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17

귀농교육 20년, 나아가야 할 방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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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교육 20년, 나아가야 할 방향은?

기사승인 2016.06.27  15:5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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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업·농민 살릴 수 있는 귀농교육 돼야

[한국농정신문 김은경 기자]
  
▲ (사)전국귀농운동본부는 지난 21일 ‘귀농교육 20년의 평가와 과제’란 주제로 귀농교육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토론회를 열었다.
(사)전국귀농운동본부(상임대표 차흥도)는 지난 21일 서울 중구 서소문동 소재 동화빌딩에서 ‘귀농교육, 20년의 평가와 앞으로의 과제’라는 주제로 귀농교육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토론회를 열었다.
차흥도 상임대표는 여는 말에서 “20년 전엔 교육운동을 중심으로 했는데, 지금은 귀농귀촌기관이 60여 개나 돼 다른 귀농귀촌기관의 교육과 우리의 차별성은 무엇인지 우리 귀농교육 프로그램도 질적인 변화와 도약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고 밝히고, “이제까지 지녀왔던 생태적 가치는 유효하지만, 20년에 대한 평가와 과제를 통해서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논의해보자”고 말했다.
이날 ‘귀농본부를 통해 보는 교육흐름과 변화’라는 주제로 발표에 나선 박용범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 상임이사는 “우리는 귀농교육에 대해 어떤 생각으로 교육과정을 만들어 가고 있을까?”에 대해 질문을 던진 후, 그동안 인기 있고 구색을 맞춘 강사로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해 온 것에 대해 지적했다. 또 “‘생태가치와 자립하는 소농’이라는 귀농본부의 슬로건을 내려놓을 것인지 아니면 이 용어를 계속 쓰면서 정체성을 강화할 것인지 명확히 정해야 진짜 귀농교육이 될 수 있는 교육과정이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임경수 논산시 공동체경제추진단장은 “귀농교육의 대부분이 작물교육을 하고 있지만, 그렇게 번 돈이 다시 농촌으로 투자되지는 않는다는 게 문제다. 돈을 잘 버는 소수의 귀농인은 농업과 농민을 살리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우리는 산업이 아닌 생활과 어우러진 농업을 만들려고 했지만, 돈 버는 농업에 대해 계속 가르치고 있는 것”이라며“결국 농사로 번 돈이 다시 농사에 투자될 수 있는 그런 농민과 농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백승우 화천현장귀농학교 교육팀장도 “정부기관 농업담당자들도 귀농교육을 자꾸 농사교육으로 가져가려고 하는데, 사실 텃밭농사와 큰 소득형 농사는 완전히 개념이 다르다”며, “정부기관 홈페이지에 있는 각종 사이버 작물 교육 등은 전혀 현실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밖에도 이날 토론회에는 송민영 귀농귀촌종합센터 팀장, 구자송 부산귀농학교 사무국장, 최민규 전북귀농귀촌지원센터 사무국장, 이수형 순창군 귀농귀촌지원센터소장 등이 참여해 열띤 토론을 펼쳤다.
박호진 귀농본부 사무처장은 “2010년부터 귀농가구가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3, 40대 청년들의 비중이 지금은 절반을 넘어섰고, 소농학교는 여성이 더 많아졌다”며, “귀농교육 20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느냐를 고민할 때, 다양한 곳의 사례를 들어보는 게 가장 큰 답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이번 토론회에 대해 총평했다.
김은경 carax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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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친이 올린 글과 함께 이 기사를 보았다. 20년 전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이 글은 당시 귀농학교 1기생이었던 양태순님이 쓴 것을 여기에 복사해서 옮겨 실었다. 올해 전국귀농운동본부를 결성한지 꼭 스무돌이 되었다. 언제 이 이야기는 따로 해야겠다.
-양태순/옹달샘
1996년 전국 귀농운동본부가 창립된 그해 가을, 서울 이수역 인근의 농업기술자회관에서 귀농학교 1기생 20여명이 제 2의 브나로드 운동의 전사를 자처하며 함께 했었다. 그로부터 올해로 20년이 되었다. 귀농학교 과정은 최근 귀농.귀촌 인구의 증가로 그 위상이 날로 증가하고 있으나 이땅의 농촌 현실은 농업의 위기와 농촌 마을의 공동화에 대해서는 여전히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당시 동기인 임경수씨는 인터넷 이장이라는 '사회적 협동조합' 을 만들고 국내 농업 벤처 1호 기업인이 되어 왕성하게 활동하였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전북 완주군에 퍼머컬처 대학과정을 만들어 2013년 까지 농업인 양성에 힘썼다.
창업 전에 그는 환경공학을 전공했으나 환경이 오염되는 현장을 연구하고 개선시키며 돈벌이를 해야하는 공부에 회의하던 차 호주의 퍼머컬처 과정을 체험하고 한국의 농촌 현실에 눈을 떠 전공을 유기농업으로 전환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감행했다.
그런 그를 지금 내가 살고있는 아산시 온양의 사회적 기업 컨퍼런스 행사장에서 2009년 재회했었다.
또 이후 강릉의 문화인들과 함께 그가 만든 
서천의 에너지 순환 공동주택 단지도 방문했었는데 이곳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고향인 봉화마을에도 도입하려 했던 의미있는 공동체 주택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당시 아이가 셋이었는데 다섯은 낳을거라던 그가 너털웃음 지으며 오랜시간 새벽녘 까지 연탄불에 구운 소박한 안주와 소줏잔을 기울이던 시간은 여전히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는 지금 충남 논산시에서'공동체경제추진단장'으로 농촌 공동체의 복원을 위해 치열하게 일하고 있다. 세계화에 맞서는 실천하는 지식인이자 이 나라의 참된 독립군이다.

