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숙
[저] 레비나스의 존재와 다르게 - 본질의 저편 읽기
충북대학교 윤리교육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윤리교육과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충북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저로는
『레비나스의 타자윤리학』,
『레비나스의 ‘존재와 다르게-본질의 저편’ 읽기』 등
비교철학적 관점에서 쓴 몇 편의 논문과 도덕·윤리교육에 관한 논문이 있다.
동양포럼 / 기고문 ■ 고령자 시대의 고령자를 생각한다(1)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18.02.25
아버지의 노년, 그 전과 후
김연숙 충북대 교수
● 쌓여만 가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아버지! 살아계실 때도 점잖으시더니 돌아가시는 것도 점잖게 돌아가셨군요.”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제가 마지막으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사자가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이 갑자기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제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아버지의 체온은 순식간에 더 떨어져 갔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제가 디디고 있는 이 대지가 마치 스케이팅을 타는 것처럼 미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이 대지는 제가 정박할 단단한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시간이 가도 희석되지 않았습니다.
해소 불가능한 그리움이 쌓여간다는 것에 대한 당혹감, 죽음 이후를 알 수는 없지만 죽어서도 아버지를 만날 가능성이 적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가슴에 한이 쌓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사후에라도 뵐 수 있으려면 비슷한 삶이어야 할 텐데, 농사일을 하신 아버지는 등이 굽고 손이 닳도록 노동을 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성정상 유명을 달리하신 분으로서 저 세상에서 이 세상을 기웃거릴 것 같지가 않아서 아버지를 어떤 방식으로 뵐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도 아픔이었습니다.
● 주려는 아버진 24만원, 받는 이장은 19만원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84세에 임종하실 때까지 거의 10년 이상을 홀로 사시면서 노년기를 보내셨습니다. 평생 애써 마련하신 농지를 아끼면서 힘닿는 만큼, 서로서로 품앗이를 하면서 해가야 하는 농사일이지만, 농업기계화가 된 덕분에 이웃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럭저럭 꾸려 가셨습니다. 특히 농지를 일구고 논에 모를 심는 것과 같은 힘든 농사일은 트랙터와 같은 기계작업이 필요합니다. 어느 날은 농대 졸업 후 농업에 종사하는 구역 이장님이 아버지를 방문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자네, 지난 농기계 사용료가 24만원이지?”라고 물으셨습니다. 이장님은 “아닙니다, 어르신, 19만원입니다.” 아버지는 거듭 24만원을 주려하고 이장님은 19만원을 받으려 하였습니다. 비용을 주는 사람은 더 주려하고 받는 사람은 적게 받으려고 애를 쓰는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습니다.
● 농총 고령인구 위한 사회적 지원 절실
이 일을 회상하면서 저는 농촌의 고령인구를 위한 사회적 지원이 절실함을 다시금 실감합니다. 도시에서는 실업자를 위한 자금지원이나 공공근로 형식의 고용형태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농촌의 고령인구의 경제활동지원을 위한 어떤 적절한 사회적 조치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농업이 기계화되는 추세에 맞춰 마을 단위의 기계지원과 기계를 다루는 인력 등을 공적으로 지원하도록 제도화하는 것은 어르신들의 경제활동을 지원하고 장려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 “어차피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다 똑같다”
농사일이 없을 때면 아버지는 동네 노인정에서 동네 분들과 시간을 보내시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정부에서 난방비와 약간의 지원금을 보조했으므로, 이를 쓴다는 명분으로 동네의 젊은 분들이 식사를 준비하여 함께 나누시곤 하였습니다. 또한 버스를 타고 시장에 있는 노인정에 나가셔서, 친구 분들을 만나 점심을 드시고 가끔씩 다방에 가서 쌍화차를 드신 후 늦지 않게 귀가하시는 일과를 종종 보내셨습니다.
그 즈음 아버지를 찾아뵈면, 식사 후 거실에서 따뜻한 맥심 커피를 마시면서, 다정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하셨습니다. 언젠가는 함께 하시던 친구들이 한 분 두 분 돌아가셔서 몇 분 남지 않았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약간은 자랑스럽게 80세를 넘겨 사는 것은 드문 일이며, 옛날에는 60을 넘겨 살기도 어려웠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멀리 창문 밖에 펼쳐진 마을 앞산을 바라보시면서 “이제는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다 똑같다”고 하셨습니다.
