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4

'삶 앞에서의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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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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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손의 종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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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문화에서 더 심하긴 하지만 기독교에도 humility라는 개념이 있어서 '겸손'은 중요한 덕목이어 왔다. 다만 동양에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를 낮춘다는 의미가 큰 것 같고 기독교 전통에선 불완전한 인간의 신 앞에서의 겸손이라는 점이 조금 다른 듯. 그런데 나는 '삶 앞에서의 겸손'에 대해 가끔 생각한다. (어쩌면 이것이 신 앞에서의 겸손과 결국 겹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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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나는 한국 땅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 중에서 71년생인 내가 속하는 세대가 가장 럭키했다는 생각이 들고, 동서고금으로 시야를 확장해도 그 시기에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건 인류사적 관점에서 매우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건 내 노력으로 얻은 것들이 아니고 순전히 우연일 뿐이었다. 

전생의 업으로 인해 받은 복이라 한들, 내가 그 전생을 기억 못 하는 한 '전생의 나'는 '지금의 나'와 동일인물이 아닌 것. (굳이 비유하자면 부모가 땀흘려 일군 재산을 상속한 은수저 정도라고나 할지.) 살면서 개개인들로부터 부당한 일들을 겪은 적도 있고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집안에서도 일상적인 아들-딸 차별을 겪으며 자랐지만,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야 '삶은 내게 늘 fair 했지 억울함 같은 건 내 평생에 전혀 없었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80억 인구 중 아마 열 명도 안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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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인권, 행복추구권, 민주주의 같은 관념들이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끔 해 주었고 그런 관념들이 인간의 문명을 이끌어 온 힘이었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는 늘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무언가'이기에 그래서 추구하는 것이며, 막상 완전히 실현되면 그땐 우린 그런 가치들은 '당연히' 여길 뿐 더이상 감사하고 행복하게 여기지 않게 되어 또 다른 목표로 눈을 돌린다. 

그러므로 추구하는 관념에 너무 몰입되면 현실에서 감사하고 누릴 수 있는 부분들을 놓치기가 쉽고, 심지어는 타인을, 사회를 혹은 삶 자체를  '채무자' 취급하게 될 수도 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사회 발전에 공한하게 된다 해도 그 마음 자체는 건강하다고 하기 힘들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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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얘기를 사람들이 잘 이해 못 하면 난 소외감을 느끼겠지만, 대충 듣고서 다 아는 듯 "니 말 무슨 말인지 알아!"라고 너무 쉽게 자신하는 이를 보면 또 나라는 사람의 그리고 내 삶의 고유성이 소거되고 그 사람 머리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패턴으로 납작해지는 것 같아서 역시 충분히 존중받지 못 하는 듯 느끼게 된다는, 이런 내용의 글(*)을 최근에 페북에서 읽었는데.. 그 내용에 200% 공감하고, 타인의 얘기를 들을 때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 분명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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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얘기를 하는 입장의 나는 어떤 태도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저런 자세는 남들을 일종의 채무자 취급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 타인의 얘기를 들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에너지 소모되는 일인데, 남들이 내 얘기를 들어 줄 때 이해와 공감조차 정확히 내가 기대하는 딱 그만큼만 해야 한다 믿고, 그에 못 미치면 공감능력 떨어진다고 상대를 원망하며, 너무 쉽게 그 수준에 이르러 오히려 그걸 넘어서면 '니가 나를 정말 다 이해한다고? 니가 뭔데? 혹시 한 눈에 속속들이 이해될 만큼 내가 그렇게 뻔한 인간이라는 뜻이야?'라며 오히려 화내는 것은 대체 얼마나 오만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채권자 심리인지. 유아들의 자기중심주의조차 이 수준은 아니건만. 인간이니 때때로 그런 마음이 들 수는 있지만, 그런 마음이 들 때 '나는 늘 상대방이 원하는 정확히 그런 종류의 이해/공감을 정확히 그 사람의 기대만큼 세상 모든 이들에게 제공했는가? 이것이 인간에게 가능이나 한 일이며, 가능하다 한들 정당한 기대이기는 한가?'부터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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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을 갖는 것.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 나의 정당한 권리와 지분을 요구하고 쟁취하는 것. (법이 보장하는 권리/권익이라는 것은 사회가 합의한 '최소한'이기에 특히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와중에서도 '삶 앞에서의 겸손'이라는 건 잊지 말아야 하는 덕목일 것 같다. 그것이 의무나 도리라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의 현실, 이승에 사는 동안엔 절대 변하지 않을 어떤 어떤 부분들을 포함하는 그 구체적 현실 속에서 내 자신이 불완전하나마 최소한의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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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글(*)을 읽으며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는데, 며칠이 지나도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아 그냥 끄적끄적. 아마도, 호의로 대할수록 오히려 채권자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내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이라서, 별 상관 없는 글에서조차 이런 생각들을 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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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Hanjin Kang
아 회초리가 너무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