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03
유동식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 ‘나’라는 물음 끝에 다시 던져진 질문
유동식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이호재 풍류신학에 ‘풍류’는 있는가? - 에큐메니안
풍류신학에 ‘풍류’는 있는가?한국 토착화 신학의 성과와 한계(1)
이호재 원장(자하원) | 승인 2020.02.04
청년 변찬린은 어릴 적부터 받은 한문 교육으로 유가 경전에 익숙하였고, 중학교 때 캐나다 장로교 계통의 신앙에 입문하여 교회에서 설교를 하기도 한다. 청년 시절에 칼 바르트의 『교의학』, 라인홀드 니버의 『비극의 피안』, 에밀 부르너의 신학, 알버트 슈바이처의 『문화철학』 등 서구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그다지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청년기를 보내면서 한국 교회에서 ‘살아있는 예수’를 보지 못하고 서구 신학의 한계를 인식한다. 스스로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으로 세계 종교경전을 새롭게 해석하겠다는 종교적 목표를 세운다. 이때는 한국 그리스도교가 토착화 담론이 촉발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 토착화신학의 발전
한국 가톨릭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조성된 토착화 분위기에 편승하여 1984년에 성직자, 수도자, 평신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한국 선교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가 개최되어 『사목』 발간과 1987년 설립된 한국사목연구소가 토착화 성과를 내었다. 그러나 2007년 주교회의 결정으로 『사목』 폐간과 한국사목연구소가 해체를 맞이하였고 지금은 토착화에 대부분 냉담한 실정이다.(1)
개신교는 서구 교회전통에 근거를 둔 교파교회가 설립되고 서구에서 신학적 사유체계를 배운 신학자에 의해 교파 신학의 지형이 공고화된다. 이를 유동식은 태동시대(1885-1930), 정초시대(1930-1960), 그리고 전개시대(1960-1980)로 구별하면서, 길선주와 박형룡 등의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 윤치호와 김재준의 사회 역사 참여를 중심으로 한 진보주의 신학, 그리고 최병헌과 정경옥의 자유주의 신학으로 한국 신학의 광맥이 형성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분류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신-합동), 한국기독교장로회(한신-기장)과 기독교대한감리교(감신-감리교)의 학맥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김흡영은 여기에 신정통주의의 이종성을 거론하며 한국 최대 교단인 예수교 장로회(통합)을 대변하는 장신(광나루)학맥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서구신학을 한국에 소개한 공로는 있지만, 한국의 독창적인 신학을 수립했다기 보다는 서구신학을 한국의 종교적 토양에 이식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신학적 환경에서 감신과 기장을 중심으로 한 토착화 신학자와 조직신학자는 상당한 신학적 성과물을 내었다. 유동식의 ‘풍류신학’, 윤성범의 ‘성(誠)의 신학’, 서남동·안병무·함석헌 등의 사상이 응축된 ‘민중신학’, 성(誠)을 실천적으로 해석한 김광식의 ‘언행일치신학’, 그리스도교와 불교와의 대화를 촉발한 변선환의 ‘대화신학(?)’, 김흡영의 ‘도의 신학, 박종천의 ‘상생의 신학’, 이정배의 ‘생명신학’ 등이다.
이 가운데 풍류신학은 토착화 신학의 큰 성과물이며, 민중신학은 세계신학계에 한국을 대표하는 신학으로 알려졌으며, 김흡영의 도의 신학과 박종천의 상생의 신학도 세계 신학계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토착화 신학은 이미 낡은 신학적 주제이고, 주요 계승자들은 ‘문화신학’의 이름으로 한국 사회의 주요 이슈를 중심으로 신학적 사유를 확대하고 있다. 어찌 보면 토착화 신학은 한국 종교문화와 ‘이해지평’에서 융합하지도 못한 채 ‘토착화의 개념’조차도 정립되지 못하고 방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토착화 신학은 개신교 내에서조차 토착화 신학의 성과물이 한국 교회에 주류담론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한국 종교지평에서 토착화 신학이 수용되지 못한 채로 어정쩡한 상태라는 것이 솔직한 평가일 것이다.
