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31
[기의 세계] 45. 기수련과 귀 - 중앙일보
도올 김용옥 1 박정진 | 불교춘추사 | 2001
김용옥 ‘기(氣)’가 뭐길래? > 게시판 > 공지사항 | 청목서원
‘기(氣)’가 뭐길래?
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으며, 공학 공부를 한 사람이다. 나와 비슷한 성장 배경의 사람들이 대개들 그러하듯이 나는 무당이나 점, 사주 등을 미신이라 생각해 왔으며, `기氣' 같은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했었다. 우리 아이들의 엄마는 불교 신자 집안 출신으로 독실한 불교 신자이다. 또 본인의 말에 의하면 `기'가 강해서 웬만한 무당이나 복술인(卜術人)들은 자기 앞에서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한단다. 사실 나는 온갖 방면에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서 단학, 명상, 기공에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읽어보았고 책을 따라서 흉내도 내 보았지만, 시작한 동기가 믿음이 없이 그저 호기심 때문이었던지라 기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련기간을 가지지 못했다. 반면, 아이들 엄마는 기공이고 뭐고 할 필요도 없이 그저 잠시 정신을 집중시키고 두 손바닥을 마주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도 기를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분하고 억울하게'도 애들 엄마로부터 `기'도 느끼지 못하는 ‘하등동물’ 취급을 받아왔던 터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명상을 하기도 뭣한 일이고, 유행하는 `단丹'. `선 禪' 이런 것을 지도하는 학원엘 다니기에도 맘이 내키지 않았다. 왜냐 하면 수련 몇 달이면 '기`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아직까지도 과학적, 객관적 근거가 없는 '기`란 것에 대하여 미심쩍어 하는 불신감이 약간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UFO, 아틀란티스 등의 고대문명, 동서양 모두에 널리 퍼져있는 유령 이야기, 환생, 최면술에 의한 전생 기억 -- 이런 신비주의occult 이야기들처럼 말이다.
최근 중국에서는 <파룬궁(法輪功)>이란 기공수련회가 규모가 너무 커지다 보니 중국 당국의 견제를 받게 되어서 무더기로 체포되는 소동이 있었지만, 사실 중국에 가보면 아침마다 공원에서 기공을 연마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유명한 기공사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한 번은 호텔에서 기공사에게 척추안마를 받아 본 적도 있지만 결과는 `글세, 이 정도라면 안 하니만 못 하쟎아?' 였다. 그 기공사가 엉터리였는지 아니면 내가 기감을 느끼는 능력이 너무 떨어져서 그런지는 모르겠다만. 그렇다고 해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일억 이상의 사람들이 모두 집단최면에 걸려서 헛것을 믿고 느끼고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는 없다. 어느 주간지의 <기> 관련 특집기사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도 기공 수련 인구가 백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 사람들은 분명히 <기>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아직까지 나 같은 일반인들은 도대체 `기'가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느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을 믿지 않을 도리도 없으니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 최소한 궁금증이라도 풀어야 숨이 터질 입장이 된 것이다.
`기'의 원산지는 동양, 특히 우리 나라와 중국, 일본이지만, 서구에서도 `기'에 대한 연구는 오래되었다. 기뿐 아니라 여러 가지의 초능력 연구소들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조시대의 퇴계, 율곡 선생의 `이기론' 논쟁이 역사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오래되었고, 특히 요즘은 사회 곳곳마다 `기'가 유행이다. 곳곳에 수련도장 간판이 있고 서점에 가면 `기氣'자가 들어 있는 제목의 책들을 수십 종류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학계를 보더라도 이공학(理工學) 계통의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한국정신과학학회>가 설립되어 있어서 기 현상을 연구의 한 분야로서 다루고 있으며, 기에 대한 책도 내가 알기로 두 권이나 공동 저술(논문 모음)로 발행하였다. 그런데 대단히 죄송하지만 내가 알고 싶어하는 `기란 무엇인가?', 즉 기의 정체에 대한 이론적 근거에 대한 이야기는 책에서 찾아 볼 수가 없다. 기껏 `생체 에너지, 공간 에너지, 우주 에너지, 정보를 담은 에너지' 등의 과학적으로 받아들이기 곤란한 ‘짐작’뿐이다. `기氣', `단丹', `선禪', `명상瞑想' 이런 유(類)의 서적들을 뒤져보아도 `기'에 대하여 납득할 만한 체계적인 설명이나 과학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책마다 사람마다 제각기 설명과 주장이 다르다. 심지어 모 대학교수의 저서로서 `기과학'이라는 제명의 책도 그 내용을 보면 전혀 과학적이 아니다. 아래에 내가 인용한 일본 과학자인 마루야마 도시아끼 丸山 敏秋의 “기란 무엇인가? <氣-論語부터 신과학까지, 1986>”라는 책에도 동양 고전에 나오는 ‘기’에 대한 소개와 일반적인 기현상(氣現像)에 대한 소개뿐, 기에 대한 과학적인 이론적 근거는 없다.
내가 요구하는 ‘과학적’이란 것은 일반 과학 이론들처럼 현상과 기존의 이론을 토대로 하여 합당한 논리와 알려진 물리법칙에 의하여 만들어진 가설을 말한다. 그 가설을 확인할 수 있는 실험 결과까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표된 책들에 나와 있는 ‘기’에 대한 설명, 주장들은 그에 대한 근거가 너무나 막연하다. 그저 옛 글에 이러저러하게 나와 있으며, 기공하는 사람들의 느낌이 이러저러한 것 같다는 말뿐이다. 이래서는 ‘기’의 실재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기’란 그저 집단 내지 자기최면에 의한 가상적 효과이거나, 두뇌의 작용에 의하여 우리 신체가 신경생리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라는 판단을 반증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과학은 관찰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적 가설을 수립하고, 그 가설을 실험으로 확인(검증, 반증)하는 과정이다. 먼저 <기 현상>을 기존의 물리법칙으로서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논리적이나 실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으며, 확인할 수 없는 것은 과학적일 수 없는 것이다. 개인적인 체험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비슷한 예로서 무슨 띠는 금(쇠 金)이요 무슨 띠는 목(木)이므로, 목이 금에게 장가가면 안 된다(金克木)라는 식의 사주팔자 풀이는 `무슨 띠가 어째서 금인가?하는 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논리적, 사실적 근거가 없으므로 과학적이지 않은 것이다. 물론 사실인지의 여부를 떠나서 원리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도대체 `기'란 무엇인가? 어떤 것인가? 지구상의 수억 이상의 사람들이 믿고 또 느끼고 있다는 `기'가 어째서 이러저러한 것이리라 하는 설명조차 찾을 길이 없단 말인가? 서양 사람들이 `기'를 무시한다고 `기'분(氣分) 나빠할 처지가 못 된다. 나는 공학을 전공했던 사람이며 평소에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과학적 근거가 없으면 믿을 수 없다. 내가 요구하는 과학적인 근거란 관련 현상을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가설로서, 물리법칙에 위배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기'란 것이 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확실한 것이라면 `기'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타당한 가설 정도는 세울 수 있을 것 아닌가? 그 존재의 근원에 대한 `가설'조차 없는 것을 실재(實在)라고 믿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과학 지식들을 동원해서 `기'의 과학적 근거를 유추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가설의 수준이다. 그러나 과학 이론들과 합치되고 논리적으로 타당한 가설이라면 이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기의 존재와 작용'을 믿을 수 있다.
그런데 반신반의로서 시작된 연구가 뜻밖에도 내가 가진 과학지식과 그리고 여러 가지 초자연적 현상들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주장(종교의 교리를 감히 이렇게 표현함은 과학의 기본인 객관적 입장을 지키고자 해서이다)들'까지도 `기'에 의해서 상당부분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기'를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감히 `기'에 대한 글을 쓰기까지에 이르게 된 동기이다.
가설의 도입과 그 전개에 있어서는 `나의 생각과 추측'을 최대한 배제하고 나름대로 과학적 이론과 사실만을 그 근거로 삼고자 노력하였으며, 인용과 참고에 있어서는 그 근거가 확실한 자료와 해당 부분의 공신력이 충분히 인정된 학자들의 저술만 채택하였다.
나의 가설은 현상으로서의 ‘기’로부터 출발하지만 물질의 ‘식(識)’을 거쳐 의식과 영혼 그리고 사후세계에 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단순히 ‘기’에 대한 생각이라면 언젠가 과학이 밝혀 줄 것이라 기대하며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영혼과 사후세계에 까지 관련되는 것이라면 그럴 수가 없는 일이다. 왜냐 하면 내가 살아가고 있는 매 순간마다에 직접적으로 가장 필요한 지식인데, 내가 죽기 전까지 과학이 이 모든 것을 밝혀 내어서 내게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은 긴데 인생은 너무 짧다. 그러니 비록 ‘가설’이라 할지라도 나는 내 나름대로 가장 가능성이 크고 타당해 보이는 것을 찾아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나의 조그만 소망은 <기>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고자 하는 것이다. 과학의 발달로 `기'의 근원과 작용기전이 확실하게 밝혀지기를 바란다. 현대 과학의 진보 속도를 보면 그리 머지 않아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2. 동양 사상(東洋 思想)에서의 기氣.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기'라는 말에 대한 검토와 정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하지 않는다면 서점의 수많은 `기'에 대한 책들과 또 일상용어로서의 `기'의 다양한 의미가 서로 헛갈려서 종잡을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기'에 대해서 혼란을 느꼈던 가장 큰 이유이다. 물론 아직까지 `기의 학문`이 정립되어 있지 아니하여 사람들마다 제각기 그 사용하는 의미가 조금씩 다르므로, 나의 독단으로 내린 정의는 잘 못된 것일 염려도 있다. 다만 내가 내린 바 '기`에 대한 결론과, 통상적으로 쓰여져 내려온 '기`의 정의가 그리 다르지 않으므로 이렇게 서두에서부터 '기`의 정의를 감히 규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 전단계로서 고전(古典)에 나오는 ‘기’라는 말과 그 의미를 살펴보자.
`기'란 말은 동양문화권에만 있는 개념으로서 오래 전부터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중국에서는 이미 춘추전국 시대부터 찾아 볼 수 있다. 더 오래 된 갑골문자 시대에는 찾아 볼 수가 없으며(주;‘三’자 비슷한 모양으로서 맨 아래의 가로 ‘一’의 끝이 아래로 처져 있는 글자로서, ‘바라다’라는 의미의 글자를 ‘氣’자로 보는 견해도 있어나, 다수 학자들은 ‘걸 乞’자의 원형으로 본다), 논어(論語)에서는 식기(食氣;식욕), 사기(辭氣;말씨, 말투) 등의 예 이외에 혈기(血氣)라는 용례가 있을 뿐이다. 맹자(孟子)에는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는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말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기‘의 본산이요 종주라 일컬어지는 도가(道家)의 시조인 노자(老子)에는 ’기‘가 불과 3회밖에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춘추전국시대의 공자, 맹자, 노자 시대까지에는 ’기‘가 뚜렷한 실체나 개념으로 체계화되지 않았던 것이다.
‘기’라는 말과 개념이 정립되어 많이 사용되는 것은 장자(莊子)부터이다. 도가(道家)의 노자(老子)를 이은 장자(노자의 약 2백년 후의 인물)는 기를 만물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기본이며, 나아가서 물질세계를 구성하는 기초 원소라 생각했다. 생과 사를 기의 취산(聚散;모이고 흩어짐)으로 보는 생각이 여기서 나온다.
人之生 氣之聚也 聚則爲生 散則爲死......故曰 通天下一氣耳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기의 모임이다. 기가 모이면 생명이 되고 흩어지는 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옛부터 이르기를 천하에 ‘기’ 하나뿐이로다 한다”
후한(後漢) 시대의 왕충(王充)은 모든 것이 `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도 인간도 `기'의 변화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 생각했다. `기'를 `음(陰氣)'과 `양(陽氣)'으로 나누는 음양설과 `기'의 변화를 금, 수, 목, 화, 토의 다섯 가지로 분류 분석하는 오행설도 대략 이 무렵에 확립되었다(전국시대 말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음).
