. 말을 할 때 보면 어디선가 누가, 하늘에서 가르쳐주는 것 같더란 말이야.
일사천리로 나오는데 그게 무당이 아니고 뭐가 무당이야. 무당도 그런 무당이 없제. 신들린 것 같단 말이야.
"맞어, 맞어. 전기가 통하는 것 같더구먼. 전기말이야!"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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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평
한편 김용옥에 대한 저자의 신랄한 비판은 다른 비판자들과는 달리 전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한다. 김용옥의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 특히 박정희 정권에 대한 편견적이고 평면적인 비판은 간접적으로 자화자찬에 빠져 있는 현 정부를 두둔하는 꼴이 될 뿐만 아니라 그 학문적 내용에 있어서도 새롭지 못한 구태의연한 수준이며 미제국주의나 서구의 근대화와 민주주의 이론을 아직도 모방적으로, 교조적으로 바라보는 모순과 자가당착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는 부모를 욕하면서도 부모를 닮아가는 그런 자기내부적 모순을 드러낸 것에 비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인류학자로 문화의 주체적 토착화와 창조적 토착화에 남다른 시각을 가져온 저자는 김용옥의 이론이 겉으로는 매우 현학적이고 서구의 패권주의와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자신도 서구이론에 의식화된 나머지 실질적으로 비판과 토론의 잣대를 서구에서 빌려오고 있어 큰소리를 치는 만큼 우리의 문제를 제기하고 푸는 데에 결정적 기여를 하지 못하는 과거에 치중하는 풀이문학적 성격에 그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미래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는 소홀하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김용옥의 비판이 그의 말의 큰 소리와는 달리 아직도 우리의 ‘몸과 땅’을 기초로 한 이론 전개에는 실패하였다고 보고 있다. 예컨대 새마을운동을 문화박멸운동(culturcide movement)이라고 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것은 “남의 과거의 신화(서양의 민주주의 신화)를 가지고 자신의 현재의 신화를(한강의 기적) 지우는 사대적 지식인의 행태의 잔존”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새마을운동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최근세사에서 경험한 민족중흥의 바람(風)의 진정한 본보기였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사집단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과소평가하려는 지식인은 아직도 사태를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말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것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것도 일제와 광복이라는 식민지적 상황의 연장선에서 주체적인 선택에 의해서 도입한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으로, 여전히 우리의 ‘몸과 땅’을 배반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서구의 민주주의 경전을 너무 교조적으로 신봉한 나머지 모자이크식(짜집기식) 헌법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이것은 항상 이상과 현실이 괴리되는 악순환에 빠지도록 하는 원인이 되고 있으며 과거로부터는 단절되고 현재는 주체적이지 못함으로써 종국에는 독립국가적인 면모를 갖추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분열하게 되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보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창조적 이성(理性)을 중심으로 하는 ‘진보적 문화운영’의 도입이 절대절명의 것이라는 주장이다. 저자는 이성의 문화운영에 있어서도 서구이론에 맹목적으로 추종한다면, 역사에서 현재적 창조와 성취를 하지 못하고 언제나 지나간 것에 대한 낭비적 소급(遡及)과 다가올 것에 대한 예축(豫祝)을 일삼는다면 ‘축제적 역사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축제적 역사관’이라는 것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의해 역사를 연출함으로써 굴곡과 파란이 많은 드라마틱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이는 매우 극적이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가난과 절망을 벗어날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진보적 역사관’은 이성에 의해 역사를 이끌어감으로써 안정과 축적을 통해 발전적인 역사를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만약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가 과거청산과 세계화라는 빛 좋은 개살구와 같은 이름으로 여전히 ‘소급과 예축’을 계속한다면 아무런 국가적 생산성의 증대를 가져오지 못하고 말만 무성케 한다면 푸닥거리식의 역사운영에 그칠 공산이 크다 하겠다. ‘역사 바로세우기’나 ‘제2건국’과 같은 깃발을 치켜들지라도 이들 양 정부가 실패를 거듭하는 것은 결국 창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들은 창조적이지 않기 때문에 오는 비극이라는 것이 저자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김용옥의 새마을운동에 대한 문화박멸운동이라는 심한 폄하도 실은 바로 지식인의 사이비성에 먼 뿌리를 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 저자의 우려이다. 사대와 위선으로 얼룩진 우리의 문사집단들의 자기방어,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우 진보적이고 좌파적인 김용옥조차도 실질적으로 그의 고백대로, 미제국주의·기독교의 유착관계의 혜택을 입은 기득권 집안 출신으로 단지 군사정권과의 유착관계에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밖으로 사대적이고 안으로 착취한’ 우리나라 선비계급(문사집단)의 과오를 무사집단을 매도함으로서 은폐하거나 두둔한다면 그 역시 문사집단의 내부적 모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는 ‘국민의 정부’의 소위 ‘말의 성찬’ 그룹은 ‘몸과 땅’을 배반함으로써 그들의 민주화운동의 찬란한 깃발과 선전에도 불구하고 국민들로부터 점차 이반당하고 있는 국면이다. 이같은 사실을 직시하고 김용옥은 앞으로도 철저하게 편당(偏黨)하지 않고 공명정대(公明正大)하고 멸사봉공(滅私奉公)하는 자세로 강의에 임하여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문이다. ‘말의 성찬’ 그룹은 IMF를 몰고 온 ‘문민정부’의 ‘무지와 오만’의 그룹과 비슷한 노정을 보이고 있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군사정권 이후에 들어선 두 민주정부가 똑같이 내부 모순에 빠진 것은 우리 문사집단(文士集團)의 문화운영이 외래 이데올로기의 모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매우 불행한 것이다. 어떤 이데올로기든, 그것이 현실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든, 실패를 하였던 간에 모두 신화조작의 산물이다. 신화조작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그 찬란한 내용보다는 자신의 ‘몸과 땅’에서 일어나는 성실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김용옥의 강의와 글쓰기도 마찬가지로 신화조작에서 성공하려면 우리의 ‘몸과 땅’을 배반하지 않아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만약 김용옥의 담론과 문화권력이 이를 배반하고 사대적-종속적 신화의 되풀이에 그친다면 또다시 우리 민족은 문화식민지적 상황과 굴레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결론적으로 『도올 김용옥』(1, 2권)은 김용옥의 인물됨과 시대적 역할에 대해 요한, 광자(狂者), 무당, 원효라는 인물을 저자는 상정한다. 그에게는 물론 이 네 인물의 성격과 유형이 다 들어 있다. 기독교적으로 보면 예수의 도래를 알리는 세례 요한과 같이 새 시대를 알리는 ‘목소리로서의 임무’를 다하는 인물이 될 수도 있으며 유교적으로 보면 군자(君子) 다음의 ‘이상은 높지만 실천이 모자라는’ 광자(狂者)에 속하는 인물일 수도 있다. 또한 한국의 문화특징으로 보면 무당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무당의 이미지는 ‘과거와 귀신’에 대한 빙신(憑神)으로 인해 ‘미래와 신’에 도달하는 데에 한계와 역부족을 드러내는 퇴행적 인물로 비쳐질 수도 있는데 만약 김용옥이 에듀테인먼터로서, 그의 퍼포먼스가 하나의 푸닥거리로 그칠 경우라면 이에 해당된다. 원효야말로 바로 무당을 극복하여 자유자재한 가장 바람직한 인물상이다. 김용옥이 우리 시대의 원효가 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모자라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그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때문에 우리의 모든 지식인과 김용옥 개인은 함께 반성하여야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 시대 원효의 탄생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목표이며 또 우리 모두가 함께 달성하여야 하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원효와 같은 인물의 배출이야말로 문화의 주체성을 강화하고 문화의 총량을 늘리면서 통일에 성큼 다가서는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도올 김용옥­요한인가, 광자(狂者)인가, 무당인가, 원효인가』(1, 2권)라는 책은 동양철학자 김용옥이 KBS TV에서 노자·공자 강의를 하는 것과 더불어 불어닥친 그에 대한 일련의 비판과 신드롬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문화총체적인) 평가를 한 책이다. 이 책은 비판서이긴 하지만 우선 도올 김용옥 신드롬에 대한 긍정적 효과를 높이 사는 쪽이다. 동시에 도올 김용옥 개인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김용옥을 통해서 우리 시대의 문제점과 그 해답을 함께 풀고자 하는 우리 시대의 신화적 글쓰기­신화조작에 대해 광범위한 토론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언론인이자 문화인류학자인 박정진씨가 쓴 이 책은 15년 동안 줄기차게 김용옥의 일련의 대(對) 사회적(社會的) 행위에 대한 사회·문화적 의미를 중층적으로 파헤쳐 온 저자의 역작이다. 저자는 지난 1990년에도 『무당시대의 문화무당』(지식산업사)이라는 책을 펴내 1980년대 중반에 불어닥친 김용옥의 1차 신드롬에 대한 문화인류학적인 의미 분석을 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저자의 이번 책은 특히 김용옥이 자주 인용하고 있는 인류학적 지식의 바탕에서 나온 인류학자의 첫 반응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저자는 이번에 1, 2차 신드롬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며 김용옥의 의미에 대한 총체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우선 의미의 네 가지 층인 기독교의 세례 요한, 유교의 광자(狂者), 종교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무당, 그리고 종교적 완성을 이룬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라간 인물인 원효스님까지 들먹이면서 그에 대한 비교적 폭넓은 해석과 미래적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문화인류학적인 탄탄한 학문적 바탕과 오랫동안 김용옥에 대한 관찰, 그리고 동시대에 공통의 문제를 두고 고민한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저자 박정진씨는 종래 김용옥의 비판에 나선 다른 비판자들이 단순히 특정 구절에 대한 해석을 두고 시비와 표절 등의 논란을 벌이거나 안하무인의 오만한 태도를 두고 문제제기를 하였던 것과는 다르게 김용옥 개인의 문제를 우리 시대 모두의 문제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저자는 독자적인 이론체계를 가지고 김용옥의 행위를 세계문화와 한국문화의 지평에서 폭넓게 문제제기를 하면서 토론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 아날학파의 장기지속(長期持續)의 이론과 신화학(神話學)의 신화분석 방법을 저자의 인류학적 연구모델인 ‘역동적(力動的) 장(場)의 개폐(開閉)이론’(DSCO: Dynamic Space Close and Open 혹은 Dynamic Space Context and Out of Context)과 결합시킴으로써 신화의 이중성과 다양성을 분석하였다. 저자는 “TV강의를 통해 김용옥이 펼치는 일련의 작업들도 크게는 신화적 글쓰기­신화조작(神話造作)에 들어가는 행위에 속하는 것”이라고 규명하고 있다. 결국 김용옥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신화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김용옥의 번역론과 자신의 문화체계 및 변동론을 비교 분석하면서 상응성과 유사점을 발견하고 있는 저자는 우선 김용옥의 강의와 해석학에 대해 우리 문화 총량의 확대와 새로운 가치체계 및 의식의 창출이라는 점에서 크게 순기능적인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말하자면 저자는 김용옥의 강의와 강의를 위해 쓰여진 『노자와 21세기』·『도올 논어』가 엄정한 학자의 오리지널리티를 보여주는 것이라기 보다는 대중적 계몽의 맥락을 가지는 것으로 대중적 토론을 유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 그것만으로도 십분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서지문 교수를 비롯, 학자들의 비판은 소위 김용옥이 형성해가고 있는 문화권력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고 이를 사이비 학자인 ‘향원(鄕原)들의 왜가리 소리’에 비유하고 있다. 해석의 다양성을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학계의 주류와 해석이 다르다고 매도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또 주부 이경숙씨가 문제제기와 함께 쓴 책『노자를 웃긴 남자』는 토론을 하기에는 심하게 함량미달의 것으로 대중강의라고 해서 아무에게나 반론의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평가하고 있다. 또 표절과 관련하여서는 물론 김용옥 자신이 영향받은 학설과 인용구절에 대해 엄정하게 밝히는 것이 학자로서의 자세로 볼 때 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겠지만 대중강의의 성격으로 보아서 처음부터 엄정한 학문적 성과물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으며 또한 김용옥의 문체의 기술상 그것을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를 의도적 표절이나 계산된 은폐라고 하는 것은 김용옥의 장점이나 순기능적인 역할을 일부러 보지 않으려는 소인배적 태도라고 나무라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런 점에서 김용옥의 강의는 새로운 문화적 공감대를 필요로 하는 우리 사회에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하였다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2권)에서는 김수환 추기경과의 대담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면서 종교문명과 과학문명의 특성과 화해를 다루고 있다. 이 두 문명체계는 서로 침해할 수도 없고 서로 대신할 수 없는 것으로 양자는 상호보완적인 것이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예컨대 죽음이나 악이나 귀신의 문제라는 한계상황이라고 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삶(영생)이나 선이나 신을 거론하는 것은 신화적(종교적)인 처방으로서는 훌륭한 것이지만 이는 자기순환적인 계열에 속하는 것으로 이를 마치 과학적인 처방으로서 혼동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인류는 종교와 과학이라는 두 수레를 굴리면서 역사를 움직여왔다. 이 둘은 쉽게 하나로 합쳐버린다면 이는 종교와 과학이라는 두 세계의 잘못된 유착(癒着)에 불과한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과학으로 해결하여야 하는 것은 과학으로 해결하고 종교로 해결하여야 하는 것은 종교로 해결하는, 상호보완적인 운영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이 두 세계는 평행선을 유지함으로써 상생적인 통합(合生)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유교의 천(天)과 상제(上帝)의 개념을 기독교의 ‘하느님’의 개념과 동일시함으로써 유교와 기독교의 화해를 추구했는데 여기서 기독교의 토착화의 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과 김용옥은 대담에서 천주교 초창기의 해묵은 문제, 토착화의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 반추하는 계기를 가졌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특히 천주교는 외부에서 전파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체적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고민하는 지식인 가운데서 사람을 보내서 유학의 새로운 다른 형태로 수용하였다는 것이 핵심내용이다. 이러한 우리의 천주교의 역사는 일방적으로 ‘전래된 것’이 아니라 ‘그 나라가 자기들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수용한’ 지구상에서 유일무이한 역사이다. 따라서 천주교 사상사는 유학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한국의 유학사와 깊은 구조적인 관련을 맺고 공통적인 문제의식과 표현양식으로부터 출발하였다는 데에 공감하였다. 그러나 김추기경은 ‘유교에서의 하늘’은 기독교에서와 같이 인격신으로서의 하느님이 아닌, 원리로서의 하느님이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애써 무시하자 이에 김용옥은 실학자들 가운데에도 ‘인격신으로서의 하느님’을 부정하고 ‘원리로서의 하느님’을 인정하는 부류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기함으로써 역시 종교인과 학자 사이의 서로 상충되는 부분을 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추기경은 누가 보아도 ‘우리 시대의 어른’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자리였으며 김추기경 앞에서 김용옥은 도전하는 젊은 지성의 면모보다는 시종 옆에서 겸손과 예(禮)로 배움의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다른 자리에서의 김용옥의 예의 자화자찬과 불손으로 잃은 점수를 만회했다. 김용옥은 여기서 김수환 추기경에게 고해성사를 요청하기도 했다.

『도올 김용옥』(2권)에서는 이 밖에 도올 김용옥의 1차 신드롬 때의 정황을 전달하는 6장 ‘도올 김용옥과 산공 강신표의 비교연구’, 7장 ‘한국 지성인의 고민에 관한 사례연구’를 실어 도올 신드롬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도 있었음을 상기시켰다. 특히 8장 ‘김용옥에 보내는 에세이 서신’에서 저자가 최근에 쓴 네 편의 에세이를 함께 게재함으로써 앞에서 맹렬하게 펼친 토론이 탄탄한 이론의 바탕 위에 건축된 것임을 보여주었으며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 공통의 문제와 그 해결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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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氣)’가 뭐길래?

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으며, 공학 공부를 한 사람이다. 나와 비슷한 성장 배경의 사람들이 대개들 그러하듯이 나는 무당이나 점, 사주 등을 미신이라 생각해 왔으며, `기氣' 같은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했었다. 우리 아이들의 엄마는 불교 신자 집안 출신으로 독실한 불교 신자이다. 또 본인의 말에 의하면 `기'가 강해서 웬만한 무당이나 복술인(卜術人)들은 자기 앞에서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한단다. 사실 나는 온갖 방면에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서 단학, 명상, 기공에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읽어보았고 책을 따라서 흉내도 내 보았지만, 시작한 동기가 믿음이 없이 그저 호기심 때문이었던지라 기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련기간을 가지지 못했다. 반면, 아이들 엄마는 기공이고 뭐고 할 필요도 없이 그저 잠시 정신을 집중시키고 두 손바닥을 마주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도 기를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분하고 억울하게'도 애들 엄마로부터 `기'도 느끼지 못하는 ‘하등동물’ 취급을 받아왔던 터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명상을 하기도 뭣한 일이고, 유행하는 `단丹'. `선 禪' 이런 것을 지도하는 학원엘 다니기에도 맘이 내키지 않았다. 왜냐 하면 수련 몇 달이면 '기`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아직까지도 과학적, 객관적 근거가 없는 '기`란 것에 대하여 미심쩍어 하는 불신감이 약간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UFO, 아틀란티스 등의 고대문명, 동서양 모두에 널리 퍼져있는 유령 이야기, 환생, 최면술에 의한 전생 기억 -- 이런 신비주의occult 이야기들처럼 말이다.


