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29

축의 시대 - 종교의 탄생과 철학의 시작

알라딘: 축의 시대

축의 시대 - 종교의 탄생과 철학의 시작
카렌 암스트롱 (지은이),정영목 (옮긴이)교양인2010-12-20
원제 : The Great Transformation: The Beginning of Our Religious Traditions


2020 필수 지식교양! 본투리드 젓가락(대상도서 포함 국내도서 25000원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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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Great Transformation: The Beginning of Our Religious Traditions (Paperback) Paperback
[절판] The Great Transformation (Audio CD, Abridged)

책소개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 세계의 주요 종교와 철학이 탄생한 인류사의 가장 경이로운 시기를 다룬 역사서. 서로 교류가 없던 네 지역에서 어떻게 비슷한 시기에 그토록 놀라운 사유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왜 그들은 우주와 인간과 삶에 대해 같은 결론에 이르렀을까? 이 책은 인간의 윤리적 각성과 철학적 성찰이 폭발하던 시대, ‘축의 시대’에 관한 인문학적 탐사이다.

‘축의 시대’는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역사의 기원과 목표>라는 책에서 제시한 문명사적 개념이다. 야스퍼스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가 정신의 기원으로 인정할 수 있는 시대, 인류 공통의 기축이 되는 시대를 설정하고 그 시기를 ‘축의 시대’라고 이름 붙였다. 카렌 암스트롱은 ‘축의 시대’를 대략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의 시기로 설정한다. 이 시기에 이후 인류의 정신에 자양분이 될 위대한 철학적·종교적 전통이 태어났다.

그렇다면 왜 지금 ‘축의 시대’인가? 과거의 시간들을 살펴보는 데 역사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을까? 암스트롱은 ‘축의 시대’에 이루어진 인간의 근본적 인식 전환과 사유의 깨달음에서 폭력과 증오, 불관용으로 점철된 우리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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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 우리는 축의 시대의 통찰을 넘어선 적이 없다

1장 축의 시대 문명 벨트(기원전 1600년∼900년경)
조로아스터, 선과 악의 대결
인도에 정착한 정복자 아리아인
요·순·우, 의로운 통치자의 시대
전쟁하는 신성한 신 야훼

2장 불안과 공포의 시대(기원전 900년∼800년경)
암흑의 400년을 견뎌낸 아테네
최초의 유일신 숭배자 엘리야
하늘의 도(道)를 따르는 지상의 삶
아트만, 내 안의 진정한 나

3장 자아의 발견(기원전 800년∼700년경)
분노하는 야훼의 대리자 이사야
오디세우스와 아킬레우스, 영웅들의 자기 중심주의
춘추시대, 새로운 감수성의 출현
숲으로 간 현자, 영적 탐구의 선구자들

4장 앎을 향한 기나긴 여행(기원전 700년∼600년경)
인간 내면의 정복, 《우파니샤드》
로고스, 그리스 영웅 시대를 끝내다
혼란한 시대 삶의 모델, 군자(君子)
‘책의 종교’ 유대교의 탄생

5장 고난의 시대(기원전 600년∼530년경)
추방당한 자들의 트라우마
아테네의 솔론, 정치를 발명하다
상키아, 인류 최초의 무신론
흔들리는 예(禮), 무너지는 도(道)

6장 공감의 발견(기원전 530년∼450년경)
공자, 인(仁)의 나라를 찾아 떠나다
고난의 길에서 태어난 일신교
그리스 민주주의를 연 이성의 힘
자이나교, 비폭력과 불살생의 극한

7장 사유의 혁명(기원전 450년∼398년경)
에즈라의 닫힌 길, 요나의 열린 길
땅으로 내려온 철학, 삶을 정화하는 비극
소크라테스, 무지의 지혜를 가르친 앎의 교사
묵가, 급진적인 공감의 사상
고타마 싯다르타, 무아의 발견자, 마음의 혁명가

8장 철학의 모험(기원전 400년∼300년경)
혜자의 역설, 장자의 무위, 맹자의 자애
두려움에 떠는 전사들의 서사시 《마하바라타》
동굴에서 나온 이데아의 탐구자, 플라톤
로고스의 건축가, 아리스토텔레스

9장 제국의 시대(기원전 300년∼220년경)
한비자·순자·노자의 도덕 군주론
헬레니즘, 문명을 만든 최초의 문명 충돌
《바가바드기타》, 축의 시대 마지막 위대한 노래

10장 축의 시대의 귀환(기원전 2세기~ )
천하 통일과 사상의 통합
새로운 불교 영웅 보디사트바(보살)
토라의 원리,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 위험한 시대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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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첫문장
축의 시대의 영성(정신성, spirituality)을 처음 시도한 이들은 러시아 남부의 초원 지대에 산 목축민이었다.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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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간의 문명을 만들다 - 정인경
“우리는 한 번도 축의 시대의 통찰을 넘어선 적이 없다.” 세계적인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이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 세계의 주요 종교와 철학이 탄생한 인류사의 가장 경이로운 시기 ‘축의 시대’를 재조명한다. 비교종교학적 지식과 영성적 통찰력으로 축의 시대 네 민족(인도, 이스라엘, 중국, 그리스)의 역사를 추적한다
-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인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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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 중앙일보(조인스닷컴) 2010년 12월 18일자
동아일보
 - 동아일보 2010년 12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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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겨레 신문 2010년 12월 17일자
저자 및 역자소개
카렌 암스트롱 (Karen Armstrong)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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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의 시대』,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마음의 진보』, 『신화의 역사』, 『신을 위한 변론』 등 다수의 종교 서적을 쓴 권위 있는 종교 역사학자이다. 1944년 영국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이던 1962년에 로마 가톨릭 수녀로 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옥스퍼드 대학의 학업과 병행했던 7년간의 수녀 생활 끝에 자신의 탐구정신과 부딪히는 수녀원의 전통적인 엄격함에 실망하여 환속했다. 이후 옥스퍼드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교직과 저술 활동을 시작했으며, 2008년 TED 상을 수상하면서 대중과도 가깝게 다가섰다. 2009년 황금률에 기반한 ‘공감의 헌장(Charter for Compassion)’을 주창하고 세계의 다양한 민족과 종교들이 공감의 가치를 설득하면서 비교 종교학의 핵심 가치를 실천에 옮기고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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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목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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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며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옮긴 책으로는 「길가메시」 시리즈, 『인디언의 진짜 친구』, 『셰익스피어 이야기』,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보물섬』, 『트로이 전쟁』, 『눈먼 자들의 도시』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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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소개
교양인
출판사 페이지


출판사 제공 책소개

“우리는 한 번도 축의 시대의 통찰을 넘어선 적이 없다.”

축의 시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연의 힘을 경배하던 인간이
시선을 안으로 돌려 자아를 발견하고 내면의 신을 탐구하기 시작한
인류 정신 문명의 첫 번째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인류 정신 문명의 첫 번째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인간 창조성이 가장 뜨겁게 폭발했던 경이로운 시대
문명 도약의 결정적 순간에 관한 인문학적 통찰

《축의 시대》는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 세계의 주요 종교와 철학이 탄생한 인류사의 가장 경이로운 시기를 다룬 역사서이다. 축의 시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연의 힘을 경배하던 인간이 시선을 안으로 돌려 자아를 발견하고 내면의 신을 탐구하기 시작한 인류 정신 문명의 첫 번째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사유의 천재들의 시대 !
이 시대에 중국에서는 공자, 묵자, 노자가 활동했고,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 자이나교, 고타마 싯다르타가 등장했으며,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가 나타났고, 그리스에서는 소포클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이 차례로 태어났다. 이들의 출현은 불을 다루는 기술을 발견한 것 다음으로 인류에게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서로 교류가 없던 네 지역에서 어떻게 비슷한 시기에 그토록 놀라운 사유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왜 그들은 우주와 인간과 삶에 대해 같은 결론에 이르렀을까?
세계적인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는 인류사의 수수께끼로 불리는 이 놀라운 문화적 평행 현상을 중국, 인도, 근동,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축의 시대 문명 벨트를 횡단하며 재조명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이 터져 나오고, 신화적 인식에 대한 이성의 투쟁이 첫발을 내딛고, 인간의 윤리적 각성과 철학적 성찰이 폭발하던 시대, 인류 정신사에 거대한 전환점이 된 축의 시대에 관한 인문학적 탐사를 만난다.

전례 없는 폭력과 두려움과 삶의 공허에 직면했던 축의 시대가 우리에게 말한다
《축의 시대》는 카렌 암스트롱의 비교종교학적 지식과 영성적 통찰력이 결합된 책이다. 암스트롱은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창안한 문명사적 개념인 ‘축의 시대’를 파피루스나 양피지 속에 말라붙은 희미한 관념이 아닌, 고통과 불안의 시대를 두 발로 걸어간 살아 있는 인간들의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 축의 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같이 느끼고 인간의 비참을 함께 슬퍼하는 공감과 자비의 정신을 발견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유의 천재들이 찾은 답은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류의 철학적?종교적 성찰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근대 세계를 탄생시킨 과학주의와 진보주의가 치열한 반성과 질문의 대상이 된 오늘, 암스트롱은 우리와 똑같이 폭력과 두려움과 삶의 공허에 직면했던 ‘축의 시대’ 사람들에게서 우리 시대의 난제를 넘어 미래를 밝힐 비전을 찾아낸다.

“우리는 한 번도 축의 시대의 통찰을 넘어선 적이 없다.”
- 인류 정신 문명의 출발점 ‘축의 시대’

‘축의 시대(Axial Age)’는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역사의 기원과 목표》(1949년)라는 책에서 제시한 문명사적 개념이다. 야스퍼스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가 정신의 기원으로 인정할 수 있는 시대, 인류 공통의 기축(基軸)이 되는 시대를 설정하고 그 시기를 ‘축의 시대’라고 이름 붙였다. 《축의 시대》에서 카렌 암스트롱은 ‘축의 시대’를 대략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의 시기로 설정한다. 이 시기에 이후 인류의 정신에 자양분이 될 위대한 철학적·종교적 전통이 태어났다. 중국의 유교와 도교,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 이스라엘의 유일신교, 그리스의 철학적 합리주의가 그것이다. 또한 이 시기는 붓다, 소크라테스, 공자, 예레미야, 맹자, 에우리피데스, 플라톤 등 사유의 천재들이 나타난 역사상 가장 뜨거운 ‘창조의 시기’였다.

정치적 격동과 폭력의 시대가 낳은 ‘축의 시대’
축의 시대 민족들이 모두 균일하게 진화한 것은 아니었다. 인도 사람들은 늘 축의 시대 진보의 선두에 서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기원전 6세기에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사람들에 의해 특별한 창조성이 피어나는 짧고 강렬한 시기를 경험했다. 이스라엘인들이 이룬 축의 시대 통찰은 랍비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로 재탄생했다. 중국에서는 공자가 기원전 6세기 말에 처음으로 완전한 축의 시대 정신을 발전시켰으며, 제자백가에 의해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했다. 이 세 지역이 처음부터 내면 탐구와 영성 추구의 방향으로 나아간 것과 달리 그리스는 로고스와 합리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 네 지역에서 ‘축의 시대’가 개화하기까지는 공통적인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시기는 조금씩 달랐지만 대부분 급격한 도시화와 인구 증가로 인한 사회경제적 변화, 계속되는 전쟁이라는 수난의 시간을 겪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 함께 살아가면서 발생하는 폭력과 무질서를 해결하는 데 전통적 관습이나 신에게 올리는 희생제는 별 효과가 없었다. 이제 인간은 신화의 세계에서 벗어나 인간 자신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인간 심리, 개인의 자아, 도덕과 윤리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축의 시대’는 이러한 거대한 변화 속에서 태어났다.

축의 시대의 영적 혁명은 혼란, 이주, 정복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하나의 제국이 망하고 다른 제국이 일어서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중국에서 축의 시대는 주 왕조의 붕괴와 더불어 마침내 시작되었으며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하면서 끝을 맺었다. 인도의 축의 시대는 하라파 문명(인더스 문명)이 해체된 후에 일어나 마우리아 제국과 더불어 끝을 맺었다. 그리스의 변화는 미케네 왕국과 마케도니아 제국 사이에 이루어졌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정박지에서 떨어져 나와 떠도는 사회에 살았다. …… 중동에서 제국의 모험 때문에 혹심한 고통을 겪었던 유대인마저 조국의 붕괴와 그에 뒤이은 추방이라는 트라우마로 인해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 시작해야만 하는 무시무시한 자유를 얻게 되면서 축의 시대로 밀려 들어갔다. - 623쪽·10장 축의 시대의 귀환

이 책에서 저자는 ‘축의 시대’ 네 민족(인도, 이스라엘, 중국, 그리스)의 역사를 추적한다. 특히 시간대 별로 네 민족의 정신적 변화 과정을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그들이 각자 나름의 속도로 ‘축의 시대’를 통과해 가는 과정을 더욱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기원전 8세기경 인도에서는 사제와 전사들이 모두 서서히 ‘아힘사’(불살생, 비폭력)라는 축의 시대 이상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그리스인은 자기 중심적인 전사의 영웅적 에토스를 찬양했다. 다른 축의 시대 민족들이 아힘사와 ‘케노시스’(‘자기 비움’. 자기 중심주의에서 벗어남)를 추구한 것은 폭력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지만, 그리스인들은 비슷한 시기에 오히려 강한 군대를 위해 이기심을 버리고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노력을 강조했다. 이처럼 저자는 축의 시대 문명 벨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비교하고 때로 예고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마치 잘 짜인 한 편의 추리 소설을 읽을 때처럼 시종일관 기대와 호기심을 품고 서둘러 다음 장으로 눈을 옮기게 만든다.