진짜 '북한 내통' 전문가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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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7 아이엠피터

2.수탈을 위한 개발:'수탈론'의 식민지 인식

2.수탈을 위한 개발:'수탈론'의 식민지 인식

 2. 수탈을 위한 개발: '수탈론'의 식민지 인식
문) 이번 시간은 해방 이후 한국사학계의 지배적 인식이었던 '수탈론'의 식민지 인식을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수탈론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먼저 식민지시기 당대의 식민지 인식이자 수탈론의 극복 대상이었던 산업혁명론의 식민지 인식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식민지시기의 지배이데올로기인 산업혁명론은 일제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것이 가장 핵심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산업혁명론은 일제의 식민 지배가 낙후한 조선사회를 어떻게 근대화시켰는가에 초점이 두어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산업혁명론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답) 말씀하신 것처럼 산업혁명론의 핵심은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가 낙후되고 정체된 조선사회를 근대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근대화를 가지고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것으로 일관하지만 시기별로 약간씩 논지가 달라지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산업혁명론이 체계적으로 정리되는 것은 대략 1940년을 전후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일제가 만주사변에 이어 중일전쟁을 도발하면서 조선을 대륙전쟁의 교두보로 삼기 시작한 때로, 전시동원체제를 위한 식민정책의 근본적인 전환이 요구되었습니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병참기지'론이 대두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과 한국의 관계가 새롭게 위치지워지는 한편 1910년에서 1940년에 이르는 식민지의 변천사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산업혁명론의 인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은 경성제국대학 교수인 스즈키 타케오(鈴木武雄)가 1942년에 간행한 {朝鮮의 經濟}로, 이 책은 1910년에서 1940년에 이르는 식민 지배 30년사를 조선 경제의 근대적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스즈키에 의하면 정체된 조선 사회가 근대화하는 계기는 강화도조약입니다. 조선 사회는 일본에 의한 문호개방으로 자본주의세계와 대면하게 되며, 이후 일본의 지도로 자본주의화로 나아가게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문호개방이 서구열강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인데, 명치유신을 통하여 근대화한 일본의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서구열강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논리입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지도로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며, 강제병합으로 근대적 제도의 이식이 급속히 진행되는데,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이 토지조사사업입니다. 토지조사사업으로 전통적인 자연경제가 해체되고 상품경제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결과 수백만의 농민이 소작농민으로 전락하였지만 농민의 희생은 근대화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으로 치부합니다.
근대적 제도가 들어온 위에 공업화가 추진되면서 농업 중심의 사회가 공업 중심의 사회로 변화하는 것은 30년대입니다. 1929년 11월 부전강발전소의 발전 개시와 1930년 1월 조선질소 흥남공장의 조업 개시로 영국의 산업혁명에 비견될만한 '조선의 산업혁명'이 시작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방직공업, 화학공업, 식료품공업을 중심으로 공업화가 추진되면서 점차 공업 중심의 근대사회로 재편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활필수품을 공급하는 경공업이 충분히 확립된 위에 군수산업인 중화학공업의 육성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공업 발전의 파행성을 피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중일전쟁의 발발로 전시통제경제가 실시되면서 공업화정책은 '병참기지론'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조선 경제는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생산력확충정책에 포괄되는 한편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중공업화가 추진되었습니다. 이러한 병참기지론은 황국신민화정책의 경제적 표현으로, 산업혁명과 공업화를 수행하여 일본과 거의 동일한 지위에 이른 한국이 제2의 일본, 일본의 대륙적 분신으로서 병참기지의 역할을 담당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산업혁명론은 시기에 따라 '일본의 지도에 의한 문호개방-->근대적 제도의 도입-->공업화-->병참기지화'로 변화해 온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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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산업혁명론도 시기에 따라 초점이 달라진다는 점은 음미할 만한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 식민사관, 즉 산업혁명론을 포함하는 식민사관을 비판하면서 내재적 발전론이 제기되었된다고 할 때, 내재적 발전론의 핵심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답) 내재적 발전론을 말 그대로 풀어보면 '내재적'이고 '발전적'으로 한국사를 바라본다는 말인데, 이는 식민사관의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극복하기 위하여 '타율적'이지 않고 '내재적'인 한국사, '정체적'이지 않고 '발전적'인 한국사를 추구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파악할 때 내재적 발전론의 핵심은 민족사의 주체적 발전과정을 체계화하는 것이며, 특히 조선후기를 중심으로 민족의 주체적 역량에 의하여 근대사회가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는 점을 밝혀 주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재적 발전론의 내부에는 다양한 관점과 방법이 섞여 있습니다. 식민사관을 비판하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한국사를 발전적으로 체계화한다는 것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체계화할 것인가를 놓고 다양한 방법이 제기되었으며, 또한 내재적 발전론의 체계화가 북한, 일본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루어졌던 점도 한 원인이기도 하였습니다.
