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0

알라딘: [전자책] 장자 : 자연 속에서 찾은 자유의 세계 - 청소년 철학창고 04

알라딘: [전자책] 장자 : 자연 속에서 찾은 자유의 세계 - 청소년 철학창고 04


[eBook] 장자 : 자연 속에서 찾은 자유의 세계 - 청소년 철학창고 04  | 청소년 철학창고 4
장자 (지은이),조수형 (엮은이)풀빛201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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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정가
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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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 195쪽
책소개
우화를 통하여 자연과 일치된 자유로운 삶과 진정한 인간성을 보여준 장자의 사상을 청소년에게 소개하는 책. 철학서에는 흔하지 않은 형식인 '우화'의 맛을 살리기 위하여 직역보다는 의역으로 이야기 형식을 살려서 풀어 썼고, 각 이야기 말미에 해설을 덧붙였다.


목차


'청소년 철학창고'를 펴내며
들어가는 말

내편(內篇)
제1화 곤이 붕으로
제2화 허유와 접여의 삶의 태도
제3화 혜자의 박
제4화 쓸모는 하늘이 정하는 법
제5화 통하였느냐
제6화 조삼모사
제7화 참을 수 없는 지식의 가벼움
제8화 무엇이 올바른 삶인가
제9화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다
제10화 꿈 깨니 또한 꿈이런가
제11화 칼로써 양생을 말하는 정(丁)
제12화 사람에게서 자연으로
제13화 누구나 자기 설움에 운다
제14화 집착이 없으면 잃을 것도 없다
제15화 천륜(天倫)과 인륜(人倫)
제16화 존중함으로 존중받는다
제17화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제18화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제19화 이름지어진 덕은 덕이 아니다
제20화 사람의 정, 하늘의 정
제21화 진인을 본받아
제22화 삶과 죽음을 넘어 자유로
제23화 청출어람(靑出於藍)
제24화 마음을 비우면 귀신도 도망간다
제25화 유위(有爲)가 무위(無爲)를 죽이다

외편(外篇)
제26화 물오리와 학의 다리
제27화 수양산 바라보며 공자를 탓하노라
제28화 그 어떤 기예도 자연을 빚지는 못한다
제29화 곳간지기 공자
제30화 바람만이 아는 대답
제31화 요임금과 봉인
제32화 인도(人道)와 천도(天道)
제33화 진리를 담을 그릇은 없다
제34화 지극한 인(仁)은 근본에 따르는 것
제35화 천도 정치
제36화 버려야 얻는다
제37화 본성에 대한 편견
제38화 벼랑에 이르러야 바다를 본다
제39화 바람은 경계가 없다
제40화 짝 잃은 장자를 곡하노라
제41화 마음을 비우면 죽음도 피한다
제42화 최고의 명장은 자연
제43화 쓸모는 사람이, 수명은 자연이 정한다
제44화 가장 뛰어난 화장술은?
제46화 제후보다 진인
제47화 흐르는 강물처럼
제48화 한 우물을 파라

잡편(雜篇)
제48화 자연인 경상초
제49화 함께 가는 길
제50화 관포지교(管鮑之交)
제51화 성(聖)과 속(俗)
제52화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제53화 필요로 하는 것을 주어야
제54화 꽃은 꽃이 아니다
제55화 나보다 귀한 것은 없다
제56화 도척의 길, 공자의 길
제57화 활인검(活人劍)
제58화 모든 화는 내 탓이다
제59화 자연에서 일어나 자연에 눕다
제60화 물은 부드러우나 다투지 않는다


영원한 자유인,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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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장자 (莊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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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는 성은 장(莊), 이름은 주(周), 자(字)는 자휴(子休)이다. 그는 송나라 몽(蒙) 사람으로 전국시대 제자백가 중 도가의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여러 문헌을 종합해 보면, 장자는 전국시대인 B.C.300년경부터 맹자보다 약간 뒤늦게 나타나 활약한 듯하다. 그는 고향인 몽에서 칠원을 관리하는 말단 벼슬아치로 근무하는 한편, 논리학파의 거물인 혜시와 친하게 지낸 박학다식한 학자요 논객이었다. 초나라 위왕이 그를 재상으로 맞아들이려고 했으나, 그는 자유를 속박당하기 싫어 이를 거절하고,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유유자적한 생애를 보냈다. 접기