왜 ‘축의 시대’인가?
그런데 왜 지금 ‘축의 시대’인가? 이 과거의 시간들을 살펴보는 데 역사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을까? 암스트롱은 ‘축의 시대’에 이루어진 인간의 근본적 인식 전환과 사유의 깨달음에서 폭력과 증오, 불관용으로 점철된 우리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20세기에 우리는 전례 없는 규모로 폭력이 분출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안타깝게도 인간들끼리 서로 해치고 상처를 내는 능력은 인류 문명이 이룬 특별한 경제적?과학적 진보에 뒤처지지 않고 함께 발전해 왔다. 저자는 어떤 정신적 혁명이 없으면 이 행성을 구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런 곤경에서 빠져나오려 할 때, 나는 우리가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축의 시대(Axial Age)’라고 부른 시기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살았던 축의 시대 현자들이 어떻게 우리의 현재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왜 우리가 공자나 붓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가? 물론 이 머나먼 시대를 공부하는 것은 정신의 고고학의 한 과정에 불과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이 세계의 현실을 반영하는 혁신적인 믿음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축의 시대의 통찰을 넘어선 적이 없다.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위기의 시기에 사람들은 늘 축의 시대를 돌아보며 길을 찾았다. - 5~7쪽·<머리말>에서

하늘로 향했던 눈을 돌려 인간 내면을 들여다보다
- 자아의 발견과 종교의 내면화

카렌 암스트롱은 ‘축의 시대’에 서로 전혀 교류가 없던 네 지역에서 거의 같은 내용의 정신적 도약이 이루어졌음에 주목한다. 그중에서도 ‘축의 시대’가 인류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인간 내면의 발견이었다. 인간은 이 시기에 이르러 처음으로 하늘로 향해 있던 눈을 돌려 자기 내면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저 먼 하늘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우주가, 불멸의 진리가 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 고통스런 삶에서 구원받고 해방되는 길은 외부의 신이나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코페르니쿠스적인 사유의 ‘대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축의 시대 사람들은 이전처럼 하늘, 자연물, 조상 등 ‘외부’의 신들을 정해진 교리와 제의에 따라 섬기기보다 인간 ‘내면’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했다. 그들은 동물 희생제가 아니라 요가나 명상 같은 특별한 정신 훈련법에 따라 자기 안에서 초월을 경험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 내면의 탐구는 기원전 9세기경에 인도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으며, 인도의 현자들에 의해 가장 깊이, 가장 멀리까지 나아갔다.

인도에서 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현대 세계에서 제의는 종종 노예적인 순응을 장려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브라민들은 그들의 학문을 이용하여 외적인 제의와 신들로부터 해방되어,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자아라는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냈다. 사제 개혁가들은 제의의 내적인 역학을 명상함으로써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아리아인 전사들이 인도의 미지의 밀림 속으로 파고들듯이 앞장서서 열심히 내적 세계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축의 시대에는 지식을 축적하는 것 또한 중요한 것으로 강조된다. 제의 전문가들은 모두가 제의를 깊이 생각하며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깨달을 것을 요구했다. 새로운 자의식이 탄생한 것이다. 그 이후로 인도의 영적인 탐구는 외적인 신이 아니라, 영원한 자아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 150쪽·2장 불안과 공포의 시대

기원전 5세기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에서는 군주가 자기 내면에서 중심을 발견하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현실에서 물러나지 않고도 명상을 통해 얼마든지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찾을 수 있으며, 자기 내면 깊은 곳을 발견할 때 비로소 인간다움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글(<심술(心術>)의 저자는 인(仁)이 인간 본성의 왜곡이 아니라 완성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인이라는 말 자체가 인간성과 동의어다. 군주가 진정으로 ‘인간적인 마음’을 갖고자 한다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발견해야 한다. 숲으로 달아나 평화와 안정을 찾는 대신 명상으로 내적인 고요를 길러 나가야 한다. 깨달음을 얻은 군주는 열정을 제어하고 욕망을 가라앉히고 마음에서 산만한 생각을 비워 진실하고 참된 자아를 발견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정신적인 힘을 분명하게 정리하게 되고, 몸의 건강이 나아질 것이며, 굳이 더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인(仁)의 인간이 되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옛날에 왕들은 신체의 정확한 방향을 잡아 도를 확립했다. 이제 <심술>에 따르면 군주는 자기 내면에서 진정한 중심을 발견하여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 497쪽, 498쪽·8장 철학의 모험

“삶의 피할 수 없는 진실인 고난과 직면하라!”

축의 시대 현자들이 남긴 중요한 통찰 중 하나는 “삶의 피할 수 없는 진실인 고난과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축의 시대에 네 지역에서 창조된 종교 전통은 모두 공포와 고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이런 고난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고난을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의 전제 조건이었다.

예레미야는 예언자 노릇을 싫어했다. 그러나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어쩔 수 없이 하루 종일 “파멸과 멸망!”이라고 외치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입을 닫으려 하면 심장과 뼈에 불이 붙는 듯하여 다시 예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예레미야는 아모스나 호세아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자신을 장악했다고 느꼈다. 자신의 사지를 비트는 고통은 야훼의 고통이었다. 하느님 또한 수모를 당하고, 추방을 당하고, 버림받은 것처럼 느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난을 부정하는 대신 사람들 앞에 슬픔의 인간으로 나타났다. 그는 자기 시대의 공포, 분노, 슬픔에 마음을 열고, 그것이 자기 존재의 구석구석을 침범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깨달음에 방해가 될 뿐이기 때문이었다. - 289~290쪽·5장 고난의 시대

상키아는 인도의 영성에 두 가지 중요한 기여를 했다. 첫째는 모든 삶이 ‘두카(dukkha)’라는 인식이었다. 이 말은 흔히 ‘괴로움(苦)’으로 번역되지만 ‘불만족스럽다, 뒤틀려 있다’는 더 넓은 의미가 있다. …… 어떤 것도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우리의 혼란스러운 내적 세계는 순식간에 이런 상태에서 저런 상태로 바뀔 수 있다. 친구들은 죽는다. 사람들은 병들고, 늙고, 아름다움과 활력을 잃는다. 이 보편적인 두카를 부정하는 것-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만-은 미망이다. 두카가 삶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키아는 이런 불완전한 본성이 우리의 친구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내’가 고통을 겪고 이 덧없는 세상과 한몸이 될수록, ‘나’는 푸루샤라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실재를 더 갈망하기 때문이다. - 332쪽?5장 고난의 시대

암스트롱은 우리 자신의 고통을 인정할 때에만 타인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으며, 바로 그 지점에서 변화를 이끌 행동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인들은 비극을 통해 ‘타자와 함께 느끼는 능력’을 계발할 수 있었다. 이 점은 기원전 472년에 디오니소스 축제에 등장했던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에서 특히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 작품을 본 아테네인들은 불과 몇 년 전 아테네를 유린했던 페르시아인들의 고통을 느끼며 울었다.

바로 몇 년 전 페르시아인은 그들의 도시를 파괴하고 성소를 더럽혔는데, 이제 그들이 페르시아 전사자들을 위해 울 수 있었던 것이다. 크세르크세스, 그의 부인 아토사, 다리우스의 유령은 모두 혈육을 잃고 안전이라는 겉치장이 뜯겨져 나가고 삶의 공포가 드러나면서 느끼는, 가슴을 찢는 슬픔에 관하여 감동적으로 이야기한다. 의기양양해하며 독선을 부리는 태도는 없었다. 고소해하는 분위기도 없었다. 아이스킬로스는 페르시아인을 적이 아니라 애도하는 사람들로 묘사했다. 페르시아인의 용기를 칭찬하기도 했다. …… 《페르시아인》은 목숨을 건 싸움의 기억이 아직 생생한 시기에 과거의 적을 향해 뻗어나간 공감의 탁월한 예였다. - 387~388쪽·6장 공감의 발견

케노시스(kenosis), 혹은 자기 버리기

삶이 본래 고통이라면, 그 고통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축의 시대 현자와 철학자들은 개인이 겪는 고통은 물론이고 사회적 갈등의 원인이 모두 ‘자기 중심주의’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를 보호하려는 욕구, 자기의 본능과 욕망을 우선시하는 이기심이 사람들 사이에서 탐욕과 갈등과 증오를 불러오는 것이다. ‘자기’를 버리는 방법을 찾는 것은 축의 시대 현자들의 공통된 목표였다. 중국에서는 고대에 태평성대를 이룬 요 임금과 순 임금이 ‘자기 버리기’를 실천한 현자로 추앙받았다.

초기 단계에도 노나라의 제의 전문가들 가운데 일부는 ‘자기 버리기’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대의 성군 요와 순을 숭배했으며, 《서경》에 나오는 최초의 연대기 가운데 하나인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을 썼을지도 모른다. …… 요와 순은 성인(聖人)이 되었다. 그들은 평화의 황금 시대를 확립한 선하고 자비로운 사람들이었다. 《서경》에 나오는 그들의 전설은 왕조가 대물림으로 이어지고 힘과 강압에 기초를 둔 통치가 이루어지는 현실에 대한 암묵적 비판임이 분명하다. 요와 순은 자신의 지위와 위엄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들이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것보다 백성의 유익을 앞세웠다. 그들은 예(禮)가 계발하고자 하는 절제, 겸손, 자제, 경의의 원형적 모범이었다. 중국의 정치 생활이 점점 더 이기적이고 무자비해짐에 따라 요순 전설은 계속 영감의 원천이 된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모든 인간에게 이런 위인이 될 잠재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 206, 208쪽·3장 자아의 발견

이스라엘에서는 예언자들이 신에게 존재를 완전히 압도당하는 경험을 통해 ‘자기 비우기’의 영성을 경험했다. 동시에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오만한 자아에 구멍을 내 비우는 역할을 맡았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자존감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그는 민족의 에고에 구멍을 내고 싶어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서 ‘자기 버리기’의 영성 ·축의 시대 이상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 에 대한 최초의 표현 가운데 하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교를 이용하여 자존감을 강화하는 대신 정의와 공평을 앞세워 개인적 이해 관계를 초월해야 했다. 예언자는 그리스인이 케노시스(kenosis) 즉 ‘비움’이라고 부른 것의 걸어다니는 본보기였다. 아모스는 자신의 주체성을 신이 차지했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아니라 야훼의 말을 했다. 예언자는 신에게 열정적으로 감정 이입을 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버렸다. 신은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불의를 개인적인 모욕으로 여겼다. 이것은 중요한 순간이었다. 축의 시대 종교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느끼는 공감이 기본 조건이 된다. 아모스는 스스로 분노를 경험한 것이 아니라, 야훼의 분노를 느낀 것이다. - 160쪽·3장 자아의 발견

마침내 공감과 자비를 발견하다

‘축의 시대’ 현자와 철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하느냐였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모두 황금률과 양보, 공감, 자비로운 생활을 요구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 중심주의와 탐욕, 폭력과 무례를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로 죽이는 것만 잘못된 것이 아니다. 적대적인 말을 하거나 성마르게 행동해서도 안 된다. 나아가 축의 시대의 거의 모든 현자들은 자비를 자기 민족에게만 제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해서든 전 세계로 관심을 확대해야 한다.
각각의 전통은 각기 그 나름의 방식으로 황금률 ? “네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마라.”? 을 정리해냈다. 공자는 그것을 ‘서’(恕, ‘자기 자신에게 견줌’)라고 말했고, 묵자는 ‘겸애’(兼愛, ‘모든 이를 향한 관심’)라고 표현했으며, 붓다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남들도 해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랍비 힐렐은 “당신 자신에게 가증스러운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마시오. 그게 토라의 전부이고, 나머지는 그 주석일 뿐이오.”라고 말했다. 세상 모든 존재의 신성한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자비의 바탕이었다.

우리는 축의 시대 현자들이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상황에서 자비의 윤리를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늘 일깨워야 한다. 그들은 상아탑에서 명상을 한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 찢긴 무시무시한 사회, 오랜 가치들이 사라져 가는 사회에 살았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공허와 심연을 의식했다. 이 현자들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이 아니라 실용적인 사람들이었다. 많은 수가 정치와 정부에 몰두했다. 그들은 공감이 단지 유익하게 들리는 이야기일 뿐 아니라, 실제로 효과가 있다고 확신했다. 자비와 모든 이에 대한 관심은 최선의 정책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통찰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은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이다. - 670쪽·10장 축의 시대의 귀환

역사상 가장 뛰어난 현자와 철학적 천재들의 시대!

‘축의 시대’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비범한 인물들이 집중되었다. 중국에서는 공자와 맹자가 나타났으며, 묵가, 도가, 법가 등 중국 철학의 모든 학파들이 탄생했다. 인도에서는 고타마 싯다르타와 자이나교의 마하비라가 태어났으며, 이란에서는 조금 이른 시기에 조로아스터가 나타나 ‘축의 시대’를 예고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아모스, 에스겔, 이사야, 예레미야 등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출현했다. 그리스에서는 호메로스가 등장했고, 파르메니데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 등 비극 작가가 활약했다. 저자는 이 놀라운 시대를 만든 현자와 철학자들의 삶과 생각을 흠결 하나 없는 고매한 ‘위인’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기쁨과 슬픔, 분노를 느끼며 ‘인간성’에 대해 고민했던 사람의 이야기로 부활시켰다.

