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22

몸의 철학으로 도달한 미래의 시간 | arte365



몸의 철학으로 도달한 미래의 시간 | arte365



몸의 철학으로 도달한 미래의 시간
알바로 레스트레포, 마리 프랑스 들뢰방 / 콜롬비아 몸의학교 교장

우 연 _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 극장장,
댓글_0 조회수 _ 717

콜롬비아에 ‘몸의학교(El Colegio del Cuerpo)’가 설립된 것은 1997년이다. 한국사회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2008년 무렵으로 설립 후 10년이 지난 뒤였다. 당시 KBS 다큐멘터리, EBS 지식채널을 통해 몸의학교의 철학과 운영방식이 처음 소개되었고, 실제로 몸의학교 학생들의 공연도 서울과 안산, 부산에서 이루어졌다. 그 후 베네수엘라의 오케스트라, 엘 시스테마(El Sistema)의 사례와 함께 콜롬비아의 몸의학교는 소외계층을 위한 예술교육 사례로 전파되었고, 이 분야의 아이콘이 되기도 했다. 다시 십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몸의학교는 그동안 어떤 변화를 겪어왔을까? 지구 저편에 50년 이상 내전에 시달리고 있는 나라가 있다고, 우리의 아이들이 키보드로 모니터 속 적군을 죽일 때, 거리에서 실제 총탄을 피하며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다고, 세계에 대한 미천한 상상력을 확장시켜 준 이 학교는 지금쯤 어떤 모습으로 건재한 것일까? 콜롬비아의 대문호 마르케스가 이야기했던 ‘고독의 시간’을 여전히 겪고 있는 중일까? 아니면, 새로운 가능성을 내포한 ‘미래의 시간’에 도달해 있을까? 평창 아트 드림캠프와 해외전문가 초청워크숍에 참가하기 위해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한 콜롬비아 몸의학교 교장 알바로 레스트레포(Álvaro Restrepo)와 마리 프랑스 들뢰방(Marie-France Delieuvin)을 만나 그 이야기를 들어본다.


마리 프랑스 들뢰방(왼), 알바로 레스트레포
알바로 선생님은 2008년 당시 몸의학교를 ‘콜롬비아 미래 세대를 위한 학교’라고 소개했다. 10년, 20년 전 몸의학교 학생들에게 2017년 지금은 바로, 그 당시 바라본 ‘미래의 시간’이다. 이제 성인이 되었을, 당시 몸의학교 학생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나?
알바로 레스트레포(이하 알바로) 지난 20년은 우리 모두에게 극적인 시간이었다. 그들은 이제 대부분 예술가가 되었다. 자기 삶을 극적으로 바꾸고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기적처럼 전환시킨 친구들도 많다. 설립 당시에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콜롬비아라는 불행한 작은 세계에 갇힌 사람들이 아니라 콜롬비아 밖의 세계를 통찰하는 세계시민이 되었다. 전 세계를 돌며 투어 공연도 하고 국제적인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몇몇은 이러한 인생의 반전에 힘들어하기도 했지만, 과거와는 분명히 다른 삶을 살고 있다.
10년 전 선생님께서는 ‘우리는 창조자들의 창조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이제 당당한 예술가가 되었다면, ‘창조자를 창조하는’ 역할을 이미 완수하신 것이다. 더불어 이들이 미래의 몸의학교 운영자가 되길 바란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꿈도 이루신 것인가?
알바로 이번 워크숍에는 두 명의 무용수, 리카르도 부스타만테 마티네(Ricardo Bustamante Martinez), 요한 구티에레 파딜라(Johan Gutierrez Padilla)와 함께 왔다. 이들이 바로 이제 몸의학교 운영자가 된 과거의 내 학생들이다. 워크숍에서도 질의응답 시간에 요한이 잠시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몸의학교에 다니며 내가 배운 것들을 직접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 꿈이 현실이 되어 실제 어린이들을 가르칠 때 너무 큰 만족감과 성취감이 느껴진다고. 요한은 극한적인 콜롬비아의 현실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지금 어린이들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교육자로서의 만족감이 남다를 것이다. 몸의학교는 요한처럼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킨 리더, 정치 사회적인 혼돈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새롭게 뒤바꿔 온 창조자를 위한 학교로 남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난 20년 동안 콜롬비아 사회도 매우 역동적인 변화를 겪어왔다고 알고 있다. 처음 설립하실 때와 지금, 학교를 둘러싼 콜롬비아 사회 환경은 어떻게 다른가?
알바로 콜롬비아는 현재 극심한 변화를 겪고 있고, 몸의학교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몸의학교는 결국 콜롬비아 사회의 축소판이다.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학교 설립 당시는 콜롬비아 내전이 극심한 상황이어서 폭력과 가난이라는 환경 자체로부터 아이들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가 교육의 핵심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평화시대에 대비해 우리가 하는 작업이 사회에 어떻게 더욱 기여할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예를 들면 청소년을 키우는 파일럿 프로젝트를 어떻게 가동할 수 있는지, 이러한 프로그램이 다른 지역의 많은 어린이들에게도 전파될 수 있도록 문화부나 교육부, 대통령실과 협력하는 방안을 계획 중이다.
평화시대에 대비한다고 하셨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얼마 전 50년간 내전으로 고통 받던 콜롬비아에서 대통령과 게릴라 대표의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협의가 있었다. 평화를 고대하던 콜롬비아가 한 열흘 동안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고 들었는데 막상 평화협정 국민투표의 결과는 부결이었다. 콜롬비아 사회는 평화를 원하지 않았던 것일까? 맥락을 모르는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충격적인 결과다. 몸의학교 이야기로부터 너무 멀리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콜롬비아의 이 역사적인 상황과 몸의학교의 운영도 별개로 사고할 수 없으니 설명을 부탁한다.
마리 프랑스 들뢰방(이하 마리 프랑스) 정치적인 과정의 실수가 있었다. 정부와 게릴라 간에 4년간 평화협정을 위한 합의작업이 있었는데, 이 합의의 내용을 먼저 국민투표를 통해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합의를 마친 후에 국민들에게 물어보는, 순서가 뒤바뀐 정치적 실수가 있었다. 이 속에서 국민들의 무관심이 표출될 수밖에 없었으니 콜롬비아 전체가 충격을 받고 있다. 나 또한 뭐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현재 한국사회도 중요한 국면에 서 있다. 민주주의적 절차에 의해 국민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과정을 경험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분명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상식과는 다른 이견(異見)과 갈등을 대면하는 일은 고통스럽고 분명 충격적이기도 하다.
알바로 콜롬비아의 경우, 충격적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평화협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투표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국민의 65% 정도가 투표를 안 해서 부결되었다는 점이다. 전쟁을 원한다고 한 사람들이 이긴 게 아니라 무관심한 사람들이 투표하지 않아서 생긴 비극적인 드라마 같은 상황이다. 보고타 젊은이들이 평화의 시대가 온다며 축하하고 거리행진도 하고 그랬지만, 국민 대부분이 무관심한 상태로, ‘평화가 나한테 뭐가 중요해?’, ‘내전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어?’ 이러한 태도로 지난 세월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 정치적 불신과 무관심이 표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안타깝다. 그러나 이것이 현재의 콜롬비아다.