● 아버지도 노년기엔 요양원 신세 지게 돼
생로병사라는 삶의 순환과정이 있듯이, 노년기에는 특히 누구나 요양원이나 병원 신세를 지게 됩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아버지도 병원에 입원하신 적도 있고 응급실로 가신 적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당신의 건강이나 병 그리고 현대 의료나 병원 등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셨는지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다만 요양원에 대해서 하신 말씀은 있습니다.
지역에 빈 집이 생기면서 그것을 개량하여 요양원을 짓는 일이 벌어졌고, 구역 사람들은 그것을 반대하여 소송을 걸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버지의 의견을 여쭈니 “요양원을 짓는 것이 어떻다고 그러냐. 그럼 이 다음에 우리 같은 사람은 다 어디로 가라고 반대를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구역에 요양원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동네 분들이 노쇠해지거나 병약해지시면 입소하게 되었고, 아버지도 친구 문병하러 들러보시고 오시더니 “음식도 잘 나오고 요양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어서 좋은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차후에 더 노쇠해지면 당신도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것도 괜찮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상기해 볼 때, 요양원과 같은 사회적 시설은 사회로부터 격리될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함께 자리하고 누구에게나 오픈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요양시설의 노인 폭행이나 학대와 같은 문제가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 통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병원에 있는 것도, 집에 있는 것도 다 좋다”
대체로 아버지는 몸이 편찮으신 경우 병원을 가기보다는 그냥 홀로 겪으신 적도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자연치유를 믿어서라기보다는 병원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과 더불어 그저 병고가 지나가길 기다리면서 감내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 싶습니다. 한번은 대학의 병원에 입원하신 적도 있습니다. 출근하면서 입원실로 찾아뵙고 좀 어떠신지 여쭤보니, “병원에 있는 것도 좋고 집에 있는 것도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화투를 꺼내셔서 재수 띠기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 주치의 선생님 등 대여섯 분의 의사선생님들이 회진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가타부타 말없이 재수 띠기를 계속 할 뿐이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의 병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으신 채.
● 임기응변 중환자실 입원에 “당장 이것들 빼”
노년기의 아버지는 또 한 차례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습니다. 일반병실이 없어서 임기응변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중환자실로 면회를 갔더니, 다른 환자분들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와 어지럽게 오가는 의료진들의 바쁜 발걸음 등으로 말미암아 심란하실 것 같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아버지가 드시는 약을 가져오라고 하였고, 오랫동안 복용해오던 고혈압 약을 보여줬더니, “아버님은 고혈압이 없으셔서 안 드셔도 되는 약입니다.”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농사일로 적당히 활동하시고 약주를 거의 안하시면서 음식을 담백하고 간소하게 드시기 때문에 고혈압이라는 말이 좀 의아하기는 하였습니다. 이틀 후에 문병을 갔더니 아버지는 일반실로 옮겨계셨습니다. 마침 올케 언니가 정갈하고 맛깔스럽게 삼단 도시락을 싸와서 아버지께 드시라고 권하고 있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긴 영문을 물으니, 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의료진에게 “뭣들 하는 건가, 당장 이것들 빼라”고 무섭게 화를 내셔서 일반실로 옮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고모. 제가 시집와서 20년 넘는 결혼생활 중에 아버님이 그렇게 무섭게 화내시는 거 이번이랑 해서 딱 두 번 뵈었네요. 생전 화내시지 않는데… 또 한 번은 어머니 제사음식 준비하고 있을 때예요. 저 혼자 주방에서 일하고 있고 오빠랑 삼촌이 방에서 바둑 두고 있으니까 ‘얘들이 나와서 거들지 않고 뭐하는 거냐’라면서 엄청 무섭게 혼내셨거든요.”
