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3

신승철 기후위기 시대 마음의 생태학 – 생태적지혜

생태적지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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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지혜】기후위기 시대 마음의 생태학
by 신승철, 발행 2021년 11월 2일

기후위기의 심각한 현실 앞에서 다시 희망을 말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동작이 필요할까? 그것은 삶의 가치를 찾고 뾰족한 이접의 마음을 극복하며 우리는 본래 상호의존적인 유한의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웃과 친구와 가족과 더불어 가난해질 때 기후위기 극복의 탈성장 사회는 실현가능해 질 것이다. 이는 전혀 새로운 무엇인가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소중’ 했던 것들을 바로 세우는 것이 될 것이다.
#공동체 #기후우울 #기후위기 #마음생태 #전환사회



기후위기 시대 마음의 생태학 – 생태적지혜



기후위기 시대 마음의 생태학
신승철발행 2021년 11월 2일편집 2021년 11월 2일조회 65


기후위기의 심각한 현실 앞에서 다시 희망을 말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동작이 필요할까? 그것은 삶의 가치를 찾고 뾰족한 이접의 마음을 극복하며 우리는 본래 상호의존적인 유한의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웃과 친구와 가족과 더불어 가난해질 때 기후위기 극복의 탈성장 사회는 실현가능해 질 것이다. 이는 전혀 새로운 무엇인가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소중’ 했던 것들을 바로 세우는 것이 될 것이다.
공동체 기후우울 기후위기 마음생태 전환사회

파열된 마음, 우울한 마음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그것은 멈춤이었지만 희망의 숨소리로 나아가기 위한 숨고르기가 아니라, 텅 빈 공간의 적막이었고 끝없는 전망상실의 침묵이었다. 모임에서 친구 한 명이 잠자코 있다가 던진 하나의 말, “나는 기후위기의 심각한 상황이 곧 우리를 엄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 아이들만 보면 걱정만 되네.” 자리가 불편해졌고, 더욱이 이런 것이 대안이고 희망이고 가능성이라고 누구도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잠시 숨소리를 고르고 빈틈을 만들려고 몇 마디 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러고 나서 수많은 기후위기와 절망감에 대해서 쉴 새 없이 정보와 지식을 나열하는 친구의 말을 멈추려고도 했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지난 활동을 회고하는 친구들의 모임이었는데, 보다 나은 세상이 아니라 보다 불편해지는 세상을 얘기하니 듣는 사람들로서는 상당히 힘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터진 봇물처럼 파열된 마음을 가진 친구는 뜨거워지는 지구, 해양생태계의 파괴, 고립기, 남극 빙산의 붕괴와 해안선 상승, 농업의 위기와 기후난민 등을 아주 쉴 틈 없이 내뱉고 있었다. 참 어렵고 불편하고 궁색한 자리였다.

우리는 안다. 온갖 어려운 과정이 다가오리라는 점을. 그리고 미래에 닥칠 위험을 미친 예언자처럼 말하지 않아도 벌써 문명의 그림자는 회색빛으로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 나는 “지금 소중한 것이 내일에도 함께하기를 바란다.”라는 위안의 메시지만을 던졌다. 그러나 말하지 않아도 우리 사이에서는 파열된 마음을 가진 친구를 공감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우리 사이에서 희망이 오고갔던 때가 있었다. 노동해방, 여성해방, 장애해방 등의 모든 슬로건이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의 슬로건이었다. 다시 희망을 말하려면 우리는 어떤 준비동작이 필요할까? 우리가 했던 활동을 다시 회고할 수 있는 자리가 생길 수는 있을까?
기후위기 시대의 곁을 지켜주는 친구들