이렇게 사회적 환경이 급변하는 가운데, 몸의학교 학생들의 교육환경도 달라졌을 것이라 예상한다. 학생들이 처한 문제의 본질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알바로 평화협정이라든지 새로운 시대로 가자는 논의가 시작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린이들의 교육환경이나 조건이 바뀌었다고 볼 수 없고, 여전히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 다만 앞으로 다가올 변화를 기대하고, 향후 평화정책이 잘 정비되길 바랄 뿐이다. 태평양 시대에 대비하게 되고, 그동안 내전에 쓰였던 국방비 등이 처음으로 교육부문에 투자되고 있는 중이고, 교육에 대해 국가의 관심이 커졌다는 것은 긍정적인 변화이다. 그러나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고위층과 기득권층의 부패, 사회 불평등 문제 등이 어떤 식으로든 해결되지 않는다면,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로서는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것이 아무리 평화시대라 명명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선생님의 교육철학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는가?
알바로 몸의학교 학생들은 여전히 대부분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의 철학은 변화된 것이 없다. 만약 사회가 더 이상 폭력적이지 않다면, 우리 사회가 가진 트라우마나 상처가 치유된다면, 그때부터는 치유보다는 예술 본연의 역할, 창조,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추게 되지 않을까 싶다. 즉 지금 콜롬비아에서는 예술의 역할이 사회적 기능, 치료의 기능, 정치적 기능을 많이 요구받게 되는데,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 예술 본연의 역할에 집중하게 되길 바란다.
마리 프랑스 알바로 씨의 이야기에 동의하고 꿈꾸고 소원하지만, 정치적 상황이 우리에게 주었던 상처가 도대체 몇 세대를 지나야 치유될 수 있을까? 지금 세대 역시 여전히 깊은 상처를 입고 살 수밖에 없는 환경인 것 같아서, 시간이 지나더라도 몸의학교의 철학은 많이 변화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젠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부조리한 일들이 콜롬비아에도, 우리의 학생들에게도, 나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밀접한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면 트럼프처럼.
화제를 바꿔, 한국의 학생들이 처한 몸의 양상은 콜롬비아와는 많이 다르다. 이에 대해 예술교육자로서의 조언을 듣고 싶다. 이를테면 ‘움직이지 마시오’와 같이 권력과 지시에 의해 통제받는 ‘수동적인 몸’, 히키코모리처럼 집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 ‘자폐적인 몸’, SNS나 인터넷과 같은 가상현실에 빠져 ‘움직이지 않는 몸’, 대지진이나 세월호 참사와 같이 ‘재난에 처한 몸’ 등이다. 이것이 오늘날 현재 한국사회를 반영하는 몸의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들께서는 한국의 학생들이 몸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져야 하고, 이들을 가르치는 예술교육자들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마리 프랑스 사람의 몸은 어떤 상황에서도 외부적 힘이나 순종으로서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 컨트롤되어야 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몸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결정하게 되어 있는데, 이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면 그것은 우리를 둘러싼 시스템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몸의 본능조차 억압하는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어제 한국 예술교육자 대상으로 워크숍을 하면서 참가자들이 자기소개를 할 때 매우 놀랐다. 다수 참가자들이 어릴 때 겪었던, 지금도 겪고 있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고백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트라우마를 교육현장에서 계속해서 다시 이야기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즉 교육자 스스로가 여전히 어떤 트라우마를 겪고 있고, 극복하지 못한 상태로 어린이들을 만나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이들 앞에 서려면 우선 자신의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어느 정도 그것을 스스로 해결하고 통제할 수 있는 상황에서 어린이들을 만나야 하지 않을까.
한국 예술교육자들에게 영감을 주신다면? 예술교육자로서 가장 보람 있고 행복했었던 경험을 하나만 꼽는다면?
마리 프랑스 너무 많은데.(웃음) 콜롬비아에 처음 와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카르타헤나 지역 어린이들의 문제를 막 발견하던 때다. 당시 카르타헤나 지역 중 ‘만델라’라는 소외지역의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굉장한 폭력 속에서 자라나 언제나 경직되어 있던 한 아이를 만났다. 수업을 해도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 어느 날 그 아이에게 다가가 긴장을 풀어주려고 얼굴을 마사지하듯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그런데 한 번도 긴장을 풀지 않던 그 아이가 갑자기 눈물을 후두둑 흘렸다. 그때 참 안정되고 평화로운 모습을 보았다. 그 순간, 내가 그 아이에게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어떤 신뢰감을 줬던 것이다. ‘신뢰’라는 것이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느꼈다.
알바로 (사진 한 장을 보여주면서) 많은 어린이들이 한 교실에 앉아있는 사진이다. 이 아이들은 정말 시끄럽게 떠들고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빈민 지역의 평범한 아이들이다. 그중 이 어린이는 평창 아트 드림캠프에도 같이 왔다. 한시도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는 어린이들이 어느 순간 스스로 가만히 앉아서 명상을 하며 그 침묵의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란 나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 것이다. 이것이 정말 자기 자신을 잘 통제한 몸이다. 언젠가는 이런 몸이 될 수도 있겠지?


