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 지킴이 소임 다하셨으니 ‘은하수의 강’ 기쁘게 건너가소서”
신문23면 1단 기사입력 2021.11.01.
[가신이의 발자취] 평화통일운동가 고 이행우 선생님 영전에
미국 필라델피아 시절 고 이행우 선생의 자택은 국내외 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교류처였다. 1980년대 함석헌(왼쪽) 선생 방문 때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장이던 김순경(오른쪽) 템플대 교수가 거실에서 함께 차를 마시던 모습이다. 아들 이상연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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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6일 은하수를 건너신 이행우 선생님을 기쁘게 환송합니다. 이행우 선생님은 2011년 한겨레 통일문화상을 받으실 때 ‘함석헌은 하나님 발길에 채이어 살았고, 나는 함석헌 발길에 채어서 살았다’고 하시어 함석헌과 같은 운명적 결을 사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태평양은 선생님의 강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의 후유증으로 극심한 가난과 혼란의 시절, 공병우 타자기 하나 덜렁 들고 태평양을 건너가시어 미국에서 컴퓨터 전문 프로그래머로 45년을 살다 연어처럼 고국으로 돌아와 이제는 영원한 은하수의 강을 건너셨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90년 제1차 범민족대회 이후 논란이 된 범민련결성 여부를 협의기 위해 조용술 목사님을 모시고 조성우 동지와 함께 독일 베를린에 갔을 때였습니다. 남쪽의 초청으로 모인 남·북·해외 대표들 중 선생님은 북미주 대표이셨습니다. 실은 그 회담도 선생님께서 퀘이커교 평화단체를 통해 북쪽을 설득한 덕분에 가능했던 자리였습니다. 더 나아가, 진영논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짜여진 틀 속에서 마치 냉전국가 대표회담 마냥 팽팽한 긴장을 반복할 때 선생님은 유연하게 합의를 봉합하는 구실을 해주셨습니다. 그 회합 때문에 제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을 살게 됐을 때도 누구보다 많이 아파해주셨습니다.
미국 퀘이커봉사위원회(AFSC)의 활동가 로베르타 레벤바흐(왼쪽부터)와 조지 오글 목사 부인인 도로시 오글 등이 미국 필라델피아 이행우 선생 자택을 방문했을 때
그뒤 1995년 11월4일엔 제가 선생님 초청을 받아 미주동포전국협회(NAKA) 워싱턴디시 사무실에서 열린 ‘북미주동포회의 제1차 전체회의’에 참석했습니다. 나카는 미국전국교회협의회 의장이신 이승만 목사님과 사업가 조동설 선생님이 설립했고, 이 목사는 경험을 바탕으로 미 주류사회와의 연결, 조 선생님은 재정 지원, 그리고 이행우 선생님은 조직화를 맡았습니다. 저도 건방지게 “우리 힘으로 통일의 시대를 열자”고 힘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카의 ‘윌리암 조 평화센터’는 다양한 포럼과 집회, 문화운동, 정신대 관련 활동 등 꾸준히 워싱턴 지역사회 진보 운동의 마당터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2007년 제가 야스쿠니신사반대공동행동 미주 캠페인을 하러 갔을 때 선생님은 노구를 끌고 뉴욕으로 달려와 마지막까지 맨해튼 거리를 함께 걸어주셨습니다. 그 모습에서 선생님 자신이 미주에 세워진 마당터란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모두 세 차례 미국 방문 때마다 선생님의 필라델피아 자택에서 여정을 풀고 미국 투어를 계획할 수 있었습니다. 