오히려 토착화 신학이 서구 신학의 관점에서 한국 종교문화를 왜곡하는 미완성의 신학이라고 말하면 과언일까?(2) 예를 들면 한민족의 고유한 ‘하늘님’(3)을 가톨릭은 하느님, 개신교는 하나님이라고 하며 신의 이름조차 통일시키지 못하고 한국의 하늘님을 분열시키고 있다. 푸코가 말한 ‘언어와 권력’에 담긴 함축적 의미를 굳이 상기할 필요조차 없다고 할 것이다. 종교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변찬린의 한국 토착화신학에 대한 비판
이런 토착화 신학에 대해 1982년 변찬린은 신약 사건과 인물을 해석한 『성경의 원리 (하)』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동안 기독교의 토착화 문제가 논의되어 메스콤의 파도를 타는 듯 하더니 판소리 찬송가 몇 편을 부르는 행사로 끝났다. 구미 신학자들이 부는 마적魔笛에 놀아난 우리들은 꼭두각시의 춤을 추었을 뿐 한국인의 심성, 그 깊은 곳에서 흥겹게 울려 나오는 가락과 신들린 춤사위를 우리는 이날까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갓 쓰고 양복을 입은 몰골로 어릿광대의 춤을 춘 모습이 우리들 기독교인들의 자화상이었다.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녹아든 노래 가락은 판소리의 한맺힌 가락과 흥겨운 서도민요西道民謠, 구성진 남도창南道唱의 신들린 선율과 농악이지 바그너의 가극과 베토벤의 교향곡과 헨델의 할렐루야가 아니다. 마늘과 된장 냄새가 우리들의 체취이지 치-즈나 뻐터의 누린내가 아니다.(4)
풍류학자로서의 변찬린은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 뿌리내리지 못한 서구신학의 한국화를 비판하며, 한민족의 종교적 근본어인 ‘풍류’를 사색하기 시작한다. 그는 1970년대 전후하여 ‘풍류’를 메타-언어로 하여 궁극적 인간을 ‘풍류체(風流體)’, 화쟁하고 회통하는 인식체계를 ‘풍류심(風流心)’, 자유자재하고 원융무애한 삶을 사는 인간을 ‘풍류객(風流客)’이라고 하며 그의 종교적 상표로 사용한다. 유동식이 풍류신학을 말하기 전인 10여 년 전의 일이다.
변찬린의 ‘풍류’해석과 유동식의 ‘풍류’신학은 한국 기층종교 문화인 선맥과 무맥의 대척점에 있으며, 또한 풍류(도)라는 창조적 영성이 화랑도라는 제도조직과 팔관회 등의 국가의례에서 발현되는 것인가 하는 핵심질문과 연계되어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성서의 복음이 한국 종교문화가 ‘이해지평’에서 만날 수 있는가? 그리고 만난다면 어떻게 만나는가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물음이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풍류’를 가지고 성서와 한국 종교문화를 동시에 고찰한 두 종교인은 종교비평되어 한국 학계에 새로운 담론으로 토론되어야 한다.
풍류신학에 대한 이해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짧은 지면에 풍류신학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풍류신학은 유동식의 신학적 상표로 한민족의 종교적 심성을 무교로 보고 한국 종교문화에 그리스도교 신학을 토착화시키려 한 신학이다. 풍류신학의 풍류(風流)는 최치원이 쓴 「난랑비서鸞浪碑序」에 출전을 둔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일컬어 풍류風流라 한다. 그 가르침의 근원이 선사(仙史)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실로 삼교를 포함하고 군생을 접화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집에 들어가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공자)의 가르침이요, 무위하게 일을 대하고, 말함없이 가르침을 배푸는 것은 주주사(노자)의 으뜸가는 가르침이요, 모든 악을 짓지않고 모든 선을 힘써 행하닌 이는 측건태자(석가)의 교화다.
풍류는 이두식 한자로 우리 말의 불(夫婁)이며, 광명, 태양과 관련되는 뜻을 가진다. 또한 풍류는 요한복음 3장 8절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희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다.”는 의미와 유비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풍류신학은 「난랑비서」에 담긴 풍류의 개념을 세속을 초월한 종교적 자유와 삶에 뿌리내린 생동감과의 조화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에 대한 의식을 ‘멋’이라고 보며, 또한 유·불·선을 다 포함하는 포월적인 성질을 나타내는 의미를 ‘한’이라고 하며, 중생을 교화하고, 사람다운 사람을 되게 하는 풍류도의 효율성을 ‘삶’이라는 우리 말로 개념화한다. 풍류는 ‘멋진 한 삶’ 혹은 ‘한 멋진 삶’으로 현대화하여 신학의 골격을 형성한다.
이를 바탕으로 풍류도의 원시 종교적 표출인 무교(고대)를 토대로 불교(신라, 고려)와 유교(조선)와 그리스도교(기독교)가 교체하며 전개되어 온 역사”라고 한국의 종교사상을 개괄한다. 또한 “멋진 한 삶”이라는 풍류도의 기본 구조로 “무교는 원시적 형태의 멋의 종교요, 불교는 철학적 한의 종교요, 유교는 윤리적 삶의 종교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종교문화사는 민족의 꿈인 ‘멋진 한 삶’의 실현 과정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 문화사적 위치로 보아 한국 그리스도교의 사명은 분명해진다.”고 말하고 있다.(5) 이런 풍류적 사유를 통해 1983년부터 ‘풍류신학’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자신의 신학 체계를 정립하고 있다.
김경재는 풍류신학에 대해 「복음과 한국종교와의 만남」이란 부제가 붙은 『해석학과 종교신학』이란 책에서 복음이 한국 종교문화에 토착화될 때 네 가지 모델을 언급하면서 풍류신학이 접목모델로서 바람직한 문화신학의 형태로 소개하고 있다. 이정배도 유동식의 선구자적인 업적은 신학의 영역만이 아니라 예술신학으로까지 확장된 연구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풍류신학에 대한 한국 종교학계의 평가
그럼 한국 종교사의 지평에서 풍류신학은 어떻게 자리매김이 가능할까? 최준식은 풍류신학은 한국 전통문화가 그리스도교에 완성된다는 성취설을 바탕에 둔다고 비판하며(6), 김상근은 유동식의 종교적 정체성을 종교학자 혹은 토착화 신학자로 보지 않고 선교신학자라고 본다.(7) 이는 그리스도교에서 한국 종교문화가 성취되어야 한다는 선교신학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평가이다.