宋代에 기의 개념이 사상적으로 전개되어. 정이천(程伊川)과 주자(朱子)가 기의 변화를 가져오는 내재적 원리로서 <리(理)>를 내세워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주자는 理는 그 자체로서 형질도 없고 움직이지도 정지하지도 않지만 기의 내재적 원리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모든 사물은 理와 氣의 상호작용에 의거하며, 理는 형이상(形以上)의 통일의 원리이고 氣는 형이하(形以下), 즉 존재하고 변화하는 실체로 보았다. 당시의 성리학(性理學)에서는 음양이 서로 작용하는 원리를 <이(理)>라하고 <이(理)>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기(氣)>라 하였다. 주자(朱子)는 이선기후(理先氣後)라 하여 이가 기를 낳는다고 주장하였다. 주자의 생각은 <식이 기의 근원>이라 생각하는 나와 유사하지만, 그후의 다른 학자들의 생각은 다소 차이가 있다. 대체로 리기일원(理氣一元)을 지지하는 편이었으며, 理보다는 氣에 더 비중을 두었다. 이것은 理를 개념적인 것으로, 氣를 실재하는 우주만물의 존재와 변화의 기본적 원소로 보았기 때문이다.
氣의 배경으로서 理가 도입된 것은 흥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理는 곧 자연의 법칙, 즉 현대 과학 용어로 하자면 물리(物理)법칙이다. 서양의 과학이 법칙을 추구함으로서 현재와 같은 성과를 이룬데 비해서 동양에서는 법칙을 밝히는 일에 소홀하였고 따라서 과학의 발전이 늦어진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도 법칙의 존재와 필요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주;理라는 개념은 ‘법칙’을 넘어서 氣가 실재할 수 있는 논리적 바탕을 제공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점에서 기의 배경에는 식(識)이 있어야 한다는 나의 가설과 상통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유학(儒學)에서의 理는 識과는 차이가 있다. 실은 그 ‘차이’가 이 책의 주제라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동양사상에 있어서 氣는 “현상계의 모든 존재 또는 기능의 근원”(마루야마 도시아끼)이며, 물질의 원소, 생기(生氣), 정신기능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물질, 생명, 마음의 三界가 모두 기의 소행이고, 자연의 모든 변화는 기의 움직임(動靜)이다.
이러한 생각을 현대 물리학에 비교하면 기는 물질(소립자), 에너지와 모든 상호작용(물리학에서는 ‘힘’을 포함한 상호작용이란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을 합친 개념이다.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현대까지 이어온 생기론(生氣論)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3. 氣란 무엇인가? -- 氣의 정의(定義)
이처럼 동양의 고전(古典)에 나오는 기는 그 개념이 너무 광범위하고 포괄적이어서 그러한 상태로서는 과학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리고 기라는 개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질과 에너지는 이미 현대과학에서 거의 구명되었으며 생명력으로서의 생기(生氣) 역시 생리학과 분자생물학의 발달로 과학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전에 등장하는 넓은 ‘기’의 개념에서 아직까지 과학적으로 해명되지 아니한 부분은 무엇인가?
‘기’를 ‘氣’만이 아니라 ’理‘를 합친 개념으로서 파악하되, 거기에서 물리학적으로 규명된 물질과 에너지(힘)를 제외하면 <상호작용(변화)에 대한 의지>만 남게 된다. 근래 우리 나라의 <기철학>의 주창자인 도올 김용옥 선생은 저서 <기철학 산조>의 머릿글 “탄현술(彈弦述)”에서 <기는 물(物)의 의지(意志;꼴림, 하고자 함)>이라 정의하고 있다. 나는 김용옥의 기에 대한 정의가 가장 정확한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일상의 생활 용어로서 주로 사용하는 `기'는 `경향'이라는 의미와, 생체 작용으로서 느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생기(生氣), `살기(殺氣)', `한기(寒氣)', `끼(氣)가 있다' 등의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기'는 그냥 수동적인 `어떤 상태'가 아니라, 그 `어떤 상태'가 능동적으로 외부로 표출되거나 작용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상태의 주체'는 `생기', `살기'에서처럼 인간이나 동물 등의 생물이기도 하고 `한기'에서처럼 무생물이기도 하다. `경향'은 좀 더 상세하게는 `의지의 표출, 작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도올의 “기는 의지(꼴림, 하고자 함)”라는 말과 합치하고 있다.
이외에 `기'는 `기가 막힌다', `기운(氣運)' 등으로 생체나 우주 내의 어떤 `힘'의 흐름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과 그 때의 의미는 근본적인 것 즉 `정의'가 아니라, 2 차적인 것이라서 부(副)현상적인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어 일단 제외한다. 나중에 <생체 내의 기>에서 다시 검토될 것이다.
그렇다면 <의지;경향, 꼴림>이란 무엇인가?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의식을 <지, 의, 정>, 즉 이성, 의지, 감정으로 분석한다. 여기에 의하면 의지는 의식의 한 부분(작용)이다. 그러나 <의식>이라는 말은 그리 쉬운 말이 아니다. 과학 특히 요즘의 첨단분야인 인공지능 연구에서는 <생각할 수 있는 기계(思考機械)>의 가능성까지 인정하는 추세이며,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있는가?'하는 문제에는 아직까지 누구도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 좀 더 상세하게 검토해 볼 것이다.
일단 <의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외부의 자극에 대하여 단순한 기계(조건반사)적 반응을 하지 않을 수 있게 하며, 원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외부의 원인과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
요는 의지란 인과율에서의 원인과 결과 사이에 개입 작용하여 원하는 방향으로 결과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과 목적성 - 한마디로 `주체성'을 가진 것이다.
주의할 것은 <기 = 의지>라는 것은 아니다. 도올 선생께서도 괄호를 붙여놓았듯이, `꼴림, 하고자 함'은 `의지에서 발휘되어 나오는 것'이지 의지 그 자체는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의지`는 주체적으로 내부에서 외부로 경향; 꼴림이라는 형태로 '기`를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기계(조건반사)적'이 아니고, 외부에 대하여 `요구'를 작용시킬 수 있으려면 추가적인 어떤 `능력'이 필요하다. ‘의지’란 어떤 목적이나 의도, 즉 방향성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의 설정 내지 지향을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정보처리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맹목적인 ‘꼴림’이 되고 마는데, 맹목적이라면 ‘의도’나 ‘방향성’이 없는 것이다. 이 정보처리 능력을 인간에 비유한다면 분석, 판단하고 선택하는 지적 능력이 될 것이다. 이 <분석, 판단, 선택>은 심리학 용어로는 `이성'에 가장 가깝다. 사실에 있어서 이성은 의지의 바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과 의지와 감정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의식'의 각기 다른 면일 뿐이며, 항상 함께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므로 `의식'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의미의 의식도 너무 좁다. 부족하다. ‘기’--의지를 가질 수 있는 것으로서 우리의 육체적 본능과 무의식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의식보다 더 폭 넓은 무엇--우리 인간의 삶의 이유와 목적에 관련되는 모든 <경향>이 의지와 기의 배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에 가장 유사한 개념이 불교의 유식설(唯識說)에서 설명되고 있는 바와 같이 의식과 본능을 포함한 <식 識>이다. 나는 `식'이란 말이 마음에 든다. 식이란 ‘안다’는 뜻이며, ‘안다’는 곧 ‘구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대상과 다른 것의 차이를 알 수 있으며, 그 차이가 행동의 선택의 바탕이 되는 기초적인 판단능력을 말한다. 나는 앞으로 모든 물질--소립자들까지도 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 식에 의해서 기를 발휘한다는 내 생각의 근거를 제시할 것인 바, 그러한 내 생각은 `범식론(凡識論)'이라 할 수 있겠다. 범식론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서 범심론(汎心論)이 있다. 모든 물질에는 ‘마음’이 있다는 생각이다.
`식(識)'이란 말의 의미는 상당히 포괄적이다. 철학에서의 가장 큰 두 개의 주제인 인식론(認識論)과 실체론(實體論)의 근저에 있는 동양적 개념이 식이다.
불교(유식론)에서 말하는 식은 우리 신체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느끼는 다섯 개의 식(전오식; 눈, 귀, 코, 혀, 피부의 다섯 감각)과 의식, 말라식, 아뢰야식 등의 팔식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식’이란 글자의 의미는 ‘식별’, ‘인식’ 등의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안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안다’의 범주에는 ‘느낌(感覺)’도 포함되어 있다. ‘안다’와 ‘느낀다’를 합하면 ‘정보를 받아들인다’라는 말이다.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cybernetics 이론과 섀넌의 정보(communication) 이론 등에 의해서 1940년 대 말경에 등장한 ‘정보’는 현대 물리학과 철학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어 있다.)
동사로서의 ‘식’은 ‘정보를 받아들임‘이지만, 명사로서의 ‘식은’ ‘지식’ 그리고 ‘아뢰야식’ 등의 용례에서와 같이 ‘정보 그 자체’이다. 이로서 ‘식’은 <‘정보 그 자체’와 ‘정보를 교환(처리)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언어를 도구로서 사물을 인식할 때에 명사와 동사의 복합적 의미로 인식하는 경우는 매우 흔히 있는 일이다. 영어 단어에서 대부분의 동사는 동시에 명사이라는 것이 그 증거이다. 철학, 물리학에 있어서도 ‘질료와 형상’, ‘체(體와 용(用)’, 즉 ‘존재와 현상을 과연 분리해야 하는가 하는 논쟁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나의 `상상'의 출발점은 기였지만, 기의 성질과 이론적 근거에 대한 검토에서 기의 배경이 되는 무엇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얻은 결실이 <식識>이었다. 실제로 이 글은 <기>에 대한 글이 아니라 <식>에 대한 글이다. <기>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내가 얻은 결론은 <식>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를 연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기의 정체에 대하여 납득할만한 가설 하나 내놓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나는 <기>의 배후에 있는 <식>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전에 나는 <식> 역시 <기>처럼 하나의 애매 모호한 개념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기>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식>을 깨우치게 된 것이다. 사실 <기>의 수준에 그치는 생각이었다면 나는 굳이 이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식>의 깨우침은 나에게 많은 변화를 주었으며, 삶의 목적을 알게 해주었다. `우물 안의 개구리의 자만심'이겠지만, 나는 다른 이들이 오랜 공부와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얻은 것을 함께 나누려 하는 것이다.
이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느낌으로서 증언하는 바에 의하면 ‘기’라는 작용이 있다(實在한다).
작용으로서의 ‘기’가 있으려면 그 근원인 ‘식識’이 있어야 한다.
`기'는 `식'이 외부에 대하여 발휘하는 ‘의지(꼴림, 경향)일 것이다.>
기는 식에 의해서 발휘될 수 있다. 따라서 식은 기의 전제조건이므로 기가 있으면 식이 있어야 한다. 또한 식은 그 자체 만으로서는 존재의 의의가 없으므로(외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식이 있으면 기도 있다. 즉, 기와 식은 상호보완적이며 함께 있는 것이다. 식 그 자체는 물리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식이 물질을 포함한 외부에 작용하는 수단인 기는 물리적이라야 한다. `물리적'이라 함은 물리법칙을 따르는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 `법칙'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아니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기’의 작용은 알려진 물리법칙에 어긋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기는 물리적인 어떤 것일까?