몸의학교 명상 장면
[사진제공]알바로 레스트레포
이번 한국 방문에서 느낀 인상이나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알바로 이번 한국 방문에 만족스럽고 다시 한 번 몸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5개 국가가 함께 작업했는데, 국가도, 인종도 다 다르지만, 우리가 똑같이 몸을 가지고 있고, 그 모든 몸은 다 우주적인 몸이고, 우리가 몸을 통해서 서로 소통하고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감사하다.
마리 프랑스 워크숍을 하면서 참가자들이 정말 무언가에 허기져있고 무언가를 실제로 찾고 있다는, 열정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다가오는 새로운 상황에 대한 걱정, 또한 그것을 헤쳐 나가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 새로운 생각을 대면하는 즐거움 등으로 가득 찬 참가자들을 보면서 매우 감명 깊었다. 이 예술교육자들은 무언가 낯선 것에 대해 호기심을 지닐 줄 알고, 찾아보고 이해하며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되어 있는 분들이라고 느꼈다.

알바로 레스트레포(Álvaro Restrepo)


몸의학교 설립자이자 교장. 콜롬비아 현대무용의 선구자로 무용 외 철학, 문학, 음악, 연극 분야 ‘통합신체교육’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1981년 콜롬비아 장학생으로 미국에서 안무를 전공하고 귀국하여 1997년 몸의학교를 설립했다. 생각과 정신을 담고 있는 ‘몸’을 매개로 힘든 환경에 노출된 청소년들에게 춤추고 생각하는 방법을 통해 몸을 아끼고 타인을 존중하는 학습에 주안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마리 프랑스 들뢰방(Marie-France Delieuvin)


몸의학교 교장. 무용가이자 안무가, 교육자이다. 프랑스 리옹 국립 무용 컨서바토리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91년 프랑스 문화부 Superior Contemporary Dance School of Angers 감독을 역임했다. 현재 몸의학교 전문가 양성 프로그램 및 다수의 사회참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_ Studio E
우 연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및 국제무용협회(CID-UNESCO) 한국본부 기획실장(1998-2005), 서울예술단 기획PD(2006), 예술경영지원센터 국제사업부장(2007-2012)을 역임하며 서울아트마켓(PAMS)및 국제교류 사업을 총괄했다. LIG문화재단 기획실장 (2013-2014)으로 LIG아트홀 강남·합정·부산 3개 제작 극장을 운영했고, 현재 창작연극 제작극장인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 극장장으로 일하고 있다.
yeoniris@gmail.com

2017/03/10

In Contemporary South Korea, Sins of Grandfathers Are Still Sins of Children | KOREA EXPOSÉ



In Contemporary South Korea, Sins of Grandfathers Are Still Sins of Children | KOREA EXPOSÉ



In Contemporary South Korea, Sins of Grandfathers Are Still Sins of Children
Published on March 7, 2017 by Se-Woong Koo


More than 70 years since Korea’s independence from Japan, having a traitor as one’s ancestor still brings great shame — if made public. Most South Koreans decline to mention such parts of their family history. A-list actor Kang Dong-won isn’t one of them, much to his own detriment.

