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코드, 천사와 악마와 같은 책을 보면, 정통 카톨릭과 이들로부터 탄압을 받은 종교 단체(템플 기사단, 일루미나티 등)의 이야기가 나온다. 비밀스러운 종교 단체 또는 거대 종교에 대항하는 비밀 조직에 대한 이야기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왔다. 이는 음모론이 계속 사람들을 통해 전해지는 것과 같다.
일레인 페이절스는 예전에 서평 글에서 보고 기억해둔 학자였는데 우연히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권위를 중요시하지 않았으며, -비록 전부는 아니지만- 여성과 남성에 대해 대등한 관점을 유지했던 영지주의자들은 어찌보면 예수의 뜻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카톨릭/기독교 신자가 아닌) 나는 정통 카톨릭의 순기능 보다는 역기능에 더 주목하고 있어왔고, 마리아 복음서와 같이 여성이 초기 카톨릭의 성립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알리는 문서들이 영지주의자들의 문서로 분류되기도 해서, 카톨릭의 대안적 요소로 영지주의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보다 올바르다고 해서 사회의 핵심 혹은 주도 세력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2000년 전의 종교계도 마찬가지였나보다.
이 책은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다량의 영지주의 문서의 내용을 설명하며, 카톨릭이 정치적/사회적 종교 조직을 어떻게 형성하였는지를 쉽게 설명하고 있다. 1945년에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복음서(나그함마디 복음서)는 카톨릭이 철저하게 배제시키고 불살라 없애려 했기에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철저하게 대비되는 내용이 다수를 이룬다.
“예를 들어 <진리 복음서>는 뱀의 시각에서 에덴 동산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영지주의 문헌마다 신성한 지혜의 본원으로 묘사되는 뱀은 아담과 이브를 설득하여 선악과를 나누어 먹도록 만든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들이 행여 지혜를 얻게 될까 시기하여 열매를 먹으면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엄포를 놓고, 마침내 아담과 이브가 지혜를 얻자 낙원에서 추방해 버린다”(p15)
뱀과 여성이 카톨릭에서는 죄많은 존재로 나오지만 영지주의에서는 그렇지 않다. 특히 영지주의 문헌에서 여성은 카톨릭과 달리 매우 예수에 가깝고,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전파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반면 베드로에 대한 묘사는 그렇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카톨릭은 영지주의 문헌을 없애려 온갖 노력을 기울였을지 모른다. 하느님 아버지라는 기도문에서 늘 가졌던 의문, 왜 하느님이 아버지인가?에 대한 이유는 여성을 철저히 종교의 외부로 몰아내려했던 초기 카톨릭의 정치/사회적 노력의 결실이 아닐까 싶다.
“정통파 유대교도들과 기독교도들은 인간과 조물주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신은 인간과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이다. 그러나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복음서의 저자들 중에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에게 있어 스스로에 대한 지식은 곧 신에 대한 지식이며, 자아와 창조주는 동일하다”(p19)
영지주의자들은 죄나 회개, 순교보다는 지식에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은 자는 예수와 동등해진다고 한다. 카톨릭에서 보기엔 기겁할 내용이긴 하다. 믿는 자들 사이에도 조직과 서열을 두었는데, 예수와 인간 사이의 벽을 허무는 내용은 얼마나 위험한가. 그래서 초기 카톨릭은 모든 영지주의 책을 불사르려 했다. 진의 시황제와 비슷하다… 한국도 조선조에 그들의 권위에 위해가 되는 책을 불사르려 했다. 권력자들 사이에 “반대되는 책을 불살라라”하는 교지나 칙훈이 전해지는 건 아닐까?
개인의 수행을 통한 지식/앎에의 도달이라는 점에서 영지주의는 불교와 관련성이 있다. 종교라는 것이 인간 사회에서 발생되는 것이므로, 주변의 종교나 사회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소아시아 지역과 같이 아시아에 가까운 지역이나 아프리카에서 영지주의가 발달한 것은 이러한 맥락과 같을 것이다.
