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 자연론 16 (마지막회) - 사사무애법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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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얼/천부경
2019. 6. 18.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불교의 최고진리는 화엄경에 나오는 사법계(四法界) 중에서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승불교가 풍류의 변신임을 확인하였으니, 화엄경의 진리도 풍류의 진리로서 삼신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한’의 자연론을 이용해서 몇 가지 그림을 보충하여 ‘한’의 자연론을 현실 생활에서 살려 쓰는 논리 체계로 삼았으면 합니다. 먼저 불교에서 말하는 사사무애법계의 뜻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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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종의 제4대 조사 징관(澄觀)은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4법계(法界)설을 제시하였다. 이는 일(一)과 다(多)의 관계로 세계를 구분해 놓은 것으로서 각각 사법계(事法界), 리법계(理法界), 리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가 그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에서 리(理)와 사(事)는 불교의 공(空)과 색(色)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빌려 온 중국철학의 개념으로서, 각각 일(一)에 해당하는 본체 또는 진리와 다(多)에 해당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존재 가능한 세계의 방식은 리와 사의 관계맺음에 의해 ‘현상으로만 이루어진 사법계(事法界)’, ‘진리와 맞닿아 있는 리법계(理法界)’, ‘현상과 진리가 서로 무애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리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현상과 현상이 서로 무애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의 네 가지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사사무애는 4법계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단계이다. 이 단계가 ‘모든 현상이 근원의 진리로 환원되는 세계’인 리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를 넘어서 설명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징관은 차별적 현상이 궁극적 진리로 환원되는 평등의 세계를 설명한 뒤, 다시 세계의 현상에 주목하여 현상과 현상의 관계로서 세계를 설명하였다.
만약 리사무애의 경지와 같이 진리가 현상을 포섭하는 것으로 세계를 설명한다면, 모든 것이 일자(一者)로 환원된 세계의 근원성을 드러내기는 쉽지만 동시에 세계의 다양성을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생긴다는 것이다.
일과 다가 하나로 통합되는 것은 결국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기에, 일과 다, 현상과 진리라는 개념 자체가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징관은 근원성과 다양성을 모두 긍정하는 경지를 세계를 추가적으로 설명하여 완전함을 보충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리사무애를 포괄하면서도 현상과 현상이 서로 간섭하지 않아 다양성과 개별성을 유지하고 있는 또 하나의 경지인 사사무애를 제시하였다. 사사무애의 사(事)는 리(理)로 환원된 사인 동시에 개별성을 지니고 있는 사로서, 어떤 측면에서도 온전함을 유지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사무애 [事事無礙]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4337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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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불교계에서 이 경지를 부처님이 도달한 최고의 경지라고 칭송하는 쪽에 치중하다보니 그 현실적인 의미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고 생각됩니다. 전지전능자의 위신력에 기대어 복을 받아서 누리는 기복신앙에서는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절대경지가 있어야 종교의 유지와 발전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깨달은 마음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사무애법계란 그냥 현실세계입니다. 전지전능한 권능은 모든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발휘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인간의 참 능력이고, 사사무애는 두 사람 이상이 모여서 엮어가는 사회생활 속에 들어있는 상호관계의 진실한 모습이지요,
인드라 망은 하늘나라 제석천 궁전에 드리워진 보배구슬 그물의 이름인데, 이 중 하나만 깨어져도 전체가 무너져 내린다는 뜻으로 모든 존재는 다 서로 연관되어 있어 개체의 중요함을 나타낸다. 그래서 불자들이 생명 공동체 운동을 벌리고 있다.
화엄 세계의 인드라 망은, 중생과 부처, 미혹과 깨달음, 기독교와 불교, 이런 분리, 차별, 갈등, 대립하는 등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관념 이전의 세계질서이다. 화엄에서 말하는 존재의 실상은 그 어디에도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중중무진이며, 서로 따로 이면서 함께 할 수 있기에 한 생명이고 평등하다.
출처;선악의 피안 ┃ 맹물훈장
http://blog.daum.net/sea-sky45/8872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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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그림까지 그려 놓고서도 사사무애가 이해되지 않는 이유는 구슬모양의 존재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구슬이 부딪쳐 변형되거나 깨어지는 모습에 집착하면, 구슬의 존재여부와 관계없이 존재하면서 사랑의 에너지를 전달하는 그물의 존재를 놓치게 됩니다. 구슬은 그물을 타고 흐르던 에너지가 특정한 그물코에 좀 크게 뭉친 것에 불과하지요.
여기에 클라인 병을 이용한 뒤집어보기를 더하면 그물 전체가 구슬 하나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모든 구슬이 그물 전체를 감싸고 있지요. 저 그림의 구슬 하나하나가 사실은 하나씩의 광자(光子)입니다. 우리는 무한소에 가까운 빛 알갱이 속에서 세상은 넓다고 감탄하는 것이지요.