Kang is at the center of a controversy that erupted on Mar. 1 — the day marking the 1919 uprising against Japanese occupation. Film news site Max Movie triggered the scandal by running a profile of actors and actresses whose forebears were pro-Japanese collaborators or independence fighters. Topping the list of collaborators’ descendants was Kang, whose maternal great-grandfather allegedly funded Japan’s war efforts and grew rich from mining rights granted by the colonial government.

The article has since been removed (but is still available on various blogs like this one). Max Movie claims that the posting, made by an individual user on its community page, had been unsolicited and contained some “information that deviates from the truth.” But the debate rages on. Under scrutiny is a comment Kang made in an interview a decade ago: “My maternal great-grandfather was [amazing]. His name was Lee Jong-man. He was chairman of Daedong Corporation. He ran gold mines.”

Worse than collaboration itself, according to many South Koreans, is refusing to acknowledge or being ignorant of colonial-era family sins. A “twisted” or “wrong” historical consciousness is a label frequently attached to views of the past that differ from or deny the ‘true’ history of the nation. Glorifying collaborator ancestors, unknowingly or not, falls squarely within this category. The only thing one can do to satiate an irate public is to confess the crime and silently disappear.

It’s a bizarre reality of South Korea: One’s career can be affected by ancestors’ deeds decades ago, for better or for worse. Another celebrity, Song Il-gook, known for starring in a popular child-rearing reality TV show Superman Returns, basks in the glory of having notable independence fighters as his maternal great-grandfather and grandfather. (He has also burnished his credentials as a patriot by naming his triplets Daehan, Minguk and Manse — the six characters that make up the expression “Long live the Republic of Korea.”)

Then there is actress Moon Geun-young, whose maternal grandfather spent more than three decades behind bars for pro-North Korean activities. For that, she has been trolled for years as a “commie.” When it was revealed in 2008 that she had been giving large sums to charities, right-wing pundit Ji Man-won accused her of trying to “elevate” her family’s leftist record with her good deeds and pretty face. In short, her actions couldn’t be accepted at face value because of who her grandfather was.

After the news broke, Kang Dong-won and his management agency, YG Entertainment, made a poor attempt at damage control by requesting that the claims against his great-grandfather, which they see as defamation, be removed from various sites and search portals. The move has only provoked angry reactions online; people now think Kang is trying to conceal the unsavory past. He is slated to star in an upcoming movie about the 1987 democratization movement, but this prospect is now in jeopardy. Since the scandal broke, Kang’s detractors have been claiming he is unfit to play the role of an iconic student activist as plan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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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jfug pvos @lvuevu


이종만 논란' 강동원 차기작 '1987'..네티즌 "친일파 손자가 이한열 영화를.."

이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은 "친일파 손자는 이한열 영화 하지 마라" "강동원은 과거 외조부를 존경한다고 칭송했다"는 등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5:16 PM - 4 Ma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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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andson of a pro-Japanese collaborator shouldn’t play [student activist] Lee Han-yeol.”


1987 이한열 열사 배역 교체하는게 맞는거 같다. 강동원이 일찍 사과했어도 그가 맡을 역할은 아닌것 같다. 역사를 다룬 영화도 역사로 남으니까. 그대로 밀어부치면 난 물론 안 볼거고 위선 쩌는 한국 영화계에 저주를 퍼부을거고

— 크앙ㅋㅇ (@zzvlf27) March 5, 2017



“Even if he had apologized earlier, this doesn’t seem like a role he should play. Because a movie about history becomes history.”

Such sentiments are equally widespread in South Korean politics. There is plenty to criticize in the impeached president Park Geun-hye and the former Saenuri leader Kim Moo-sung without delving into their parentage. Yet the left’s favorite gossip, at least before the Choi Soon-sil scandal, was stories of what Park’s and Kim’s fathers got up to as collaborators before 1945. To me, how General Park Chung-hee — Park’s father — worked his way into Japan’s good graces is as irrelevant to assessing his daughter’s career as what her fans say: that president Park deserves support simply because her father was a great leader. Either way, the logic is the same. Love or hate her not for what she has done, but for who sired her.

The controversy surrounding Kang betrays two impulses in South Korean society. One is to use the past to judge children who weren’t responsible for that past. Holding figures accountable for the sins of their kin is a vestige of feudal politics. In Joseon, the Korean dynasty that endured until 1910, blood and marital relations of treasonous subjects could incur punishment even if they themselves were not disloyal to the throne. The system survives on a smaller scale in contemporary South Korea. Not only do descendants of pro-Japanese collaborators and communist sympathizers suffer shaming; children of criminals, too, are often socially shunned as the product of “bad seed.”

Another impulse is to quickly condemn a past that may be too complex to be grasped through a few factoids, especially concerning the colonial era. Of all South Korean media outlets, it is surprisingly the liberal Hankyoreh that has leapt to Kang Dong-won’s defense by reprinting a column from last year: The article contends that while Lee Jong-man, Kang’s great-grandfather, did offer money to Japan, he also donated 800 times that amount (roughly 70 million dollars in today’s terms) for the education of Korean workers and farmers. This complicates the narrative surrounding the man. But it won’t be enough to turn the backlash against the actor.

