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길의 불자라면 이렇게] 5. ‘산은 산, 물은 물’ 생태적 고찰
기자명유정길 불교환경연대 녹색불교연구소장
입력 2022.05.23
물도 산도 혼자 이뤄지지 않는다
성철 스님 종정 취임 법어 중
‘산은산, 물은물’ 대중들 주목
생태적으로 고찰·사유 가능
성철 스님의 어록
현대 선지식 중 한 명인 성철(性澈) 스님이 1981년 1월 20일 조계종 제7대 종정에 추대되면서 내린 종정 취임법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山是山 水是水)”는 당시 사회적으로 대단한 주목을 끌었다. 범상치 않은 심오한 뜻이 담긴 이 선적(禪的) 언어는 8년 동안 장좌불와하며 참선하고, 3000배를 해야만 친견할 수 있다는 신비감이 더해져 큰 관심과 반향을 일으켰다.
스님을 만나려고 3000배하는 것을 ‘굴신운동’이라고 비판한 법정 스님은 이후 성철 스님을 만나 대담을 통해 “절에 와서 부처님은 안 찾고 나만 찾길래 3000배를 하랬다. 실제로 3000배를 하고 날 만나러 온 사람들이 심성이 편해진다더라.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3천배를 하겠느냐”라는 말을 듣고 깊은 감탄을 하며 오해를 풀었다고 한다. 사실 필자도 1980년 중반 우연히 해인사에서 3천배를 하고 친견한 스님과의 인연을 통해 시작된 불교공부로 내 삶이 완전히 바뀌었으니 3천배는 확실히 큰 공덕이 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산은 산, 물은 물”의 출처에 대해서는 많은 설의 연원이 있다.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야보(冶父) 스님의 시구에서, 8세기 중엽 당나라의 청원유신(靑源惟信)선사가 남긴 〈청원유신선사어록〉에도, 고려 말 경한(景閑) 스님의 〈백운화상어록〉에도 , 고려 진각국사 혜신 스님이나 중국의 운문 선사의 어록에도 나오는 유명한 법어이다.
필자는 이 선적언어의 본래 의미를 규명하고 싶은 의도는 없다. 단지 이 뜻을 주관적이고 나름 생태적 관점에서 한번 해석을 시도해 보고 싶었다. 행여 본래의 뜻을 왜곡했다든가 잘못 이해했다든가 하는 시비는 말아주길 바란다. 시인의 손을 떠난 시(詩)는 어떻게 해석하든 읽는 사람의 것이 되듯이 말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마음이 청정하면 세상도 청정해진다는 ‘심청정 국토청정(心淸淨 國土淸淨)’의 말씀을 반대로 해석하면 마음이 오염되면 자연과 생명도 오염된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환경·생명위기는 결국 인간정신의 오염이 자연에 투영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돈)이 주인인 사회이다. 오로지 돈벌이가 최고이며 무엇보다 우선한다. 돈을 많이 벌고 빨리 성장하는 것은 개인이든 국가이든 지고지순의 최고의 목적이다. 돈 되는 일은 뭐든 한다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이다. 그러나 돈이 되지 않는 일은 다 쓸데없는 일이 된다. 돈을 벌기위해 식탁에 올라오는 곡식이나 농산물에도 비료, 농약, 제초제를 뿌리고, 채소와 과일을 더욱 싱싱하게 보이기 위해 착색제, 발색제와 방사능조사를 하고 GMO 유전자 조작을 하며 각종 MSG 첨가물과 유해화학물질을 뿌리며 곡식과 식품을 생산하여 판매한다.
도로와 다리, 터널을 많이 뚫어야 돈을 많이 벌수 있는 토건업자는 끊임없이 건설과 개발의 논리를 만들도록 정치인과 학자, 언론인들을 지원한다. 토건이나 건설업자들에게 아름다운 산과 계곡은 그냥 아름다움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그곳을 개발해 리조트와 케이블카, 관광시설을 지어 돈을 벌까를 궁리할 수 있어야 한다.