조로아스터, 선과 악의 우주적 투쟁
기원전 1500년경부터 러시아 남부 초원 지대에 살던 아리아인들의 느리고 무탈했던 삶이 폭력적으로 바뀌었다. 청동 무기, 소와 말을 이용한 새로운 이동 방법을 알게 되면서 아리아인은 전사가 되었다. 그들은 이제 빠른 속도로 멀리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우월한 무기를 이용하여 이웃의 정착지를 기습하고 가축과 작물을 빼앗았다. 방어를 위해서라도 군사 기술을 배워야 했다. 영웅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힘이 곧 정의였다. 이때 초원 지대를 휩쓴 폭력에 마음 깊이 괴로워하던 한 젊은 사제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그의 이름은 조로아스터였다. 조로아스터는 자신의 민족에게 닥친 수난과 절망에 충격을 받아 갈등에 사로잡혀 갈가리 찢기는 절망에 빠져들었다.

예전의 평화로운 세상에서 삶은 주기를 그리는 것처럼 보였다. 계절이 바뀌고, 낮은 밤으로 이어지고, 추수는 파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조로아스터는 이제 이런 자연의 박자를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은 격변을 향해 쏜살같이 나아가고 있었다. 조로아스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우주의 갈등이 폭발하는 ‘경계의 시간’에 살고 있지만, 그들은 곧 선의 최후 승리와 어둠의 세력의 절멸을 목격하게 될 터였다. 무시무시한 전투가 끝난 뒤 아후라 마즈다와 불멸의 존재들은 남자와 여자의 세상으로 내려와 희생제를 드릴 것이다. 이어 큰 심판이 이루어진다. 악한 자들은 지상에서 쓸려 나가며, 타오르는 강이 지옥으로 흘러들어 ‘적대적인 영혼’을 태워 재로 만들 것이다. 그러면 우주는 원래의 완벽한 상태로 회복될 것이다. …… 우리는 이런 묵시록적 전망에 익숙하다. 그러나 조로아스터 이전의 고대 세계에는 이런 전망이 전혀 없었다. 이 전망은 자신의 민족이 수난을 당하는 것을 지켜본 조로아스터의 분노와 정의를 향한 갈망에서 나온 것이다. 조로아스터는 악한 자들이 선하고 무고한 사람들에게 준 고통에 대하여 벌을 받기를 바랐다. - 35쪽?1장 축의 시대 문명 벨트

수백 년 뒤 축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철학자, 예언자, 신비주의자들은 모두 비폭력에 기초한 영성을 장려하여 자기 시대의 잔혹함과 공격성에 맞서려 했다. 그러나 상처 입은 조로아스터의 전망은 복수심에 불타며, 거기에는 방화, 폭압, 절멸의 이미지가 담겨 있었다. 조로아스터가 살아온 길을 보면 정치적 격동, 잔혹 행위, 수난이 언제나 축의 시대 양식의 신앙을 생산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복잡한 현실을 선과 악이라는 지나치게 단순한 범주로 양극화하는 전투적 믿음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조로아스터는 뜨겁게 윤리적인 전망으로 축의 시대를 고대했다. 그는 새로운 전사의 에토스 속에 도덕성을 집어넣으려 했다. 진정한 영웅은 동포를 탄압하지 않고 폭력에 맞선다. 신성한 전사는 평화에 헌신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축의 시대’의 첫 번째 종교를 만든 사람들은 바로 조로아스터가 비난했던 인도로 아리아인 가축 도둑들이었다.

《우파니샤드》의 현자, 인간 내면을 정복하다
인도의 고대 베다 종교는 끊임없는 이주와 새로운 영토의 정복에서 영감을 받았다. 폭력적 갈등의 세계에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베다 종교의 정수를 담은 《우파니샤드》는 내적 공간의 평화로운 정복에 나섰다. 이것은 종교사에서 외적인 제의가 엄격한 자기 성찰로 대체되는 매우 중요한 진전을 뜻한다. 현자들은 지도 없는 정신 세계에 침투하여 선구자가 되었다. 초기 《우파니샤드》에서 가장 유명한 두 사람은 비데하 왕국의 야지나발키아와 쿠루-판찰라 지역의 우달라카 아루니였다.

야지나발키아는 새로운 영성을 옹호하는 데 앞장섰던 비데하의 자나카 왕의 직속 철학자였다. 《우파니샤드》의 모든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야지나발키아도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는 말하자면 불멸의 불꽃이 있다고 확신했다. 불멸의 불꽃은 전 우주를 유지하고 또 거기에 생명을 주는 불멸의 브라만에 참여하며 또 그 본질도 같았다. 이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발견이었으며, 모든 주요 종교 전통에서 중심을 이루는 통찰이 된다. 궁극적 실재는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존재했다. 따라서 자아, 즉 아트만의 깊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 225~226쪽·4장 앎을 향한 기나긴 여행

처음으로 인간은 인간 의식의 더 깊은 층들을 체계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규율 잡힌 자기 성찰로 정신의 표면 아래 놓인 자아의 방대한 영역에 눈을 떴다. 완전하게 ‘자의식’을 갖추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야지나발키아는 종교의 외적 의식(儀式)을 논의하지 않았다. 대신에 진정한 자아, 즉 세속적 경험 속의 ‘나’를 통제하고 살아 있게 하는 ‘내적 인간’을 밝히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인간 존재의 심리적 구조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외적 제의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신성함을 경험하려는 시도는 모든 지역에서 나타난 축의 시대의 특징 중 하나였다. 19세기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인간 무의식을 탐구하기 훨씬 전에 이미 인도에는 인간의 내면 깊은 곳을 찾아 성찰한 선구자들이 존재했다.

추방당한 자들의 트라우마, 이스라엘의 축의 시대를 열다
기원전 6세기에 이스라엘은 본격적으로 축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번에도 변화의 촉매는 걷잡을 수 없는 충격적인 폭력의 경험이었다. 아시리아의 뒤를 이어 바빌로니아 제국이 가나안 일대를 장악했다.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에 정복당한 북부 이스라엘 왕국에 이어 이제 남부 유다 왕국이 바빌로니아라는 외세에 정복당하고 말았다. 기원전 597년 유다 왕국의 젊은 왕 여호야긴은 바빌로니아에 항복하여, 백성 8천 명과 함께 자기 땅에서 추방당했다. 새로운 축의 시대 전망을 창조한 사람들은 이때 바빌로니아에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예언자 에스겔도 그렇게 끌려간 사람들 중 하나였다.

에스겔은 나중에 환상에서 야훼가 뒤에 남은 유다 사람들의 우상 숭배와 부도덕 때문에 자신의 도시에서 쫓겨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추방당한 사람들도 그런 재앙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음을 깨달아야 했다. 에스겔의 임무는 기원전 597년에 추방당한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은 품지 말아야 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회개하는 것이었고, 어떻게 해서든 바빌로니아에서 제대로 질서 잡힌 생활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슬픔의 무게를 온전히 경험하기 전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 295~296쪽·5장 고난의 시대

바빌로니아의 무자비한 제국 권력의 과시는 추방당한 사람들의 민족적 통일성을 훼손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추방당한 사제와 예언자들은 원한과 복수에 기초한 믿음을 피하고, 모든 생명의 신성함을 인정하는 영성을 창조함으로써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를 뿐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남을 탓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고, 모든 생명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축의 시대’ 통찰의 핵심이었다.

공자, 인(仁)의 나라를 찾아 떠나다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은 천자가 다스리던 주나라가 힘을 잃으면서 중국은 엄청난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른바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제후국들 간에 전쟁이 치열해지고 중원은 폭력에 휩싸였다. 낡은 정치와 사회 구조는 해체되어 갔으며, 중국은 무정부 상태로 곤두박질치는 것처럼 보였다. 조상을 모시던 제의에 대한 경멸이 확산되었고, 예법에 따른 절제의 기풍도 약해졌다. 졸부가 크게 늘었고, 지배계급의 가장 아래쪽에 있던 사(士) 가운데는 평민으로 전락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은 천도(天道)를 이렇게 무시하다가 우주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겠다고 걱정했다. 이 무렵, 노(魯)나라에서 예(禮)의 깊은 뜻을 제대로 해석하면 중국인들을 다시 천도로 되돌릴 수 있다고 믿는 이가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공구였으며, 우리는 흔히 그를 공자라 부른다. 공자에 이르러 마침내 중국의 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공자의) 서(恕)는 ‘매일 종일토록’ 우리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발견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고통을 주는 일을 삼갈 것을 요구한다. 자신을 특별한 별도의 범주에 넣지 말고, 늘 자신의 경험을 타인의 경험과 연결시킬 것을 요구한다. 공자는 황금률(Golden Rule)을 처음 공포한 사람이었다. 공자에게 그것은 초월적 가치였다. 예를 완벽하게 습득하면 그가 인(仁)이라고 부른 것을 얻는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인이라는 말은 원래는 ‘고귀하다’거나 ‘훌륭하다’는 뜻이었지만, 공자의 시대에는 그냥 인간을 뜻했다. 공자는 이 말에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지만, 규정하려 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일부 철학자들이 인을 ‘박애’와 같다고 보았지만, 이것은 공자에게는 그 말의 의미를 너무 좁히는 것이었다. - 357쪽·6장 공감의 발견

공자는 전통적 관습과 전례의 세목에 매달리는 소심한 보수주의자가 아니었다. 그의 전망은 혁명적이었다. 그는 관례적인 제의(예)에 새로운 해석을 부여했다. 이것은 귀족의 존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잊는 실천을 습관으로 만들어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고안한 것이었다. 공자는 제의에서 자기 중심주의를 밀어내 제의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심오한 잠재력을 끄집어냈다. 공자는 또 새로운 평등주의를 도입했다. 전에는 오직 귀족만 예를 수행했다. 이제 공자는 누구라도 전례를 실행하면 출신이 미천한 사람이라도 군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축의 시대 중국의 다른 철학자들은 중국의 많은 문제에 더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만, 그들이 늘 공자만큼 야심이 컸던 것은 아니다. 공자는 법과 질서 이상의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인간의 존엄함, 고귀함, 신성함을 원했으며, 이것은 서(恕)라는 덕을 얻으려고 매일 노력할 때만 얻을 수 있음을 알았다. 실로 대담한 계획이었다.

에우리피데스, 삶을 정화하는 그리스 비극의 힘
다른 지역에서 종교의 사제들과 철학자들이 축의 시대를 개척했다면, 그리스에서는 비극 작가들이 그 임무를 맡았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는 비극이 귀중한 제도가 되었다. 매년 디오니소스 축제 기간에 상연되는 연극은 축의 시대의 자기 성찰을 반영하였다. 이 연극들은 아가멤논, 오이디푸스, 아이아스, 헤라클레스 등 신화의 유명한 인물들이 내적인 여행을 떠나 복잡한 선택 때문에 갈등을 하고 선택의 결과와 마주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 연극들은 축의 시대의 새로운 자의식을 보여준다. 관객은 주인공의 마음이 자기 내부를 향하고, 대안을 명상하고, 고통스럽게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비극 작가들은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신의 본성, 그리스 문명의 가치, 삶의 의미 등 모든 것에 질문을 던졌다. 또한 비극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자신을 ‘타자’에게 비춰 보고, 자신과 전제가 분명히 다른 사람들도 공감의 범위 안에 포함시키라고 가르쳤다.

무엇보다도 비극은 고난을 무대에 올려놓았다. 비극은 관객에게 삶이 두카(dukkha)라는 것, 고통스럽고, 불만스럽고, 비틀린 것임을 잊도록 허락지 않았다. 아이스킬로스(Aeschylos), 소포클레스(Sophocles), 에우리피데스(Euripides) 등 기원전 5세기의 비극 작가들은 폴리스보다 고통받는 개인을 앞세우고, 그 사람의 고통을 분석하고, 관객이 그에게 공감하는 것을 도움으로써 축의 시대 영성의 핵심에 이르렀다. 그리스인은 슬픔과 눈물을 함께 나누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 귀중한 유대를 창조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원수들도 《일리아스》의 끝에서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가 그러는 것처럼 공통의 인간성을 발견했다. 그들의 눈물이 카타르시스가 되어 독기 가득한 증오가 담긴 슬픔을 정화해준 것이다. 아테네 사람들은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부끄러움 없이 큰 소리로 울었다. 이것은 시민 간 유대를 강화해주었을 뿐 아니라, 개인들에게 그들이 슬픔에서 혼자가 아님을 일깨워주었다.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모든 인간이 고난을 겪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타르시스(정화)는 공감과 자비를 경험하는 데서 얻을 수 있었다. 타자와 함께 느끼는 능력이 비극적 경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 386~387쪽·6장 공감의 발견

에우리피데스는 ‘타자’, 심지어 복수를 위해 자신을 논리적으로 설득해 자식들을 살해한 메데이아나 여신 헤라가 불어넣은 광기에 빠져 부인과 자식들을 죽인 헤라클레스 같은 사람들을 향해서도 감정적으로 손을 내미는 비극의 전통을 이어갔다. 《헤라클레스》의 결말부에서 테세우스는 더럽혀지고 망가진 사나이에게 공감하려 한다. 테세우스는 헤라클레스를 무대 뒤로 데려가면서 ‘우정의 굴레’의 표시로 팔짱을 낀다. 합창(코러스)은 ‘애도와 눈물로’ 탄식한다. “오늘 우리는 가장 고귀한 친구를 잃었기 때문이다.” 이 말에 관객도 따라서 울었다. 이것은 우리 안에 깊이 뿌리박힌 편견과 선입관에서 ‘밖으로 나가’(엑스타시스), 연극을 보기 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자비의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 무지의 지혜를 가르친 앎의 교사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질질 끌고 잔혹 행위가 잇따라 일어나던 기원전 420년대에 새로운 철학자가 아테네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멋쟁이 소피스트들과는 달리 그는 꾀죄죄한 편이었다. 그는 돈을 버는 데는 관심이 없었으며, 학생들에게 돈을 받는다는 발상에 경악했다. 소크라테스는 출신이 비천했지만 아테네에서 가장 좋은 집안 출신 청년 몇 명이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왔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에게 매혹되었으며, 그를 철학적 영웅으로 숭배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는 것이 얼마나 적은지 이해했으며, 자기 생각의 한계에 연거푸 마주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남들보다 나은 점이 있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제기하는 문제의 답을 결코 찾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다는 점뿐이었다. 소피스트들은 이 무지로부터 실용적인 행동으로 피신했던 반면,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삶의 깊은 신비를 드러내는 엑스타시스로 경험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장 근본적인 가정에 반드시 질문을 던져야 했다. 그래야 올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으며, 진짜 있는 모습 그대로 사물을 볼 수 있고, 그릇된 의견을 넘어서서 언제나 올바르게 행동하게 해주는 완벽한 직관에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었다. 이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편의에 따라 피상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남겼다고 하는 기억할 만한 말에서 이 점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검토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 444~445쪽·7장 사유의 혁명