과연 한국 종교문화는 선교신학에 바탕을 둔 풍류신학을 그대로 수용할 수 있을까? 2002년 8월 30일 유동식, 김경재, 이정배, 최인식이 연세대학교 알렌관에서 풍류신학을 주제로 한 좌담회에서 최인식은 “저는 유 선생님께서 어떤 조직신학을 쓰고 성서를 주해하고 체계화시키지는 않으셨지만, 일생을 한국 신학을 위한 틀 짜기, 그것을 위해서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이룩해 주셨다.”고 한다.(8) 또 허호익도 풍류신학이 성경해석의 원리로 제시되지 못하고 수사적인 작업에 머물렀다고 평가한다.(9)
김광식은 근본적인 평가를 한다. “1960년대 토착화 논쟁을 거쳐서, 1970년대에의 무교문화론을 낳았고, 1980년대 이후로 풍류신학 즉 복음의 무교적 예증이 시도되어온 것이다”라고 말한다.(10) 이 말에는 그리스도교 복음이 한국의 종교원류인 무교에 의해 왜곡되며, 한국 종교문화의 본류를 무교로 보는 신학자의 입장을 대변한다. 이에 이진구도 동일한 논지를 전개하며 유동식의 무교문화론이 보수적인 기독교가 지닌 무교에 대한 미신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였지만 무교를 한국종교의 원형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하다는 평가를 동시에 하고 있다.(11)
풍류신학으로 성서해석이 가능한가
신학자는 기본적으로 풍류신학의 한국 종교문화에 대한 해석은 성과라고 평가하지만, 풍류신학으로 성서해석에 적용이 가능한 신학인지를 반문한다. 반면에 우리는 한국 종교지평에서 성서해석에 적용이 되지도 않는 풍류신학이 그리스도교 신학, 즉 선교신학으로 한국 종교문화를 재단하지 않았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는 선교신학에 바탕을 둔 토착화 신학은 한국 종교문화를 왜곡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초는 아닐까?
이런 상반된 평가의 공통점은 ‘풍류’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이며, 한국의 기층 종교문화가 선맥(僊脈)이냐 혹은 무맥(巫脈)이냐를 둘러싼 한국종교의 중핵을 판단하는 핵심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1993년 『한국종교와 한국신학』을 발간기념으로 유동식, 김경재, 김광식, 이정배가 참석한 좌담회에서 풍류신학의 풍성한 신학적 성과를 평가하면서 나온 말이다.
유동식 : [중략] 전에 누가 이런 말을 합디다. 성서에서 “道”만 찾으려고 하지 말고 “선(仙)”맥을 찾아봐야 한다고 말이죠. 선맥이 흐르는 것 그것을 보지 못하면 성서를 제대로 못본다는 거예요.
김경재 : 선맥(仙脈)이 무슨 뜻입니까?
유동식 : [중략] 유·불·선에서도 말하는 … 하나의 새로운 존재, 그것을 요한이 제시해 준 것이거든요. 도성인신이라고 하는 그 표현 자체부터 … 결국은 우리가 “도”를 통해야 하늘나라에 가는데 …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는 말은 방법과 목적이 하나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것이 바로 동양적 인식입니다.(12)
‘도’만이 아니라 ‘선맥’을 찾아라
유동식은 누구에게서 “성서에서 ‘도’만 찾으려고 하지 말고 “선맥”을 찾아봐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까? 변찬린은 세계 신학계에서 최초로 선(僊)과 선맥 등의 도맥(道脈)을 성서해석에 적용한 비조(鼻祖)이다. 1979년에 “성경 속에 뻗어내린 대도(大道)의 정맥(正脈)은 선맥[僊(仙)脈]이었다. 성경은 선僊을 은장한 문서이다. 에녹과 멜기세덱과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로 이어지는 도맥(道脈)은 이날까지 미개발의 황금광맥이었다”고 1979년 『성경의 원리 (상)』 머리말에서 말한다.
세계 신학자 가운데 동방의 신선사상과 선맥을 성서해석에 적용한 자가 없었다. 변찬린이 세계 최초이다.(13) 심지어 변찬린은 ‘풍류는 선(僊)’이라고 한다.
다음 호에서 “변찬린의 선맥신학과 유동식의 풍류신학”을 주제로 대화하기로 한다.
미주
(미주 1) 심상태, 「새 50주년을 위한 토착화 신학 진로 모색」, 『신학전망』177, 30-64,
(미주 2) 길희성, 「한국 개신교 토착신학의 전개와 문제점들」, 『종교·신학 연구』1, 347-356; 최준식, 「한국의 종교적 입장에서 바라 본 기독교 토착화 신학」, 『신학사상』 82, 1993, 113-124.
(미주 3) 필자가 하늘님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천주교의 하느님과 개신교의 하나님과 구별한 한국의 고유한 지고신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미주 4) 변찬린, 『聖經의 原理』下(서울: 도서출판 가나안, 1982), 1.
(미주 5) 유동식의 저술은 『素琴 柳東植 全集(10권)』(2009)에 간행되어 있으니 참고할 것.