My own lineage has made me wonder whether I ought to be ashamed of my family’s past. My father’s side of the family were once large landowners in South Jeolla Province. After 1945, my paternal grandfather headed the local chapter of the Anti-Communist Youth League. On my mother’s side, my great-grandfather was vice-principal of a venerable girls’ school in Seoul while the city was the colonial capital.

Such facts conform to typical profiles of collaborators. Under Japanese rule the percentage of land owned by Koreans decreased steeply; those who held on to sizeable tracts of land likely accommodated and even assisted the foreign rulers. The same landowners often became anti-Communist stalwarts after liberation, fearing land redistribution similar to that enacted in North Korea. Meanwhile, holding a position of authority in the colonial education system could easily attract a charge of betraying the nation.

But were they traitors? If so, how much did they benefit from collaboration? My maternal grandmother hastily married, in the twilight of colonial rule, a man she didn’t care for. She did it as the only way out of becoming one of the comfort women who were coerced into sexually servicing Japanese soldiers. Only after marrying was she safe from forcible recruitment, I am told. Being from a family of ‘collaborators’ did nothing to protect her.


We may never get the chance to learn the complete truth about Kang Dong-won’s great-grandfather, already branded a collaborator in the internet trial. Kang himself has apologized for “not correctly perceiving [my maternal great-grandfather’s] actions.” In that same apology, he also spoke about his maternal grandmother, an “independence fighter’s descendant,” clearly in an attempt to salvage his family’s and his own reputations. It’s perhaps the only thing he can do now. In history as defined by the majority of South Koreans, there is only right and wrong, white and black. And collaboration is the blackest sin of them all, passed down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till the end of time.
ーーー
For more on the Kang Dong-won controversy, read “Pro-Japanese Roots Haunt South Korean Actor Kang Dong-won” in ké radar.

Cover Image: High-profile pro-Japanese collaborators stand next to the last emperors of Korea, Gojong and Sunjong, in the immediate aftermath of the 1910 treaty that formalized Japan’s takeover of Korea. (Source: unknown)

TAGS: COLLABORATIONCOLLABORATORSCOLONIAL RULEHISTORYJAPANKANG DONG-WONMOON GEUN-YOUNGPARENTAGESONG IL-GOOKSOUTH KOREA


SE-WOONG K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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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Woong Koo earned his Ph.D. from Stanford University and taught Korean studies at Stanford, Yale, and Ewha Women's University. His writings have appeared in The New York Times, Foreign Policy, and Inside Higher Ed among other publ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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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彼をはじめ多くの日本人は当時の日本軍は「日本帝国」の品のあるジェントルな軍人だという妄想を持っていることである。なるほど戦争は平和のためであるから戦士は天使と思われがちである。戦争と軍人の実像を知らないのが一般的である。]

2017/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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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7-01-02
[새해 기획] 음식과 IT기술의 만남
밭에서 장바구니까지 ‘푸드테크
만나씨이에에의 농장 풍경.
만나씨이에에의 농장 풍경.
농산물을 포함한 식품과 정보통신기술이 결합한 ‘푸드테크’(FoodTech. Food와 Technology) 산업은 농업에도 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충북 진천 이월면에 위치한 스마트팜 스타트업 ‘만나 씨이에이’(MANNA CEA)의 농장(사진)에는 흙을 찾아볼 수가 없다. 싱그럽게 꽃처럼 피어나는 채소들은 물속에 뿌리를 박고 자란다. ‘수경재배 제어시스템’이다. 박아론(31)·전태병(28) 공동대표가 자체 기술로 개발한 방식이다.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아쿠아포닉스’(Aquaponics. 물고기 양식과 수경재배를 결합한 농법)와 빛, 습도, 사료 공급 등을 자동 조절하는 소프트웨어 등이 결합된 시스템이다.
스마트 농장인 ’만나 씨이에이’
’바이오 필터’ 특허기술 개발해
물고기 양식한 물로 수경재배
엽채류 생산량 일반농가 30배
박 대표는 “양식한 물고기의 배설물을 질산염으로 처리해 액상배료를 만들어 식물을 키운다. 물고기를 양식한 물이 바이오필터를 거쳐 식물의 뿌리로 전달되는 식”이라고 말했다. 그 물은 다시 물고기 양식장으로 간다. 바이오필터는 만나씨이에이의 대표적인 특허기술이다.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한 박씨와 기계공학이 전공인 전씨는 대학에서 룸메이트였다. 농업이야말로 미래산업이라는 데 의견 일치를 본 이들은 취업 대신 창업을 선택했다. 2013년 법인을 설립한 이들은, 전공을 살려 첨단정보기술을 농업에 적용했다. 2014년 1만9800㎡(약 6000평) 규모로 세운 만나씨이에이 농장이 그 결과물이다. 현재 엽채류 50가지, 뿌리채소 7가지, 허브 20가지 등을 재배하고 있다. 엽채류는 일반 농가보다 생산량이 30배 많다. 이들 채소는 지난해 1월 선보인 유통 서비스 ‘만나박스’를 통해 판매하고 있다. 박 대표는 “매월 30~40% 정도 성장해 누적 회원수가 대략 1만2000명”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공유농장 프로젝트인 ‘팜잇’을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와디즈에 선보였다. 하루 만에 386명의 투자자가 몰리면서 목표했던 투자금 7억원 유치에 성공했다. 박 대표는 “팜잇은 지분을 나눠 가지면서, 오너십과 수익을 배분하는 공유농장 개념”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아쿠아포닉스 시설과 수경재배 제어시스템 등도 판매 상품으로 내세운다. 2015년에는 카카오의 자회사인 케이벤처그룹으로부터 투자도 받았다.
글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사진 만나씨이에이 제공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76986.html#csidxc4fb099e48c5b819ed84f24509fa933 