그러나 아테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위험한 인물로 보았다. 재판에서는 소크라테스에게 국가의 신들을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신들을 도입하고, 젊은이들을 부패시킨 죄를 물었다. 결국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감옥에서 독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았다. 플라톤의 말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마시기 전에 자신의 몸을 씻었다. 자신이 죽은 뒤에 여자들이 해야 할 일을 덜어주려는 것이었다. 간수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것에 정중하게 감사했다. 심지어 자신의 곤경을 두고 온화한 농담을 하기도 했다. 소크라테스는 차분하게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었으며, 친구들에게 애도하지 말라고 하면서, 곁을 지켜주는 그들의 우정을 조용하고 다정하게 받아들였다.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슬픔 대신 조용하고 수용적인 평화가 있었다. 축의 시대 내내 현자들은 죽음에 몰두했다. 소크라테스는 고통과 고난 가운데에서도 인간이 자신의 환경을 초월하는 평온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고타마 싯다르타, 무아의 발견자, 마음의 혁명가
기원전 5세기 말 무렵, 히말라야 산맥 산기슭에 자리잡은 샤카 공화국에 살던 한 크샤트리아가 머리와 턱수염을 자르고, 출가자의 샛노란 가사를 입고 마가다로 가는 길에 나섰다. 그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였으며, 나이는 29살이었다. 출가자가 된 고타마는 당대 최고의 요가 수행자를 찾아 공부했고 놀라운 성취를 보였다. 스승들은 기뻐했으나 고타마는 만족할 수 없었다. 자기 안에서 진정한 변화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고타마는 금욕주의자들에게 배움을 청했다. 고타마는 극단적인 고행으로 등뼈가 물렛가락처럼 튀어나올 정도로 바짝 말라 거의 죽음에 이를 지경까지 갔다. 그러나 아무리 고행을 해도 욕정과 갈망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평화와 자아의 해방은 찾아오지 않았다. 고타마는 스스로 특별한 요가 훈련법을 계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매일 요가 수련을 통해 의식의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갔으며, 점차 이기적인 갈망과 욕망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7년 동안 끊임없는 자기 수련을 통해 고타마는 마침내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이제 고타마는 ‘깨어 있는 사람’ 또는 ‘깨달은 자’(붓다)가 되었다.

고타마는 괴로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니르바나에 이르는 길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전통적으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팔정도八正道)이라고 부르는 이 길은 도덕, 명상, 지혜로 이루어진 행동 방침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수행자들은 요가 수행을 통해 고타마의 가르침을 ‘직접’ 이해하고 자신의 일상 생활과 통합할 수 있다. …… 니르바나란 무엇일까?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이 말은 고타마가 깨달음을 얻으면서 ‘꺼졌다’는 뜻이다. 고타마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 종종 ‘타타가타’(tathagata, ‘사라졌다’)라고 불렸다. ‘그’는 이제 거기에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적인 소멸을 뜻하지 않는다. 꺼진 것은 그의 인격이 아니라 욕심, 증오, 기만의 불이었다. 붓다(이제 고타마를 이렇게 불러야 한다)는 ‘해로운’ 마음 상태를 눌러 없앰으로써, 자기가 없는 상태로부터 오는 평화를 얻었다. - 479쪽·장 사유의 혁명

붓다는 폭력적이고 슬픈 세상에 살던 자기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안식처 역할을 했다. 그는 니르바나를 찾음으로써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지만, 그것이 자기 사명의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붓다는 공감과 자비의 마음으로 슬픔의 세상에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려 했다. 그는 45년간 지칠 줄 모르고 갠지스 평원의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신과 동물과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사람들은 그의 냉정함에 불쾌함을 느끼지 않았으며, 어떤 대상 또는 어떤 사람을 특별히 더 좋아하지 않는 태도에 풀이 죽지도 않았다. 붓다는 유머가 없고 엄격하고 비인간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외려 그를 만나는 모두에게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그의 변함없고 끈질긴 관대함, 고요, 공정함은 심금을 울리고 사람들의 가장 깊은 갈망과 공명했던 것 같다. 붓다는 소크라테스나 공자와 마찬가지로 카를 야스퍼스가 ‘인격의 모범’이라고 부른 사람이 되었다. 인간이라면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하는 목표를 예증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 축의 시대의 선각자들은 원형적 모델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모방함으로써 그들이 구현한 고양된 인간성을 성취하는 길로 조금이라도 더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 490~491쪽·7장 사유의 혁명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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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르고벼르다 산 책. 원서는 얇은데 번역서는 너무 외관이 사치스럽고 비싼게 단점  구매
커피홀릭 2011-03-16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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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철학의 성립사, 이것은 인간심리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강추.  구매
alicego 2012-07-17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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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더 읽어봐야할 책  구매
장님버드나무 2011-03-04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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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어렵고 심오한 문제를 통찰력 있게 풀어냈다. 곱씹어볼 만한 이야기가 가득.  구매
푸른거리 2012-07-13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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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사를 축의시대로 구분지어 서술한 저자의 논리가 읽을수록 신선하고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구매
의암 2012-08-11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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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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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인은 하늘과 땅의 간극을 보지 않고 오직 그 연속성만을 보았다. 그들은 ‘저 바깥’에서 원가 신성한 것을 찾는 일보다는 이 세계를 하늘의 원형과 일치시켜 더 신성하게 만드는데 관심이 있었다. 여기 땅에서 모든 것을 하늘의 도와 일치시키는 일상적이고 실용적인 노력을 하면서 신성함을 경험햇다. 일식이 일어나면 왕과 봉신들은 지단 주위에 모여 각자 정확한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우주의 질서를 회복하려는 것이엇다. 이렇게 땅은 하늘의 동반자엿다.

왕이 왕으로서 천명을 받아 천자가 되면 지상에서 하늘을 위한 ‘길이 열린다.’ 그는 도덕 즉 ‘도의 힘’이라 부르는 마법적 능력을 부여받는데 이 힘으로 적을 진압하고 충성스런 추종자들을 끌어들이고 자신의 권위를 강제한다. 왕이 일단 이 힘을 가지면 왕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 힘이 발휘된다고 믿었다. 왕의 힘이 강하면 땅이 부서져 꽃이 피어난다. 왕의 힘이 쇠퇴하면 백성이 병들어 때 이르게 죽고 흉년이 들고 우물이 마른다. 자연과 사회는 서로 묶여 있다.

왕은 더할 수 없이 높은 권력을 가졌지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평생 천상의 모범과 일치해야 햇다. 그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왕의 역할은 자신의 힘으로 대외 또는 국내 정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길을 따르는 것이엇다. 왕이 제의적인 의무를 정확하게 이행하면 그의 힘(도덕)이 만물을 ‘차분하고 온순하게’ 만들었다. 이런 신성한 안정 상태를 큰 평화(태평)라 불렀다. 왕은 살아있는 원형이었다. 사람들은 하늘의 아들을 모방하여 자신의 생활이 하늘의 도와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축제는 신성한 사회를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신적인 것에 가까이 다가가 사는 것이었다. 모두에게 남과 바꿀 수 없는 유일무이한 역할이 있었다. 그들은 일상의 자아를 떠남으로써 더 크고 더 중요한 것에 사로잡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의는 극적으로 천궁의 복제품을 창조햇다.

중국인들은 정교하게 고안된 의식의 중요성을 이해햇다. 이런 복잡한 드라마를 공연하면서 그들은 완전한 인간을 행해 나아간다고 느꼈다. 기원전 9세기에 이르면 제의에서 경험하는 변화의 힘이 신들을 다루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햇다. 우리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여 우리 자신과는 다른 존재가 된다. 다른 페르소나를 맡음으로써 우리는 순간적으로 다른 존재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잃는다. 제의는 참여자에게 조화, 아름다움, 신성의 전망을 제시했으며 이 전망은 그들이 일상의 혼란으로 돌아가도 그대로 남았다.

제의의 확립은 주나라의 위대한 업적으로 꼽히며 뒷세대들도 이 점을 인정했다. 축의 시대 이후에 완성된 텍스트인 ‘예기’는 상나라는 영혼을 앞에 두고 제의를 두번째에 놓았으나 주나라는 제의를 앞에 두고 영혼을 두번째에 놓았다고 말한다. 상나라는 제의를 통해 신들을 통제하고 이용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주나라는 직관적으로 제의 자체가 신보다 큰 변화의 힘을 지니고 잇음을 깨달았다.”

공자가 述而不作이라 말할 때 그가 ‘술’하는 대상은 물론 서주의 ‘문화’이다. 그러나 그 문화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면, 그리고 유교가 종교라 불리는지 이해하려면 고대중국인의 天觀, 원형에 대한 사고를 알아야 한다. “예란 하늘의 도(經)이며 땅의 의(義)이니 사람이 해야 할 것이다”란 춘추의 말은 공자에게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었고 유효한 것이엇다.

중국인들의 원형에 대한 사고는 고대인들에게 공통된 것이엇다. 중국인들이 신과 대화하기 뼈에 문자를 썼듯이 이집트에서도 문자는 신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이엇다. 고대인들에게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 하늘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런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엘리아데는 이렇게 요약한다. 고대인들은 “외계의 사물이거나 인간의 행동이거나 간에 그 자체로선 어떤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에 의하면 사물이나 행동은 어떤 가치를 본래 가지는 것이 아니라 획득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서 실재가 된다. 그런데 그럴 수 잇는 것은 사물이나 행동이 그들 자체를 초월하는 다른 실재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돌 중에서 어떤 돌이 거룩한 돌이 되었다고 하자. 그 돌이 거룩하게 된 것은 그 돌이 聖顯(hierophany)이 된다든가 마나를 소유한다든가 혹은 그 돌이 신화적 행위를 기념한다든가 하는 이유 때문이다. 사물은 어떤 외부의 힘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용기이다. 그 외부의 힘은 그 사람을 독특한 것으로 해줄 뿐 아니라 그 사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인간의 행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행동이 의미와 가치를 갖는 것은 자연 그대로의 육체적 여건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 원초적인 행위를 재현하고 신화적 범례를 반복할 때 이다. 음식을 먹는 것도 생리작용이 아니며 결혼과 질탕한 주연도 신화적 원형을 반향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반복되는 이유는 태초에 신들이나 조상들이나 영웅들에 의해 그런 것들이 성별되었기 때문이다.” (M. 엘리아데)

고대인에게 실재란 하늘의 원형(celestial archetype)을 모방한 것일 뿐이었다. 하늘의 장소를 본떠 만들어질 때 도시나 사원이나 집은 실재가 된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티그리스강 은 아누니트 별을 그 모델로 하고 유프라테스강은 스왈로우 별을 모렐로 한다고 한다. 이집트인들은 장소라든가 주의 이름을 천상의 ‘들판’ 이름을 따라 지었다. 먼저 천상의 들판을 안 다음에 지상의 지리와 그것을 동일시 한 것이다.” (엘리아데)

하늘의 따라 만들어진 장소는 ‘세계의 중심’ 또는 우주의 배꼽(Omphalos)이며 그렇기에 거룩한 장소이다. 고대인들은 누구나 자신이 우주의 배꼽, 거룩한 곳에 살고 잇다고 생각햇다. 그들은 성스러운 장소에서 성스러운 행위를 모방하며 성스럽게 살았다.

저자는 아리아인들의 성스러운 삶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들은 이름부터 성스러웟다. “아리아인이라는 말은 자부심의 표현으로서 ‘고귀하다’거나 ‘명예롭다’는 의미엿다. 그들은 기원전 4500년 경부터 카프카스 초원 지대에 살았다. 아리아인들은 조용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멀리 여행할 수 없었다. 말이 아직 가축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야는 초원 지대에 한정되엇다. 그들은 땅을 경작하고 양, 염소, 돼지를 치고 안정성과 지속성을 귀중히 여겼다. 이렇다할 적도 없엇고 새로운 땅을 정복할 야망도 없었다 그들의 종교는 단순하고 평화로웠다. 다른 고대인들처럼 자신의 내부와 자신이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경험햇다. 폭풍, 바람, 나무, 강은 비인격적인 정신이 결여된 현상이 아니었다. 아리아인들에게 인간, 신, 동물, 식물, 자연의 힘은 모두 같은 신성한 영혼의 표현이었으며 이것을 마이뉴 또는 마냐라 불렀다. 이것이 그들에게 생기를 주고 그들을 유지해주고 그들을 모두 함께 묶어주었다. 신들도 인간처럼 우주를 지탱하는 이 힘에 신성한 질서에 복종해야 했다. 이 질서가 삶을 가능하게 했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 유지해주고 진실하고 옳은 것이 무엇인지 정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느리고 무탈한 삶은 아리아인이 최신 기술을 발견하면서 끝이 났다 기원전 1500년 무렵 그들은 카프카스 산맥 남쪽의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인에게서 청동무기를 배웠으며 전차를 얻었고 야생마를 길들이는 법을 배웠다. 남쪽 왕국에서 용병으로 일하고 돌아온 아리아인은 전사가 되엇다. 그들은 이제 빠른 속도로 여행을 할 수 있었고 새로운 기술을 이요해 이웃을 기습하고 가축과 작물을 빼앗았다. 습격과 약탈이 가축을 기르는 것보다 재미도 있고 이익도 많았다. 그들은 죽이고 약탈하며 전통적인 아리아인을 공포에 떨게 햇다. 전통적인 아리아인은 당황하고 겁을 먹었다.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했다. 삶은 엉망으로 뒤집혔고” 더 이상 우주적 질서를 따르는 성스러운 것이 아니게 되었다.