그럼, 카톨릭은 왜 영지주의를 배제했는가?
카톨릭은 베드로를 권위자로 하고 있다. 이러한 연결고리는 “예수의 부활”을 처음 목도한 자가 베드로라는 카톨릭 정전(신약성경)의 내용에 기초하고, 그 결과 베드로가 교회의 정당한 지도자가 된다. 이는 후일 카톨릭의 조직을 세우는 기초가 된다고 한다.
“이러한 이론(즉, 모든 권위는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보고 겪은 열두 제자로부터 나오며, 앞으로 누구도 다시는 그러한 경험을 할 수 없으리라는 이론)은 공동체의 정치적 구조에 있어 엄청난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독일 학자 칼 홀이 지적했던 바와 같이, 이 이론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닌 소수의 사람들만이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제한하고 있다. 둘째로, 오직 사도들만이 그들을 계승할 후대 지도자들을 임명할 수 있다고 암시하고 있다.”(p48)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부활을 다르게 보고, 이를 영적인 사건으로 본다. 육체로서의 부활이라기 보다는 영적으로 그러한 것을 감지했다는 것이다. 즉 환상에서 본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환상은 아니며, 영적인 자각, 성숙을 통해 인지하게 된 사건이라고 한다. 마리아 복음서에서는 성경의 마가/요한 복음에서의 내용과 일치하게 마리아가 예수의 복음을 최초로 인식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p49 참조). 부활을 영적 사건으로, 그리고 예수와의 만남이 동시대가 아니라 시대를 넘어서도 가능하다는 것에 중점을 두었기에, 사도의 권위는 영지주의에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결과, 영지주의자들은 사도들에게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고, 카톨릭의 근간이었던 주교 제도에도 복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영지주의자들은 왜 카톨릭과 같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된 것일까? 카톨릭은 공개적인 가르침에 집중을 한 반면, 영지주의자들은 일부, 그러니까 지식을 전수받을 만한 사람에게 지식을 나누어 주는 방식을 택했다. 통찰력 있는 자들이 깨달음을 통해 전수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영지주의의 영향력을 축소시켰다.
“후대의 누구도 사도들이 그러했듯 그리스도의 살아 생전과 부활의 순간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각자 사도들이 세운 로마의 교회 및 주교들의 권위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중략) 정통파 교회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성직자들이나 그들의 가르침은 영지주의자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지’를 부여받은 사람은 모두 교회의 가르침을 뛰어넘으며 교회의 계급적 권위를 초월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부활에 대한 논쟁이, 기독교 운동을 제도적 종교로 자리잡게 만드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음이 입증되었다. 기독교인들은 모두 원칙적으로 오직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만이 궁극적인 영적 권위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오늘날 누가 그 권위를 행사할 것인가가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중략) (영지주의자들) 그들은 개개인의 경험만이 진리의 궁극적인 판단 기준을 제공하며, 간접적으로 전달된 증언과 전통-영지주의 전통까지도!- 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중략) 이 이론을 거부했던 사람들(카톨릭)은 후대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사도의 증언을 심지어 스스로의 경험보다 더 신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략) 사회적 질서의 관점에서 보자면, 부활에 대한 정통파(카톨릭)의 가르침은 전혀 다른 권위를 낳았다. 즉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특정 계급에 속한 사람들의 권위를 거쳐야만 하는 계급 제도가 생겨난 것이다.” (p67-70)
결국, 영지주의는 신자들에게 믿음 뿐만 아니라 고민과 내면의 성장을 요구했지만, 카톨릭은 믿음만을 요구했다. 어떤 고민이 아니라, 권위를 따르고 받아들이면 되도록. 그래서 성경에서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믿음으로 받아드릴 수 있도록. 어찌보면 단순하고 이해가지 않지만, 인간은 그리 논리적이지도, 내면의 성장만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과거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다.