최근작 : <우화로 읽는 장자>,<장자>,<장자 내편> … 총 132종 (모두보기)

조수형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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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과를 졸업하고, 동교육대학원에서 윤리교육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제7차 교육과정 전통윤리 교과서 제작에 참여했으며, EBS를 비롯해 여러 공공기관에서 인문학 고전 강좌를 진행했습니다. 독서대학 르네 21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3년 현재 보성여자고등학교에서 윤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전통 윤리》와 《윤리와 사상》, 《고등학교 논술 》 교과서 집필에 참여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장자, 자연 속에서 찾은 자유의 세계》와 《살아 있는 도덕 수업을 위하여》(공저)가 있습니다.

최근작 : <질문하는 십대, 대답하는 인문학>,<도덕경>,<내신 & 고1 도덕 (1학기, 2학기)> … 총 11종 (모두보기)



평점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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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핵심만 쉽고 재미있게 적어 놓았다!
북극성 2023-03-09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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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평안을 얻을수 있는책. 다른 출판사의책과 비교해서 읽으니 이해가 더 잘됐다.
멋진사람 2013-02-19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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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의 개구리로 살 것인가, 아니면 구만리를 날면서 살 것인가-<장자, 자연 속에서 찾은 자유의 세계>를 읽고-




한국 사회에는 “이래 이래야 한다.”는 기준들이 있다.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꼭 명문이라고 불리는 대학에 입학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대학을 나온 뒤에는 많은 연봉을 주는 기업에 취업해야 한다. 그리고 취업한 다음에는 이른바 결혼적령기라는 시기를 놓치지 말고
결혼을 해야 한다. 그런데 결혼을 하더라도 아무나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 사회적인 조건이 자기와 비슷하거나 더 나은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 그리고 자녀를 낳으면 그 자녀는 어릴 때부터 조기에 영어 교육을 해야 한다. 그리고 학교에 입학하면 공부를 잘 해서 명문이라고 불리는 대학에 입학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에서 “잘 산다, 부럽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은 위와 같은 기준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인다.
입시가 전쟁이라는 것은 너무 당연한 사실이고, 이제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입학 했을 때부터 취업 전쟁에 뛰어든다. 결혼할 나이가 되면, 사람들은 누가 어떤 사람과 결혼했는지를 입에 올리면서 그가 결혼을 잘 한 것인지 못 한 것인지를 평가한다.


그리고 자녀를 낳으면, 자녀가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은 자녀 교육을 잘한 사람으로서 존경의 대상이 된다. 자녀의 성적이 좋지 않은 사람은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런데 우리는 왜 저 기준에 얽매여서 살아야 하는가? 명문대를 나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행복이 보장 되는가? 조건이 좋은 사람과 결혼하면 행복한가? 한국 사회에서 말하는 “이래 이래야 한다.”는 기준에 들었다고 해서 꼭 행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또 이 기준에 들지 못했다고 해서 평생을 괴롭게 사는 것만은 아니다.


예전에 인간극장에서 쓰레기를 수거해서 파는 사람의 이야기를 방송한 적이 있다. 보통 우리는 쓰레기를 줍는다고 하면 늙은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벌이도 정말 안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방송에 등장한 사람들은 젊은 부부였고, 한 달에 500만원이나 벌고 있었다.


장자의 내편 제3화에는 ‘혜자의 박’ 이야기가 나온다. 혜자가 위나라 왕에게서 받은 박씨를 심었더니 열매가 열렸는데, 그 크기가 다섯 석(石)에 달했다. 마실 물을 들어도 너무 무거워서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박을 둘로 쪼개 표주박을 만들었다. 하지만 갈라진 표주박도 바닥이 너무 얕아 제 구실을 못할 것 같아 홧김에 부셔버렸다.