길고 긴 영웅시대가 시작되었다. “힘이 정의였다. 족장들은 이익과 영광을 추구했다. 시인들은 침략, 무모한 배짱, 무용을 칭송했다. 이전의 아리아 종교는 호혜주의, 자기 희생, 동물을 사랑하는 태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가축 약탈자들의 마음을 끌지 못햇다. 이제 습격자들이 갈망하는 신의 모범은 신성한 전사 인드라였다.”

가축 도둑들은 전사가 되엇고 전사는 명예를 아는 귀족이 되었다. 귀족의 뿌리는 언제 어디서든 전쟁이었다. 귀족이 귀족일 수 있는 것은 귀족이 귀족의 자격을 갖는 것은 목숨의 대가였다. 가장 먼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자. 남보다 앞에 서서 죽음을 향해 돌진할 수 있는 자만이 남에게 목숨을 요구할 자격을 가졌다. 남의 앞에 설 자격이 있는 자, 귀족은 전장에서 남의 앞에 서는 자들이 그 기원이었다. 중세 유럽의 기사도는 그런 전사의 에토스가 가장 세련되게 진화한 예일 것이다.

비겁하지 않겠는가?

약자를 보호할 것인가?

스스로를 속이지 않겠는가?

맹세는 죽음으로 지키겠는가?

넌 언제든 죽을 각오가 되었으니 이제 기사다

중세의 기사서약이다. 그 의식이 치뤄졌을 고딕 성당이 머리 속에 그려지는 맹세이다. 중세 기사도를 규정했던 가치는 명예였고 그것은 신의 영광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 외양이 어떻든 그 본질은 전사의 에토스에 있었다.

항우는 길고 긴 중국의 역사에서 전사의 에토스를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항우의 관심은 부귀영화가 아니라 영웅의 업적이었다. 더구나 그는 결과(황제라는 ‘저 자리’)보다 과정(저 자리에 ‘오르는’)을 더 중시했다. 그는 원하는 바를 얻은 후에 무엇을 어떻게 누리며 살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에게는 오직 자신이 바라는 바를 얻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진정한 영웅은 승리를 위해서보다 전투 그 자체에 더 혼신을 다하는 법이다. 어느 영웅이 하릴없이 소일이나 하며 자기 생을 소모하고 싶겠는가. 할 일이 있으며 나서서 해내는 것이 영웅의 자세이다. 무슨 일을 하는 지는 중요치 않으며 그 일을 하고 나서 어떻게 되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감정의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이요 행동하는 방식이다.” (이중톈) 감정의 인간은 머리로 세상을 보지 않고 가슴으로 세상을 느낀다. 감정의 인간에게 삶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미학적이다. 그들에게 삶은 추하거나 멋있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런 삶의 태도를 속된 말로는 폼생폼사라 하며 고상하게는 명예라 한다.

삶의 멋이란, 명예란 항우에게 무엇이었는가는 그의 최후에서 잘 드러난다. “항우는 줄곧 백전백승이었다가 마지막 전쟁에서 참패해 체면을 구기고 집에 돌아가지도 못햇다. 그는 ‘내가 강동의 자제 8천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왔다 지금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니 강동의 부형들이 불쌍히 여겨 나를 왕으로 삼더라도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만나겠는가!’라고 했는데 이는 ‘낯으로 그들을 보러 가겠는가’하는 것이다. 결국 항우는 자살했다. 비록 죽음의 길 밖에 없었지만 죽음의 길도 길이다. 항우가 자살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영웅이라 칭송하며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는 또한 ‘면목이 없다’라는 성어를 남겼으니 영원히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할 수 있다.” (이중톈)

항우에게 체면 또는 명예는 목숨보다 귀했다. 달리 말해 ‘폼’이 망가지는 것은 죽는 것보다 못했던 것이다. “그는 어째서 면목이 없다고 말했을까?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외에도 사람들의 연민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항우처럼 일생동안 강함을 추구해온 인간에게 연민이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연민을 받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

“그에게는 승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전투 그 자체였다.” 그런 미학적 인간에게 구질구질하게 악착같이 포기하지 않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천자의 자리가 아니었고 그가 원한 것은 영웅호걸의 통쾌한 삶일 뿐이었”으니 다 진 싸움에서 구차하게 목숨을 건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전장에서 물러나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 그는 다만 멋진 피날레를 연출하고 싶어햇다.” 삶을 미학적으로 살았던 항우는 그 최후에도 폼(또는 명예)을 꺾지 않았다. 그러나 그 폼, 그 명예가 어떤 명예인가가 문제이다.

‘면목이 없다’ 외에도 항우는 많은 고사성어의 원전이 되었다. 금의환향도 그중 하나이다. 그런데 그 말이 나온 배경이 문제이다.

항우는 진의 수도 함양을 점령한 후 힘없는 어린 황제를 죽이고 궁궐을 불태웠고 백성을 모조리 죽엿다. “역사서에는 이를 두고 성에 모기 새끼 한 마리 없었다고 전한다 분명 아녀자와 어린애도 죽였을 것이다. 모든 일이 끝나자 부하가 간언했다. ‘함양은 제왕의 수도입니다. 함양을 수도로 정하고 천하를 호령하십시오’ 점입가경으로 항우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는 ‘부귀한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누가 알아줄 것인가’라 말했다. 입신출세해 비단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항우는 황궁에서 약탈한 금은보화와 수백명의 미녀들을 수레에 태워 의기양양하게 고향으로 갔다.” (이중톈)

항우는 명예를 중시했다. 그러나 그 명예는 약자를 위한 것도 천하를 위한 것도 아닌 자기를 아는 사람에게만 세우면 되는 폼이었고 명예였다. 그런 명예이니 그가 모르는 사람이 얼마가 죽든 상관이 없었다. “항우는 일단 성을 점령하면 성에 있는 백성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했으며 투항한 병사까지 생매장했다. 커다란 구덩이를 판 다음 수십만명이나 되는 사람을 며칠 밤을 새워 생매장했다.” (이중톈)

항우의 명예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명예였다. 이기적이고 쾌락주의적이고 잔인한 그런 명예는 호머가 그린 그리스 영웅들의 것이기도 하다. 알렉산드로스 역시 그런 삶을 살았다. 스승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말려도 그가 전쟁터까지 끼고 갔던 책은 일리아드였다. 그에게 호머의 영웅들은 삶의 모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영웅들의 삶을 살았다. 명성을 쫓고 과시하기 좋아하는 호머의 영웅들은 책임감 있는 통치자라기 보다는 전사였다.

“호메로스는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더 강렬한 삶을 산다고 말하는 것같다. 만일 영웅의 명예로운 행위가 서사시에서 기억된다면 그는 죽음의 망각을 극복하고 소멸할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가능한 유일한 불명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명성은 생명보다 소중하며 시는 명성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경쟁하는 전사들을 보여준다. 이 영광의 탐구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 나선다. 영웅은 며예와 지위의 문제에 시달리는 자기중심적인 인간이며 시끄럽게 자신의 공적을 떠벌리고 자신의 존엄을 높이기 위해 전체의 이익을 언제든지 희생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런 자기중심적인 전사들은 통치자의 모델이 될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먼저 살았던 공자도 그랫고 당시는 정치철학이 완숙된 시절이었다. 당시 완성된 정치철학에서 군주란 민심을 헤아리고 천명을 받드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더를 움직인 것은 그런 정치철학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야망과 허영에 따라 행동했다.

물론 그는 페르시아 제국을 소수의 병력으로 쓰러트릴 정도로 유능한 전술가였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권력을 다룰줄 아는 노련한 정치가였다. 그리고 그가 능력이 있었기에 그가 이룬 정복사업의 결과 위에서 그의 사후 헬레니즘이란 문명이 태어날 수 있었으며 로마제국이 가능했고 로마제국 위에서 기독교가 일어나고 지금의 서구문명이 태어날 수 있었다. 이것은 분명 그의 업적이다.

그러나 인간 알렉산더에게 세상은 자신의 명성과 새로운 도전 또는 모험을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항우가 제국건설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전쟁 자체에 열광했던 것처럼, 그는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트린 후 통치를 어떻게 할 것이라는 비전이 전혀 없었다. 물론 뛰어난 정치적 감각이 있었지만 그에게는 정복자체가 당기는 것이지 통치는 지겨울 뿐이었다. 그의 사후 그의 제국이 사분오열된 것은 당연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영원한 아이로 살았다. 게다가 술주정뱅이에 변덕스럽고 신경질적인 성격이었다. 그리고 독재적인 기질이 있는 권력욕의 화신이었다.

영웅시대는 항우와 알렉산더 같은 전사들이 세상이엇다. 그리고 그 영웅들의 신이 그들을 닮은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아리아인은 초원 지대에서 습격을 시작한 이후로 자신들의 일상 생활의 경쟁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제의의 형식을 바꾸엇다. 그들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전차와 강력한 청동 검을 사랑했다. 그들은 목축민이엇으며 이웃의 가축을 훔쳐서 생계를 유지했다. 가축 도둑질은 목숨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오락이 아니었다. 또한 행위에 신의 힘을 불어넣는 제의가 결합된 성스러운 활동이었다. 인도의 아리아인들은 역동적인 종교를 우너했다. 그들의 영웅은 이동하는 전사이자 전차를 탄 투사였다. 아리아 전사들은 습격과 전투에서 데바와 아수라가 벌이는 천상의 전투를 재연했다. 그들은 싸움을 할 때 자신을 넘어서서 인드라와 하나가 된 것처럼 느꼈다. 이런 제의들은 그들의 전투에 영혼을 부여했으며 지상의 전투와 신성한 원형을 결합하여 전투를 성스러운 활동으로 만들었다.”

인도 아리아인의 종교에 그리고 그들의 그리스 사촌의 종교는 영광과 공포라는 영웅의 에토스를 재연했다. “전사의 삶 전체가 식량과 부를 둘러싸고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위험한 경쟁 즉 아곤이었으며 이런 경쟁은 죽음으로만 끝날 수 있었다.”

영웅시대는 달리 암흑시대라고도 부른다. “중동에서는 철의 야금 및 가공 기술이 보급됨과 더불어 기원전 1200년부터 기원전 1000년 사이에 침입과 이민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히브리인, 도리아인, 그 밖의 많은 새로운 민족이 역사에 등장하여 야만적이면서 훨씬 평등주의적인 시대를 열었다. 성서 ‘판관기’의 저자는 폭력과 유혈로 가득 찬 그 이야기를 이렇게 요약한다. ‘그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제멋대로 하던 시대였다.’” (윌리엄 맥닐)

일리아드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미케네 문명이 무너진 후 “그리스의 암흑시대 초기에는 정치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부분 스무 명 정도의 소규모 집단을 이루고 목축을 하거나 농사를 지으며 근근히 연명해나갔다. 실제 그리스 인구가 그전의 번영했던 시절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고 경작지도 따라서 감소했으며 당연히 식량생산도 줄었다.

농업이 시들해지자 많은 그리스인들은 유목민처럼 살았다. 머물던 곳의 목초지가 과도하게 방복되면 그 다음에는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떠나야 했다. 운이 좋으면 곡식을 경작할 땅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런 반 정착민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동할 때를 대비하여 간단한 오두막을 짖고 최소한의 집기만을 갖추고 살았다.” (토머스 마틴) 물론 그들은 떠돌며 약탈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파라오 람세스 3세는 북쪽으로부터 이집트의 변방응ㄹ 침략해온 해상 침략자들의 가공할 만한 연합세력을 기원전 1182년에 패퇴시키고 이렇게 말햇다. ’갑자기 사람들이 움직였다. 그 어떤 땅도 그들의 공격을 물리칠 수 없엇다. 그들은 땅끝까지 그들의 영토를 확장하려 들었고 그들의 정신은 자신감과 믿음으로 흘러넘쳤다.’ 이집트의 기록은 이들 바닷사람들(sea people: 암흑시대의 약탈자를 가리키는 역사용어)이 여러 다른 인종으로 구성되었다고 전핝다. 그들은 아마도 미케네 그리스, 에게 해 제도, 아나톨리아. 키프로스, 근동의 여러 지역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통일된 민족집단을 구성하지 않았다. 그들은 본거지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 때문에 본거지를 떠나온 독립된 집단이엇다. 그들 중 일부 세력은 과거의 강력한 지도자 밑에서 한때 용병을 하던 자들이엇다. 그러다 권력과 전리품을 노려 그 지도자들에게 반기를 들었다. 일부 세력은 외국 땅에서 노략질을 하려고 먼 곳에서 온 자들이엇다. 지중해 동부를 휩쓴 바닷사람들은 여러 번에 걸쳐 파괴행위를 자행했다. 공격과 퇴각의 연쇄반응이 반복적으로 확장되는 사이클로 진행됨으로써 더 많은 약탈 집단이 파괴행위에 가담하게 되엇다. 바다사람들 중 일부는 순전히 약탈을 목적으로 했고 일부는 새로운 거주지를 찾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침략자 집단이 자행하는 물질적 피해는 그들이 기존의 정착사회에 끼친 사회적 혼란으로 더욱 악화되엇다. 이런 침략과 이주는 지중해의 정치적 지도와 인구의 지도를 바꾸어 놓았다. 이런 요란한 소동의 이유와 원인은 수수께끼로 남아잇지만 그것이 근동문명과 그리스문명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토머스 마틴)