최근 중국에서는 <파룬궁(法輪功)>이란 기공수련회가 규모가 너무 커지다 보니 중국 당국의 견제를 받게 되어서 무더기로 체포되는 소동이 있었지만, 사실 중국에 가보면 아침마다 공원에서 기공을 연마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유명한 기공사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한 번은 호텔에서 기공사에게 척추안마를 받아 본 적도 있지만 결과는 `글세, 이 정도라면 안 하니만 못 하쟎아?' 였다. 그 기공사가 엉터리였는지 아니면 내가 기감을 느끼는 능력이 너무 떨어져서 그런지는 모르겠다만. 그렇다고 해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일억 이상의 사람들이 모두 집단최면에 걸려서 헛것을 믿고 느끼고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는 없다. 어느 주간지의 <기> 관련 특집기사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도 기공 수련 인구가 백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 사람들은 분명히 <기>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아직까지 나 같은 일반인들은 도대체 `기'가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느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을 믿지 않을 도리도 없으니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 최소한 궁금증이라도 풀어야 숨이 터질 입장이 된 것이다.


`기'의 원산지는 동양, 특히 우리 나라와 중국, 일본이지만, 서구에서도 `기'에 대한 연구는 오래되었다. 기뿐 아니라 여러 가지의 초능력 연구소들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조시대의 퇴계, 율곡 선생의 `이기론' 논쟁이 역사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오래되었고, 특히 요즘은 사회 곳곳마다 `기'가 유행이다. 곳곳에 수련도장 간판이 있고 서점에 가면 `기氣'자가 들어 있는 제목의 책들을 수십 종류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학계를 보더라도 이공학(理工學) 계통의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한국정신과학학회>가 설립되어 있어서 기 현상을 연구의 한 분야로서 다루고 있으며, 기에 대한 책도 내가 알기로 두 권이나 공동 저술(논문 모음)로 발행하였다. 그런데 대단히 죄송하지만 내가 알고 싶어하는 `기란 무엇인가?', 즉 󰡐기󰡑의 정체에 대한 이론적 근거에 대한 이야기는 책에서 찾아 볼 수가 없다. 기껏 `생체 에너지, 공간 에너지, 우주 에너지, 정보를 담은 에너지' 등의 과학적으로 받아들이기 곤란한 ‘짐작’뿐이다. `기氣', `단丹', `선禪', `명상瞑想' 이런 유(類)의 서적들을 뒤져보아도 `기'에 대하여 납득할 만한 체계적인 설명이나 과학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책마다 사람마다 제각기 설명과 주장이 다르다. 심지어 모 대학교수의 저서로서 `기과학'이라는 제명의 책도 그 내용을 보면 전혀 과학적이 아니다. 아래에 내가 인용한 일본 과학자인 마루야마 도시아끼 丸山 敏秋의 “기란 무엇인가? <氣-論語부터 신과학까지, 1986>”라는 책에도 동양 고전에 나오는 ‘기’에 대한 소개와 일반적인 기현상(氣現像)에 대한 소개뿐, 기에 대한 과학적인 이론적 근거는 없다.


내가 요구하는 ‘과학적’이란 것은 일반 과학 이론들처럼 현상과 기존의 이론을 토대로 하여 합당한 논리와 알려진 물리법칙에 의하여 만들어진 가설을 말한다. 그 가설을 확인할 수 있는 실험 결과까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표된 책들에 나와 있는 ‘기’에 대한 설명, 주장들은 그에 대한 근거가 너무나 막연하다. 그저 옛 글에 이러저러하게 나와 있으며, 기공하는 사람들의 느낌이 이러저러한 것 같다는 말뿐이다. 이래서는 ‘기’의 실재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기’란 그저 집단 내지 자기최면에 의한 가상적 효과이거나, 두뇌의 작용에 의하여 우리 신체가 신경생리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라는 판단을 반증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과학은 관찰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적 가설을 수립하고, 그 가설을 실험으로 확인(검증, 반증)하는 과정이다. 먼저 <기 현상>을 기존의 물리법칙으로서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논리적이나 실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으며, 확인할 수 없는 것은 과학적일 수 없는 것이다. 개인적인 체험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비슷한 예로서 󰡒무슨 띠는 금(쇠 金)이요 무슨 띠는 목(木)이므로, 목이 금에게 장가가면 안 된다(金克木)󰡓라는 식의 사주팔자 풀이는 `무슨 띠가 어째서 금인가?󰡒하는 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논리적, 사실적 근거가 없으므로 과학적이지 않은 것이다. 물론 사실인지의 여부를 떠나서 원리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도대체 `기'란 무엇인가? 어떤 것인가? 지구상의 수억 이상의 사람들이 믿고 또 느끼고 있다는 `기'가 어째서 이러저러한 것이리라 하는 설명조차 찾을 길이 없단 말인가? 서양 사람들이 `기'를 무시한다고 `기'분(氣分) 나빠할 처지가 못 된다. 나는 공학을 전공했던 사람이며 평소에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과학적 근거가 없으면 믿을 수 없다. 내가 요구하는 과학적인 근거란 관련 현상을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가설로서, 물리법칙에 위배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기'란 것이 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확실한 것이라면 `기'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타당한 가설 정도는 세울 수 있을 것 아닌가? 그 존재의 근원에 대한 `가설'조차 없는 것을 실재(實在)라고 믿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과학 지식들을 동원해서 `기'의 과학적 근거를 유추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가설의 수준이다. 그러나 과학 이론들과 합치되고 논리적으로 타당한 가설이라면 이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기의 존재와 작용'을 믿을 수 있다.


그런데 반신반의로서 시작된 연구가 뜻밖에도 내가 가진 과학지식과 그리고 여러 가지 초자연적 현상들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주장(종교의 교리를 감히 이렇게 표현함은 과학의 기본인 객관적 입장을 지키고자 해서이다)들'까지도 `기'에 의해서 상당부분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기'를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감히 `기'에 대한 글을 쓰기까지에 이르게 된 동기이다.






가설의 도입과 그 전개에 있어서는 `나의 생각과 추측'을 최대한 배제하고 나름대로 과학적 이론과 사실만을 그 근거로 삼고자 노력하였으며, 인용과 참고에 있어서는 그 근거가 확실한 자료와 해당 부분의 공신력이 충분히 인정된 학자들의 저술만 채택하였다.


나의 가설은 현상으로서의 ‘기’로부터 출발하지만 물질의 ‘식(識)’을 거쳐 의식과 영혼 그리고 사후세계에 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단순히 ‘기’에 대한 생각이라면 언젠가 과학이 밝혀 줄 것이라 기대하며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영혼과 사후세계에 까지 관련되는 것이라면 그럴 수가 없는 일이다. 왜냐 하면 내가 살아가고 있는 매 순간마다에 직접적으로 가장 필요한 지식인데, 내가 죽기 전까지 과학이 이 모든 것을 밝혀 내어서 내게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은 긴데 인생은 너무 짧다. 그러니 비록 ‘가설’이라 할지라도 나는 내 나름대로 가장 가능성이 크고 타당해 보이는 것을 찾아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나의 조그만 소망은 <기>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고자 하는 것이다. 과학의 발달로 `기'의 근원과 작용기전이 확실하게 밝혀지기를 바란다. 현대 과학의 진보 속도를 보면 그리 머지 않아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2. 동양 사상(東洋 思想)에서의 기氣.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기'라는 말에 대한 검토와 정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하지 않는다면 서점의 수많은 `기'에 대한 책들과 또 일상용어로서의 `기'의 다양한 의미가 서로 헛갈려서 종잡을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기'에 대해서 혼란을 느꼈던 가장 큰 이유이다. 물론 아직까지 `기의 학문`이 정립되어 있지 아니하여 사람들마다 제각기 그 사용하는 의미가 조금씩 다르므로, 나의 독단으로 내린 정의는 잘 못된 것일 염려도 있다. 다만 내가 내린 바 '기`에 대한 결론과, 통상적으로 쓰여져 내려온 '기`의 정의가 그리 다르지 않으므로 이렇게 서두에서부터 '기`의 정의를 감히 규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 전단계로서 고전(古典)에 나오는 ‘기’라는 말과 그 의미를 살펴보자.






`기'란 말은 동양문화권에만 있는 개념으로서 오래 전부터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중국에서는 이미 춘추전국 시대부터 찾아 볼 수 있다. 더 오래 된 갑골문자 시대에는 찾아 볼 수가 없으며(주;‘三’자 비슷한 모양으로서 맨 아래의 가로 ‘一’의 끝이 아래로 처져 있는 글자로서, ‘바라다’라는 의미의 글자를 ‘氣’자로 보는 견해도 있어나, 다수 학자들은 ‘걸 乞’자의 원형으로 본다), 논어(論語)에서는 식기(食氣;식욕), 사기(辭氣;말씨, 말투) 등의 예 이외에 혈기(血氣)라는 용례가 있을 뿐이다. 맹자(孟子)에는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는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말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기‘의 본산이요 종주라 일컬어지는 도가(道家)의 시조인 노자(老子)에는 ’기‘가 불과 3회밖에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춘추전국시대의 공자, 맹자, 노자 시대까지에는 ’기‘가 뚜렷한 실체나 개념으로 체계화되지 않았던 것이다.


‘기’라는 말과 개념이 정립되어 많이 사용되는 것은 장자(莊子)부터이다. 도가(道家)의 노자(老子)를 이은 장자(노자의 약 2백년 후의 인물)는 기를 만물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기본이며, 나아가서 물질세계를 구성하는 기초 원소라 생각했다. 생과 사를 기의 취산(聚散;모이고 흩어짐)으로 보는 생각이 여기서 나온다.


人之生 氣之聚也 聚則爲生 散則爲死......故曰 通天下一氣耳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기의 모임이다. 기가 모이면 생명이 되고 흩어지는 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옛부터 이르기를 천하에 ‘기’ 하나뿐이로다 한다”


후한(後漢) 시대의 왕충(王充)은 모든 것이 `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도 인간도 `기'의 변화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 생각했다. `기'를 `음(陰氣)'과 `양(陽氣)'으로 나누는 음양설과 `기'의 변화를 금, 수, 목, 화, 토의 다섯 가지로 분류 분석하는 오행설도 대략 이 무렵에 확립되었다(전국시대 말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음).






宋代에 기의 개념이 사상적으로 전개되어. 정이천(程伊川)과 주자(朱子)가 기의 변화를 가져오는 내재적 원리로서 <리(理)>를 내세워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주자는 理는 그 자체로서 형질도 없고 움직이지도 정지하지도 않지만 기의 내재적 원리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모든 사물은 理와 氣의 상호작용에 의거하며, 理는 형이상(形以上)의 통일의 원리이고 氣는 형이하(形以下), 즉 존재하고 변화하는 실체로 보았다. 당시의 성리학(性理學)에서는 음양이 서로 작용하는 원리를 <이(理)>라하고 <이(理)>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기(氣)>라 하였다. 주자(朱子)는 이선기후(理先氣後)라 하여 이가 기를 낳는다고 주장하였다. 주자의 생각은 <식이 기의 근원>이라 생각하는 나와 유사하지만, 그후의 다른 학자들의 생각은 다소 차이가 있다. 대체로 리기일원(理氣一元)을 지지하는 편이었으며, 理보다는 氣에 더 비중을 두었다. 이것은 理를 개념적인 것으로, 氣를 실재하는 우주만물의 존재와 변화의 기본적 원소로 보았기 때문이다.


氣의 배경으로서 理가 도입된 것은 흥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理는 곧 자연의 법칙, 즉 현대 과학 용어로 하자면 물리(物理)법칙이다. 서양의 과학이 법칙을 추구함으로서 현재와 같은 성과를 이룬데 비해서 동양에서는 법칙을 밝히는 일에 소홀하였고 따라서 과학의 발전이 늦어진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도 법칙의 존재와 필요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주;理라는 개념은 ‘법칙’을 넘어서 氣가 실재할 수 있는 논리적 바탕을 제공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점에서 기의 배경에는 식(識)이 있어야 한다는 나의 가설과 상통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유학(儒學)에서의 理는 識과는 차이가 있다. 실은 그 ‘차이’가 이 책의 주제라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동양사상에 있어서 氣는 “현상계의 모든 존재 또는 기능의 근원”(마루야마 도시아끼)이며, 물질의 원소, 생기(生氣), 정신기능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물질, 생명, 마음의 三界가 모두 기의 소행이고, 자연의 모든 변화는 기의 움직임(動靜)이다.


이러한 생각을 현대 물리학에 비교하면 기는 물질(소립자), 에너지와 모든 상호작용(물리학에서는 ‘힘’을 포함한 상호작용이란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을 합친 개념이다.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현대까지 이어온 생기론(生氣論)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3. 氣란 무엇인가? -- 氣의 정의(定義)






이처럼 동양의 고전(古典)에 나오는 기는 그 개념이 너무 광범위하고 포괄적이어서 그러한 상태로서는 과학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리고 기라는 개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질과 에너지는 이미 현대과학에서 거의 구명되었으며 생명력으로서의 생기(生氣) 역시 생리학과 분자생물학의 발달로 과학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전에 등장하는 넓은 ‘기’의 개념에서 아직까지 과학적으로 해명되지 아니한 부분은 무엇인가?


‘기’를 ‘氣’만이 아니라 ’理‘를 합친 개념으로서 파악하되, 거기에서 물리학적으로 규명된 물질과 에너지(힘)를 제외하면 <상호작용(변화)에 대한 의지>만 남게 된다. 근래 우리 나라의 <기철학>의 주창자인 도올 김용옥 선생은 저서 <기철학 산조>의 머릿글 “탄현술(彈弦述)”에서 <기는 물(物)의 의지(意志;꼴림, 하고자 함)>이라 정의하고 있다. 나는 김용옥의 기에 대한 정의가 가장 정확한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일상의 생활 용어로서 주로 사용하는 `기'는 `경향'이라는 의미와, 생체 작용으로서 느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생기(生氣), `살기(殺氣)', `한기(寒氣)', `끼(氣)가 있다' 등의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기'는 그냥 수동적인 `어떤 상태'가 아니라, 그 `어떤 상태'가 능동적으로 외부로 표출되거나 작용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상태의 주체'는 `생기', `살기'에서처럼 인간이나 동물 등의 생물이기도 하고 `한기'에서처럼 무생물이기도 하다. `경향'은 좀 더 상세하게는 `의지의 표출, 작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도올의 “기는 의지(꼴림, 하고자 함)”라는 말과 합치하고 있다.


이외에 `기'는 `기가 막힌다', `기운(氣運)' 등으로 생체나 우주 내의 어떤 `힘'의 흐름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과 그 때의 의미는 근본적인 것 즉 `정의'가 아니라, 2 차적인 것이라서 부(副)현상적인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어 일단 제외한다. 나중에 <생체 내의 기>에서 다시 검토될 것이다.






그렇다면 <의지;경향, 꼴림>이란 무엇인가?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의식을 <지, 의, 정>, 즉 이성, 의지, 감정으로 분석한다. 여기에 의하면 의지는 의식의 한 부분(작용)이다. 그러나 <의식>이라는 말은 그리 쉬운 말이 아니다. 과학 특히 요즘의 첨단분야인 인공지능 연구에서는 <생각할 수 있는 기계(思考機械)>의 가능성까지 인정하는 추세이며,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있는가?'하는 문제에는 아직까지 누구도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 좀 더 상세하게 검토해 볼 것이다.


일단 <의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외부의 자극에 대하여 단순한 기계(조건반사)적 반응을 하지 않을 수 있게 하며, 원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외부의 원인과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






요는 의지란 인과율에서의 원인과 결과 사이에 개입 작용하여 원하는 방향으로 결과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과 목적성 - 한마디로 `주체성'을 가진 것이다.


주의할 것은 <기 = 의지>라는 것은 아니다. 도올 선생께서도 괄호를 붙여놓았듯이, `꼴림, 하고자 함'은 `의지에서 발휘되어 나오는 것'이지 의지 그 자체는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의지`는 주체적으로 내부에서 외부로 󰡐경향; 꼴림󰡑이라는 형태로 '기`를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기계(조건반사)적'이 아니고, 외부에 대하여 `요구'를 작용시킬 수 있으려면 추가적인 어떤 `능력'이 필요하다. ‘의지’란 어떤 목적이나 의도, 즉 방향성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의 설정 내지 지향을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정보처리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맹목적인 ‘꼴림’이 되고 마는데, 맹목적이라면 ‘의도’나 ‘방향성’이 없는 것이다. 이 정보처리 능력을 인간에 비유한다면 분석, 판단하고 선택하는 지적 능력이 될 것이다. 이 <분석, 판단, 선택>은 심리학 용어로는 `이성'에 가장 가깝다. 사실에 있어서 이성은 의지의 바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과 의지와 감정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의식'의 각기 다른 면일 뿐이며, 항상 함께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므로 `의식'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의미의 의식도 너무 좁다. 부족하다. ‘기’--의지를 가질 수 있는 것으로서 우리의 육체적 본능과 무의식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의식보다 더 폭 넓은 무엇--우리 인간의 삶의 이유와 목적에 관련되는 모든 <경향>이 의지와 기의 배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에 가장 유사한 개념이 불교의 유식설(唯識說)에서 설명되고 있는 바와 같이 의식과 본능을 포함한 <식 識>이다. 나는 `식'이란 말이 마음에 든다. 식이란 ‘안다’는 뜻이며, ‘안다’는 곧 ‘구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대상과 다른 것의 차이를 알 수 있으며, 그 차이가 행동의 선택의 바탕이 되는 기초적인 판단능력을 말한다. 나는 앞으로 모든 물질--소립자들까지도 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 식에 의해서 기를 발휘한다는 내 생각의 근거를 제시할 것인 바, 그러한 내 생각은 `범식론(凡識論)'이라 할 수 있겠다. 범식론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서 범심론(汎心論)이 있다. 모든 물질에는 ‘마음’이 있다는 생각이다.


