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30

希修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 대승불교의 정체성

Facebook


希修  6 hrs · <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 대승불교의 정체성 >
.
.
1. 머리말
.
올해 봄 〈법보신문〉의 지면을 통해 전개되었던 ‘초기-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은 몇 가지 점에서 매우 유익한 논쟁이었다. 첫째는 불교계 내의 가장 민감한 교리적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를 공론화했다는 점이다.
.
둘째는 이를 계기로 앞으로 불교학계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될 것으로 기대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이를 계기로 진지한 학자들과 일반 불자들이 한국불교의 문제점에 대해 공석과 사석에서 토론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이다.
.
특히 무엇이 불교적이고 정법에 근거하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보다 깊게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온갖 비불교적 요소가 판을 치는 불교계 현실을 감안할 때 현재보다는 미래의 성과가 더욱 기대된다고 할 것이다.
.
하지만 이 논쟁은 전개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점과 한계를 드러낸 것 또한 사실이다.
.
첫째는 처음에 보여주었던 논점의 진지함이 논쟁이 과열됨에 따라 주제 자체보다는 인신공격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로 인해 논쟁에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해서 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아쉽게 종결된 점이다.
.
그리고 논쟁의 마당을 제공하고 이끌었던 (법보신문〉이 논쟁을 마무리하면서 사설을 통해 마녀 재판식 결론을 내린 것은 매우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인지는 모르나 그 사설은 논쟁이라는 형식을 빌어 〈법보신문〉이 의도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기획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할 수 있다.
.
이번 논쟁을 주의 깊게 지켜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논쟁은 결코 아직 승패가 가려진 것이 아니다. 이제 겨우 논의의 주제가 설정된 단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지금까지 논의되어 왔던 주제를 하나하나 정리하고 재검토하는 것이다.
.
그런 과정을 통해 어느 쪽의 주장이 옳고 그른지, 그리고 어느 쪽의 주장이 미래의 한국불교 발전에 보다 도움이 되는 견해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의 목적도 여기에 있다.
.
.
2. 논의된 주요 주제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
.
2.1. 붓다로 돌아가자는 것이 문제일 수 있는가
.
처음 이 논쟁은 동국대 불교학과 김용표 교수의 기고문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이 즉각 반론을 제기했다. 이렇게 불붙기 시작한 이번 논쟁의 주된 쟁점은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에 관한 것이었다.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이 문제는 김용표의 지적처럼, 역사적·철학적·해석학적 통찰이 필요한 난제임에는 틀림없다.
.
그러나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 혹은 초기불교에서 찾으려는 흐름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이유는 불교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
전재성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불교의 정신은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역사적인 붓다의 삶 속에서만 드러난다. …… 초기불교라든가 대승불교라든가 하는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역사적인 붓다의 삶이라는 사건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라고 단정짓고 있다.
.
따라서 어떤 형태의 불교이든지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석가모니불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다고 본다.
.
그런데 역사적으로 후대에 성립된 대승불교가 정법의 기준이라도 되는 듯한 기술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정법의 잣대란 원래의 불교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 순리이지, 거꾸로 현재의 잣대로 원래의 불교를 진단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사상사(思想史)의 흐름에도 역행되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
한편 김성철 교수는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논리적 귀결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말속에는 분명 초기불교를 낮추어 보는 대승불교 전통의 편향된 시각을 아주 자연스럽게 답습하고 있다. 즉 초기불교는 불완전하고 미완성이었는데, 대승불교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
이러한 시각은 중국에서 고안된 종파적인 교판론(敎判論)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근거가 되는 교판론은 전혀 역사적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 지 이미 오래 되었다.
.
불교학에도 역사의 개념이 도입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스다니 후미오가 지적했듯이, 역사의 개념을 전적으로 무시한 교상판석(敎相判釋)에 근거한 작업은 모두가 그릇된 전제 위에 선 것이다. 그런 전제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되었기에 그러한 교상판석에 근거한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
간혹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은 아직도 인도불교는 서론에, 중국불교는 본론에, 한국불교는 결론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상좌불교도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붓다로부터 2,50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는 종갓집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
이처럼 자기들이 신봉하는 불교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자기 중심의 호교론적 입장은 두 전통의 불교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계속된 충돌만 있을 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조준호가 제시한 “초기불교는 초기불교로서 대승불교는 대승불교로서 각각 ‘불교의 귀결’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서로 조정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맥락은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바라보는 각도가 다를 뿐 동일한 목적지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주명철의 지적처럼, “오히려 대승불교는 세존의 깨달음과 자비의 가르침의 정신을 더욱 충실히 실천하였지 진리를 부정하거나 존재를 부정한 적은 없다.”
.
필자도 이 점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대승불교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른 초기 불교주의자들도 초기불교만이 진리이고, 대승불교는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계의 모든 불교가 초기불교의 틀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고 주장한 적도 없다.
.
다만 필자는, 현재의 한국불교가 그 원래의 대승불교에서 많이 일탈해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초기불교 지상주의를 건설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점에서 완전히 초기불교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필자의 주장은, 지금 이 시점에서 부처님의 불교, 즉 붓다의 본래 정신을 가능한 되살리자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불교적 전통과 모습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는 현재의 상좌불교도 원래의 초기불교는 아니다.
.
따라서 필자는 부처님의 불교를 하자는 것이지, 남방 상좌부 불교를 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상좌불교도들도 교단이 어지러울 때에는 언제나 원래의 불교 모습으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한다. 불교의 정통성과 기준은 오직 석가모니불이기 때문이다.
.
대승불교 흥기의 배경도 ‘붓다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지 않은가! 부파불교가 사회적 실천이라는 붓다의 근본 정신을 외면했기 때문에 원래의 붓다 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외침이 대승불교 운동이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
그런데 현재의 한국불교 현상들은 오히려 그러한 대승불교의 본질 혹은 정신을 크게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붓다의 원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
“초기불교를 강조하는 것은 대승불교를 똑바로 잘하기 위함이다.”라고 필자가 주장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그러한 취지에서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불교를 정법(正法)의 토대로 더욱 굳건히 올려놓기 위해 붓다로 돌아가자고 강조하는 것이다.
.
그런데 필자가 부처님의 불교를 생각해 보자고 제의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잘못된 것인 양 매도하려는 분위기는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다. 붓다로 돌아가자는 것이 과연 큰 문제인가?
.
2.2.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는 정당했는가
.
이 주제는 대승불교의 경전관(經典觀)에 관한 문제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논쟁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떠한 일방적인 입장으로의 결론이 도출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그 자체를 논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본다. 그리고 현재 상황에서 대승경전 전체를 비불설이라고 완전히 배제한다거나 부정하는 것도 편견에 빠질 염려가 있다고 본다.
.
필자는 지금까지 대승경전의 비불설을 주장한 적이 없다. 그리고 대승경전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도 않는다. 대승경전은 비록 붓다의 친설은 아니라 할지라도 사상적으로 매우 훌륭한 측면이 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을 드러낸 부분도 있는 것이다. 김성철의 주장과 같이 대승불전이 초기불전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점도 필자는 인정한다.
.
다만 대승경전과 관련하여 홍사성이 주장한 내용은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는 이 시점에서 새롭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이다.
.
그는,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이해했다”라고 정직하게 말하지 않고,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고 함으로써 붓다의 친설과 자신의 설을 구별하지 않은 것은 지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대승경전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찬술자들의 부정직한 태도를 지적하였던 것이다.
.
그는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마치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으로 가탁(假託)했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는 대승불교의 성립 배경과 원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종교사학적으로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그 자체는 한 번도 논의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여러 차례 지적하였다.
.
이에 대해서 진현종과 김성철은 크게 반박하고 있다. 진현종은 나의 깨달음과 부처님의 깨달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대승불전 찬술자들의 태도에 오히려 치하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붓다와 그 제자의 관계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처음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붓다도 아라한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포함시켰다. 즉 불교교단에서 붓다는 첫번째 아라한(阿羅漢)이었다. 그는 어떠한 구별도 없이 다른 아라한들과 같이 한 명의 아라한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이 최초로 고타마의 가르침에 귀의한 다섯 고행자(pan?avaggiya)의 개종 이후, 붓다를 그들 중의 하나로 계산하여 당시 세상에는 여섯 아라한이 있었다고 진술했던 것이다.
.
그러나 후대에 오면 처음 깨달음을 이룬 붓다와 그의 가르침에 의해 나중에 깨달음을 이룬 제자와는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
“붓다는 깨달았다는 점에서는 아라한과 동등하다고 말했다. 단지 다른 점은 붓다는 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개척한 선구자인데 반해서, 아라한들은 붓다가 밟았던 길을 따라서 같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아라한들은 붓다누붓다(buddha ubuddha), 즉 완전히 깨달은 자(正等覺者) 다음에 깨달음에 도달했던 사람들이라고 묘사되었다.”
.
이와 같이 스승의 가르침에 의해 제자가 스승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지라도 스승과 동등하다고 자만한 흔적은 초기경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깨달음을 이룬 뒤에도 제자들은 한결같이 붓다를 스승으로 모시고 존경했다.
.
붓다의 상수 제자였던 사리뿟따(Sariputta, 舍利弗)는 “그리고 존자시여, 제자들은 지금 길을 쫓아서 나중에 그 길을 구현하는 자로 살 것입니다”라고 했다. 비록 사리뿟따는 당시에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스승에 대한 존경의 예는 변함이 없었다.
.
그런데 후대의 대승경전 찬술자들은 석가모니불과 동등한 입장에서 경전들을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행위와 태도가 진현종의 주장처럼 겸손해서 그런 것인가?
.
대승경전이 출현하기 이전에도 논장(論藏, Abhidhamma Pit.aka)은 있었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논장은 기원전 3세기경 제3결집 때, 목갈리뿟따-띳사(Moggaliputta-tissa) 장로에 의해 편찬된 《논사(論事, Kathayatthu)》로 알려져 있다. 이때 비로소 경·율·논 삼장이 성립되었다. 그후 부처님의 제자들은 자신이 이해한 견해들을 논서로 저술하여 후세에 남겼다.
.
그런데 오직 대승경전 찬술자들만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함에 있어서 논서의 저술가로 이름을 남기지 않고,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이라고 가탁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해 당시의 부파교단에서 강력히 반발하였을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
당시의 부파교도들은 ‘대승은 악마의 설’이라고까지 반박하였다. 이에 대해 대승교도들은 ‘부처님은 한 목소리로 설법하셨는데 대중이 여러 가지로 이해했다(一音異解)’며 대승이 부처님의 말씀임을 논증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설은 《유마경》에서 역설한 것인데, 원래는 대중부(大衆部)에서 부처님의 신통자재한 덕을 찬양하려고 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
이처럼 부파교도들이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에 대하여 극심하게 비난했던 증거들이 오히려 대승경전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
이것은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대승의 설이야말로 부처님의 진설(眞說)이므로 부파교도들의 반발과 주장에 동요하지 말라고 강조한 것이 그대로 대승경전 속에 기록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
만일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대승경전을 논서로 남겨두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불설·비불설 논쟁은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을 홍사성이 지적했던 것이다.
.
그런데 김성철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대승경전을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마스다니 후미오가 그의 저서 《불교개론》에서 현대에서도 새로운 경전이 생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스다니 후미오의 주장은 위경(僞經)을 계속 생산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불교의 새로운 사상을 끊임없이 전개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
즉 후대의 불제자들이 더 많은 논소(論疏)와 주석서들을 저술하여 불교사상을 보다 풍부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러한 마스다니 후미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인지, 김성철은 대승경전을 2000년 동안 만들지 못한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하고 참회해야 한다고 했다.
.
김성철의 주장대로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대승경전을 만들어 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불경의 의미는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이 자칭 깨달았다고 말하고, 궤변을 늘어놓아도 불설이 된다. 이렇게 계속해서 불경을 만들어낸다면 나중에 불설과 비불설을 누가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
대승경전을 옹호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지금도 논소(論疏)나 주석서가 아닌 대승경전을 계속 만들어내자는 것은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인도와 중국에서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불설을 빙자한 위경(僞經)들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
2.3. 역사적 실증주의는 과연 잘못된 것인가
.
역사적 실증주의에 바탕을 둔 불교학의 연구는 정말 잘못된 것인가? 진현종은, 실증주의와 합리주의는 그 본산지에서조차 이미 박살난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실증주의는 사견과 망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하고 있다.
.
그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친설은 초기불전에서도 신고층(新古層)이 있기 때문에 구분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 자체가 이미 실증주의와 합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
사실 역사적 실증주의를 배제하면 불교학은 물론 학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논쟁 자체도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논쟁도 어느 쪽의 주장이 더욱 더 역사적 진실에 가깝게 접근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주지하다시피, 서구 불교학의 출발은 호교론적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초기의 서구 불교학자들은 대부분 가톨릭 신부이거나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식민지 지배를 보다 확대하거나 공고히 하기 위해 인도학 불교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철저한 문헌비평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
이러한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현대의 불교학이다. 초기경전 가운데 신·고층이 있다는 사실도 이러한 연구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초기경전에 신·고층이 있다는 진현종의 주장 자체가 이미 역사적 실증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논리적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
불교는 그 어느 종교보다도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과학적이라는 것은 학계의 정설이다. 불교의 특질 가운데 하나가 합리성과 미신의 배제이다.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은 “불교에는 불합리한 미신적인 요소는 하나도 없다. 또 수행의 방법도 단계적인 순서를 좇아 합리적으로 조직되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종교의 학설에서 그에 비견될 만한 것을 볼 수 없는 바이다.”라고 했다.
.
주명철은 “석존은 합리적이라기보다는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라고 했다. 또한 그는 “대승불교는 석존의 명상적이고 신비적인 면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그는 붓다를 비밀교의를 펼쳤던 신비주의자로, 그리고 대승불교를 신비주의로 이해하고 있다.
.
이러한 그의 불교관은 자칫 불교를 신비주의로 이해하는 부류와 기복신앙을 조장하려는 부류에 편승하거나 아니면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의혹을 배제할 수 없다. 진현종은 부처님 자신도 실증주의적 입장을 거부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주장을 거리낌없이 내두르고 있는 데에 그저 할 말을 잃는다.
.
과연 부처님은 합리주의와 실증주의를 부정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일반적으로 부처님은 실증주의에 바탕을 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는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닌 현실주의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
무엇보다도 먼저,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어느 편이냐 하면, 불교는 현실주의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므로 현실주의적이다. 불교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본다(如實知見). 불교는 헛된 기대 속에 살도록 우리들을 거짓으로 달래지도 않고, 온갖 종류의 가상의 공포와 죄책감으로 우리들을 놀라게 하거나 괴롭게 만들지 않는다. 불교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주변 세계는 어떠한지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주며, 또한 완전한 자유, 평화, 평안 그리고 행복에 이르는 길을 우리들에게 제시해 준다.
.
이와 같이 붓다는 언제나 실증할 수 없는 것, 즉 진위(眞僞) 여부를 가릴 수 없는 사후(死後)에 관한 일이라든가 미래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결코 말한 적이 없다. 붓다의 가르침은 다른 종교가들의 주장과는 달라서 현실적으로 증명되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
가르침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다. 즉 이 가르침은 현실적으로 증명되는 것,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능히 열반에 인도하는 것, 또 지혜 있는 이가 저마다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라고.
.
이 인용문은 초기경전 여러 곳에서 되풀이되는 정형구로서, 붓다의 가르침의 기본적 성격을 아주 간단 명료하게 표현한 것이다. 붓다 가르침의 특징:
.
- 첫째, 존귀한 자에 의하여 잘 설해진 가르침(世尊善說法), 즉 ‘표현의 명료성(善說)이다.
- 두번째의 특징은, 경험적인 내용(現見)이라는 점이다.
- 세번째의 특징은, 특정한 시간에 제한되지 않는 것(非時間的)이다.
- 네번째 특징은, 검증 가능성(ehipassika, 來見)이다.
- 다섯번째 특징은,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생활 조건(즉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은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이 종교생활의 최종적인 목표나 효과(paramat.t.ha, 勝義)가 된다는 점이다.
- 여섯번째 특징은, 스스로 경험되는 것(paccattam. veditabbo, 自證)이라는 점이다.