기는 에너지가 아니다. 기는 힘도 아니다. 에너지나 힘이라면 물리적으로 측정이 가능할 것인 바, 아직 아무도 그 측정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기’를 옛 선현들의 정의와 같이 물리적인 힘, 그리고 소립자의 여러 근본적 성질을 포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물리학에서 밝혀 낸 소립자의 성질은 일단 제외하고서 ‘식’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유형의 물질이 아닌 무형의 것으로서, 에너지와 힘을 제외한다면 어떤 가능성이 남는가? 물리학 책을 다 뒤져보면 딱 한 가지가 남아 있다. 열역학 제2법칙에 나오는 엔트로피다. 엔트로피는 `무질서'라는 말로 대체되기도 하지만 가장 폭 넓은 의미로서는 `정보'의 개념이다. 기는 식이 외부 대상에 전달하는 정보일 것이다. 즉 ‘경향, 꼴림’은 외부에 정보의 형태로 작용한다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정보>는 이 책의 주 연구대상의 하나이다.
미국 네바다 대학의 <의식 연구소> 소장인 딘 대린 Dean Darin은 "The Conscious Universe” (“의식의 세계”, 도서출판 양문, 1999. 주;이 책의 영문 제명은 “의식의 세계”가 아니라 “의식을 가지고 있는 우주”라는 의미이다)에서 염력(念力)을 “의식과 사물과의 상호작용”이라 정의하면서 아울러 “실험에 의하면 염력은 의식으로부터 물질로 정보가 이동하는 현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식과 기는 어떤 형태의 실재일까? 소립자의 가장 자연스러운 존재 형태가 파동적이라는 점과, 기를 감지하는 사람들이 대개 기를 파동의 형태로 느낀다는 점에서 기도 일종의 파동과 유사하거나 같은 형태라고 보는 것이 가장 오차가 작을 것이다. 이 생각은 기, 즉 식의 작용이 홀로그래피와 같을 것이라는 가정의 근거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물리학이 밝힌 바와 같이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파동이다. 존재의 정의는 ‘차이(差異)’이다. 주변 혹은 다른 존재와의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그 차이에 의해서 주변과 다른 존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존재한다’라고 정의한다. 물론 ‘차이’와 ‘영향력’은 동일한 것이다. 파동은 순수하게 ‘차이’만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파동의 그림인 사인sin 곡선은 어떤 무엇이 주기적으로 차이를 나타내는(변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단순한 존재의 형태이다. 현대 물리학의 최첨단 이론으로서 모든 존재와 힘을 한꺼번에 해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는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도 소립자와 힘 모두를 극히 미세한 끈의 진동으로 해석하려는 이론이다. 그러나 식과 기를 수학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지금으로서는 굳이 그 `형태'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파동이든 입자든 장(場)이든.
소립자--물질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기론>은 그리스 시대부터 있어 왔던 생각이며, 유명한 철학자 베르그송 등에 의해서 주장되었고, 금세기 초에도 생물학자 한스 드리슈 등이 신봉하던 이론이었다. 그리고 <기>라는 개념 또는 그 존재는 동양에서는 보편화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기를 의지 또는 식의 외부 작용수단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생각은 찾아보기 어렵다.(이경숙 저 “마음의 여행”에는 “기는 바로 영혼의 실체인 정보의 활동이며....‘서로를 알리려는 힘’이라 나와 있다. 정신세계사, 1999, P258). 물론 본질인 식과 현상인 기는 별 개로 나누어 생각할 수도 있고 하나로 통합하여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식과 기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의식과 사후식을 이해하는 데에는 기라는 개념에 가까운 것 만으로서는 부족하며, 식이라는 기의 근원이 되는 실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기일원“이냐 ”이기이원“이냐 하는 옛 논쟁에 비유한다면 나의 생각은 ”식(이)일원론“이라 하겠다. 그러나 <기>라는 말과 개념이 이미 널리 익숙해져 있으며, 본질과 현상은 굳이 서로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글에서 앞으로 <식>과 <기>가 다소 혼용될 것임을 미리 사과 드린다
참고로, 오랫동안 생명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철학이었던 <생기론>과 나의 생각의 차이점을 말씀드리겠다. <식>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이다.
<생기론>은 물질에 생명(생기)을 부여하는 보이지 않는 무엇이 있다는 생각이다. 물질에 생기가 작용하면 생물이 되고, 작용하지 않으면 그대로 물질--무생물이라는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된 이 생각은 그 역사가 매우 길다. 이와 유사한 생각으로 물활론, 범신론, 범심론 등이 있는데, 그 중에 특히 이 책과 관련하여 인용할만한 이론으로서 띠야르 샤르댕Teilhard de Chardin(1881-1955)의 물활론이다.
띠야르 샤르댕은 프랑스의 신부였으며 철학자, 고생물학자로서, 물질과 정신(자연과 인간) 사이에 있는 간격을 설명하고 극복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새롭게 정의한다. 물리학에서 에너지는 스칼라 양, 즉 그 크기만 있고 방향성을 가지지 않는 양이다. 샤르댕은 에너지가 방향을 가진 벡터 양이라 가정한다. ‘방향성’은 앞에서의 <기 = 꼴림, 경향>이라는 정의와, 그리고 ‘기’가 방향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식이 뒷받침해야 한다는 나의 가설과 동일한 논리 위에 있다. 에너지의 ‘방향’은 곧 에너지의 ‘의지, 생기’이다. 샤르댕은 에너지(모든 물질의 존재와 그 변화의 근본은 에너지이라는 물리 기초를 염두에 두시라)에 진화를 추구하는 방향성으로서 의지, 즉 ‘기’가 있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는 나아가서 생물 그리고 인간은 이 에너지의‘정신적 벡터’의 작용 결과이며, ‘정신적 벡터’는 우주 전체에 작용하는 것이므로 우주(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최후의 완전 진화한 상태를 지향하여 나아가는(진화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모든 에너지가 집중되는 이 최종적인 상태(목표)를 <오메가 포인트>라 하였다. 이 생각은 불교에서 모든 존재가 그 불성을 찾아서 해탈(성불)하게 되는 것이라는 교리와 같은 것이다. 이 것은 나의 <식--기> 가설과 상당히 일치한다. 다만 샤르댕은 ‘정신적 벡터’의 방향, 즉 그 본질이 ‘지고(至高)의 선(善)’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것은 다소 비약이 아닐까 한다. 소립자가 가지고 있는 미소한 에너지, 그것도 그 일부분에 우주 전체의 궁극적인 목표가 이미 담겨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기에는 논리에 비약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검토는 <사후식의 세계> 편에서 다시 생각해 보겠다. 샤르댕의 <오메가 포인트> 가설은 나름대로 물활론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제안된 가설로서 현대에도 신과학 방면의 과학자들이 즐겨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가설들은 물리법칙이나 물질적인 측면에서의 관점만으로는 도저히 생명현상(생명의 탄생과 진화)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긴 가설이지만, 현대에 들어서 분자생물학의 발달로 부정되고 있다.
샤르댕을 제외한 다른 <생기론>이 물질과 생기가 독립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데 비해서 나의 생각은 모든 물질--그 근원인 소립자는 <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 그 자체는 분명히 물리적인 존재로서 물질과 분리될 수 없다. 다만 소립자와 소립자의 집합체인 생명체 사이에는 그 <식>의 수준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것은 <범심론 panpsychism>과 비슷하다 하겠다.
생기론 또는 물활론을 인정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생물의 <합목적적 성격>을 인정하는 가 아닌가에 달린 것이다. 모든 생물은 전체로서는 물론, 그 기본 단위인 하나의 세포까지도 어떤 고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목적성>이 어떻게 해서 생겨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명의 탄생과 진화의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물론 ‘목적’을 가진다는 것은 곧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논리적인 전제로 한다. 유물론적 환원주의자들의 생각은 ‘우연’과 ‘자연도태’에 의해서, 통합(전체)주의자들의 생각은 복잡계의 제2차 법칙적 특성(창발)에 의해서 생겼다는 쪽이다. 양측 공히 자신 있게 내 세울 수 있는 이론적 근거는 없다. 나의 가설은 <식>, 즉 능동적으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소립자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식>은 곧 <정보>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정보’란 말의 의미처럼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현대 과학 철학에서 말하는 바, <정보는 정보를 낳는다>라는 명제와 같이 능동적인 <정보>인 것이다. 현대 물리학의 최첨단인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상호 결합되는 접점에서는 물질의 존재, 즉 ‘객관적 실체’와 ‘정보의 초광속 전달’은 존재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상보성인 것이다. 상세한 것은 <소립자> 편에서 아인슈타인의 EPR 상상실험과 보아의 “하나의 통합체”이론, 그리고 이 둘을 결합하여 밝힌 죤 벨 Jhon Bell의 정리 및 그 실험 결과를 통해서 말씀 드리겠다.
이상이 내가 생각하는 <식과 기의 정의>이다.
이제 과학적 사실들이 위와 같은 기의 정의와 부합되고, 그리고 과학 이론들이 <기>에 대하여 알려진 여러 가지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를 검토해 보자.
'장풍도사' 의 '氣막힌' 세태 고발, 장풍 한번 쐬는데 얼마요? "돈으로 氣사고 초능력 탐내다 몸 망치고" : 네이버 블로그
[[도와 하나되는 삶* ** - 도교의 이상적 인간상 이용주 (2001)
도와 하나되는 삶* **
- 도교의 이상적 인간상 이 용 주*” (2001)
I. 도의 인간학적 함의 Ⅱ. 도와 하나되는 몸짓(도교수행) 1.
수행으로서의 4無爲'(n°n action) 2.
몸(身,形)과 마음(心,神)의 문제 3.
기의 수행과精•氣•神 4.
수행과 성스러운 시간:生氣와死氣 5.氣수행의 목표로서 '″ III. 신선: 불사의
도교적 의미 |
* 이 논문은 20%년도 한국학술진홍재단의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 본 논문의 제목으로 선택한 '도와 하나되는 삶℃與道合-')은『회남자』에 나오는 표 현으되 도교의 이상 인간을 내용적으로 기장 잘 드러낸다. 도교에서는 도를 체득한 이상 상태를 표현할 때에 '得道' 혹은 '體道라는 말을 가장 널리 시용하고 있다. 그리고道를 얻은 사람을 가리기는 표현은道弋眞人神f山,神人至人등 다양하다.
***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1 . 도의 인간학적 함의
'道'는 학파와 종파의 차이를 떠나 중국 종교의 이상적 인간상을 묘사할 때 가 장 먼저 이해해야 할 근원적인 개념이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중국 종교는 거의 예외 없이 도를 이해하거나
아니면 그 도를 체득하여 도와 하나되는 삶을 사는 인간을 이상적 인간으로 제시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도교 전통은 몸의 수련을 통 해 도와 하나되는 몸짓을 획득하는得道를 종교의 궁극적 목표로서 제시하고 있 기 때문에, 도와 하나되는 삶을 이야기할 경우 도교를 가장 먼저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道 그 자체의 개념적 원리적 성격에 관해서는 이미 수많은 논지-들이 다양한 관 점에서 엄청난 양의 글을 써 놓았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반복하는 것 자체가 무 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중국 문호를 가장 중국 문화답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도교에서 지향히는 이상적 인간상을 탐구하기 위한 전제로 서,道에 대해 필요한 한에서 간단하게 서술할 필요가 있다.
문자학적 의미에서 도는 행위와 사상의 통일체를 지칭하는 개념 기호라고
이해 할 수 있다. 즉, 도는 동작 혹은 행위를 나타내는
요소(行)와 사고 혹은 생각 나 아가 사람 그 자체를 나타내는
요소(首)로 구성되어 있다.