(미주 6) 최준식, 「한국의 종교적 입장에서 바라 본 기독교 토착화 신학」, 『신학사상』82, 1993, 115-116.
(미주 7) 김상근, 「1980년대의 풍류신학과 21세기 선교 신학」, 『신학사상』, 『한국문화신학회논문집』10, 2007, 164-183.
(미주 8) 소금 유동식 전집 간행위원회, 『素琴 柳東植 全集(10권)』, 한들출판사, 2009, 476-477.
(미주 9) 허호익,「단군신화의 기독교 신학적 이해」『단군신화와 그리스도교』, 대한기독교서회, 2003, 253.
(미주 10) 김광식, 「샤마니즘과 風流神學」, 『신학논단』 21, 1993, 59-81.
(미주 11) 이진구, 「샤마니즘을 보는 개신교의 시선」, 『기독교사상』, 2017, 59-61.
(미주 12) 소금 유동식 박사 고희 기념논문집 출판위원회, 『한국종교와 한국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3, 126-127.
(미주 13) 김상일, 「한국의 풍류사상과 기독교를 선맥사상으로 융합한 사상가의 복원」, 《교수신문》 6면, 2017.12.18.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100살 신학자 유동식 “우리의 혼 풍류도를 발현해 세계인을 열광케 하라” : 조현이만난사람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100살 신학자 유동식 “우리의 혼 풍류도를 발현해 세계인을 열광케 하라”
등록 :2021-01-20 08:15수정 :2021-02-18 09:17
조현 기자 사진
조현 기자
‘코로나19 사태’로 많은 이가 고통받고 있다.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코로나는 엎친 데 덮친 충격이다. 이 충격은 일시적 재앙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 코로나가 근본적인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이 전환의 시기, 우리는 어떻게 살며 어떻게 미래를 준비해야 할까. 선각자의 혜안을 얻기 위해 휴심정이 플라톤아카데미와 공동으로 ‘인생 멘토에게 코로나 이후의 길을 묻다’ 시리즈를 진행한다. 4주 간격으로 10회에 걸쳐 연재하는 시리즈의 다섯번째 멘토는 풍류신학의 창시자 유동식(99) 교수다.
유동식 교수. 사진 조현 기자유동식 교수는 황해도 평산 남천에서 태어나 연희전문대를 거쳐 일본 도쿄 동부신학교에 유학 중 1944년 일제 학도병으로 징집됐다가 한국전쟁 직후 감신대를 거쳐 미국 보스턴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이어 감신대와 연세대 교수를 지냈다.
그는 한국 나이로 100살이다. 일제강점기 연희전문에서 윤동주 시인과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는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연세대 옆 단독주택에서 홀로 산다. 부인 윤정은 전 이화여대 교수가 4년간의 암 투병 끝에 2004년 별세했으니, 사실상 20년 넘게 홀로 삼시 세끼를 해결하며 산 셈이다. 그런데도 초인종을 누르자 2층에서 내려와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손수 열어줬다.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운동 삼아 직접 나온다고 한다. ‘원활한 대화와 인터뷰가 가능할까’라는 염려를 일거에 날리고, 무려 3시간 동안 질문에 자세히 답했다.
그는 “코로나19 사태가 기독교인에게는 교회라는 공간을 넘어 참 신앙을 찾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한국 전통의 얼을 풍류도로 보고 풍류신학을 연 그는 케이팝의 원류를 풍류도라고 본다. 그는 “춤과 노래와 예술혼인 풍류도를 마음껏 발현하라”고 젊은 세대를 격려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우리의 자존심을 살려줬던 타고르의 시 ‘동방의 등불’을 영어로 줄줄 외웠다. 그러면서 ‘동방의 등불’은 풍류도를 오늘에 알린 최치원이 썼던 말이라고 했다. 다음은 유동식 교수와 주고받은 일문일답이다.
-왜 풍류도에 천착하게 됐나.
“일제시대 이루 말할 수 없는 열등의식 속에서 살다가 해방이 됐는데, 한국전쟁 이후 미국 유학을 가보니까, 나는 4대째 기독교 모태신앙인데도 내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이 그들과는 달랐다. 그러다가 일본의 석학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쓴 <한국과 예술>이란 책을 봤다. 명치유신때 영국에 유학했다가 육로로 돌아오면서 문화 예술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 수년에 걸쳐 일본에 돌아갔던 그는 석굴암 본존불을 보고 감탄해 무려 7번을 올라갔다. 그러면서 일본이 문화적으로는 절대 한국을 지배할 수 없다고 했다. 일제시대인데 말이다. 그래서 아 우리 전통을 찾다가 <삼국사기>에 나온 최치원의 난랑비문에서 풍류도를 보고, ‘아, 이게 우리민족의 얼’이구나 생각했다.”
유동식 교수가 우리 전통의 얼과 통하는 풍류신학을 형상화해 그린 그림. 사진 조현 기자-풍류도를 왜 우리 민족의 얼로 보는가.
