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4

Namgok Lee 박석 동서철학의 만남, 엇갈린 변주곡들 이라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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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5 h  · 
박 석 교수의 책을 읽다보면 그의 독서량과 천재적 번뜩임, 유려한 문체에 빠져든다.
고금(古今)과 동서(東西) 그리고 종교, 철학, 정치, 예술, 건축을 넘나드는 방대함이 놀랍다.
노자(老子)가 말한 화광동진(和光同塵)과 대교약졸(大巧若拙)의 두 코드로 관통하고 있다.

박 교수는 노자는 화광동진을 이야기했지만, 노자 스스로는 미완에 그쳤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동서양과 고금을 회통하면서 스스로 그 완성에 대한 집념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에게는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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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그 코드가 대단히 우수하고, 나도 대체로 동의하는 바가 많지만, 아무리 우수한 코드라고 해도 그 코드 자체가 진리나 진실에 접근하는데 일정한 한계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코드로 사물을 보고 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인식체계다. 다만 자신이 어떤 코드로 사물과 세계를 인식하고 있다는 그 자체를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은 사물이나 세계 그 자체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인식능력이나 탐구력이 뛰어날수록 이것을 자각하는 것이 어렵기도 하지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항상 ‘나는 틀릴 수 있다’라는 빈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 진리 탐구와 진정한 창조를 위해 필요하다.
 한 사람 안에서 그것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결국은 서로 다른 시대와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진행되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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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철학의 만남, 엇갈린 변주곡들>이라는 장(章)에서 
‘동서문화 교류 초기의 서양인에 비친 중국 철학’에서 마테오 리치, 니콜라스 트리고, 필립 쿠플레, 라 모트 르 바예 등을 소개하고, 
최초로 중국 철학을 비교 연구한 서양 철학자 라이프니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그는 논리학, 형이상학 등은 서양이 중국에 앞선 것이 사실이지만 윤리학 방면에서는 중국이 서양 보다 우위에 있음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는 인류의 보편 정신에 기초하여 동양과 서양의 만남을 추구하였으며 평화적이고 평등한 교류를 통하여 인류의 복지가 증대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후대 현실의 역사에서는 라이프니츠가 희망하였던 아름다운 쌍방 교류는 이어지지 못하고 서양의 침탈로 인한 일방적인 교류가 되고 말았다.’

중국문화와 유가사상을 극찬하였던 볼프와 볼테르를 소개하고, 볼테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가 유교에 깊게 심취했던 것은 유교에서 이신론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며, 공자의 사상에서 발견한 관용 사상으로써 다시 기독교의 맹신주의와 신구교의 갈등으로 고통을 겪던 프랑스 사회를 구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미신적이고 부패한 종교이며 특히 지나친 배타성으로 인해 관용력이 부족한 저급한 종교라고 악평하였다’

반면에 유가사상을 극도로 폄하하였던 헤르더와 헤겔을 소개하면서, 헤르더는 중국은 인종적 지리적 특징에 따라 인류사의 유년기에 영원히 고착된 나라에 불과하한 것으로 보고, 그의 역사철학과 중국관이 그대로 헤겔에게 계승된다고 보고 있다.

‘헤겔은 <역사철학>에서 헤르더와 마찬가지로 인도 중국 페르시아 이집트 등 동양을 세계사의 유아기, 그리스를 청년기, 로마제국을 장년기로 보고 게르만 사회를 역사의 성숙기이자 완성기로 보고 있다. 동양 가운데서도 그리스 문명에 영향을 끼친 페르시아와 이집트를 비교적 높게 평가하고 중국과 인도는 정체에 빠져 있는 유아기라고 폄하하였다.
중국인들에게는 미신이 만연하며 내면의 비자립성과 정신적 부자유 정신의 상실이 보인다‘

박석 교수의 표현이다.

 ‘헤르더와 헤겔의 중국관은 사실 유럽이 세계사의 중심이라는 유아적인 자기중심성과 중국에 대한 지극히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선입관에서 나온 황당한 견해여서 실소를 금할 길이 없지만, 냉정하게 보면 이들의 중국관은 당시의 유럽 문명권과 중국 문명권의 실제적인 힘의 역전을 잘 반영한다. 헤겔이 베를린 대학에서 역사철학 강의를 할 1830년 즈음에는 서양 문명의 우위가 더욱 가시화되었다. 결국 그로부터 약 10여년 뒤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대패하고 그 뒤 서양 열강의 동네북이 되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은 서세동점이 본격화되던 시기로 많은 서양의 사상가들이 헤르더와 헤겔의 중국관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마르크스의 중국관도 헤겔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서구인들의 편향된 중국관은 1차 대전 이후에 크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그들의 과학문명과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참혹한 전쟁을 목도하면서 서구의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반성을 하기 시작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적어본다.

박 교수의 창(窓)을 통해서 역사와 사상의 흐름을 보는 것이 즐겁다.
내 젊은 시절의 짧은 독서량이나 스스로가 빠졌던 코드를 되돌아보게도 되고, 비록 노년이라도 이렇게 접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를 느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