● “가까운 사람에게 잘하는 것이 중한 것”
병실에서 식사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는 문득 아버지가 연세도 있으시고 건강도 예전 같지 않으시니, ‘티벳사자의 서’의 이야기를 전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까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아버님과 책에 나온 이야기를 나눈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병원에 입원해 계신 분께 죽음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이 좀 꺼려지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 책에는 단 한 번만 듣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열반에 들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책에서 본 건데요. 돌아가시면, 이런저런 무시무시한 소리와 빛들과 험상궂은 형상들이 단계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형상이자 나 자신을 돕기 위해 나타나는 평화의 신이라는 것을 알아채야 한답니다. 알아차림만으로도 누구나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해요.” 조용히 저의 이야기를 듣던 아버지의 표정에 아주 잠깐이나마 약간의 긴장감이 스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 듣고 나더니 즉각적으로 “교회나 절에 다니는 것보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 “아들이건 딸이건 공부잘하는 놈 대학보낸다”
그 때, 저는 마치 죽비로 머리통을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저는 책에서 읽은 내용이라고 변명하듯 중얼거렸습니다. 아버지는 말씀하시진 않으셨지만, 어떤 실망감이 얼굴에 스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의미를 즉각적으로 알 것 같았습니다. 문맹이시지만 아버지는 늘 막내딸인 제게 공부에 힘쓸 것을 독려하셨습니다. 어렸을 때는 “아들이건 딸이건 공부 잘하는 놈은 누구든 대학을 보낸다.”라고 말씀하셔서 대학이 좋은 것이고 그곳에 가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셨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하게 되니, 아버지는 제가 공부를 이어가지 못하게 될까봐 크게 아쉬워하셨습니다. 제가 공부를 계속해 온 데는 아버지의 뜻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그런 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동안 공부한 내용, 책의 이야기를 전해 드리자마자 바로 “사람에게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갈하셨던 것입니다. 책을 읽으신 적이 없으셨기에 공부하는 것에 대해 엄청난 존경심을 가지셨고 책 속에 엄청난 훌륭한 이야기들이 담겨있을 것이라고 짐작하셨던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선친과 거의 마지막으로 나눈 이 대화는 부단히 저를 소환하여 왔습니다.
● 영정사진 속 아버지 눈빛엔 깊은 슬픔 서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제가 아버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눈치도 못 챈 것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영정사진을 모셔두고 49일이 되는 날까지 기도를 올리던 중,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영정사진을 뵐수록 그동안 평안하고 담담하다고 생각해 오던 아버지의 눈빛에 깊은 슬픔이 서려있다는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앞에서만은 모든 자식들이 조심하고 온화하였으며 용돈도 곧잘 챙겨드렸고, 또한 시골 농촌공동체의 오랜 인연 속에서 주변 분들과도 늘 화목하게 살아오셨기 때문에, 전혀 짐작하지 못한 ‘슬픔’이었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욕심 없이 자족하면서 노년의 삶을 살아내셨던 것 같은데, 그 슬픔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거듭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마음에 걸리는 일들을 적어봅니다.
● 애별리고(愛別離苦), 외로우셨을 것
무엇보다도 애별리고(愛別離苦), 외로우셨을 것으로 봅니다. 아버지는 막내딸인 저를 매우 사랑하셨고, 저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연로해지실수록 여러 가지 일들이 닥쳐서 점점 더 전화도 제대로 못 드리고 찾아뵙지도 못하였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자식이 소식을 자주 전하지 못해서 걱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즈음 아버지가 좀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받고 집으로 모셔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집에 가보니 원만하셨고, 오히려 오랜만에 보게 된 이 딸을 딱하게 쳐다보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네가 참으로 불쌍하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사는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똑같다. 아버지가 옛날에 6.25 전쟁에 참전하였을 때, 큰 배에 태워져 남쪽에서 속초인가로 가게 되었다. 군인들을 먼저 태우고 사람들을 태웠는데, 난리를 치면서 바글바글 탔단다. 간신히 배에 타고 가는 중에도 풍랑을 만나 모두들 배 멀미를 하면서 여기저기 나자빠지고 쓰러져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웠다. 원래 하루면 갈 것을 풍랑을 만나 며칠씩 더 걸리면서 간신히 도착하여 살아난 것이다. 그때 ‘멀리서 보면 바다가 평탄한데 막상 바다 속으로 들어오니 이렇게 파도가 치고 풍랑이 이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이제 보니 사람 사는 모습도 바다랑 아주 똑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탄하게 사는 것 같아도 속을 들여다보면 다들 풍랑을 겪으면서 사는 것이다.” 라고 걱정하시면서 위로의 말을 건네셨습니다.