“고운 최치원이 12세 때 당나라 유학을 떠나 과거까지 급제하고 17년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너무 어려서 가서 신라에 대해선 몰랐다. 그런데 당나라에서 유불도를 다 익히고 와보니 신라에 그것이 다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깊고 오묘한 도가 있다. 이를 풍류라 한다. 실로 이는 유·불·도 삼교를 포함한 것이요, 모든 중생과 접해 인간화 한다”고 했다. 중국에도 풍류라는 말은 있지만 그것이 도가 된 건 한국뿐이다. 풍류는 멋이다. 그건 서양의 미의식과는 다르다. 한국인은 특유의 미의식이 있어서 인생을 멋있게 살라고 한다. 유불도를 다 통달해야 나오는 멋이다. 그게 한국인의 얼이다.”
-풍류도와 기독교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나.
“우리나라의 종교를 살펴보니, 불교 천년, 유교 5백년. 다 중국에서 왔다. 그 뿌리를 캐다보니 무교가 있었다. 나는 무속이라고 하지않고 무교라고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도 보면 만주지역에 살던 우리 조상들이 봄, 가을에 여러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게 나온다. 그들의 노래가 무교인(무당)을 통해 전해온게 700여가지나 된다. 난 박사학위를 그 무교로 했다. 무당박사다. 그래서 이단으로 많이 몰렸다. 그런데 이제 풍류신학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때는 그걸 알아야 우리의 얼을 찾겠더라. 불교, 유교도 풍류도를 통해 재해석돼 한국불교, 한국유교가 된것이다. 기독교도 풍류도로 해석되어야 한국인의 마음에 더 깊게 와닿게 된다. 사람 의식은 일이백년에 쉽게 바뀌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풍류도를 언급한 신라의 유학자 최치원이 사용한 ‘동방의 등불’이란 말을 어떻게 타고르가 사용했을까.
“1922년 3.1운동 여파로 한국인들이 침울하던 때, 당시 동경에는 한인 유학생 400명이 있었다. 이 때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일본을 방문했다. 인도도 영국의 식민지여서 한국의 3.1운동에 강한 인상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또 헐버트가 1905년에 낸 <한국역사>라는 영어 책과 야나기 무네요시의 논문 등을 통해 타고르도 한국 문화와 예술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한다. 도쿄와이엠시에이에 조선인유학생사무실이 있었는데, 그곳에 타고르를 초대했더니 타고르가 와주고 가면서 그 ‘등방의 등불’이란 시를 적어 건네 줬다고 한다. (영어로 시 전문을 외운 뒤). 일제시대 일본은 일등국민이라고 하고, 우릴 멸시해서 얼마나 심한 열등의식 속에서 살았는지 모른다. 그 땐 영어도 잘 못했지만, 그 열등감에서 벗어나게 하는 동방의 등불만은 다 외웠다. 우리나라가 중국에 의해 속국이 되어도 직접 지배를 받는 식민이 되어 우리 말도 마음대로 못쓰고, 성씨도 못쓰게 한 건 일제시대밖에 없다. 지금 아무리 시대가 힘드니, 나쁘니 해도, 그 멸시를 당한 왜정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 때는 도저히 당당할 수가 없었다. 어떤 세상도 왜정시대보다는 낫다.”
-한국 풍류도와 일본 무사도의 비교했는데요. 어떻게 다른가?
“교토 동지사대학 창립자 니즈마 주기 때마다.외국석학들을 불러 특강을 시키는데, 100주기 때 특강 강사로 나를 초청했다. 그 때 무사도와 풍류도를 주제로 3일간 강의를 했다. 일본인들의 상징은 칼과 거울이다. 그들은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니다. 그들은 생선도 날것 그대로 사시미로 먹는다.. 자연 그대로를 음미한다. 그러나 우린 그게 아니다. 우린 있는 걸 몽땅 넣어 비벼먹는다. 복장도 일인들은 바지를 안입고 남녀가 다 치마를 입었다. 해양족들이 그렇다. 그런데 우리같은 기마민족들은 바지에 댓잎을 묶는다. 우리처럼 소고기를 많이 먹는 민족도 없다. 말 타던 북방민족의 특성이다. 야생 사냥을 하던 이들이어서 우리만 쇠젖가락을 쓴다. 이웃 민족들은 다 나무젖가락을 쓰는데도 말이다. 옛날엔 담배 쌈지에 칼을 꼿고 다녔다. 사냥하던 전통이 있어서 그랬다. 일본 도쿄대학 교수가 한때 일본인도 기마민족이라고 주장했는데, 일본에서 그 설을 막았다. 왜냐면 기마민족설에 따르면 한국민이 월등한게 드러나고 일본인이 열등민족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기마민족의 원시 종교가 바로 무교다. 기마민족은 동서남북 땅이 아니라 하늘의 별을 보고 다니니,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믿는다. 그게 유일신자에겐 하나님이다. 일본사람들은 하느님이란 말이 없다. 천황을 신으로 믿으니까. 유대민족도 유목민의 후손이다. 아시아에서 일본은 거의 없는데 우리나라가 기독교 인구가 가장 많은 것은 원시 종교인 하느님 신앙과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싸이와 방탄소년단, 불랙핑크, 이날치밴드에 세계인들이 열광하는 것을 어떻게 보는가.