혜자의 말을 듣고 난 뒤 장자는 “다섯 석짜리 큰 박을 배로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울 생각은 하지 않고, 평평하여 소용이 닿지 않는다고 부쉈다니, 그대의 옹졸한 행동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라고 말한다.


편견은 우리의 삶을 좁은 틀에 가둔다. “이래 이래야 한다.”는 좁은 틀에 자신의 가능성을 가두어 두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장자는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일생을 좁은 우물에서 보낼 수도 있고, 광대한 바다를 누비며 다닐 수도 있는 것이라고.


내편 1화에는 곤과 붕의 이야기가 나온다. 곤은 북쪽 끝 바다 검푸른 곳에 사는데 수천 리에 달할 만큼 거대한 물고기다. 이 물고기는 어느 날 홀연히 붕이라는 일음의 새로 변했는데, 그 크기 역시 수천 리에 달했다. 붕이 힘껏 날아오르면 활짝 펴진 날개가 마치 하늘에 드리워진 구름 같았다고 한다. 이 새는 풍랑이 일면 천지(하늘의 연못, 혹은 하늘만큼 큰 연못)라는 이름의 남쪽 바다로 날아가려 한다.


붕은 한 번의 날갯짓으로 구만 리 먼 하늘을 날아올라 남쪽 바다로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우물 안의 개구리로 살 것인가, 아니면 구만리를 날면서 살 것인가. 장자는 우리가 날개를 펼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 접기
veronica0312 2007-09-11 공감(10)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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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철학, 진정한 인간성




중국은 동북공정을 고수하길 좋아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들을 훔쳐오길 좋아한다.
요근래의 서적을 읽다보면, 중국 고전의 서적에서 발췌하여 인용하길 좋아하는 서적들이 많은데, 직접 장자에 대한 일생과 그의 저서를 읽을 기회가 생겨 왠지 어깨가 으슥해지는 면이 생기는 점은 어쩔수 없다. 윤리와 정치의 관계를 많이 개입시킨 공자의 유가사상과는 달리 무위자연을 강조하는 장자의 도가사상은 권력의 통치 기반과는 무관하기에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실제 우리나라는 노자와 장자가 주장한 도가사상보다는 죽지 않고 오래 사는 현세적 행복을 추구하는 도교사상의 영향을 물려받았다. 자연과의 일체를 주장하고 타고난 천성대로 살아갈 것을 주장하는 장자의 철학은 자본주의 시대에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짐짓 무거운 자신의 짐을 내려놓고 편안히 명상에 잠기게 하는데 주효할만한 명약이라 할만하다.

장자의 저서는 내편 7본, 외편 15본, 잡편 11본으로 내편이 오래되었고 장자의 철학이 담긴 저서라고 보여지며, 외편과 잡편은 후학에 의해 집필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이 책의 특징은 우화를 중심으로 이야기 중심으로 소개되었고 내편, 외편, 잡편의 순서를 따랐다.

내편의 1~4화는 소요유, 5~10화는 제물론, 11~13화는 양생주, 14~17화는 인간세, 18~20화는 덕충부, 21~23화는 대종사, 24~25화는 응제왕을, 외편의 26~27화는 변무, 28화는 마제, 29화는 거협, 30화는 재유, 31화는 천지, 32~33화는 천도, 34화는 천운, 35화는 천운과 제물론, 36화는 각의, 37화는 신성, 38~39는 추수, 40화는 추수, 41~42화는 달생, 43~44화는 산목, 45화는 전자방, 46~47편은 지북유를 거론했다.
잡편의 48~49화는 경상초, 50화는 서무귀, 51~52화는 즉양, 53~54화는 외물, 55화는 양왕, 56화는 도척, 57화는 설검, 58화는 어부, 59화는 열어구, 60화는 천하를 이야기한다.