한 번은 워싱턴에서 뉴욕으로 가는 눈길을 졸음을 참으며 헤쳐나가던 이야기를 전설처럼 되뇌이며, 사모님 모르게 하자고 둘이서 ‘끼득’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모님과 가족들 피해가 많아 미안하다는 말씀엔 숙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미국에 갈 때마다 직접 차를 몰아 여기저기 안내를 해주셨습니다. 깨진 미국 독립기념 ‘자유의 종’보다도 서재필 박물관을 방문한 것이 감동이었습니다. ‘인디안 박물관’과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서 충격이 컸습니다. 왜 우리는 일제 학살의 상징물 하나 못 만드나? 제 눈에서 비늘이 벗겨나간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뉴욕이나 워싱턴에서 필라델피아 집까지 오가면서 굳이 우회 도로를 돌아서 다니시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1달러의 교통세를 절약하기 위해서라고 하시어 새삼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저 만이 아니라, 1980년대 이래 미국에 간 민주인사들은 모두 선생님의 필라델피아 집을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김재준·함석헌·문익환·문동환을 비롯해 무수한 유명 인사들의 서명이 방명록에 빼곡히 담겼습니다. 특히 북한 대표까지도 유일하게 외부 숙소로 선생님 집에서 묵었다는 사실은 그럴 정도로 자택이 공공의 공간으로서 정치·문화교류의 장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지난해 김원웅 회장이 광복회의 방향 전환을 상징하는 ‘평화통일상’을 제정해, 숨은 인물을 발굴해달라고 해서 선생님을 추천드렸습니다. “뭔 상을 받아”라며 세 번이나 사양하시어, 실랑이 끝에 마지못해 ‘억지상’을 받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시상식 날 환하게 웃으시며 “사람들이 상을 좋아하나봐” 하셨을 때는, 반가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 기분이 좋으신 것 같아 다행이었습니다.
지난달 16일 은하수를 건너신 이행우 선생님을 기쁘게 환송합니다. 이행우 선생님은 2011년 한겨레 통일문화상을 받으실 때 ‘함석헌은 하나님 발길에 채이어 살았고, 나는 함석헌 발길에 채어서 살았다’고 하시어 함석헌과 같은 운명적 결을 사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태평양은 선생님의 강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의 후유증으로 극심한 가난과 혼란의 시절, 공병우 타자기 하나 덜렁 들고 태평양을 건너가시어 미국에서 컴퓨터 전문 프로그래머로 45년을 살다 연어처럼 고국으로 돌아와 이제는 영원한 은하수의 강을 건너셨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90년 제1차 범민족대회 이후 논란이 된 범민련결성 여부를 협의기 위해 조용술 목사님을 모시고 조성우 동지와 함께 독일 베를린에 갔을 때였습니다. 남쪽의 초청으로 모인 남·북·해외 대표들 중 선생님은 북미주 대표이셨습니다. 실은 그 회담도 선생님께서 퀘이커교 평화단체를 통해 북쪽을 설득한 덕분에 가능했던 자리였습니다. 더 나아가, 진영논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짜여진 틀 속에서 마치 냉전국가 대표회담 마냥 팽팽한 긴장을 반복할 때 선생님은 유연하게 합의를 봉합하는 구실을 해주셨습니다. 그 회합 때문에 제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을 살게 됐을 때도 누구보다 많이 아파해주셨습니다.