.
위의 둘째, 셋째, 넷째의 세 가지 항목은 붓다의 가르침이 리얼리스트(realist)의 사상이었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마스다니 후미오는 지적했다.
.
이와 같이 붓다의 가르침은 현실적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붓다가 설한 것은 모두가 인생의 현실 문제였으므로, 누구라도 편견 없는 눈으로 그 진상을 관찰한다면 그것이 헛되지 않음을 볼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붓다는 결코 환상을 말하지 않았다. 붓다는 신비주의자가 아니었다. 또한 붓다의 법은 비밀리에 비밀법을 전한 것도 아니다. 이에 대해 월폴라 라훌라는 이렇게 말했다.
.
붓다는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Maha?arinibba?a-sutta)》에서 그는 상가(Sangha, 僧團)를 통제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고, 상가가 그에게 의지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가르침에는 비전(秘傳)의 교설은 없으며, ‘스승의 꽉 쥔 주먹(Ayariya-mut.t.hi, 師拳)’에 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혹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몰래 준비한 어느 것도 결코 없다고 붓다는 말했다.
.
엄격히 말해서 원래의 불교에는 비밀리에 법을 전해준다는 따위의 신비적인 요소는 전혀 없다. 그러나 후대의 불교에 오면 신비적인 요소가 가미된다. 이에 대해 칼루파하나(David J. Kalupahana)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전수되는 것 중에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적인 것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승과 제자간의 관계나 그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교육의 본성이 불교에 관한 아주 최근의 설명에서처럼 지나치게 신비화됨으로써, 삭발하고 가사 장삼을 걸친 채 무언의 비전을 전수받기 위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지 않고서는 법의 실천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초기경전에도 신(新)·고층(古層)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현종은 어느 것도 진짜 불설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무한급수의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빠지고 만다.
.
근본적인 붓다의 말씀을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 불교학의 목적이다. 학자들은 지금도 어느 것이 가장 붓다의 친설에 가까운 교설인가를 계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초기경전 내부에 신·고층이 있다고 할지라도 현재 남아 있는 초기 문헌만으로도 붓다의 근본 교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
그리고 붓다가 설한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연기설·사성제·팔정도·중도 등의 기본 교설은 대·소승에 별로 큰 차이가 없다. 우리는 그러한 교리들을 통해 붓다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실증주의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만일 역사적 실증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붓다의 탄생지, 열반지, 초전법륜지 등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인도나 동남아로 성지순례를 떠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곳이 역사적으로 부처님의 발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
부처님이 대승경전들을 직접 설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진실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했다는 것도, 베살리에서 유마거사가 《유마경》을 설했다는 것도 역사적 진실이 아님은 자명하다. 이처럼 비역사적인 사실은 역사라고 믿고, 진짜 역사적 사건은 역사적 실증주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몽롱한 주장은 현기증을 유발할 뿐이다.
.
결론적으로, 모든 학문과 종교현상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실증주의에 그 바탕을 두지 않으면 신뢰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
2.4. 다불다보살 신앙에 문제는 없는가
.
이것은 대승불교의 신앙관에 관한 문제이다. 대승불교의 다불다보살(多佛多菩薩) 사상은 사상적으로 위대한 점이 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비불교적인 요소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후대의 불신관(佛身觀)에 의하면 과거·현재·미래에 수많은 부처님과 보살들이 존재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나 사상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다불다보살 사상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보다 법신불(法身佛)이나 보신불(報身佛)에 더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일반 불자들은 대부분 대승불교의 보살을 거의 신적(神的)인 존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
이러한 사상은 자칫 잘못하면 범신론적(汎神論的) 유신교(有神敎)로 전락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불다보살 사상은 신앙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전통이나 권위 혹은 대승이라는 이름으로 다불다보살 신앙을 포용함으로써 불교의 본질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지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
대승불교의 다불다보살 신앙은 절대주의의 경향이 농후하다. 마스다니 후미오는 “불교에서 말하는 ‘붓다’란 기독교인이 말하는 ‘신(神)’과는 그 개념이 다르다. 그는 천지와 만물의 창조자가 아니다. 최고의 유일한 존재도 아니다. 인간에게 ‘절대 타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 불교인 중에는 마치 절대자를 대하는 것같이 붓다를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붓다의 성격을 완전히 곡해한 것이며, 또 붓다 그분의 뜻에서도 빗나간 생각임이 명백하다.”고 했다.
.
그리고 이어서 그는 “대승경전이 붓다를 절대화하는 과오를 범했다고 해서 거기에 담긴 많은 진리까지도 부정할 마음은 나에게 없다. 또 과거의 고승 대덕들이 도달한 종교적 경지에 대해서도 나는 겸허하게 고개를 숙일 아량을 갖고 있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
상좌불교국에서는 교차로나 주택의 입구에 사면불(四面佛)이나 십일면(十一面)관세음보살상등을 수호신(守護神)으로 봉안하고 있다. 인도의 힌두교적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매일 그 신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모든 재앙을 소멸하게 해달라고 빈다. 이러한 행위는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난 그릇된 신앙 행위임은 말할 나위 없다. 상좌부의 스님들도 이러한 비불교적 민간신앙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진현종은 불자들의 신관(神觀)과 외도들의 신관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주명철은 한술 더 떠서 “대승의 붓다관을 유신론이라는 잣대로 폄하하는 점은 인도 종교의 유신론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편견이다.”라고 말했다.
.
하지만 과연 누가 인도 종교의 유신론에 대한 이해 부족과 편견인지 이 부분의 전공자들이 밝혀주기를 기대한다.
.
한편 한국의 사찰에서 행해지고 있는 각종의 비불교적인 신앙에 대해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은 그의 저서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1910년 저술)에서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지면 관계로 여기서는 칠성과 신중에 관한 부분만 인용한다.
.
"칠성(七星)은 더욱 황당무계해서 웃음거리가 아닐 수 없다. 별을 상(像)으로 하여 받들 바에는 하늘에 있는 별이 매우 많은 터에 어찌 유독 칠성만을 위하는 것인가. 또 그것이 여래(如來)의 화현(化現)인 때문이라 한다면, 천지·일월과 삼라만상이 똑같이 부처님과 일체(一體)일 터인데, 하필 칠성만이 그렇다는 것인가.
.
불제자(佛弟子)로서는 여래의 참된 상(像)을 받드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멀리 부처님의 화현(化現)에게까지 숭배의 대상을 확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번거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
.
신중(神衆)은 부처님께서 영산(靈山)에 계실 때에 호위하는 임무를 띠고 항상 따르던 신의 무리니, 불법(佛法)을 보호함이 실로 그들의 책임인 터이다. …… 비유컨대 승려는 상관과 같고 신중은 호위 순경과 같다 하겠다.
.
이제 여기에 한 상관이 있어서 손을 맞잡고 꿇어앉아 도리어 호위 순경에게 머리를 조아려 애걸한다면 약자에게 쩔쩔매는 그 꼴을 웃지 않는 자가 드물 것이니, 우리 승려들은 어찌 이것만을 보고 자기를 보지 않는 것이랴. 지금 남에게 뒤질세라 신중에게 몸을 굽혀 복을 비는 사람들이 있거니와, 나는 그 가치의 전도(顚倒)를 견디기 어려운 바이다."
.
앞에서 언급한 두 신관의 차이를 비교할 필요도 없이 한국불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비불교적인 잡다한 신앙들은 하루빨리 청산되어야 할 잘못된 신앙 형태라고 본다. 이런 측면에서도 만해 한용운은 시대를 앞서간 위대한 선구자였음을 알 수 있다.
.
여하튼 대승불교 흥기와 함께 불교 속에 습합된 다불다보살 신앙은 다분히 유신교적 경향을 띠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한 신앙이 맹목적으로 강조될 경우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날 염려가 있다.
.
대승불교도들이 다불다보살 신앙을 통해 불교의 본질로 돌아온다면 다행이겠지만, 불교 교리에 무지한 일반 대중들이 자칫 잘못하면 미신이나 유신론으로 빠지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
2.5. 기복을 부추기는 것이 옳은 일인가
.
정체성 논쟁과 아울러 제기되는 문제는 기복신앙이다. 대승불교에서는 기복신앙이 용인되는 것으로 주장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다행히 주명철은 “한국불교의 기복문제는 대승불교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 종단, 교파, 기성체제 속에서 대승불교를 잘못 이해하고 적용한 후학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한국불교의 문제를 오로지 대승불교에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좋은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
필자가 주장했던 내용과 동일하다. 필자도 한국불교가 대승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기복 위주의 잘못된 신앙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코 대승불교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기복(祈福)과 작복(作福)을 혼동하고 있는데, 만약 같다고 하면 이렇게 논쟁할 필요도 없고 기복을 두 손 들고 맞이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가 지면을 통해 자세히 언급하였음으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
분명한 사실은, 기복의 대안이 작복이다. 조준호의 지적처럼 “작복은 백 번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작복이야말로 대사회적으로 불교의 위치를 당당히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반복적인 외침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한국불교 분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점이다.
.
이미 만해 한용운도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복은 빌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다가 부처님도 원래 화복의 주관자가 아니시니, 빌어 본대도 복을 얻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
이와 같이 기복신앙을 작복신앙으로 전환하자는 데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다만 현실적으로 기복신앙을 비판·부정하면 마치 한국불교가 무너져 버릴 것이라는 몇몇 사람들의 과민한 애종심이 문제이다. 그리하여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하자고 주장한다.
.
하지만 교리적·이론적으로는 기복신앙이 불교에서 용인되지 않는다. 그 잘못된 신앙을 어떻게 해서든 바른 방향으로 유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기복의 대안인 작복도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한편 조준호는 기복신앙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
“부처님은 예경(禮敬)의 대상이지, 화(禍)는 물론 복을 내리는 기도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나아가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한 이유는 세상 사람들의 물질적인 기대나 세속적인 욕망을 채워 주기 위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불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의 기능에 있어 ‘기복’이야말로 더 현실적으로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어느 종교이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종교의 중심 경전에 근거한 본연의 입장과 대치되는 대중적 차원의 신앙이 병존(竝存)하는 이중적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
이와 같이 불교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느 종교나 신행에 있어서 분명히 이중적 구조의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의 지성인들과 미디어 종사자들이 앞장서서 기복신앙을 옹호하거나 조장 혹은 부추겨서야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
맹목적·미신적·주술적·비밀교적인 그리고 무속적 기복신앙은 불교가 아님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그 명백한 사실을 왜 억지로 비호하고 권장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현실적으로 기복신앙을 갑자기 개선하기가 어렵다 할지라도 점차 개선해야 한다는 태도가 불교도의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
불교계의 언론은 기복신앙을 권장하거나 부추기기보다는 오히려 출가·재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잘못된 신앙을 바른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기복신앙을 권장하는 것이 옳은가? 어떤 주장이 더 미래의 불교를 위한 것인가?
.
2.6. 잘못된 전통까지 고수해야만 하는가
.
<법보신문>의 사설에서는 “불교의 특성 중의 하나가 전파 당시 그 나라의 고유한 신앙을 습합하며 정착한 데 있다는 것은 재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초기경전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불교가 아니라는 원리주의적 주장을 펴는 것은 폭력이다.”라고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1910년에 만해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을 지었다. 만해는 이 〈조선불교유신론〉에서 한국불교 속의 비불교적 신앙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불가(佛家: 조선불교를 말함)에서 숭배하는 소회(塑繪 : 절에 모신 일체의 등상과 그림을 말함)는 가리어 혼란이 없어야 하겠고, 간략하여 번잡하지 않아야 하겠다.”고 주장했다.
.
그리고 만해 이전에 이미 “소회(塑繪)는 미신에서 나온 거짓된 모습이니 전부를 들어 소각함이 상책이다. 그리하여 절을 깨끗이 해서 암흑 시대의 미신을 일소하고 진리를 배양하여 불교의 새 나라를 고쳐 세워야 한다.”는 보다 과격한 주장도 있었다.
.
여기서 우리는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무릇 모든 종교는 어느 지역에 정착하기 위해서 기존의 신앙을 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측면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질적인 종교와 사상이 발을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
인도라는 토양에서 잉태된 불교가 동쪽 끝에 위치한 한반도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재래 민간신앙을 습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완전히 민간신앙을 배제하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는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불교의 전래는 단순히 종교사상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함께 전래된다. 외래문화가 들어오면 처음에는 거부반응을 가지다가 점차 시간이 경과하면서 토착문화와의 습합을 통해 새로운 문화가 탄생되고 그것이 정착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독자적인 한국불교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
이렇게 형성된 한국불교 나름의 문화사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문화현상 자체를 좋다 나쁘다고 평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다만 그러한 과정을 거침으로 인해 원래의 불교, 즉 불교의 순수성 혹은 정체성이 희석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정당화하거나 찬양하는 듯한 논조는 문화사적인 측면에서는 타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불교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명제에는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흔적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
특히 기백이 넘치던 옛 선사들이 한국불교 속에 남아 있는 산신각, 용왕각, 독성각 등을 철거하기 위해 탱화를 불살랐던 일화도 전설처럼 남아 있다. 이러한 행위는 한국불교의 문화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처절한 몸부림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만해 한용운이다.
.
그는 염불당의 폐지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불가에서 숭배하는 소회(塑繪)의 철거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의 주장 가운데 극히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
신통치도 않는 신들 앞에 종처럼 무릎 꿇어 아첨하고 있으니, 소회(塑繪)를 받드는 폐단이 이에 이르러 극단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누가 능히 만천하의 이런 소상(塑像)들을 불살라 날려보내고 물에 던져 가라앉혀서, 다시는 세상에 머물지 못하게 하여, 우리 종교의 진리로 돌이켜 흠이 없게 할 것인가. …… 설령 불교를 미신이라고 한다 해도 부처님을 미신하는 것으로 족한 터이다. 어찌 아침에는 부처님을 미신하고, 저녁에는 나한(羅漢)을 미신하고, 또 칠성(七星)을 미신하고, 또 시왕(十王)을 미신하고, 또 신중(神衆)을 미신하고, 또 천왕·조왕·산신·국사(國師) 따위를 미신함으로써 일정한 신앙이 없을 수 있겠는가.
.
이와 같이 지금의 필자와 같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불교계 내부에서도 열린 시각으로 일찍부터 한국불교의 문제점들을 지적해 왔다. 만해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전혀 통용될 가능성이 없는데, 1910년대에 그것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겠는가? 그 장벽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러한 토착화된 문화 혹은 종교현상은 불교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점을 필자는 강조하는 것이다.
.
그리고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잘못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그 잘못된 부분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감싸야만 한국불교가 바르게 되는가? 이를테면 가문의 명예를 빛낸 인물도 있지만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인물도 있을 수 있다. 비록 가문을 더럽혔다고 해서 그 가문의 출신이 아닌가? 그 옳고 그름은 후대에서 판단할 몫이다. 잘못된 부분을 두둔하거나 변명한다고 잘못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부분은 잘못된 부분대로, 잘된 부분은 잘된 부분대로 인정하면 그만이다.
.
대승불교의 역대 조사나 사상가, 그리고 한국의 고승 중에서도 본의 아니게 부처님의 뜻과 반대되는 주장이나 행동을 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그 잘잘못을 따질 수 있어야 한다. 과문의 탓인지는 모르나 부처님께서는 후회할 나쁜 행위가 전혀 없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만일 부처님도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그 잘못된 부분에 대해 비판받아야 한다.
.
실제로 부처님께서는 안거(安居)가 끝나는 마지막 날의 자자(自恣, pava?an.a?에서 나의 허물을 보거나 발견한 사람은 지적해 달라고 말했다.
.
이와 같이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붓다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잘못이 있다면 대중 앞에 발로 참회해야 한다. 이것이 불가의 전통이다. 허물은 덮어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잘못된 전통을 고수하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인가? 그 잘못을 지적하면 한국불교의 전통과 자존심을 짓밟는 것인가? 그 잘못을 덮어두면 한국불교의 전통과 자존심을 세우는 것인가?
.
.
3. 맺음말
.
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을 주창할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과 같은 한국불교의 분위기에서도 한국불교의 잘못된 부분들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현재 초기불교 정신에 따른 한국불교 실태 파악이 수용되기는커녕 오히려 매도하려는 분위기는 더더욱 한국불교의 미래를 생각할 때 참담할 뿐이다.
.
이는 아직까지도 한국불교가 지적으로 성숙해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한국불교를 주도하고 있는 주된 세력들은 여전히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러한 주장들을 외면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비록 표면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불교를 올바르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은 어느 쪽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으며 미래 지향적인가를 잘 알고 있다. 이번 지상 논쟁을 지켜 본 많은 사람들은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 없다고 말한다. 잘못된 것을 올바른 것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올바른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올바른 것일 수밖에 없다.
.
지금까지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한국불교 정체성 논쟁에 침묵을 고수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침묵하는 쪽이 오히려 낫다.
.
반대로 현실적으로 제도권 불교에 영합하고 편승하여 상대방을 공박하려는 태도 또한 훗날의 비판을 면키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
여하튼 새로운 한국불교의 모습은 언젠가는 올 것이고, 그러한 분위기는 굉장한 수준으로 성숙되고 있어 희망적이다. 새살이 돋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불교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더욱 정진해야 할 것이다.
.
끝으로, 한국불교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초기불교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지적하고자 한다. 기복신앙으로는 한국불교의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불교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오늘의 문제점들을 진단하고 그 대안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
마성스님
스리랑카 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현재 스리랑카 팔리불교대학교 한국 분교 교수 및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마산 가야사 주지.
http://www.ripl.or.kr/
.
.
*** 아래의 댓글들도 반드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