그 두 요소로 구성된 도의 본래 의미는 길, 즉 사람이 다니는 길이다.『설문해자』에서는 “도는 사람이 다니는 길이다. 그것은 일정한 방향을 향해 꽫어있다”(道所行道也-達謂之道) 라고道의 문자적 함의(字意`)를 설명하고 있다.道즉 길은 일정한 방향-을 향해 꽫어 있어서, 사람을 그 방향으로 인도하는 지표로서 역할을
한다는 뜻이 그의 설 명 속에 숨어 있다. 중국의 고대 문헌에서 도는 많은 경우 사상적 의미가 전혀
담 기지 않은 단순한 '통행로라는 의미에서 그 말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설문』에서 이미 어느 정도 암시되어 있었던 것처럼,道는 사람 혹은
사물 나아가 자연 의 존재 방식을 결정히는 규율 혹은 원리라는 뜻으로 의미가 확대된다.道개념의 의미
확대는 춘추 시대에 와서 거의 일반화되는 경향을 보이 는데, “하늘의 도는 멀괴 사람의 도는 가깝다. 따라서 인간과 멀리 떨어진 하늘에 서 발생하는 천문 현상의 변화를 근거로 인간사의 길흉 회복을 예측하는 것은
불 기능하다."(天道遠人道미,非所及也何以魃.Ⅹ『좌전』소공18년)리는鄭子産의
발언은 그러한 경향을 대표하는例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道는 자연과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존재를 지배하는
규범이자 원리라고 보는 이러한 확대된 도 관념 은 노자와 장자, 그리고 공자 등 고대 철인들을 거치면서
그 내용이 더욱 풍부해 졌다.
특히 본론에서 문제삼는 도교(도가)의 도론은 고대의 철인들이 정립한 도의 규정을 바탕으로 전개된 것이며, 그러한
도론에 근거하여 자연의 규율이자 인 간 존재의 근거가 되는 도를 체득하여 도와 하나가 되는 삶을 완성하고가 하는 도교적 양생 수양론이 수립되기에
이른다. 도와 수양론과의 결합을 이해하기 위 해 도교(도7b의 도론의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도교적 道의 의미를 가장 포괄적으로 정립한 문서는 말할 필요도 없이『道德經』이다.1)
l)『도덕경』의 저자가 누구인가의 문제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학계의 토론에도 불구하 괴 그 문서의 저지를 확정旨는 것은 어려운 것 같다. 일단『도덕경』의 저자가 '노자' 라고 하는『사기의 지적은 그 자체가 이미 역사적 시걸로서 신빙성이 결여되어 있 다.『사기에 묘시된 '노자'의 전기 자체가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신화적인 성격이 종합하면서 우주 만물의 근거가 되는 형이상학적 근원이 '도라고 규정한다.道의 여러 다양한 성격은 근본적으로『도덕경』이 정립한 도론에서 파생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개관해 볼 때,『도덕경』의 도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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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은 이념적으로 확대된道에 관한 고대 중국의 다양한 담론을
- 첫째, 도는 천지만물의 근원이다. “도는 만물의 비밀을 담고 있다”(道者,萬物之奧. 62장)라든가, “도는 만물의 으뜸인 것 같다"(似萬物之宗) 혹은 “상제보다 앞서 존재言는 듯하다"(象帝之先4장) 등은 도의 근원성을 표현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 둘째, 도는 다른 창조자의 창조 행위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
- 셋째, 도는 무와 유라는 존재의 근본 형식을 통일히는 근원적 통합의 원리이다.
- 따라서 도는 있음과 없음, 생성과 소멸, 존재와 비존재, 삶과 죽음 등등의 대립적 힘을 통합하며, 그 자신은 생성과 소멸을 뛰어 넘는 근원성을 지니고 있다.
- 넷째, 존재의 근원인 도는 인간의 감각적 인식을 초월한다. 인간의 인식은 근본 적으로 상대적이며, 기호(名)를 통해서만 사물을 파악한다. 그러나 도는 그런 상대 성을 넘어서 있으며, 모든 기호적 제약을 벗어나 있다. “도를 이름 불여 말할 수 있으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든지, “도는 항상 이름을 넘어 서 있다"(道常無各32장) 등은 개념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도의 절대성을 표현하 는 말들이다.
- 다섯째, 무명이고 무형인 도는 없는 듯 하지만, 사실 모든 것의 생성과 창조의 근원이다.『도덕경』에서 도는 무한하며 무형이괴 생성하고 소멸히는 존재의 상대 성을 초월해 있는 절대적 생명의 원리로 설정되어 있다.
강한 기록이다. 그것은 이미 신화화된 노자의 전기(仙話)에 불과하다. 여기서는『도 덕경』의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괴『도덕경』의道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신선화된 노자의 전기가 형성되는 과정, 그리고 그 신선화된 노자가 도교 적 지평 안으로 편입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요시오카 요시토요(吉~의『道敎E 佛敎1』(國書刊行會, 1959) 및
쿠스야마 하루키(楠l″)의『老子傳說7)硏究』(創文弘1979년) 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2)道의 성격과 투정을 논하는 수많은 연구 성과가 쌓여
있지만, -『老子今注今譯』(중화서국)의「서론」부분이 도의 성격을 종합적으로 잘 개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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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적 수양론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사실은 도가 단순히 우주의 개관적 근원일뿐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인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한편,『도덕 장에서는道의 근원성과 본래성을 표현하기 위해 자연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도는 무엇보다는 '자연' 그 자체라는 함의를 담고 있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자연'은 오늘날 영어로 Nature라고 번역될 수 있는 실체적 자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3) 하지만, '자연'이리는 개념이 실제적인 자연 현상뿐만 아니라 인위적인 조작이 가미되지 않은 사물의 본래적이고 순수한 상태를 가리킨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도덕경』의 '자연계는 분명 도의 본래성과 근원성이 온전히 보존된 원초 의 순수 상태라는 함의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道개념에 담긴 추상성과 ~을 극복하되 사물 존재 그 자체에 내재하는 본래적 순수성이 리는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 '도와 '자연'을 병치시킨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도교는 인간의 현실이 부정적인 질곡 상황에 처해있는 것으로 진단하되
도와 자연으로 대표되는 존재의 순수성 모델을 통해 현실의 질곡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엄밀한 주석학적 토론을 유보하고 말한다면, 도교의 '자연은 인간이 실현해야 할 본래적 이상적 상태, 존재의 시초로
휘귀하여 발견할 수 있는 본래성, 순수성, 근원성을 지칭하는
개념어이다. 그리고 이 지점이 도교의 도론과 인간학이 만나는 가장 중요한 고리의 하나이다. 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결국, 다양한 수행의 방법을 통해 인간이
존재의 본래성, 순수성을 회복하고 인위적 조 작에 의해 파괴되기 이전의 본래적 있음('자연')으로 되돌아간다는 구원론적 인간 학의 함의, 수양론적 함의를 담고 있다. 도교 수행론은 도에 의해 근거 지위진
인 간의 본래성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4)
3) “도법자연”이리는 도덕경의 언설은 상당』히 복잡한 의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도를 단순히 자연(Nature)라고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 여준다. 전개서의 저자인 ~은 도덕경의 '자연'이 존재의 본래성 순수성을 담기 위해 시~용된 말이라고 풀이한다.
4) 도의 회복, 나아가 도에 의해 근거지워진 본래적 인간성을 회복할 것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도덕경』은 수양론적 함의를 가진 문헌으로 읽을 수 있다.『도덕경』의 초 기 주석서 중의 하나인 “河上公注"는 도덕경의 도론과 메시지 전체를 수양론적 관점, 특히 기의 수행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내려고 한다. 다른 한편, 도가 사라진 현실을 극 복하여 평화롭고 순수하고 자유로운 삶이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이상주의 적 열망이 담긴 정치론으로서『도덕경』을 읽어 낼 수 있는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이처럼 고전은 다양한 읽기의 관점에 의해 거듭날 수 있는 열린 텍스트이다. '텍 스타란 그것이 숭배되어야 할 문헌이 아니라, 다양한 읽기의 관점에 의해 읽히기를 기다리는 중립적인 문서라는 의미이다.
고전은 믿고 숭배해야 할 캐는(경전)이 아니 라 읽고 이해하고 재해석되어야 할 텍스트이기 때문에 시대의 거리를 뛰어넘어 여전 히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필지는 경학적 태도와 해석학적 태되 캐논과 텍스트의 대립이라는 구도로 고전 읽기의 입장을 개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읽고 이해해야 할 문서를 쉽사리 경전으로 고정화시켜, 단 하나의 읽기 관점을 고집하괴 다양한 해석을 용납하지 않는 '경핵적 캐는적 태도가 이주 뿌리깊 게 잔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최근 김용옥의 노자 해석을 비판한 김경숙은 노 자 읽기의 다양한 기능성을 무시하고 '노자는 이렇게 읽어야 한다는 시걸을 강조하는 편협한 시각에서 김용옥의 해석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한 시각에서는 고전은 '옳 은 읽기와 '툘린'('다른'이 아닌) 읽기만이 존재하는 닫힌 문서가 되고 만다. 고전의 읽기에 관한 한 옳고 틀리고의 해답은 있을 수 없다. 얼마나 현실적 정합성을 가진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가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뿐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고전은 말이 없다. 고전을 말하는 사람은 고전 그 자체에 대해 밀耉는 것이 아니라, 고전을 통해 '자가의 말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의 세계와 자기의 세계가 융합된 지 평의 융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김용옥의 노자 읽기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읽기가 전적으로 틀린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문학적 토론은 '무엇을?' 이리는 사실 인정의 차원에서는 사실의 옳고 그름에 대한 것이지만, 한 단 계 더 나아가 그 사실의 '왜?'를 묻는 차원에 나아가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를듗함'의 문제로 전환한다.