고전을 읽을때 종종 주의하게 되는 경우가 저자의 원문을 충실하게 해석했는가라는 점과 원문의 틀이 어떻게 바뀌었는가인데, 이 책에서는 곽상본 33편을 기준으로 각각의 내편, 외편, 잡편에서 대표적인 이야기거리를 발췌하여 화두를 제시한 점이 특징이다.
자연론자, 운명론자인 장자의 사상 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대목은 <13화 양생주, 누구나 자기 설움에 운다> 에서였다.

노자가 죽자, 그의 벗 진실이 조문을 가서는 세 번 곡을 하고 그냥 나온 것을 그의 제자가 선생님의 벗일진대 조문을 그렇게 해서야 되겠냐고 물어봅니다. 진실 왈 "그렇다. 처음에는 나도 저들처럼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내가 들어가 조문할 때 곡을 하던 노인은 자식을 잃은 설움에 우는 것 같았고, 젊은 사람들은 어미를 잃은 듯 울었다. 사람들이 여기에 모인 이유는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위로와 곡을 하기 위함이다. 노자가 세상에 온 것은 태어날 때를 맞았기 때문이고,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은 떠날 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때를 알고 하늘의 뜻에 따르면 기쁨이나 슬픔도 나와는 관계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절대적인 구속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니겠느냐" - (45쪽)

겉으로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만, 실제 각자 가지고 있는 설움 때문에 곡을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면, 사람은 남에 대한 연민보다는 자기 설움에 흐느껴 우는 존재일 뿐이라고 한다.
살다보면 때때로 타인의 냉대와 무관심의 설움에 울게 마련이다. 어디선가는 착하게 지켜야 할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을 무질서한 어른들의 이기심으로 파괴시키기 일쑤이고 타인의 연민과 고뇌가 얽힌 삶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얼굴에 한가득 무관심으로 포장한 채 아는 척 모른척 살아가기 바쁘다.
세속을 초탈한 삶이 자신의 안녕과 편안한 삶을 보상해 줄지언정, 한편으론 야속하기 그지 없다.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일차적인 속박을 당한다. 시간이 지나 후회를 할만정, 왜 그때 그랬었을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난 내 설움에 왜 그토록 빠져들었을까. 남의 설움이 왜 눈에 들어오지 못했던 것일까? 매일 접시에 빠져 허적이는 파리의 모습처럼 살았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자기 설움에 운다란 이 글을 보는 순간, 내 마음 한구석을 자리하던 간사한 악마의 속삭임을 살필수 있었다.
우는 것이 어쩔수 없는 나의 숙명이라면 내 설움을 그만 내려놓고 이제는 남의 설움을 들어보고 대신 울어줄때란 생각이 들었다.
집착이 없으면 잃을 것도 없다.
장자의 우화를 통해 진정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해 본 좋은 동기가 됐다.

- 밑줄긋기 -

1. 자유의 당당함은 각자의 분수를 깨닫고 욕심을 덜어 낼 때 비로소 생긴다. (20쪽)
2. 도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변하며, 특별한 기준이 따로 없기에 차별이란 있을 수 없다. (28쪽)
3. 사물에 대한 편견을 버려라. 인간의 관점이 아닌 도의 관점에서 보면 사물에 대한 상대적인 차별은 편견일 뿐이다. (29쪽)
4.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두 사람을 비교하고, 판단을 개입시켜 선과 악으로 나눈다. (69쪽)
5. 집착과 근심 걱정이 많을수록 겉모습에 표시가 나기 마련이다. 세속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인위를 계함에게 읽힌 것이고, 이를 짚어 낸 계함에게 열자가 빠져 버린 것이다. (76쪽)
6. 태어난 이유를 알려 하지 않고 죽어야 하는 이유도 따지지 않는다. 삶에 연연하지 않으며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다. 변하여 무엇이 되더라도 변화를 기다린다. - 대종사 (107쪽)
7. 차별에서 비롯된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덕목은 겸손이다. 겸손은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자연이 허락한 처지를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이 가하는 부당한 차별도 받아들인다. 다른 사람에게 호감이 주는 외모로 바꾸고자 한다면 그 비결이 겸손한 마음임을 알아야 한다(131쪽)
8. 배우고자 하는 욕심을 키우는 것보다 무심히 흐르는 강물처럼 지식을 갖고자 하는 욕심마저 잊고 흐르는 것이 도에 가장 가까운 삶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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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라이크 2007-09-10 공감(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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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추수편' 한 대목에 대한 비판적 단상