● 외식 나가면 늘 짜장면만 드셨던 아버지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면 애별리고의 고통을 겪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장한 자식의 삶의 반경은 부모님의 삶의 반경과 매우 다릅니다. 아버지의 경우, 자식들 집을 방문하셔도 늘 가축을 챙겨야 한다는 이유로 서둘러 귀가하셨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당신의 삶의 반경 안에서 자연스럽게 좀 더 즐겁게 사실 수 있는 생활여건이 되셨다면 조금은 덜 슬프지 않으셨을까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경우 식사는 담백하고 검소하셨습니다. 대체로 보리밥이나 칼국수를 드시곤 하였으며, 외식을 나가면 늘 짜장면을 선택하셨습니다. 오빠들이 오리백숙과 같은 건강음식을 사오면 매우 부담스러워하셨습니다. 급기야는 “대관절 이런 것을 어떻게 다 먹으라고 사오느냐”라고 나무라셨습니다. 반면 아버지가 자주 방문하시던 노인정에서의 식사에 대해 여쭈자 “노인정에서 화투치고 생기는 개평과 정부에서 보조하는 지원금을 모아서 점심밥을 짓는 아주머니를 고용하고 있단다. 아주머니가 먹던 음식을 다시 내오는 일이 없어 깨끗하고 손맛도 좋아서 다들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작은 공동체에 실질적 지원 이뤄져야
조금 넓게 생각해보면, 이런 문제는 아버지만의 문제가 아니고 노년기를 맞이하신 분들의 공통적인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혹자는 “노인정과 같은 곳에까지 사회적 지원을 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년기의 삶이 우울하고 가난하고 그래서 병이 들어 병원이나 요양원에 입소하게 되면 건강보험 등을 통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공적으로 지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역의 노인정과 같은 작은 공동체를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잠재적으로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는 한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 노인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치유제가 된다
공동체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노년기의 삶이 안정되면 그 안에서 함께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과 생활이 안정되어 그 파급효과가 매우 클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로부터 우리 사회에는 정로(定老)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현명한 노인을 스승으로 모셔 교화를 펴고 전하며 덕을 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실한 노인을 어르신으로 모셔 교화를 정성스럽게 지켜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치열한 경쟁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서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여유와 적절한 휴식을 누리는 노인의 모습은 그 자체로 요즘과 같은 피로사회의 스트레스를 줄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표도 없고 출구도 없는 경쟁적인 삶의 사이클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자기를 추구함이 없이 존재 그 자체로 존재하는 노인들의 존재모습은 그 자체로 치유제가 될 수 있기도 합니다.
● 쌓여만 가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아버지! 살아계실 때도 점잖으시더니 돌아가시는 것도 점잖게 돌아가셨군요.”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제가 마지막으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사자가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이 갑자기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제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아버지의 체온은 순식간에 더 떨어져 갔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제가 디디고 있는 이 대지가 마치 스케이팅을 타는 것처럼 미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이 대지는 제가 정박할 단단한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시간이 가도 희석되지 않았습니다.
해소 불가능한 그리움이 쌓여간다는 것에 대한 당혹감, 죽음 이후를 알 수는 없지만 죽어서도 아버지를 만날 가능성이 적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가슴에 한이 쌓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사후에라도 뵐 수 있으려면 비슷한 삶이어야 할 텐데, 농사일을 하신 아버지는 등이 굽고 손이 닳도록 노동을 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성정상 유명을 달리하신 분으로서 저 세상에서 이 세상을 기웃거릴 것 같지가 않아서 아버지를 어떤 방식으로 뵐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도 아픔이었습니다.
● 주려는 아버진 24만원, 받는 이장은 19만원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84세에 임종하실 때까지 거의 10년 이상을 홀로 사시면서 노년기를 보내셨습니다. 평생 애써 마련하신 농지를 아끼면서 힘닿는 만큼, 서로서로 품앗이를 하면서 해가야 하는 농사일이지만, 농업기계화가 된 덕분에 이웃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럭저럭 꾸려 가셨습니다. 특히 농지를 일구고 논에 모를 심는 것과 같은 힘든 농사일은 트랙터와 같은 기계작업이 필요합니다. 어느 날은 농대 졸업 후 농업에 종사하는 구역 이장님이 아버지를 방문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자네, 지난 농기계 사용료가 24만원이지?”라고 물으셨습니다. 이장님은 “아닙니다, 어르신, 19만원입니다.” 아버지는 거듭 24만원을 주려하고 이장님은 19만원을 받으려 하였습니다. 비용을 주는 사람은 더 주려하고 받는 사람은 적게 받으려고 애를 쓰는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습니다.
