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신학자의 두 얼굴①] 요더의 '성적 실험'은 '성폭력'
[연중 기획 #교회_내_성폭력_OUT] 20세기 최고 신학자의 반복된 성범죄
기자명 이은혜 기자
승인 2018.03.04
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성취했거나 진보적 목소리를 내 온 사람들이 줄줄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성폭력 가해자로서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마땅한 법적·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이룬 업적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여기 메노나이트 교단을 대표하는 신학자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가 있습니다. 평화주의, 기독교 윤리학의 새 지평을 연 요더는 수십 년간, 많게는 100명에 가까운 여성에게 성폭력을 가했습니다. 그의 탁월한 신학과 저서를 볼 때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미투 운동'으로 한국 사회가 요동치는 지금, 요더의 성범죄를 다룬 <야수의 송곳니를 뽑다>(대장간)가 출간됐습니다. 존경받는 신학자 요더의 성폭력과 학교 및 교단의 대처, 그것이 드러나기까지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목회자 성폭력이 끊이지 않는 한국교회에 주는 시사점이 많습니다.
<뉴스앤조이>는 연중 기획 '#교회_내_성폭력_OUT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의 일환으로 요더의 성폭력을 통해 본 목회자 성범죄와 교회 문화를 조명합니다. ①요더가 어떤 방법으로 성범죄를 저질렀는지 ②신학교와 교회는 왜 치리에 실패했는지 ③그가 세상을 떠난 뒤 메노나이트교회는 어떤 과정을 거쳐 피해자들의 회복을 위해 힘썼는지 ④한국교회가 요더 사건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살펴봅니다. - 편집자 주
존 하워드 요더는 메노나이트가 낳은 최고의 신학자로 평가받는다.
"당신들에게 한 일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통탄할 정도로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면 절대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실망시켰고, 교회를 실망시켰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망시켰습니다."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2015년 3월 22일, 미국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성경신학교(AMBS) 총장 사라 웽어 쉥크(Sara Wenger Shenk)는 성범죄 피해자들의 회복과 치유를 위해 열린 '탄식과 고백과 헌신의 예배'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메노나이트교회(MCUSA)는 같은 해 7월 열린 총회에서 '성적 학대에 대한 범교회적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는 교회가 건강한 성을 가르치는 데 실패했고 성적 학대를 당한 이들의 아픔을 축소한 것을 사과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교단을 대표하는 신학교와 총회가 교회에서 발생한 성범죄를 공개 사과하는 건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흔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두 기관은 여러 차례 피해자들의 아픔을 묵인한 것을 회개하며 사과했다. 사건이 일어난 지 십수 년이 지난 후였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비폭력·평화를 표방하고 실천해 온 메노나이트에서 일어난 치명적 오점. 수많은 피해자의 가해자는 한 명,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 1927~1997)다.
교회의 새로운 전통
메노나이트 계열 평화신학 창시자
'천재 신학자', '최고의 논쟁가', '메노나이트 신학 연구의 선구자'. 모두 요더를 가리키는 말이다. 메노나이트가 낳은 20세기 최고 신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요더는 1927년 미국에서 태어나 스위스 바젤대학교 칼 바르트(Karl Barth) 밑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967년부터 고센성경대학원(GBS·AMBS 전신)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활동했다. 1988년 미국 기독교윤리학회 회장을 역임한 요더는 자타공인 최고의 학자로 평가받았다.
1972년 출간된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IVP)은 <크리스채너티투데이>가 꼽은 20세기 10대 책 중 한 권이다. 요더는 평화와 관련한 책을 다수 집필한 '평화신학'의 선구자였다. 요더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평화의 일꾼이 되어야 하며, 평화의 일꾼들이 모인 교회는 평화 공동체라고 주장했다. 요더는 평화와 화해를 강조하는 메노나이트 전통에 충실한 신학자였다.
요더의 저작 <예수의 정치학>(IVP)은 미국 <크리스채너티투데이>가 꼽은 20세기 10대 책 중 한 권이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요더는 살아 있을 때 이미 탁월한 신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동시에 그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을 상대로 부적절한 '성적 실험'(Sexual Experiments)을 행하고 있다는 문제 제기도 꾸준히 있었다. 하지만 요더가 학교나 교단에서 차지하는 위치 때문인지 공개적인 논의는 거의 불가능했다.