내재적 발전론이 하나의 흐름으로 출현한 것은 4월 혁명을 계기로 해서였습니다. 50년대의 실증사학에 비판적이었던 소장연구자들은 {사상계} 1963년 2월호 특집 [한국사를 보는 눈]을 통해 식민사관과 실증사학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면서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사를 발전적으로 체계화하는 작업은 우리에게만 국한된 과제는 아니었습니다. 북한의 경우 1950년대에 '조선사회과학원' 산하 '역사연구소'를 중심으로 한국사의 합법칙적 발전과정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일본에서도 식민사관의 기반이 된 강좌파(講座派)의 아시아관을 비판하고 한국사의 주체적 발전과정을 추구하는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남한의 내재적 발전론은 북한과 일본의 연구와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형성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일본인 연구자의 성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재적 발전'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도 일본인 연구자들이었고,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용어를 하나의 개념으로 정식화한 것도 일본인 연구자들이었습니다. 일본인 연구자들은 식민사관의 기반이 된 강좌파의 아시아관을 비판하고 일제의 침략사가 아닌 "한국인이 입장에서 한국인이 걸어왔던 한국인의 역사"를 지향하였으며, 이러한 관점을 내재적 발전론으로 정식화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인 연구자들 사이에도 방법론의 차이가 있었는데, '한국인의 주체적 발전의 역사'라는 포괄적인 관점에서부터 '사적 유물론적 방법'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방법론이 포괄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연구의 영향을 받은 남한의 한국사학계에서도 일본인 연구자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방법론이 병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식민사관 비판을 통하여 형성된 내재적 발전론은 곧 민족주의사학이라고 편의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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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지난 시간에 식민지 인식의 역사를 개관하면서 수탈론은 내재적 발전론의 관점을 식민지시기에 적용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내재적 발전론이 어떻게 수탈론으로 연결되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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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내재적 발전론의 논리를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발전하여 온 역사가 한국사라는 것이며, 특히 조선 후기에서 한말에 이르는 시기에 봉건사회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이 민족 내부에서 준비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에서 식민지시기를 인식하는 핵심은 한말까지 축적되어 왔던 내재적 발전이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의하여 부정되었다는 점입니다. 인적, 물적 자원의 폭력적 수탈로 요약되는 일제의 식민 지배는 한국인의 내재적 발전의 성과와 동력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해체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자신의 존재와 전망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일제의 식민 지배와 양립할 수 없는, 일제의 식민 지배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존재였으며, 여기에서 '수탈/저항'이라는 수탈론의 기본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탈/저항이라는 인식 속에서 식민지시기의 모든 것은 일본(일제)과 한국(조선)이라는 민족적 구분에 의하여 규정됩니다. 내재적 발전론이 일본인이 식민지 지배를 위하여 만든 식민사관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한국인의 주체적 발전을 제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수탈론도 일본(인)의 수탈과 한국(인)의 저항이라는 기본틀 속에서 식민지시기의 제도, 사건 등을 바라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수탈하는 일본인과 수탈당하는 한국인이 분리되어 침략정책사와 독립운동사가 구성되며, 일본인의 '제국주의경제'와 한국인의 '민족경제'가 분리되어 일본에서 들어온 일본인 자본과 한국인의 '민족자본'이 대립하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장기화됨에 따라 식민정책이 더욱 심화되고 일본인 자본도 확대되는 반면 민족경제, 민족자본은 축소되어 나가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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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지금까지는 수탈론의 식민지 인식을 검토해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수탈론이 식민지를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독립운동사와 더불어 가장 많은 연구성과가 쌓인 곳이 총독부의 식민정책 분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보통 식민정책의 흐름을 1910년대를 무단통치기, 
1920년대를 문화통치기, 