RIPL.OR.KR

팔리문헌연구소




希修

Sejin Pak 참고하실 만한 글 몇개 올려 드리겠습니다.


希修

부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 기억력이 비교적 좋다고 소문난 이들 약 5백여명이 부처님 사후 모여 서로가 기억하는 부처님과의 일화를 대조, 기억이 일치되는 부분을 운문형식으로 확정하여 노래처럼 부르며 전파합니다. (글로 남기면 권력자의 정치적 목적 등에 의해 훼손될 위험이 있어서요.) 이런 결집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 3차 결집까지는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토씨 하나까지도 얼마나 중시했는가 하면, 영역본으로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그 긴긴 텍스트를 수천 명이 동시에 순서대로도 외우고, 맨 뒷단어에서부터 거꾸로도 외우고, 한 단어씩 건너 뒤면서도 앞뒤로 외우는, 그야말로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여 보존합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른 후 문자로 기억되는데,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발견된 다른 판본들의 내용이 거의 완벽히 일치하게 됩니다.
암튼, 경전의 성립과정이 이렇다 보니, 경전의 내용도 제자들이 결집하여 기억을 기술한 그대로입니다. "이러저러한 날 이러저러한 곳에 부처님이 계셨는데 누구누구가 와서 이런 질문을 했고, 나는 부처님이 이렇게 대답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부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 않은 이들, 시공간적으로 너무나 많이 떨어져 있던 이들이 무수한 입을 통해 전해들은 내용을 자기 나름대로 재창작하여 기록하면서 "나는 이렇게 들었다"라는 구절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죠. 읽는 이들은 당연히, 그 내용이 부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라는 오해를 하게 되구요. (이런 문제들 때문에 불교발전의 역사를 모르면 엄청 헷갈리고 엉뚱한 삽질을 하게 됩니다.)
위의 2.2. 단락은 대승경전의 이 integrity 문제를 지적하는 부분입니다. 대승경전 중에도 물론 '훌륭한' '작품'들이 많습니다만, 그 자체로 철학이라 볼 수는 있어도 부처님의 말씀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P%C4%81li_Canon
Sejin Pak