미국 퀘이커봉사위원회(AFSC)의 활동가 로베르타 레벤바흐(왼쪽부터)와 조지 오글 목사 부인인 도로시 오글 등이 미국 필라델피아 이행우 선생 자택을 방문했을 때
그뒤 1995년 11월4일엔 제가 선생님 초청을 받아 미주동포전국협회(NAKA) 워싱턴디시 사무실에서 열린 ‘북미주동포회의 제1차 전체회의’에 참석했습니다. 나카는 미국전국교회협의회 의장이신 이승만 목사님과 사업가 조동설 선생님이 설립했고, 이 목사는 경험을 바탕으로 미 주류사회와의 연결, 조 선생님은 재정 지원, 그리고 이행우 선생님은 조직화를 맡았습니다. 저도 건방지게 “우리 힘으로 통일의 시대를 열자”고 힘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카의 ‘윌리암 조 평화센터’는 다양한 포럼과 집회, 문화운동, 정신대 관련 활동 등 꾸준히 워싱턴 지역사회 진보 운동의 마당터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2007년 제가 야스쿠니신사반대공동행동 미주 캠페인을 하러 갔을 때 선생님은 노구를 끌고 뉴욕으로 달려와 마지막까지 맨해튼 거리를 함께 걸어주셨습니다. 그 모습에서 선생님 자신이 미주에 세워진 마당터란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모두 세 차례 미국 방문 때마다 선생님의 필라델피아 자택에서 여정을 풀고 미국 투어를 계획할 수 있었습니다. 한 번은 워싱턴에서 뉴욕으로 가는 눈길을 졸음을 참으며 헤쳐나가던 이야기를 전설처럼 되뇌이며, 사모님 모르게 하자고 둘이서 ‘끼득’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모님과 가족들 피해가 많아 미안하다는 말씀엔 숙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미국에 갈 때마다 직접 차를 몰아 여기저기 안내를 해주셨습니다. 깨진 미국 독립기념 ‘자유의 종’보다도 서재필 박물관을 방문한 것이 감동이었습니다. ‘인디안 박물관’과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서 충격이 컸습니다. 왜 우리는 일제 학살의 상징물 하나 못 만드나? 제 눈에서 비늘이 벗겨나간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뉴욕이나 워싱턴에서 필라델피아 집까지 오가면서 굳이 우회 도로를 돌아서 다니시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1달러의 교통세를 절약하기 위해서라고 하시어 새삼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저 만이 아니라, 1980년대 이래 미국에 간 민주인사들은 모두 선생님의 필라델피아 집을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김재준·함석헌·문익환·문동환을 비롯해 무수한 유명 인사들의 서명이 방명록에 빼곡히 담겼습니다. 특히 북한 대표까지도 유일하게 외부 숙소로 선생님 집에서 묵었다는 사실은 그럴 정도로 자택이 공공의 공간으로서 정치·문화교류의 장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지난해 김원웅 회장이 광복회의 방향 전환을 상징하는 ‘평화통일상’을 제정해, 숨은 인물을 발굴해달라고 해서 선생님을 추천드렸습니다. “뭔 상을 받아”라며 세 번이나 사양하시어, 실랑이 끝에 마지못해 ‘억지상’을 받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시상식 날 환하게 웃으시며 “사람들이 상을 좋아하나봐” 하셨을 때는, 반가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 기분이 좋으신 것 같아 다행이었습니다.
지난 2007년 이해학(왼쪽 둘째) 목사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아 미국 순회 캠페인을 했을 때 고 이행우(맨 왼쪽) 선생과 서승(왼쪽 넷째) 리츠메이칸대학 교수 등이 뉴욕 맨해튼 시위에 동참했다. 사진 이해학 목사 제공
선생님은 저에게 바다같은 넓은 세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미국 전역을 돌며 통일 강연이나 좌담회를 열도록 멍석을 깔아주셨습니다. 그때 서부 샌디에고에서 만난 은호기 선생은 “이행우 선생은 미주에 세워진 자랑스런 통일 기둥”이라고 칭송하셨습니다.
유엔(UN)본부 옆 종교빌딩에서 유일하게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퀘이커봉사위원회의 ‘퀴노센터’는 적은 인력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시민활동의 현장이었습니다. ‘퀴노하우스’는 호텔을 얻기 어려운 가난한 나라 대표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그들이 서로 유엔 아젠다를 검토하는 토의장을 만들어 ‘작은 유엔’이라 불리는 공간이었습니다. 퀘이커 운동은 신도는 작은 규모이지만 미국에서 처음 시작한 ‘인간답게 보살피는 정신병원’에서부터 유명 대학과 고등학교를 가장 많이 운영하는 신비로운 힘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손수 아미시 공동체에 저희 부부를 실어다 주신 덕분에 비폭력 무소유 공동체인 브루더호프를 체험하고 종교의 새로운 지평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뒤에도 여러차레 시카코의 공동체와 부루더호프를 들락거렸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긴급조치 1호로 구속됐던 1974년부터 박정희 군사정권 아래 고문·투옥·살해 당하는 양심수 가족들을 돕고자 설립된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를 오랫동안 이끌어 오셨습니다. 부친의 반 박정희 독재 투쟁으로 인연을 맺어 십대 때부터 선생님을 그림자같이 따랐던 나카의 이재수 사무국장은 “반독재 운동가들이 주로 국내 유명 정치인 후원그룹 세력 규합에 급급할 때에도 선생님은 남북통일운동에 전념하셨다”고 증언합니다.
