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제628호
2006년09월19일
부처님은 죽이라고 했는가
불교적 신념이 강한 내가 한국 종단의 ‘신도’가 되길 거부하는 이유 …교리를 왜곡해가면서 전쟁 이데올로기를 생산해온 동아시아 종단의 치부
▣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나의 내면적 신앙이 어떻게 돼도 어떤 조직적 종교의 신도로 칭하지 않으려 한다. 종교 조직을 멀리할 이유 중 하나는 전쟁이라는 야만의 극치에 대한 종교들의 무력함에 따르는 환멸이다.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 지역은 역사적으로 ‘종교전쟁’을 해본 일은 없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국가가 자행하는 전쟁 행위에 대한 종교 집단들의 협력은 구미 지역에 비해 훨씬 가시적이었다.
△ 샤쿠 소엔(왼쪽)은 메이지 시대 선불교의 최고 고승이자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근대 학문을 배운 개화 인사였다. 그는 ‘기독교 국가 러시아’와의 전쟁을 적극 지지했다. |
물론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 제동을 걸지 못한 구미 지역의 주류 교단들에 면죄부를 줄 일은 없지만, 구미 지역에서 전쟁을 일관되게 반대하는 비주류 교단들마저 놀랍게도 동아시아에서는 전쟁의 협력자로 돌변하곤 했다.
일본 퀘이커의 변절
예컨대 구미에서 병역거부·반전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받아온 퀘이커들을 생각해보자. 1894년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거의 모든 일본인 퀘이커들은 ‘하나님의 사랑’보다 ‘국가와 천황에의 보은’을 앞세워 ‘전쟁 지지’와 ‘적극적인 협력’을 밝혔다. 결국 일본 퀘이커들은 세계 퀘이커 공동체와 일시적으로 관계를 끊어야 했다. 또한 일본인 퀘이커로서 가장 유명했던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1862~1933) 박사는 1898년에 영문으로 일본 무사도의 찬양론을 쓰는 등 군국 일본의 대외 홍보에 일익을 담당하게 됐다. 여호와의 증인 등 극소수만 제외하고는 퀘이커와 같은 정통 평화 교단들마저도 병역 거부를 선언하지 못한 게 근대 동아시아의 현실이다. 성경책에서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리라”고 나오지 않았던가? 서구를 따라잡으려고 ‘국민 총동원’을 상시적으로 실시하는 후발 근대화 사회에서, 내가 살인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하나님이 아닌 시저의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동아시아 기독교는 그나마 러일전쟁을 비판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1861~1930)나 베트남 전쟁을 반대한 그 제자 함석헌(1901~89) 같은 위인들을 자랑할 수 있다. 서구에서 지금도 ‘전쟁 반대의 종교’로 인식되는 나의 신앙, 즉 불교는 과연 어떤가? 지난 백수십 년 동안 일본·한국의 불교 교단사를 보면,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합리화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전쟁을 더 적극적으로 지지하기 위해 불교의 교리를 왜곡해가면서 종교적 전쟁 이데올로기를 생산해온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예컨대 일본 민초들에게 가장 영향력이 커 정권에 이용가치가 높았던 정토진종(淨土眞宗)의 오타니파(大谷派)라는 한 교파의 지도자는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국민으로서 당연히 용감하게 싸워야 하지만 특히 우리 신도로서 국가에의 충성이 부처님의 절대 진리에 상응되는 세속적인 진리라는 점을 자각하여 국은(國恩)을 갚는 데에 마음을 다 바치라”는 교시까지 내렸다. 그 지도자를 비롯한 오타니파의 성직자들이 ‘국가의 은혜’를 갚느라고 전선에 빈번히 왕래하면서 ‘군인 위안 방문’을 했고 병사의 사기를 고취하는 전쟁 선전의 책자도 만들어 배포했다. “전장에서 쓰러지면 곧 정토 왕생된다”는 것을 병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전사자를 위한 추도회까지 현지에서 열곤 했다. 그런데 그들을 비롯한 불교의 여러 교파들이 부처님의 교리를 총알받이들을 전장에 보내기 위한 정신적인 마약으로 변조하면서까지 열을 올렸음에도, 일본의 상류사회로부터 “기독교인에 비해 전쟁 협조를 덜 열심히 했다”고 빈축을 샀다.