개인적으로 중국 제자백가 사상 중에서 <장자>를 제일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우화 형식으로 돼 있지만 내재해 있는 철학적 사유가 매우 심오하기 때문입니다. 우화의 내용은 대부분 모순적인 상황을 발생시킵니다. 그리고 우화의 끝에 이르면 언제나 지혜에 대한 깨달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미학이라고 할까요. 뭐, 노자 <도덕경>이나 자사의 <중용>을 읽어보면 비슷한 사유의 흔적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화 속의 특유한 '논리' 구조*는 제자백가 사상 중 <장자>에서 가장 두드러집니다. <장자>를 읽는 재미와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어쨌든, 이 ‘역설’의 논리는 서구의 변증법적인 방법과 비슷해 보이지만 음미해 보면 선불교에서 말하는 ‘공안’의 논리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런지 직접 <장자>가 하는 말 몇 대목을 들여다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제가 소장하고 있는 <장자> 판본은 여러 개인데, 아래 글은 윤재근 씨가 편저한 <장자> 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1990년 판이라 2013년 판본과 페이지 수가 달라 페이지는 생략 했습니다.)












“사물은 이건 아닌 것이 없고 저것 아닌 것이 없다. ~ (중략) ~ 이것이 저것이고 저것이 또한 이것이다. 저것도 하나의 시비이며 이것도 하나의 시비이다. 과연 저것과 이것이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저것과 이것이 서로 대립을 없애는 경지를 도의 중심이라고 한다."




“손가락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 아니라고 하는 것은, 손가락 아닌 것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만 못하다.”




“한쪽에서 보면 분열이고 다른 쪽에서 보면 합침이다. 한쪽에서의 합침은 다른 쪽에서의 파괴이다. 모든 사물은 합침이든 파괴이든 다 같이 하나이다.”




“저 텅 빈 것을 잘 보라. 텅 빈 방에 햇빛이 비쳐 밝지 않은가. 행복은 텅 빈 곳에 머문다.”




“삶을 죽이는 자에게 죽음이란 없다. 삶을 살려고 하는 자에게 삶이란 없다. 이것이 도이다. 도란 모든 것을 보내고 모든 것을 맞아들이며 모든 것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이룩한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근심과 한탄, 변덕과 고집, 아첨과 거만, 개방과 꾸밈 이것들이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고 내가 없으면 그것들이 나타날 데가 없다.”




<장자> '내편'에서는 위와 같은 어록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말장난처럼 보이는 대목도 있고 아포리즘과 같은 대목도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모든 어록이 평면적인 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자백가 사상 중, 가장 논리적이고 역설적인 서술이 많은 텍스트가 <장자>인 듯합니다.




<장자> '내편'에서는 주로 장주가 직접적으로 말하지만, '외편'에서는 논리를 중시하는 명가의 공손룡과 혜시(장주의 친구)가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편을 읽는 재미가 내편을 읽는 재미보다 낫습니다.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대화가 많습니다. 대구로 되어 있어 주거니 받거니 합니다. '외편'도 좀 들여다 보겠습니다.





혜시 : 하늘은 땅만큼 낮고, 산은 못만큼 낮다.

[이것은 사물과 그 속성을 포괄하는 논리적 문제이다. 우리는 ‘하늘’과 ‘산’이 높은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지만, 혜시는 산의 저상 아래로 보이는 구름의 경우와 산의 정상에 높이 있는 못의 경우를 예로 든다.]

장자 : 이 세상에서 털 끝보다 더 큰 것은 없으며, 태산은 작다.