1930년대 이후를 황민화정책기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먼저 이러한 시기구분이 다른 관점에서 제시된 것은 없는지 궁금하며, 각 시기별로 어떠한 부분에 중점을 두었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답) 식민정책의 흐름은 일제가 한국 민족을 어떻게 통치해 왔는가라는 관점에서 무단통치기, 문화통치기, 황민화정책기의 세 시기로 구분하여 왔으며, 무단통치가 문화통치로 바뀌는 계기는 3·1운동에 두었으며, 문화통치가 황민화정책으로 바뀌는 계기는 일제의 만주사변 도발에 두거나 중일전쟁의 발발에 두었습니다.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서 보듯이 이러한 방식이 식민정책을 서술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며, 지금까지도 별다른 변화 없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단지 70년대 들어 지배정책사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무단, 문화, 황민화라는 용어가 일제 당국이 사용하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는 문제가 지적되면서 명칭이 다소 변화하였을 정도입니다. 예를 들면 1910년대를 무력지배정책기, 1920년대를 민족분열화정책기, 1930년대 이후 일제의 패망까지를 대륙병참기지화정책기로 부르거나, 1910년대를 무단통치에 의한 지배체제구축기, 1920년대에서 중일전쟁 전까지를 회유정책에 의한 민족개량화기, 중일전쟁에서 패망까지를 민족말살을 통한 전시강제동원기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기별로 연구가 집중된 부분을 보면, 무단통치기에는 식민지체제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각종 법령과 제도의 시행과 설립 및 3·1운동에 연구가 집중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일제의 초기 식민정책의 억압성과 수탈성을 드러내는 한편 이에 항거한 3·1운동의 전개과정과 성격이 해명되었습니다. 문화통치기에는 임시정부와 산미증식계획에 연구가 집중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및 산미증식계획을 통한 쌀의 이출과 농민 수탈의 양상이 밝혀졌습니다. 황민화정책기에는 강제동원과 전시수탈에 연구가 집중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징용, 징병, 정신대 등의 강제동원 실태와 각종 물자의 공출 실태가 밝혀졌습니다. 이상에서 말한 것처럼 일제의 식민정책은 각 시기별로 무엇을 빼앗고 무엇을 파괴하였나라는 점에 집중되었으며, 시기구분과 각 시기별 연구에서 이러한 관점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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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수탈론은 인적, 물적 자원의 수탈과 민족적 정체성의 파괴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인적, 물적 자원의 수탈은 아무래도 경제정책에서 잘 드러나리라고 생각합니다. 각 시기의 경제정책에서 수탈론적 관점이 어떻게 서술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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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각 시기별로 대표적인 경제정책으로는 1910년대의 토지조사사업, 1920년대의 산미증식계획, 1930년대 말 이후의 병참기지화정책을 들 수 있습니다. 토지조사사업은 강제병합을 전후하여 이루어진 식민지 기반 구축사업 중 가장 핵심적인 사업으로, 1912년에서 1918년까지 약 2,456만원이라는 거액을 투자하여 토지제도와 지세제도를 식민지 경영에 적합하도록 바꾸는 사업이었습니다. 토지조사를 "수탈을 위한 측량"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60-70년대의 연구는 사업의 진행과정에서 나타난 폭력적 약탈과 반농민적 성격을 규명하는데 집중되었습니다. 즉 기한부 신고제를 채택하였기 때문에 신고를 못하거나 안한 경우가 많았고, 분쟁지 처리과정에서도 정식 재판이 아닌 행정처분으로 소유자가 확정되었기 때문에 전국 농토의 약 40%가 불법적으로 탈취당했으며, 조선후기 이래 성장해 오던 농민의 권리, 즉 경작권, 개간권, 도지권, 입회권 등이 철저히 부정당하였다고 보았습니다. 농업정책의 약탈적 성격과 반농민적 성격은 산미증식계획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20년부터 1934년까지 15년에 걸쳐 실시된 산미증식계획은 수리조합을 세워 관개를 개선하는 토지개량사업과 일본식 농법을 보급하는 농사개량사업의 두 갈래로 전개되었는데, 일본의 식량문제를 타개하기 위하여 증산된 양보다 더 많은 쌀을 약탈해 갔으며, 수리조합사업의 결과 일본인 대지주나 한국인 대지주는 토지소유를 확대한 반면 대다수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몰락하였다고 보았습니다.
만주사변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중일전쟁 발발과 더불어 본격화된 병참기지화정책은 일제의 대륙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조선을 병참기지화하는 것으로,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화정책이 시행되었으며, 군수 자원과 노동력을 대규모로 약탈당하였습니다. 전쟁이 막바지로 갈수록 공출 형태의 수탈 및 징용, 징병, 정신대와 같은 강제동원은 더욱 격심해졌습니다. 이처럼 조선경제가 일제의 전쟁 수행에 철저하게 복무한 결과 공업의 '식민지적 파행성'은 더욱 심화되었다고 봅니다. 공업의 식민지적 파행성이란 조선의 공업이 ①일본 독점자본에 의하여 장악되어 있고 ②국내의 재생산연관이 결여된 채 일본에 예속되어 있고 ③중공업과 경공업이 모두 낙후한 채 일본에 예속되어 있고 ④공업 배치에서 지역적으로 편중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수탈론적 관점에서 총독부의 모든 식민정책, 특히 경제정책은 수탈을 위한 개발이며, 조선 경제는 수탈을 위하여 편성, 배치되고, 수탈에 필요한 부분만 확대, 성장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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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1980년대 중반 토지조사사업의 원자료가 발굴되면서 기존의 통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가 나오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자료에 기반한 연구가 기존의 수탈론적 관점에 어떠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으며, 기존의 연구에 어떠한 수정을 가져왔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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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1980년대 중반 김해군청에서 방대한 분량의 토지조사관계 자료들이 발굴되었는데, 이 자료들은 하나의 군에 한정된 것이라 하더라도 토지신고서에서 분쟁지 관련 서류에 이르기까지 토지조사사업의 거의 전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김해군 및 다른 몇몇 지역의 자료에 기반하여 연구가 진행되면서 기존의 통설과는 다른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즉 소유권의 확정은 현실의 지주를 지주로, 현실의 소유를 소유로 확인해 가는 작업에 불과했고, 무신고지도 전체 2천만여 필의 0.05%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신고제를 통한 토지 약탈이 근거가 없는 사실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또한 소유권 확정에 문제가 있는 분쟁지의 경우 국유지로 확인된 비율이 44%(김해군)이고, 이에 승복하지 않고 불복신청한 경우에도 대부분 신청자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분쟁지 처리과정을 통한 토지 약탈도 문제가 있는 주장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렇게 기존의 통설 중 상당 부분이 잘못된 것이었음이 밝혀짐에 따라 기존의 견해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졌으며, 새로운 관점과 방법의 도입이 불가피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어떤 연구자는 현실의 소유를 그대로 확인한 것에 불과한 토지소유제도의 법인에 의미를 두기 보다는 결부제를 폐기하고 근대적 지세제도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사업의 의의를 찾으며, 또 어떤 연구자는 사업을 통하여 배타적 토지소유권이 확정, 등기됨으로써 일본인의 토지소유권이 안정되었으며, 임조권(賃租權), 도지(賭地) 등 농민적 권리가 부정되었다는 점에서 일제의 수탈성을 찾고 있습니다. 