EN.WIKIPEDIA.ORG

Pāli Canon - WikipediaPāli Canon - Wikipedia


Like


·
Reply
· 51 m
·
Edited



希修

불교를 공부하시다 보면 차차 느끼시겠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의 양 자체도 워낙 방대하고, 그 내용도 상당한 지적능력, 특히 메타인지가 있어야만 이해와 실천이 가능한 수준입니다. 그래서 착한 일을 하며 공덕을 쌓으면 언젠가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을 받고 태어나게 된다고 애초에는 생각했었습니다. 초기불교는 말하자면,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대국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시켰듯, 인간이 그렇게 자신의 의식을 스스로 업그레이드시키는 코딩방법에 대한 매뉴얼이라고 저는 비유하겠습니다.
그러다가 "엘리트 아니면 그럼 일반 대중은 들러리냐?"면서 일반 대중을 위한 대승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부처님 말씀에 대한 온갖 희석, 윤색, 창작들이 생겨나고, 그래도 여전히 일반 대중에겐 어려우니 "대중은 보시만 하면 그 보시받은 사람이 깨달아 해탈할 때 보시했던 사람도 그 등에 업혀 free ride로 함께 해탈할 수 있다"라는, 일종의 '구세주를 통한 구원의 종교'로 변질되게 됩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변질시켜 놓고서 "우리는 대중도 함께 데려가는 자비로운 大乘이고, 초기불교는 째째하게 혼자만 해탈하겠다는 小乘"이라고 폄하하여 부르기 시작한 것이죠. 사실은, 나조차 너를 도와줄 수 없다, 너를 구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네 자신의 수행뿐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가르침을 남기는 것뿐이라고, 부처님 본인도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특히, 대승운동을 주도한 이들이 인도의 중산층 이상 상류층이었기에, 그들이 이미 젖어 있었던 proto 힌두교 사상이 자연스레 대승에 배어듭니다. 그리고 동북아로 와서는 도교, 유교, 토착신앙, 무속신앙 등이 모두 혼합되구요. 현재 한국의 99.9%의 사찰들에서는 제사상에 가격표를 붙여 가며 장사를 하고 있으니, 초기경전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실은 상좌불교를 '소승'이라며 폄하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모든 종류의 신비주의와 의식/의례에 대한 집착을 나무라는 부처님의 모습이 초기경전에는 나오거든요.) 다행히 최근엔 한국에서도 초기불교를 지향하는 스님들이 한 두 분씩 늘어나고 있지만요..
Sejin Pak



希修

여러 주장들 중의 하나.. 불교는 애초에 '기복이나 대중 위로/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라기보다 각 개개인을 위한 수양방법으로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LHGc3JgvOg&list=PLpnKGM1FbJm6dnBBinOfd07k__h6fN2fb&index=2&t=5s
See more


YOUTUBE.COM

인도에서 불교는 왜 사라졌을까? [BBS TV 자신감] 20회인도에서 불교는 왜 사라졌을까? [BBS TV 자신감] 20회











경계해야 할 세 가지 독, “탐진치”

경계해야 할 세 가지 독, “탐진치”






경계해야 할 세 가지 독, “탐진치”
[정운복의 아침시평 15]
정운복 칼럼니스트 jwb11@hanmail.net
등록 2017.09.05 11:04:14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우리가 경계해야 할 세 가지 독이 있으니 그것을 “삼독(三毒)”이라고 합니다.

탐냄(貪, 탐), 성냄(嗔, 진) 어리석음(痴, 치)가 그것입니다.

이는 불가에서 착한 마음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를 의미하기도 하지요.



탐은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집착을 의미하고

진은 좋아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반감이나 혐오, 불쾌의 감정이며

치는 지적인 번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탐냄이란 무언가를 가지거나 차지하려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것은 즐겁거나 매혹적인 대상과의 접촉에서 발생하게 되지요.

주변의 끌리는 현상을 마주하면 자신도 모르게 탐냄에 물들게 됩니다.

붙잡을 수도 없고 붙잡아서도 안 되는 것이라면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좋습니다.






▲ 우리가 경계해야 할 세 가지 독은 탐냄과 성냄과 그리고 어리석음(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성냄은 일을 그르치는 단초입니다.

성내지 말고 다른 사람이 성내어도 성냄으로 갚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는 보복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무식한 귀신은 부적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만들지 않으면 얻을 수 없고,

아무리 총명하더라도 배우지 않으면 깨닫지 못한다.

노력과 배움, 이것 없이는 인생을 밝힐 수 없다.“



“탐진치”는 무엇보다도 내 마음에 근거하는 개념들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문제의 답이 외형에 있지 아니하고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마음을 잘 갈고 닦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정운복 칼럼니스트 의 전체기사 보기

[여적]탐진치 삼독(貪瞋痴 三毒) - 경향신문

[여적]탐진치 삼독(貪瞋痴 三毒) - 경향신문



[여적]탐진치 삼독(貪瞋痴 三毒)노응근 | 논설위원

입력 : 2012.05.27

오늘 석가모니 탄신일을 맞아 부처가 이 세상에 오신 뜻을 한번쯤 새겨볼 만하다.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은 석가탄신일 봉축 법어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화와 갈등은 탐진치(貪瞋痴)가 원인”이라면서 “탐진치를 떨쳐버리고 개개인이 ‘참나’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탐진치에서 ‘탐’이란 탐욕, ‘진’이란 성냄, ‘치’란 사리를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뜻한다. 부처는 탐진치가 삶과 죽음을 포함해 인간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보편적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봤다. 오죽했으면 불가에서는 탐진치를 ‘삼독(三毒)’이라고 부를까.

부처는 우리가 탐진치에서 벗어난 상태를 얘기했다. 열반이요, 해탈이다. 부처는 인간의 탐냄과 성냄,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열반이라고 했다. 진제 스님의 법어에서 유추하면 우리에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 이기심이 녹아 없어지면서 참나가 드러난 경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의 감각적 차원을 뛰어넘어 더없는 행복과 희열이 찾아온 상태, 너와 나가 구별없이 하나인 전체가 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열반이 아무리 좋아 보이더라도 출가자도 아닌 보통 사람이 다가가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부처가 실천한 수행 방법을 따르면 된다.

부처가 한 말을 그대로 기록한 불교 초기경전을 보면 수행 방편으로 계율이 강조되고 있다. 그런 계율 중 몸과 입, 마음을 단속하라는 십선계(十善戒)가 있다. 탐진치를 버리는 것 외에 살생과 도둑질, 간음, 거짓말, 이간질, 험담, 잡담을 하지 않는 것을 더한 것이다. 일상사에 매여 정신없이 살기 바쁜 우리로서는 감히 십선계를 실천하기로 마음을 먹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을 수 있다. 자신감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삶이 더 피곤해질 수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선 시작은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기 쉬운 계율부터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것도 어렵게 느껴진다면 가까운 절이나 선원을 찾아 도움을 받으면 된다. 경기 양평에 있는 순일선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수행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 마음에 쌓인 탐진치의 찌꺼기를 걷어낼 수 있게 도와준다. ‘탐진치는 자신은 물론 남까지 힘들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 부처님오신날이 됐으면 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205272055435#csidx4e61b5a450dcf3c9cd39f6577939463

불교언론-42. 탐진치 - 법보신문

불교언론-42. 탐진치 - 법보신문







HOME  2019 연재모음  강병균의 불교와 수학



42. 탐진치

 강병균 교수

승인 2019.11.12



육체의 고통은 탐진치 극복해도 피할 수 없다



수학의 핵심은 논리적인 분류

불교도 독보적 분류체계 특징



육체 고통인 생로병사는 필연

생명체는 업을 타고나는 존재



수학의 장점이자 핵심은 논리적인 분류이다. 불교는 분류의 학문이라 부를 정도로 독보적인 분류 체계를 자랑한다. 분류를 통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의학의 진단과 치료에 해당한다. 부처님을 의왕(醫王)으로 칭송하는 이유이다.



---

불교는 탐진치(貪瞋痴)를 고통의 원인으로 본다. 이를 극복하면 고통을 벗어난 걸로 본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에는 육체적 고통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정신적 고통만 포함되어 있다. 육체적 고통은 탐진치를 극복해도 피할 수 없다. 육체적 고통인 생로병사는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부처님도 요통·두통·이질 등을 앓고 치료받으신 기록이 있다. 법륜성왕(法輪聖王)의 붕어(崩御)의 직접적인 원인은 상한 음식(돼지고기 또는 버섯)으로 인한 설사(혈변)였다.



탐(貪)은 행(行 의지)에 해당한다. 욕망 추구에는 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瞋)은 수(受 감정)에 해당한다. 감정에는 반드시 호·오·중(好惡中)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치(痴)에는 ‘상과 식’(想·識 생각과 기억)이 작용한다. 



지식과 생각이 부족하면 어리석어지기 때문이다. 무아를 이해하고 깨달으려면, 지식과 생각(사유)이 필요하다. 컴퓨터에 비유하면 성능과 데이터에 해당한다.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데이터가 없으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다. 데이터가 불량하면 결과도 불량하고, 데이터가 틀리면 결과도 틀리게 된다. 종이가 아무리 좋아도 생선을 싸면 생선 비린내를 풍길 수밖에 없다.



불교는 인간을 오온(五蘊 色受想行識)으로 보는데, 행(行)이 탐에, 수(受)가 진에, 상(想)과 식(識)이 치에 해당한다. 오온에서 비롯된 병의 원인을 탐진치로 진단한 것이고, 그걸 고치는 치료법으로 계정혜 삼학과 8정도를 제시하였다. 8정도 중 정어·정업·정명은 계에, 정정진·정념·정정은 정에, 정견·정사유는 혜에 대응된다.



여기에는 색(色)에 대한 질병, 즉 육체적 질병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불경은 이를 다루지 않는다. (기도나 제사를 통해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타종교가 믿음의 대가로 질병의 치유를 약속하는 것에 비해 놀라운 자세이다. 타종교의 교주들과 달리 부처는 타인의 육체적 질병을 치료하지 않았다. 자신도 몸이 아프면 정직하게 치료를 받았다. 이에 비해 타종교 교주들은 병을 숨기고 치료 받은 사실도 숨겼다. 현대에도 사이비교주들은 추종자들에게 치병을 약속하면서도 자신은 병에 걸려 병원을 드나들지만 그 사실을 숨긴다. 그러다 큰 병원에 입원해 온갖 연명장치를 달고 연명하다가 의식을 잃고 한동안 식물인간으로 살다가 다시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는다.) 불교는 색신(色身 육체)을 업(業)으로 본다. (진화론적인 업, 즉 진화과정에서 쌓인 업으로 볼 수도 있다.) 업이 해소되지 않는 한 영원히 다시 태어나는 걸로 본다. 정신적인 업이 해소되어 다시 태어나지 않음으로써, 색신으로 인한 병에 더이상 걸리지 않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벗어나는 걸로 본다. 이걸 무여열반이라고 한다.



진(瞋 분노 증오)은 자신이 일으키는 진뿐만이 아니라 내가 타인에게 일으키는 진도 있다. 그 진이 내게 돌아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탐과 치 역시 마찬가지이다. 불교가 연기법이라면, 탐진치에는 내가 일으키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타인에게 일으키는 것도 포함되어야 한다.



연기법(interdependent origination)에 의하면 독립적인 존재는 없다. 모든 존재는 시공과 환경에 따라 생멸변화한다. 따라서 나의 탐진치 역시 타인에게 영향을 미쳐 타인의 탐진치 형성에 기여를 하며, 타인의 탐진치 역시 나에게 영향을 미쳐 나의 탐진치 형성에 기여를 한다. 생명체가 시대와 장소와 환경이 주는 영향을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중세 기독교 국가에 태어나면 거의 백 프로 기독교인이 되고, 회교 국가에 태어나면 회교도가 되고, 페르시아에 태어나면 배화교도가 되고, 태국 스리랑카 등 불교국가에 태어나면 불교도가 된다는 점에서, 종교도 시공간과 환경의 업이다.) 이는 시공업(時空業) 또는 움벨트(umbelt) 업이라 부를 만하다. 사실은 이게 가장 큰 업일지 모른다. 실존주의 철학의 ‘내던져진 존재(geworfenheit 被投性存在)’란 이런 업을 타고나는 존재를 이른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

[1512호 / 2019년 11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탐진치 개념정리 : 네이버 블로그

탐진치 개념정리 : 네이버 블로그



『밀린다팡하』(해제)



삼독[三毒]



삼독이란 탐욕(貪慾, lobha)과 진에(瞋恚, dosa)와 우치(愚癡, moha)를 가리킨다.

​탐욕은 본능적 욕구를 포함해서 탐내어 구하는 것을 말하고,

​진에는 뜻에 맞지 않을 때 일어나는 증오심이나 노여움이며, 마지막으로

우치는 탐욕과 진에에 가려 사리분별에 어두운 것을 말한다.