`식(識)'이란 말의 의미는 상당히 포괄적이다. 철학에서의 가장 큰 두 개의 주제인 인식론(認識論)과 실체론(實體論)의 근저에 있는 동양적 개념이 식이다.


불교(유식론)에서 말하는 식은 우리 신체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느끼는 다섯 개의 식(전오식; 눈, 귀, 코, 혀, 피부의 다섯 감각)과 의식, 말라식, 아뢰야식 등의 팔식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식’이란 글자의 의미는 ‘식별’, ‘인식’ 등의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안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안다’의 범주에는 ‘느낌(感覺)’도 포함되어 있다. ‘안다’와 ‘느낀다’를 합하면 ‘정보를 받아들인다’라는 말이다.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cybernetics 이론과 섀넌의 정보(communication) 이론 등에 의해서 1940년 대 말경에 등장한 ‘정보’는 현대 물리학과 철학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어 있다.)


동사로서의 ‘식’은 ‘정보를 받아들임‘이지만, 명사로서의 ‘식은’ ‘지식’ 그리고 ‘아뢰야식’ 등의 용례에서와 같이 ‘정보 그 자체’이다. 이로서 ‘식’은 <‘정보 그 자체’와 ‘정보를 교환(처리)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언어를 도구로서 사물을 인식할 때에 명사와 동사의 복합적 의미로 인식하는 경우는 매우 흔히 있는 일이다. 영어 단어에서 대부분의 동사는 동시에 명사이라는 것이 그 증거이다. 철학, 물리학에 있어서도 ‘질료와 형상’, ‘체(體와 용(用)’, 즉 ‘존재와 현상󰡑을 과연 분리해야 하는가 하는 논쟁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나의 `상상'의 출발점은 기였지만, 기의 성질과 이론적 근거에 대한 검토에서 기의 배경이 되는 무엇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얻은 결실이 <식識>이었다. 실제로 이 글은 <기>에 대한 글이 아니라 <식>에 대한 글이다. <기>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내가 얻은 결론은 <식>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를 연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기의 정체에 대하여 납득할만한 가설 하나 내놓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나는 <기>의 배후에 있는 <식>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전에 나는 <식> 역시 <기>처럼 하나의 애매 모호한 개념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기>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식>을 깨우치게 된 것이다. 사실 <기>의 수준에 그치는 생각이었다면 나는 굳이 이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식>의 깨우침은 나에게 많은 변화를 주었으며, 삶의 목적을 알게 해주었다. `우물 안의 개구리의 자만심'이겠지만, 나는 다른 이들이 오랜 공부와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얻은 것을 함께 나누려 하는 것이다.






이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느낌으로서 증언하는 바에 의하면 ‘기’라는 작용이 있다(實在한다).


작용으로서의 ‘기’가 있으려면 그 근원인 ‘식識’이 있어야 한다.


`기'는 `식'이 외부에 대하여 발휘하는 ‘의지(꼴림, 경향)일 것이다.>






기는 식에 의해서 발휘될 수 있다. 따라서 식은 기의 전제조건이므로 기가 있으면 식이 있어야 한다. 또한 식은 그 자체 만으로서는 존재의 의의가 없으므로(외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식이 있으면 기도 있다. 즉, 기와 식은 상호보완적이며 함께 있는 것이다. 식 그 자체는 물리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식이 물질을 포함한 외부에 작용하는 수단인 기는 물리적이라야 한다. `물리적'이라 함은 물리법칙을 따르는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 `법칙'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아니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기’의 작용은 알려진 물리법칙에 어긋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기는 물리적인 어떤 것일까?


기는 에너지가 아니다. 기는 힘도 아니다. 에너지나 힘이라면 물리적으로 측정이 가능할 것인 바, 아직 아무도 그 측정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기’를 옛 선현들의 정의와 같이 물리적인 힘, 그리고 소립자의 여러 근본적 성질을 포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물리학에서 밝혀 낸 소립자의 성질은 일단 제외하고서 ‘식’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유형의 물질이 아닌 무형의 것으로서, 에너지와 힘을 제외한다면 어떤 가능성이 남는가? 물리학 책을 다 뒤져보면 딱 한 가지가 남아 있다. 열역학 제2법칙에 나오는 엔트로피다. 엔트로피는 `무질서'라는 말로 대체되기도 하지만 가장 폭 넓은 의미로서는 `정보'의 개념이다. 기는 식이 외부 대상에 전달하는 정보일 것이다. 즉 ‘경향, 꼴림’은 외부에 정보의 형태로 작용한다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정보>는 이 책의 주 연구대상의 하나이다.


미국 네바다 대학의 <의식 연구소> 소장인 딘 대린 Dean Darin은 "The Conscious Universe” (“의식의 세계”, 도서출판 양문, 1999. 주;이 책의 영문 제명은 “의식의 세계”가 아니라 “의식을 가지고 있는 우주”라는 의미이다)에서 염력(念力)을 “의식과 사물과의 상호작용”이라 정의하면서 아울러 “실험에 의하면 염력은 의식으로부터 물질로 정보가 이동하는 현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식과 기는 어떤 형태의 실재일까? 소립자의 가장 자연스러운 존재 형태가 파동적이라는 점과, 기를 감지하는 사람들이 대개 기를 파동의 형태로 느낀다는 점에서 기도 일종의 파동과 유사하거나 같은 형태라고 보는 것이 가장 오차가 작을 것이다. 이 생각은 기, 즉 식의 작용이 홀로그래피와 같을 것이라는 가정의 근거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물리학이 밝힌 바와 같이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파동이다. 존재의 정의는 ‘차이(差異)’이다. 주변 혹은 다른 존재와의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그 차이에 의해서 주변과 다른 존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존재한다’라고 정의한다. 물론 ‘차이’와 ‘영향력’은 동일한 것이다. 파동은 순수하게 ‘차이’만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파동의 그림인 사인sin 곡선은 어떤 무엇이 주기적으로 차이를 나타내는(변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단순한 존재의 형태이다. 현대 물리학의 최첨단 이론으로서 모든 존재와 힘을 한꺼번에 해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는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도 소립자와 힘 모두를 극히 미세한 끈의 진동으로 해석하려는 이론이다. 그러나 식과 기를 수학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지금으로서는 굳이 그 `형태'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파동이든 입자든 장(場)이든.






소립자--물질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기론>은 그리스 시대부터 있어 왔던 생각이며, 유명한 철학자 베르그송 등에 의해서 주장되었고, 금세기 초에도 생물학자 한스 드리슈 등이 신봉하던 이론이었다. 그리고 <기>라는 개념 또는 그 존재는 동양에서는 보편화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기를 의지 또는 식의 외부 작용수단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생각은 찾아보기 어렵다.(이경숙 저 “마음의 여행”에는 “기는 바로 영혼의 실체인 정보의 활동이며....‘서로를 알리려는 힘’이라 나와 있다. 정신세계사, 1999, P258). 물론 본질인 식과 현상인 기는 별 개로 나누어 생각할 수도 있고 하나로 통합하여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식과 기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의식과 사후식을 이해하는 데에는 기라는 개념에 가까운 것 만으로서는 부족하며, 식이라는 기의 근원이 되는 실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기일원“이냐 ”이기이원“이냐 하는 옛 논쟁에 비유한다면 나의 생각은 ”식(이)일원론“이라 하겠다. 그러나 <기>라는 말과 개념이 이미 널리 익숙해져 있으며, 본질과 현상은 굳이 서로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글에서 앞으로 <식>과 <기>가 다소 혼용될 것임을 미리 사과 드린다


참고로, 오랫동안 생명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철학이었던 <생기론>과 나의 생각의 차이점을 말씀드리겠다. <식>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이다.


<생기론>은 물질에 생명(생기)을 부여하는 보이지 않는 무엇이 있다는 생각이다. 물질에 생기가 작용하면 생물이 되고, 작용하지 않으면 그대로 물질--무생물이라는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된 이 생각은 그 역사가 매우 길다. 이와 유사한 생각으로 물활론, 범신론, 범심론 등이 있는데, 그 중에 특히 이 책과 관련하여 인용할만한 이론으로서 띠야르 샤르댕Teilhard de Chardin(1881-1955)의 물활론이다.


띠야르 샤르댕은 프랑스의 신부였으며 철학자, 고생물학자로서, 물질과 정신(자연과 인간) 사이에 있는 간격을 설명하고 극복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새롭게 정의한다. 물리학에서 에너지는 스칼라 양, 즉 그 크기만 있고 방향성을 가지지 않는 양이다. 샤르댕은 에너지가 방향을 가진 벡터 양이라 가정한다. ‘방향성’은 앞에서의 <기 = 꼴림, 경향>이라는 정의와, 그리고 ‘기’가 방향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식이 뒷받침해야 한다는 나의 가설과 동일한 논리 위에 있다. 에너지의 ‘방향’은 곧 에너지의 ‘의지, 생기’이다. 샤르댕은 에너지(모든 물질의 존재와 그 변화의 근본은 에너지이라는 물리 기초를 염두에 두시라)에 진화를 추구하는 방향성으로서 의지, 즉 ‘기’가 있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는 나아가서 생물 그리고 인간은 이 에너지의‘정신적 벡터’의 작용 결과이며, ‘정신적 벡터’는 우주 전체에 작용하는 것이므로 우주(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최후의 완전 진화한 상태를 지향하여 나아가는(진화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모든 에너지가 집중되는 이 최종적인 상태(목표)를 <오메가 포인트>라 하였다. 이 생각은 불교에서 모든 존재가 그 불성을 찾아서 해탈(성불)하게 되는 것이라는 교리와 같은 것이다. 이 것은 나의 <식--기> 가설과 상당히 일치한다. 다만 샤르댕은 ‘정신적 벡터’의 방향, 즉 그 본질이 ‘지고(至高)의 선(善)’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것은 다소 비약이 아닐까 한다. 소립자가 가지고 있는 미소한 에너지, 그것도 그 일부분에 우주 전체의 궁극적인 목표가 이미 담겨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기에는 논리에 비약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검토는 <사후식의 세계> 편에서 다시 생각해 보겠다. 샤르댕의 <오메가 포인트> 가설은 나름대로 물활론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제안된 가설로서 현대에도 신과학 방면의 과학자들이 즐겨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가설들은 물리법칙이나 물질적인 측면에서의 관점만으로는 도저히 생명현상(생명의 탄생과 진화)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긴 가설이지만, 현대에 들어서 분자생물학의 발달로 부정되고 있다.


샤르댕을 제외한 다른 <생기론>이 물질과 생기가 독립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데 비해서 나의 생각은 모든 물질--그 근원인 소립자는 <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 그 자체는 분명히 물리적인 존재로서 물질과 분리될 수 없다. 다만 소립자와 소립자의 집합체인 생명체 사이에는 그 <식>의 수준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것은 <범심론 panpsychism>과 비슷하다 하겠다.


생기론 또는 물활론을 인정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생물의 <합목적적 성격>을 인정하는 가 아닌가에 달린 것이다. 모든 생물은 전체로서는 물론, 그 기본 단위인 하나의 세포까지도 어떤 고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목적성>이 어떻게 해서 생겨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명의 탄생과 진화의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물론 ‘목적’을 가진다는 것은 곧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논리적인 전제로 한다. 유물론적 환원주의자들의 생각은 ‘우연’과 ‘자연도태’에 의해서, 통합(전체)주의자들의 생각은 복잡계의 제2차 법칙적 특성(창발)에 의해서 생겼다는 쪽이다. 양측 공히 자신 있게 내 세울 수 있는 이론적 근거는 없다. 나의 가설은 <식>, 즉 능동적으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소립자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식>은 곧 <정보>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정보’란 말의 의미처럼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현대 과학 철학에서 말하는 바, <정보는 정보를 낳는다>라는 명제와 같이 능동적인 <정보>인 것이다. 현대 물리학의 최첨단인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상호 결합되는 접점에서는 물질의 존재, 즉 ‘객관적 실체’와 ‘정보의 초광속 전달’은 존재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상보성인 것이다. 상세한 것은 <소립자> 편에서 아인슈타인의 EPR 상상실험과 보아의 “하나의 통합체”이론, 그리고 이 둘을 결합하여 밝힌 죤 벨 Jhon Bell의 정리 및 그 실험 결과를 통해서 말씀 드리겠다.






이상이 내가 생각하는 <식과 기의 정의>이다.


이제 과학적 사실들이 위와 같은 기의 정의와 부합되고, 그리고 과학 이론들이 <기>에 대하여 알려진 여러 가지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를 검토해 보자.




