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30

불교언론-29. 허준의‘잔등’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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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허준의‘잔등’

이미령
승인 2015.03.17 11:54


소년의 뱀장어와 할머니 잔등불에 담긴 증오 혹은 연민


▲ ‘잔등’
허준 중편소설
창비출판사
20세기 한국소설 제12권1945년 8월15일 마침내 일제가 항복했습니다. 정말이지 그들은 지독했습니다. 남의 땅에 무단으로 쳐들어와서 돈 되는 것은 무엇이든 빼앗았습니다. 이 땅의 주인들은 저항 한 번 못 하고 고스란히 다 내줘야 했습니다. 그랬던 시절이 이제 끝이 났습니다.

해방을 맞아 이 땅 38선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들어왔고, 저들의 통제 아래 그럭저럭 새로운 질서가 잡혀가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패전한 일본인들의 입장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이제 서러움과 모진 학대는 저들 차례가 되었습니다.

월북작가 허준의 중편소설 <잔등>은 바로 이런 시점에 함경도 청진 땅을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만주에서 살고 있던 화가지망생 천복은 해방 조국을 맞아 친구 방(方)과 함께 서울로 돌아오기로 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만주 장천을 떠나 회령까지 도착했고,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함경도 청진 땅으로 들어오려 했다가 만원기차에서 친구와 그만 헤어지고 맙니다. 천복은 우여곡절 끝에 트럭을 얻어 탔고, 수많은 난민들을 지붕 위까지 싣고 오느라 더디게 달리던 기차보다 더 먼저 청진에 도착합니다.

청진에 도착한 그는 친구가 탄 기차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냅니다. 해방을 맞고 보니 억척스레 만주 땅을 개척했다가 일본인들에게 고스란히 토지를 빼앗긴 친척들도 생각납니다. 저들도 이제 떳떳한 독립국가의 주인으로서 제 권리를 되찾을 수 있겠지…하며 자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가을볕이 찬란하게 쏟아지는 강둑에서 하릴없이 상념에 잠겨 있는 그때 난데없이 소리가 들립니다.

찰그닥-.

소년 하나가 강에서 뱀장어를 잡아 강둑에 내던지는 소리입니다. 얼핏 보기에도 나이 어린 소년인데 뱀장어를 삼지창으로 찍어 낚아 올리는 솜씨는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가리가 삼지창에 찍혀 피투성이가 된 뱀장어는 뭍으로 내동댕이쳐지기 무섭게 필사적으로 물을 향해 꿈틀거립니다.

‘삼지창 끝에 박히었던 장어의 대가리는 옥신각신 진탕으로 이겨져서 여지없이 된 데다가 뛰는 때마다 피가 뿜어져 나온 부분이 모래와 반죽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장(細長)의 동물은 그 전신 토막토막이 전수이 생명이라는 듯이 잠시도 가만있지는 아니하였다. 제가 얼마나 뛰랴, 뛰면 무엇 하랴 하고 얕잡아보고 앉았는 사이에 여러 번 여러 수십 번도 더 툭툭거리기질을 하는가했더니 어느 덧 물 언저리까지 접근하여 가서 한 번 더 뛰면 물속으로 뛰어 들어갈 수가 있게까지 된 것이 아닌가.’

하여, 천복은 서둘러 일어나 뱀장어를 다시 낚아 올려 이전 자리에 팽개쳐버립니다. 소년이 힘들게 낚은 것을 눈앞에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지요. 하지만 뱀장어는 어떻게 해서라도 물로 들어가려 몸부림을 칩니다. 작가는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목숨이 어디가 붙었는지도 모르는 그 목숨에 대한 본능적인 강렬한 집착-그리고 그 본능의 정확성은 놀라리만큼 큰 것이었다. 곰불락일락 쳐보아서 전후좌우의 식별이 없이 그저 안타까워서 못 견디는 맹목적인 발동같이 보이지만 나중에 그 단말마적 운동이 그려나간 선을 따라가보면 그것은 언제나 일정한 것이었다. 그것은 자기의 생명이 찾아야 할 방향을 으레 지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뱀장어를 지켜준 덕분에 주인공 천복은 소년과 말문을 트게 됩니다. 열서너 살 정도 된 소년은 이 뱀장어를 수용소에 갇혀 있는 일본인들에게 판다고 말합니다. 일본인들은 전 재산을 재주껏 빼돌리고 감춰둔 채 스스로를 알거지라고 하소연하고 있지만 그래도 음식 본능은 감출 수 없는지 소년의 뱀장어를 사먹기 위해 품에서 돈을 꺼냅니다. 소년은 뱀장어를 팔면서 낯을 익혀둔 일본인들이 재산을 빼돌려 수용소를 탈출할 때 그들을 검거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도 합니다.

소년의 눈에는 일본인에 대한 분노와 경멸이 이글이글 불타오릅니다. 하긴, 왜 안 그러겠습니까.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그냥 놔둘 수가 없지요. 당한 만큼 되돌려줘야 셈이 맞을 것입니다. 아니, 죄 없이 당한 설움까지 갚으려면 저들은 곱절로 당해도 쌉니다.