김용옥이 한문 해석 능력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문제도 마찬가지다. 전혀 한문의 기본 원리도 -구로는 사람이 헛소리 한 것이 아 니라면(무엇을 묻는 차원) 독자적인 읽기의 전략(왜를 묻는 차원)을 무시한 채, 기초 실력 운운하는 발언 그 자체가 바로 기본 소양의 부족함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용옥의 문제는 그가 한문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원문을 잘못 읽었다는데 있지 않다. 그의 잘못은 스스로의 읽기를 절대시하는 바로 그 독단성과 오만함에 있 다. 고전의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하는, 인간은 결국 함께 더블의 살아가야呑는 존재 이며, 그 더불어 살기의 윤리를 깨닫지 못言는 사람에게 지식은 오히려 위험한 무기 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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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德經』에서 도론은 도의 근원성을 이론적으로 확인하는 데에서 그치는 추상 적 언설이 아니다.『도덕경』은 비판적 현실 인식을 바탕에 깔면서, 근원적인 도에 로의
복귀 혹은 도의 회복을 역설하는데 그 주안점이 주어져 있다.『도덕경』의 저자 혹은 편자가 도의 근원성과
우위성, 자연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인간의 삶이 도의 근원성에서 멀어져 있다는 시걸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한 현실 비판을 통해 인간의 삶이 주극적으로 도의 존재 모델을 따라서 재편성되어야 한다는 이 상을 강조한다. 종교는 현실을 극복해야 할 문제 상황으로 이해하괴 그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과 방呑0홀 제시한다 그런 점에서『도덕경』전체는 삶의 근원 적 변화를 촉구히는 소망이 담긴 전형적인 종교 담론이다. 변화를 추구하는 구원 론적 소망은 현실을 긍정하면서 현실 속에서 추구될 수도 있괴 현실을 전면 부정 하면서
추구될 수도 있다 도교는 현실 부정과 긍정의 두 스펙트럼을 동시에 보유 言는 독특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 도교적
신념의 출발점에 자리잡고 있는『도덕 경』은 도의 근원성에 근거하며 변화의 방법과 방향을 제시하는 전형적인 종교사상 으로서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마치 기독교가 하느님 나리를 말하괴 불교가 열반 이나 정토를 말히는 것처럼,『도덕경』은
도와 하나된 상태, 도의 근원성을 회복하 는得道의 삶을 인간의 삶이 추구해야 할 목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경에 서 제시된, 도와 하나되는 삶을 실현하는
것을 지향하는 도교 수행의 주요한 이론 적 내용을 정리해言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Ⅱ . 도와
하나되는 몸짓(도교수행)
도고 의례는 도교의 신성한 가치를 현실 속에 구현하고자 하는 형식화된
몸짓 이다. 그것은 도와 하나되는 것을 지향하는 몸짓이다. 도교
의례는 그 자체가 거 대한 수행의 몸짓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몸짓은 공동체적 목적을 위해 실천되는
집단적 몸짓일 수도 있지만, 명상과 관상 등 지극히 개인적인 몸짓일 수도 있다. 도교적 몸짓은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道士는 도교에서 의례적
몸짓을 실천히는 의례 전문가이다. 도교의 도시는 카톨릭의 신부나 불교의 승려와 마찬가 지뢰 도교 공동체
내부의 일정한 규율에 따라 엄격한 훈련을 거쳐 의례 전문가로 서 길러진다. 그 수련 과정은 도교 의례의
절차와 의례적 몸짓을 습득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단히 복잡한 세부節目을 가지고 있는 도교 의례의
완결된 절차 를 처음부터 끝까지 실천하기 위해서는 긴 수련 과정이 필요하다. 의례 전문가로 서 도사는
자기가 실천할 수 있는 몸짓의 난이둑 즉 수행 정도에 따라 정해진 위 계 질서 속에 편입된다5)
5)
가톨릭의 서품 제도나 불교의 승직 제도와 대단히
비슷하게, 영어식으로는 "ordination
rank"라고 -부를 수 있는, 교계
조직 질서에 따른 등급이 부여되는 것이 다. 외형적 조직 공동체로서 도교 공동체 내부의 위계는 곧 그
공동체에 소속된 성 원, 즉 도사의 수행 수준과 일치되는 것으로 인정된다. 모든 교계 조직이 그러하듯이 도교의 교계 조직에 있어서도 위계의 정점에 속한 인물은 도교적 진리, 가르침에 가 장 가까이 다가서 있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다. 가톨릭의
엄격한 위계 질서에 따르면 교황이 하느님의 진리를 구현하는 현실의 대표자인 것처럼, 도교의 교계 조직에서
본다면 교황과 같은 유일한 중심은 아니지만, 장천사는 도교적 진리를 구현한 대표 자로 나아가 도교적
진리의 체현자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위계 질서를 절대시言는 공고한 조직의 실현은 종교 공동체의 경직성을
낳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 위계 질서 를 무시하거나 부정言는 자유로운 움직임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종교의 신비주의적 성향은 그러한 깨달음의 위계를 설정하려는 교권 제도에 대한 반발로 출현하기도 한 다. 도교에서도 교권의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있는 자유로운 수행자의 출현이 일상화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송대는 그러한 자유 수행자들이 폭발적으로 등장한 정점이었다. 도교
내부에는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종파-들이 존재하는데, 그러한
다양성은 권위의 절대적 중심이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도교의 역시는 어떤 의미에서는
국가 권력과 결합한 어느 특정 종파가 다른 종파를 권위적으로 통합하려는 교권 수립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장은明나라의 시점에서 용호산 장천사의 정일파가 교권 통합에 성공한 결과물이 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도교는 끊임없는 분파를 만들어 내었기 때문 에 오늘날 도교 교권의 최종적인 승리자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중국에서 도교는 살아있는 종교 현상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도교의 교권 조직이 일찍이 무너져 버린 곳에서는 그러한 자유로운 수행자
혹은 자유로운 의례 실행자-들 이 저마다의 권위를 주장하며 종교적인 실천을 하는 경우가 일상화되어 있다.
1.
수행으로서의 '無爲'(non-action) 도교는 현실의 불완전함을 극복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고 제시하는 종교 사 상으로서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도교의 진단에 따르면 현실의 부정적 질그고으
01 위적 조작의 과잉에서 결과하는 피폐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도는 자연성, 포용성, 포괄성, 그리고 시원성을 동시적으로 표현하는 전체성을 상 칭하는 개념이다. 인위적
조작에 의한 세속적 힘의 과잉은 도의 성스러운 전체성 을 숨막히게 만든다.『도덕경』은 세속적 힘이 작용하는
의욕 과잉의 상태를 '유위 (有爲)'라고 지칭하며, 도의 자연성 내지 시원성을 의미히는 '무위(無爲)'와 대립시
킨다. 무위는 도의 성스러움이 있는 그대로 실현되는 상태, 사물의
본래 그대로의 상태이다. 즉 자연 상태이괴 시원 상태이괴 도의 포용성과 완전성이 작동하는 완 전함의
상태이다.
1-十아가 '무위는 그러한 도와 하나되는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근원적 몸짓을 지 칭하는 수양른적 용어이기도 하다. 존재의 근원인道를 회복하고가 하는 종교적 이상을 도교에서는 '반박〈返樸)', '귀진(歸眞)' 등
회귀적 메타퍼를 사용하여 표현한 다. '귀진' 혹은 '반백은 도교의 근원적 성스러우을 실현하는 것이다. 무위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도의 근원적 성스러우을 실현(歸眞)하고자 하는 적극적 인 몸짓으로서의 무행위, 무조작이다. 도와 하나되는 삶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인 수행법은 그 자체가 중요한 의례적 몸짓이다. 마치 요가나 선이 가만히 않아 있음을 통해 존재의 본래성을 회복하고가言는 적극적 몸짓인 것과 마찬가지되 무위의
수행은 도의 포용성, 자연성, 순수성을 파괴亏는 인위적 욕망의
과잉을 치 유하는 역설적이지만 적극적 몸짓이다. 그것은慾望과有爲에 의해 훼손된 도의 근원성과 자연성을
회복하는 치료적 몸짓이자 이념이다. 무위는 욕망에 의해 발동 되는 파괴적 몸짓이 아니라, 도교적 진리와 하나되는 수행적 몸짓이며, 도인(導
引),
토납(吐納), 복기(服氣), 행기(磠기 존시〈存思), 좌망(坐忘) 혹은 심재(心齋) 구체적인 기의 수련법으로 구체회된다.6) 도교는 현실의 질곡,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질병의 고통, 천재지변의 고통, 전쟁 의 고통 등등, 모든 종류의 실존적 고통을 극복하여 삶에 궁극적 변화를 초래하기 위한 다양한 종교적 몸짓을 실천한다7) 탈주와 변화를 추구하는 도교의 몸짓은
6)
혼히氣功이라고 부른 도교의 수련은 위에서 열거한
다양한 기의 훈련과 정신의 훈 련올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도교 기공이 가장 발전된 형태가 다름 아니
내단 수련법 이다. 구체적인 기의 다양한 수련법에 대해서는 체계적인「가른 글을 마련하고 있다. 다양한 양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 종류를 다 열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다. 하지만, 도교 의례의 다양한 몸짓은 한마디로 존재의 근원적인 힘을
회복하 는 것, 즉 '得道'를
목표로 삼는다. 도교 의례 그 자체를 도교적 진리를 실현하려 는 수행적 몸짓으로 이해한다면, 도의 근원적 힘을 회복하는 '무위'는
무행위가 아니라, 도와 하나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몸짓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라 고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무위'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과정에 있어 실천 해야 할 다양한 세부적 의례적 항목을 가진다. 처음부터 단박에 무위의
최고 상태 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최고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단계적 발전이 요구된다. 도교적 몸짓의 전문가, 도교 의례의 전문가인 도시는 그 몸짓을 단계적
으로 실천하괴 그 결과 무위, 즉 도와 하니뒴을 실현한 사람들이다. 그리괴
도와 하나되는 몸짓을 수행言는 사람들, 그 결과 도와 하나된 사람•들은
도교적 의미의 불사성을 획득한다8) 도교적 의미의 불사%g규을
획득한 사람을 도교에서는 신선9)이 라고 부른다.
신선이 되기 위해서는 신선이 되기 위한 방법을 실천해야 한다. 도교의 의례, 특히 개인적 수행은 도교적 의미의 불사(도와 하羽)를 획득하는 몸짓이다. 도고
적 수행은 크게 몸의 수행과 미음의 수행으로 범주화할 수 있다. 그러나 수행의
7)
어느 정도 도식적으로 말한다면, 도교적 의례, 몸짓을 크게 두 호름으되 공동체 전 체를 대상으로
실천되는 공동체적 의례와 개인의 몸(미음)올 수련하는 개인적
의례 로 1•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공동체 의례는
대개 도교에서는科儀라고 불 리는 집단적 의례(liturgy)이며, 개인적
수련은 기공 및 정신 수련을 포함한다. 도교 의례는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든 공동체 차원의 것이든 궁국적으로는
현실의 질곡을 벗어나, 신선 세계의 완전함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동일한 지향 을 가진
몸짓이다. 도A는 개인의 수련을 통해 도와 하나 힘을 획득한다. 공동체 의 례의 실천은 그러한 내면 수련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의례 전문가로서 도사의 의례 집전 행위와 기 수련은 연속적이다. 도교
과의의 구조와 의미에 관해서 중요한 연구 성과로는 Kristofer Schipper, Le Corps
Taoisre (Taoisr Body)(Fayard, 1982) 를 반드시 참조해야 한다. 그리고 Isabelle Robinet의 Taoisme의 제3장은 도교 의 례의 기본 구조를 잘 설명한 개요로서 참조할 수 있다. 중국에서
니은 연구서로는 張澤夾『道敎~儀硏究』는 사천대학 도교 연구소의 박사학위 논문으로서, '黃籧齋를 중심으로 도교 의례의 구조를 잘 그리고 있는 역작이다.
8)
도교의 내부 해석에 의하면 그렇다. 그러나 종교의 내부 해석의 진실성을 따지는 것 은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9)道士는 다른 말로眞人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쫴山은 가장 널리 보편적으로 사용되 는 명칭이다. 신선 이외에도道/&神人至人등 다양한 명칭이 사용되는데, 그 개념 =은 각각 뉘앙스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도교적 진리 즉 도를 획득하여 도와 하나 됨을 실현한 존재(與道合-), 도교적 깨달음을 획득(得遡한
도교의 이상적 인간을 지칭히는 개념으로서 내포하는 바가 동일하다. 자세한 것은 본 논문의 마지막 절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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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방향은 방법론적 구분일 뿐이지
실제 수행에 있어서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 구 분이 되지 않는다기보다는 그 둘은 분리되어 실행되어서는
안 된다. 그 두 방향의 수행이 통합적으로 실행되어야 함을 역설하기 위해 도고 수행, 특히 내단 수행에 서는 “성명쌍수(性命雙窿)'를 강조한다 약간 거칠게 말한다면, 명(命)의 수행은 몸의 수행이괴 성(性)의 수행은 정신의 수행이다. 이론가에 따라서는 그 둘 사이 의 위계를
강조하는 경우도 있지만, 궁극적 목적으로서 그 둘 •사이를
완전히 분리 히는 경우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두 방향의 수행은 도교적인 몸과 마 음의
이론 구성과 대응한다.
2.
몸(身,形)과 마음〈心,神)의 문제
육체(形)와 영혼(神) 혹은 몸(身)과 정신(心)의 관계 문제는 도교를 포함하는 중국적 인간과 수양론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도교 혹 은 중국
종교가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깨달음 혹은 득도는 궁극적으로 몸과 마음 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먼저
원리적으로 말하자면 도교 나아가 중국 종교 일반에서 깨달음은 단순히 추장적인 이해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몸 의 차원이 결부된 종교
경험으로 이해되었다. 득도는 구체적인 몸짓을 수반하며, 구체적인
몸짓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존재의 특별한 차원의 경험으로 이론화된다. 몸은 깨달음이 발생하는 장소이다. 특히 도교는 깨달음이 발생言는 정소로서의 몸 을 중시言는 역사를 강하게 지니고 있다 먼저 중국의 시상 종교 전통, 특히 도교에서 몸과 미음, 그리고 그 둘의 관계 문제에 대한 입장을
간단히 살펴보자. 중국 전통에서 몸과 미음은 궁극적으로 ' 리'되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론화의 과정에서 몸과 마음을
'구분'하는 의식마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먼저,形左-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형태를 지닌 육체, 형체 나아가 물질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반면形과 대비되는 神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간이나 생명체를 성립시키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어 떤 요소를 가리킨다. 서양적인 이분법을
적용해 본다면, 형은 육체 혹은 물질이괴 신은 정신 혹은 정신적 실재를 가리킨다고 단순화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아가 도교의 신 개념에서 특히 주목되어야 할 점은 신이 인간의 정신뿐만 아니라 우주 적 신(神明) 그리고 인간의 내면에 내재하는 신적 존재로서體內神10) 혹은 생명
10 도교의 체내신 개념은 도교 특유의 신관념과 결부되며, 도교의 신체 기법, 기의 수련 과 연결되어 상당히 중요하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나오는 주를 참조할 것.