“몇년 전 홍콩의 대학에서 강의해달라고 했을 때 알렉산더는 말을 타고 파키스탄까지 밖에 못왔지만 싸이는 말춤으로 세계를 정복했다고 했다. 한민족은 아세아의 독특한 민족이다. 중국이 주변국을 다 먹었다. 위구르족은 종교도 이슬람이고 민족도 전혀 다른데 그곳까지 다 합쳤다. 그런데 조그만 한국은 못합친다. 합쳐지지가 않는다. 그들과는 다른 우리의 독자성이 있기 때문이다. 춤추고 노래하는 풍류도에 세계가 열광하는 것을 보라. 이제 왜정시대 살았던 우리처럼 세상 어디에서도 기 죽을 게 없다. 우리 얼인 풍류의 춤과 노래와 예술로 마음껏 뽐내보라. 그것이 우리 민족의 최고 장점이다.”
-한국에서 기독교가 동양에서 가장 크게 꽃피운 것은 고대에 하늘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고대의 무교와 기독교는 어떻게 연결되나.
“무속은 3가지를 빈다. 첫째는 건강하고 오래 살게 해달라고 제적거리를 하고, 이어 부자 되게 해달라고 대감거리를 하고, 평화롭게 해달라고 성주거리를 한다. 그것이 열두거리의 핵심이다. 오늘날 교회도 오래 살고 부자 되고 편하게 살게 해달라고 빈다. 그러나 그런것만을 목적으로 하면 무속과 다를게 없다. 그런 것을 넘어서 그걸 극복하고 다른 차원의 인생의 의미를 찾는게 종교다.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너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서로 사랑하고 살자는게 기독교다.”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전통 종교와 문화를 미신시하는데, 이를 어떻게 보나
“하나님은 한 문화, 한 언어로만 말씀하시지 않는다. 불교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유교를 통해서도 말씀하시다가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셨다. 나는 부처님도 공자님도 하나님께서 보낸 예언자라고 생각한다. 구약의 이사야만 예언자가 아니고. 그런 분들이 계셔서 우리나라를 더 풍요롭게 했다.”
-기독교가 한국에 끼친 영향은
“뭐니뭐니해도 문화적인 현대화다. 선교사들이 들어오자마자 배제, 이화, 배화 등 학교를 세웠기에 한국이 근대화의 첫걸음을 걸었다. 그들이 전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않고 교육과 자선사업을 하고 나중에 홀트가 와서는 고아들까지 돌보았다. 우리의 바탕에 깔린 어려움을 해소해준게 기독교인들이다. 한국 근대화화는 기독교와 뗄래야 뗄수가 없다.”
-신학적으로 영향 받은 인물은
“내 신학의 조상은 불투만이다. 불투만. 그의 ‘케리그마와 비신화화’를 처음으로 번역했다. 유럽에 있을 때 그 댁에 찾아가기도 했다. 우리는 영의 세계를 믿는데, 그것을 표현하려면 이 세상적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영의 세계를 이 세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신화라고 한다. 희랍신화는 자기들 영적인 세계를 신화로 표현한 것이다. 영적인 세계를 표현하려면 이 세상 말로 표현할 수 밖에 없으니, 그것을 해석해야한다는게 불트만은 비신화화라고 했다. 가령 죽으면 천당간다고 하면 저 하늘에 천당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천당은 영의 세계다. 복음을 학문적으로 눈 뜨게 한 것이 불투만 교수다. 그 다음에는 문화신학자인 폴틸리히의 영향을 받았다.”
유동식 교수가 젊은 시절 그린 그림. 사진 조현 기자-영향 받은 한국인은 없었나.
“해방 후 학병에서 돌아왔는데 신학교가 다 문을 닫았다. 감신대가 겨우 문을 열었는데, 일본인들이 다 가고나니 교수들이 없었다. 겨우 변홍규 박사 같은 몇 분이 가르쳤다. 다른 분들 강의는 일본에서 강의듣던데 비하면 너무도 형편없었다. 그런데 종로 와이엠시에이 강당에서 일요강좌가 있었다. 주 강사가 유영모, 함석헌이었다. 그 강의가 오후 1시부터 시작하니, 일요일 예배가 끝나면 점심도 안먹고 그리 달려갔다. 유영모는 독특한 용어를 써서 잘 못알아들었지만 함석헌은 달변에다가 한국사를 전공해서 한국적인 기독교 해석을 했다. 그 때 신학생들 치고 함석헌 영향을 받지않은 사람이 없었다.”
-윤동주 시인과도 인연이 있었나.
“연희전문 다닐때 같은 기숙사에 있었다. 얼굴이 하얗고 예의가 바르고 점잖은 신사였디. 사귀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어떻게 보면 차원이 좀 달랐다. 일찍 깨달은 사람이다. 시의 세계에서 살수 있는 사람이었다. 시에서 보다시피 기독교 신앙 세계를 깨달은 사람이다. 쉽게 말하면 학생인데 도사였다. 그러니 일반사람들과 막 사귀지않았다. 그 세계에 통해야지 사귈 수 있었을테니까.”