암흑시대는 그리스와 중동 그리고 인도까지 지배했다. 암흑시대가 길어지면서 사람들은 지쳣다. “’리그베다’의 후기 시들 가운데 몇 편은 전에 볼 수 없는 피로와 비관을 표현한다. ;곤궁과 헐벗음과 피로가 나를 아프게 죄어 온다. 내 마음은 새의 마음처럼 차닥거린다. 쥐가 직조공의 실을 쏠쏠 듯 근심이 나를 갉아먹는다.’ 이런 허약한 상태는 혼란스러운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던 베다 시대 후기의 특징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새로운 시대의 폭력과 무자비함에 당황햇다. 전통적인 가치들은 쓸모없게 되엇고 무너졌다. 익숙한 생활방식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 들어선 질서는 무시무시하고 낯설었다. 인도인들이 삶을 ‘두카’라고 느낀 것도 당연했다. 이 말은 보통 ‘괴로움’이라고 번역하지만 ‘불만족스럽다’, ‘결함이 잇다’, ‘뒤틀렸다’와 같은 말이 원뜻에 더 가깝다.” (저자의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에서)

그리스의 비극은 암흑시대의 두카에서 태어난 예술이다. “비극은 고난을 무대에 올려놓았다. 비극은 관객에게 삶이 두카라는 것, 고통스럽고, 불만스럽고, 비틀린 것임을 잊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기원전 5세기의 비극작가들은 폴리스보다 고통받는 개인을 앞세우고, 그 사람의 고통을 분석하고 관객이 그에게 공감하는 것을 도움으로써 축의 시대 영성의 핵심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이 두카를 그들 자신의 카르마의 결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외부의 신성한 원천에서 나온 것으로 경험한다. 필멸인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책임지지 않는다. 그들은 안티고네처럼 비극을 치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노력을 할만큼 한 뒤에는 당당하게 용기를 내어 운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리스 비극의 비관주의, 숙명론은 그리스인들이 암흑시대에 얻은 트라우마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 트라우마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햇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자였던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아테네의 현자 솔론에게 자신의 보물창고를 보여주었다. 그러면 그 현자가 ‘부의 장대함’에 놀라워하리라 생각햇다. 그리고 크로이소스는 솔론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고 말햇다. 그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솔론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크로이소스가 아니라 한창 나이에 전사한 아테네의 어느 가장인 텔루스라고 답했다. 그 다음으로 행복한 사람도 역시 죽은 두 형제였다. 이 형제는 마치 한 쌍의 황소처럼 자신들을 마차에 매고 달려 어머니를 마을 축제에 모셔다 드리고 나서 쉬려고 곤히 잠든 사이에 세상을 떠났다.

크로이소스는 당연히 당혹했고 분노했다. ‘정말이지 어리석은 자’ 솔론을 멀리 쫓아버렸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는 에피소드이다. “솔론의 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건장한 형제가 휴식을 취하다 곤히 단잠에 빠진 뒤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하게 된것, 그리고 인생의 한창때 아내와 자식들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 젊은 가장, 대체 어떤 면에서 이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볼 수 잇는가?

크로이소스가 갈망했던 손에 잡히지 않는 ‘그것’을 명명하는 단어는 그리스어의 유(eu: 좋은)와 다이몬(daimon: 신, 영혼, 악마)의 합성어인 유다이모니아(eudaimonia)는 행운이란 뜻(좋은 신, 안내해주는 영혼을 옆에 가진다는 것은 행운이므로)을 내포하게 된다. 이 말은 신성의 개념도 띠는데 다이몬이 신들을 대신해서 보이지 않게 인간을 지켜보는 신들의 사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서 불행한 데스데모나는 신들도 인간처럼 변덕을 부린다는 것에 놀란다. 그녀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불행을 뜻하는 디스다이몬을 변형한 것이다. 다이몬은 악귀 또는 악령 즉 데몬의 어원이기도 하다. 그 모호하고 불길한 어떤 의미가 유다이몬에 녹아있다. 크로이소스가 물었을 때 솔론은 운이라는 것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한 것이다.

‘크로이소스, 신이 질투도 하고 인간을 괴롭히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잇는 당신이 내게 인간사에 대해 물었고. 인생을 보자면 원치 않지만 봐야 할 것도 많고 겪고 싶지 않은 고통도 많이 겪게 되는 것이외다. 인간의 수명을 70년으로 봅시다. 윤년을 빼면 25,200일로 환산되니 대략 한 인간 앞에 놓이는 것은 26,250일이오. 이 수많은 날 중 어느 하루도 같은 날이 없소. 그러니 크로이소스, 인간이란 자신 앞에 닥치는 것에 전적으로 달려 있을 뿐이라오. 당신이 아주 대단한 부자이고 많은 사람을 거느린 왕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없는 분명한 것이오. 허나, 당신이 내게 물은 그것은 당신이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내가 대답할 수 없는 문제라오.’

공포를 자아내는 천둥이나 일식, 월식, 공동체 전체를 휩쓸어버리는 주기적인 역병이나 기아, 어느 부락이든 어김없이 존재하는 끔찍하게 뒤틀린 외양을 가진 남녀들, 기껏 5년도 넘기지 못하고 죽는 아이들, 존재의 취약함을 부단히 상기시키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들. 이런 세상에서 삶이란 뭔가 추구해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견디어 내는 것이엇다. 성공적으로 잘 견디어낸 자만이 운좋고 축복받은 행복한 사람들로 간주될 수 있었다.” 솔론이 말한 텔루스는 “역병이나 약탈군에 파괴되지 않은 도시에 살면서 출산 중에 자손을 하나도 잃지 않은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이기도 했다ㅓ. 건강과 유복함을 누렸으며 죽어서도 “아테네 시민들은 그가 숨을 거둔 장소에 공식 장례식을 거행하는 영예를 안겨주는” 명예로운 삶을 살았다.

솔론이 말하는 것은 “진정 그들에게 의미있는 것은 그 마지막 바로 죽음이다. 인간의 행운, 축복이 이제는 더 이상 빼앗길 수 없는 것이 됐음을 마지막에 확신하게 된 것이다. 인생은 불확실성으로 좌우되는 것이므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행복하다고 볼 수 없다. 솔론이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크로이소스는 ‘악마의 엄청난 방문’에 맞닥드리며 비로소 솔론이 남긴 말을 깨닫는다. 아들이 이상한 죽음을 맞고 자신은 신탁을 잘못 이해해 전쟁의 재앙에 휩쓸리며 그의 왕국은 페르시아군에게 파괴당한다. 포로가 되어 장작더미 위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그는 ‘살아 잇는 자는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도다’라고 외치며 솔론의 이름을 세번 부른다.” (대린 맥마흔)

축의 시대는 두카에 대한 것이며 두카의 극복에 대한 것이었다. “축의 시대의 영적 혁명은 혼란, 이주, 정복을 배경으로 이루어졋다. 어떤 사회에 전쟁과 테러가 만연한다면 이것은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준다. 증오와 공포는 그들의 꿈, 관계, 욕망, 야망에 스며든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이런 일이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것을 극복하는 것을 돕기 위해 자아의 더 깊고 덜 의식적인 수준에 뿌리를 둔 교육을 만들어냈다. 그들이 서로 다른 경로를 거쳤음에도 깊은 수준에서는 서로 비슷한 해결책을 제시햇다는 사실은 그들이 인간이 움직이는 방식에서 어떤 중요한 것을 실제로 발견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프로그램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폭력의 원인인 자기 중심주의를 없애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그 첫 프로그램은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인도의 축의 시대는 전례개혁과 함께 시작된다. “희생제는 인도 아리안 사회의 영적 핵심이었다.” 희생제의 의미는 지금도 농촌에 가면 고시레를 볼 수 잇는데 음식을 먹기 전 첫 숟가락의 음식을 조금 떠서 신에게 바치는 제의(祭儀)의 유물이다. 고시레와 마찬가지로 ‘아리아인은 신들이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느라 소비한 에너지를 채워주려고 희생물을 바쳤다.” 고대인들은 사람이 살기 위해선 다른 생물의 죽음 즉 희생이 필요하듯이 신도 살기 위해 그런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희생제는 중국인들의 제의와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이 연결되었다는 원형론을 전제로 한다. 아리아인들이 초원지대에 살때는 그들의 평화로운 삶처럼 희생제 역시 평화로웠지만 아리아인들이 가축도둑으로 거듭나면서 희생제 역시 호전적이고 경쟁적이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9세기 무렵이 되면 아리아인은 점차 약탈보다 농업 생산물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정착인이 되면서 약탈의 악순환을 중단해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통적 제의는 이런 파괴적 패턴을 정당화했을 뿐 아니라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기까지 했다. 사제들은 희생 전례를 체계적으로 평가하여 폭력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는 관행은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희생제의 핵심인 희생 즉 죽음은 내면화되었다.

“후기 베다 시대로 오면서 아리아인은 브라만, 즉 최고의 실재라는 개념을 발전시켯다. 브라만은 데바가 아니라 신들보다 더 높고, 더 깊고, 더 기본적인 힘, 우주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모든 요소득을 한데 묶어 그것들이 파편이 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힘이었다. 브라만은 정의되거나 묘사될 수 없엇다 모든 것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브라만 밖으로 나와 그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제의에서는 경험할 수 있었다.”

희생제의 의미는 브라만을 느끼고 필멸자인 인간의 운명인 죽음을 극복한다는 의미로 확장된다. 그러나 그 자격을 얻으려면 “전리품을 들고 습격에서 안전하게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제의 개혁가들은 죽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하는 대신 자신의 내부로 받아들였다.” 희생 제물과 제물의 제공자가 하나가 되어 “세로운 제의에서 상징적으로 죽어 신들에게 바쳐졌으며” 희생제물처럼 “불멸을 경험했다. ‘그 자신이 희생물이 됨으로써 희생제를 바치는 사람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후원자는 이제 영웅시대의 약탈자들이 만신전의 주인으로 모셨던 “인드라처럼 죽여서 불멸을 얻는 것이 아니라 제의화된 죽음을 겪었다. 그렇게 해서 적어도 의식이 진해오디는 동안만이라도 시간을 초월한 신들의 세계에 들어가야 했다. 그는 이렇게 선포할 수 있다. ‘나는 하늘을, 신들을 얻엇다. 나는 불멸이 되었다.’”

여기서 개혁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발전한다. 필멸자가 불멸자가 된다는 것은 희생제를 바치는 사람은 자신을 바치는 것이며 자신을 바치는 것으로 브라만과 하나가 되어 “그의 자아(아트만)을 재구성한다”는 의미가 된다. 제의의 의미는 다음 세상에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생전에 ‘신성한 자아’를 알기 위한 것으로 바뀐다.

“전례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내면 세계의 발견”이 되었다. 사제들은 “희생제를 드리는 사람의 정신적 상태를 강조하여 그의 관심을 내부로 이끌었다 고대에는 종교가 보통 바깥을 외부의 현실을 가리켰다. 과거의 제의들은 신에게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들의 목표는 가축, 부, 지위 등 물질적 이익을 얻는 것이엇다. 자의식적 반성은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 제의 개혁자들은 선구자였다. 아트만이란 말은 점차 한 인간을 독특하게 만드는 그 사람의 본질적이고 영원한 핵심을 가리키게 되었다.”

내적 자아의 발견은 제의를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혼자서 명상을 하는 것이 외적인 제의만큼이나 효과가 있다. 제의 지식을 아는 자는 제의에 참가하지 않고도 하늘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있다. 고행자도 혼자서 적어도 자신의 신성한 아트만은 창조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따라서 이 순간부터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신과 동급이 되었으며 신들을 섬길 필요가 없었다. 인도에서 축의 시대가 열렷다. 그 이후로 인도의 영적인 탐구는 외적인 신이 아니라 영원한 자아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러나 인도에는 이 득의양한 자기만족이 (영웅들의) 괴물 같은 자기중심주의로 변하지 않도록 해줄 강력한 윤리적 의무가 여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축의 시대의 촉매는 폭력과 그 결과인 무질서엿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질서를 무너트리는 폭력은 자기중심주의에서 나온다고 보았고 질서를 회복하려면 작은 나를 버리고(초월해) 더 큰 나를 깨달아야 된다는 케노시스가 축의 시대의 핵심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전사에겐 케노시스(또는 초월)란 “전사가 자아의 경계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길은 살해의 엑스타시스를 경험할 때뿐이다. 전사는 전쟁의 신 아레스에게 사로잡히면 생명의 엄청난 풀요를 경험하며 신과 같은 상태에 이르고 아르스테이아 속에서 자신을 잃고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도륙한다. 따라서 전쟁은 사람에 의미를 줄 수 잇는 유일한 활동이다.”

전사들의 라그나로크를 끝내려면 케노시스가 필요햇고 축의 시대는 케노시스의 방법론에 관한 것이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인도에서 그 방법론은 자아의 발견이엇다면 중국에선 윤리의 탐구와 함께 시작되었다.