2017/02/14

【正論】漱石と鴎外に与えた乃木大将の殉死の意味とは… 文芸批評家、都留文科大学教授・新保祐司(1/4ページ) - 産経ニュース

【正論】漱石と鴎外に与えた乃木大将の殉死の意味とは… 文芸批評家、都留文科大学教授・新保祐司(1/4ページ) - 産経ニュース

漱石と鴎外に与えた乃木大将の殉死の意味とは… 文芸批評家、都留文科大学教授・新保祐司

(1/4ページ)

文芸批評家・都留文科大教授 新保祐司氏

 今年は明治の文豪・夏目漱石の没後100年の年である。青春時代に著作をずいぶん読んだが、漱石文学の愛読者というほどではない。今では、「明治の精神」を代表する一人であると考えている。

 『吾輩は猫である』『坊っちゃん』『草枕』などの初期の名作や『三四郎』『それから』『門』の中期の三部作、『彼岸過迄』『行人』『こころ』『道草』『明暗』などの後期の作品群は、今日でも読まれている作品であるし、今後も読まれ続けるに違いない。

≪『こころ』に描かれた場面≫

 しかし、今日の日本、21世紀の世界の中の日本、ということを思うとき、漱石の何が最も日本人の精神に訴えるものであるか、と考えると、それは『こころ』の中で、明治天皇の崩御と乃木大将の殉死に触れている文章であり、そこで「明治の精神」という言葉を出していることだと思う。

 小林秀雄は有名な『モオツァルト』の中で、モーツァルトの音楽を熱愛したフランスの作家・スタンダールの『ハイドン・モオツァルト・メタスタシオ伝』の結末の一節-モーツァルトを「裸形になった天才」ととらえた文章-について代表作である「数百頁の『赤と黒』に釣り合っていないとも限るまい」と小林らしい批評をした。同様に『こころ』の中の明治天皇と乃木大将について触れた一節が、漱石の数多くの「数百頁の」長編小説と「釣り合っていないとも限るまい」といえるのではない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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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こころ』の結末にいたって、主人公の「先生」は「夏の暑い盛りに明治天皇が崩御になりました。その時私は明治の精神が天皇に始まって天皇に終わったような気がしました」という。そして、「自分が殉死するならば、明治の精神に殉死する積りだ」と妻に語る。「それから約一か月ほど経ちました。御大葬の夜私はいつもの通り書斎に坐って、相図の号砲を聞きました。私にはそれが明治が永久に去った報知のごとく聞こえました。後で考えると、それが乃木大将の永久に去った報知にもなっていたのです。私は号外を手にして、思わず妻に殉死だ殉死だと言いました」と書かれている。


 ≪「覚醒」した日本人の基層≫

 そして、その死に深い共感を抱いて、ついに「先生」も自殺するにいたるのだが、こういう「一節」に漱石という人間が「明治の精神」を代表する一人である所以(ゆえん)があらわれているのである。

 漱石・夏目金之助は、慶応3(1867)年、ということは明治維新の年の1年前に生まれている。まさに明治の子であり、近代日本の文明開化の中で成長し、生きたわけである。幼少からの深い漢学的教養という台木に、西洋文学(漱石の場合は、英国文学)が接ぎ木された。「明治の精神」の悲劇的な相貌(そうぼう)は、この精神における接ぎ木から来ているが、そのような近代日本の悲劇については、明治維新から半世紀ほどたった明治44(1911)年に行った『現代日本の開化』という講演で漱石自身が鋭い認識を示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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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して、その1年後、明治天皇が崩御し、乃木大将が殉死するのである。近代人・漱石は、それまで近代人のエゴイズムの問題を鋭くえぐり出していたが、ここで深い衝撃を受け、乃木大将の殉死が象徴する、いわば前近代の精神に「覚醒」したのである。単に前近代の精神というよりも、日本的精神の基層にある何か、といった方がいいかもしれない。この「覚醒」が表現されているものとして、『こころ』のこの一節は、極めて貴重であり、今日の、そして今後の日本人の精神に訴えるものであり得ているのではないか。

≪忘れ果てていた大いなるもの≫

 このような「覚醒」は、明治の文豪として並び立つ森鴎外にも起こった。これが、2人の文豪に起きたということは、乃木大将の殉死が日本人にとっていかに深い意味を持っているかを表している。