'장풍도사' 의 '氣막힌' 세태 고발, 장풍 한번 쐬는데 얼마요? "돈으로 氣사고 초능력 탐내다 몸 망치고" : 네이버 블로그

'장풍도사' 의 '氣막힌' 세태 고발, 장풍 한번 쐬는데 얼마요? "돈으로 氣사고 초능력 탐내다 몸 망치고" : 네이버 블로그

<요약> - 장풍이란 실제로 자신의 몸속에서 기가 방사되는 것이다 - 고 최종현 SK 회장은 인위적인 지식호흡을 주장하다가 결국 세상을 뜨게 됐다 - 박철언 전 자민련 의원이 혼자 호흡수련을 하다가 탈장(脫腸)돼 병원에 실려간 것도 잘못된 호흡법 때문 - 기를 자주 방사하면(치료 등) 허약해진다 - 단전호흡은 단전을 딱딱하게 굳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런 호흡을 하는 것이다 - 일부 종교단체에서 신도들의 기공수련과 치료를 목적으로 유혹이 들어왔으나 거절 - 도올 김용옥선생의 부인은 도올의 머리에서 사기(탁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양운하씨의 기공자세 仙道(선도)/氣 '장풍도사' 의 '氣막힌' 세태 고발, 장풍 한번 쐬는데 얼마요? "돈으로 氣사고 초능력 탐내다 몸 망치고" 청학 2010. 9. 2. 7:56 이웃추가 0 1 玄妙之道(현묘지도) =================================================== [이색화제]'장풍 도사' 양운하의 '氣막힌' 세태 고발 "돈으로 氣사고 초능력 탐내다 몸 망치고" 고요한 동작, 명상…. 기공의 세계는 지극히 평화로워 보인다. 그러나 내면을 살펴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한국의 토속기공을 지키려 고군분투하는 '장풍도사'를 통해 기공의 이면을 들여 다 보았다. 
안영배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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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일본의 TV아사히 방송팀이 한국을 찾아왔다. 특집 프로그램인 ‘세계의 놀라운 3면기 사(三面記事)’에 출연할 주인공을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전세계에서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 으나 실재하는 사건 혹은 기이한 인물들의 이면(裏面)을 추적하는 이 팀은 한국에서 ‘장풍 도 사’란 별명을 가진 양운하(梁運河·46)씨를 취재했다. 장풍(掌風), 말 그대로 손바닥에서 바람이 나온다는 뜻이다. 중국 무협소설 같은 것에나 등장함 직한 환상적인 장면이 과연 실재하는 것일까? 서울 성산대교 부근 한강변. 강폭이 무려 1200m에 이르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한쪽에서는 양 씨가, 맞은편에서는 실험대상 5명이 서 있었다. 양씨는 특유의 자세를 취해 단전호흡(丹田呼吸) 으로 몸속의 기를 손바닥에 모은 뒤 장풍을 쏘았다. 30초 후 한 사람이 훌떡 뒤로 넘어가더니,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나머지 4명 모두 쓰러져버렸다. 실험 대상자들은 각기 “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가슴을 미는 것을 느꼈 다” “뒤에서 누군가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고 느낀 점을 말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에게 일어난 현상이 잘 믿어지지 않는 듯했다. 양씨의 설명에 의하면 손에서 바람이 나간다는 장풍은 호사가들이 지어낸 말일 뿐, 실제로는 자신의 몸에서 기(氣)가 방사(放射)된다는 것. 바람이 아닌 기여서 거리에 구애를 받지 않고 상 대방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운기방사(運氣放射)라고 표현한다. 사상 초유의 실험에 양씨가 거뜬히 성공한 것을 확인한 방송MC 키쿠다(菊田)씨 역시 할 말을 잊은 듯 멍하니 서 있더니 감격의 눈물을 터뜨렸다. 양씨에 대해 뻣뻣한 태도를 유지하던 그녀 의 허리가 90도로 꺾어졌다. 일본 방송팀은 이 실험에 앞서 양씨의 장풍을 회의적인 시각에서 검증해보려는 듯했다. 일본 스탭 중 건장한 20대 청년이 직접 장풍을 맞아보기도 했고, 양씨가 최면으로 사람을 조종할 수 도 있다고 가정, 실험자의 등 뒤에서 장풍으로 잡아당기는 테스트도 거친 터였다. 심지어 기가 통하는 생명체는 다 교감된다는 양씨의 말에 한국의 경찰견을 수소문, 개 실험까지 했다. 조련 사가 우수한 훈련 능력을 보이는 셰퍼드에게 꼼짝 말고 서 있으라고 지시한 뒤, 양씨가 장풍을 쏘자 개가 힘없이 풀썩 고꾸라졌던 것. 0 1 玄妙之道(현묘지도) 지난 3월28일 이런 장면이 일본에서 방영된 이후 양씨는 시청자들 뿐만 아니라 일본 기공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아직까지 일본에서는 양씨와 견줄 만한 기공 고수가 보이지 않기 때문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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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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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초 우리 고유의 기체조인 ‘학춤기공’을 보급하고 있는 정준씨(‘하루 10분이면 기가 살아난 다’의 저자, 동아일보사 간)가 전화를 걸어왔다. 오래 전 지리산에서 수련하던 양씨를 만난 이후 지금까지 친분을 나눠오고 있다는 그는 기자에게 안타깝다는 듯이 하소연했다. “양선생이 일본으로 도망간답니다. 그 사람 없으면 그나마 간신히 지탱해오던 한국 토속기공은 맥이 끊어지고 말아요.” 자초지종은 이러하다. 진작부터 양씨의 존재를 알고 있던 재일동포 사회에서 이번 일본 방송 출연을 계기로 양씨를 ‘모셔가려는’ 교섭을 해왔다. 잘 대접받지도 못하는 한국에서 기공 실력 을 썩히지 말고 아예 일본으로 오라는 제의였다. 주택에 넉넉한 생활비까지 제공하겠다는 달콤 한 유혹과 함께. 양씨 역시 91년 속세에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이후 지금까지의 서울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제주도와 춘천 등지를 떠돌아다니던 참에 일본측 제의가 와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기자는 양씨를 만나보기로 했다. 마침 그는 춘천 근방의 한적한 산장에서 며칠 쉬고 있는 중이 라고 했다. 서울에서 가평을 조금 지난 길목에서 외진 곳으로 한창 들어갔더니 산기슭에 아담 한 카페(굿모닝 베트남)가 자리잡고 있었다. 80년이 넘은 초가집을 원형대로 복원해 만든 이 카 페 한쪽에는 양씨가 머물다 갈 수 있도록 방이 마련돼 있었다. 카페 주인 김진승씨(48)는 양씨 팬인 듯 양씨의 초상화를 카페 마루에 전시해두고 있었다. 제주 갈옷 차림으로 한가로이 마당 을 거닐고 있던 양씨가 미소로 맞았다. ―서울에는 잘 안 올라옵니까. 서울 생활이 싫어졌다는 얘기도 들리던데? “꼭 필요한 일이 있어서 서울 가는 것 외에는 가급적 피하려 합니다. 서울 공기가 답답하고 사 람들도 그렇고…. 이제 한 15만명에게 기공을 보급했으니 더 이상 운기방사 같은 것을 선보일 필요도 없잖아요.” 사실 그는 기공계 뿐만 아니라 국내 방송가에서도 유명한 ‘탤런트’다. 장풍, 즉 운기방사는 시청 자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기 실험이기 때문에 TV 제작 팀들이 기 관련 프로그램을 제 작할 경우 눈요깃감으로 좋은 그를 빠트리지 않는다. 하도 많이 TV에 출연해 ‘양PD’라는 별명 까지 붙었을 정도다. 뿐만 아니라 그가 국내 단체 혹은 기업체에 출강, 기공을 가르친 사람만도 수를 헤아릴 수 없 다. 그의 기공지도를 받은 유명인사도 적지 않다. 이종찬 전 국가안전기획부장, 박봉환 전 동자 부 장관, 정호선 국민회의 의원, 도올 김용옥 교수, 윤병철 하나은행 회장, 김현종 WTO 법률자 0 1 玄妙之道(현묘지도) 문관, 표재순 세종문화회관 이사장, 타악기 연주가 김대환씨, 국악인 김영동씨, 화가 남유소씨, 가수 이선희· 장사익·이덕진·김하정씨 등 각 방면의 사람들이 그와 인연을 맺었다. 언뜻 보면 그는 매우 성공한 기공사다. 명예와 함께 부(富)도 덩달아 따랐을 터이고…. 그러나 그의 속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양복 입은 빈털터리 신사쯤으로 그를 묘사한다. 그는 그 흔한 기공도장 하나 없이 제자의 사무실 한 구석에 연락사무소를 차려놓고 이곳저곳 떠돌아 다니는 신세라는 것. “제가 연예인 비슷하게 TV에 자주 출현해 운기방사 시범을 한 건 재주 자랑해 돈 벌자던 게 아 닙니다. 우리 토속기공을 세상에 전파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기공 하면 중국이 종주국인 줄만 알고 떠받드는 세태에, 우리 몸에 맞는 우리 기공의 참 면모를 보여주고 주체성을 가지자는 것 이었지요. 그런데 참 어려워요. 사람들에게 좋은 것 가르쳐줘도 자꾸 엉뚱한 것에 빠져 회의가 들고, 세상 민심이란 게 그런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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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풍 한번 쐬는데 얼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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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하는 세상 민심이란 어떤 것일까. 아마도 이것이 그가 ‘출(出)서울’ 혹은 ‘탈(脫)한국’하려 는 것과 연결되는 대목일 것이다. 그의 9년간 속세 경험을 통해 요즘 난무하고 있는 기공세계 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얼마 전 양씨는 자신의 제자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40대 여성이 토속기공을 배워보 겠다는 열정이 대단해 제자로 받아들였는데, 입문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기공 도장(道場)을 차렸다는 것이다. “스승한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도장 차리는 제자는 세상 천지에 없어요. 도장이 무슨 학원이라 도 됩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기초도 떼지 않은 상태로 사람들을 가르치겠다는 것인데, 그게 사 이비 기공사와 뭐가 다르겠습니까. 제가 참 기공을 전수하겠다고 그렇게 노력하는데도 제자라 는 사람은 기공을 돈벌이가 되는 장사쯤으로 생각하고 쉽게 덤벼드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팠어 요. 제자가 그러니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요. 그래서 다시는 제자를 받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양씨는 돈이면 뭐든지 다 된다고 생각하는 물질지향형 인간이 너무 많다고 한탄한다. 사회적으 로 이름이 알려진 K변호사가 어느날 양씨를 찾아왔다. 그는 몸이 불편하다고 호소하면서 이렇 게 말했다. “장풍 한번 쐬는 데 얼마면 되겠소?” 양씨는 몸이 아파도 움직일 수 있는 상태라면 직접 기를 배워 스스로 하는 게 가장 효과가 좋다 고 일러주었다. 그래도 그는 막무가내로 두툼한 돈봉투를 내놓으며 기를 넣어달라고 했다. 자존 심이 상한 양씨가 이를 거부하자 K변호사는 “다른 기공사는 돈만 주면 수도꼭지에서 물 틀어주 듯이 기를 넣어준다고 하는데 당신은 왜 그리 뻣뻣하냐”고 하면서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가버 렸다. 0 1 玄妙之道(현묘지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양씨는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교양있다고들 하는 계층에서 오히려 물 질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태도가 많이 보인다고 한탄한다. 그런 경향은 기를 수용하는 쪽 뿐만 아니라 기를 보급하는 쪽에서도 적잖다. 일부 기공사들이 기공에 관심 있는 수련자들을 모아 몸안에 소주천(小周天;인체의 입맥과 독맥이 소통되는 운 기 현상)을 형성시켜주는데 얼마, 대주천(大周天;온몸이 소통되는 운기 현상)을 이루는 데는 얼마 하는 식으로 기를 상거래(商去來) 상품으로 취급한다는 것. 물론 양씨는 그런 행위는 정도 (正道)가 아니며 실제로 효과도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돈으로 기공을 사려는 시도는 놀랍게도 종교계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일부 종교단체에서 양씨 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영입’을 교섭해오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얼마전 한 종교단체의 핵심 간부가 어마어마한 스카우트 금액과 함께 부교주 자리를 제시하면서 자기 교단에서 신도들에 게 기를 가르치고 환자를 치료하는 일을 해달라고 부탁해왔다. 또 신도가 1만명 정도 되는 어느 절의 소유주가 50평짜리 아파트에, 기사 딸린 차에, 한달 몇백 만원의 용돈을 제시하며 영입작전을 편 적도 있다. 심지어 양씨의 아내한테까지 ‘공작’을 펴 아 내가 유혹을 받기도 했지만 양씨는 거절했다고 한다.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면 그 종교의 신도가 돼야 하고 교주의 권능으로 능력이 생겼다고 선전 해야 합니다. 실제로 능력 있는 기공사들을 상대로 종교단체에서 섭외가 들어오는 경우가 없지 않아요. 종교단체는 그렇게 함으로써 더 많은 신도를 확보할 수 있으니까 손해볼 게 없을 거고 요. 그 외에 저를 데리고 장사해보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은 부지기수예요. 참으로 기가 막힌 세 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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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속기공과 중국기공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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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씨는 한국의 기공계가 이렇게 혼탁해진 것은 일차적으로 한국의 기공사들에게 책임이 있겠 지만, 시점을 따져보면 중국기공이 무분별하게 수입되고 엉터리 기공사들이 난무하면서부터라 고 말한다. 중국에 1주일 정도 다녀온 사람이 어느날 느닷없이 ‘기공 대사(大師)’로 변신해 있다 는 것. 문제는 외국 기공이나 명상을 배워온 사람들이 그것이 제일인 양 토속기공을 우습게 여기고, 또 기공을 배우려 하는 한국사람들도 외국 것에 혹하는 현실이다. 양씨가 토속기공이 중국기공 에 뒤떨어지지 않는, 그리고 한국인의 체질에 맞는 기공이라고 아무리 외치고 행동으로 보여줘 도 마이동풍인 세상이 그저 안타깝다고 말한다. “자랑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 한 저처럼 운기방사를 하는 사람이 중국, 일본, 전세계 어디에도 없어요. 제가 TV에 나와 운기방사를 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직접 기를 체험케 해 서 기공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닫도록 유도하는 거지요.” 반면에 중국 기공사들이 상대방에게 기를 보낸다고 하는 것은 주로 ‘의념(意念) 방사’ 즉 생각으 로 상대방의 기를 유도하는 능력이라는 게 양씨의 주장. 따라서 의념방사는 기공사가 몸안의 0 1 玄妙之道(현묘지도) 기를 운행시켜 실제로 기를 보내는 운기 방사와는 차원이 다르며, 엄밀히 말해서 염력 혹은 텔 레파시 등 초현실 세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양씨는 92년에 중국 흑룡강성 아성(阿城)시 TV방송국 초청으로 중국현지에서 운기방사 공개시 범을 했다. 한국 기공사로서는 최초로 토속기공을 중국에 선보이는 무대였다. 그는 운기방사 실 험 뿐 아니라 기공마취 실험도 보여줘 중국인들은 그를 ‘기공대사’라도 칭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세 명의 중국 기공사들을 만나 ‘대결’도 벌였다. 거기서 양씨가 중국 기공사 세 명 모 두를 한꺼번에 넘어뜨리는 장면이 TV에 방영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때 그 기공사들은 의념방사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자기들이 의념을 보낼 테니까 나더러 기가 들어온다, 들어온다 생각하고 있으래요. 그래서 그건 기공이 아닌 최면이니까, 의념이니 뭐니 따지지 말고 거꾸로 내가 직접 기를 보낼 테니 받아보라고 했지요. 그렇게 옥신각신하다가 양 쪽에서 동시에 기를 한번 쏴보자고 합의했지요. 그때는 내가 손바닥이 아닌 인당(이마의 혈)으 로 기를 보냈는데, 상대방이 한 세바퀴 반 굴러 나자빠지더군요. 사실 보통 사람보다 기에 민감 한 사람들이 제 기를 더 잘 받아들이지요. 나중에는 중국 기공사들이 한수 가르쳐주지 않으면 중국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말라고 농담성 협박까지 하더군요.” 양씨는 의념방사를 위주로 하는 중국기공 때문에 일반인들이 기공 하면 정신집중 혹은 생각 정 도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신체에 매우 위험한 현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경 고한다.  -------------------------------------------------------------------------------- 
기 배우다 몸버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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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는 중국기공을 하는 조선족 초능력자가 찾아온 적이 있어요. 투시능력이 있다고 하 기에 내가 저쪽 방에 가 있을 테니 투시해보라고 하니까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다고 말하 는 거예요. 가만히 그를 살펴보니까 머리에 온신경을 집중하는 투시능력을 너무 남용해서 눈이 시쳇말로 노랗다 못해 동태눈이더라구요. 얼굴도 노래지고 있구요. ‘너는 지금 속이 썩어들어가 는 것을 알고 있느냐’고 말했더니 그렇다고 인정해요. 돈 벌려고 그 짓 더하다간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게 되니까 그만두라고 충고해 보냈습니다.” 양씨의 설명에 의하면 의념, 즉 생각으로 기를 보내는 것 등에 집중하다보면 머리가 상기돼 정 신질환 등 큰 부작용이 생긴다고 한다. 이른바 ‘주화입마(走火入魔)’라는 현상이 그것이다. 실제로 경희대 한방병원 기공진료실의 신용철교수는 “기공을 잘못 배워 기공병에 걸려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의 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신경정신과 의사인 김영우박사 역시 “최근들어 머리개발 수련을 하다가 환각, 환시, 환청 증 이상 증세를 느껴 찾아오는 사람 들이 부쩍 늘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양씨의 보충 설명. “기공을 굳이 현대의학적으로 설명해보면, 제가 하는 토속기공은 호흡에 의해 혈관운동반사가 일어나는 개념이라고 하면 의념기공은 생각이나 명상에 의해 신경운동반사가 일어나는 거예 요. 그러니까 의념 기공은 말 그대로 온몸의 신경회로가 뇌로 집중하게 됩니다. 이때 신경에 과 도한 부하가 생길 경우 상기병, 즉 노이로제 신경증 같은 병이 생기는 것이지요. 0 1 玄妙之道(현묘지도) 저한테도 이런 상기병 환자들이 많이 찾아와요. 평소에는 제 말을 믿지 않더니 다른 데 가서 몸 이 고장나니까 저를 찾더라구요. 그때는 이미 늦은 상태인데도 안 고쳐준다고 떼를 써요. 속으 로 참 어리석은 중생이로구나 생각할밖에….” ―사실 중생은 누가 진짜이고 가짜 기공사인지 잘 모르니까 잘못된 길을 갈 수도 있는 것 아닙 니까? “ 그게 참 문제이긴 해요. 그러나 몇 가지 살펴볼 단서가 있어요. 기공하는 사람들은 눈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눈에서 기운이 느껴져야지 눈이 풀린 사람, 죽어 있는 사람들은 의심할 필요가 있어요. 이게 좀 추상적인 것 같으면 상대방의 손톱을 한번 보세요. 손톱 색깔이 맑으면서 빨가 스름해야 하고 반달이 있어야 운기(運氣)가 제대로 되는 사람입니다(그러면서 양씨는 자신의 손톱을 보여줌). 서양 의사들도 마취주사를 놓은 뒤 환자가 깨어나는 것을 환자의 손톱 색깔로 판단해요. 중국 기공사들도 저를 보더니 ‘이 자가 가짜가 아닌가’하고 손톱부터 살펴보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공을 구름잡는 식으로, 신비한 현상인 양 유도하는 사람들을 특히 경계해 야 합니다.”    -------------------------------------------------------------------------------- 
단전호흡법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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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씨는 인체에 대한 현대의학적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기공을 제대로, 그리고 빨리 배우며 또 한 사이비들에게 속지 않는 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기가 인체 에너지이며, 인체 에너지 를 관리하는 이른바 ‘기 테크’가 기공임을 전제로 말한다. 다음은 인체와 기공에 대한 양씨의 현 대의학적 해석. 참고로 양씨는 생활체육지도자로 운동생리학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우리 몸은 크게 중추신경의 조절을 받는 수의근(隨意筋)과 자율신경의 조절을 받는 불수의근 (不隨意筋)으로 구성돼 있다. 수의근은 다시 운동 등 빠른 동작을 할 때 작용하는 속근(速筋), 평 상시 움직일 때 작용하는 중간근(中間筋), 그리고 거의 퇴화되다시피한 지근(遲筋)으로 구성돼 있다. 바로 여기서 기공의 몸동작이 여느 운동과는 달리 몸에서 땀이 빗물처럼 흘러도 숨이 차지 않 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아주 느린 동작에서 사용되는,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퇴화 돼 있는 지근(遲筋)을 단련하기 때문이다. 동양의학적 개념으로 볼 때 속근이 양(陽)운동이라면 지근은 음(陰)운동이다. 육상, 테니스 등 속근을 사용하면 나중에 숨이 차 헉헉거리게 된다. 이때 활성산소가 다량 배출되는데, 이것이 세포의 노화를 촉진한다. 스포츠 스타들이 단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면 기공운동으로 지 근을 사용하면 퇴화된 근육에 산소를 공급하므로 인체를 건강하게 해준다. 또 아무리 운동을 많이 해도 숨이 차지 않는다. 한편 자율신경 관할 하에 있는 불수의근은 우리 인체 중 오장육부에 집중돼 있다. 특히 기공 수 련에서 중요시 하는 단전(丹田;배꼽 아래의 중요 혈) 부위는 대장이 감싸고 있다. 이 부위는 당 연히 불수의근이기 때문에 대뇌의 명령이 잘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의념기공법으로 대뇌에서 단전에 명령해도 아랫배가 작동해 단전이 따뜻해지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다 보면 단전이 아 0 1 玄妙之道(현묘지도) 닌 머리가 상기돼 머리에 띠를 두른 것 같다거나 가슴이 답답하다거나 하는 여러 가지 장애가 올 수 있다. 반면 우리 고유의 단전호흡법은 말 그대로 아랫배 호흡(복식호흡이 아님)을 통해 단전 부위를 개발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훈련을 통해 단전이 열리면 그 다음부터 단전이 자동적으로 알아서 호흡을 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복식호흡을 단전호흡으로 착각하거나 자연스럽지 못한, 인위적인 호흡으로 몸 을 망치는 경우도 적잖다는 점. “제가 어릴 적 산에서 공부할 때 가짜 도사를 만나 그 밑에서 3년간 지식호흡(止息呼吸:들숨 과 날숨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호흡)을 하다가 장염에 걸리는 등 몸이 망가진 경험이 있어요. 그걸 회복하느라 무척 고생했어요. 연전에 어떤 스님을 만났더니 ‘나는 단전호흡을 해 한 뼘을 쌓았다’고 말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스님 단전호흡은 뭘 쌓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단전으로 호흡하는 겁니다’ 했더니 버럭 화를 내면서 ‘무슨 소리냐. 내 배를 만져봐라. 이렇게 단전이 있 는 아랫배가 딱딱해져 있지 않으냐’고 합디다. 이미 그 스님은 내가 잘못 배웠던 것처럼 몸이 아주 망가져 있더군요.” 양씨는 단전호흡 수련을 열심히 하던 선경의 최종현 회장 역시 인위적인 지식호흡을 주장하다 가 결국 세상을 뜨게 됐다고 말했다. 또 몇해 전 박철언 자민련 의원이 아무개가 쓴 단전호흡법 책을 가지고 혼자 호흡수련을 하다가 탈장(脫腸)돼 병원에 실려간 것도 역시 잘못된 호흡법 때 문이라고 했다. “호흡은 여하튼 자연스럽게, 그러니까 들숨보다는 날숨을 약간 길게 하는 정도가 제일 좋습니 다. 거꾸로 날숨보다 들숨을 길게 하다보면 장기에 물혹이 생기는 등 안 좋은 현상이 발생하기 십상이죠. 또 단전으로 개발하기 위한 호흡으로는 우리식으로 표현해 ‘두레박식 호흡’을 들 수 있어요. 우물에 두레박을 툭 던지죠(날숨). 그러면 우물물에 파장이 일죠(단전 자극). 그 다음에 두레박을 끌어올리고(들숨), 다시 툭 놔버리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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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막힌 사회 지도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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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씨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기공을 배우면 자신의 건강 뿐 아니라 사회 전체를 밝게 이끌어 갈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도층 인사들이 양씨가 보기엔 ‘기가 꽉 막혀’ 보 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다. 대표적인 예로 양씨는 ‘기 철학자’인 도올 김용옥씨(전 고려대 교수)를 든다. 김용옥씨는 몇해 전 양씨의 운기방사, 즉 장풍 맛을 직접 체험해본 후 자신의 저서에다 ‘그대는 나에게 기를 느끼게 해주었소’라는 글을 적은 뒤 양씨에게 책을 선물할 정도로 감격했다. 그러 나 기 철학을 한다는 도올 자신은 정작 당시에 기가 너무 막혀 있었다는 것. “도올 선생의 몸이 너무 막혀 있기에 기를 좀 넣어주었더니 그 머리에서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 어올라요. 그때 도올선생의 부인하고, 가수 이선희씨 부부가 다 함께 있으면서 그걸 목격했어 요. 도울선생 부인이 ‘아니 당신 담배도 안 피우는데 머리에서 웬 연기가 나느냐’고 깜짝 놀랐지 0 1 玄妙之道(현묘지도) 요. 그 양반은 하도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지 사기(邪氣)가 빠져나가는 것이 눈으로 보일 정도 였죠. 후에 그 양반한테는 사기를 빼는 방법을 가르쳐드렸습니다.” 반면에 기공예찬론자인 하나은행의 윤병철 회장은 양씨의 평가에 의하면 상당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윤회장은 현재 2m 정도 운기방사가 가능할 정도고, 지금도 열심히 수련하고 있다 는 것. 그러나 양씨를 거쳐간 대부분의 지도층 인사들은 시간이 없고, 배우기 힘들다는 이유로 그저 기를 받는 수준에서 멈추고 만다고 한다. 그러나 토속기공의 장점이 시간이 없는 사람들도 잠 깐 짬을 내서 쉽게 배울 수 있다는 것. 양씨는 우리 생활주변에서 쉽게 목격되던 도리깨질, 물레돌리기, 노젓기, 썰매타기, 상모돌리기 등 전래 몸짓이야말로 기운동의 결정체라고 주장한다. “농부들은 하루종일 벼를 베고 도리깨질을 해도 지칠 줄 모릅니다.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천 천히 일하는 사이 자연스럽게 팔과 다리, 허리 운동이 이루어지기 때문이죠. 여기에 천천히 호 흡만 맞춰주면 그 자체가 완벽한 기공이에요. 바로 이런 것이 신토불이 기공체조고 우리 몸에 맞는 겁니다. 사람들이 외국것에 너무 사로잡혀 있는지 유치하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직접 해 보세요. 몰라보게 건강해질 테니까.” 이를 테면 ▲도리깨질 동작은 관절염과 변비 및 몸통의 군살을 제거하는 효과가 있고 ▲물레 돌리기는 어깨 군살 제거 ▲노젓기는 간기능 강화 및 요통에 탁월한 효과가 있고 ▲썰매타기 동작은 견비통 및 슬관절 질환에 효과가 있으며 ▲상모돌리기는 만성 두통과 목디스크 질환에 좋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그가 현재 집중적으로 보급하는 5형기공(곰, 사슴, 학, 호랑이, 잠자리를 형상화한 동 작)은 온갖 만성적 질환을 치료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고 한다. 그는 현재 서울 운니동의 정신세계문화원에서 일주일에 한번 5형기공 등 토속기공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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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 44단의 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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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굿모닝 베트남’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고 허리도 뻐근했다. 피곤도 풀 겸 양씨로부터 운기방사를 직접 체험해보고 싶다고 요청했다. 즉석에서 실험이 벌어 졌다. 기자 역시 장풍을 맞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 몸에 맥이 빠져 주저앉고 말았다. 양씨는 맥 이 풀리는 것은 막혔던 기혈이 풀어지는 것이니까 좋은 현상이라고 ‘위로’했다. 실제로 양씨의 장풍을 맞고 오래 견디는 사람일수록 기가 많이 막혀 있다는 설명. ―그런데 일본에 진짜 가긴 갑니까?(그때까지 양씨는 그의 친구인 정준씨가 기자에게 한 말을 모르고 있던 상태였다) “(깜짝 놀라며) 허허, 사람 마음을 투시하는 재주가 있네요…. 일본 뿐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 스 위스 등지에 있는 동포들과 제자들이 한국에서는 할 만큼 했으니 자기가 사는 나라로 들어오라 고 해요. 지금 고민중입니다. 토속기공이 한국에서 대접받지 못하니까 외국에서 빛을 봐 다시 0 1 玄妙之道(현묘지도) 한국으로 역수입하게 하는 것이 좋은지, 끝까지 한국에 남아 토속기공을 보급하는 것이 좋은지 잘 판단이 안 서네요. 한국에는 이미 어느 정도 수준에 있는 제자들도 몇 있긴 한데… “ 사실 제자들 중 곽치산씨(척추건강센터 원장), 윤창대씨(LG화재 근무), 김신환씨 등 5~6명은 상 당한 수준의 운기방사 능력이 있다고 한다. ―그 정도 실력이면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지 않아요? “적당히 타협하기로 마음 먹는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제 천성이 그렇지를 못하고, 우 리나라 사람들의 쉽게 끓고 쉽게 식은 ‘냄비 기질’이 마땅치가 않아요. 원래는 그런 천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데…. 게다가 처자식이 딸린 생활인이라는 신분도 무시할 순 없고.” 양씨는 기공이 아닌 무도인으로서의 경력만으로도 생활방편을 삼을 수 있다. 공인된 것만 따져 도 태권도 5단, 불무도 7단, 활기도 7단, 합기도 7단, 십팔기 5단, 쿵푸 6단, 활법 7단 등 모두 44 단이다. 기공을 하게 된 인연도 어린 시절부터 닦은 무술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기공의 길을 걸은 이상 다시 무도의 길로 생활비를 벌 생각은 없다고 한다. 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아직도 한국에 미련이 남아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한 국을 떠나는 건 도피가 아닐까요?”하는 말로 헤어지는 그의 뒤통수를 간지럽게 했다

