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아마 <<칠극>>이란 책을 아실 것도 같습니다.
방적아(龐迪我)라는 낯선 이름을 아실까 모르겠다. 본명은 디다체 데 빤또하라는 스페인 사람으로, 17세기 초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였다. 조선 후기에 작성된 여러 문헌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 실학자 이익과 안정복의 저술을 비롯해 여러 선비의 문집에서, 나는 방적아를 만났다. 그가 조선에서 유명해진 것은 <<칠극(七克)>>이라는 책을 저술하였기 때문이다.
<<칠극>>은 천주교의 세계관을 담고 있는데, 18세기 후반 조선의 지식층 사이에서 <<천주실의>>와 함께 가장 인기 있는 서학 서적으로 손꼽혔다. 이책은 성리학자가 애독한 <<사물잠>>과도 유사한 점이 있었다.
<<사물잠>>이라면, 공자가 수제자 안연에게 일러준 극기복례(克己復禮)의 방편을 풀이한 것이었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는 가르침을 담은 것이 <<사물잠>>이었다.
그런데 <<칠극>>은 그보다 서술이 훨씬 체계적이었던데다가, 동서양의 명언 명구를 종횡무진 인용하면서 참신하고 깊이 있는 서술이었다. 당연히 선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현대의 독자에게도 깊은 감명을 줄 책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간행된 <<칠극>>(정민 역, 김영사, 2021)을 다시 읽으며, 나는 풍부한 해설과 아름다운 번역에 감탄을 연발하였다.
현명하게 살기를 가르치는 이 책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누군가로부터 비방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단다.
“그 이가 제정신으로 나를 헐뜯었다면 내가 화를 내겠으나, 그 마음이 병들어서 나를 헐뜯은 거라면 성을 낸들 무엇하랴?”
이런 명구를 아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쓴 <<명상록>>에서도 본 듯하다. 조선 선비들은 낯선 서양 선교사가 책에서 전하는 주옥같은 말씀에 크게 공감하였다고 한다.
저자 방적아는 선교사라서 <<성경>> 말씀도 책에 실었다. 게으른 농부의 밭에는 가시덤불이 가득하더라는 이야기이다.
“잠깐이라도 마음을 내버려두면 삿된 생각과 더러운 욕망이 수많은 싹으로 돋아나 덤불을 이룬다.”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인데 그 취지는 유교 경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방적아는 신앙의 모범인 솔로몬 왕도 이 책에 등장시켰다. 주의 천사가 왕을 찾아와 무엇이든 원하면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였단다. 그러자 왕은 “제게 다름 아닌 지혜를 주옵소서”라고 말하였고, 주는 지혜뿐만 아니라 부귀와 장수, 영예로운 이름까지도 주었단다. 이런 내용을 읽으며 어떤 선비는 고개를 끄덕였고, 또 누군가는 좌우로 내젓기도 하였을 것이다.
조선 선비 중에서 가장 먼저 이책을 읽은 이는 실학자 성호 이익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이 책을 공정하게 평가하기도 했다. 1740년 이전에 쓴 <칠극(七克)>이란 글에서, 그는 이 책의 취지가 유교의 극기(克己)와 같다고 평하였다. 그러면서도 내용이 풍부하고 논리적인데다가 비유도 적절하여 유학자의 수양 공부에 도움을 준다고 호평하였다. 다만 “천주”와 “마귀” 따위의 잡설이 섞여 있어서 유감이라고 말하였다.(<<성호사설>>, 11권)
<<칠극>>이 널리 유행한 것은 정조 8년(1784)이었다. 그해 초여름, 천주교 신자 이벽의 영향으로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가 이 책을 독파하였다(<<다산시문집>>, 15권). 그 무렵에는 이가환과 이기양 등도 이미 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그해에 윤지충 역시 이 책을 서울의 김범우에게서 빌려 보았다. 그 당시 <<칠극>>은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다.
윤지충은 이책을 읽고서 신자가 되었다. 그는 <<십계>>와 <<칠극>>이란 두 권의 책을 빌려 옷소매에 넣고 고향 전주로 돌아와 베낀 다음 차근차근 학습하였다.(<<실록>>, 순조 1년 12월 22일)
그런데 바로 그해 겨울부터 선비 사회에는 천주교를 배척하는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안정복은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책에 뼈를 찌르는 듯한 절실함이 있다 하여도 우리 공부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순암선생문집>>, 6권)
<<칠극>>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은 신유사옥이 끝난 뒤 조정에서 반포한 <반교문>에도 보인다. “<<칠극>>은 황당하기가 도참서나 다름없다.”(<<실록>>, 순조 1년 12월 22일) 그로부터 많은 선비가 이책을 읽고 매도하였다.
그래도 <<칠극>>은 남몰래 살아 있었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남몰래 이 책을 인용하였다. 그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 책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우리는 지금 관점과 사고의 전환이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죽비처럼 우리를 일깨우는 책이 많이 탄생하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문득 <<칠극>>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