근대화론의 문제제기도 결국 사업의 이러한 문제점을 기반으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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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수탈론에서 핵심적인 문제 중의 하나는 '민족자본', '민족경제' 문제입니다. 한국인의 생활거점이자 민족주의운동의 기반으로서 민족자본, 민족경제의 설정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데, 식민지시기 사회성격논쟁에서 '민족자본'의 존재 유무를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민족자본이나 민족경제가 논란이 되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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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민족경제나 민족자본이라는 용어는 식민지나 반(半)식민지에서 식민 지배를 받는 민족의 민족주의운동에 경제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박현채에 따르면 민족경제란 민족주의의 기초이자 민족적 생활을 위한 경제적 기초라고 할 수 있으며, 이민족의 침략에 의한 민족의 위기 속에서 이러한 민족경제의 존재가 민중의 저항으로 구체화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민족자본은 민족경제에 자신의 재생산 기반을 갖는 자본으로서, 민족경제를 파괴하려는 제국주의자본이나 그 대행자인 매판자본과 이해가 대립되는 자본을 말합니다.
그런데 쟁점이 되는 것은 실제로 제국주의의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식민지에 민족경제의 영역이나 민족자본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점입니다. 이에 대하여 당위적으로 민족주의운동의 기반이 되는 민족자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민족자본의 실체를 확인하려는 연구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민족자본이 민족자본이기 위해서는 ①독자적인 경제영역(원료조달, 제품판매, 금융시장 등)을 가지며 ②근대적 산업자본이고 ③자본 규모가 중간 정도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중소규모 이하의 영세한 기업, 공장이나 전통적 기술에 의존하는 분야에서 이 규정에 적합한 자본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견해에는 많은 약점이 있습니다. 논리적인 면에서 민족주의라는 정치 논리를 경제 분석에 적용하여 관념적인 대상을 추구한다는 점이 문제라면, 현실적인 면에서 중소공장이나 가내사업장의 경우 원료를 일본에서 공급받는 곳이 많으며, 가내공업의 확대도 총독부의 정책적 지원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 민족자본의 존립 자체가 의심스러워 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많은 연구자들이 민족자본은 존재할 수 없거나 조선 경제가 일본제국주의 경제에 깊숙히 포섭되면서 소멸해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도 상당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박현채는 식민 지배가 장기화됨에 따라 민족자본은 소멸의 경향을 갖지만 민족경제는 존재한다고 봅니다. 이러한 견해는 민족경제를 규정하는 독특한 방식에서 나옵니다. 즉 그는 민족경제를 '본래적인 민족경제'와 '부차적인 민족경제'로 구분하고, 외국자본의 침투와 이에 기생하는 매판자본의 활동에 의하여 본래적인 민족경제는 축소, 소멸하는 반면 민족구성원들이 외국자본이나 매판자본에 예속된 부차적인 민족경제는 확대되어 나간다고 봅니다. 그리고 부차적인 민족경제에 속한 민족구성원들, 예를 들면 일본인이 경영하는 대규모 공장에 고용된 한국인 노동자나 일본인 지주나 한국인 대지주에 고용된 한국인 소작농민들이 생활 속에서 민족주의적 지향을 가진다고 보기 때문에, 설령 민족자본이 속한 본래적인 민족경제가 소멸한다고 하더라도 부차적인 민족경제가 있는 한 민족경제는 지속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편 근대화론의 입장에 선 연구자들은 민족경제와 민족자본을 모두 부정하고 한국인이 소유한 한국인 자본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봅니다. 호리 가즈오(堀和生)는 조선경제가 일본제국주의경제에 완전히 포섭된 상황에서 독자적인 민족경제나 민족자본은 존재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일본에서 진출한 대자본과 한국인 중소자본은 보완관계에 있으며, 원료 공급, 유통망을 일본(인)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의 한국인 중소자본을 일본자본주의의 '외업부'(外業部)로 파악합니다. 이처럼 민족자본을 부정하더라도 박현채의 경우 민중적 민족주의가 민족해방의 동력이라는 점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인 반면 호리의 경우 일본자본주의와의 연관 속에서 한국인자본가가 출현했다는 점이 중요하며, 식민지라는 규정은 사라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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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수탈론에서도 한때 민족자본을 강조했지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민족자본 개념의 문제점이 불거지자 그냥 한국인 자본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보통 식민지시기는 한국인 자본이 몰락하는 시기로 파악하는데, 한국인 자본이 어떤 계기를 통하여 몰락하게 된다고 서술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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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수탈론적 관점에서 식민지시기는 일본인 자본이 확대되는 시기이자 한국인 자본이 위축,몰락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일본인 자본이 확대되는 배경에는 총독부의 정책적 지원 및 각종 특혜가 있으며, 기본적으로 값싼 원료와 노동력이라는 조건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본인 자본이 확대되는 조건은 동시에 한국인 자본이 몰락하는 조건이 되며, 한국인 자본의 몰락은 식민지 초기부터 끊임없이 진행되어 간다고 봅니다.