● 농총 고령인구 위한 사회적 지원 절실
이 일을 회상하면서 저는 농촌의 고령인구를 위한 사회적 지원이 절실함을 다시금 실감합니다. 도시에서는 실업자를 위한 자금지원이나 공공근로 형식의 고용형태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농촌의 고령인구의 경제활동지원을 위한 어떤 적절한 사회적 조치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농업이 기계화되는 추세에 맞춰 마을 단위의 기계지원과 기계를 다루는 인력 등을 공적으로 지원하도록 제도화하는 것은 어르신들의 경제활동을 지원하고 장려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 “어차피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다 똑같다”
농사일이 없을 때면 아버지는 동네 노인정에서 동네 분들과 시간을 보내시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정부에서 난방비와 약간의 지원금을 보조했으므로, 이를 쓴다는 명분으로 동네의 젊은 분들이 식사를 준비하여 함께 나누시곤 하였습니다. 또한 버스를 타고 시장에 있는 노인정에 나가셔서, 친구 분들을 만나 점심을 드시고 가끔씩 다방에 가서 쌍화차를 드신 후 늦지 않게 귀가하시는 일과를 종종 보내셨습니다.
그 즈음 아버지를 찾아뵈면, 식사 후 거실에서 따뜻한 맥심 커피를 마시면서, 다정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하셨습니다. 언젠가는 함께 하시던 친구들이 한 분 두 분 돌아가셔서 몇 분 남지 않았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약간은 자랑스럽게 80세를 넘겨 사는 것은 드문 일이며, 옛날에는 60을 넘겨 살기도 어려웠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멀리 창문 밖에 펼쳐진 마을 앞산을 바라보시면서 “이제는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다 똑같다”고 하셨습니다.
● 아버지도 노년기엔 요양원 신세 지게 돼
생로병사라는 삶의 순환과정이 있듯이, 노년기에는 특히 누구나 요양원이나 병원 신세를 지게 됩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아버지도 병원에 입원하신 적도 있고 응급실로 가신 적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당신의 건강이나 병 그리고 현대 의료나 병원 등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셨는지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다만 요양원에 대해서 하신 말씀은 있습니다.
지역에 빈 집이 생기면서 그것을 개량하여 요양원을 짓는 일이 벌어졌고, 구역 사람들은 그것을 반대하여 소송을 걸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버지의 의견을 여쭈니 “요양원을 짓는 것이 어떻다고 그러냐. 그럼 이 다음에 우리 같은 사람은 다 어디로 가라고 반대를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구역에 요양원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동네 분들이 노쇠해지거나 병약해지시면 입소하게 되었고, 아버지도 친구 문병하러 들러보시고 오시더니 “음식도 잘 나오고 요양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어서 좋은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차후에 더 노쇠해지면 당신도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것도 괜찮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상기해 볼 때, 요양원과 같은 사회적 시설은 사회로부터 격리될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함께 자리하고 누구에게나 오픈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요양시설의 노인 폭행이나 학대와 같은 문제가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 통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병원에 있는 것도, 집에 있는 것도 다 좋다”
대체로 아버지는 몸이 편찮으신 경우 병원을 가기보다는 그냥 홀로 겪으신 적도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자연치유를 믿어서라기보다는 병원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과 더불어 그저 병고가 지나가길 기다리면서 감내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 싶습니다. 한번은 대학의 병원에 입원하신 적도 있습니다. 출근하면서 입원실로 찾아뵙고 좀 어떠신지 여쭤보니, “병원에 있는 것도 좋고 집에 있는 것도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화투를 꺼내셔서 재수 띠기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 주치의 선생님 등 대여섯 분의 의사선생님들이 회진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가타부타 말없이 재수 띠기를 계속 할 뿐이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의 병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으신 채.
