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29
인류가 일궈낸 정신적 발전의 ‘황금률’을 찾아서 - 교수신문
인류가 일궈낸 정신적 발전의 ‘황금률’을 찾아서 - 교수신문
인류가 일궈낸 정신적 발전의 ‘황금률’을 찾아서
정영목 이화여대·번역가
승인 2010.12.27
[책을 말하다] 카렌 암스트롱 지음, 『축의 시대』(정영목 옮김, 교양인, 2010.12)
‘축의 시대’라는 말은 물론 카를 야스퍼스가 사용한 용어다. 야스퍼스는 인류의 역사를 역사철학의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대략 기원전 800년부터 200년 사이에 중국, 인도, 그리스, 근동 등 세계의 네 지역에서 위대한 종교적, 사상적 전통이 탄생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인류의 정신적 축이 돼 역사의 바퀴를 지금까지 계속 굴려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영국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는 야스퍼스가 포착해낸 그 시대에 실제로 그 네 지역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시간 순서에 따라 살펴보는 책이다.
따라서 암스트롱의 책은 야스퍼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구체적으로 실증해내는 측면도 있다. 실제로 암스트롱은 야스퍼스 이후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야스퍼스가 좁게 잡았던 시대를 약간 넓히고(기원전 800년을 900년으로), 조로아스터, 노자 등 주요 등장인물들의 활동 시기를 정정할 뿐, 야스퍼스가 제시한 틀에 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또 야스퍼스의 생각을 확대해, 16세기 과학혁명 이후의 시기를 ‘제2의 축의 시대’라고 부르며 이 시대의 주역으로 뉴턴,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을 꼽기도 한다. 암스트롱은 이런 식으로 야스퍼스가 제시한 틀을 받아들인 뒤에는 역사철학이나 문명사의 맥락에서 그의 틀을 검증하는 일에 더 매달리지 않는다. 사실 암스트롱의 관심은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시기에 인류에게 중요한 영적 발전이 이루어졌다면 그 발전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작업 자체가 야스퍼스의 틀을 풍부하게 채우는 면은 분명히 있지만, 그렇다고 암스트롱이 그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 작업을 하면서 야스퍼스 철학의 다른 도구를 빌려오는 일도 거의 없다. 일단 야스퍼스의 틀을 통과해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로 진입하면, 이제 야스퍼스는 잊어도 좋다고 말할 수 있다.
암스트롱의 책이 야스퍼스의 주장에 대한 추상적인 학문적 관심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는 점은 그녀가 축의 시대에 주목하는 이유를 밝힌 머리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암스트롱은 현대 인간의 정신적 위기는 기존의 종교적 틀로는 해결할 수 없으며, 이 위기를 돌파해 인간의 정신적 삶을 감당해낼 수 있는 새로운 도약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대량 살상에 이용되는 “뛰어난 과학기술적 재능에 뒤처지지 않는 어떤 정신적 혁명이 없으면, 이 행성을 구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암스트롱은 이런 절실한 위기감 때문에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종교와 사상의 뿌리가 박혀 있는 축의 시대로 들어가보려고 한 것이며, 이때 그녀가 우선 주목한 점은 축의 시대의 사상들 또한 안온한 온실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 찢긴 무시무시한 사회, 오랜 가치들이 사라져 가는 사회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축의 시대는 주 왕조의 붕괴와 더불어 시작돼 어지러운 춘추전국 시대에 공자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인도의 축의 시대를 이끈 ‘우파니샤드’의 제의 전문가들은 하라파 문명(인더스 문명)이 해체되면서 등장했으며, 고타마 싯다르타는 이들의 탐구를 극한으로 밀고 나아갔다. 그리스의 변화는 미케네 왕국이 붕괴하면서 시작돼, 가치의 혼란과 호전적인 분위기 속에서 소크라테스나 소포클레스가 탄생했다. 근동에서는 조국의 붕괴와 추방이라는 엄청난 충격을 겪은 상황에서 이사야, 예레미야 등의 예언자들이 극도의 고통에 시달리며 자기를 버리고 야훼 신앙을 재해석했다.
이렇게 네 지역에서 축의 시대가 개화하기까지는 급격한 도시화와 인구 증가로 인한 사회경제적 변화, 계속되는 전쟁과 대규모 살상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이런 사회적 격변이 사람들에게 정신적 위기를 가져왔으며, 많은 사람들이 영성을 지배하던 기존의 틀로는 도저히 자신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됐다. 이들은 비슷한 위기에서 출발한 만큼 비슷한 방식으로 돌파구를 찾아나갔다.
축의 시대 이전에 영성을 지배하던 틀의 가장 정교한 표현물은 희생제로 대표되는 제의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외부의 초월적 존재와 인간을 맺어주는 핵심적인 통로였던 제의가 사회적 격변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자 개혁가들은 제의를 재해석하게 됐다.
예를 들어 축의 시대의 선두에 섰던 기원전 9세기 인도의 사제들은 제의를 드리는 대상에서 제의를 드리는 사람 자신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들은 제의를 드리는 사람의 정신적 상태를 강조하면서 본격적으로 인간 내면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탐구가 시작됐다. 그러나 이 ‘나’라는 것은 불멸의 진리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인 동시에 모든 고통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현실이 고통이 될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자기중심주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를 아는 동시에 ‘나’를 버리는 현란한 영적 곡예가 시작됐다. 이것은 곧 ‘고통’이 보편적 상황임을 인정하고, 그 바탕에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 나를 비움으로써 모든 사람에 대한 관심과 자비로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결국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타인에 대한 사랑밖에 없었다. 이렇게 축의 시대의 성과인 중국의 인이나 겸애, 인도의 자비, 근동의 회개, 그리스의 비극 등은 모두 남이 자신에게 하기를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않는다는 황금률로 귀결되는 것이다.
저자에게 놀라운 점은 바로 이런 주제 자체를 이 책을 서술하는 틀로 사용하면서, 그것을 연대기적 서술 및 각 지역 역사의 병치와 결합해냈다는 것이다. 이런 서술이 가능했다는 것 자체가 축의 시대의 인류에게 공통된 위기와 해법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형식과 내용의 통일이라는 면에서 『축의 시대』는 최고 수준에 이른 책이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또 하나 놓치면 안 되는 점은 이 책이 역사철학이나 문명사와 관련된 명제와 연구를 구체적인 현실적 과제와 결합시키는 대단히 실천적인 글쓰기의 모범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눈에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인류가 축의 시대에 정신적으로 도약한 계기를 인류 외부에서 찾지 않고, 현실적 삶의 위기를 맞아 그것을 타개해나가려는 인간들 자신의 고된 노력의 결실로 본 종교학자 암스트롱의 입장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이 세계의 현실을 반영하는 혁신적인 믿음을 창조하는 것이다.”
정영목 이화여대·번역가
서울대 영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화여대 번역대학원 겸임교수다. 역서로 『지젝이 만난 레닌』, 『마르크스평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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