체의 중심으로서 인간의 영혼, 나아가
귀신 등을 동시에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개 념으로 폭넓게 시용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그 신은 서구적
의미의 정신과 정 신적 존재, 신적 존재를 포괄한다. 하지만, 도교적인形~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 은 그形과神이라는 대립적인 두
범주가 서로 배타적이고 닫힌 범주로서가 아니 라, 서로 소통적이며 상호 전환이 기능한 열린 범주로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초기 도교 경전인『태평경』에 보이는 형신 관계 혹은 몸과 정신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언설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1) “사람은 혼돈의 기, 즉 원초적인 기에
서 태어난다. 그氣는 생명력의 정수인精을 낳괴 그精이 고도화되어 영혼(神)을 낳는다.神은 다시明을 낳는다. 인간을
구성하는 기는 본래 음양의 기이며, 그氣 가 고도화되면서精으로 전환되괴精은 다시神으뢰神은 다시明으로
전환된 다."11) (2) “기가 기-득하면 거기에서
영혼(神)이 나타나고 기가 끊어지면 영혼(神) 도 함께 죽어버린다.”12)
(3) “신과 정이 기에 대해 가지는 관계는 마치 물고기가 물에 대해 가지는 관계와 비슷하다. 기가
끊어지면 신과 정이 홀어지는 것처럼, 물이 없어지면 물고기가 죽는다."13)
(4) “기가 흩어지면 죽고 기를 얻으면 산다 .”14) (5) “사람은 한 음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몸은 정신과 더불어 합쳐 하나가 되 어 있다. 몸(形)는 죽음을 지배하고 있으며 정신은 삶을 지배한다. 그리고 정신과 묎形)이 함께 하나가 되어 있을 때에는 생명을 유지(吉)할 수 있지만, 정신과 몸 (形)이 분리될 때에는 불행(죽음,凶)이 발생한다. 곧 정신이 몸을 떠는 것이 죽 음이괴 정신과 몸이 하나로
합쳐 있는 것이 삶이다. 정신과 육체(形/)의 분리가 일 어나지 않고 하나가 될 때 장생불사가 가능해 진다."15)
태평경의 언설은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첫째, 태평경의
저지〈들)은『장자』 혹-은『관자』에서부터 정식화되는 고대
중국의 기른적 관점을 계승하면서 인건을 포함하는 모든 시월이 -우주적 원기(기)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둘째, 기로 형성 된 인간은 육체라는 유형적 측면과 정신 혹은 신이라고 불리는 무형적 측면이 통 합되어 있는 존재이다. 셋째, 유형적 측면인 육체는 인간을 죽음으로 이끌어 간다.
Il)『태평경합교』: “夫人本生混沌之氣氣生精,精生神,神生明.本于~之氣氣轉爲精,
*爲神, i*爲明.”(p.739)
12)『太平經合校』: “人有氣則禰,氣絶貝l爵亡."(p.%)
13)
상동: i*有氣如.魚有水疊魚亡."(p.727)
14)
상동: “失氣貝l埏有氣則生”(p.3%)
15)
상동: “人有-身,與精神相合幷也形者乃主死속精神者乃主生相合則吉,去則凶. 神則囮有精神則生相合則爲-,可以長存世”(p.716)
----
반면 정신은 인간을 불멸로 이끌고 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육 체적 측면은 속의 원리인 반면에 정신적 측면은 성스러움의 원리이다.
넷째, 인간 을 형성하는 육체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는 사실상 분리되어 존재해서는 안 된다. 육체가 인간을 죽음으로 끌고 간다고 해서, 무형적 정신이 육체와
분리되어 별개 로 독립되어 존재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정신이 생명을 부여하는 힘이라고 할 지라되
육체와 분리된 정신이 독립적으로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고 간다는 것은 아니다. 도교에서 추구하는
장생불入는 어디까지나 정신과 육체가 하나로 통 합되어 존재言는 상태를 지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정 신이 육체와 분리된 채로 영원히 지속할 수 있다는 정신 불멸, 혹은 영혼 불멸의
입장을 도교가 주장하는 것은 아니己1는 사실이다. 땠째, 인간의 생명을 형성하 는 바탕이 되는氣를 순수하게 고도의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수련에 의해 인간 생 명은 활성화되어
불사의 상태로 유지될 수 있다. 생명의 원리인 정신의 바탕도 기 괴 육체를 형성히는 기질의 바탕도 결국
기이다. 따라서, 도교의 불사 수련은 결 국 기의 수련을
통해 몸과 정신을 충실하게 만드는 훈련이다. 마치 호수에 맑은 물이 기득 넘치고 그 물 속에 건강한
물고기가 뛰어 놀듯이. 여섯째, 기의 순수화 와 충실화는
단계적인 고도화 과정을 거쳐 최후의 단계에서는 궁극적인 도와 하 나가 되는 신적인 상태에 이른다. 그
신적인 단계는 신이라고 표현되기도 하지만, 『태평경』에서는 밝음 혹은 빛의 메타퍼를 시용하여, 그 최후의 깨달음을 표현한다. 시기적으로 훨씬 나중에 등장히는 내단
문헌에서는 도교적 완성 상태를 *光 이라는 빛의 메타퍼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 표현은 사실상『태평경』의 '明'과
일 맥상통한다.16) 도와 하L捏을 추구하는 도교의 수련에서形蕣申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형과 신 이 서로 소통 기능한 열린 범주로 이론화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도교에서는
이 간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사물이 기로 형성되어 있다고 이해한다. 그러한 근원적 기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유형적인 것이든 무형적 것이든 존재言는 모든 것은 기 로 이루어진다. 오늘날의 용어로 정신이라 번역되는神이나, 육체라고 번역되는 形은 모두氣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구성 오소리는
측면에서는 그 둘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하지만, 도고
수행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둘 사이에는 엄
16)『태평경』의 형신론이 도교 형신론의 이론 전체를 대표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그 입장은 나중에 도교 사상사의 전개에서 기본적 경향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도교의 수양론 특히 내단의 이론에서 기 수련의 단계론과 관련된 자세 한 형신 관계론은
더욱 자세한 문헌적 검토를 기다리는 영역이다.
연한
질의 차이, 혹은 순수화의 정도에 따른 양상의 차이는 존재한다. 그러한
양 상의 차이로 인해 다음에 살펴볼 기의 세 양상〈精•氣•神)과 관계된 수련의 단계 에 대한 이른적 구상이 제시될 수 있었던 것이다.
3.
기의 수행과精•氣•示中 도교에서 몸과 마음의
수행은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기 (氣)의
수행에서 시작된다. 도교의 다양한 수행적 몸짓을 결국 기의 수련 문제로 귀결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도교 수행에서 기 개념은 중요하다. 인간은 몸은 물론이고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질료라고 이해되고 있다.17) 기는 가시적으로 보이 는 인간의 몸을 형성하는 기반일 뿐 아니라, 소위
말하는 인간의 정신을 이루는 기반이며 생명력을 유지香는 근거라고 이해되기도 한다. 도교에서는 인간의
육체 와 정신을 엄격하게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육체와 정신은 구분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질료(氣)리는
측면에서 볼 때, 그 둘의 경계는 엄밀하지 않다. 따라서, 앞에서도 본 것처럼, 인간을 몸과 정신이라는 엄격한 이원적 구조를
근거로 이해히는 관점 그 자체가 도교적이지 않다. 도교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다양한 레벨을 가진 기(氣)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기의 레벨 사이의 엄격한 획선 을 긋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낮은 레벨의 기는 가시적인 육체를 구성하괴
높은 레벨의 기는 정신이라고 불리는 높은 단계의 생명력과 관련이 있다. 기의 차원에 서 볼 때 도교는
인간을 정(精), 기(氣), 신(神)이라는 양상이
다른 세 차원의 기 로 구성된 존재로 이해한다. 그때 낮은 단계의 기는 육체와 보다 밀접한 관계가 있괴
높은 차원의 기는 굳이 서양식으로 말하자면 정신이나 영혼과 보다 더 밀접 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인간을
형성히는 양상이 다른 기들 사이에는 상호 전환이 가능한 열린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도교의 기 수련은
이러한 기본적인 인간관, 즉 양4-01 다른 세 차원의 기의
종합에 의해 인간이 형성되어 있으며, 그 기들 사이 에는 상호 전환이 가능하다는 관점을 배경으로 삼을
때에만 이해할 수 있다.
기의 수련은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단순한 질료적 기(그것을 도교에서는氣質 이라고 부른다)를 보다 높은 차원의 기로 전환할
수 있다는 신념을 전제로 하여
17) 기의 의미에 관한 토론은 끝이 없다. 여기서는 간단하게 질료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물질적 원소라고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수많 은 논의가
진행되어 있다. 대체로 생명력의 근간으로서 물질을 이루는 바탕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입장이다.
실행된다. 유형적 질료에 가까을수록 그 기는 차원이 낮은
기이다. 질료적 기는 인간을 세속에 묶어두는 부정적 힘으로 작용한다.
그 기는 현실의 질곡을 대표하 는 상징어로 시용되기도 한다. 굳이 성과 속의 구분을 적용한다면, 기는 속(俗)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며, 인간의 삶을 속박하는 것이다. 도교에서 추구香는
해탈, 자 유, 득도는 속(俗)의 차원을 뛰어 넘어 성(聖)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18) 도교에서는 기의 수련을 통한 기질적 차원으로부터의 탈피, 나아가 고차원적인 기의 상태로의 진입, 마지막으로 신의 단계에 도달하는
득도의 과정을 일련의 단 계론적 메타퍼로 묘사하는 것이 일반화되어있괴 내단학에서는 그러한 발전 과정 을 대체로 네 단계로 설명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 단계 전체를 기질을 변 화시키는 과정이라고 본다면, 도교의
기 수행은 결국 속(secular)의 차원에 속하 는 기질을 벗어나서 성스러움의 차원의 신(sacerd)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포함 6는 이론이다. 내단학에서는 정기신의 단계론을 수련의 단계론과 연결시키며 다 음과 같은 과정을 제시한다. (1)築基(기질의 변화에 돌입하기 위한 기초 수련 단 계), (2)鍊精化氣(인간 생명의 원초적인 에너지를 고차원의 에너지로
끌어올리 는 수련), (3)鍊氣化神(고차원의 기 에너지를
더욱 고차적인 정신 에너지로 끌 어올리는 수련), (4)鍊神還虛(가장
승회된 형태의 기가 무의 상태, 즉 모든 것의 근원이며 모든 것의 귀결점인 도와 하나되는 합일의 경지).19) 도교에 있어 성스러움은 다양한 용어로 표현된다.神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다. 신(神)은
성스러움이 실현된 상태, 속의 속박을 벗어버린 상태의 기를 가 리키는 도교 특유의 개념이다. 신 역시 그것은 기의 한 양상이지만, 세속을 형성
18)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도교에서는 수준이 낮은 질료적 단계의 기를 '음으로 범주 화하괴 그 기를 높은 수준으로 승화시켜 김뗴 따라 양의 범주로 옮아가는 것으로 단계를 지워 이해한다. 그 과정은 <陰-半陰,半隣-闊>으로 도식화할
수 있다. 완전 한 양〈″의 단계에 도달한 인간이 도와 하나가
된.神f山이다. 그리고
도교에서는 범속한 현실을 벗어나 지기옥롭고 완전한 존재, 즉 신선으로 넘어7는 그 과정을 4超凡入聖'이라고
표현한다. 필八는 엘리아드에게서 유래하는 성과 속이라는 용어를 사 용했지만, 도교적 맥락을 고려하면서 말한다면,凡俗과 ″이리는 표현이 적절하다 고 생각한다.