아닌 게 아니라 청진 땅에서 마주치는 일본인들은 이미 그 죄를 다 받고 있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재산을 몰래 감추고 탈출하려다 붙잡혀 모진 매질 끝에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질 않나, 사내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아내 홀로 남아 자식들을 안고 업고 걸리고 동냥질하며 아오지나 고무산으로 떠날 기차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설마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을까요? 아마 몰랐을 겁니다. 남의 땅을 무단으로 쳐들어와서 이 땅의 본래 주인을 노예처럼 부리며 대대손손 호위호식하며 잘 살리라는 생각만 했을 것입니다. 땅과 가족과 이름과 생명마저 빼앗긴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돌아보지 않았을 테지요. 그런데 바로 그 일을 지금 저들이 고스란히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본인들은 마지막까지 잔인했습니다. 도망치면 시내에 있는 아이들 학교마저 불 질러 버렸기 때문입니다. 가려면 그나마 곱게 갈 일이지 그런 해코지까지 하고 떠나다니, 이런 사악한 자들이 또 어디 있을까요? 천벌도 아깝습니다. 그래서 어린 소년은 뱀장어를 미끼로 일본인들을 조롱하고 감시합니다.

그런데 작가는 주인공 천복의 발길을 장터의 어느 국밥집으로 향하게 합니다. 밤새도록 희미한 잔등불 하나 밝혀 놓은 채 새색시마냥 오두마니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가 주인입니다. 천복은 술 한 잔 받아 놓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할머니가 불면증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낮에 아주 잠깐 잘 뿐 밤이 되면 잠이 오지 않아 이렇게 희미한 잔등을 밝혀 놓고는 장터를 오가는 사람들을 망연히 내다보고 있다는 거지요.

할머니의 사연은 기가 막힙니다. 일찌감치 남편과 아이들을 조르륵 앞세우고 늘그막에 얻은 막내아들 하나를 의지하며 살아가는데 이 아들이 해방되기 직전 옥사했기 때문입니다. 단 며칠만 버텨주었더라면…. 할머니 가슴에 일본에 대한 원망과 저주가 가득할 법 합니다.

하지만 할머니 눈에는 못된 패전국가의 포로가 아니라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처참한 몰골만이 보입니다.

‘더부룩이 내리덮인 머리칼 밑엔 어떤 얼굴을 한 사람인지 채 들여다볼 용기도 나지 아니하는 동안에, 헌 너즈레기 위에 다시 헌 너즈레기를 걸친 깡똥한 일본 사람들의 여자옷 밑에 다리뼈와 복숭아뼈가 두드러져 나온, 두 개 왕발이, 흐물거리는 희미한 기름불 먼 그늘 속에 내어다보였다. 한 팔을 명치끝까지 꺾어 올린 손바닥 위에는 옹큼한 한 개의 깡통이 들리어서 역시 그 먼 흐물거리는 희미한 불그늘 속에서 둔탁한 빛을 반사하고 있으며.’

“저겁니다. 저것들입니다.”

할머니는 ‘저것’을 보고 있습니다. ‘저것’이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아이 업은 일본여자가 깡통을 들고 동냥하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견딜 수 없다는 할머니입니다. 모진 세월을 지독한 아픔 속에 지내오다 보니 원망도 증오도 재가 되었는지, 남은 것은 그저 목숨에 대한 안쓰러움뿐인 것만 같습니다. 죽고 죽이고 죽이게 하며 아비지옥의 세월을 거친 결과가 지금 그렇습니다.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깡통 들고 동냥 하는 저 일본여자의 모습은 소년의 삼지창에서 대가리가 으깨져 피투성이가 되어도 제 살 곳을 찾아가겠다고 단말마적 발악을 하던 뱀장어와 다르지 않습니다.
목숨은 그렇습니다. 목숨은 살고자 합니다. 살아 있어야 목숨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숨이라는 본능 앞에서 우리는 모두가 겸손하게 엎드려야 합니다. 그 누구도 목숨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뒤집혀졌으니 이제 네가 죽을 차례라는 법은 없습니다.

국밥집 할머니는 자식을 앞세우면서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고통을 다른 이들이 겪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할머니가 새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아오지에서 실려 온 일본인 포로들의 추위와 굶주림을 달래주려고 한밤중에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말아 내주는 일이 전부입니다. 할머니의 그 행동은 화려하거나 찬란하지 않습니다. 벽 틈으로 새어들어 오는 바람에 너울너울 춤을 추는 부끄러운 등잔불빛 정도입니다. 작가는 그걸 이렇게 표현합니다.

‘혁명은 가혹한 것이었고 또 가혹하여도 할 수 없을 것임에 불구하고 (중략) 덥석덥석 국에 말아줄 마음의 준비가 언제부터 이처럼 되어 있었느냐는 것은 나의 새로이 발견한 크나큰 경이가 아닐 수 없었다. 경이보다도 그것은 인간 희망의 넓고 아름다운 시야를 거쳐서만 거둬들일 수 있는 하염없는 너그러운 슬픔 같은 곳에 나를 연하여 주었다.’

천복은 천만다행하게도 친구를 만났습니다. 이제 그들은 어깨 겯고 서울로 향하겠지요. 소설을 다 읽고 생각해보니, 그 후 이 땅에 대살육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떠올라 새삼 몸서리가 쳐집니다. 뱀장어를 잡으며 일본인을 향해 분노를 쏟아내던 소년도, 하얗게 밤을 새며 따끈한 국밥으로 생명을 안아주던 할머니도 그 아수라장에서 어찌되었을까요?

문체가 너무나 고색창연해서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다가 덮어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모쪼록 당신이 이 작품을 지금 새롭게 만났다면 천천히 소리 내어 읽고 또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혁명이라는 불길 속에 목숨은 뱀장어처럼 단말마적인 발악을 하는 가운데, 흐릿한 등잔불 같은 온정이 흐믈흐믈 춤을 춥니다. 목숨을 향한 경외와 너그러운 슬픔을 지독하리만치 세심하게 묘사한 문체에 곱절은 감동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령 cittalm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