​우치는 모든 번뇌의 원천인 무명(avidya), 혹은 근본무명과는 구별된다.

​삼독과 근본무명은 상호작용하면서 강화되므로 순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탐진치로 통칭된다.



삼독은 중생으로 하여금 윤회전생의 괴로움을 받게 하는 가장 큰 적이지만, 이러한 번뇌가 생겨나게 된 근본 원인은 결국 자아에 대한 도착된 견해[我見 혹은 我相]와 그 사견에 대한 집착이다.



​탐진치로 대표되는 번뇌는 아상을 중심으로 생성, 발전하기 때문이다.

​무아에 대한 통찰은 모든 번뇌의 서식처를 없앤다는 의미에서 수행의 근본이며,

​불교가 지혜를 중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원문>

"모든 유위법의 평정(平靜)이며, 모든 번뇌를 버리는 것이며, 갈애의 지멸(止滅)이 열반이다."(SN Ⅰ, 136)



"오, 비구들이여, 무위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탐욕의 소멸이며, 진에(瞋恚)의 소멸이며, 우치(愚癡)의 지멸이다. ···"(SN Ⅳ, 359)



"이와 같이 보는 그는 감각적인 욕망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존재하고자 하는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어리석음의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마음이 자유로워졌을 때, '자유로워졌다'라는 앎이 있고, '윤회는 끝났다. 청정한 범행은 완성되었으며, 해야 할 일은 해 마쳤고, 이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라고 그는 안다."(MN Ⅰ, 279)



[네이버 지식백과] 삼독 [三毒] (『밀린다팡하』 (해제), 2004.,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1) 삼독

말 그대로 세 가지 독을 말하는데, 삼독은 불교에서 중생의 선한 마음을 해치는 근본적인 3가지 번뇌를 독에 비유한 것이다.

삼독은 삼불선근(三不善根)·삼구(三垢)·삼화(三火)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삼독은 세 가지 즉 - 탐욕·진에(瞋 : 분노·노여움)·우치(愚癡) - 로서 흔히 '탐·진·치'라 한다.

​탐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집착,

​진은 탐의 이면에 있는 것으로 좋아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반감· 혐오· 불쾌 등의 감정을 말한다.

탐과 진이 감정적인 측면에서 발생한 번뇌라면 치는 지적인 번뇌라고 할 수 있다.



​치는 사제(四諦)나 연기(緣起) 등 불교에 대한 무지를 가리키는 것으로써, 무명(無明)과 관련이 있다.

​세상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는 세상의 참 모습을 바로 볼 수 없으며, 그것은 고통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원래 청정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보았는데, 이 삼독은 인간의 청정함을 해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삼독은 인간의 숱한 번뇌를 압축한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이 삼독에 갇혀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보았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탐, 진, 치를 극복해야 한다. 우선 탐욕심을 버려서 청정심을 기르고, 성낸 마음을 없애 밝은 마음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청정한 마음, 평화롭고 자비한 마음, 지혜롭고 밝은 마음이 우리의 본래의 마음임을 알고 삼독을 극복하여야 한다.



2) 삼학



삼학은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고자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이 반드시 가져야 하는 3가지 수행 방법을 말한다. 삼학을 삼승학(三勝學)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계학(戒學)·정학(定學)·혜학(慧學)의 세 가지가 그것이다. 이를 줄여서 계·정·혜라고도 한다. 계·정·혜는 수행의 순서를 정해놓은 것이기도 한데, 계는 의지, 정은 감정, 혜는 지식을 말하는 것으로 이 세 가지 수행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계, 정, 혜가 융합하여 이상적인 마음의 작용을 이루어서 완전한 인격이 형성된다.

계는 악을 행하지 않고 참선을 하는 계율(戒律)을 말하고, 정은 마음을 차분히 하여 정신을 맑게 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하는 선정(禪定), 혜는 번뇌를 없애고 진리를 얻어가는 지혜를 가리킨다.

삼학은 불교 수행의 방법을 제시한다. 점진적으로 얕은 분야에서 시작을 해서 깊은 분야로 순서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경험과 지식 또는 말로 행해지는 나쁜 행위를 방지하고 덕을 행하는 계학과, 선정을 수행하여 마음의 흔들림 없는 고요하고 평안한 경지에 이르게 하는 정학, 마음속 고통 없이 평온함에서 진리를 얻는 혜학이 그것이다. 계·정·혜로 불리는 삼학은 서로 보완적으로 불교의 수행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하며 진리를 얻는 과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독, 삼학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2007. 12. 15., 청서출판)



출처 시공 불교사전 | 삼독









번뇌



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갈등을 나타내는 불교 심리용어.



불교에서는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있다고 보아 이를 3가지 독(三毒)이라 한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인식기관인 눈·귀·코·혀·몸·뜻의 6가지 문을 통해 항상 흐르는 번뇌에 의해 마음은 산란되고 갈등을 느낀다고 한다. 따라서 불교 경전에서는 이 번뇌의 다른 표현으로 미혹함·잠듦·물듦·흐름·얽매임 등을 사용하고 있다. 이에는 모든 괴로움의 근본이 되는 탐욕·성냄·어리석음 등의 근본번뇌와 이에 따라 일어나는 게으름·불신·경망스러움·교만 등 20가지 정도의 수번뇌가 있으며, 결국 불교의 이상은 이러한 번뇌를 극복함으로써 평온한 열반의 경지에 다다른다고 보았다.



이러한 번뇌 종류가 수없이 많음을 팔만사천번뇌라 하며 6가지 감각을 중심으로 삼세에 걸친 3가지 선택지로서 계산한 108번뇌는 보다 철학적으로 정리된 번뇌로서 알려져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번뇌가 바로 깨달음이라 하여 번뇌의 성품이 비었음을 깨우치는 것이 번뇌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의 첩경임을 설명하며, 수많은 번뇌 가운데서 깨우치는 대승적 해결로서 초기 불교에서의 번뇌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와 이의 세세한 대치보다는 마음의 걸림 없음을 통해 보살행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네이버 지식백과] 번뇌 [煩惱] (두산백과)





삼독



불교에서 말하는 근본적인 세 가지 번뇌.

개설 탐욕(貪慾)·진에(瞋恚)·우치(愚癡)를 의미한다.

줄여서 탐·진·치라고도 하며, 이 세 가지 번뇌가 중생을 해롭게 하는 것이 마치 독약과 같다고 하여 삼독이라고 한다.



내용  탐욕은 탐애(貪愛)라고도 하며 자기가 원하는 것에 욕심을 내어 집착하는 것,자기의 뜻에 맞는 일에 집착하는 것, 정도를 넘어서서 욕심을 부리는 것, 명성과 이익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 등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5욕(五慾)이라고 하여 식욕(食慾)·색욕(色慾)·재욕(財慾)·명예욕·수면욕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구하는 것 자체가 탐욕이 아니라 그것이 정도를 지나칠 때 탐욕이라고 한다.

한편, 여자가 가지는 욕망으로는 색욕·형모욕(形貌慾: 얼굴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위의욕(威儀慾: 옷치장에 관한 욕망)·자태욕(姿態慾: 아름다운 몸매에 관한 욕망)·언어욕(言語慾: 아름다운 음성에 대한 욕망)·세활욕(細滑慾: 피부의 윤기에 대한 욕망) 등 6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진에는 분노하는 것으로서, 산목숨에 대하여 미워하고 성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진에 속에는 분노뿐만 아니라 시기와 질투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 진에는 수행을 하는 데 가장 큰 허물이 되는 것이며, 다스리기도 어려운 것으로 보고 있다.



우치는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할 수 없는 어두운 마음으로서,

이로 인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판단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우치 때문에 모든 번뇌가 일어나게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삼독은 모두 ‘나[我]’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나’ 스스로에 미혹한 것이 우치이고, 그 우치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맞으면 탐욕을 일으키고, ‘나’에게 맞지 않으면 진에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삼독은 중생을 생사의 윤회 속으로 빠뜨리는 근원이 되고, 중생의 고통을 만드는 원인으로 해석되고 있다. 따라서 삼독을 제거하면 곧 고(苦)를 떠나서 열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삼독을 없애기 위한 수행으로는

바른 견해(正見)·바른 생각(正思惟)·바른 말(正語)·바른 행동(正業)·바른 생활(正命)·바른 노력(正精進)·바른 인식(正念)·바른 정신(正定)의 팔정도(八正道: 여덟 가지의 올바른 수행법)와 계(戒)·정(定)·혜(慧)의 삼학(三學)을 들고 있다.

즉, 계로써 탐욕을 다스리고, 정으로써 진에를 다스리며, 혜로써 어리석음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독 [三毒]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실용 한-영 불교용어사전 탐진치 貪瞋痴,

실용 한-영 불교용어사전



탐진치
[貪瞋痴, Tamjinchi]



  • 사람의 착한 마음에 해독 (害毒)을 끼치는 세 가지 번뇌 (煩惱)인 욕심,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 그런데 이때 꼭 알아야 할 것은, 욕심이란 온갖 고통과 불행의 근본 원인이며, 특히 어리석음이란, 단순한 무지 (無知)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 부처님께서 6년의 고행 끝에 보리수 아래에서 깨치신 연기법에 대한 무지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에 이 두 가지 불교의 핵심 교리를 모른다면, 모두가 겉치레이며 허사가 될 수 있다
    The three poisonous elements: Craving or greed, anger or hatred, and ignorance or illusion. However, we must understand that greed is the fundamental cause of all suffering, and that ignorance is not just lack of knowledge but the ignorance of the law of causality which Sakyamuni Buddha realized under the bodhi tree after six years of ascetic practice and meditation

'heed': Naver English-Korean Dictionary

'heed': Naver English-Korean Dictionary

Verb
1.
타동사 격식 [VN] (남의 충고경고에) 주의를 기울이다
Synonym take notice of

Idiom 1 
give/pay |heed (to somebody/something) 


(~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다
Source : Oxford Advanced Learner's English-Korean Dictionary


1.

VERB FORMAL If you heed someone's advice or warning, you pay attention to it and do what they suggest.
2.

PHRASE FORMAL 
If you take heed of what someone says or 
if you pay heed to them, 
you pay attention to them and consider carefully what they say..
.Collins Cobuild Advanced Learner's English Dictionary
give/pay heed (to somebody/something) ( take heed (of somebody/something) ) 

pay careful attention to somebody/somethingOxford Idioms Dictionary for Learners of English
pay heed 


[Verb] To heed; to give attention.Wiktionary 

Meaning 36
따르다 1 
1.

(유행·의견·규칙 등을) follow; (충고 등을) act (up)on, (formal) heed; (규칙 등을) obey, comply (with), abide by, conform to[with]
2.

(뒤를) follow, go after, tag along (with)
3.

(좋아하여) like, love, be fond of, be attached toET-house Neungyule Korean-English Dictionary
충고를 따르다 


follow[take, heed, act on] sb's advice[suggestion]ET-house Neungyule Korean-English Dictionary

듣다 1 
1.

(말·충고 등을) listen (to), follow, obey, take (one's advice), (Am) mind, (formal) heed
2.

(소리를) hear, listen (to)
3.

(소식·소문 등을) hear (of), (formal) learnET-house Neungyule Korean-English DictionaryView more meanings

Examples 3,402

Take heed of enemies reconciled, and of meat twice boiled. 발음듣기 

화해한 적과 두 번 삶은 고기를 조심하라.
(스페인속담, 원수속담)

명언/속담
The accident happened since nobody paid heed to the warning signs. 발음듣기 


그 사고는 아무도 경고 표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일어났다.절대어휘 5100
It's fine to celebrate success but it is more important to heed the lessons of failure. (Bill Gates) 발음듣기 


성공을 자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패를 통해 배운 교훈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빌 게이츠, 실패명언)

명언/속담View more examples

VLIVE Fansubs 2


평소 아스트로는 매니저의 말을 잘 듣는 편입니까?


Does Astro heed what your manager says? 듣기
View video

ASTRO : [ASTRO PROJECT] 아스트로 프로젝트 : 아.시.아 2회


평소 아스트로는 매니저분들의 말을 잘 듣는 편입니까?