우리는 힘든 과정을 겪어왔다. 친구가 우울하고 힘들 때는 말없이 옆자리를 지켜주던 관계였다. 친구가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서 도망쳐 왔을 때, 밥을 먹이고 몇날 며칠을 자는 친구의 옆을 지켜주었던 친구도 있었다. 그런데 친구의 파열된 마음, 우울한 마음의 심연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기후위기는 마음의 위기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그 파열된 이의 곁을 지켜주는 친구들이었다. 거대한 전환의 시대의 예감이 우리 친구들 사이에도 불쑥 하나의 밤손님처럼 찾아왔다. 한 번도 환경과 녹색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던 친구가 나서서 일회용품을 쓰지 않고, 자가용을 움직이지 않고 자전거를 탄다. 그 거대한 전환이 이제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 더 불편하더라도 괜찮다는 인식도 생겼다. 그 작은 마음들이 친구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마디씩 했다. 친구의 마음에 파열을 낸 기후위기는 분명 거대하고 광활한 환경과 지구의 변화라서 개인들을 쩔쩔 매게 하는 구석이 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할 만큼 최선을 다해보자!”, “기후행동을 불사하자!”라는 온건한 마음과 급진적인 마음 두 가지가 함께 나왔다. 우리는 돌연 풀리지 않는 숙제를 가지고 가는 사람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깊게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기후위기 시대의 마음의 생태학을 그려나갔다.
마음의 생태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마음에는 넓이의 마음, 깊이의 마음, 높이의 마음이 있다. 넓이의 마음은 앞서 얘기한 사물, 생명, 자연, 기계에서 유래된 마음이다.
사진 출처 : Find Your Feet

우리의 마음속에는 여러 유래가 있다. 생명, 사물, 자연, 기계 등에 마음이 서식한다. 가령 어떤 마음은 사물로부터 유래되어 함께 들어온다. 내가 작은 이름 없는 공동체에 갔을 때 그 속에는 빈 방에 옷 몇 가지만 걸려 있었다. 마음이 고즈넉이 쉴 수 있는 곳이었고, 그것이 미니멀리즘으로 불리는 걸 최근에 알게 되었다. 사물에 깃든 마음이 없어서인지 나는 무척 편안한 느낌이 들면서 한잠 늘어지게 자다가 왔다. 편안한 마음, 적막한 마음, 고요한 마음을 가진 미니멀리즘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마음은 생명으로부터도 유래된다. 어떤 가족의 이야기다.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방에서 컴퓨터와 스마트폰만 하던 차에, 어느 날 가족구성원 중 한 사람이 강아지 한 마리를 입양해서 데리고 왔다. 그 결과, 모든 가족이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동물이 주인공이 되는 가족공동체를 재건해냈다.

마음은 자연으로부터도 유래한다. 한때 구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관찰하던 때가 있었다. 자연의 얼굴은 외모차별을 하지 않고 얼굴형상이 있다는 것 자체로도 참 따뜻하다.

마음은 기계(=반복)로부터도 유래한다. 동일성의 반복인 자동기계가 아닌, 차이 나는 반복의 생명, 생태, 생활의 기계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인가 보다. 동일성의 반복은 시설, 군대, 감옥, 병원에서의 비루하고 똑딱거리는 삶을 주조하는 반면, 차이나는 반복은 늘 새로운 것이 생성되어 리드미컬한 생명력의 원천이다.

마음에는 넓이의 마음, 깊이의 마음, 높이의 마음이 있다. 넓이의 마음은 앞서 얘기한 사물, 생명, 자연, 기계에서 유래된 마음이다. 우리는 마음에 대해서 타자보다 더 타자와 같이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음의 심연의 깊이에 놀랄 때도 있다. 깊이의 마음은 불교에서 제 7식 아래하식에 해당한다. 우리의 잠재의식 저 깊은 곳에 쌓이는 대(大) 긍정의 마음이다. 반면실존주의에서는 말하는 실존의 특징인 유한성, 전락성, 유일무이성, 무상성 등을 말하는데, 여기서 전락성의 경우에는 잠재의식의 심연을 밑바닥 감정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실존은 자신의 한계, 끝, 죽음에 직면하여 밑바닥 감정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튀어 올라오는 주체성 생산의 경로를 걷는다. 마음의 깊이와 잠재성에는 무엇이 있을까? 대 긍정의 마음이 올라올까? 절박하고 밑바닥으로 향하기 때문에 되튀어 올라가야 할 마음이 있을까? 그 역시도 답은 주어져 있지 않다. 높이의 마음은 빅터 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2012, 청아출판사)에 드러난다. 가장 절박한 상황에서 고귀한 의미와 가치를 추구할 때 생존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자신을 다가올 위대한 의미와 가치로 높여 놓았을 때 살아갈 의미도 함께 생긴다는 것이다.