[이 역설은 예상되는 표준에서 벗어나는 특이한 예외를 인용함으로써 위의 혜시의 경우가 아닌, 만물의 ‘동일성과 나눌 수 없음’의 차원인 형이상학적인 해결을 보여주고 있다.]




혜시 : 정오의 해는 지는 해이고, 태어난 생명체는 죽어가는 생명체이다.

장자 : 생명이 있는 곳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이 대화에서 보듯이 혜시는 장주에게 먼저 논리적인 공격을 가하지만 번번이 장주의 논리에 결정타를 먹고 사라집니다. '외편'을 읽어 나가다보면 혜시와 공손룡은 예외 없이 위의 대화처럼 장주에게 논리적으로 무릎을 꿇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매우 못마땅한 부분이 있습니다. 본 페이퍼를 쓰는 이유도 바로 이 부분에 어떻게든 딴지를 걸어보고 싶어서 입니다. (하아~ 서설이 너무 길었습니다.) <장자>를 읽다보면 '외편'의 '추수편'에서 다음의 유명한 대화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제가 시나리오 형식으로 편집해 봤습니다.)





장주(장자)와 혜시(혜자)가 호수의 다리위에서 한가하게 거닐고 있었다.

장주 : (물고기를 보면서) 하, 참 그놈들 한가롭게도 헤엄치고 있네. 이게 물고기의 즐거움이렸다.

(이 말을 들은 혜시)

혜시 :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안다는 말인가?

장주 :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는 말인가?

혜시 : 나는 장주, 그대가 아니니까 물론 자네를 알지 못하네. 마찬가지로 자네는 물고기가 아니니까 물고기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확실한 거라네.




이 대목은 <장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출간된 거의 모든 책에서 다음의 내용과 동일하게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장주가 말하기를 “자, 이야기를 처음으로 되돌려 살펴보세. 자네는 나에게 ‘자네가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에 대해서 아는가?’ 라고 물었는데, 그것은 그대가 이미 나의 앎에 대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그렇게 물은 것이라네. 나 역시 호수 다리 위에서 물고기의 즐거워함에 대해서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라고) 말한 것이네”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주석 또한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합니다. <장자> 해설서 중에서 가장 빼어난 책 중 하나라고 하는 박이문 교수의 <노장사상>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이문 교수는 책에서 "장주가 혜시의 논변에 자가당착(自家撞着)의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이미 간파했다"라고 몰아갑니다. 계속된 논의를 따라가 보면, 혜시의 “사람은 자기가 아닌 타자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나는 장주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장주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장주도 자기가 아닌 물고기에 대해서 알 수 없다’는 것을 나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부분이 모순을 범했다는 겁니다.



모순을 범했기에 장주는 혜시의 모순을 딛고 서서 자기주장의 논리적 타당성을 변증 설파한 것이라고 하면서 박이문 교수는 장주의 변증 설파 부분(장주의 마지막 대화)으로 글을 맺고 있습니다.


“자네가 처음에 나에게 ‘자네가... 어떻게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안다는 말인가?’ 라고 물은 것은, 자기가 아닌 나, 즉 타자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나 역시 호수 다리 위에서 혜자, 자네의 전제대로 타자인 물고기가 한가롭게 노닐고 있는 것을 보고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 것이다.”







아, 그런데 이 대화의 이러한 결론에 저는 도저히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혜시는 장주에게 논리적으로 완승을 거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혜시는 논리학파로서 순수하게 장자의 말에 논리적인 모순점을 지적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위에서 장주의 마지막 말은 혜시의 날카로운 반격에 관계없는 제3의 요소를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자네가 어떻게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안다는 말인가?'라고 했지만 그것은 이미 내가 안다는 것을 알고서 그렇게 물은 것이라네.”라는 장주의 말은 논리를 넘은 말입니다.