Does Astro heed what your manager says? 듣기
View video

ASTRO : [ASTRO PROJECT] 아스트로 프로젝트 : 아.시.아 2회

Thesaurus

Noun


고려, 배려; 염려; 걱정
Synonym 
thought care mind attention regard respect noticeCollins Gem Thesaurus

Noun


if he heard, he paid no heed.
Synonym 
attention notice note regard heedfulness attentiveness consideration thought careOxford Thesaurus
View more Collins Gem Thesaurus View more Oxford Thesaurus of English

영신수련과 하느님 체험 - 만레사 체험

† 함께하는 삶의 여정






영신수련과 하느님 체험 | 영성수련자료


베네딕도 Choi HJ 2011. 2. 6. 21:46

http://blog.daum.net/corea3050/16904713



~ 영신수련과 하느님 체험
정제천(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 예수회 신부)









1. 영신수련의 기원



영신수련을 교회에 남긴 이냐시오 성인은 중세의 분위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1491년에 스페인에서 태어나 기사로 성공하기를 꿈꾸던 사람이다. 그런데 프랑스 군대와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집에 와서 병상생활을 하던 가운데 회심의 계기를 갖게 되었다. 그는 예수전과 성인열전을 읽으면서 자신의 과거가 얼마나 죄스러운지를 깨닫고 보속을 해야 한다고 느꼈으며, 성인들처럼 고행과 극기의 생활을 하고 싶어하였다.

어느 정도 걸을 수 있게 되자 그는 예수님께서 사시던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떠났다. 배를 타러 가다가 만레사라는 마을에 이르러 그동안 겪은 수많은 ‘영적인 움직임’을 정리해 둘 요량으로 잠시 머물기로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일 년 가까이 머물게 되었다. 만레사의 동굴에서는 심한 고행과 극기의 생활을 하였는데 자신의 죄스러움을 깊이 깨달았을 때에는 더 이상 인생을 지탱할 수가 없어 자살을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일생을 두고 배운 것을 합친 것보다 더 뛰어난 ‘영적인 비추임’을 받았다.

그는 영적인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겪은 모든 일을 회상하고 성찰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적어두었는데, 이것이 영신수련의 기원을 이룬다. 그리고 자신의 체험에 신학 공부를 하면서 얻게 된 새로운 지식을 덧붙여서 영신수련을 완성해 갔다. 영신수련이 완성되는 데에는 2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을 만레사에서 쓰기 시작하여 그 뒤에도 계속해서 적어 넣고 고쳤으며 로마에서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2. 영신수련의 구조

영신수련은 만레사 체험의 결론인 ‘두 개의 깃발’과 ‘그리스도의 나라’ 묵상이 핵심을 이루고, 이를 출발점으로 하여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생애를 관상하는 것이 근본 구조이다.



1) 제1주간(죄의 성찰)

영신수련은 인간이 창조된 사실부터 시작한다. “사람이 창조된 것은 우리 주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께 경배하고 봉사하며 또 이로써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함이다”(「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윤양석 옮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2년, 23항). 이 명제는 영신수련의 출발점이자 진행 원리가 된다. 세상만물을 바라보는 눈도 여기에서 나온다. 곧 인간관계를 포함하는 세상만물은 인간의 창조 목적인 하느님 찬미와 경배와 봉사를 위해 도움이 되도록 사용되어야 한다. 오직 이 목적에 맞는지가 취사선택의 기준이 된다.

피정하는 사람은 제1주간에 앞서 제시된 일반 성찰과 특별 성찰의 양식에 따라 성찰에 익숙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죄의 성찰은 고해성사를 위한 성찰과 달리 개별적인 죄행의 성찰이나 인간의 죄스러움에 대한 심리학적 통찰에 그쳐서는 안 되고 죄의 연대성에 대한 통찰과 내 죄의 역사적, 신학적 뿌리를 인식하는 데에 도달해야 한다. 무죄한 사랑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세상의 죄에 나도 일조해 왔다는 통찰과 이에 대한 뉘우침이 제1주간에 기대되는 열매이다.



2) 제2주간(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관상함)

제2주간은 영신수련의 핵심 체험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의 나라’ 기도로 시작된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왕들처럼 우리를 부르신다. 자신과 세상의 죄에 혐오감을 느끼게 된 피정자는 이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접하고 여기에 응답하게 된다. 이로써 구원사업의 협력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창조의 목적에 따라 회복하고자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회복을 위해 취하신 방법은 힘과 권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모욕과 업신여김과 가난을 참아 받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가난하고 겸손한 그리스도 왕을 따라 가난과 모욕과 업신여김을 참아 받는 길을 가야 한다. 피정자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소집에 응답하려는 능동적인 열망을 외적으로 보여야 한다. 예수님의 생애를 관상하려는 이는 예수님의 생애를 관람하는 관객이 아니다. 그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 생활양식에 민감한 이해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능동적 자세가 예수님 생애에 대한 관상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이다.

이어서 예수님의 강생과 탄생 관상으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생애 관상이 계속된다. 이와 병행하여 제2주간에는 이냐시오식의 고유한 기도가 제시된다. 두 개의 깃발,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 세 단계의 겸손이 그것이다. ‘두 개의 깃발’ 기도에서 이 세상은 그리스도와 사탄의 나라 사이에 일대 결전을 벌이는 싸움터로 묘사된다. 중요한 것은 두 진영의 전술이다. 사탄의 전술은 부와 명예를 추구하게 하여 교만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예수님의 전술은 가난과 업신여김을 사랑하게 하여 겸손으로 이끄는 것이다. 두 개의 깃발 묵상이 그리스도와 그 진영에 대한 지성적인 동의를 요구한다면,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 묵상은 예수님에 대한 정서적인 지지와 추종을 다짐하는 것이다. 이 내적인 움직임이 반복되면서 종합을 이루는 것이 ‘세 단계의 겸손’이다.



3) 제3주간(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수난)

여기서 피정자는 최후의 만찬에서 시작하여 게쎄마니 동산의 기도, 체포, 재판, 군중들의 배척과 십자가의 길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관상한다. 피정자는 수난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아파하면서 그분의 수난 여정에 동참하게 된다. 그 여정에 온전히 동참하고자 제3주간에는 “고통과 슬픔, 당황스러움”(「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193항)을 기도의 선물로 청한다.



4) 제4주간(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삶)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시면서 고통 중에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영광 중에도 당신을 따르게 하겠다(「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95항 참조)는 약속을 하셨는데, 그분의 부활은 이 약속이 정녕 실현될 것임을 희망으로 맛보게 하는 사건이다. 영신수련을 마치는 이 단계에서는 위로부터 오는 기쁨을 마음껏 누리도록 초대받는다. 이 주간에는 성모님께 발현하신 장면에서 시작하여 복음서에 나오는 부활 장면을 관상하게 된다.

부활 관상에 이어서 피정자는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230-237항)으로 전체를 마무리한다. 우주적 그리스도상이 제시되는 이 관상은 영신수련의 구도에서 볼 때 성령 강림에 해당한다. 성령 강림을 체험한 사도들은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경험한 사실들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 이후에 교회는 자발적으로 복음 선포에 나섰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은 ‘지금까지 받은 그 많은 것들에 대한 내적 인식’을 구하며 영신수련 전체 과정을 총정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피정자는 세상에 파견되어 그리스도를 증언할 임무를 받는다.


3. 영신수련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주제들



1) 이냐시오식 관상

관상(觀想: contemplation)은 글자 그대로 “보면서 생각하는” 기도이다. 산 위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경치를 관조하거나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듯이, 복음서의 장면이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상상하면서 사건과 메시지의 구원사적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복음서를 가지고 기도하는 방법인데, 원칙적으로 일정한 시공간에서 이루어진 사건을 묘사하는 장면일 때에 가능하다. 장소와 시간, 등장인물을 상상의 눈으로 재구성하여 그들이 2000년 전에 행한 것을 지금 여기 기도 속에서 재현하는 것이다.

이 기도의 장점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생생한 현장감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전인적 존재이기 때문에 기억과 상상력, 감수성이 망라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기도 체험은 다른 기도에서 느낄 수 없는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이 체험을 가지려면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있어야 하며 침잠을 방해하는 어떤 사건이나 기억으로 혼란 상태에 빠져있어서는 안 된다. 상상력을 통한 복음 속의 예수님과의 만남이 ‘내가 멋대로 지어 만든 허상’이 되지 않으려면 복음서의 내용을 존중해야 하고 특히 지도자와 면담을 통해 확인받을 필요가 있다.

이냐시오식 관상에서 기대되는 핵심 체험은 시각적인 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복음서를 통하여 전해지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듣는 데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장소 구성과 생동적인 장면 전개가 어느 정도 되느냐는 사람들의 재능, 기질, 성향에 따라서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은 이냐시오식 관상에 더 적합하다든지 또는 적합하지 않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이냐시오식 관상의 본질을 시각적인 것에서 찾는 데서 오는 오류라고 할 수 있다. 관상의 본질인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듣는’ 데에는 열망에 따른 개인차는 있을지언정 능력에 따른 개인차는 없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예수님을 만나려는 열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영신수련의 방법에 따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해야 옳다. 이냐시오식 관상에서 장소 구성과 그에 따르는 시각적 체험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복음서 내용을 현재화하는 의미 있는 수단이라고 보아야 한다.



2) 부칙들(「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73-90. 127-131. 206. 226-229항)

인간은 감각적, 정감적, 영적 차원을 고루 갖고 있는 다차원적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 조건상 기도를 좀 더 잘 하려면 기도의 준비, 자세와 횟수, 기도를 위한 분위기 조성, 고행의 정도 등을 세심하게 배려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이냐시오는 각 주간에 맞는 요령들을 제시하고 있다.



3) 영들의 식별 규칙(「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313-336항)

이냐시오는 영적 회심 체험 이후 자신의 내면에 일어난 일들을 회상하고 성찰하면서 어떤 규칙들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이것을 알면 영성생활을 진보시키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고 이를 적기 시작하였다. 영들의 식별에서 기본이 되는 개념은 영적인 위안과 실망이다. 하느님을 향해 진보하려는 영혼에게 성령께서는 영적인 위안을 주셔서 그 길에 매진할 수 있게 하며, 악한 영은 그와 반대로 걸림돌을 놓고 실망감을 불러일으켜서 길을 바꾸게 한다는 것이다. 영들의 식별 규칙은 이냐시오의 순수 창작물이 아니고, 자신의 체험에 교회의 전통을 종합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4) 기부금(자선금)의 처리(「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337-344항)

영신수련 피정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공적인 임무를 맡아 재산을 관리하거나 기부금(자선금)을 분배하는 일을 담당하는 경우가 있다. 이 규칙들은 이들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이 규칙들은 오늘날 사제들의 생활 개선에도 의미 있는 시사점이 되어준다. 기부금은 사심 없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공정하게 분배하도록 한다.



5) 세심증에 관한 규칙(「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345-351항)

영성생활을 시작하는 사람은 세심증을 당할 수가 있다. 이냐시오 역시 만레사 생활 도중에 세심증으로 마음고생을 했다. 세심증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며 극복되어야 하지만 ‘아무 잘못이 없는 데서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량한 영혼의 표지이다.’는 그레고리오 성인의 말처럼 더욱 정화된 영혼을 갖게 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심증으로 하느님께 드려야 할 영광과 봉사에 소홀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6) 교회와 함께하는 정신(「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352-370항)

영신수련 피정을 마치는 사람은 자신의 내적 체험을 과신하는 나머지 교회의 가르침과 맞서는 오만에 빠져서는 안 된다. 영신수련을 하는 동안에 각 개인을 이끌어준 성령과 교회 지도자들을 통해서 교회를 인도하고 통치하는 성령은 같은 분이시기 때문에 이 둘은 모순되지 않는다. 만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개인적인 신념보다 교회의 가르침을 우선해서 따라야 한다고 이냐시오는 가르치고 있다.