기원전 8세기, 중국의 천자는 더 이상 도덕(도의 힘)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종교도 다시 생각해야 햇다. 왕은 과거의 전례에서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제 무력한 꼭두각시가 되고 말았는데 어떻게 그의 힘을 계속 숭배할 수 있을까?” 왕의 힘은 정치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주적인 문제엿다. 우주의 질서를 떠받치는 힘을 잃었을 때 질서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중국에서도 그 해답은 제의전문가들이 내놓았다. “제의 전문가(儒)들은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귀족 생활의 원리를 정리햇다. 군자는 봉신들의 모임에서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할지 어떻게 서서 사람들과 어떻게 인사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아야 햇다. 언제 이야기를 할지 언제 입을 다물어야 할지도 알아야 했다. 그때그때 정확한 옷을 입고 적절한 몸짓을 하고 적당한 얼굴 표정을 지어야 했다. 이 모든 것에는 종교적 가치가 있었다. 주나 초기에 왕실의 제의는 자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고안되었었다. 이제 군주제가 쇠퇴하자 유는 대평원 지대에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생활 전체를 정교한 제의 수행과 다름없게 바꾸어놓았다.

제의 개혁은 폭넓은 의미를 지니는 원칙에 기초를 두었다. 예는 전례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이런 의식에서 관심을 쏟는 자의 신성함도 높여준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주술적인 개념이지만 깊은 심리적 통찰에 기초를 둔 것이엇다. 일관되게 최고의 존경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이 사람은 자신이 숭배를 받을 자격이 잇다고 느끼게 된다. 전례는 군자의 지위와 위엄을 고양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그러나 제대로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조정에서 자기중심주의를 몰아낼 수도 있었다. 봉건제는 모두가 자기 자리를 지켜야 유지되었다. 봉신이 너무 힘이 강해지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국가의 평형을 흔들 수도 잇었다. 예는 폭력과 교만을 제어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전례는 제방이 홍수를 방지하듯이 무질서를 방지한다.’”

“제의화된 새로운 절제는 점차 중원의 제후국들에 뿌리를 내렸다. 비록 긴장된 시대엿지만 이러한 절제는 예로 표현되는 중국의 이상에 여전히 충성하는 이 오래된 읍성들이 평화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엇다. 제후국들 사이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일정한 테두리 안에 가두어둘 수 있었다. 기원전 7세기가 되자 제후국의 삶은 예로서 세밀하게 규제되어 사회, 정치, 군대 생활이 주나라 조정의 정교한 제의적 의식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제의 개혁의 “목적은 절제와 자제로 우아한 삶을 사는 군자들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엇다.”

그러나 예는 시대를 이길 수 없었다. 예의 내용은 조화이다. 조화는 서로를 존중하는데서 나온다. 그러나 “이런 전례를 따르는 것이 사실 케노시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귀족의 제의화된 생활 양식은 귀족들에게 겉으로는 서로를 존중하며 겸손하게 행동하도록 가르쳤지만 보통의 경우 예의 특징은 자기 이익이엇다. 모든 것이 위신의 문제였다. 귀족은 특권과 명예를 선망했으며 예를 이용하여 자신의 지위를 높엿다.” 결굴 예는 형식만 남고 그 내용은 그 시대의 정신인 자기이익을 담게 되었다. 유가식으로 말하자면 質이 文을 압도했고 무질서는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형식마저도 초나라와 같은 변방의 無禮한 나라들이 무대에 오르면서 무너져 내린다. 초나라 뿐 아니라 “다른 큰 나라들도 전통의 속박을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이제 절제와 양보의 미덕으로 구속했던 전쟁은 달라졌다. “적을 완전히 없애는 한이 있어도 더 많은 영토를 정복하고 확장하려 했다. 전쟁은 과거의 위엄있는 출정과는 사뭇 달라졌다. 제의에 대한 결멸이 확산되었다. 절제의 기풍도 희미해졋다.

이것은 단순한 사회적, 정치적 위기가 아니엇다. 하늘과 땅은 상호의존적이기에 천도를 이렇게 경멸하다가는 우주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겠다고 걱정했다. 노나라의 제의 전문가들은 새로운 탐욕, 폭력, 물질주의를 신성한 제의에 대한 신성모독이라 보앗다.

공자는 “제의의 깊은 의미를 이해했으며 그것을 제대로 해석하면 중국 사람들을 천도로 돌이킬 수 잇다고 확신했다.” 중국의 축의 시대는 공자의 그 확신과 함께 시작되엇다.

“이제 예는 귀족의 탐욕과 허세를 제어하지 못했다. 하늘은 무관심해 보엿다. 공자는 축의 시대의 다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시대로부터 깊은 소외감을 느겼다. 그는 오랫동안 제후국의 행동을 관장했던 전통적인 제의를 무시한 것이 당대 중국에 만연한 무질서의 뿌리 깊은 원인이라 확신햇다. 제후들은 도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치를 쫓고 자신의 이기적인 야심을 채우느라 바밨다. 낡은 세계는 무너져 가는데 과거의 가치를 대신할 새로운 가치는 나타나지 않았다. 공자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좋은 해법은 과거에 잘 운용되었던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엇다.”

그러나 공자가 해석한 전통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엇다. “과거의 종교는 하늘에 초점을 맞추엇다. 사람들은 그저 신과 영혼의 은혜를 얻으려고 의생제를 거행햇다 그러나 공자는 이 세상에 집중했다. 사실 그는 하늘에 관해 전혀 말하지 않는 쪽을 더 좋아햇다. 공자는 중국의 종교를 땅으로 끌어내렸다. 사라믈은 내세에 관심을 두는 대신 여기 아래에서 선해져야 했다. 그들의 궁극적 관심은 하늘이 아니라 도였다. 군자의 과제는 그길을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것이었으며 그 자체에 절대적 가치가 있었다. 그렇게 하면 어떤 장소나 사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선의 상태에 이르렀다. 제의는 그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안내해줄 지도엿다.

공자는 인도의 현자들처럼 ‘에고 원리’를 인간이 편협함과 잔혹의 원천으로 보앗다. 사람들이 삶의 매순간 이기심을 버리고 예의 이타적 요구에 복종한다면 덕의 아름다움에 의해 변할 것읻. 그들은 군자. 즉 우월한 인간이라는 ‘원형’을 따를 것이다. 전례는 일상적인 행동을 다른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공자는 덕이 이타주의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처음으로 분명히 밝힌 사람이다. 공자는 (예의 근본정신인) 황금율을 처음 공포했다. 공자에게 그것은 초월적 가치엿다. 예를 완벽하게 습득하면 그가 仁이라 부른 것을 얻는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공자 이전 제의 개혁자들이 예의 형식만 구할 수 잇었고 내용은 시대의 힘 앞에 무너졌다면 공자는 시대에 맞는 내용을 제시했다. “공자는 인이 도의 힘(도덕)이며 성군들은 이것 때문에 무력 없이 통치할 수 있었다고 믿엇다 인은 마법적 효력이 아니라 정신적 효력으로 간주해야 하며 폭력이나 전쟁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잇다.

공자는 건종적 관습과 전례의 세목에 매달리는 소심한 보수주의자가 아니엇다. 그의 전망은 혁명적이엇다. 그는 관례적인 예에 새로운 해석을 부여했다. 이것은 귀족의 존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잊는 실천을 습관으로 만들어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고안한 것이었다. 공자는 제의에서 자기중심주의를 밀어내 제의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심오한 잠재력을 끄집어냈다. 공자는 굴종적인 순응을 장려하지 않았다. 각 상황이 독특하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판단해야 하기에 예는 상상력과 지성을 요구했다. 공자는 또 새로운 평등주의를 도입했다. 전에는 오직 귀족만 예를 따랐다. 이제 공자는 누구라도 전례를 실행하면 안회처럼 미천한 사람도 군자가 될 수 잇다고 주장햇다. 공자는 법과 질서 이상의 것을 목표로 삼앗다. 그는 인간의 존엄함, 고귀함, 신성함을 원했으며 이것은 인이란 덕을 얻으려고 매일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음을 알앗다. 실로 대담한 계획이엇다.

인은 얻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인은 엄격하지만 환희에 찬 생활방식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초월이다. 동정적이고 공감하는 삶을 살면 우리 자신을 넘어 다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안회는 예와 인이라는 지속적인 규율 덕분에 성스러운 실재를 잠깐 보았다. 이 실제는 내재하는 동시에 초월하는 것이며 안에서 어렴풋하게 나타나는 동시에 함께 벗할 수 잇는 존재이며 ‘내 위에 우뚝 서 잇는’ 것이다.

공자는 삼가는 태도로 자신이 실패자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의 영성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겼다.”


인도의 축의 시대의 다음 단계를 규정한 사람은 브라민 사제가 아니라 출가자엿다. 누가 진정한 브라민인가? 외적인 제의를 거행하는 사제인가, 아니면 어디를 가나 신성한 불(아트만)을 운반하는 출가자인가? 출가자는 축의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종교의 내면화를 처음 성취한 사람들이다. 제의전문가들은 희생제가 신성하고 영원한 자아를 창조한다고 주장했다. 희생제가 곧 아트만이엇다. 제의에는 브라만의 힘이 들어있다. 출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갔다. 출가자는 아트만을 발판으로 우주를 통합하는 힘에 다가갈 수 있었다.” 그리고 우파니샤드는 이렇게 말한다. “아트만은 브라만과 동일하다. 현자가 자기 존재의 내적 핵심을 발견할 수 잇다면 자동적으로 궁극적 실재로 들어가 필멸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아트만은 이제 누구에게나 있는 당연한 것이 되었다. “아트만은 이제 단순히 인간 존재에 생명을 주는 숨이 아니라 들이마시고 내쉬는 그 자체이기도 햇다. 깨달은 사람은 자기 내부에서 세상을 초월하여 위로 올라갈 수단을 발견한다. 그들은 단지 주술적 제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본성의 신비를 아는 과정에서 초월을 경험한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아트만은 희생제를 통해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위와 경험의 규정을 받는” 것이 된다. “인간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은 그가 행동하는 방식과 처신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 행동이 좋으면 좋게 변할 것이다. 행동이 나쁘면 나쁘게 변할 것이다. 바라지 않는 사람, 욕망이 없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고 욕망이 이미 충족되어 잇고 유일한 욕망이 자신의 자아인 사람은 그 핵심적 기능들이 떠나지 않는다. 그가 브라만이며 그는 브라만에게 간다.” 다시 말해 두번 다시 두카의 삶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자신이 온 우주를 포함한 브라만과 동일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현재의 이 제한된 존재에 매달려서 얻을 것이 하나도 없음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행동(카르마)’의 교의를 듣게 된다. 이제 카르마(業)는 인도 영성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이제 신들은 배경으로 물러나 희미해졋다. 초기의 ‘우파니샤드’에서 브라만의 인격화된 펴현인 프라자파티는 이제 평범한 구루가 되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제자는 프라자파티를 지고의 실체로 존중하지 않으면서 그들 자신의 아트만을 구해야 했다. 데바와 아수라도 이 중요한 진리를 배워야 했으며 그래서 인간과 마찬가지로 내부로 향하는 훈련을 열심히 했다.” 여기에서 다시 인도의 축의 시대는 한 단계 도약한다.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와 오나전히 다르고 베다 경전에도 거의 눈길을 돌리지 않는 새로운 철학이 나타났다. 이 철학은 상키아(분별)라 부른다. 인도에서 진실은 객관적 가치가 아니라 치유적 가치를 기준으로 평가된다. 삶의 고통과 좌절을 넘어서려면 에고가 진짜 자아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강렬한 인식 행위를 통해 이 구원의 지식에 이르면 우리는 모크샤(해방)를 달성하게 된다. 상키아의 관점에서 희생제는 소용이 없다. 신들 또한 자연에 갇혀 있으니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쓸모없다. 제의하는 수단으로 하늘에서 살아남을 아트만을 구축하는 것도 역효과다. 에고-자아는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의 가장 진정한 실재에 눈을 뜨는 특별한 앎만이 영원한 해방을 가져온다. 상키아는 사실 (원형론이란) 영속철학의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관점이 발전한 것이다. 사람들으 늘 천상의 모범에 몰입하기를 갈망해왔으나 상키아는 그것이 외적 실재가 아니라 내부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신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참된 자아에 눈을 떠야 절대적인 것을 발견한다는 이야기다. 원형은 머나먼 신화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 내부에 있다.”

상키아는 두가지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하나는 삶은 두카라는 인식이다. 두번째는 요가이다. “요가는 에어로빅 운동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긴장을 풀거나 과도한 불안을 누르거나 자기 삶에 편안함을 느끼도록 돕지도 않았다. 오히려 반대다. 요가는 에고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이엇다. 오랜 시간에 걸쳐 수행자에게 정상적인 의식과 더불어 그 의식의 잘못과 미망까지 없애버리는 가혹한 수련법이엇다. 기원전 6세기에 이르면 요가는 인도의 영적 풍경 안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요가는 인간이 되는 다른 방식에 입문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근본적인 정신적 변화를 의미했다.” 자기 안의 원형을 찾는 방법론인 요가는 “원형적 모범의 모방이라는 전통을 축의 시대 방식으로 새롭게 변형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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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lu 2011-08-30 공감(2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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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보다 중요한 행동과 실천, 그것이 종교다. 새창으로 보기 구매
한 동안 회사를 옮기고 정신이 없어서 책장을 넘길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 번 주말에 축구 보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오랜만에 머리가 개운해 져서 방 구석에 처박혀 있던 [축의 시대]를 꺼내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었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여유였는지... 행복했다.



먼저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느낌은 “이 걸 언제 다 읽나” 였는 데 막상 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이렇게 무거운 주제에 이 정도 속도감이라니……”라는 감탄과 놀라움 이였다. [축의 시대]는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 세계의 주요 종교와 철학에 대한 인문학적 비평이다. 국가별로 살펴보자면 그리스에서는 제우스, 아폴론으로 대표되는 신화의 세계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세계가 완성되고 있었고, 중국은 공자, 묵자, 노자, 장자의 윤리적/정치적 성찰의 시대였으며 이스라엘이 유일신 창조자 야훼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의 예언과 율법의 시대였다면 인도는 우파니샤드, 자이나교, 싯타르타 (붓다)등으로 대표되는 인간 내부의 깨달음에 다다르고자 하는 고행의 시대였다. 이를 종교로 분류해 보자면 중국의 유교와 도교, 인도의 흰두교와 불교, 이스라엘의 유대교, 그리고 그리스의 철학적 합리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저자는 인류사의 철학적, 종교적 유산의 탄생은 모두 다르지만 축의 시대의 종교들이 공유하는 가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첫째, 자기 중심주의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둘째, 종교는 곧 황금률이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남도 하기 싫은 법이다.