[[도와 하나되는 삶* ** - 도교의 이상적 인간상 이용주 (2001)

ReligionandCulture_v7_283.pdf

도와 하나되는 삶* **

- 도교의 이상적 인간상 이 용 주*” (2001)

I. 도의 인간학적 함의

Ⅱ. 도와 하나되는 몸짓(도교수행)

1.   수행으로서의 4無爲'(n°n action)

2.   (,)과 마음(,)의 문제

3.   기의 수행과精

4.   수행과 성스러운 시간:生氣와死氣

5.氣수행의 목표로서 '″

III. 신선: 불사의 도교적 의미


이 논문은 20%년도 한국학술진홍재단의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 본 논문의 제목으로 선택한 '도와 하나되는 삶與道合-')『회남자』에 나오는 표 현으되 도교의 이상 인간을 내용적으로 기장 잘 드러낸다도교에서는 도를 체득한 이상 상태를 표현할 때에 '得道혹은 '體道라는 말을 가장 널리 시용하고 있다그리고道를 얻은 사람을 가리기는 표현은道弋眞人神f,神人至人등 다양하다.


***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1  . 도의 인간학적 함의

''는 학파와 종파의 차이를 떠나 중국 종교의 이상적 인간상을 묘사할 때 가 장 먼저 이해해야 할 근원적인 개념이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중국 종교는 거의 예외 없이 도를 이해하거나 아니면 그 도를 체득하여 도와 하나되는 삶을 사는 인간을 이상적 인간으로 제시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도교 전통은 몸의 수련을 통 해 도와 하나되는 몸짓을 획득하는得道를 종교의 궁극적 목표로서 제시하고 있 기 때문에, 도와 하나되는 삶을 이야기할 경우 도교를 가장 먼저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道 그 자체의 개념적 원리적 성격에 관해서는 이미 수많은 논지-들이 다양한 관 점에서 엄청난 양의 글을 써 놓았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반복하는 것 자체가 무 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중국 문호를 가장 중국 문화답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도교에서 지향히는 이상적 인간상을 탐구하기 위한 전제로 서,道에 대해 필요한 한에서 간단하게 서술할 필요가 있다.


문자학적 의미에서 도는 행위와 사상의 통일체를 지칭하는 개념 기호라고 이해 할 수 있다. , 도는 동작 혹은 행위를 나타내는 요소()와 사고 혹은 생각 나 아가 사람 그 자체를 나타내는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그 두 요소로 구성된 도의 본래 의미는 길, 즉 사람이 다니는 길이다.『설문해자』에서는도는 사람이 다니는 길이다. 그것은 일정한 방향을 향해 꽫어있다”(道所行道也-達謂之道) 라고道의 문자적 함의(字意`)를 설명하고 있다.道즉 길은 일정한 방향-을 향해 꽫어 있어서, 사람을 그 방향으로 인도하는 지표로서 역할을 한다는 뜻이 그의 설 명 속에 숨어 있다. 중국의 고대 문헌에서 도는 많은 경우 사상적 의미가 전혀 담 기지 않은 단순한 '통행로라는 의미에서 그 말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설문』에서 이미 어느 정도 암시되어 있었던 것처럼,道는 사람 혹은 사물 나아가 자연 의 존재 방식을 결정히는 규율 혹은 원리라는 뜻으로 의미가 확대된다.道개념의 의미 확대는 춘추 시대에 와서 거의 일반화되는 경향을 보이 는데, “하늘의 도는 멀괴 사람의 도는 가깝다. 따라서 인간과 멀리 떨어진 하늘에 서 발생하는 천문 현상의 변화를 근거로 인간사의 길흉 회복을 예측하는 것은 불 기능하다."(天道遠人道미,非所及也何以魃.Ⅹ『좌전』소공18)리는鄭子産의 발언은 그러한 경향을 대표하는例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道는 자연과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존재를 지배하는 규범이자 원리라고 보는 이러한 확대된 도 관념 은 노자와 장자, 그리고 공자 등 고대 철인들을 거치면서 그 내용이 더욱 풍부해 졌다.

특히 본론에서 문제삼는 도교(도가)의 도론은 고대의 철인들이 정립한 도의 규정을 바탕으로 전개된 것이며, 그러한 도론에 근거하여 자연의 규율이자 인 간 존재의 근거가 되는 도를 체득하여 도와 하나가 되는 삶을 완성하고가 하는 도교적 양생 수양론이 수립되기에 이른다. 도와 수양론과의 결합을 이해하기 위 해 도교(7b의 도론의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도교적 道의 의미를 가장 포괄적으로 정립한 문서는 말할 필요도 없이『道德經』이다.1)

l)『도덕경』의 저자가 누구인가의 문제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학계의 토론에도 불구하 괴 그 문서의 저지를 확정旨는 것은 어려운 것 같다. 일단『도덕경』의 저자가 '노자' 라고 하는『사기의 지적은 그 자체가 이미 역사적 시걸로서 신빙성이 결여되어 있 다.『사기에 묘시된 '노자'의 전기 자체가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신화적인 성격이 종합하면서 우주 만물의 근거가 되는 형이상학적 근원이 '도라고 규정한다.道의 여러 다양한 성격은 근본적으로『도덕경』이 정립한 도론에서 파생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개관해 볼 때,『도덕경』의 도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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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은 이념적으로 확대된道에 관한 고대 중국의 다양한 담론을

  • 첫째, 도는 천지만물의 근원이다. “도는 만물의 비밀을 담고 있다”(道者,萬物之奧. 62장)라든가, “도는 만물의 으뜸인 것 같다"(似萬物之宗) 혹은 “상제보다 앞서 존재言는 듯하다"(象帝之先4장) 등은 도의 근원성을 표현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 둘째, 도는 다른 창조자의 창조 행위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
  • 셋째, 도는 무와 유라는 존재의 근본 형식을 통일히는 근원적 통합의 원리이다.
  • 따라서 도는 있음과 없음, 생성과 소멸, 존재와 비존재, 삶과 죽음 등등의 대립적 힘을 통합하며, 그 자신은 생성과 소멸을 뛰어 넘는 근원성을 지니고 있다.
  • 넷째, 존재의 근원인 도는 인간의 감각적 인식을 초월한다. 인간의 인식은 근본 적으로 상대적이며, 기호(名)를 통해서만 사물을 파악한다. 그러나 도는 그런 상대 성을 넘어서 있으며, 모든 기호적 제약을 벗어나 있다. “도를 이름 불여 말할 수 있으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든지, “도는 항상 이름을 넘어 서 있다"(道常無各32장) 등은 개념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도의 절대성을 표현하 는 말들이다.
  • 다섯째, 무명이고 무형인 도는 없는 듯 하지만, 사실 모든 것의 생성과 창조의 근원이다.『도덕경』에서 도는 무한하며 무형이괴 생성하고 소멸히는 존재의 상대 성을 초월해 있는 절대적 생명의 원리로 설정되어 있다.

강한 기록이다. 그것은 이미 신화화된 노자의 전기(仙話)에 불과하다. 여기서는『도 덕경』의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괴『도덕경』의道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신선화된 노자의 전기가 형성되는 과정, 그리고 그 신선화된 노자가 도교 적 지평 안으로 편입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요시오카 요시토요(~의『道敎E 佛敎1(國書刊行會, 1959) 및 쿠스야마 하루키(l″)의『老子傳說7)硏究』(創文弘1979) 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2)道의 성격과 투정을 논하는 수많은 연구 성과가 쌓여 있지만, -『老子今注今譯』(중화서국)의「서론」부분이 도의 성격을 종합적으로 잘 개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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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적 수양론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사실은 도가 단순히 우주의 개관적 근원일뿐 아니라인간의 구체적인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한편,『도덕 장에서는道의 근원성과 본래성을 표현하기 위해 자연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도는 무엇보다는 '자연그 자체라는 함의를 담고 있다도덕경에서 말하는 '자연'은 오늘날 영어로 Nature라고 번역될 수 있는 실체적 자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3) 하지만, '자연'이리는 개념이 실제적인 자연 현상뿐만 아니라 인위적인 조작이 가미되지 않은 사물의 본래적이고 순수한 상태를 가리킨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도덕경』의 '자연계는 분명 도의 본래성과 근원성이 온전히 보존된 원초 의 순수 상태라는 함의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道개념에 담긴 추상성과 ~을 극복하되 사물 존재 그 자체에 내재하는 본래적 순수성이 리는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 '도와 '자연'을 병치시킨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도교는 인간의 현실이 부정적인 질곡 상황에 처해있는 것으로 진단하되 도와 자연으로 대표되는 존재의 순수성 모델을 통해 현실의 질곡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엄밀한 주석학적 토론을 유보하고 말한다면, 도교의 '자연은 인간이 실현해야 할 본래적 이상적 상태, 존재의 시초로 휘귀하여 발견할 수 있는 본래성, 순수성, 근원성을 지칭하는 개념어이다. 그리고 이 지점이 도교의 도론과 인간학이 만나는 가장 중요한 고리의 하나이다. 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결국, 다양한 수행의 방법을 통해 인간이 존재의 본래성, 순수성을 회복하고 인위적 조 작에 의해 파괴되기 이전의 본래적 있음('자연')으로 되돌아간다는 구원론적 인간 학의 함의, 수양론적 함의를 담고 있다. 도교 수행론은 도에 의해 근거 지위진 인 간의 본래성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4)

3)  도법자연이리는 도덕경의 언설은 상당』히 복잡한 의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도를 단순히 자연(Nature)라고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 여준다. 전개서의 저자인 ~은 도덕경의 '자연'이 존재의 본래성 순수성을 담기 위해 시~용된 말이라고 풀이한다.