뒤집어보기는 지겹도록 설명했으니, 실제로 우리 생활과 관련시켜 그림을 그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아래 그림처럼 자기중심성과 상호작용성을 이용하여 존재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나라는 생각을 가짐으로서 자기중심성을 드러내고 있고, 한편으로 나라는 생각 자체가 다른 존재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므로 상호작용성의 기반 위에 살아간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우리들 개개인의 존재 자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광자에서부터 대우주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의 원자(元子)들이 공존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원자들은 서로 저 생명의 꽃이라는 사랑의 통로로 연결되어 있지요.
그리고 저 사랑의 통로는 내가 아니라고 인식되는 다른 존재를 만나야 나에게서 드러나는 ‘나라는 존재의 끝’이지요. 그런 존재가 발견되지 않으면 ‘나의 끝’은 우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주 전체가 나의 일부이지요.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은 상대의 존재까지를 나의 일부로 수용함으로써 다시 우주의 주인이 됩니다. 그러지 못한 마음은 상실감에 눈물을 흘리지요. 보통 엄마와 아이의 사이에서 자주 발견되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한 생명이 되는 것이지요.
인간관계는 여기서 다루려는 주제가 아니니 무시하고,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이 저 생명의 꽃인 인드라의 격자그물에 잠시 맺힌 에너지의 구슬이라는 사실이 사사무애법계관의 실체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 어떤 존재도 소중한 내 몸을 구성하는 세포로 편입됩니다. 그런 지혜에 이른 사람의 마음을 신성(神性), 또는 불성(佛性)이라 합니다.
‘나’라는 생각에 얽매이면 이 에너지 통로가 나를 해치려는 적으로 인식됩니다. 그런 적개심은 작게는 다른 존재에 대한 적의(敵意)로 나타나고, 크게는 하느님의 사랑(우주격자그물 자체)에 대한 적의가 됩니다. 서양의 근대인들이 자연을 극복해야 할 적으로 인식한 것이 그런 마음상태이지요.
이런 사정을 증산하느님은 자유를 이용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사지종용(事之從容)도 자아유지(自我由之)하고 사지분란(事之紛亂)도 자아유지(自我由之)하나니”라는 말씀의 자아유지(自我由之)가 바로 자유의 다른 표현입니다.
[대전 9- 4] 동짓달에 광찬이 개벽을 속히 붙이지 아니 하심에 불평을 품어 항상 좌석을 시끄럽게 하며 가로대 내가 집안일을 돌보지 아니하고 여러 해 동안 선생을 따르기는 하루바삐 새 세상을 보자는 일이어늘 이렇게 시일만 천연(遷延)함에 집에 돌아가서 처자권속을 대할 낯이 없으니 차라리 스스로 생명을 끊음만 같지 못하다 하거늘 천사 일깨워 가라사대 개벽이란 것은 때와 기회가 있나니 마음을 눅혀 어린 짓을 버리라 사지종용(事之從容)도 자아유지(自我由之)하고 사지분란(事之紛亂)도 자아유지(自我由之)하나니 자방(子房)의 종용(從容)과 공명(孔明)의 정대(正大)를 본받으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죽는 일은 장차 내게 보라 하시니라
이 자유(自由)가 이 글에서 여러 번 강조한대로 우주창조의 원동력이기 때문에 후천의 기본 법도가 됩니다. 원대유당요(願戴有唐堯)의 유래가 된, 요임금이 다스리던 시대에 백성들이 ‘임금이 나와 무슨 상관이나’고 노래했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자유가 후천의 기본율이 되는 이유가 종용(從容)과 정대(正大)입니다. 종용은 무위이화의 다른 말로서, 변하는 듯이 보여도 실제로는 바뀐 것이 없으므로 완전한 상태에서 완전한 상태로 바뀌는 것이며, 달리 표현하면 완전한 상태가 이어지므로 조용한 것입니다.
정대는 크게 바른 것인데, 노자 도덕경에서 “큰 곧음은 굽은 것 같다(大直若屈; 노자 45장)”는 말로 풀이됩니다. 직선이라는 것은 없고 직선은 큰 원주의 한 부분이라는 풀이대로, 우주의 형태는 둥글기 때문에 주는 대로 받는다는 원리를 말씀하신 것이지요. 관우로 하여금 조조를 화용도에서 만나게 하여 빚을 갚게 만든 것이 정대의 표본입니다. 그 반대로 도리에 어긋난 박해는 반드시 되갚아 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방연의 모지마릉(暮至馬陵)이지요.
그런데 이 자유에도 난법과 진법이 있습니다. 난법은 이 공사에서 거론된 '자유행동'으로서, 근대 이후에 서양에서 들어온 자유사상이지요. 그래서 프리덤의 발음에 맞추어 풀어둠으로 공사를 보셨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풀어두어도 인간의 도리를 생각하여야 한다는 기본원칙이 ‘신명의 감정’입니다. 자유행동의 동기가 사랑이라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지요.