카톨릭은 초기에 종교의 조직적 기틀을 잡기 위해 사도들의 절대적 권위를 내세울 수 있도록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여성은 배제되었고, 사도-주교-평신도와 같은 계층적인 구조가 탄생하게 되었다. 영지주의는 그러지 못했다. 모든 영지주의가 여성을 동등하게 본 것은 아니지만, 카톨릭에서 매우 낮추어졌으나 마리아 복음서 등의 영지주의 문헌에서는 예수의 의지를 가장 잘 이해한, 베드로보다 더 높은(?) 자가 마리아라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베드로의 권위를 못살리는 인물이라 카톨릭에서 그렇게 음해했을 가능성도 많다.
그렇다면, 이토록 여성을 하대하고, 신자들 간의 계층을 두었던 카톨릭은 어떻게 교세를 확장하였고, 여성과 평등을 고려하였던 영지주의는 어떻게 역사의 뒤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했던 것일까? 왜 초기의 예수를 믿던 자들은 –내 생각에는- 보다 예수의 뜻에 가까운 영지주의보다 카톨릭을 선택했던 것일까? 조직이 없어서? 베드로 이후의 주교들이 가지는 카리스마가 없어서?
종교가 형성되는 시기의 정치적, 사회적 긴장관계와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의 성향은무시하기 어렵다. 이 책의 저자는 초기 기독교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주교로, 사제로 참여했지만 200년을 지나며 이런 경향이 사라졌다고 한다. 로마에서조차도 여성들은 운동 경기에 참여하고 전쟁에도 참여했다. 그리스/소아시아나 이집트 지역 역시 높은 수준의 여성 해방과 여성의 참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유대교 공동체의 여자들은 공공장소에서 행하는 예배, 교육, 사회 및 정치 활동에의 참여가 용납되지 않았다.”(p116)
저자는 초기의 여성 참여가 200년을 전후로 여성 배제로 바뀐 카톨릭의 특성은 마리아로 인해 베드로의 권위 잠식을 우려한 카톨릭의 두려움, 헬레니즘화 된 유대인들의 반여성적 태도의 흡수, 영지주의와 구별짓기 위한 반여성의 태도 등 복합적 요인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울러, 나는 게르만 족으로의 종교 전파도 영향을 가지지 않았나 싶다. 게르만 족은 대체적으로 가부장적 성격이 강했고, 여성을 비하하는 관습이 있었다. 유대인과 게르만족의 여성 비하 관습과 영지주의/마리아로부터 베드로와 주교의 정통성을 쌓기 위한 움직임이 결국, 초기 기독교의 모습을 벗어나(더욱 엄밀히 말하면, 예수의 가르침을 벗어나) 반여성인 모습을 띄며 가톨릭은 정치화되었다.
그리스정교회보다 로마카톨릭이 더 여성을 강하게 억압했던 것을 볼 때, 확실히 그 지역 사람들의 관습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비잔틴 제국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서유럽의 그것 보다 높았으며, 왕위계승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아무래도 비잔틴 제국은 소아시아,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과의 교류가 잦았기 때문이리라.
조직을 만드는 과정에서 카톨릭은 믿음을 단순화 시켜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반면 영지주의자들은 부름을 받은 대다수 중에서 선택은 소수가 된다는 판단하에, 신자들 사이에도 영지 능력의 유무를 구별했다.