4)  도의 회복, 나아가 도에 의해 근거지워진 본래적 인간성을 회복할 것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도덕경』은 수양론적 함의를 가진 문헌으로 읽을 수 있다.『도덕경』의 초 기 주석서 중의 하나인河上公注"는 도덕경의 도론과 메시지 전체를 수양론적 관점, 특히 기의 수행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내려고 한다. 다른 한편, 도가 사라진 현실을 극 복하여 평화롭고 순수하고 자유로운 삶이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이상주의 적 열망이 담긴 정치론으로서『도덕경』을 읽어 낼 수 있는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이처럼 고전은 다양한 읽기의 관점에 의해 거듭날 수 있는 열린 텍스트이다. '텍 스타란 그것이 숭배되어야 할 문헌이 아니라, 다양한 읽기의 관점에 의해 읽히기를 기다리는 중립적인 문서라는 의미이다


고전은 믿고 숭배해야 할 캐는(경전)이 아니 라 읽고 이해하고 재해석되어야 할 텍스트이기 때문에 시대의 거리를 뛰어넘어 여전 히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필지는 경학적 태도와 해석학적 태되 캐논과 텍스트의 대립이라는 구도로 고전 읽기의 입장을 개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읽고 이해해야 할 문서를 쉽사리 경전으로 고정화시켜, 단 하나의 읽기 관점을 고집하괴 다양한 해석을 용납하지 않는 '경핵적 캐는적 태도가 이주 뿌리깊 게 잔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최근 김용옥의 노자 해석을 비판한 김경숙은 노 자 읽기의 다양한 기능성을 무시하고 '노자는 이렇게 읽어야 한다는 시걸을 강조하는 편협한 시각에서 김용옥의 해석을 비판하고 있다그러한 시각에서는 고전은 '옳 은 읽기와 '툘린'('다른'이 아닌읽기만이 존재하는 닫힌 문서가 되고 만다고전의 읽기에 관한 한 옳고 틀리고의 해답은 있을 수 없다얼마나 현실적 정합성을 가진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가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뿐이다엄밀하게 말하자면고전은 말이 없다고전을 말하는 사람은 고전 그 자체에 대해 밀耉는 것이 아니라고전을 통해 '자가의 말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고전의 세계와 자기의 세계가 융합된 지 평의 융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김용옥의 노자 읽기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그의 읽기가 전적으로 틀린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인문학적 토론은 '무엇을?' 이리는 사실 인정의 차원에서는 사실의 옳고 그름에 대한 것이지만한 단 계 더 나아가 그 사실의 '?'를 묻는 차원에 나아가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를듗함'의 문제로 전환한다

김용옥이 한문 해석 능력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그 문제도 마찬가지다전혀 한문의 기본 원리도 -구로는 사람이 헛소리 한 것이 아 니라면(무엇을 묻는 차원독자적인 읽기의 전략(왜를 묻는 차원)을 무시한 채기초 실력 운운하는 발언 그 자체가 바로 기본 소양의 부족함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김용옥의 문제는 그가 한문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거나원문을 잘못 읽었다는데 있지 않다그의 잘못은 스스로의 읽기를 절대시하는 바로 그 독단성과 오만함에 있 다고전의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하는인간은 결국 함께 더블의 살아가야呑는 존재 이며그 더불어 살기의 윤리를 깨닫지 못言는 사람에게 지식은 오히려 위험한 무기 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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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德經』에서 도론은 도의 근원성을 이론적으로 확인하는 데에서 그치는 추상 적 언설이 아니다.『도덕경』은 비판적 현실 인식을 바탕에 깔면서, 근원적인 도에 로의 복귀 혹은 도의 회복을 역설하는데 그 주안점이 주어져 있다.『도덕경』의 저자 혹은 편자가 도의 근원성과 우위성, 자연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인간의 삶이 도의 근원성에서 멀어져 있다는 시걸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한 현실 비판을 통해 인간의 삶이 주극적으로 도의 존재 모델을 따라서 재편성되어야 한다는 이 상을 강조한다. 종교는 현실을 극복해야 할 문제 상황으로 이해하괴 그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과 방呑0홀 제시한다 그런 점에서『도덕경』전체는 삶의 근원 적 변화를 촉구히는 소망이 담긴 전형적인 종교 담론이다. 변화를 추구하는 구원 론적 소망은 현실을 긍정하면서 현실 속에서 추구될 수도 있괴 현실을 전면 부정 하면서 추구될 수도 있다 도교는 현실 부정과 긍정의 두 스펙트럼을 동시에 보유 言는 독특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 도교적 신념의 출발점에 자리잡고 있는『도덕 경』은 도의 근원성에 근거하며 변화의 방법과 방향을 제시하는 전형적인 종교사상 으로서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마치 기독교가 하느님 나리를 말하괴 불교가 열반 이나 정토를 말히는 것처럼,『도덕경』은 도와 하나된 상태, 도의 근원성을 회복하 는得道의 삶을 인간의 삶이 추구해야 할 목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경에 서 제시된, 도와 하나되는 삶을 실현하는 것을 지향하는 도교 수행의 주요한 이론 적 내용을 정리해言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Ⅱ . 도와 하나되는 몸짓(도교수행)

도고 의례는 도교의 신성한 가치를 현실 속에 구현하고자 하는 형식화된 몸짓 이다. 그것은 도와 하나되는 것을 지향하는 몸짓이다. 도교 의례는 그 자체가 거 대한 수행의 몸짓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몸짓은 공동체적 목적을 위해 실천되는 집단적 몸짓일 수도 있지만, 명상과 관상 등 지극히 개인적인 몸짓일 수도 있다. 도교적 몸짓은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道士는 도교에서 의례적 몸짓을 실천히는 의례 전문가이다. 도교의 도시는 카톨릭의 신부나 불교의 승려와 마찬가 지뢰 도교 공동체 내부의 일정한 규율에 따라 엄격한 훈련을 거쳐 의례 전문가로 서 길러진다. 그 수련 과정은 도교 의례의 절차와 의례적 몸짓을 습득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단히 복잡한 세부節目을 가지고 있는 도교 의례의 완결된 절차 를 처음부터 끝까지 실천하기 위해서는 긴 수련 과정이 필요하다. 의례 전문가로 서 도사는 자기가 실천할 수 있는 몸짓의 난이둑 즉 수행 정도에 따라 정해진 위 계 질서 속에 편입된다5)

5)   가톨릭의 서품 제도나 불교의 승직 제도와 대단히 비슷하게, 영어식으로는 "ordination rank"라고 -부를 수 있는, 교계 조직 질서에 따른 등급이 부여되는 것이 다. 외형적 조직 공동체로서 도교 공동체 내부의 위계는 곧 그 공동체에 소속된 성 원, 즉 도사의 수행 수준과 일치되는 것으로 인정된다. 모든 교계 조직이 그러하듯이 도교의 교계 조직에 있어서도 위계의 정점에 속한 인물은 도교적 진리, 가르침에 가 장 가까이 다가서 있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다. 가톨릭의 엄격한 위계 질서에 따르면 교황이 하느님의 진리를 구현하는 현실의 대표자인 것처럼, 도교의 교계 조직에서 본다면 교황과 같은 유일한 중심은 아니지만, 장천사는 도교적 진리를 구현한 대표 자로 나아가 도교적 진리의 체현자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위계 질서를 절대시言는 공고한 조직의 실현은 종교 공동체의 경직성을 낳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 위계 질서 를 무시하거나 부정言는 자유로운 움직임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종교의 신비주의적 성향은 그러한 깨달음의 위계를 설정하려는 교권 제도에 대한 반발로 출현하기도 한 다. 도교에서도 교권의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있는 자유로운 수행자의 출현이 일상화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송대는 그러한 자유 수행자들이 폭발적으로 등장한 정점이었다. 도교 내부에는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종파-들이 존재하는데, 그러한 다양성은 권위의 절대적 중심이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도교의 역시는 어떤 의미에서는 국가 권력과 결합한 어느 특정 종파가 다른 종파를 권위적으로 통합하려는 교권 수립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장은明나라의 시점에서 용호산 장천사의 정일파가 교권 통합에 성공한 결과물이 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도교는 끊임없는 분파를 만들어 내었기 때문 에 오늘날 도교 교권의 최종적인 승리자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중국에서 도교는 살아있는 종교 현상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도교의 교권 조직이 일찍이 무너져 버린 곳에서는 그러한 자유로운 수행자 혹은 자유로운 의례 실행자-들 이 저마다의 권위를 주장하며 종교적인 실천을 하는 경우가 일상화되어 있다.

1.          수행으로서의 '無爲'(non-action) 도교는 현실의 불완전함을 극복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고 제시하는 종교 사 상으로서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도교의 진단에 따르면 현실의 부정적 질그고으 01 위적 조작의 과잉에서 결과하는 피폐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도는 자연성, 포용성, 포괄성, 그리고 시원성을 동시적으로 표현하는 전체성을 상 칭하는 개념이다. 인위적 조작에 의한 세속적 힘의 과잉은 도의 성스러운 전체성 을 숨막히게 만든다.『도덕경』은 세속적 힘이 작용하는 의욕 과잉의 상태를 '유위 (有爲)'라고 지칭하며, 도의 자연성 내지 시원성을 의미히는 '무위(無爲)'와 대립시 킨다. 무위는 도의 성스러움이 있는 그대로 실현되는 상태, 사물의 본래 그대로의 상태이다. 즉 자연 상태이괴 시원 상태이괴 도의 포용성과 완전성이 작동하는 완 전함의 상태이다.

1-十아가 '무위는 그러한 도와 하나되는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근원적 몸짓을 지 칭하는 수양른적 용어이기도 하다. 존재의 근원인道를 회복하고가 하는 종교적 이상을 도교에서는 '반박〈返樸)', '귀진(歸眞)' 등 회귀적 메타퍼를 사용하여 표현한 다. '귀진' 혹은 '반백은 도교의 근원적 성스러우을 실현하는 것이다. 무위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도의 근원적 성스러우을 실현(歸眞)하고자 하는 적극적 인 몸짓으로서의 무행위, 무조작이다. 도와 하나되는 삶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인 수행법은 그 자체가 중요한 의례적 몸짓이다. 마치 요가나 선이 가만히 않아 있음을 통해 존재의 본래성을 회복하고가言는 적극적 몸짓인 것과 마찬가지되 무위의 수행은 도의 포용성, 자연성, 순수성을 파괴亏는 인위적 욕망의 과잉을 치 유하는 역설적이지만 적극적 몸짓이다. 그것은慾望과有爲에 의해 훼손된 도의 근원성과 자연성을 회복하는 치료적 몸짓이자 이념이다. 무위는 욕망에 의해 발동 되는 파괴적 몸짓이 아니라, 도교적 진리와 하나되는 수행적 몸짓이며, 도인(

), 토납(吐納), 복기(服氣), 행기(磠기 존시〈存思), 좌망(坐忘) 혹은 심재(心齋) 구체적인 기의 수련법으로 구체회된다.6) 도교는 현실의 질곡,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질병의 고통, 천재지변의 고통, 전쟁 의 고통 등등, 모든 종류의 실존적 고통을 극복하여 삶에 궁극적 변화를 초래하기 위한 다양한 종교적 몸짓을 실천한다7) 탈주와 변화를 추구하는 도교의 몸짓은

6)   혼히氣功이라고 부른 도교의 수련은 위에서 열거한 다양한 기의 훈련과 정신의 훈 련올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도교 기공이 가장 발전된 형태가 다름 아니 내단 수련법 이다. 구체적인 기의 다양한 수련법에 대해서는 체계적인「가른 글을 마련하고 있다. 다양한 양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 종류를 다 열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다. 하지만, 도교 의례의 다양한 몸짓은 한마디로 존재의 근원적인 힘을 회복하 는 것, '得道'를 목표로 삼는다. 도교 의례 그 자체를 도교적 진리를 실현하려 는 수행적 몸짓으로 이해한다면, 도의 근원적 힘을 회복하는 '무위'는 무행위가 아니라, 도와 하나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몸짓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라 고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무위'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과정에 있어 실천 해야 할 다양한 세부적 의례적 항목을 가진다. 처음부터 단박에 무위의 최고 상태 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최고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단계적 발전이 요구된다. 도교적 몸짓의 전문가, 도교 의례의 전문가인 도시는 그 몸짓을 단계적 으로 실천하괴 그 결과 무위, 즉 도와 하니뒴을 실현한 사람들이다. 그리괴 도와 하나되는 몸짓을 수행言는 사람들, 그 결과 도와 하나된 사람들은 도교적 의미의 불사성을 획득한다8) 도교적 의미의 불사%g규을 획득한 사람을 도교에서는 신선9)이 라고 부른다.

신선이 되기 위해서는 신선이 되기 위한 방법을 실천해야 한다. 도교의 의례, 특히 개인적 수행은 도교적 의미의 불사(도와 하羽)를 획득하는 몸짓이다. 도고 적 수행은 크게 몸의 수행과 미음의 수행으로 범주화할 수 있다. 그러나 수행의

7)   어느 정도 도식적으로 말한다면, 도교적 의례, 몸짓을 크게 두 호름으되 공동체 전 체를 대상으로 실천되는 공동체적 의례와 개인의 몸(미음)올 수련하는 개인적 의례 로 1•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공동체 의례는 대개 도교에서는科儀라고 불 리는 집단적 의례(liturgy)이며, 개인적 수련은 기공 및 정신 수련을 포함한다. 도교 의례는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든 공동체 차원의 것이든 궁국적으로는 현실의 질곡을 벗어나, 신선 세계의 완전함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동일한 지향 을 가진 몸짓이다. A는 개인의 수련을 통해 도와 하나 힘을 획득한다. 공동체 의 례의 실천은 그러한 내면 수련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의례 전문가로서 도사의 의례 집전 행위와 기 수련은 연속적이다. 도교 과의의 구조와 의미에 관해서 중요한 연구 성과로는 Kristofer Schipper, Le Corps Taoisre (Taoisr Body)(Fayard, 1982) 를 반드시 참조해야 한다. 그리고 Isabelle Robinet Taoisme의 제3장은 도교 의 례의 기본 구조를 잘 설명한 개요로서 참조할 수 있다. 중국에서 니은 연구서로는 張澤夾『道敎~儀硏究』는 사천대학 도교 연구소의 박사학위 논문으로서, '黃籧齋를 중심으로 도교 의례의 구조를 잘 그리고 있는 역작이다.

8)   도교의 내부 해석에 의하면 그렇다. 그러나 종교의 내부 해석의 진실성을 따지는 것 은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9)道士는 다른 말로眞人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쫴山은 가장 널리 보편적으로 사용되 는 명칭이다. 신선 이외에도道/&神人至人등 다양한 명칭이 사용되는데, 그 개념 =은 각각 뉘앙스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도교적 진리 즉 도를 획득하여 도와 하나 됨을 실현한 존재(與道合-), 도교적 깨달음을 획득(得遡한 도교의 이상적 인간을 지칭히는 개념으로서 내포하는 바가 동일하다. 자세한 것은 본 논문의 마지막 절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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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방향은 방법론적 구분일 뿐이지 실제 수행에 있어서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 구 분이 되지 않는다기보다는 그 둘은 분리되어 실행되어서는 안 된다. 그 두 방향의 수행이 통합적으로 실행되어야 함을 역설하기 위해 도고 수행, 특히 내단 수행에 서는성명쌍수(性命雙窿)'를 강조한다 약간 거칠게 말한다면, ()의 수행은 몸의 수행이괴 성()의 수행은 정신의 수행이다. 이론가에 따라서는 그 둘 사이 의 위계를 강조하는 경우도 있지만, 궁극적 목적으로서 그 둘사이를 완전히 분리 히는 경우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두 방향의 수행은 도교적인 몸과 마 음의 이론 구성과 대응한다.

2.          (,)과 마음〈心,)의 문제 육체()와 영혼() 혹은 몸()과 정신()의 관계 문제는 도교를 포함하는 중국적 인간과 수양론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도교 혹 은 중국 종교가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깨달음 혹은 득도는 궁극적으로 몸과 마음 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먼저 원리적으로 말하자면 도교 나아가 중국 종교 일반에서 깨달음은 단순히 추장적인 이해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몸 의 차원이 결부된 종교 경험으로 이해되었다. 득도는 구체적인 몸짓을 수반하며, 구체적인 몸짓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존재의 특별한 차원의 경험으로 이론화된다. 몸은 깨달음이 발생하는 장소이다. 특히 도교는 깨달음이 발생言는 정소로서의 몸 을 중시言는 역사를 강하게 지니고 있다 먼저 중국의 시상 종교 전통, 특히 도교에서 몸과 미음, 그리고 그 둘의 관계 문제에 대한 입장을 간단히 살펴보자. 중국 전통에서 몸과 미음은 궁극적으로 ' '되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론화의 과정에서 몸과 마음을 '구분'하는 의식마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먼저,形左-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형태를 지닌 육체, 형체 나아가 물질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반면形과 대비되는 神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간이나 생명체를 성립시키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어 떤 요소를 가리킨다. 서양적인 이분법을 적용해 본다면, 형은 육체 혹은 물질이괴 신은 정신 혹은 정신적 실재를 가리킨다고 단순화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아가 도교의 신 개념에서 특히 주목되어야 할 점은 신이 인간의 정신뿐만 아니라 우주 적 신(神明) 그리고 인간의 내면에 내재하는 신적 존재로서體內神10) 혹은 생명

10 도교의 체내신 개념은 도교 특유의 신관념과 결부되며, 도교의 신체 기법, 기의 수련 과 연결되어 상당히 중요하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나오는 주를 참조할 것.