-화엄경의 사사무애 법계 등의 불교 이해 등을 책에서도 언급했는데, 어떻게 불교를 공부했나
“해방 후 감리교신학교 기숙사에 있을때 이재각이란 룸메이트와 함께 이름있는 외래 강사들을 쫓아다녔다. 그때는 교수들이 시원치않으니, 이름있는 강사들을 서울시내 전역으로 쫓아다녀 듣는게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그 때 기독교의 함석헌처럼 뛰어난 이가 불교에서 탄허스님이었다. 탄허스님이 젊었을 때였는데 장자 강의를 했다. 남산 아래 사립대학에서 겨울방학에 하루에 두시간씩 했다. 추운 겨울에 강의하는 사람도 용코, 듣는 사람들도 용했다. 학생들이 교파를 막론하고 지식에 굶주려 있을 때라서 낮에 와이엠시에이의 함석헌 강의에 우르르 몰려가고, 밤엔 탄허의 장자강의에 우르르 몰려갔다. 함선생도 기독교지만 동양 고전 통한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탄허도 성경을 다 알고있었다. 그걸 들으면서 ‘아 서양 기독교만 있는게 아니구나’나라는 걸 알았다. 그 때부터 점점 뿌리를 캐다가 한국 종교사를 안 것이다. 탄허 스님이 장자를 강의하면서 화엄학을 자주 이야기했다. 우린 불행한 세대임에도 그렇게 다른 종교와 사상도 더불어 배워 회통할 수 있는 세대였다. 그게 큰 특징이다. 동양학 강의를 듣는게 성서를 보는 눈에 트는데 큰 도움이 됐다. 영원한 하나님이 진리인 이(理)법계라면, 생활은 사(事)법계다. 영원한 하나님 말씀이 역사 안에 들어오신 것이다. 화엄경의 이사무애법계를 모르면 성육신과 살아계신 하나님,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이해못한다. 동양학자들이 포착한 도의 극치에 가면 다 통한다. 그게 삼교를 다 포함한다는 풍류도다. 풍류도를 표현한게 예술이다. 외래 종교 사상만 배운 최치원의 고민이 나의 고민과 같았다. 그래서 최치원이 우리 얼인 풍류도의 눈으로 유불도를 봤는데, 나는 풍류도의 눈으로 기독교를 보려고 했다. 그게 풍류신학이다.”
-소금이란 호는 무슨 뜻인가.
“원래는 호가 소석이었다. 힌돌이란 뜻이다. 전주 남문밖교회 고득순 목사가 지어줬다. 결혼식날을 잡아놨는데 한국전쟁이 터져서 천사원을 설립한 목사인 장인이 안방에서 주례를 해서 그냥 식을 올렸다. 그리고 난리통에 전주에 내려갔다. 고 목사님은 전주의 10대 한학자중 한분이었다. 사서삼경과 성경을 다 외우신 분이었다. 그 분이 소석이란 호를 지어줬는데, 힌돌은 묵시록에 나온 그리스도란 뜻이다. 예수님 발바닥도 못따라가는 내겐 너무 짐스러웠다. 그런데 도연명이 시를 읽다보고, 1년 사시사철 술에 취해 사는 도연명의 호 소금이 마음에 들어서 칠순부터 호를 소금으로 했다. 소금은 거문고는 거문고인데 줄을 달기 전의 거문고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인데 제 소리도 제대로 못내는 내게 걸맞는 호라고 생각했다.”
-그 시대 신학자들은 대부분 목사 안수를 받지않았나.
=한국전쟁 때 서울이 수복된 뒤 전주에서 돌아와 배화학교 교목으로 가야하는데, 목사가 아니니 종교주임을 했다. 감리교는 예전엔 목사 안수를 받을 때 금주 서약을 했다. 그런데 군에서 2년간 술을 많이 마셔서 버릇이 됐다. 지금도 여기에 맨 포도주잖아.그러나 과음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는 술 마신다고 죄 될게 없는데라고 생각은 했지만,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서 목사 안수를 포기했다. 감신대 신학교 기숙사에 있을때도 룸메이트하고 술도 마시고, 감리교신학교인 미국 보스턴신학교에서도 보니 학생들이 몰래 술을 다 마시고는 있었다. 지금은 안수 때 금주 규정이 없어졌다. 그런데도 그때는 그런 규정이 있어서, 술을 못끊을 것 같아서 나를 속일 수 없어 안수를 안받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의미는
“나는 평생 연세대교회를 다녔는데, 주일날마다 교회 모이는 것이 내 삶의 중심이다. 코로나로 이게 중단돼 버렸다. 그래서 코로나를 마귀라고 생각한다. 인간관계를 끊어버리니, 현대판 마귀 아니냐. 일요일날 천안에 사는 아들이 오면 함께 성경 한장 읽고 예배 드린다. 공동체 예배를 회복해달라고 기도를 한다. 그러나 지금 고난은 참 하나님을 찾게 하는 은사이기도 하다.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니며 건성으로 신앙했다. 그런데 남의 소리 듣고 감동 받는 것도 좋지만, 각자의 신앙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거다. 가령 교회에서 무슨 소리인줄도 모르고 주기도문을 외운 사람이 혼자서 한글자 한글자 생각하게 될수 있다.”
-건강 비결은.