1980년대에는 윤한봉님의 망명을 계기로 광주학살에 분노한 젊은이들이 미국에서 민주·민족 청년운동을 조직하고 활동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1986년 선생님은 순수 동포 민간인의 힘을 모아 워싱턴에 ‘한겨레미주홍보원’(KIRC)을 설립하셨습니다. 그때 선생님과 뜻을 같이한 정기열·최관호·한호석·이재수·서혁교 등의 후학들이 지금은 의연한 생명일꾼으로 세계 곳곳에서 제몫을 다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1989년 ‘범민족대회 북미주 추진본부’를 결성하시고 2001년에는 6·15공동선언실천 미국위원회 결성을 주도하는 등 통일운동 선두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때 유럽 등 국외에서 모임이 있을 때면, 직장 근무를 마치고 금요일 오후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 주말 동안 회의를 주재하시고, 일요일 늦은 저녁 아니면 월요일 새벽 돌아와 곧바로 출근을 하는, 놀라운 정신력을 발휘하셨습니다. 물론 일흔세살로 은퇴할 때까지 직장 휴가도 모두 통일운동과 관련된 활동으로 보냈습니다.
1992년 엘에이(LA) 폭동을 계기로 재미 한인들의 정치력 강화의 필요성을 느낀 선생님은 퀘이커봉사위원회(AFSC)를 발판 삼아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심장부인 미 의회를 대상으로 홍보 활동을 펴고 국제연대를 통해 본격적으로 미 주류사회를 설득하는 로비리스트 활동에 박차를 가하셨습니다. 또 미 의회에서 미국·남한·북한 의회의원 3자 회의를 최초로 개최하고,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참가하는 민간인 ‘6자 회담’도 성사시켰습니다.
2013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이후 마지막 날까지 사단법인 겨레살림공동체의 고문으로 남북 신뢰 회복과 통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셨습니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제공
그럼에도 선생님은 평생토록 하신 일을 세상에 자랑하고 내보이지 않았습니다. 공과와 훈장에 미친 세상에서 말없이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며 스스로 다짐하셨겠지요. 선생님은 다른 운동가들과는 결이 다른 삶을 사셨습니다. 주변에 숱한 활동가들이 민주화와 통일에 열정을 쏟다가 지치고 타락해버리나 선생님은 물 흐르듯 꾸준한 일관성으로, 퀘이커인으로서 중심을 잃지 않고 열정을 다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제게 하나님을 품고사는 사람의 도리를 졸탁(啐啄)으로 눈 뜨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발에 체인 사람들인 것을.
이행우 선생님! 별들을 밟으며 은하수의 강을 건너 신나게 가십시오. 저희들도 늘 선생님을 기억하며 오늘을 기쁘게 살겠습니다.
이해학/목사·겨레살림공동체 이사장
선생님은 저에게 바다같은 넓은 세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미국 전역을 돌며 통일 강연이나 좌담회를 열도록 멍석을 깔아주셨습니다. 그때 서부 샌디에고에서 만난 은호기 선생은 “이행우 선생은 미주에 세워진 자랑스런 통일 기둥”이라고 칭송하셨습니다.