체의 중심으로서 인간의 영혼, 나아가 귀신 등을 동시에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개 념으로 폭넓게 시용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그 신은 서구적 의미의 정신과 정 신적 존재, 신적 존재를 포괄한다. 하지만, 도교적인形~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 은 그形과神이라는 대립적인 두 범주가 서로 배타적이고 닫힌 범주로서가 아니 라, 서로 소통적이며 상호 전환이 기능한 열린 범주로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초기 도교 경전인『태평경』에 보이는 형신 관계 혹은 몸과 정신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언설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1) “사람은 혼돈의 기, 즉 원초적인 기에 서 태어난다. 그氣는 생명력의 정수인精을 낳괴 그精이 고도화되어 영혼()을 낳는다.神은 다시明을 낳는다. 인간을 구성하는 기는 본래 음양의 기이며, 그氣 가 고도화되면서精으로 전환되괴精은 다시神으뢰神은 다시明으로 전환된 다."11) (2) “기가 기-득하면 거기에서 영혼()이 나타나고 기가 끊어지면 영혼() 도 함께 죽어버린다.”12) (3) “신과 정이 기에 대해 가지는 관계는 마치 물고기가 물에 대해 가지는 관계와 비슷하다. 기가 끊어지면 신과 정이 홀어지는 것처럼, 물이 없어지면 물고기가 죽는다."13) (4) “기가 흩어지면 죽고 기를 얻으면 산다 .”14) (5) “사람은 한 음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몸은 정신과 더불어 합쳐 하나가 되 어 있다. ()는 죽음을 지배하고 있으며 정신은 삶을 지배한다. 그리고 정신과 묎形)이 함께 하나가 되어 있을 때에는 생명을 유지()할 수 있지만, 정신과 몸 ()이 분리될 때에는 불행(죽음,)이 발생한다. 곧 정신이 몸을 떠는 것이 죽 음이괴 정신과 몸이 하나로 합쳐 있는 것이 삶이다. 정신과 육체(/)의 분리가 일 어나지 않고 하나가 될 때 장생불사가 가능해 진다."15) 태평경의 언설은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첫째, 태평경의 저지〈들)은『장자』 혹-은『관자』에서부터 정식화되는 고대 중국의 기른적 관점을 계승하면서 인건을 포함하는 모든 시월이 -우주적 원기()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둘째, 기로 형성 된 인간은 육체라는 유형적 측면과 정신 혹은 신이라고 불리는 무형적 측면이 통 합되어 있는 존재이다. 셋째, 유형적 측면인 육체는 인간을 죽음으로 이끌어 간다.

Il)『태평경합교』: “夫人本生混沌之氣氣生精,精生神,神生明.本于~之氣氣轉爲精,

*爲神, i*爲明.”(p.739)

12)『太平經合校』: “人有氣則禰,氣絶貝l爵亡."(p.%)

13)             상동: i*有氣如.魚有水疊魚亡."(p.727)

14)             상동: “失氣貝l埏有氣則生”(p.3%)

15)             상동: “人有-,與精神相合幷也形者乃主死속精神者乃主生相合則吉,去則凶. 神則囮有精神則生相合則爲-,可以長存世”(p.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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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정신은 인간을 불멸로 이끌고 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 인간의 육 체적 측면은 속의 원리인 반면에 정신적 측면은 성스러움의 원리이다. 넷째, 인간 을 형성하는 육체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는 사실상 분리되어 존재해서는 안 된다. 육체가 인간을 죽음으로 끌고 간다고 해서, 무형적 정신이 육체와 분리되어 별개 로 독립되어 존재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정신이 생명을 부여하는 힘이라고 할 지라되 육체와 분리된 정신이 독립적으로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고 간다는 것은 아니다. 도교에서 추구하는 장생불入는 어디까지나 정신과 육체가 하나로 통 합되어 존재言는 상태를 지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정 신이 육체와 분리된 채로 영원히 지속할 수 있다는 정신 불멸, 혹은 영혼 불멸의 입장을 도교가 주장하는 것은 아니己1는 사실이다. 땠째, 인간의 생명을 형성하 는 바탕이 되는氣를 순수하게 고도의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수련에 의해 인간 생 명은 활성화되어 불사의 상태로 유지될 수 있다. 생명의 원리인 정신의 바탕도 기 괴 육체를 형성히는 기질의 바탕도 결국 기이다. 따라서, 도교의 불사 수련은 결 국 기의 수련을 통해 몸과 정신을 충실하게 만드는 훈련이다. 마치 호수에 맑은 물이 기득 넘치고 그 물 속에 건강한 물고기가 뛰어 놀듯이. 여섯째, 기의 순수화 와 충실화는 단계적인 고도화 과정을 거쳐 최후의 단계에서는 궁극적인 도와 하 나가 되는 신적인 상태에 이른다. 그 신적인 단계는 신이라고 표현되기도 하지만, 『태평경』에서는 밝음 혹은 빛의 메타퍼를 시용하여, 그 최후의 깨달음을 표현한다. 시기적으로 훨씬 나중에 등장히는 내단 문헌에서는 도교적 완성 상태를 *光 이라는 빛의 메타퍼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 표현은 사실상『태평경』의 ''과 일 맥상통한다.16) 도와 하L捏을 추구하는 도교의 수련에서形蕣申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형과 신 이 서로 소통 기능한 열린 범주로 이론화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도교에서는 이 간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사물이 기로 형성되어 있다고 이해한다. 그러한 근원적 기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유형적인 것이든 무형적 것이든 존재言는 모든 것은 기 로 이루어진다. 오늘날의 용어로 정신이라 번역되는神이나, 육체라고 번역되는 形은 모두氣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구성 오소리는 측면에서는 그 둘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하지만, 도고 수행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둘 사이에는 엄

16)『태평경』의 형신론이 도교 형신론의 이론 전체를 대표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그 입장은 나중에 도교 사상사의 전개에서 기본적 경향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도교의 수양론 특히 내단의 이론에서 기 수련의 단계론과 관련된 자세 한 형신 관계론은 더욱 자세한 문헌적 검토를 기다리는 영역이다.

연한 질의 차이, 혹은 순수화의 정도에 따른 양상의 차이는 존재한다. 그러한 양 상의 차이로 인해 다음에 살펴볼 기의 세 양상〈精)과 관계된 수련의 단계 에 대한 이른적 구상이 제시될 수 있었던 것이다.

3. 기의 수행과精示中 도교에서 몸과 마음의 수행은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기 ()의 수행에서 시작된다. 도교의 다양한 수행적 몸짓을 결국 기의 수련 문제로 귀결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도교 수행에서 기 개념은 중요하다. 인간은 몸은 물론이고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질료라고 이해되고 있다.17) 기는 가시적으로 보이 는 인간의 몸을 형성하는 기반일 뿐 아니라, 소위 말하는 인간의 정신을 이루는 기반이며 생명력을 유지香는 근거라고 이해되기도 한다. 도교에서는 인간의 육체 와 정신을 엄격하게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육체와 정신은 구분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질료()리는 측면에서 볼 때, 그 둘의 경계는 엄밀하지 않다. 따라서, 앞에서도 본 것처럼, 인간을 몸과 정신이라는 엄격한 이원적 구조를 근거로 이해히는 관점 그 자체가 도교적이지 않다. 도교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다양한 레벨을 가진 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기의 레벨 사이의 엄격한 획선 을 긋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낮은 레벨의 기는 가시적인 육체를 구성하괴 높은 레벨의 기는 정신이라고 불리는 높은 단계의 생명력과 관련이 있다. 기의 차원에 서 볼 때 도교는 인간을 정(), (), ()이라는 양상이 다른 세 차원의 기 로 구성된 존재로 이해한다. 그때 낮은 단계의 기는 육체와 보다 밀접한 관계가 있괴 높은 차원의 기는 굳이 서양식으로 말하자면 정신이나 영혼과 보다 더 밀접 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인간을 형성히는 양상이 다른 기들 사이에는 상호 전환이 가능한 열린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도교의 기 수련은 이러한 기본적인 인간관, 즉 양4-01 다른 세 차원의 기의 종합에 의해 인간이 형성되어 있으며, 그 기들 사이 에는 상호 전환이 가능하다는 관점을 배경으로 삼을 때에만 이해할 수 있다.

기의 수련은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단순한 질료적 기(그것을 도교에서는氣質 이라고 부른다)를 보다 높은 차원의 기로 전환할 수 있다는 신념을 전제로 하여

17) 기의 의미에 관한 토론은 끝이 없다. 여기서는 간단하게 질료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물질적 원소라고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수많 은 논의가 진행되어 있다. 대체로 생명력의 근간으로서 물질을 이루는 바탕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입장이다.

실행된다. 유형적 질료에 가까을수록 그 기는 차원이 낮은 기이다. 질료적 기는 인간을 세속에 묶어두는 부정적 힘으로 작용한다. 그 기는 현실의 질곡을 대표하 는 상징어로 시용되기도 한다. 굳이 성과 속의 구분을 적용한다면, 기는 속()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며, 인간의 삶을 속박하는 것이다. 도교에서 추구香는 해탈, 자 유, 득도는 속()의 차원을 뛰어 넘어 성()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18) 도교에서는 기의 수련을 통한 기질적 차원으로부터의 탈피, 나아가 고차원적인 기의 상태로의 진입, 마지막으로 신의 단계에 도달하는 득도의 과정을 일련의 단 계론적 메타퍼로 묘사하는 것이 일반화되어있괴 내단학에서는 그러한 발전 과정 을 대체로 네 단계로 설명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 단계 전체를 기질을 변 화시키는 과정이라고 본다면, 도교의 기 수행은 결국 속(secular)의 차원에 속하 는 기질을 벗어나서 성스러움의 차원의 신(sacerd)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포함 6는 이론이다. 내단학에서는 정기신의 단계론을 수련의 단계론과 연결시키며 다 음과 같은 과정을 제시한다. (1)築基(기질의 변화에 돌입하기 위한 기초 수련 단 계), (2)鍊精化氣(인간 생명의 원초적인 에너지를 고차원의 에너지로 끌어올리 는 수련), (3)鍊氣化神(고차원의 기 에너지를 더욱 고차적인 정신 에너지로 끌 어올리는 수련), (4)鍊神還虛(가장 승회된 형태의 기가 무의 상태, 즉 모든 것의 근원이며 모든 것의 귀결점인 도와 하나되는 합일의 경지).19) 도교에 있어 성스러움은 다양한 용어로 표현된다.神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다. ()은 성스러움이 실현된 상태, 속의 속박을 벗어버린 상태의 기를 가 리키는 도교 특유의 개념이다. 신 역시 그것은 기의 한 양상이지만, 세속을 형성

18)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도교에서는 수준이 낮은 질료적 단계의 기를 '음으로 범주 화하괴 그 기를 높은 수준으로 승화시켜 김뗴 따라 양의 범주로 옮아가는 것으로 단계를 지워 이해한다. 그 과정은 <-半陰,半隣->으로 도식화할 수 있다. 완전 한 양〈의 단계에 도달한 인간이 도와 하나가 된.f山이다. 그리고 도교에서는 범속한 현실을 벗어나 지기옥롭고 완전한 존재, 즉 신선으로 넘어7는 그 과정을 4超凡入聖'이라고 표현한다. 필八는 엘리아드에게서 유래하는 성과 속이라는 용어를 사 용했지만, 도교적 맥락을 고려하면서 말한다면,凡俗과이리는 표현이 적절하다 고 생각한다.

19) 기 수련의 단계론에 관해서는 더욱 자세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도교의 내부적 관 점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수련의 단계를 서술하는 연구는 여럿이 있지만, 그러한 수 련 과정론의 의미를 비판적이면서도 비교종교학적인 관점에서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요가의 수련 단계에 관한 논의, 서양 연금술에서의 단계적 발전에 관 한 논의 등이 적절한 참조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 점에 관해 다른 논 문을 준비하고 있다. 일단,『오진편』(중화서국, 도장께 역주자 해설이 도교 내부의 관점을 가장 콤팩트하게 정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는 일반적인 기와 질적으로 다르다.神이리는 펑꺼는 초현실적인 존재, 영어로 는 deity와 직결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개념의 참 의미를 이해하는 것 이 쉽지 않은 점이 있다. 도교적으로神은 수련을 거쳐 가장 높은 수준으로 고양 된 기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동시에 신은 인간의 역량을 초월하는神靈혹은 그 신령과 동일한 차원으로 고양된 신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개념이기도 하다. 나아가 신은 도교의 독특한 신 관념인體內型0발 가리키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천상에 거하는 우주적 신은 도의 현현이다. 체내의 신은 인간에 내재한 도의 현현 이다. 결국道와神은 그 내포하는 함의가 동일하다. 나중에 보겠지만,道人,眞人, 至人또는神人이라고 불리는 도를 획득한 인간에 대한 명칭은 결국 내용적으로 는 동일한 것이다. 기를 수련히여 가장 순수하고 완전한 기, 즉神의 상태로 끌어 올리는存思혹은守-의 수행은 체내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신이 적극적으로 몸의 주인이 되도록 만드는 훈련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속의 지배를 벗어나 서 성스러움이 실현된 존재로 삶의 차원을 높이고자 하는 훈련이다. 우주의 근원 이고 생명의 근원인 도가 우리 몸 속에 실현되괴 몸을 통해 우주 전체를 도의 차 원으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이 그것이다.21)

4. 수행과 성스러운 시간:生氣와死氣 기 수련에 있어 기의 순수화 정도에 따라 정신을 단계론적으로 나누어 보는 관점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기를 죽은 기(死氣)와 살아있는 기(生氣)

20) 도교 상청파에서 극에 달하는 체내신 관념은 모든 도교 기공 이론에서 수용되는 것 은 아니지만, 우주적 신이 도의 현현이라는 시걸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리괴 기의 고양된 상태로서 신이 도와 하나가 된 상태, 우주적 이법의 운행 속에 참여한 상태를 가리키는 상징어라는 점에 대해서는 도고 내부적으로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체내신 관념과 그 신의存思를 통해 신을 몸 숙에 보존하여 불사를 획득할 수 있다 는 수련법에 대해서는 상청파의 중요 경전인『황정경』『대동진경』을 참조할 수 있다. 상청파의 중요 수련법인 체내신의 존사에 관한 연구 문헌은 이미 많이 있지만, 대표 적인 것으-로는 Michel Stricmann, "The Mao Shan Revelation"(T'oung Pac), vol. LXIII, Leiden, 1977)이 있괴 일본 연구로는 카미츠카 요시코(神塚淑子),『六朝道稅빥想㈆硏犯(창문사, 1%9) 1 r眞誥lcov<J를 참조

21) 기가 도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가 기의 수련을 통해 도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관 점, 그리고 기는 도와 상통할 뿐 아니라 인간의 생명력의 근거이며, 동시에 인간의 물질적 기초라는 주장은 도고 문헌 도처에서 보이는 도교의 상식적인 관점이다. 특 히 도교에서 기의 수련과 도의 획득을 동일 선상에서 이해하는 기공적 관점에 대해 서는『운급칠첨』권56 r~에 자세하게 나타난다.「원기론」은 도교 기공의 이 론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검토해야 할 중요한 문헌이다. 그리괴 동 권57에 실린唐의可馬承禎의 -작품이라고 알려진-『服~侖」도 대단히 중요하다.

나누어 보는 관점이다.神이 기의 수련 정도 및 수준에 관한 문제라면, 사기와 생기의 구분은 존재의 상태를 시간의 맥락에서 성과 속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다. 기는 구체적인 시간 속에 존재하는 우주와 생명의 근원이다. 그러나 기의 의해 가득 채워진 공간이 균질적이 아닌 것처럼, 시간도 균질적이 않다. 신의 영 역에 속하는 하늘은 성스러운 공간이지만, 지상은 하늘에 비해 질이 낮고 기의 수 준도 낮다. 즉 하늘에 속한 것보다는 지상에 속하는 것이 가치론적으로 열등하다. , 그것은 속의 영역에 속한다. 시간 계열에 있어서도 기의 이원성은 유지된다. 앞에서 본 것처럼 본래적으로는 기')와 도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이지만, 현실적 으로氣는 도의 차원에서 멀어져 있다. 즉 성과 속의 이원성의 지배를 받고 있다. 기의 근원적 본래성이 있는 그대로 긍정되지 않는다 존재를 바람직한 상태와 바 람직하지 않은 상태로 나누어보는 종교의 이원적 관점이 시간과 연관하여 기를 설명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적 이원성에 따라 성 스러운 시간대에 속言는 기가生氣(생명의 기)이고 속된 시간대의 기가死氣(죽음 의 가이다. 생기와 사기라는 이원적 관념은 기가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져 있 다는 생각이 구체적인 기의 수련에 있어서는 시간의 관념과 결합하여 다듬어진 것이다.