셋째, 종교는 사람들이 초월해야 할 대상 – 탐욕, 자기 중심주의, 증오, 폭력 등등 – 에 집중했다.



넷째, 종교적 가르침은 행동 강령이다. 믿음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 물론 유일신을 믿는 유대교는 예외일 수 있지만 유대교가 율법의 종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자비가 제일 중요하다. 자비는 타자에 대한 관심임 동시에 존중이며 배려이다.



그럼 저자가 궁극적으로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현대의 종교들이 축의 시대의 종교가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실천적 행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편협한 자기 중심적 종교주의의 배타성으로 인한 인류의 피해는 정도를 벗어나고 한 참 벗어 났다는 게 종교 비평가인 저자의 정확한 진단이며 이런 동기로 이 책을 쓰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이 책을 한번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책은 서재에 꽂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보는 사전이나 백과사전으로 이용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오랜만에 읽어보는 방대한 역사적 지식을 풍부하고, 명쾌하고, 이해하기 쉽게 풀어간 비범한 책이다. 올 여름에 강력하게 추천하는 인문학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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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hoi92 2012-08-13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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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의 시대 / 카렌 암스트롱 새창으로 보기 구매
'축의 시대'란 무수한 폭력으로 집단을 유지, 발전시켜 나가던 고래의 관습을 타개하기 위해 기원전 400년을 전후로 시작된, 영적인 진리에 대한 갈망의 시기를 가리킨다.

그 흐름의 중심에 있는 선구자들이 바로 소크라테스와 공자, 붓다와 사제 P(이 사랑의 가르침을 완성한 이가 바로 예수)와 같은 현자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제각각의 조건 아래에서 조금씩 다른 사유 과정을 거쳤지만 한가지 공통된 황금률에 도달했으니 그것이 바로 '자신을 귀하게 여기듯이 타인을 대하라'는 명제이다.

이 사랑의 공동체를 완성하기 위해서 소크라테스는 그치지 않는 이성의 물음을 강조했고, 공자는 고대의 이상적인 주공의 예를 되살려 다듬었다.

붓다는 스스로 깨달음의 반열에 올라 중생에게 길을 열어주었으며, 예수는 메시아라는 원천적인 징표 아래 고달픈 백성의 마음을 그러모았다.

많은 시간이 흘러 종교의 교리가 우상화되고 서로가 절대적 우위성을 주장하게 된 지금, '축의 시대'가 지향한 사랑의 가치는 잊혀져가고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 '말씀'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기 때문이리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마태복음 5: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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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 2013-01-23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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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찢긴 고통의 현실에 직면했던 고대의 현자들이 제시한 실천 대응 방안은... 새창으로 보기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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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The Great Transformation 입니다. 하지만 번역 제목이 더 인상적입니다.  '축의 시대'.



저자는 머릿말에서 우리가 이 시대에서 겪고 있는 많은 난관 뒤에는 더 깊은 정신적 위기가 자리잡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전례 없는 규모로 폭력이 분출했던 20세기'를 겪으며 저자가 목격한 바는 '우리가 서로 해치고 상처를 내는 능력은 경제적, 과학적 진보에 뒤처지지 않고 함께 발전해 왔다는 것'과 '인간 존중의 마음을 키우도록 도와주어야 할 종교조차 종종 이 시대의 폭력과 절망을 반영 하는 듯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대한 이런 진단을 내린 뒤에 저자가 눈을 돌린 것은 과거의 역사 중에서 특히 '축의 시대'입니다. 저자는 카를 야스퍼스를 인용하며, '축의 시대'를 정의합니다. 기원전 900년 경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에 세계의 네 지역에서 이후 계속 해서 인류의 정신의 자양분이 될 위대한 전통이 탄생했다고 하며 이 시기가 인류의 정신적 발전에서 중심축을 이룬다 하여 '축의 시대'라 한다고 합니다.



유목 문화에서 차차 농경 문화로 옮겨갈 무렵, 빠르게 진행된 도시화, 차곡차곡 증가하는 부와 늘어가는 인구는 그 이전 시대보다 더한 폭력의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전쟁과 대규모 살상이라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던 많은 사람들은 폭력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질서를 세우고 유지하기 위해,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그 이전까지 막연하게 가져왔던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신념들을 재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주나라의 봉건제에 기반한 통치질서가 세워지기까지, 그리고 그 봉건제가 다시 무너지고 전국 시대를 거쳐 진에 의해 통일되기까지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제자백가로 알려진 다양한 사상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하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주나라의 예전을 발전적으로 재해석해서 다시 세우려는 공자로부터 시작해서 묵자, 장자, 노자, 맹자 등 다양한 사상들이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국가 체제를 효율적으로 정립하게 만든 법가의 정치철학이 진으로 하여금 천하를 통일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스에서는 도시 국가인 폴리스들끼리의 국지적인 경쟁적 발전 단계에서 페르시아와의 전쟁이라는 국제적인 격변에 휩쓸렸던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면서 자신을 둘러싼 자연환경을 이해하게 하는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에우리피데스 등으로 대표되는 그리스의 비극은 고난에 직면한 등장인물에 대한 심리 묘사를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깊은 공감의 경지에 이르게 하였고,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이어지는 합리적, 철학적 사고는 그리스가 페르시아 침략이라는 전대 미문의 고난에 접했을 때, 가장 합리적인 대응방안을 빠르고 신속하게 채택하게 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게 하였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변방인 유다에서 야훼 신앙은 앗시리아와 바빌론의 침공으로 인한 포로기를 겪으며 새롭게 재해석되고 발전했다고 합니다.



인도에서는 하라파 문명과 마우리아 왕조를 겪으면서 자신을 깊게 성찰하는 전통이 세워졌고, 고타마 싯다르타가 등장하여, 불교를 일구어 냈습니다.



이러한 각 지역에서의 사상적 발전은 도덕성, 자비, 비폭력에의 추구를 공통적인 강조점으로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축의 시대의 희망이고, 그 시대 영성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일들의 배경과 그 전개를 10개장에 걸쳐서 설명합니다. 1~3장까지는 축의 시대의 배경이 되는 기원전 1600년경 부터 700년경까지를 다루고, 4~9장까지는 축의 시대인 기원전 700년경부터 220년경까지를 다룹니다.



마지막 10장에서는 '축의 시대의 귀환'이라는 이름으로 기원전 200년경 이후의 시대에 축의 시대의 유산이 제국의 성립, 또는 해체라는 새로운 변화의 상황에서 어떻게 재발견되었는지를 얘기합니다.



중국에서는 한 제국이 성립되고 통치철학으로서의 장점을 가진 유가가 중심적인 사상이 되었지만, 다른 사상들도 폭넓게 수용되었습니다.



마우리아 왕조가 해체된 인도의 불교 전통에서는 새로운 불교 영웅 보디사트바(보살)가 탄생했습니다. 그는 깨달음을 얻어 니르바나에 도달할 수 있음에도,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려고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피난처, 세상의 빛, 세상의 구원 수단의 안내자'가 되기로 하려한 사람들로 축의 시대의 오래된 이상을 새로운 형식으로 번역한 존재였다 합니다.



유대교는 로마의 지배라는 변화된 상황에서 새롭게 개화하였다 합니다. 바리사이파는 유대교의 축의 시대에서 가장 포용력있고 진보적인 영성을 발전시켰습니다. 당시의 대표적인 랍비 힐렐은 토라 전체를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요약했습니다. "당신 자신에게 가증스러운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마시오. 그게 토라의 전부이고, 나머지는 그 주석일 뿐이오. 가서 그것을 공부하시오." 당시 유대교에서 토라의 본질은 이러한 황금률이었습니다.



유대교를 배경으로 한 기독교 역시 이타적인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을 중요한 순종의 규범으로 삼았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자기 비움과 사랑이 기독교의 핵심이었습니다. '사랑은 자만심으로 부풀어 올라 자기에 대한 과장된 관념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텅 빈 것이고, 자기를 잊는 것이고, 끝없이 타인을 존중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축의 시대의 마지막 개화가 서기 7세기의 아라비아에서 이슬람교의 탄생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슬람의 전통은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 태도를 강조했으나 오늘날의 모습은 그러한 전통과 멀어진 모습도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기원전 200년 이후의 주요한 흐름으로 유가를 중심으로 한 사상체계의 안정적 정립, 불교의 갱신, 랍비 유대교로의 변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탄생을 열거하면서 축의 시대가 새롭게 귀환했다고 합니다.



저자는 10장의 마지막 소챕터에서 오늘의 '이 위험한 시대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큰 공포와 고통의 시기에 살고 있다. 축의 시대는 인간 삶의 피할 수 없는 사실인 고난과 직면하라고 가르쳤다. 우리 자신의 고통을 인정할 때에만 타인과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축의 시대 현자들이라면, 우리의 고통이 곪아서 폭력, 불관용, 증오로 터지도록 놓아두는 대신, 그것을 건설적으로 이용하려는 영웅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유다의 예레미야는 추방당한 유대인들에게 원한에 휘둘리지 말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으며, 그리스인은 불과 몇 년 전에 그들의 도시를 유린했던 페르시아인들의 고통에 공감하는비극 서사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축의 시대 현자들이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상황에서 자비의 윤리를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늘 일깨워야 한다. 그들은 상아탑에서 명상을 한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 찢긴 무시무시한 사회, 오랜 가치들이 사라져 가는 사회에 살았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공허와 심연을 의식했다. 이 현자들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이 아니라 실용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공감이 단지 유익하게 들리는 이야기일 뿐 아니라, 실제로 효과가 있다고 확신했다. 자비와 모든 이에 대한 관심은 최선의 정책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통찰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은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시대는 과학과 기술의 천재들의 시대지만, 축의 시대는 영적 천재들의 시대였습니다. 그들은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암 치료법을 찾아내는데 쏟아붓는 것 만큼이나 많은 창조적 에너지를 인류의 영적 불안의 치료법을 찾는데 쏟아 부었습니다.



황금률은 축의 시대에 새롭게 발견된 '개인'들에게 '내가 나 자신을 귀하게 여기듯이 타인도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일깨웠습니다. 저자는 우리의 과제가 이런 통찰을 발젼시켜, 여기에 전지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비극적 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리스인이 이미 알고 있었듯이, 여기에는 간단한 답이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스 비극이라는 장르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사물을 볼 것을 요구합니다. 종교가 우리의 부서진 세계에 빛을 가져오게 하려면, 맹자가 주장했듯이, 우리는 사라진 마음, 우리의 모든 전통의 핵심에 놓여 있는 자비의 정신을 찾으러 나서야 한다고 하며 책을 마무리 합니다.



책을 읽으며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각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각 지역에서의 역사를 시대별로 지역별로 나누어 기술한다기 보다, 같은 시대에 각 지역에서 어떤 흐름들이 있었는지를 차례차례 조망하는 방식의 기술이어서 그 시대 자체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네 개 지역에서의 수백년에 걸친 영적, 종교적 통찰의 결과가 결국 '네 자신이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로 수렴된다는 것은 놀랍고도 감동적인 결론이었습니다.



제레미 리프킨은 우리가 사는 시대가 '공감의 시대'가 되어갈 거라고 얘기합니다.  SNS의 도래와 같은 기술적, 문화적 변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를 더 잘알게 돕게 되므로 '공감'은 이전 시대 보다 조금 더 쉬어질거라 합니다.



반면에 저성장 시대를 거치면서 사람들끼리 더욱 각박해져가는 모습은 이미 전세계적인 현상이 되었습니다. 난민에 대해서 보다 더 엄격해지고, 이민자들에 대한 적대감이 증가한 오늘의 현실은 '공감'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고도 보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남겨진 선택지는 두가지 극단의 사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이 책아 우리에게 주는 통찰은 축의 시대가 남긴 정신적, 영적 경험과 지식의 기반 위에서 공감의 실천을 하는 것이 결국 우리 시대를 변화시킬 것이라는 희망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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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소망 2018-12-21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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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탄생과 철학의 시작 새창으로 보기 구매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
ebs 무슨 독립서점 안내하는 프로에 고미숙쌤이 나와 추천해서 읽었다 바로 후회했다. 너무 두껍고 방대해서...ㅎ

‘대략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에 세계의 네 지역에서 이후 계속해서 인류의 정신에 자양분이 될 위대한 전통이 탄생했다. 중국의 유교와 도교,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 이스라엘의 유일신교, 그리스의 철학적 합리주의가 그것이다.‘

이 시기를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축의 시대‘라 명칭했다고. 그리고 머리말 제목처럼 우리는 축의 시대의 통찰을 넘어선 적이 없고. 늘 근원적 질문의 철학적 해답을 찾을땐 이 축의 시대의 통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읽어보니 어렵지 않고 쉽게 읽히고 역사책이나 인문서를 읽을때마다 언급되는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는데 그 발생 과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어 흥미롭게 시작하지만 역시나 종교 철학의 방대한 시대 역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며 읽기가 결코 쉽지 않은 책이다. 중간쯤 읽으며 이번 첫 독서는 그냥 전체적 흐름을 익히는 수준에서 만족하자고 스스로 저절로 다짐하게 되더라는.ㅎ 두세번은 읽어야 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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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산책 2020-03-02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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