19) 기 수련의 단계론에 관해서는 더욱 자세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도교의
내부적 관 점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수련의 단계를 서술하는 연구는 여럿이 있지만, 그러한 수 련 과정론의
의미를 비판적이면서도 비교종교학적인 관점에서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요가의 수련 단계에 관한 논의, 서양 연금술에서의 단계적 발전에
관 한 논의 등이 적절한 참조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 점에 관해 다른 논 문을 준비하고
있다. 일단,『오진편』(중화서국, 도장께 역주자 해설이 도교 내부의 관점을 가장 콤팩트하게 정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는 일반적인 기와 질적으로 다르다.神이리는 펑꺼는 초현실적인
존재, 영어로 는 deity와 직결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개념의 참 의미를 이해하는 것 이 쉽지 않은 점이 있다. 도교적으로神은
수련을 거쳐 가장 높은 수준으로 고양 된 기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동시에 신은 인간의 역량을 초월하는神靈혹은
그 신령과 동일한 차원으로 고양된 신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개념이기도 하다. 나아가 신은 도교의 독특한
신 관념인體內型0발 가리키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천상에 거하는 우주적 신은 도의 현현이다. 체내의 신은 인간에 내재한 도의 현현 이다. 결국道와神은 그 내포하는 함의가 동일하다. 나중에 보겠지만,道人,眞人, 至人또는神人이라고
불리는 도를 획득한 인간에 대한 명칭은 결국 내용적으로 는 동일한 것이다. 기를 수련히여 가장 순수하고
완전한 기, 즉神의 상태로 끌어 올리는存思혹은守-의 수행은
체내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신이 적극적으로 몸의 주인이 되도록 만드는 훈련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속의 지배를 벗어나 서 성스러움이 실현된 존재로 삶의 차원을 높이고자 하는 훈련이다. 우주의 근원 이고 생명의 근원인 도가 우리 몸 속에 실현되괴 몸을 통해 우주 전체를 도의 차 원으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이 그것이다.21)
4. 수행과 성스러운 시간:生氣와死氣 기 수련에 있어 기의 순수화
정도에 따라 정 • 기 • 신을 단계론적으로 나누어 보는
관점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기를 죽은 기(死氣)와 살아있는
기(生氣)로
20) 도교 상청파에서 극에 달하는 체내신 관념은 모든 도교 기공 이론에서 수용되는 것 은 아니지만, 우주적 신이 도의 현현이라는 시걸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리괴
기의 고양된 상태로서 신이 도와 하나가 된 상태, 우주적 이법의 운행 속에 참여한 상태를 가리키는 상징어라는
점에 대해서는 도고 내부적으로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체내신 관념과 그 신의存思를 통해 신을 몸 숙에
보존하여 불사를 획득할 수 있다 는 수련법에 대해서는 상청파의 중요 경전인『황정경』『대동진경』을 참조할 수 있다.
상청파의 중요 수련법인 체내신의 존사에 관한 연구 문헌은 이미 많이 있지만, 대표 적인
것으-로는 Michel Stricmann, "The Mao
Shan Revelation"(T'oung Pac), vol. LXIII, Leiden, 1977)이 있괴 일본 연구로는
카미츠카 요시코(神塚淑子),『六朝道稅빥想㈆硏犯(창문사, 1%9) 제1장 r眞誥lcov<J를 참조
21) 기가 도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가 기의 수련을 통해 도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관 점, 그리고 기는 도와 상통할 뿐 아니라 인간의 생명력의 근거이며, 동시에
인간의 물질적 기초라는 주장은 도고 문헌 도처에서 보이는 도교의 상식적인 관점이다. 특 히 도교에서
기의 수련과 도의 획득을 동일 선상에서 이해하는 기공적 관점에 대해 서는『운급칠첨』권56의 r元~에 자세하게 나타난다.「원기론」은
도교 기공의 이 론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검토해야 할 중요한 문헌이다. 그리괴 동 권57에 실린唐의可馬承禎의 -작품이라고 알려진-『服~侖」도 대단히 중요하다.
나누어 보는 관점이다.精•氣•神이 기의 수련
정도 및 수준에 관한 문제라면, 사기와 생기의 구분은 존재의 상태를 시간의 맥락에서 성과 속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다. 기는 구체적인 시간 속에 존재하는 우주와 생명의 근원이다. 그러나 기의 의해 가득 채워진 공간이 균질적이 아닌 것처럼, 시간도
균질적이 않다. 신의 영 역에 속하는 하늘은 성스러운 공간이지만, 지상은
하늘에 비해 질이 낮고 기의 수 준도 낮다. 즉 하늘에 속한 것보다는 지상에 속하는 것이 가치론적으로
열등하다. 즉, 그것은 속의 영역에 속한다. 시간 계열에 있어서도 기의 이원성은 유지된다. 앞에서 본 것처럼
본래적으로는 기'끄)와 도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이지만, 현실적 으로氣는 도의 차원에서 멀어져 있다. 즉 성과 속의 이원성의
지배를 받고 있다. 기의 근원적 본래성이 있는 그대로 긍정되지 않는다 존재를 바람직한 상태와 바 람직하지
않은 상태로 나누어보는 종교의 이원적 관점이 시간과 연관하여 기를 설명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적 이원성에 따라 성 스러운 시간대에 속言는 기가生氣(생명의 기)이고 속된 시간대의 기가死氣(죽음 의 가이다. 생기와 사기라는 이원적 관념은 기가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져 있 다는 생각이 구체적인 기의 수련에 있어서는
시간의 관념과 결합하여 다듬어진 것이다.
도교에서 기의 수련은 반드시 시간의 관념23)과 결합되어 진행된다. 자연을 구 성言는 바탕이 되는 기는 자연의
유주적 리듬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도교의 기 수행을 실천할 수 있는 바람직한 시간(성스러운 시간)의 계열은生氣가 지배하
22) 도교에서는 본래적인 순수한 '가를 일상적이고 속된 세상을 구성히는 기(氣)와 구별 하기 위해 굳이 기(炁)라고 쓰기도 있다.
23) 도교 기 수행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내단 수련법에서는 수련 과정을 설명힘뻬 있어 다양한 시간 계열을 중시한다. 그 과정을 대충 단계적으로 말하자면, 첫 단계가 生之時' 즉 생명의氣가
생성되는 시간이며, 그 다음 단계가 내적으로 생성된 순수한 기를 모아 내단의 프로세스에 진입시키는 과정
즉 '霖之時'이다. 그렇게
모아진 기 는 목욕(沐浴之時)이라는 세련화 과정과 팽련(;烹끄時)이라는 정련 과정을 거치면서 고도로 순수한 기로 승화되괴
마침내 도와 하나가 되는 마지막 단계 즉証道脫升之時로 완성된다 내단학의 프로세스와 각 단계의 의미에 관해서는 학계에서 아직 충 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다. 일단 서양의 연구 성과로는 이자벨 로비네 교수의 일련의 내단 연구를 정리하고 있는 "Taoism: The Growth a Religion"(California University
Press, 19%)의 마지막 장이 유용한 참고가 될 것이다. 중국의 문헌은 양적으로 많이
있지만, 수련 각 단계의 구체적인 의미를 도교 내부의 해석을 비판적이고 객관적으로 해명하는 연구 성괴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사 적인 측면에서의 내단 이론에 관해서는 임계유 주편,『中國道敎剡(상해고적출판사,
1990) 참조 일본에서는 이시다 히데미(石田秀實)의『흐르는
신체』(열린책들, 이동철 번역, 1四를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는 시간이며, 기 수행을 해서는 안 되는 바람직하지 않은
시긴(속의 시간) 계열은 사기가 지배하는 시간이다. 생기는 생명의 원리이며, 사기는 죽음과 연관된다. 여 기서 중요한 것은 사기를 배제하고 생기를 수련하여, 기 본래의
근원성을 최대한 활성화시키고 그 근원적 기를 도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송대 이전의內丹이론을
집약한『道樞•會眞篇』에서는 하루의 시간을生氣의 시간과死氣의 시 간 두 계열로 분류하면서 내단 수련의
과정을 설명呑는 전형적인 사우를 보여준
다.
“구圈밤 열한시부터 새벽 한시)부터午時(오전 열한시부터 오후 한시)는 기 가 생성되는 시간이다. 이때에 기를 모아 단을 만드는 수련을 실행할 수 있다. 子跱에는腎氣가
생성되괴 뀌畤에는肝氣가 생성된다. 그리고午碍에 이르러서 는腎氣와 서로 교류하며 기가 쌓이고 체액을 생성한다. 그리고 그氣가 丹田으로 흘러 들어가玄珠長生의藥, 즉丹藥이 만들어진다."24)
子時에서午時에 이르는 여섯 단위의 시간은 생명의 원리인生氣가 지배古는 시간대이므로 기의 수련은 이
시간 동안에 실천되어야 한다. 한편午畤부터 구畤 까지는 죽음의 원리인死氣가 지배하는 시간대이므로 그
시간 동안에는 기 수련 을 피해야 한다. 시간의 흐름과 기의生•死를
연결시켜 설명言는 도교적 관점은 음양 관념에 근거한 이원적 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시간적
흐름을 음과 양의 이원론으로 풀이呑는 해석에 따르면, 하루를 구성하는 열 두 단 위의 시간 중了碍에서午畤에
이르는 여섯 단위의 시간은陽에 속하고 다시午時에서 시작하여 구峙에 이르는 시간대는陰에 속한다고 설명한다. 기의
수련은 반드시 생명의 힘이 약동하는陽의 시간대에 실행되어야 하며, 기가 위축되는 시 간대에 기를 수련히는
것은 자연의 리듬에 역행하는 것이 된다.
기가 생성되는生氣의 시간과 기가 위축되는死氣의 시간에 대한『道樞』의 관 점은 도교의 상식으로 고대
도교에서부터 널리 공유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갈 홍은『포박자』에서 도교 기공 양생술을 비롯한 도교
방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 서, “기의 수련(行氣)은 반드시生氣의 시간에 실행해야 한다.死氣의 시간에 기를 수련해서는
안 된다. 옛날 선인들이六氣25)를 수련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
24)『道樞•會眞篇』: “夫自子至午者,氣生之時也可以用~月焉.子之時,腎氣虫卯之時,肝氣生至于午之時貝構氣交乎心彔積氣生海還于丹田,是爲玄-″
25) '六氣'는子時에서午時에
이르는 여섯 단위의 시간대에 속하는氣즉生氣를 의미
문이었다. 하루의 낮과 밤에는 열 두 단위의 시간이 있는데, 한밤(子時)에서 한 낮 (午畤)에 이르는 여섯 단위의 시간은生氣가 지배하며 한낮에서 한밤에 이르는 다 른 여섯 단위의 시간은死氣가 지배한다.死氣가 지배하는 시간대에 기를 수련하 는 것은 무익하다”26)라고
하면서 기 수련의 시간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27)
5.氣수행의 목표로서 4純陽' 다음으로
도교의 기 수련에 있어陽의 시간이라는 관념과 연계하여 '鵬이라 는 개념에 대해 살펴보자. 도교의 내면 수련 전통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내단 수 련에서 특히 중시되는 수양이리-는 개념은 성스러운 시간을 의미하는陽개념과 연계되어서도 중요하지만, 세계를 “神(仙) •人•鬼”의 삼부 세계로 보는 도교의 기본적 세계관의 견지에서 그 중요성을
인정할 수 있다. 도교에서 인간은 양과 음이 결합된半聖•半俗의
존재이다. 음양론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음과 양 의 결합체로서 성과 속의 중간 영역에 속한다. 육체를 구성하는 낮은 수준의氣 즉氣質민을 놓고 본다면 인간은 속의 영역에 속하는 존재이지만, 정신을 구성하 는 순수한 기는 성스러움의 영역에 속하고 따라서 속의 영역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다. 도교에서는 그 성스러움의 영역을陽의 영역이라고 범주 화한다. 따라서, 육체를 구성言는 기질의 한계를 벗어나서 순수한 기(神)의 영역으 로 진입하는 것을 도교에서는半陰•半陽의 중간 차원을 벗어나
순수한 양의 영 역으로 진입한디는 단계론적 변화의 메타퍼를 이용하여 설명한다. 당송 시대에 있 어 도교
내단학의 이론 수립과 관련하여 중요한 문헌인『鍾呂傳道集』에서는 음양 의 관점에서 인간과 신선, 그리고
귀신의 차원에 대해 퓨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선은 하나가 아니다.