7) 영신수련 지도자와의 관계

이냐시오는 자신의 만레사 체험을 구술하면서 선생이 학생을 가르치듯이 하느님께서 자신을 다루셨다고 고백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신수련의 진정한 지도자는 하느님이시다. 영신수련에 동반하는 지도자는 하느님과 그의 피조물의 직접적인 만남을 돕는 중개인일 뿐이다. 지도자는 피정자의 체험을 이해하여 그를 돕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영신수련의 지도자는 고해 사제와 다르기 때문에 피정자의 개인적 생각이나 죄에 대하여 묻거나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영신수련은 피정자가 지도자와의 관계에서 차츰 많은 자율성을 얻어가는 과정이다.



4. 영신수련의 특징들



1) 성서적이다

영신수련의 전체 4주간은 구약성서에서 시작하여 신약의 복음서 전체를 망라하고 있다. 제1주간은 구약에서 보이는 천사와 원조의 죄, 본죄들을 묵상하도록 초대한다. 제2주간은 예수님의 강생, 탄생에 이어서 전체 지상 생애를 복음서에 따라서 관상하는 것이며, 제3주간은 예수님의 수난을, 제4주간은 예수님의 부활을 관상하도록 되어있다. 영신수련은 그리스도교의 모든 신앙 체험의 원천인 성서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성서의 원체험을 각자가 고유한 상황에 맞게 내면화시키도록 돕는 유효한 수단이다.



2)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영신수련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고자 하는 역동적인 정리 과정이다. 제1주간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분으로 제시된다. 제2주간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으로 시작되며 그리스도의 진영에 속하고자 하는 결심과 선택을 바탕으로 하여 진행된다. 제3주간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관상하면서 그분의 아픔에 동참하려는 의지를 보이며, 제4주간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함께 나누는 기쁨의 시간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영신수련은 그리스도 제자 됨의 과정이다.



3) 삼위일체적이다

영신수련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와 하나가 되는 삼위일체 구도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피정자는 기도 때마다 필요한 은혜를 청하게 되는데, 이 은혜는 다름 아닌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에 결국 피정 기간에 성령께 기도의 은혜를 청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을 떠나서는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위에서 말한 대로 매 기도에서 ‘청하는 은혜들’ 외에도 영들의 식별, 제2주간의 선택에서 확인을 구하는 일, 삼중담화에서 구하는 은총은 모두 성령의 인도 및 열매와 관련을 갖고 있으며, 특히 마지막 관상인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은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 성령 강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4) 정감의 훈련

많은 이들이 이냐시오식 기도는 지성적이고 의지적인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냐시오가 강조하는 기도의 틀은 마치 수영을 배울 때 익혀야 하는 기본기와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상상력을 활용하는 장소 구성은 앞서 보았듯이 복음서를 여러 차례 읽어서 내 것이 되어갈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장소를 택하는 것이 좋다. 이를 위해서 처음에는 의지와 지성을 활용하여야 하지만, 반복에 따른 효과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반복은 이냐시오식 관상의 성공 여부를 가리는 중요한 안전장치이다. 반복을 통하여 관상 기도는 마음의 기도가 된다.
영신수련의 성격과 관련하여 중요한 또 하나의 요점은 기도의 목표이다. 기도는 머리의 훈련이 아니라 마음의 훈련이다. 기도를 달리기 경주처럼 생각하여 꼭 도달하여야 할 어떤 목표가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기도는 나와 하느님의 만남으로 목표가 달성된다.



5) 봉사의 신비가

영신수련 피정은 사도적인 사람을 지향한다. 피정자는 제1주간부터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다. 제2주간에 들어서 세상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소집에 응답하고 제2주간부터 제4주간에 걸쳐 예수님의 생애와 수난, 죽음에 대한 관상을 통하여 남을 위한 사람인 그리스도의 생활양식을 배운다. 영신수련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 안에서 정리한 영혼이 가난하고 미소한 이들을 위한 봉사자로 태어나도록 돕는 과정이다.



6) 영성생활의 종합적 수련소

영신수련은 기도 방법들의 가르침 외에도 영들의 식별 규칙, 세심증, 기부금 배분의 원칙 등 영성생활의 기본 원리에 해당하는 것을 망라하고 있다. 영신수련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회개와 용서의 체험이며, 새로운 삶의 기획이 내포된 종합적 프로그램이다.



5. 영신수련의 실행 현황



한국에서는 1980년대 이후 수녀회에서부터 영신수련 피정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서강대학교 안에 있는 이냐시오 영성 연구소에서 영신수련 지도자를 양성하는 과정이 있고, 수원 ‘말씀의 집’에서 정기적인 피정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참가자들에게 영신수련 피정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각 예수회원들이 수녀원, 신학교의 요청에 따라서 현지에 가서 봉사하고 있으며, 몇몇 수도회와 교구에서는 자체 지도요원을 양성하여 피정을 하고 있다. 연례 피정으로 영신수련을 하는 경우에는 8일 피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여러 교구에서는 사제 서품 전에 한 달 동안 영신수련 피정을 하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있고, 수도회에서도 종신서원 전에 한 달 피정을 하는 곳이 많다.


6. 맺음말

영신수련 체험은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게 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중요한 전기가 되어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신앙과 생활을 통합하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오늘날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여러 유사 종교 운동들이 있지만, 그러한 운동들이 사람들을 인간의 진정한 고향인 하느님께로 이끌지 못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우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직 하나의 북극성이 있을 뿐이다. 영적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현대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올바로 이끄는 것은 오직 성서 속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영신수련은 감수성과 체험을 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끝으로 영신수련에 수반되는 문제점 또는 극복되어야 할 과제가 있다면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 이를 지적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영신수련의 첫 번째 약점은 대중화가 쉽지 않아 본의 아니게 영적 엘리트주의를 추구한다는 누명을 쓰게 되는 점이다.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들로서는 한 달은 고사하고 단 며칠이라도 피정에 참석하는 일이 쉽지 않다. 그래서 이냐시오는 영신수련 일러두기에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일상생활을 하면서 하루에 한 시간씩 기도 시간을 내서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도록 배려하고 있다.

영신수련의 두 번째 약점은 영신수련의 언어와 신학이 16세기의 것이라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나라’와 ‘두 개의 깃발’ 개념은 다분히 중세적인 배경을 연상시킨다. 또 제1주간의 죄의 묵상과 관련하여서는 그동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도 꾸준히 발전되어온 신학의 업적을 활용하는 것이 좋겠지만, 모두가 공감할 만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같은 틀을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현대 예수회원들이 풀어가야 할 과제라고 하겠다.



<부록>



이냐시오식 관상기도의 순서와 요령



1. 기도의 먼 준비: “마음을 드높이!” 하는 자세로 일상생활을 지낸다. 분노, 증오심, 질투와 같은 격렬한 감정을 피하고 텔레비전을 멀리함으로써 시각을 절제하는 생활을 한다.



2. 기도의 가까운 준비: 해당 복음서를 렉시오 디비나의 방법으로 천천히 세 번 정도 읽는다. 이를 통해서 성서의 내용과 장면을 숙지하게 된다. 이때 마음에 와 닿거나 깊이 묵상하고 싶은 요점들을 세 개 정도 선정한다.



3. 기도의 실행: 기도는 들어가는 부분과 본 부분, 마무리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1) 들어가는 부분(5분 정도)
· 기도하는 자리에 서서 잠시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앉는다.
· 기도하려는 내용을 떠올린다. 예) 마르코 복음 4장 35-41절을 기도한다면,

“배 안에서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풍랑이 일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고…….”

(이때 복음서를 읽으면서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으면 기억한다.)
· 기도에서 구하는 은총을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로 청한다.



2) 본 부분(50분 정도)
· 사건이 일어나는 장면과 등장인물을 머리에 그려본다.

명확하지 않아도 되고 장면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 성서 읽기를 통해서 익숙해진 줄거리에 따라 기도를 진행한다.

요점을 따라서 기도하면 헤매지 않아서 좋다.
· 기도를 하다가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있으면 더 나아가려는 부담을 갖지 말고 충분히 머문다.



3) 마무리(5분 정도)
· 기도를 마치면서 주님의 기도, 성모송 등 익숙한 기도를 바친다.


4. 기도의 성찰



· 기도에서 무엇을 체험했는지를 돌아보면서 떠오르는 것을 노트에 적어둔다. “어떻게 시작했는가? 어떤 확신이나 강렬한 느낌이 있었는가? 하느님의 사랑을 느꼈는가? 평화로움을 느꼈는가? 창조적인 느낌이었는가? 거룩한 느낌이었는가? 기도를 잘하게 만든 태도나 잘못하게 만든 태도가 있었는가?” 등을 돌아보는 것이다. 이로써 반복 기도 때에 집중할 요점을 찾아내고 다음 기도에서 개선할 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 Spiritual Exercises는 그대로 해석하면, 영적인 훈련, 영적 수련이란 뜻이다. 이 글에서는 이냐시오의 영적 수련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윤양석이 번역한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이후 계속해서 사용해 온 영신수련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다. 이 명칭은 서구어의 spirit이 가리키는 ‘영과 정신’을 포괄하여 만든 ‘영신’이란 말로써 수련의 주체를 드러내는 장점이 있다. 최근 번역어로 사용되는 ‘영성 수련’은 묵상, 기도 등 영적인 수련들을 통칭하는 용어로 쓰기로 하고 이냐시오의 한 달 피정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는 종전대로 ‘영신수련’이라고 부르기로 제안한다. - 필자 주.

2020/06/29

希修 The essence of the Buddhist practice is in heedfulness


希修 updated her profile picture.
27 June at 03:42 · 
.
The essence of the Buddhist practice is in heedfulness 
- about unskillfulness/defilements/貪瞋痴 in the thoughts, words or actions of oneself and others. 
1. 
heedfulness - the trait of staying aware of (paying close attention to) your responsibilities
mindfulness. 
attentiveness - the trait of being observant and paying attention. 
inadvertency, unmindfulness, inadvertence, heedlessness - the trait of forgetting or ignoring your responsibilities.


It is NOT in love/mercy, let-go, no thinking, being positive, being content in here and now, returning to the 'innate goodness', becoming like a child again, worshipping the Buddha or anything. The so-called 'positive thinking' is sometimes a mere 'wishful thinking' justifying and indulging in fantasies or cravings. What's important is 'constructive thinking', I rather suppose.
When heedfulness, alertness and ardency are combined and balanced, we call it 'mindfulness'.
.



33

希修




希修




希修 | My Recommendation on Studying Buddhism

 希修 | Facebook

< My Recommendation on Studying Buddhism >
(1) 10 introductory lectures by Ven. Bodhi.
---

---





---


---


---

---


+6
---


1010

7 comments

1 share

希修

Talk from around 30:00. Topics range from whether/how/whom to help, what to look for in a teacher, how to calm and protect yourself when scared, etc..
https://www.youtube.com/watch?v=WDpAbeJR1gw&t=1883s



YOUTUBE.COM

Happiness is a Choice & a Skill by Phra Ajaan Thanissaro (6 Dec 2019 )
170720 Choices at Death \ \ Thanissaro Bhikkhu \ \ Dhamma Talk



希修

https://youtu.be/gFWocG3kM4E


YOUTUBE.COM

130825 Solid in the Face of Death \ \ Thanissaro Bhikkhu \ \ Dhamma Talks
130825 Solid in the Face of Death \ \ Thanissaro Bhikkhu \ \ Dhamma Talks


希修

https://youtu.be/eVNWerD2z4U


YOUTUBE.COM

200409 Strength of Conviction \ \ Thanissaro Bhikkhu \ \ Dhamma Talk

希修 2006 "The Bureaucracy of the Defilements" 번뇌 - 내 자신에겐 안 보이는 나의 진짜 속마음



(1) 希修 | Facebook



Album Teachings of Venerable Thanissaro

希修 27 June  #193. [Source] "The Bureaucracy of the Defilements"

[Extract] "Years back there was a teacher in another Buddhist tradition who liked to talk a lot about the bureaucracy of the ego and how we had to throw off the shackles and tyranny of that bureaucracy. By that, he meant your ideas of right and wrong, of what you should and shouldn’t do. 

His way of overcoming the tyranny of that bureaucracy was to deliberately do a lot of the things your mind said you shouldn’t do. As you can imagine, he ended up doing a lot of harm to himself and to many other people, breaking the precepts and getting them to break the precepts as well.

The thing is that that’s not the bureaucracy that you have to be afraid of, and that’s not the tyranny you have to overthrow. You have another bureaucracy: the bureaucracy of your defilements—things like greed, aversion, and delusion, which cloud the mind and get in the way of genuine discernment.