한국인 자본이 몰락하는 대표적인 계기로는 화폐정리사업, 회사령, 전시체제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화폐정리사업이란 러일전쟁 직후부터 강제병합 때까지 일본의 화폐제도를 도입하여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고 옛 화폐인 백동화와 엽전을 새로운 화폐로 교환하는 것으로, 이 과정에서 액면가격을 무시하고 실질가치에 따라 교환함으로써 한국인의 재산은 반 이하로 축소되거나 폐기되었으며, 또한 그 여파로 발생한 공황으로 많은 한국인 상인, 자본가는 하루아침에 몰락하였습니다. 

1910년에 공포된 회사령은 회사 설립에 대한 허가제로, 총독이 회사의 설립과 해산에 대한 권한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일본인은 쉽게 허가를 내주는 반면 한국인에게는 극소수의 회사만을 허가하거나 해산을 명령하기까지 하여 한국인 자본의 발전을 철저하게 가로막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인 자본이 몰락하는 계기는 중일전쟁 발발로 전시체제가 본격화되던 때입니다. 1930년대 들어 일본의 중요 재벌인 미츠이(三井), 미츠비시(三菱) 등 대규모 자본이 본격적으로 들어왔으며, 전시통제의 실시로 일본인 독점자본계통의 회사는 원료, 자금, 노동력 등 각종 지원이 강화되는 반면 한국인 중소기업은 통제만 가중되어 극소수 대기업을 제외한 대다수 한국인 중소기업은 몰락하였습니다.