순수하게陰氣로만 구성되어 있고陽氣를 가지고 있는 않 은 존재는 귀신이다. 순전한陽氣로 이루어져
있고陰氣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
한다.
26)『抱朴子內篇•釋滯』: “夫行氣當以生氣之時,勿以死氣之時肛故日仙人服六氣此之謂也-日-夜有十二時,從日死氣之時, 行氣盪世”
27) 시간뿐만 아니라 수행의 장소도 대단히 중요하다. 기의 수련은 기의 순수함이 확보 될 수 있는 조용한 곳(특별한 수행의
장소로서道覿이나靜室등등) 이나 산 속이 바람직하다. 도교의
이상적 인간은 아무래도 세속적 힘이 강하게 작용呑는 도시보다 는 성스러움의 기운을 머금고 있는山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수행을 중요한 종교 적 의례의 실천이라고 본다면, 의례에서 일반적으로
중시되는 시간과 장소의 비균질 성, 비구등성에 대한 인식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것이다. 예배는 정해진 특별한 시 간에 정해진 특별한 장소에서 드려지는 것이 요구한다는 점을 상기하자.
은 존재는 신선이다 음기와 양기가 골고루 섞여 있는 존재는 인간이다.
그런데 오직 인간만이 귀신이 될 수 있괴 또 신선도 될 수 있다. 젊은 시절부터 수련을
하지 않고 함부로 정욕을 발산하고 뜻하는 바를 쫓기만 하는 사람은 병들어 죽어 서 나중에는 귀신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수련을 거듭하여 범속함 을 뛰어 넘어 성스러움의 영역으로 들어가는(超凡入聖) 사람은 기질의 한계를 벗 어버리고 신선이 될 수 있다. 신선에는
니썻 등급이 있괴 수련의 법에는 세 등급 이 있다. 그 법을 수련하고 하지 않고는 인간에게 달려 있지만
공이 이루어진 결 괴는 사람의 분수에 달려있다"게 기의 수련은 저급하고 범속한 존재의 범주를
벗 어나 신성한 존재의 범주로 진입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도교에서는 그 범속한 의 범주를 음이라고
규정하괴 인간의 욕Q才과 자기 파괴적 욕구에서 비롯되는 질 병, 죽음
등 인간의 구속하는 존재의 질곡을 음의 범주에 소속시키괴 그러한 존 재의 질곡을 극복하여 나아가는 완전함의 상태를 양의 범주에 소속시킨다. 도교에 서 양은 죽음을 극복한 존재의 차원, 인간의 범속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도교 적 이상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당송 시대의 내단학을 대표하는
유명한 도사들은 순양의 경지 즉 신선의 경지를 추구하는 그들의 이상을正陽子 (″權), %혐子(呂ilöm,華陽(施肩吾),紫陽(張배단),醵(王喆,王醵),月暢 (J馬鈺) ••• 등의
이름〈號)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기를 음과 양, 두 범주로 나누고 양의 범주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관념은 『주역』에서 유래한 것이다. 도교 양생가들은『주역』의 음양 범주와 시간적 추이에 따라陰에서부터陽으로
변화하는 음양消息의 이론을行氣服氣胎息등 다양 한 기 수련법에 널리 팡팡하였괴 도교 수련에서 순양 개념은 그 결과 도출되었 다.「延陵君鍊氣法』에서는 당나라 도사吳筠의 대표작「~을 인용하면서 도
교 수련법의糸4鵬관념을嶰易消息의 관점과 연결시키고 있다 “陽氣가
조금이라 도 남아있으면 귀신이 될 수 없괴陰氣를 조금이라도 남겨두면 신선이 될 수 없 다.禮易의 기는
양기이며, 음적물의 기는 음기이다. 따라서 수도하는 사람은
항상 먹는 음즤을 줄이고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元氣가 몸 속을 운행할 수 있도록 훈 련을 거듭하면, 양기가 왕성해지며 음기는 저절로 소진 되어버린다. 양기가 왕성 해지고
음기가 쇠진하면 온갖 질병이 발생하지 않고 정신이 안정되고 육체도 기
28)『鍾呂傳道集』卷1 “仙非-也繈而瞿者鬼咆″而*者仙世~ 雜者人也惟人可以爲鬼可以爲fill. /多年不修,恣情″,病死而爲鬼也知之修鍊,韶凡入聖,而脫質劗山也4山有五等,法有三成終持在弋而功*分者世”(氣功• ″~, 上海古籍出版秘1989년)
얻을 수 있으며, 그 때에 비로소 장생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29)
Ⅲ. 신선: 불사의 도교적 의미
장자에서부터 도교(도가)적 이상인으로 등장하는 •진인, 신인, 도인은 무위를 실 천함으로서 세속적 속박을 벗어버린 자류로운 존재들이다. 도고적
지주는 세상의 속박을 완전히 탈각한 상태를 지칭한다. 그 속박에는 죽음이라는 속박도 포함된다. 인간을 속박히는 궁극적 한계인 죽음을 벗어난 존재들이기에 그들은 불사자들이 다. 도교에서不死와自由와無爲그리고得道는 동일한 내포를 가지는 개념이다. 무위를
통해 자우에 도달할 수 있괴 자유에 도달하면 무위를 실천할 수 있고 도 를 얻을 수 있다. 또한 도를
얻어야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괴 무위에 이를 수 있 다. 무위에 도달하여 도를 얻은 사람은 죽지 않는다. 진인은 도의 본래성 (authenticity)을 획득한 사람이기
때문에 참된 인간 '진인'(authentic man)이다
그는 도와 하나가 된 인간이기 때문에 '도인'(man of the
Tao)이라 부를 수도 있다. 그리괴 인간으로서 도를 획득함으로서 인간의 유한한 속박과
현실의 상대 적 한계를 벗어나 신적인 존재로 승화되었기 때문에 '신인'(divine
man)이라 불 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 신적인 상태로 고양된 인간은 때묻은 세상에 살지
않는 다. 세상을 벗어나 존재의 본래적 순수함이 보존되어 있는山속에 살거나 하늘로 비상히는 그는 '신선'이기도 하다. 그는
인간의 삶을 내리누르는 모든 무게로부터 지주,롭기 때문에 그 무게를 벗어나 하늘로 비상할 수 있다. 그는 구름을 타고 비 상할 수 있괴 물 속이나 불 속에 뛰어들어도 몸을 상하지 않괴 삶과 죽음의 경 계를 마음대로
노닐 수 있다. 산은 순수와 성스러움의 상징이다 또한 상승과 비 상은 자유로움의 전형적 상징이다. 그러한 자구를 획득한 사람, 무위를 실천하는 사람, 도를 얻은 사람, 죽지 않는 사람이 바로 '신선'(immortals)이다.
신선에 관한 상상적 관념은 고대에서부터 존재했고『장자』와『열자』그리고
『회남자』를 거치면서 도교적 종교 세계 안으로 편입되어 들어왔다. 그러나, 그러 한 신선과 불사에 관한 상상적 관념이 도교적 이론 체계 안으로 정식으로 편입되
29)『雲笈七籤』「맛떠陵君鍊氣法」: “″氣不盡,不爲鬼-不確不爲仙.元陽卽陽氣也食氣卽麟也常減食節欲使元氣內遵陽氣旣壯,皀陰氣自消.陽壯陰衰, 卽百病不f乍,神* 미覷長生.”
고 체계회~된 것은 갈홍의『포박자』에서였다. 갈홍은 고대 중국의 신화 세계에서부 터 존재했던 불사와 신선의 상상을 도교의 도 개념과 연결시키괴 구체적인
도교 의 방술들과 연결시킴으로서, 불사와 신선을 도교적 상상 세계 속에 뿌릴 내리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도교적 신선시상의 정최자로 자리매김되었다.
갈홍의 공적은 고대부터 중국인의 종교적 삶 속에 존재해왔던 신선을 도교적
세계관 속에 자리를 잡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한정되지 않는다. 갈홍의 공적은 오 히려 신선을 도와 연결시김으로서, 현실의 질곡을 극복하고 '누구든지'
스스로의 노력과 수양에 의해 그러한 이상적 자유의 삶에 도달할 수 있는 기능성을 이론적 으로 확인한데서 찾을 수 있다. 갈홍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신선의 자유로움-을 묘 사히는 다양한 이야기와
신선 방술에 대한 소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산해경』 이나『장자』에 나오는導引,吐納등등 신선 방술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갈홍은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는 물론 질병이나 재난 전쟁 등 다양한 현실의 질곡을 수련과 수양에 의해 극복하괴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신분적 차별을 넘어서 서 우주적
원리와 하나되는 존재, 즉 도와 하나되는 불사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종교적 세계 해석을 제공함으로서
신선 불사의 탐구에 새로운 지평을 제공한다. 신선에 관한 갈홍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은 도교에서의
신선 사상과 신선 방술을 이해하는 먼 길에 있어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의미가 있
다. 그 작업은 필자에게 남겨진 다음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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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의 노자 해석을 비판한 김경숙은 노자 읽기의 다양한 기능성을 무시하고 '노자는 이렇게 읽어야 한다는 시걸을 강조하는 편협한 시각에서 김용옥의 해석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한 시각에서는 고전은 '옳은 읽기와 '틀린'('다른'이 아닌) 읽기만이 존재하는 닫힌 문서가 되고 만다. 고전의 읽기에 관한 한 옳고 틀리고의 해답은 있을 수 없다. 얼마나 현실적 정합성을 가진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가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뿐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고전은 말이 없다. 고전을 말하는 사람은 고전 그 자체에 대해 밀耉는 것이 아니라, 고전을 통해 '자가의 말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의 세계와 자기의 세계가 융합된 지평의 융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김용옥의 노자 읽기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읽기가 전적으로 틀린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문학적 토론은 '무엇을?' 이라는 사실 인정의 차원에서는 사실의 옳고 그름에 대한 것이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 그 사실의 '왜?'를 묻는 차원에 나아가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를듯함'의 문제로 전환한다.
김용옥이 한문 해석 능력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문제도 마찬가지다. 전혀 한문의 기본 원리도 모르는 사람이 헛소리 한 것이 아니라면(무엇을 묻는 차원) 독자적인 읽기의 전략(왜를 묻는 차원)을 무시한 채, 기초 실력 운운하는 발언 그 자체가 바로 기본 소양의 부족함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용옥의 문제는 그가 한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원문을 잘못 읽었다는데 있지 않다. 그의 잘못은 스스로의 읽기를 절대시하는 바로 그 독단성과 오만함에 있 다. 고전의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하는, 인간은 결국 함께 더블의 살아가야呑는 존재 이며, 그 더불어 살기의 윤리를 깨닫지 못言는 사람에게 지식은 오히려 위험한 무기 가 될 수 있다)
<도와 하나되는 삶 - 도교의 이상적 인간상>
이 용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