유엔(UN)본부 옆 종교빌딩에서 유일하게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퀘이커봉사위원회의 ‘퀴노센터’는 적은 인력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시민활동의 현장이었습니다. ‘퀴노하우스’는 호텔을 얻기 어려운 가난한 나라 대표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그들이 서로 유엔 아젠다를 검토하는 토의장을 만들어 ‘작은 유엔’이라 불리는 공간이었습니다. 퀘이커 운동은 신도는 작은 규모이지만 미국에서 처음 시작한 ‘인간답게 보살피는 정신병원’에서부터 유명 대학과 고등학교를 가장 많이 운영하는 신비로운 힘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손수 아미시 공동체에 저희 부부를 실어다 주신 덕분에 비폭력 무소유 공동체인 브루더호프를 체험하고 종교의 새로운 지평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뒤에도 여러차레 시카코의 공동체와 부루더호프를 들락거렸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긴급조치 1호로 구속됐던 1974년부터 박정희 군사정권 아래 고문·투옥·살해 당하는 양심수 가족들을 돕고자 설립된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를 오랫동안 이끌어 오셨습니다. 부친의 반 박정희 독재 투쟁으로 인연을 맺어 십대 때부터 선생님을 그림자같이 따랐던 나카의 이재수 사무국장은 “반독재 운동가들이 주로 국내 유명 정치인 후원그룹 세력 규합에 급급할 때에도 선생님은 남북통일운동에 전념하셨다”고 증언합니다.
1980년대에는 윤한봉님의 망명을 계기로 광주학살에 분노한 젊은이들이 미국에서 민주·민족 청년운동을 조직하고 활동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1986년 선생님은 순수 동포 민간인의 힘을 모아 워싱턴에 ‘한겨레미주홍보원’(KIRC)을 설립하셨습니다. 그때 선생님과 뜻을 같이한 정기열·최관호·한호석·이재수·서혁교 등의 후학들이 지금은 의연한 생명일꾼으로 세계 곳곳에서 제몫을 다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1989년 ‘범민족대회 북미주 추진본부’를 결성하시고 2001년에는 6·15공동선언실천 미국위원회 결성을 주도하는 등 통일운동 선두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때 유럽 등 국외에서 모임이 있을 때면, 직장 근무를 마치고 금요일 오후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 주말 동안 회의를 주재하시고, 일요일 늦은 저녁 아니면 월요일 새벽 돌아와 곧바로 출근을 하는, 놀라운 정신력을 발휘하셨습니다. 물론 일흔세살로 은퇴할 때까지 직장 휴가도 모두 통일운동과 관련된 활동으로 보냈습니다.
1992년 엘에이(LA) 폭동을 계기로 재미 한인들의 정치력 강화의 필요성을 느낀 선생님은 퀘이커봉사위원회(AFSC)를 발판 삼아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심장부인 미 의회를 대상으로 홍보 활동을 펴고 국제연대를 통해 본격적으로 미 주류사회를 설득하는 로비리스트 활동에 박차를 가하셨습니다. 또 미 의회에서 미국·남한·북한 의회의원 3자 회의를 최초로 개최하고,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참가하는 민간인 ‘6자 회담’도 성사시켰습니다.
2013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이후 마지막 날까지 사단법인 겨레살림공동체의 고문으로 남북 신뢰 회복과 통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셨습니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제공
그럼에도 선생님은 평생토록 하신 일을 세상에 자랑하고 내보이지 않았습니다. 공과와 훈장에 미친 세상에서 말없이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며 스스로 다짐하셨겠지요. 선생님은 다른 운동가들과는 결이 다른 삶을 사셨습니다. 주변에 숱한 활동가들이 민주화와 통일에 열정을 쏟다가 지치고 타락해버리나 선생님은 물 흐르듯 꾸준한 일관성으로, 퀘이커인으로서 중심을 잃지 않고 열정을 다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제게 하나님을 품고사는 사람의 도리를 졸탁(啐啄)으로 눈 뜨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발에 체인 사람들인 것을.
이행우 선생님! 별들을 밟으며 은하수의 강을 건너 신나게 가십시오. 저희들도 늘 선생님을 기억하며 오늘을 기쁘게 살겠습니다.
이해학/목사·겨레살림공동체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