 近代人・鴎外も、奇しくも『現代日本の開化』の次の年に発表した『かのように』という作品で、世界と人間の価値は、ある「かのように」あると語っていた。絶対的なものの見方ではなく、相対的な見方であり、絶対的なものがある「かのように」考えるのである。その鴎外が乃木大将の殉死に衝撃を受け、武士の殉死を描いた歴史小説『興津弥五右衛門の遺書』を書いた。それから、鴎外は近代の日本から離れ、前近代のことを書くようになってい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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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漱石と鴎外という2人の近代日本の文豪の精神に起きた「覚醒」は、今日の日本人にとって何か大きな示唆を与えているのではないか。明治維新以来の文明開化の中に生きた2人は、50歳くらいになったとき、乃木大将の殉死という事件に邂逅(かいこう)した。そして、自分の精神の基層にあった日本的精神の何かが噴き出したのである。

 21世紀の日本人も戦後七十余年という更なる文明開化の中に生きて、何か大いなるものを忘れ果てていた。今や、そのことに気がつかされ、日本人の精神の再生が深いところから起きてくる時代になってきたのではないか。(しんぽ ゆうじ)

今年で発行から100年 夏目漱石の「こゝろ」を読み解く - NAVER まとめ

今年で発行から100年 夏目漱石の「こゝろ」を読み解く - NAVER まとめ




今年で発行から100年 夏目漱石の「こゝろ」を読み解く


夏目漱石のこころは2014年で発行から100年を迎えます。読んだことの無い人にはぜひ読んでほしい。

更新日: 2014年07月28日


grtn89さ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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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年に発行された夏目漱石の「こころ」





Amazonこころ



夏目漱石が亡くなる2年前に書かれた晩年の名作

今まで読んだことの無い人、読んだけどいまいちよくわからなった人は
ぜひもう一度読んでほしい。


あらすじは……





Flickr由比ヶ浜 by yutaka-fCCライセンス:表示



明治末期、避暑地鎌倉へ旅行に来ていた「私」は、「先生」という人物に出会う。
先生は、東京で奥さんと二人暮らしをしているが、仕事はせず、人との交流を好まない。
私は、そんな先生のもとを頻繁に訪ねるようになっていた。
そのうちに、私は先生の心に巣食う「過去」に触れる。

しかし、その後私は父の病床を見守るため実家に帰省することに。
その間にも先生に何通も手紙を送るが返事が来ることはなかった。
幾日が経ち、明治天皇の崩御、乃木大将の殉死、「明治」が終わりを告げた頃
父の容体が急変し、周りがあわただしくなる中、先生から一通の手紙が届く。
父が何とか峠を越えた時、私はやっと先生の手紙を読むことができた。
しかし、目に飛び込んできたのは
「此手紙があなたの手に落ちる頃には、私はもう此世には居ないでしょう。
 とくに死んでいるでしょう」
という遺言めいた言葉であった。私は急いで東京行きの列車に乗り込みはやる気持ちを抑えて
手紙の続きを読み始めた。

その中には、両親を早くに亡くし、遺産管理を任せていた叔父の裏切り
(人を信じることしかできなかった自分の無知さへの恥じ)
そして、同じ人を好きになってしまった友人を欺き、結果的に自殺へ追い込んでしまったこと
への自責の念が書かれていた。

「あなた限りに打ち明けられた私の秘密として、すべてを腹の中にしまっておいて下さい。」

その言葉で締めくくられた先生の遺書を読み終えたところで、この物語は終わる。


発行当時の広告文





GettyImages



自己の心を捕へんと欲する人々に、人間の心を捕へ得たる此作物を奨む。


出典夏目漱石 『心』広告文



最初は短編集であった「こころ」





GettyImages



当時の予告には数種の短篇を合してそれに『心』といふ標題を冠らせる積〔つもり〕だと読者に断わつたのであるが、其短篇の第一に当る『先生の遺書』を書き込んで行くうちに、予想通り早く片が付かない事を発見したので、とう/\その一篇丈〔だけ〕を単行本に纏めて公けにする方針に模様がへをした。


出典夏目漱石 『心』自序



こころの前身、「先生の遺書」を書くことになったわけ





出典naotonote.blogspot.com



夏目漱石がこころの前身である「先生の遺書」(おそらく本編、下の先生と遺書)
を書くきっかけとなったのは、陸軍大将・乃木希典の殉死にありました。


夏目漱石が乃木希典に見た「明治の死」





出典ja.wikipedia.org


明治天皇の大喪の礼の日
腕に喪章をつける夏目漱石


現在も、明治を象徴する人物としてあげられる乃木希典
嘉永2年に生まれ武士として、その後明治に代わってからは陸軍の大将として
その後は、学習院院長として教育にも携わっていました。
日露戦争での功績は世界でも称賛され、他国からの勲章を受けるほどであった。
しかし、乃木希典はその日露戦争で多くの犠牲者を出したことを深く悔いており
自責の念を感じていたのです。
その後、明治天皇大葬の大正元年9月13日、妻静子とともに
自らの喉を刀で突き刺し自刃しました。