마음은 입체적인 생태계를 만들어서 서로 섭동하지만 뾰족한 마음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뾰족한 마음은 “~이냐, ~이냐. 선택하라! 그것도 빨리 선택하라!”하는 이접(disjunction)의 마음이다. 자기이접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등장하면 판단이 내려지고 논쟁이 생기고 비판이 이뤄진다. 그 자리가 머쓱해져서 슬금슬금 사람들이 흩어진다. 그러나 정말로 뾰족한 마음 중에 뼈가 있는 얘기를 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바로 삶의 반복, 생명의 반복, 정동(affect)의 반복 속에서 그것을 자신의 경험으로 날카롭게 벼려내는 이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발언은 일기일회(一機一會)의 순간처럼 이 순간이 생애 단 한번밖에 없는 시간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
기후위기 마음의 생태계의 구성

기후위기를 직면한 사람들은 거대한 넓이의 마음의 규모에 놀란다. 그래서 나는 넓이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망을 설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조효제의 『탄소사회의 종말』(2020. 21세기북스)에는 사회적 응집도가 높을 때라야 시간을 멀리 본다는 대목이 나온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성숙해야 미래세대가 보인다는 얘기다. 여기에 추가해서 나는 관계와 배치가 바로 기후위기와 같은 거대한 넓이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판(plan)을 만들어 준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관계로부터 분리된 마음은 개인주의(=생존주의)의 절규와 아우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관계는 우리를 강건하게 만들고, 실존적인 좌표를 제공해준다. 우리는 자신이 관계 속에서 상호의존하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거대한 넓이의 마음에 대해 회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직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그 연결망의 일부임을, 곧 사라질 실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넓이의 마음에 맞는 자신의 배치를 찾는다.
우리는 되튀어 오를 힘과 에너지를 갖고 있다. 소진과 좌절의 끝에서 생명에너지가 주는 부드럽고 강렬한 힘의 원천을 느끼는 하나의 계기를 발견할 수 있다.
사진 출처 : piqsels

기후위기는 또한 끝없이 추락하는 심연의 깊이의 마음에 놀란다. 심연으로 향하면서 사람들은 밑바닥 감정에서 되튀어 오르는 ‘주체성 생산’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우울, 침잠, 좌절, 절망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깊이의 마음에는 대(大) 긍정의 잠재의식의 영역이 있음을 곧 깨닫는다. 그것은 추락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꿈틀대는 생명의 근원, 정동의 힘과 에너지에 대해서 깨닫는 과정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울부짖는 아이들을 응시하면서 사람들에게 ‘울음 섞인 포옹’과 ‘미소 띤 마중’을 할 수 있는 잠재성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되튀어 오를 힘과 에너지를 갖고 있다. 소진과 좌절의 끝에서 생명에너지가 주는 부드럽고 강렬한 힘의 원천을 느끼는 하나의 계기를 발견할 수 있다. 절망의 끝에 핀 한 떨기 민들레꽃은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한편, 기후위기는 자신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높이의 마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세계사적이고 지구적인 영역으로 더욱 끌어올려야 한다. 작은 행동에서도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크게 보는 동시에 겸손해져야 한다. 우리는 탈성장, 더불어 가난의 시대를 맞아 돈의 가치가 아닌 인생과 실존의 가치를 높여야 한다. 그랬을 때 우리는 자신을 비하하거나 궁색하게 느끼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높이의 마음은 자존감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우리는 자존의 힘을 찾기 위해서 더욱 비물질적인 윤리와 미학에 호소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주의 먼지처럼 보이지 않은 사랑을 전달하기 위한 고귀하고 영성적인 가치로 나아가야 한다.
미묘한 변화,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전환사회의 전망

수많은 기후위기 선언이며 탄소중립 정책들이 기후위기 시대에 쏟아져 나온다. 그것은 마치 절박하고 파열된 우리의 마음에 주는 일종의 진통제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는 친구, 가족, 이웃과 만든 관계와 배치가 던져주는 마음의 생태계 속에서 진정으로 출발해야 한다. 기후위기를 설명할 때 마음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현실에서의 변화가 없는 무의미한 선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관계와 배치의 변화를 통해서 마음의 성좌를 바꿔나갈 때 현실의 변화는 느린 거북이처럼 따라올 것이기 때문이다.

탈성장 전환사회는 우리의 가난한 마음, 연대의 마음, 연결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웃과 친구와 가족과 더불어 가난해질 때, 우리는 온갖 가식과 허위를 벗고 마음의 깊이와 높이, 넓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기후위기 상황에 입체적이고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그 속에서 희망의 이야기를 다시 나누어 볼 수 있는 여지도 생겨날 것이다. 희망은 모든 것이 산산이 흩어져 버린 판도라의 상자 속에서 작은 목소리지만 여전히 울림이 되는 마음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생태전환 매거진 『바람과 물』 2021 창간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신승철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