문) 한국인 자본 혹은 민족자본이 몰락하는 이면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일본인 자본의 확대가 있었습니다. 특히 1930년대에 일본 독점자본이 대거 들어왔는데, 이때 일본 자본이 들어오는 배경은 값싸고 풍부한 원료나 정책적 지원도 있었겠지만 임금이 낮은 한국인 노동자의 존재가 가장 큰 요인이었을 것입니다. 기존의 서술에서 한국인 노동자의 실태는 어떻게 그려지고 있습니까.

답) 식민지시기 연구의 어느 한 곳도 수탈론적 관점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지만 한국인 노동자부문에서만큼 수탈과 저항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기존의 서술은 크게 두 부분에 집중되는데, 한 부분은 일제의 가혹한 수탈과 차별에 의한 한국인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밝히는 것이며, 다른 한 부분은 이러한 수탈과 차별에 맞서 치열하게 전개된 한국인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을 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존의 서술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한국인 노동자들은 일본인 노동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으면서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하루 10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에 혹사당하였으며, 대부분 숙련노동에서 배제되어 힘든 육체노동을 강요당하였습니다. 

더욱이 일본에서 시행되는 공장법조차 시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성노동자와 미성년노동자들은 성인 남성노동자들보다 더욱 가혹한 노동조건에 혹사당했습니다. 이러한 일제의 압박과 착취 아래 신음하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결성이나 파업투쟁 등을 통하여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을 깨우쳐 갔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1929년에 벌어진 '원산총파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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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수탈론이 지배적인 식민지상으로 자리잡은 지 상당한 시간이 경과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식민잔재 청산과 식민사관 비판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수탈론의 소박한 식민지 인식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했는데, 그동안 식민지시기 연구가 상당한 성과를 축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수탈론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까. 

