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04

希修 [우정]

(7) 希修 | Facebook

希修  < 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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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보아 온 우정에 대한 모든 해석들 중 가장 와닿는 글이다. 지난 2년 간 때때로 떠올리며 곱씹을수록 더욱 와닿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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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간은 지속적인 친분 관계에서는 주는 것과 받는 것 사이의 '계산'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는 힘들기에, 3년이든 30년이든 억눌러 놓았다가도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 대차대조표가 갑자기 화산처럼 폭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대의 하소연을 내가 9번 들어 주었어도 상대가 내게 준 단 1장의 땡큐 카드/편지가 more than enough 할 수도 있는 것처럼 정서적 효과라는 것은 뭔가 객관적인 잣대로 측정할 수 있는 게 애초부터 아닌지라, 이런 애매모호한 교환이 무수히 이루어지고 그 와중에 서로의 작은 실수들과 그로 인한 섭섭함이나 미안함 같은 것들까지 추가되어 깔끔한 계산이나 설명이 불가능해지면 우린 그 해묵은 우정에 비로소 '끈끈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인다. 연애감정도 결국 이 결실을 맺기까지 서로를 참아 내게 하기 위해 의미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며, 부모-자식 같은 가족 관계도 이 결실을 맺지 못 하면 단순 의무로 전락할 수도 있다. 원망이나 원한이 될 정도의 애증은 건강한 감정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말로든 행동으로든 '가해자'의 사과 표현이 오랜 세월 반복되면 '피해자'의 마음을 녹이는 날이 올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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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와서 보낸 23년동안 남편과 시댁식구들이라는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들을 '친구'라고 부르는 일에 아무런 불편함이나 어색함이나 오글거림이 없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를 시댁에 다녀올 때마다 매번 느낀다. 나의 많은 단점들을 봐 주고 있는 다른 친구들도 덩달아 한 번씩 떠올려 보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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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진실한 소수면 족하다고 법정 스님은 말씀하셨고 이 얘기에 공감은 하지만, 100살이 된들 우리의 '사람보는 눈'이 이런 판단을 할 수 있을 만큼 정확하지도 안정적이지도 아마 못 하리라는 점이 문제다. 그러니 (i) 프로야구의 4번 타자도 타율은 3할대에 불과하고, (ii) 내가 준 것보다 받은 게 더 많았던 무수한 관계들은 편리하게도 나의 뇌가 오래 전 망각했으며, 또 (iii) 정우열 정신과 의사가 말하듯 대부분의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알고 보면 별로라는 이 세 가지 사실을 기억하면서 세월에게 판단을 맡길 뿐. 어차피 정산(精算)은 업이 하는 것이라 믿을 수 있다면 마음도 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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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E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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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은 투명성의 관계가 아니다. 우리는 이따금 낯선 장소에서 조우한 낯선 이와 가장 깊은 속내를 공유하지만, 그것을 우정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런 공유의 표상은 예전에는 이국으로의 여행이었는데, 근래는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면 그만이다. 이런저런 커뮤니티의 숱한 익명들에게 우리는 욕망을 쉽게 고백하고 드러낸다. 여행에서든 온라인에서든 그런 투명한 고백이 가능한 이유는, 아무런 위험부담이 예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잃을 것이 없다. 물론 속내를 터놓는 것, 그것은 그것대로 우정에 필요한 단계이겠다. 하지만 그렇게 내밀한 마음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행위 자체가 우정의 전부라고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그렇게 투명하게 까발려진 속내들은 서로 얽혀 차라리 복잡성과 모호함을, 시차성이 기입되어 있기에 근본적으로 불투명한 인식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불투명성이야말로 “그럼 너는 XXX야”라는 한 마디로 인간을 정리해 버리는 확고하고 투명한 편견들에 맞선다. 우정 어린 변호란 단적인 싸잡기, 즉 환원에 저항하는 마음가짐이다. “걔는 이러이러하잖아?” -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 - “그럼 저러해?” - “아니, 또 그건 아니지만 …” - “잘 안다며?” - “그러게 …” 

『어린 왕자』의 여우는 우정이란 시간을 들여 서로의 역사를 함께한 끝에 속내를 알게 되는 관계라는 걸, 혹은 속내를 완전히 알지 못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관계 — 여우와의 대화에서 중요한 요소는 침묵=기다림이다 — 라는 걸 보여준다. 

우정은 일방성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인내하면서 교섭하고 타협하는 관계이고 어느 정도는 역할을 교대하는 관계다. 엄석대와 학우들의 관계를 우정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은 단지 폭력과 억압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폭력과 억압의 일방성 때문이다. 때로는 내가 너의 빵을 사오고, 또 때로는 네가 나의 요구르트를 사오는 관계는 일진과 빵셔틀 사이의 일방적 착취 관계와 구별되어야 하며, 이런 모호한 교대로 인해 우정의 근원적 불투명성이 구성된다. 

거기에는 ‘서로 주고 받은 것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이 존재하며, 이 불가능성이 우정의 윤리를 구축한다. 네가 a와 c를 줬으니 나는 à와 ç로 갚을게, 이런 건 신사적이고 아름답지만 우정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서로 약간씩 더 베풀고 덜 받고,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대충 어림짐작으로 손익균형을 잡는 것이지, 하나하나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계산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도 아니다. 반대 급부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계산의 완전한 방기는 자비의 윤리이지 우정의 윤리는 아닐 것이다. 형용모순을 감수하자면 우정의 경우에는 ‘계산 없는 계산’이 이뤄진다. 즉 하나하나 헤아리지는 않지만(“계산 없는”), 완전한 불공평은 참기 어렵다는(“계산”) 모순. 바로 그래서 우정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서로 오래 관계를 지속해야만 그런 계산 없는 계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둘보다 셋이 우정을 유지하는 데 더 용이하다면 三者 관계가 二者 관계보다 정확한 계산이 어렵기 때문일 터이다. 누가 누구와 무엇을 주고 받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그런 물타기가 세 명 이상의 사이에서 작동하며 그것을 통해 우정의 공동체가 유지된다. 

반대로 연인의 사랑 같은 二者 관계에서는 물타기가, ‘애매모호한 끈끈함’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 게다가 사랑이 끝나는 순간에 심정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얼마나 꼼꼼하게 대차대조표가 작성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내가 너에게 이렇게나 잘해 줬는데!” 우정은 그런 대차대조표의 작성을 방해함으로써, 이익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손해를 보는 것 같기도 한 그런 느낌의 교차를 통해서, 그래서 종국에는 이익인지 손해인지 더 이상 헤아리지 않게끔 만듦으로써 구성원을 묶어둔다. 우정이 사랑의 단순한 아종으로 취급될 수 없다면, 오히려 우정에서 출발해서 사랑을 사유해야 한다면 이런 사정 때문이다. 애정의 변화 단계에 따른 호르몬 분비에 대한 연구들이 증언하듯, 우정이 된 사랑은, 곧이라도 죽을 것 같은 사모와 헌신의 사랑보다 더 오래 지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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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Sungsoo Hong
끈끈한 희수!
Reply3 dEdited
Sungsoo Hong
希修 ㅋㅋㅋㅋ 이 생에서는 끈끈하게 지내다 언젠가 끈끈이에서 놓여 해탈하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