“정통파 지도자들은 이러한-영지주의자들의- 종교적 엘리트 의식을 거부하고, 대신 보편적 교회를 건설하려 애썼다. 모든 사람들에게 교회를 개방하겠다는 의지를 실현하기 위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조직 체계에 복종하겠다는 사람이면 누구든 신분, 인종, 문화 학력에 관계없이 환영했다. 주교들은 조직 체계의 핵심 3요소인 교리, 의식, 교계제도 중 어느 한가지라도 의구심을 품는 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영지주의 교인들은 세가지 모두에 이의를 제기하였던 것이다. 정통파 지도자들은 영지주의를 억압함으로써 자신들의 조직 체계를 공고히 하며, 모든 교인들을 가까스로 하나의 교회 안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그들은 교역자와 평신도 사이에만 구분을 두었을 뿐, 교인들을 1등급, 2등급 등으로 구분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으며, 또한 교리의 준수, 의식에의 참여, 사제 및 주교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는 자들을 엄중히 처단했다. 이러한 체계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종파를 구축하려 했던 영지주의 교회는 약 200~300년 후 사라지고 말았다” (p188-189)
역설적으로 주교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았으나 영지라는 높은 수준을 요구했던 영지주의는 주교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위에 복종을 하면 신자로 인정했던 카톨릭을 넘을 수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뭘 몰라서 권위에의 맹종으로 카톨릭을 택했던 것이 아닐 것이다. 영지주의는 인간의 내면적 성숙이 반드시 필요함을 주장했다. 영지를 얻기 위해서는 고독한 수행과 자아 발견이라는 길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통파 기독교는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며 사회 속에 융화가 되기 쉽게 했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덕’을 설명하였으며, 고민하지 않아도 사도/주교의 권위와 말을 따르면 되도록 했다. 초기에는 로마와 반목하였으나, 이후 통치자와 길을 함께하는 정통파 기독교는 권위가 핵심인 종교였다. 그리고 이러한 권위는 종교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인 ‘마음의 평화’에 사람들이 보다 가깝게 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카톨릭은 인간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조직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앞으로도 많이 고민해야 할 지점이 아닐까 한다.
카톨릭/기독교 신자가 아니지만 이 종교에는 관심이 많다. 그 이유는 일견 불합리해 보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경전의 모든 말들을 자구 그대로 믿고 있고, 그러한 불합리성을 권위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종교의 가르침 보다는 이 종교의 움직임이 늘 궁금했다. 영지주의의 문헌이 사실인지 아닌지, 혹은 성경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등에 대한 진위는 학자들의 몫일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카톨릭/기독교가 어떻게 사람들을 모아서 조직화 시켰으며, 어떻게 권력에 가까이 갔으며, 어떻게 대중적인 믿음(특히 여성과 낮은 계급을 차별하였고, 비유럽인들에게 제국/식민주의의 고통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을 유지하는 가이다.
영지주의의 실패 사례는 역설적으로 대중이 정치에 깊이 관여할 수 있는 요즘 주목해야 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지식을 중요시 여기고, 다수에 대한 지식의 전파 보다는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 사이의 지식 전달을 중요시 했다. 일반 민중들이 카톨릭을 선택한 것은, 영지주의자가 민중을 껴안을 수 있는 기본 토대를 갖추었음에도, 외부에 보여지는 모습은 그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외부의 모습이 타인에 의해 덧칠된 것이었던, 내부의 고집으로 그렇게 보여졌던, 대중과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민주주의에서는 반드시 고민하고 점검해봐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지식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보다 많이 녹아내고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있어야 참된 지식이 아닐까?
** 덧붙여, 관련 종교의 신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치적,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이 종교의 역기능은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물론 불교와 이슬람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평신도들의 선한 마음과 예수, 그리고, 선한 의지와 행동의 성직자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난 2천년간의 역사를 바라보면, 오로지 선하게 모든 지역의, 모든 계급의, 모든 성별의 인간을 위한 훌륭한 종교라고는 도저히 부를 수 없다는 것은 모두 인정할 것이다.
** 잘 쓰여진 책이다. 영지주의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한다. 하나 아쉬운 점은 읽는 도중에 ‘첫째’라는 말이 나오는데 ‘둘째’나 ‘셋째’가 안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 ‘둘째’는 나오는데 앞을 뒤져봐도 연관되는 ‘첫째’가 없는 경우가 있다. 그 점이 글을 읽는데 가끔 걸리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