장주가 처음 “하, 참 그놈들 한가롭게도 헤엄치고 있네. 이게 물고기의 즐거움이렸다.”라고 말한 것은 이미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다는 전제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논리를 중시한 혜시는 이를 재빨리 캐치해서 이 숨어 있는 전제를 공격한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다시 돌아가 이 문제를 혜시에게 환기 시키는 것은 (논리적으로 볼 때) 정말 가당치 않습니다.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 것처럼 말한 사람은 장주 자신입니다. 혜시가 문제 삼은 것은 이미 ‘네가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느냐’이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 장주를 알고서 혜시가 그렇게 물은 것이 아닙니다. (혜시는 논리학파이기에 너무도 당연한 문제제기 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 '추수편'의 이 대화는 형식논리학적 관점에서 다시 조명해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상, 허접한 야무의 딴지 걸기였습니다.



[덧]

* <장자> 텍스트의 특유한 논리 구조는 이미 여러 편의 논문들에서 다루어져 온 내용입니다. 동양 철학 텍스트에서 서구 논리학에 가장 근접한 사유 구조를 보이는 것은 공손룡을 위시한 '명가'학파였습니다. 하지만 <장자>텍스트 속의 논리 구조는 텍스트가 구성될 시 불교 철학의 사유 구조가 상당부분 흡수되어 편집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백가 중 독특한 논리구조를 보여주는 텍스트가 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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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3-11-13 공감 (15)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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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나무가 그토록 오래 산 이유가 있다면...



장자, 나무가 그토록 오래 산 이유가 있다면...




무위를 주장했던 장자, 어쩌면 노자보다 더욱 자연스러움을 주장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처세술 가운데 하나는 아무 것도 드러내지 않고, 아무 쓸모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득도?하여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공자의 덕와 너무 다른 주장이다. 진정한 자유란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음이다. 장자 내편의 4편인 인간세의 13번째 이야기는 수천년 동안 잘리지 않고 신목으로 자리잡은 나무에 대한 이야기다. 오랫동안 아무 해를 받지 않고 살아 남기를 원한다면 누구에게도 눈에 띄어서는 안되고, 누구의 필요에 대해서도 무용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한 번 들어보자.






제 4편 인간세



13

장석(匠石)이 제(齊) 나라로 가다가 곡원이란 곳에 이르러 사당의 신목(神木)으로 심어져 있는 참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가 수천 마리의 소를 뒤덮을 만하였고, 그 둘레는 백 아름ㅁ이나 되었으며, 그 높이는 산을 내려다볼 정도이고, 열 길이나 되는 곳에서부터 가지가 나와있었다. 그것도 배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것이 수십 개나 되었다. 구경꾼들은 장터처럼 모여 있었다. 장석은 돌아다 보지도 않고 멈추는 일도 없이 지나쳐 버렸다. 제자들을 실컷 그것을 구경하고 나서 장석에게 달려가 말했다.



“제가 도끼를 손에 들고 선생님을 따라다닌 뒤로 이처럼 훌륭한 재목을 본 일이 없습니다. 선생님께선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지나쳐 버리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아서라, 그런 말 말아라. 쓸모 없는 나무다. 그것으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만들면 곧 썩어 버리며, 그릇을 만들면 곧 깨져 버리고, 문을 만들면 나무진이 흐르며, 기둥을 만들면 좀이 슬어 버린다. 쓸 만한 곳이 없어서 그처럼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원문


匠石之齊,至于曲轅,見櫟社樹。其大蔽牛,絜之百圍,其 高臨山十仞而后有枝,其可以舟者旁十數。觀者如市,匠伯不顧,遂行不輟。弟子厭觀之,走及匠石,
曰:‘自吾執斧斤以隨夫子,未嘗見材如此其美也。先生不肯 視,行不輟,何邪?”
曰:“已矣,勿言之矣!散木也。以為舟則沉,以為棺槨則速腐,以為器則速毀,以為門戶則液樠,以為柱則蠹,是不材之木也。無所可用,故能若是之壽。




경쟁적이고 적자생존의 피비린내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아무 쓸모 없는 존재가 되어야 오래 살아남다는 역설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찬찬히 곱씹어 보면 진정한 승자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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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2-03-07 공감 (5)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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