강을 보면 그 고유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보존하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수변개발을 할지, 4대강 토목건설을 통해 어떻게 개발 이익을 얻을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특히 아름답고 보존할 가치가 있는 곳은 대부분 개발이 금지되어 있지만 개발업자들의 눈에는 어떻게든 국립공원, 그린벨트 등의 제한을 풀어 개발허가를 얻을 방법을 모색한다. 그런 정치인을 지원하고, 개발을 부추기는 언론에 광고도 주고, 논리를 만드는 학자들의 연구비도 지원하면서 남보다 먼저 독점적 개발이익을 얻을 궁리를 하게 된다.
그들에겐 산은 그냥 산으로 보이지 않는다. 물을 그대로의 물로 보이지 않는다. 산과 강은 돈벌이를 위한 대상으로 보일 뿐이다. 집과 주택을 사람이 사는 곳으로 보지 않고 돈벌이의 대상, 투기의 대상으로 본다. 모든 것이 돈이고 상품이다. 사람을 한 인격체로서 보지 않고 인신을 매매하여 돈벌 생각을 하거나 그 사람을 이용해 이익을 볼 궁리한다. 산업재해가 발생하는 위험하고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할 생각하지 않고 저렴한 임금으로 다치거나 죽어도 상관하지 않고 돈을 벌려고 하는 것도 결국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돈버는 도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산을 산으로 봐야 하고, 강을 강으로 봐야하고, 사람을 사람으로 봐야하는데 오늘의 사회는 산을 산으로 보지 않고,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물은 물이 아니다
발우공양을 할 때 나는, 어시발우에 밥을 덜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식사의 보조를 맞추기 위해 밥을 적게 푼다. 〈소심경〉을 외면서 하발게·전발게·회발게·십념·봉반게·오반게·생반게까지 하고 나면 빈속에 배가 고프다. 그러나 아직 게송이 끝나지 않았다. 정식게와 삼시게까지 마쳐야 먹을수 있기 때문이다. 배가 고파 허겁지겁 수저를 들고 밥을 먹기 직전 외우는 〈정식게〉의 내용은 “오관일적수 팔만사천충 약불염차주 여식중생육(吾觀一滴水八萬四千蟲 若不念此呪 如食衆生肉)”이다. “물 한방울을 살펴봐도 팔만사천마리의 벌레들이 살고 있네, 내가 이 주문을 외지 않고 먹는다면 얼마나 많은 중생을 먹게 되는 것인가”란 뜻이다.
물에 물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밥과 물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박테리아, 미생물, 세균 등의 생명까지 헤아리고 살피는 〈정식게〉의 경지, 이들 생명인 공양물을 어쩔 수 없이 먹지만 맛에 탐닉해서 먹는 게 아니라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약으로 먹으며, 악을 끊고 선을 행하여 부처를 이루겠다는 이 발원의 가르침은 불교를 처음 알게 된 당시 나에겐 정말 충격적인 감동이었다.
먹고 마시는 물이 화학기호인 순수한 H2O만 되어 있을까? 과연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순수한 물이 존재할 수 있을까? 정답은 “없다”이다. 그러한 물은 실험실에서 만든 물일 뿐이다. 자연계 물에는 수많은 박테리아와 미네랄, 세균과 각종 화학물질도 포함돼 있다. 산속에 아무리 깨끗한 물이라고 할지라도 수많은 미네랄, 프랑크톤과 조류와 미생물들이 살고 있다. 그러면 그것은 더러운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것이 좋은 물맛을 결정하고 몸에도 좋은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산속 계곡이나 냇물, 강물에는 당연히도 물만 있는 게 아니라 물고기와 물벌레, 물풀 등이 함께 살고 있는 생태계이다. 내가 보는 계곡물, 냇물과 강물, 바닷물 모두 물이 아닌 것들과 함께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물은 물이 아닌 것이다.