△ 동아시아 기독교는 그나마 러일전쟁을 비판한 우치무라 간조(오른쪽)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
외래 계통의 소수파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인정받아야 했던 그 당시의 일본 기독교인들의 ‘전쟁열’이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이 가는 이야기다.
한 사람을 죽여 많은 중생을 살려라?
청일전쟁 때만 해도 일본의 종군 승려들은 전사자 추도회를 할 때 중국 병사들의 유해까지 함께 장례 치르는 등 ‘적병’에 대한 나름의 ‘예우’를 해주었다. 하지만 ‘기독교 국가 러시아’를 상대로 한 러일전쟁에서는 불교계 석학 이노우에 엔료(井上圓了·1858~1919)의 말대로 “부처님의 원수”였던 러시아에 대한 적대심은 광풍 그 자체였다. 주요 종단들이 징병 대상자에 대한 격려와 군영의 위문 방문, 군승 파견을 한 것은 물론, 병사들과 함께 최전선에서 참전했던 군승들이 “적들을 무수히 죽여버렸다”고 불교 언론에서 자랑할 정도였다. 선불교의 주요 종단인 임제종(臨濟宗)의 최고 고승 중 한 명으로 꼽히고, 미국에서 포교에 큰 역할을 맡았던 샤쿠 소엔(??宗演·1860~1919) 스님의 이야기도 충격적이다. 종군 포교사로 파견 중이던 그는 불교에 긍정적이었던 톨스토이가 “교전 중의 양국 대표자로서 반전운동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자 “공생이 불가능한 존재들 사이의 융화에 도달하자면 전쟁과 살인이 필수적”이라고 대답했다. 승려에게 참전은커녕 칼 찬 사람에의 설법까지 엄금하는 불교의 계율을 생각해본다면, 속인 톨스토이의 제안에 “노”를 외쳐대는 ‘고승’의 모습은 괴이하게만 보인다.
△ 화폐 개혁 전 5천원권에는 니토베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
이미 그때에 불교계는 대량살인을 ‘일살다생’(一殺多生)이라 불렀다.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많은 중생을 살린다는 편하기 짝이 없는 논리다. “저 해로운 벌레를 죽임으로써 아시아 평화를 도달케 하는 우리 병사”들을 “보살행의 수행자”라 칭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이르러서는 “천황 폐하는 여래와 같은 존재이기에 그가 명하는 전쟁이란 크나큰 자비의 실천”이라는 주장으로 진일보했다.
일본 불교에 거의 편입된 식민지 조선의 주류 불교계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이후에 동국대학교의 초대 총장을 역임한 친일 불교의 거두 권상로(1879~1965). 그는 전쟁 때의 명령이 바로 “성전에 임하는 병사의 계율”이라든가 “완벽한 지혜를 얻은 자는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을 죽여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니 전선에서 살인을 해도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라는 식의 망발을 계속했다.
동국대 초대 총장 권상로의 발언
오늘날의 한국 주류 불교 종단은 메이지 시대 이후의 일본 불교의 군사주의를 그대로 담은 식민지 말기의 ‘호국을 위한 살생 허용’의 논리를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 종단의 신도증을 받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아무리 불교적 신념이 강해도 말이다. 아니, 불교적 신념이 강하기에 마음에 걸린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최고 효과의 묘약을 잘못 이용하면 최악의 독약이 되듯이, 가장 고매한 종교의 교리 체계에서 비폭력·반전에 관한 부분을 빼버리면 결국 대중을 국가의 총알받이로 만드는 최강의 마취제로 변하고 만다.
△ 니토베 이나조는 전쟁에 관한 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천황폐하의 선량한 신민’으로서의 입장을 택했다. |
과연 지금 대한민국의 불교·기독교는 평화의 성현 붓다와 예수의 가르침을 각각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가?
**** ‘박노자의 동아시아 남녀’는 이번호부터 ’박노자의 동아시아 근현대 탐험’으로 문패를 바꿉니다. 글의 소재를 동아시아 근현대로 확장해 독자 여러분의 역사적 안목을 더욱 높여 드리려고 합니다. 지속적인 성원 부탁드립니다.
참고 문헌:
1. <논집 일본불교사 8: 메이지 시대>, 이케다 에이(池田英俊) 외 엮음, 도쿄: 유잔가구(雄山閣)출판, 1987, 225~269쪽.
2. , Notto R. Thel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7, 169~174쪽.
3. , Brian Victoria, Weatherhill, 1997.
4. <친일불교론> 상·하, 임혜봉, 민족사,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