当時世間を吹き荒れていた「明治の精神への批判」





出典www.shirakaba.ne.jp



明治末期、自由主義を背景に、理想主義、人道主義、個人主義な作品を制作する
「白樺派」という文芸思潮が現れました。
白樺派を謳う人々は、「明治の精神」に象徴される武士道の精神や時代遅れな封建制
を批判し、より海外の文化に触れ視野を広げることで未来へと進むことを良しとし、
生前から、乃木希典を批判の対象としていました。
同人誌「白樺派」で作品を掲載していた作家の多くは学習院出身であり
乃木希典の教え子でもありました。

そんな彼らは、乃木希典の死後、明治天皇の後を追い殉死したことを
「前近代的行為」と冷笑的な態度をとっていました。


夏目漱石が「こころ」に封じ込めた「明治の精神の死」





GettyImages



「こころ」の作中で、Kを自殺に追い込んだことに長年苦しめられ
やがて時期を経て、自殺をした先生と
日露戦争で多数の犠牲を払い、十数年を自らを苦しめながら生き
忠誠をつくした明治天皇の崩御後、殉死した乃木希典。
夏目漱石は、先生という人物を明治の精神の象徴として
作品に残していったのです。


読んでみたくなった人は


夏目漱石 こころ


http://www.aozora.gr.jp/cards/000148/files/773_14560.html


こころ 夏目漱石 上 先生と私 一 私 ( わたくし ) はその人を常に先生と呼んでいた。だからここでもただ先生と書くだけで本名は打ち明けない。これは世間を 憚 ( はば ) かる遠慮というよりも、その方が私にとって自然だからである。私はその人の記憶を呼び起すごとに、すぐ「先生」といいたくなる。筆を 執 ( と ) っても心持は同じ事である。よそよそしい 頭文字 ( かしらもじ ) などはとても…


参考にしたリンク


こゝろ - Wikipedia


http://ja.wikipedia.org/wiki/%E3%81%93%E3%82%9D%E3%82%8D


こゝろ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移動: 案内 、 検索 この項目では、 夏目漱石 の小説について記述しています。その他の用法については「 こころ 」をご覧ください。 こゝろ 著者 夏目漱石 発行日 1914年 ( 大正 3年) 発行元 岩波書店 ジャンル 小説 国 日本 言語 日本語 ウィキポータル 文学 テンプレートを表示 『 こゝろ 』(こころ)とは、…


乃木希典 - Wikipedia


http://ja.wikipedia.org/wiki/%E4%B9%83%E6%9C%A8%E5%B8%8C%E5%85%B8


乃木希典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移動: 案内 、 検索 乃木 希典 乃木希典 生誕 1849年 12月25日 武蔵国 江戸 死没 1912年 9月13日 (満62歳没) 東京市赤坂区新坂町(現在の 東京都 港区 乃木坂 ) 所属組織 大日本帝国陸軍 軍歴 1871年 - 1912年 最終階級 陸軍大将 墓所 青山墓地 , 乃木神社 テンプレートを表示 乃…


乃木希典大将はなぜ名将なのか、日本人には知って欲しい。 - さくらの花びらの「日本人よ、誇りを持とう」 - Yahoo!ブログ


http://blogs.yahoo.co.jp/bonbori098/3101327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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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目漱石『こころ』で、先生が自殺した理由に、明治天皇の話はどう関係

夏目漱石『こころ』で、先生が自殺した理由に、... - 文学、古典 | Yahoo!知恵袋



夏目漱石『こころ』で、先生が自殺した理由に、明治天皇の話はどう関係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

どなたかわかりやすく教えてください。

whitepeachwhiteさん2009/9/200:08:23

閲覧数:8,586 回答数:2 違反報告

ーー

higonosuke8010さん 2009/9/211:00:49

読み手によって、考え方も変わるとは思いますが

僕は、明治天皇というより 乃木大将の殉死が関係してるんだと思います。



乃木希典は、西南戦争の時 西郷軍に軍旗を奪われます。

非常に気にして、自殺を試みたりします(見つかって未遂)

厳しい処分をしてほしいと望んでも、お咎めなし。

結局、30年以上して明治天皇の死によって、殉死と言う形で亡くなります。

その時の、遺書で 乃木大将が 30年以上前の軍旗盗難が

殉死の理由に挙がっていて

世間は、「あんな昔のこと まだ気にしてたの!?なんて責任感が強いんだ」と

驚きます。



そこで言えるのが、乃木は、過去の過ち(軍旗奪われる事件)を

ずっと悩み、気にしてた。

先生も、Kのことで悩み気にしていた。



結果、2人とも自殺。

乃木大将と同じく、明治の過ちを 明治で終わらせる。



内容的には、上のように考えてますが

物語以外の もっと奥深い何かがあるんだと思います。

例えば、乃木は 結果的に 妻と一緒に自決。

先生は、妻には何も話さず死んでます。

つまり、過去の過ちで死ぬのに 妻も道連れにしなくても・・・など

その他もろもろ、乃木大将の殉死に対しての 漱石の批判。



先生の奥さんは、「お嬢さん」など書かれてますが

「静」と呼ばれてるシーンがありますよね。

奥さん(お嬢さん)の、名前は「静」と思われますが

乃木大将の奥さんは、「静子」なんですよね。



長くなりましたが、僕は先生の自殺は

漱石の乃木夫妻の殉死に 批判めいたのものがあったのでは?と考え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