산은 산이 아니다
또 산에는 흙과 바위만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나무들로 이루어져있다. 또한 수십, 수억 마리의 풀벌레들도 살고 있으며 헤아릴 수 없는 짐승들과 새들이 살고 있는 터전이다. 산은 그냥 흙들의 집합이나 바위덩어리가 아니다. 산의 계곡에는 끊임없이 물의 흐른다. 그 물은 어디서 흘러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비가 오면 산 자체가 스펀지처럼 물을 머금고 있다가 조금씩 계속 물을 흘러 내려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산은 거대한 저수지인 것이다. 그래서 산에 나무가 많으면 흙을 붙잡고 있는 나무의 뿌리들이 비를 머금고 있어 산사태를 막고 홍수를 막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산에는 흙과 바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많은 물이 들어있는 것이다. 산이 곧 물인 것이다. 또한 물의 시원은 항상 산이다. 그래서 물은 산인 것이다.
이처럼 산은 물로 돼 있고, 물 또한 산과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산은 산이 아닌 것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한 물은 물이 아닌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산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 산은 흙과 바위와 물, 벌레와 짐승에 의해 구성된 존재이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산은 산이 아닌 수많은 것들의 연기적 결과인 것이며, 물도 물이 아닌 것들의 연관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산을 산으로 보지 않고 개발하고 파헤쳐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위한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다. 온갖 위락시설과 리조트, 케이블카, 양수발전소, 스키장, 골프장 등을 만들어 등산하고 놀러가고 이용할 곳으로만 생각을 했다. 산을 그대로 산으로 보존하려 하지 않고 물을 있는 그대로 물로 지키려고 하지 않고 그저 돈벌이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은 산이 아니며 물이 아닌 이치를 깨닫고 다시 바라본 산과 물은, 역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할수 있다.
산은 산이 아닌 것들의 연기적 관계 속에 만들어진 존재이며, 물도 물이 아닌 것들로 만들어 진 존재이다. 따지고 보면 어느 존재 하나 그렇지 않은 것이 있던가? 나라는 존재 또한 나 아닌 것으로 구성돼 있으며, 나라고 할 것이 없는 존재이다. 내 이름은 내 고유의 이름이 아니라 주변사람들에게 불리기 위해 방편적으로 만들어진 명칭일 뿐이다. 의자는 그저 ‘의자’라고 명칭을 붙였을 뿐 그것을 ‘체어(Chair)’라고 부르거나 ‘이수(いす)’라고 부르기로 약속하면 ‘체어’나 ‘이수’가 되는 것이다.
명칭은 그저 겉모습의 이름일 뿐 본질은 아닌 것이다. 본질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관계없이 거기 그렇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산은 산이 아닌 것으로 이뤄져있지만, 산이라고 명칭한 것이다. 이것을 바다라고 부른다고 해도 실제는 변함없다. 그러나 우리는 명칭은 방편인데도 그것이 실체인양 내둘린다. 산이라는 고정된 이미지, 바다라는 고정된 이미지에 갇히며 스스로 부자유스러워 진다.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담배 파이프 그림제목이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인 것처럼, 언어는 사물의 명칭을 갖게 하고 개념을 만들어주지만 언어에 얽매이면 방편임에도 마치 그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실제를 인식했다고 하면 명칭은 어떻게 불려도 상관없는 일이 될 텐데 말이다. 그래서 산의 실체는 산이 아닌 것들로 존재하지만 그냥 이름을 붙여 ‘산’이라고 붙여도, 물을 그냥 ‘물’이라고 이름을 붙여도 상관없지 않는가? 우리는 언어와 방편에 속고 끄달려 진실의 실제를 혼돈하여 담마를 보지 못하고 어리석게 되는 것 아닐까. 산과 물에 대한 어설픈 작은 생각이다.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녹색불교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