답) 80년대 이후 식민지시기 연구자가 많이 늘어나고 연구성과도 많이 축적되면서 식민지시기 연구는 양적으로 크게 팽창하였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인식의 기본틀은 수탈/저항이라는 틀에 갇히면서 연구의 지평은 수탈론 내에 갇혀버렸습니다. 식민정책사와 독립운동사 연구가 지금도 식민지시기 연구의 주종을 이룬다는 점에서 미루어 생각한다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지 사회주의운동사 연구가 수탈론의 민족주의적 관점을 비판적으로 극복할 가능성을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민족적 사회주의'나 '사회주의적 민족주의'라는 용어에서 보듯이 민족주의적 관점에 흡수되어 버리는 바람에 수탈론적 관점의 양적 확대에 그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인식의 기본틀이 변화하지는 않았지만 연구성과의 양적 축적 속에서 수탈론의 방법론과 서술에서 상당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70년대까지는 주로 일제 식민정책의 수탈성을 폭로하고 한국인의 고난에 찬 저항을 드러내는데 치중하였습니다. 즉 초기에는 땅과 쌀을 빼앗아간 일제가 나중에는 사람까지 전쟁터로 끌고 나갔다고 하는 식으로 식민지 지배가 얼마나 강압적이고 가혹한 것이었나를 밝히는 연구가 많았습니다. 이후 조선 후기 농업사 연구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 내재적 발전의 연구성과가 축적되면서 

1980년대에는 한말에 도달한 내재적 발전의 성과가 일제의 식민정책에 의하여 어떻게 변질되고 파괴되어 나갔는지를 해명하는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일제가 얼마나 빼앗아 갔는가를 폭로하는 이전의 연구에서 이제 조선 후기의 내재적 발전에 의하여 성장한 조선 경제가 일제의 식민정책과 일본자본의 침투로 어떻게 위축되고 몰락해 나갔는지 구체적이고 동태적으로 규명하는데 집중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식민정책, 경제구조, 한국인 자본가와 생산자의 동향 등이 상호 관련된 양상을 구조적으로 분석하는 연구로 나아갔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원시적' 수탈론에서 '구조적' 수탈론으로 나아갔다고나 할까요. 그렇지만 수탈론의 이러한 변화는 수탈론을 확대해 나간, 수탈론 내부에서의 변화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연구 분야를 확대하고 구체적인 실증을 바탕으로 생생한 변동상을 보여주었고 방법론에서 구조적인 파악으로 진전되었지만, 수탈/저항이라는 수탈론의 인식틀에 갇힌 채 식민지의 복잡한 현실과 그 현실의 변화를 포착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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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해방 이후 식민사관의 왜곡을 바로잡고 민족사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은 시대적 과제였다고 생각됩니다. 수탈론은 이러한 시대적 과제에 기여하기 위한 한국사학계의 노력이라고도 불 수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수탈론이 가지는 실천적 함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울러 수탈론이 가지는 한계도 지적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답) 말씀하신 것처럼 수탈론은 해방 이후 식민 지배의 청산이라는 시대적 과제와 떼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식민 지배의 청산이라는 과제가 한국사학계에서는 식민사관의 극복이라는 방식으로 제기되었고, 이에 기여한 것이 내재적 발전론과 수탈론입니다. 수탈론을 통하여 '수탈/저항'이라는 식민지시기를 보는 기본틀이 만들어졌으며, 민족주의사학의 형식과 내용이 갖추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시대적 과제에 기여한다는 점이 가지는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시대적 과제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역사라는 학문이 학문이라는 장을 넘어 사회 또는 정치라는 장으로 나오게 되는데, 이때 일면적 인식이나 주관적 인식으로 흐를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학문이 대중들에게 수용되기 위해서는 단순하게 또는 도식적으로 전달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학문이 시대적 과제에 기여한다는 것은 학문의 효용성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학문을 단순하거나 일면적인 논리로 만들 위험성을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수탈론이 직면한 한계도 바로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수탈과 저항이라는 단순한 논리는 시대적 과제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식민지의 복잡한 현실을 연구하는 학문의 복합적이고도 균형잡힌 관점을 훼손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수탈론은 이러한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수탈과 저항이라는 좁은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말았으며,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러한 좁은 틀 속에서 시대적 과제가 변화했다는 점도 깨닫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식민 잔재의 청산이란 시대적 과제는 중차대한 과제이지만 동시에 말 그대로 시대적 과제입니다. 식민지 지배가 남긴 인적, 물적 잔재의 청산, 즉 친일파 숙청과 새로운 민족국가의 건설이라는 과제는 해방 직후 얼마간의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하고도 유효한 과제였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러한 과제의 유효성은 상실되고 새로운 과제가 제기되게 됩니다. 물론 지금도 친일 경력 시비가 벌어지고 이완용이 소유한 땅이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오늘의 시대적 과제는 더 이상 식민 지배의 청산일 수 없습니다. 수탈론은 이러한 점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식민지의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었으며, 스스로 근대화론이 출현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