요더의 성적 실험이 권위를 이용한 성폭력이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는 데는, 2015년 1월 메노나이트 학술 계간지 <메노나이트쿼터럴리리뷰 Mennonite Quaterly Review> 특별호에 실린 레이첼 왈트너 구센(Rachel Waltner Goossen)의 논문이 큰 역할을 했다. <야수의 송곳니를 뽑다 Defanging the Beast>는 제목의 이 논문은, 다양한 시각과 언어로 애매하게 묘사하던 요더의 성적 행위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첫 공식 저작물이다.
특별호에는 <야수의 송곳니를 뽑다> 외에도 교회 내 성폭력과 관련해 참고할 만한 글이 여러 편 수록돼 있다. 교회 내 성폭력의 형태와 정의,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겪는 트라우마를 상세히 설명했다. 개신교에서 말하는 무분별한 용서의 문제점도 다뤘다. 한국에서 아나뱁티스트 신학 서적을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도서출판 대장간은, 2월 중순 구센의 논문과 같은 제목으로 특별호를 번역·출판했다.
이 책에 수록된 요더의 성범죄 내용을 읽다 보면 탄식이 흘러나온다. 그가 한 행동은 '성적 실험'과 같은 애매한 용어로 포장할 수 없는 '성폭력'이었다. 자신이 교단과 학교에서 차지하는 명성을 이용한 권력형 성범죄다. 책에는 요더가 어떻게 여성 학생·직원들을 포섭하고 그들에게 어떤 성폭력을 가했는지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학교 여학생·직원 상대
신뢰 관계 형성 후 유혹
전형적인 그루밍 성범죄
요더는 1970년대 초 고센성경대학원에 총장으로 부임했을 때부터 이미 유명 인사였다. 1972년 <예수의 정치학>을 출판한 이후에는 비폭력 평화주의 신학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 <야수의 송곳니를 뽑다>는 그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 1972년부터 1997년까지 요더 생애의 마지막 25년을 조명한다.
1970년대, AMBS는 전교생 중 여학생이 차지하는 비율이 그리 많지 않았다. 1970년 6%(87명 중 5명)에 불과한 여학생 수는 1979년 37%(222명 중 83명)까지 증가한다. 1973년 '교회와 사회에서의 여성'이라는 과목이 신설된 게 주된 원인이었다. 요더는 이 강좌의 자문교수로 자원봉사했고, 학생들 학점을 매기는 행정 처리도 맡았다.
요더는 빈 강의실, 차 안, 여학생의 집 등을 오가며 자신만의 '성적 실험'을 자행했다.
미국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을 논하던 시대였다. 자연스럽게 학교 안에서도 이에 관심 있는 여학생이 늘었고 요더는 그들을 적극 지지했다. 요더는 자신을 멘토로 생각하는 여학생들에게 '실험'을 빌미로 신체적 접촉을 시작했다.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교수와 그를 따르는 제자. 오랜 시간 서로를 알아 가고 신뢰를 얻은 뒤, 요더는 성적 접촉을 시작했다. 구센은 이를 '그루밍'이라 규정했다.
"성폭력에 정통한 전문가들은 요더의 기회주의적인 접근 방법의 범위를 '길들이기'(grooming) 행동이라고 규정하였고, 그와 관계하는 사람이 누가 되든지 그녀를 지적이고 협동적이라고 치켜세우면서 교묘히 유혹하는 행위라고 설명하였다." (49쪽)
요더는 자신의 성적 행동을 '학문적'이라 포장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가 된 이들이 어디까지 친밀감을 표현할 수 있는지, 신학적·윤리적·심리학적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요더는 1974년 8월, 일부 여성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글 Call for Aid'을 보냈다. 요더는 이 글을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상호 관계성 안에서 자매라고 생각하는 자 △성숙한 독신자 △독신이면서 폭넓은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 △방어에 비판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그럴싸한 말로 포장했지만 결국 자신이 성범죄를 저지를 대상을 물색하는 작업이었다. 그는 우발적이고 폭력적으로 여성들에게 접근하지 않고 지적인 방법을 택했다. 구센은 "지성과 우정에 호소하는 것은 캠퍼스 내외의 여성들에게 손을 뻗치며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을 모집하는 기법"이라고 표현했다.