도교에서 기의 수련은 반드시 시간의 관념23)과 결합되어 진행된다. 자연을 구 성言는 바탕이 되는 기는 자연의 유주적 리듬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도교의 기 수행을 실천할 수 있는 바람직한 시간(성스러운 시간)의 계열은生氣가 지배하

22) 도교에서는 본래적인 순수한 '가를 일상적이고 속된 세상을 구성히는 기()와 구별 하기 위해 굳이 기()라고 쓰기도 있다.

23) 도교 기 수행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내단 수련법에서는 수련 과정을 설명힘뻬 있어 다양한 시간 계열을 중시한다. 그 과정을 대충 단계적으로 말하자면, 첫 단계가 生之時' 즉 생명의氣가 생성되는 시간이며, 그 다음 단계가 내적으로 생성된 순수한 기를 모아 내단의 프로세스에 진입시키는 과정 즉 '霖之時'이다. 그렇게 모아진 기 는 목욕(沐浴之時)이라는 세련화 과정과 팽련(;烹끄時)이라는 정련 과정을 거치면서 고도로 순수한 기로 승화되괴 마침내 도와 하나가 되는 마지막 단계 즉証道脫升之時로 완성된다 내단학의 프로세스와 각 단계의 의미에 관해서는 학계에서 아직 충 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다. 일단 서양의 연구 성과로는 이자벨 로비네 교수의 일련의 내단 연구를 정리하고 있는 "Taoism: The Growth a Religion"(California University Press, 19%)의 마지막 장이 유용한 참고가 될 것이다. 중국의 문헌은 양적으로 많이 있지만, 수련 각 단계의 구체적인 의미를 도교 내부의 해석을 비판적이고 객관적으로 해명하는 연구 성괴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사 적인 측면에서의 내단 이론에 관해서는 임계유 주편,『中國道敎剡(상해고적출판사, 1990) 참조 일본에서는 이시다 히데미(石田秀實)의『흐르는 신체』(열린책들, 이동철 번역, 1四를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는 시간이며, 기 수행을 해서는 안 되는 바람직하지 않은 시긴(속의 시간) 계열은 사기가 지배하는 시간이다. 생기는 생명의 원리이며, 사기는 죽음과 연관된다. 여 기서 중요한 것은 사기를 배제하고 생기를 수련하여, 기 본래의 근원성을 최대한 활성화시키고 그 근원적 기를 도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송대 이전의內丹이론을 집약한『道樞會眞篇』에서는 하루의 시간을生氣의 시간과死氣의 시 간 두 계열로 분류하면서 내단 수련의 과정을 설명呑는 전형적인 사우를 보여준

.

구圈밤 열한시부터 새벽 한시)부터午時(오전 열한시부터 오후 한시)는 기 가 생성되는 시간이다. 이때에 기를 모아 단을 만드는 수련을 실행할 수 있다. 子跱에는腎氣가 생성되괴 뀌畤에는肝氣가 생성된다. 그리고午碍에 이르러서 는腎氣와 서로 교류하며 기가 쌓이고 체액을 생성한다. 그리고 그氣가 丹田으로 흘러 들어가玄珠長生의藥, 즉丹藥이 만들어진다."24)

子時에서午時에 이르는 여섯 단위의 시간은 생명의 원리인生氣가 지배古는 시간대이므로 기의 수련은 이 시간 동안에 실천되어야 한다. 한편午畤부터 구畤 까지는 죽음의 원리인死氣가 지배하는 시간대이므로 그 시간 동안에는 기 수련 을 피해야 한다. 시간의 흐름과 기의生死를 연결시켜 설명言는 도교적 관점은 음양 관념에 근거한 이원적 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시간적 흐름을 음과 양의 이원론으로 풀이呑는 해석에 따르면, 하루를 구성하는 열 두 단 위의 시간 중了碍에서午畤에 이르는 여섯 단위의 시간은陽에 속하고 다시午時에서 시작하여 구峙에 이르는 시간대는陰에 속한다고 설명한다. 기의 수련은 반드시 생명의 힘이 약동하는陽의 시간대에 실행되어야 하며, 기가 위축되는 시 간대에 기를 수련히는 것은 자연의 리듬에 역행하는 것이 된다.

기가 생성되는生氣의 시간과 기가 위축되는死氣의 시간에 대한『道樞』의 관 점은 도교의 상식으로 고대 도교에서부터 널리 공유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갈 홍은『포박자』에서 도교 기공 양생술을 비롯한 도교 방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 서, “기의 수련(行氣)은 반드시生氣의 시간에 실행해야 한다.死氣의 시간에 기를 수련해서는 안 된다. 옛날 선인들이六氣25)를 수련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

24)『道樞會眞篇』: “夫自子至午者,氣生之時也可以用~月焉.子之時,腎氣虫卯之時,肝氣生至于午之時貝構氣交乎心彔積氣生海還于丹田,是爲玄-″

25) '六氣'는子時에서午時에 이르는 여섯 단위의 시간대에 속하는氣즉生氣를 의미


문이었다. 하루의 낮과 밤에는 열 두 단위의 시간이 있는데, 한밤(子時)에서 한 낮 (午畤)에 이르는 여섯 단위의 시간은生氣가 지배하며 한낮에서 한밤에 이르는 다 른 여섯 단위의 시간은死氣가 지배한다.死氣가 지배하는 시간대에 기를 수련하 는 것은 무익하다”26)라고 하면서 기 수련의 시간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27)

5.氣수행의 목표로서 4純陽' 다음으로 도교의 기 수련에 있어陽의 시간이라는 관념과 연계하여 '鵬이라 는 개념에 대해 살펴보자. 도교의 내면 수련 전통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내단 수 련에서 특히 중시되는 수양이리-는 개념은 성스러운 시간을 의미하는陽개념과 연계되어서도 중요하지만, 세계를() •의 삼부 세계로 보는 도교의 기본적 세계관의 견지에서 그 중요성을 인정할 수 있다. 도교에서 인간은 양과 음이 결합된半聖半俗의 존재이다. 음양론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음과 양 의 결합체로서 성과 속의 중간 영역에 속한다. 육체를 구성하는 낮은 수준의氣 즉氣質민을 놓고 본다면 인간은 속의 영역에 속하는 존재이지만, 정신을 구성하 는 순수한 기는 성스러움의 영역에 속하고 따라서 속의 영역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다. 도교에서는 그 성스러움의 영역을陽의 영역이라고 범주 화한다. 따라서, 육체를 구성言는 기질의 한계를 벗어나서 순수한 기()의 영역으 로 진입하는 것을 도교에서는半陰半陽의 중간 차원을 벗어나 순수한 양의 영 역으로 진입한디는 단계론적 변화의 메타퍼를 이용하여 설명한다. 당송 시대에 있 어 도교 내단학의 이론 수립과 관련하여 중요한 문헌인『鍾呂傳道集』에서는 음양 의 관점에서 인간과 신선, 그리고 귀신의 차원에 대해 퓨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선은 하나가 아니다. 순수하게陰氣로만 구성되어 있고陽氣를 가지고 있는 않 은 존재는 귀신이다. 순전한陽氣로 이루어져 있고陰氣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

한다.

26)『抱朴子內篇釋滯』: “夫行氣當以生氣之時,勿以死氣之時肛故日仙人服六氣此之謂也--夜有十二時,從日死氣之時, 行氣盪世

27) 시간뿐만 아니라 수행의 장소도 대단히 중요하다. 기의 수련은 기의 순수함이 확보 될 수 있는 조용한 곳(특별한 수행의 장소로서道覿이나靜室등등) 이나 산 속이 바람직하다. 도교의 이상적 인간은 아무래도 세속적 힘이 강하게 작용呑는 도시보다 는 성스러움의 기운을 머금고 있는山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수행을 중요한 종교 적 의례의 실천이라고 본다면, 의례에서 일반적으로 중시되는 시간과 장소의 비균질 성, 비구등성에 대한 인식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것이다. 예배는 정해진 특별한 시 간에 정해진 특별한 장소에서 드려지는 것이 요구한다는 점을 상기하자.

은 존재는 신선이다 음기와 양기가 골고루 섞여 있는 존재는 인간이다. 그런데 오직 인간만이 귀신이 될 수 있괴 또 신선도 될 수 있다. 젊은 시절부터 수련을 하지 않고 함부로 정욕을 발산하고 뜻하는 바를 쫓기만 하는 사람은 병들어 죽어 서 나중에는 귀신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수련을 거듭하여 범속함 을 뛰어 넘어 성스러움의 영역으로 들어가는(超凡入聖) 사람은 기질의 한계를 벗 어버리고 신선이 될 수 있다. 신선에는 니썻 등급이 있괴 수련의 법에는 세 등급 이 있다. 그 법을 수련하고 하지 않고는 인간에게 달려 있지만 공이 이루어진 결 괴는 사람의 분수에 달려있다"게 기의 수련은 저급하고 범속한 존재의 범주를 벗 어나 신성한 존재의 범주로 진입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도교에서는 그 범속한 의 범주를 음이라고 규정하괴 인간의 욕Q才과 자기 파괴적 욕구에서 비롯되는 질 병, 죽음 등 인간의 구속하는 존재의 질곡을 음의 범주에 소속시키괴 그러한 존 재의 질곡을 극복하여 나아가는 완전함의 상태를 양의 범주에 소속시킨다. 도교에 서 양은 죽음을 극복한 존재의 차원, 인간의 범속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도교 적 이상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당송 시대의 내단학을 대표하는 유명한 도사들은 순양의 경지 즉 신선의 경지를 추구하는 그들의 이상을正陽子 (″), %혐子(ilöm,華陽(施肩吾),紫陽(張배단),(王喆,王醵),月暢 (J馬鈺) ••• 등의 이름〈號)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기를 음과 양, 두 범주로 나누고 양의 범주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관념은 『주역』에서 유래한 것이다. 도교 양생가들은『주역』의 음양 범주와 시간적 추이에 따라陰에서부터陽으로 변화하는 음양消息의 이론을行氣服氣胎息등 다양 한 기 수련법에 널리 팡팡하였괴 도교 수련에서 순양 개념은 그 결과 도출되었 다.「延陵君鍊氣法』에서는 당나라 도사吳筠의 대표작「~을 인용하면서 도 교 수련법의糸4鵬관념을嶰易消息의 관점과 연결시키고 있다陽氣가 조금이라 도 남아있으면 귀신이 될 수 없괴陰氣를 조금이라도 남겨두면 신선이 될 수 없 다.禮易의 기는 양기이며, 음적물의 기는 음기이다. 따라서 수도하는 사람은 항상 먹는 음즤을 줄이고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元氣가 몸 속을 운행할 수 있도록 훈 련을 거듭하면, 양기가 왕성해지며 음기는 저절로 소진 되어버린다. 양기가 왕성 해지고 음기가 쇠진하면 온갖 질병이 발생하지 않고 정신이 안정되고 육체도 기

28)『鍾呂傳道集』卷1 “仙非-也繈而瞿者鬼咆*者仙世~ 雜者人也惟人可以爲鬼可以爲fill. /多年不修,恣情″,病死而爲鬼也知之修鍊,韶凡入聖,而脫質劗山也4山有五等,法有三成終持在弋而功*分者世”(氣功• ″~, 上海古籍出版秘1989)

 얻을 수 있으며, 그 때에 비로소 장생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29)

Ⅲ. 신선: 불사의 도교적 의미

장자에서부터 도교(도가)적 이상인으로 등장하는진인, 신인, 도인은 무위를 실 천함으로서 세속적 속박을 벗어버린 자류로운 존재들이다. 도고적 지주는 세상의 속박을 완전히 탈각한 상태를 지칭한다. 그 속박에는 죽음이라는 속박도 포함된다. 인간을 속박히는 궁극적 한계인 죽음을 벗어난 존재들이기에 그들은 불사자들이 다. 도교에서不死와自由와無爲그리고得道는 동일한 내포를 가지는 개념이다. 무위를 통해 자우에 도달할 수 있괴 자유에 도달하면 무위를 실천할 수 있고 도 를 얻을 수 있다. 또한 도를 얻어야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괴 무위에 이를 수 있 다. 무위에 도달하여 도를 얻은 사람은 죽지 않는다. 진인은 도의 본래성 (authenticity)을 획득한 사람이기 때문에 참된 인간 '진인'(authentic man)이다 그는 도와 하나가 된 인간이기 때문에 '도인'(man of the Tao)이라 부를 수도 있다. 그리괴 인간으로서 도를 획득함으로서 인간의 유한한 속박과 현실의 상대 적 한계를 벗어나 신적인 존재로 승화되었기 때문에 '신인'(divine man)이라 불 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 신적인 상태로 고양된 인간은 때묻은 세상에 살지 않는 다. 세상을 벗어나 존재의 본래적 순수함이 보존되어 있는山속에 살거나 하늘로 비상히는 그는 '신선'이기도 하다. 그는 인간의 삶을 내리누르는 모든 무게로부터 지주,롭기 때문에 그 무게를 벗어나 하늘로 비상할 수 있다. 그는 구름을 타고 비 상할 수 있괴 물 속이나 불 속에 뛰어들어도 몸을 상하지 않괴 삶과 죽음의 경 계를 마음대로 노닐 수 있다. 산은 순수와 성스러움의 상징이다 또한 상승과 비 상은 자유로움의 전형적 상징이다. 그러한 자구를 획득한 사람, 무위를 실천하는 사람, 도를 얻은 사람, 죽지 않는 사람이 바로 '신선'(immortals)이다.

신선에 관한 상상적 관념은 고대에서부터 존재했고『장자』와『열자』그리고 『회남자』를 거치면서 도교적 종교 세계 안으로 편입되어 들어왔다. 그러나, 그러 한 신선과 불사에 관한 상상적 관념이 도교적 이론 체계 안으로 정식으로 편입되

29)『雲笈七籤』「맛떠陵君鍊氣法」: “″氣不盡,不爲鬼-不確不爲仙.元陽卽陽氣也食氣卽麟也常減食節欲使元氣內遵陽氣旣壯,皀陰氣自消.陽壯陰衰, 卽百病不f,* 미覷長生.”

고 체계회~된 것은 갈홍의『포박자』에서였다. 갈홍은 고대 중국의 신화 세계에서부 터 존재했던 불사와 신선의 상상을 도교의 도 개념과 연결시키괴 구체적인 도교 의 방술들과 연결시킴으로서, 불사와 신선을 도교적 상상 세계 속에 뿌릴 내리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도교적 신선시상의 정최자로 자리매김되었다.

갈홍의 공적은 고대부터 중국인의 종교적 삶 속에 존재해왔던 신선을 도교적 세계관 속에 자리를 잡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한정되지 않는다. 갈홍의 공적은 오 히려 신선을 도와 연결시김으로서, 현실의 질곡을 극복하고 '누구든지' 스스로의 노력과 수양에 의해 그러한 이상적 자유의 삶에 도달할 수 있는 기능성을 이론적 으로 확인한데서 찾을 수 있다. 갈홍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신선의 자유로움-을 묘 사히는 다양한 이야기와 신선 방술에 대한 소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산해경』 이나『장자』에 나오는導引,吐納등등 신선 방술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갈홍은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는 물론 질병이나 재난 전쟁 등 다양한 현실의 질곡을 수련과 수양에 의해 극복하괴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신분적 차별을 넘어서 서 우주적 원리와 하나되는 존재, 즉 도와 하나되는 불사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종교적 세계 해석을 제공함으로서 신선 불사의 탐구에 새로운 지평을 제공한다. 신선에 관한 갈홍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은 도교에서의 신선 사상과 신선 방술을 이해하는 먼 길에 있어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의미가 있

. 그 작업은 필자에게 남겨진 다음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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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의 노자 해석을 비판한 김경숙은 노자 읽기의 다양한 기능성을 무시하고 '노자는 이렇게 읽어야 한다는 시걸을 강조하는 편협한 시각에서 김용옥의 해석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한 시각에서는 고전은 '옳은 읽기와 '틀린'('다른'이 아닌) 읽기만이 존재하는 닫힌 문서가 되고 만다. 고전의 읽기에 관한 한 옳고 틀리고의 해답은 있을 수 없다. 얼마나 현실적 정합성을 가진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가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뿐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고전은 말이 없다. 고전을 말하는 사람은 고전 그 자체에 대해 밀耉는 것이 아니라, 고전을 통해 '자가의 말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의 세계와 자기의 세계가 융합된 지평의 융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김용옥의 노자 읽기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읽기가 전적으로 틀린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문학적 토론은 '무엇을?' 이라는 사실 인정의 차원에서는 사실의 옳고 그름에 대한 것이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 그 사실의 '왜?'를 묻는 차원에 나아가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를듯함'의 문제로 전환한다. 


김용옥이 한문 해석 능력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문제도 마찬가지다. 전혀 한문의 기본 원리도 모르는 사람이 헛소리 한 것이 아니라면(무엇을 묻는 차원) 독자적인 읽기의 전략(왜를 묻는 차원)을 무시한 채, 기초 실력 운운하는 발언 그 자체가 바로 기본 소양의 부족함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용옥의 문제는 그가 한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원문을 잘못 읽었다는데 있지 않다. 그의 잘못은 스스로의 읽기를 절대시하는 바로 그 독단성과 오만함에 있 다. 고전의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하는, 인간은 결국 함께 더블의 살아가야呑는 존재 이며, 그 더불어 살기의 윤리를 깨닫지 못言는 사람에게 지식은 오히려 위험한 무기 가 될 수 있다)


<도와 하나되는 삶 - 도교의 이상적 인간상> 

이 용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