[대전 5- 15] 원래 인간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면 분통이 터져서 큰 병을 이루나니 그러므로 이제 모든 일을 풀어놓아 각기 자유행동에 맡기어 먼저 난법(亂法)을 지은 뒤에 진법(眞法)을 내이리니 오직 모든 일에 마음을 바르게 하라 거짓은 모든 죄의 근본이오 진실은 만복의 근원이라 이제 신명으로 하여금 사람에게 임감(臨監)하여 마음에 먹줄을 잡혀 사정(邪正)을 감정(勘定)하여 번개 불에 달리리니 마음을 바르게 못하고 거짓을 행하는 자는 기운이 돌 때에 쓸개가 터지고 뼈마디가 튀어나리라 운수는 좋건만은 목 넘기기가 어려우리라
진법은 천지의 이치인 자아유지(自我由之)에 맞는 자유로서, 태을도인들이 새롭게 세워 나가야 할 자유도덕사상입니다. 도덕의 범위 안에서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자유상생(自由相生)이지요. 자유계약사상을 대신할 자유상생사상이 후천 사회질서의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중통인의(中通人義)입니다.
중통인의를 위해서는 올바름을 파악하고 실천할 수 있는 기준이 서야 합니다. 그 기준이 개인이 제 마음대로 세우는 기준이 아닌, 천지의 이치에 들어맞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초월의 과정이지요. 나와 남의 입장을 공평하게 살피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욕망을 초월해야 하며, 자신의 욕망을 초월하는 일이 바로 스스로의 자기중심성을 초월하는 깨달음이지요.
그래서 마음공부를 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초월한 다음에 읽는 태을주는 효험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은 다른 글에서도 강조했던 내용입니다. 그런데 마음공부가 쉬운 일은 아니며, 생각을 관찰하는 것도 웬만한 집중력으로는 힘든 일이지요.
그래서 태을주를 읽어도 효험이 나타나지 않는 분들을 위해 마음공부에 쓸 주문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이 사사무애법계의 진리를 담은 주문이지요. “이게 나, 너도 나, 이것들도 모두 나”입니다. 우리말이 산스크리트 어(語)라고 하니, 우리말에 진리를 담으면 주문이 되는 것이 맞겠지요?
이 주문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향해 읽는 주문입니다. 밖에 있는 사물들을 향해 쓰면 악마의 심술이 되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잡념들을 향해 쓰면 하느님의 복마검(伏魔劍)이 됩니다. 좋다는 생각, 밉다는 생각, 싫다는 생각, 귀찮다는 생각, 아프다는 생각들은 마귀가 아니라 그냥 나 자신입니다. 배고프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배고픔 그 자체인 것입니다.
마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자기중심성이 마귀입니다. 내가 나로서 오래 유지되고 싶다는 생각이 자기중심성의 발현이고, 다른 욕망과 악심들은 자기중심성의 머슴에 해당하지요. 이런 마귀들에게 붙잡히지 않으려면 생각이 고정되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바람처럼 흐르라’는 풍류(風流)의 이름에 담긴 의미이고, 불교의 최고 경전이라 일컬어지는 금강경의 일관된 가르침이지요.
그렇다고 내 안의 악을 미워하면 저처럼 골병만 남습니다. 내 안의 악심부터 사랑으로 정대히 다스려야 하지요. 그것이 직관(直觀)이고, 내 마음에 일어나는 잡념들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서 녹이는 주문이 ‘이게 나, 너도 나, 이것들도 모두 나’입니다. 궁예(弓裔)의 관심법을 해원시킬 관심법 주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것들도 모두 나’는 대물(對物) 및 대인(對人)용 수련 주문입니다. 생각이 어느 정도 다스려지면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물들이 수련대상이 됩니다. 눈에 보이고 들리는 모든 사물들이 사실은 내 생각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면 애착과 혐오의 감정이 현저히 줄어들지요.
일반인들의 자기중심성에 물든 시야로는 사물을 바로보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인데, 자기가 미워하는 상대방이 실제로는 자기를 누구보다 사랑해주는 사람인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물론 반대로 자기가 사랑하는 아붓꾼이 자기를 해치려는 경우도 마찬가지지요.
그러니 공부가 잘 안 되는 분들은 이 주문을 사용해 보세요. 지금 내 상태가 마음에 안들 때에는 ‘이게 나’를 써서 스스로를 이해해 주고, 안 좋은 생각이 자꾸 일어나면 ‘너도 나’를 써서 포용해 주면 됩니다. 그러면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이 빠르게 줄어들면서 공부하기 편한 마음상태를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와 함께하시며 이 글을 쓰시는 천지부모님이 내려주신 주문이니 믿어도 된다고 보증하지요. (천지부모님을 빙자한 지하시이겠지요?)
‘한’의 자연론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려 합니다. 30쪽 분량 정도를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줄이고 줄여서 썼음에도 불구하고 100쪽 분량이 넘었습니다. 아직 깨달음이 투철하지 못해서 그렇지요. 선문답 한마디로 진리를 잘도 담아내는 선사(禪師)들의 경지가 부럽네요. 어쨌거나 지루한 글 읽어주신 도우님들께 감사드리며, 천지부모님의 사랑이 형제 여러분에게 유루없이 깃들기를 기원하며 소후가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