● 임기응변 중환자실 입원에 “당장 이것들 빼”
노년기의 아버지는 또 한 차례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습니다. 일반병실이 없어서 임기응변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중환자실로 면회를 갔더니, 다른 환자분들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와 어지럽게 오가는 의료진들의 바쁜 발걸음 등으로 말미암아 심란하실 것 같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아버지가 드시는 약을 가져오라고 하였고, 오랫동안 복용해오던 고혈압 약을 보여줬더니, “아버님은 고혈압이 없으셔서 안 드셔도 되는 약입니다.”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농사일로 적당히 활동하시고 약주를 거의 안하시면서 음식을 담백하고 간소하게 드시기 때문에 고혈압이라는 말이 좀 의아하기는 하였습니다. 이틀 후에 문병을 갔더니 아버지는 일반실로 옮겨계셨습니다. 마침 올케 언니가 정갈하고 맛깔스럽게 삼단 도시락을 싸와서 아버지께 드시라고 권하고 있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긴 영문을 물으니, 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의료진에게 “뭣들 하는 건가, 당장 이것들 빼라”고 무섭게 화를 내셔서 일반실로 옮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고모. 제가 시집와서 20년 넘는 결혼생활 중에 아버님이 그렇게 무섭게 화내시는 거 이번이랑 해서 딱 두 번 뵈었네요. 생전 화내시지 않는데… 또 한 번은 어머니 제사음식 준비하고 있을 때예요. 저 혼자 주방에서 일하고 있고 오빠랑 삼촌이 방에서 바둑 두고 있으니까 ‘얘들이 나와서 거들지 않고 뭐하는 거냐’라면서 엄청 무섭게 혼내셨거든요.”
● “가까운 사람에게 잘하는 것이 중한 것”
병실에서 식사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는 문득 아버지가 연세도 있으시고 건강도 예전 같지 않으시니, ‘티벳사자의 서’의 이야기를 전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까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아버님과 책에 나온 이야기를 나눈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병원에 입원해 계신 분께 죽음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이 좀 꺼려지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 책에는 단 한 번만 듣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열반에 들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책에서 본 건데요. 돌아가시면, 이런저런 무시무시한 소리와 빛들과 험상궂은 형상들이 단계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형상이자 나 자신을 돕기 위해 나타나는 평화의 신이라는 것을 알아채야 한답니다. 알아차림만으로도 누구나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해요.” 조용히 저의 이야기를 듣던 아버지의 표정에 아주 잠깐이나마 약간의 긴장감이 스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 듣고 나더니 즉각적으로 “교회나 절에 다니는 것보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 “아들이건 딸이건 공부잘하는 놈 대학보낸다”
그 때, 저는 마치 죽비로 머리통을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저는 책에서 읽은 내용이라고 변명하듯 중얼거렸습니다. 아버지는 말씀하시진 않으셨지만, 어떤 실망감이 얼굴에 스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의미를 즉각적으로 알 것 같았습니다. 문맹이시지만 아버지는 늘 막내딸인 제게 공부에 힘쓸 것을 독려하셨습니다. 어렸을 때는 “아들이건 딸이건 공부 잘하는 놈은 누구든 대학을 보낸다.”라고 말씀하셔서 대학이 좋은 것이고 그곳에 가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셨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하게 되니, 아버지는 제가 공부를 이어가지 못하게 될까봐 크게 아쉬워하셨습니다. 제가 공부를 계속해 온 데는 아버지의 뜻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그런 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동안 공부한 내용, 책의 이야기를 전해 드리자마자 바로 “사람에게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갈하셨던 것입니다. 책을 읽으신 적이 없으셨기에 공부하는 것에 대해 엄청난 존경심을 가지셨고 책 속에 엄청난 훌륭한 이야기들이 담겨있을 것이라고 짐작하셨던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선친과 거의 마지막으로 나눈 이 대화는 부단히 저를 소환하여 왔습니다.
● 영정사진 속 아버지 눈빛엔 깊은 슬픔 서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제가 아버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눈치도 못 챈 것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영정사진을 모셔두고 49일이 되는 날까지 기도를 올리던 중,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영정사진을 뵐수록 그동안 평안하고 담담하다고 생각해 오던 아버지의 눈빛에 깊은 슬픔이 서려있다는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앞에서만은 모든 자식들이 조심하고 온화하였으며 용돈도 곧잘 챙겨드렸고, 또한 시골 농촌공동체의 오랜 인연 속에서 주변 분들과도 늘 화목하게 살아오셨기 때문에, 전혀 짐작하지 못한 ‘슬픔’이었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욕심 없이 자족하면서 노년의 삶을 살아내셨던 것 같은데, 그 슬픔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거듭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마음에 걸리는 일들을 적어봅니다.