Kleshas (Buddhism) - Wikipediaen.wikipedia.org › wiki › Kleshas_(Buddhism)
The emotional obscurations (in contrast to intellectual obscurations), usually translated as "poisons" or "defilements." The three main klesas are ignorance, hatred, and desire. The five klesas include these three along with pride and envy.
  Vietnamese‎: ‎phiền não
  Pali‎: ‎किलेस (kilesa)
  Korean‎: ‎번뇌; (‎RR‎: Beonnoi)


Our mind is very complex. It’s like a large organization, making all kinds of decisions all the time, and we have a tendency to delegate a lot of our decisions to our old habits. There are a lot of little bureaus in there that we haven’t looked into for a long time. We gave them a job and they protect their jobs.
If you’ve ever studied the theory of bureaucracy, you know that each bureaucrat’s main job is to protect his or her job. That is why bureaucrats don’t like reform and don’t like to have their work looked into. It’s the same with your defilement bureaucrats: Their main desire is to hold onto their positions. But if you give them their way, you’re the one who’s going to suffer. They’re not going to suffer. They’re creating your kamma and it’s all going to affect you. It’s because you, as the boss, delegated things and you tend to get distracted— you’re not even there in the head office all of the time—that you end up suffering from the decisions that these lower-level bureaucrats have made.
So, one of the main purposes of the meditation is to shine a light down into this bureaucracy, all of these lower-level functionaries inside your mind, the ones that allow greed, aversion, and delusion to have sway over the choices you’re making, that you’re barely aware that you’re making. ... ...

The first thing you’ve got to do is to learn how to simplify your life in as many ways as possible, because one of the excuses for having a large bureaucracy where there are lots of dark corridors and hidden offices is because there’s just so much work to be done that you’ve got to delegate things and need a lot of people to do it. ... ... 

But when you simplify your life, ... ... You start out, of course, with the in-and-out breath. But then you begin to realize that there are other subtle movements of energy in the different parts of the body and you begin to open up areas of awareness and areas of the body that used to get closed off because you were interested in something else. But now you’re here. You can settle in and spread out to fill the body. You begin to see the movements of the mind a lot more clearly and a lot more quickly. A thought forms and you can see it in the beginning stages. ... ... 

There’s a little bit of stirring here or there in the mind and it’s right at the boundary between the mind and the breath. Then a perception comes along and stamps a meaning on it, saying that “This is a thought about x.” You realize you can go with that perception or not. If you’re clear about what’s happening, if you’re watching the functionaries, then you can decide, “Do I really want to go with that?” And your decision is an informed one.

And it can be an effective one, too. Once you’ve become conscious of your choice and you’ve made up your mind that you don’t want to go, it’s a lot easier to say, “Nope, nope, nope, nope,” down the line. That clears out a lot because you see that, with some of the defilements creating suffering, all you have to do is be aware of them and they wither away. Once you shine the light of your investigative reporting on them and you can see clearly that what they’re doing is unnecessary and is causing a lot of suffering, they vanish.

Your other functionaries, though, know that no matter how much you shine a light on them, they have their ways of staying on ... ... 'Okay, what is it that’s keeping this particular defilement from going away? Why does it keep coming back again and again and again? What’s the appeal?'

... ... First, notice when things come. Second, notice when they go. Third, notice, when they’re coming, what’s their appeal? Why does the mind go for these things? What felt need does it satisfy? And do you really feel that need anymore? ... ... A lot of the times you assign a job to a certain functionary and then you forget about it entirely. These old habits: Some of them go back to your childhood, old ways of thinking, old ways of seeing the world, understanding how you can get pleasure out of something ... ... 'Okay, what’s the price of this pleasure?' ... ... This is where you begin to see the drawbacks of the pleasures advanced by the defilements, which is the fourth step ... ... And then the fifth step is seeing the escape. ... ... Part of the answer lies in seeing the drawbacks, and part lies in realizing that you have the choice—and that there is a better choice. You don’t have to go with greed, aversion, and delusion anymore. ... ...
As long as everything is transparent—you’ve got wisdom in charge, you’ve got discernment in charge—you find that this bureaucracy, instead of continually churning out problems and churning out suffering, can actually become harmless. Blameless. Useful.

So it’s the bureaucracy of your defilements, not the bureaucracy of the ego, that you have to watch out for. The problem lies, not in having a sense of right and wrong, but in having the wrong sense of right and wrong, one that’s been skewed by the defilements. That’s what you have to straighten out. Above all, as long as your life is very complex and your mind is taking on lots of tasks, it’s going to be hard to deal with these things, hard to see these things. You want to simplify as much as possible and get your awareness to settle down. Instead of focusing outside all the time, get it to fully inhabit your body. That way, all the little back corridors and basements in this bureaucracy you’ve got here become opened to your conscious awareness. All of the kamma that you’ve been creating in a semiconscious way becomes a lot more conscious—and your ability to bring consciousness and discernment to these things is what’s going to make all the difference."

[希修] "남들에겐 훤히 보이지만 정작 내 자신에겐 안 보이는 나의 진짜 속마음" https://www.facebook.com/keepsurfinglife/posts/1048109315561151
* right view, wrong view, ego, mind, defilements, bureaucracy, politics, delegate.





------------------
希修
6 March  · Shared with Public
< 남들에겐 훤히 보이지만 정작 내 자신에겐 안 보이는 나의 진짜 속마음 >
.
제주 4.3을 다룬 영화 "지슬"에서 두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다.
.
하나는, '빨갱이' 소탕을 위해 제주로 내려온 한 군인이, 빨갱이에게 희생된 자신의 가족사와 그 恨을 얘기하는 장면. 저 사람으로서는 저럴 수도 있겠구나, 싶어 가슴 아팠다.
.
또 하나는, 토굴에 피신해 있던 마을 사람들이 젊은이 둘을 보초로 세웠는데, 한 명이 군인에게 걸려 그 군인을 토굴로 인도하다가, 다른 보초가 이 장면을 보고 너 지금 뭐하는 짓이냐는 식으로 따지자, 이 아저씨는 착한 군인 아저씨라서 우리를 해치지 않을 거다, 라고 얘기하던 장면. 더없이 어수룩한 청년이었지만, 아마도 그 행동은 철저한 계산에 의한 것이었을 듯. 토굴로 안내하라는 이 군인의 요구를 거절하면 내가 살아 남을 확률은 0%이고 마을 사람들은 끝까지 살아 남을 수 있을지 어떨지 미지수이지만(a), 이 군인의 요구대로 그를 토굴로 인도하면 마을 사람들이 살아 남을 확률은 0%여도 혹시 이 군인이 나는 살려 줄 가능성도 2%쯤 될지 모른다, 라는(b). 마을 사람들로부터 '살짝 모자란 아이' 취급을 받을 정도로 순박한 그 청년조차, 저런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을지, 그 '합리적'인 계산을 순식간에 해 낸 것이었겠지 - 이런 해석이 감독의 의도였는지 아니면 그저 내가 좀 '삐딱'하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 청년이 (a)를 선택했다면 사후 다른 이들로부터 칭송 받았겠으나, (b)를 선택했다 해서 그 누구도 저 청년을 비난할 수는 없는 일. 또 사실, 이 군인 아저씨는 착한 아저씨라서 우리를 해치지 않을 거라던 그 청년의 말도 의식적인 거짓말은 아니었을 거라고 난 생각한다. 다만, '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인간'으로 자신을 인식하기가 너무 괴로우니, 의식의 표면 아래에서 스스로에게 저런 거짓말을 한 후, 의식의 수면에선 그 내용을 '정직하게' 믿었을 뿐. 어떤 면에서 그의 의식은, 자기 자신의 속마음에게 속은 '억울한 피해자'일 뿐.
.
리가 마주치는 상황들이 저렇게 극적이지 않기에 인지조차 못 하고 넘겨서 그렇지, 저런 식의 '스스로도 속아 버린 거짓말'을 대부분의 인간들이 늘상 자신에게 또 타인에게 하면서 살아 간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적 장애인의 노동력을 수십 년간 착취하고 발목에 족쇄까지 채워 글자 그대로 소처럼 취급했으면서도 자신은 그를 불쌍히 여겨 "거두고 돌봐 주었"을 뿐이라 말하는 '순박한 농부' (스님이었나?)같은 실화들을 우린 종종 접한다. 광주에서의 무력진압이 "빨갱이들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전두환의 주장이나, 4대강 사업이 환경과 경제 모두에서 국가에 큰 도움이 될 획기적인 프로젝트였다는 MB의 주장이나, 이 군인 아저씨는 우리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우기던 저 청년의 주장이나, 어쩌면 모두 동일한 자기기만, 남들에게는 그 속이 뻔히 보이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안 보이는 그런 자기기만일 수도.  
.
인간의 의식은, 지하로 계속 뻗어 내려가는 건물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층에는 모든 인간이 타고 나는 온갖 욕구/욕망들이 있고, 어떤 층에는 내가 속한 가정이나 사회로부터 주입 받은 가치관과 규범들이 있고, 다른 층에는 내가 살아 오면서 겪은 경험들로 인한 기억 및 교훈들이 있고, 또 다른 층에는 나라는 개인이 애초부터 타고 난 고유성같은 것들이 있고. 어떤 층에선 매우 이타적인데, 동시에 다른 층에선 매우 이기적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의 의식은 지하 10층에서 그치는 데에 비해, 어떤 사람의 의식은 지하 500층까지 내려가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의식에 대해 지하 3층까지밖에 파악을 못 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지하 100층까지 샅샅이 꿰뚫고 있기도 하고.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언행은, 지층에 내거는 슬로건에 불과할 터.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이 내거는 온갖 공약들 같은. 그런 공약들이 그 정치인의 진심이었는지 아닌지는, 추후 그 정치인의 행동!을 통해 추측할 수 있을 뿐. 하지만 어떤 사람에 대한 나의 해석/평가/추측 역시 복잡하고 왜곡된 내 자신의 의식을 거쳐서 나오는 주관인지라 정확하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상대가 전두환이든 이명박이든 "지슬"의 저 청년이든, 그가 하는 얘기가 내게는 아무리 '말도 안 되게' 들린다 해도 "그렇군요, 최소한 당신 의식의 표면/지층에선 그렇게 생각했군요"라고 선선히 인정해 주는 것이, 타인에 대한 존중이고 인간으로서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한계에 대한 겸허함이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 그의 주장들과 무관하게 그의 행동에 대한 판단은 별도로 행할 수밖에 없지만. (의도와 행동/결과를 분리할 수 있어야 成人.)
.
암튼 중요한 건, 누군가가 나의 '진심'을 '오해'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사고/언행 방식이 서로 너무 달라서일 수도 있고(1), 내가 생각하는 나의 '진심'이 전두환이나 이명박이나 "지슬"의 저 청년의 주장같은 자기기만에 불과하기 때문(2)일 수도 있고. '틀림' 아닌 단순 '다름'이라 해도 그 '다름'을 감당한다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이기에 (1)이라면 마음 비울 수 밖에 없을 테고 (나의 wish 때문에 타인을 피곤하게 하는 건 이기적인 행동), 만약 (2)의 경우라면 자기성찰에 노력하는 수밖에. 
.
'깨달음'이라는 것에 대해 온갖 해석과 심지어 사기가 난무하지만, 내 경우엔 칼 융의 이 얘기가 가장 와닿는다. "One does not become enlightened by imagining figures of light, but by making the darkness conscious." 겉으로 얼마나 '자비로운'지, 어떤 선행을 얼마나 많이 하고,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들이 그 입에서 나오는 얘기들에 보석처럼 박혀 반짝거리는지 등을 모두 떠나, 자기 내면의 어둡고 안 예쁜 부분들을 스스로 얼마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얼마나 정직하게 인정하는지,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깨달음'의 시작. 그러니, 인간이기에 갖는 온갖 탐진치가 뻔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신을 '메시아' 혹은 '道人'으로 칭하는 이들을 보면 그저 웃플 뿐이고, 거기에 혹해 넘어가는 '긍정적인' 사람들 역시 그 판단력을 신뢰는 도저히 못 하겠고..
.


Writ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