이렇게 모집한 여성들에게 요더가 정확하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그가 밀러 총장(AMBS)에 보낸 메모에 자세히 나온다. 1975년부터 총장으로 재직한 밀러는 요더의 성폭력과 관련한 제보를 받고 비공개 조사에 임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요더와 비밀 메모를 주고받았다. 주로 요더의 해명이 담긴 메모였다. 1979년 12월, 요더는 자신이 선정한 대상들과 어떤 행동을 나눌 수 있는지 정리한 메모를 밀러 총장에게 보냈다(21쪽).
- 자연스러운 인사와 환영으로서 피상적인 접촉
- 가능한 좀 더 깊은 의미의 접촉에 대한 토론
- 보다 깊은 의미의 접촉; 아마도 손깍지를 끼거나 포옹, 간단한 키스
- 위와 동일한 표현이지만 기대감을 갖고 하는 접촉; 아마도 문을 닫고, 무릎에 올라앉아서 좀 더 깊게 하는 키스
- 부분적으로 옷을 벗고 하는 접촉
- 완전히 옷을 벗고 하는 접촉
- 남녀 성기에 대한 구체적 접촉
- 부분적·순간 발기 / 중단에 대한 탐험
요더는 같은 메모에 "이러한 모든 방식을 변화무쌍하게 왔다 갔다 함"이라고 썼다. 한 번도 아니고 계획적으로 여러 명에게 접근해 '실험'을 빙자해 발생한 권력형 성범죄. 지금의 성폭력 기준으로 볼 때 이 같은 행위는 성범죄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1980년대 들어서야 학생을 대상으로 한 성추행이 성차별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1990년대 미국 대법원은 교사들이 어떻게 학생에게 성적으로 구애하는지 사례를 모아 발표했다.
<야수의 송곳니를 뽑다>(대장간)에는 요더의 성 문제와 관련한 글들이 수록돼 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피해자들 스스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 깨닫기도 전에, 요더는 자신의 행동을 '성 윤리 실험'으로 또 한 번 포장했다. 요더는 피해자들에게 계속해서 '우정'과 '자매 됨'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는 말로 여성들을 설득해 성적인 행위를 하도록 만들었다. 성적 접촉을 나눈 이들에게는 "완벽한 기독교 신학을 추구하기 위한 실험 대상이었다"고 했다.
'평화와 화해의 제자 공동체'는
왜 요더를 치리할 수 없었나
요더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한 사람이 몇 명인지는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메노나이트교회가 요더 징계 과정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100명 가까운 여성이 요더에게 원치 않는 성폭력을 경험했다.
학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요더의 부적절한 행위를 알고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요더를 징계하지 못했다. 요더가 학교를 떠나는 1984년까지도 공식 제재가 없었다. 요더는 AMBS를 떠난 뒤에도 노트르담대학교에서 기독교윤리학을 가르치며 학문 연구를 지속했다. 그의 '성적 실험'은 그곳에서도 계속됐다.
교단은 1996년, 공식적으로 요더 치리 절차를 마무리한다고 밝혔다. '파면', '면직' 등의 단어는 없었다. 피해자 대신 요더의 회복과 치료에 초점을 맞춘 절차였다. 학교와 교단은 요더와의 관계, 학교의 평화에만 관심을 둔 나머지 피해자들 목소리는 외면했다.
메노나이트는 재세례파로 분류되며 그 어떤 기독교 교단보다도 평화와 화해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곳이다. 모든 일에 대화를 중요시하며 군 복무도 거부할 정도로 비폭력 평화주의를 체화했다. 평화신학자의 성폭력은 그 자체로 경악할 일이지만, 그것을 인지하고도 제대로 치리하지 않은 교단이 메노나이트였다는 점에 또 한 번 경악하게 된다.
다음 기사에서는 메노나이트교회와 학교가 왜 요더 치리에 실패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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