● 애별리고(愛別離苦), 외로우셨을 것
무엇보다도 애별리고(愛別離苦), 외로우셨을 것으로 봅니다. 아버지는 막내딸인 저를 매우 사랑하셨고, 저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연로해지실수록 여러 가지 일들이 닥쳐서 점점 더 전화도 제대로 못 드리고 찾아뵙지도 못하였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자식이 소식을 자주 전하지 못해서 걱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즈음 아버지가 좀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받고 집으로 모셔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집에 가보니 원만하셨고, 오히려 오랜만에 보게 된 이 딸을 딱하게 쳐다보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네가 참으로 불쌍하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사는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똑같다. 아버지가 옛날에 6.25 전쟁에 참전하였을 때, 큰 배에 태워져 남쪽에서 속초인가로 가게 되었다. 군인들을 먼저 태우고 사람들을 태웠는데, 난리를 치면서 바글바글 탔단다. 간신히 배에 타고 가는 중에도 풍랑을 만나 모두들 배 멀미를 하면서 여기저기 나자빠지고 쓰러져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웠다. 원래 하루면 갈 것을 풍랑을 만나 며칠씩 더 걸리면서 간신히 도착하여 살아난 것이다. 그때 ‘멀리서 보면 바다가 평탄한데 막상 바다 속으로 들어오니 이렇게 파도가 치고 풍랑이 이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이제 보니 사람 사는 모습도 바다랑 아주 똑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탄하게 사는 것 같아도 속을 들여다보면 다들 풍랑을 겪으면서 사는 것이다.” 라고 걱정하시면서 위로의 말을 건네셨습니다.
● 외식 나가면 늘 짜장면만 드셨던 아버지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면 애별리고의 고통을 겪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장한 자식의 삶의 반경은 부모님의 삶의 반경과 매우 다릅니다. 아버지의 경우, 자식들 집을 방문하셔도 늘 가축을 챙겨야 한다는 이유로 서둘러 귀가하셨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당신의 삶의 반경 안에서 자연스럽게 좀 더 즐겁게 사실 수 있는 생활여건이 되셨다면 조금은 덜 슬프지 않으셨을까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경우 식사는 담백하고 검소하셨습니다. 대체로 보리밥이나 칼국수를 드시곤 하였으며, 외식을 나가면 늘 짜장면을 선택하셨습니다. 오빠들이 오리백숙과 같은 건강음식을 사오면 매우 부담스러워하셨습니다. 급기야는 “대관절 이런 것을 어떻게 다 먹으라고 사오느냐”라고 나무라셨습니다. 반면 아버지가 자주 방문하시던 노인정에서의 식사에 대해 여쭈자 “노인정에서 화투치고 생기는 개평과 정부에서 보조하는 지원금을 모아서 점심밥을 짓는 아주머니를 고용하고 있단다. 아주머니가 먹던 음식을 다시 내오는 일이 없어 깨끗하고 손맛도 좋아서 다들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작은 공동체에 실질적 지원 이뤄져야
조금 넓게 생각해보면, 이런 문제는 아버지만의 문제가 아니고 노년기를 맞이하신 분들의 공통적인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혹자는 “노인정과 같은 곳에까지 사회적 지원을 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년기의 삶이 우울하고 가난하고 그래서 병이 들어 병원이나 요양원에 입소하게 되면 건강보험 등을 통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공적으로 지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역의 노인정과 같은 작은 공동체를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잠재적으로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는 한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 노인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치유제가 된다
공동체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노년기의 삶이 안정되면 그 안에서 함께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과 생활이 안정되어 그 파급효과가 매우 클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로부터 우리 사회에는 정로(定老)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현명한 노인을 스승으로 모셔 교화를 펴고 전하며 덕을 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실한 노인을 어르신으로 모셔 교화를 정성스럽게 지켜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치열한 경쟁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서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여유와 적절한 휴식을 누리는 노인의 모습은 그 자체로 요즘과 같은 피로사회의 스트레스를 줄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표도 없고 출구도 없는 경쟁적인 삶의 사이클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자기를 추구함이 없이 존재 그 자체로 존재하는 노인들의 존재모습은 그 자체로 치유제가 될 수 있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