“사람들이 장수의 비결이 뭐냐고 자주 묻는데, 하나님이 살려주시니 사는 것이다. 가난한 왜정시대에 학병 끌려가 죽을뻔했고, 한국전쟁때도 죽을 뻔 한 것을 살려주신 구원의 역사에 감사한다. 1남1녀를 뒀는데, 딸은 일찌기 미국으로 이민 갔는데 먼저 세상을 떴고, 천안에서 건축업을 하며 사는 아들이 한주일에 한번씩 먹을 걸 냉장고에 넣어두고 간다. 아침에 일어나면 스트레칭을 30분 하고, 기도를 한 뒤에 생식을 두유에 타서 먹고 화장실에 다녀오면 아침 8시가 된다. 평생 그렇게 산다”
대문 밖에서 배웅하는 유동식 교수. 사진 조현 기자-100세신데,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나.
“저사람(부인)이 암 4년을 앓고 세상을 뜨면서 19개의 시를 썼다. 마지막으로 죽음을 내다보면서 쓴 19번째 시가 ‘제3의 생일’이다. ‘육체로 태어나게 해준 생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번째는 세례를 받고, 새사람으로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나라에서 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썼다. 나한테는 아주 감동이다. 죽음이 바로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죽음을 생일로 본거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외로움은 어떻게 극복하나.
“사람들이 그걸 많이 물어보는데, 난 외로운걸 모른다. 저사람이 갔어도 내가 혼자 있다는 생각이 안든다. 저 사람이 시로 읊었지만 하늘나라에 살아있어서 거기서 여기 들락날락하고, 나는 여기서 거기를 들락날락하니, 혼자 있다는 생긱이 들지않는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well/people/979519.html#csidx925164f98eb44f7abc30123408f9348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장영호 2021 논평자 이수호 김말순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20210930
장 영 호(전 씨알사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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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함석헌의 신앙
내 즐겨 이단자가 되리라/
비웃는다 겁낼 줄 아느냐/
못될까 걱정이로다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다/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리라.1)
함석헌의 시 <대선언>의 일부 입니다. 젊은 날 제가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는 함석 헌 선생님이 기독교를 떠났나보다 했습니다. 함선생님의 말씀과 독서의 시간이 얼마 간 흐른 후에 깨달은 것은 ‘떠난 것이 아니라 넘어선’ 것이구나 라고 이해하기 시작 했습니다. 풍류신학자 유동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불교, 유교, 기독교 세 종교가 들 어왔는데, 각 그 종교에서 나왔으나 경계를 넘어선 이가 원효, 율곡, 함석헌이라 하였 습니다. ‘넘어서다’라는 우리말은 참 묘미가 있는 어휘입니다. 김경재 교수는 함석헌 시 연구서, <<내게 오는 자 참으로 오라>>에서 명쾌한 풀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종파주의 또는 교파주의 안에 갇혀있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해해 봄직 하다는 것 입니다.
여러분이 애독해온 불후의 고전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당초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의 고침 글인데, ‘대선언’의 전후 시기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도 보입 니다.
고향 평북 용천에서 어린 시절 장로교회를 다닌 함석헌은 13살까지는 순박한 기독교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나라를 독립시키려면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교회에 들어온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2)
삼일만세운동 사건을 뼈아프게 겪은 이후, 오산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함석헌은 생 각이 깊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의 가르침과 동서양의 명품서적 들을 읽으면서 좀 더 깊고 참된 믿음이 있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교회에 점점 비판적이 되어 멀어져 갔으리라 보입니다.3)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유학 시절, 김교신의 소개로 그는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 에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아니고도 믿을 수 있다고 한 우치무라의 신앙 을 세상에서는 무교회주의라 불렀습니다. 아무 형식, 의식 없이 단순히 모여서 하는 예배형태로 성경과 십자가에 의한 속죄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신앙관이 특색입니다.4) 그러나 함석헌의 무교회 신앙도 변동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무교회도 어느덧 자기주장에 집착하여 교파 아닌 교파가 되어가는 모습에 함석헌은 참고 견디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1) 대선언, <<수평선 너머>>, 일우사(1961), 170~171
2) <씨의소리> 1970년 4월호. 함석헌전집4.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1’ 207~8.
3) 위 책, 214.
4) 위 책,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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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말라붙는 사람은 기독교도 깊이 모르고 말고, 성경에 목을 매는 사람은 성경도 바로 알지 못하고 맙니다. 체험은 반드시 이성으로 해석이 돼야 합니다. 해석 못 된 체험은 소용이 없습니다.
대속(代贖)이란 말은 인격의 자주가 없던 노예시대에 한 말입니다. 대신은 못하는 것이 인격입니다.5)
우치무라의 신앙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함석헌은 이제 제자가 선생과 같 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내가 나에게 충실하는 것이 그를 스승으 로 대접하는 도리라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인 플라톤을 두고 말 한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스승은 고귀하다. 그러나 진리 는 더욱 고귀하다.”
신의주 학생사건의 배후로 몰려 죽음의 순간을 겪었던 함석헌은 동료와 제자들의 도 움으로 1947년 극적으로 월남하기에 이릅니다. 바로 그해 미국에서 갓 돌아온 현동완 선생이 주도하는 목요모임에 나가면서 퀘이커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퀘 이커들의 평화운동,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를 놀라움 속에 들었다고 합니다. 이때까지 기독교에서 자랐으면서도 전쟁이 잘못이라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고, 무교회에서조차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6) 시련과 고독 속에서 맞은 1960년은 함석헌에게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가져다준 한 해 입니다.
꽃이 피었다 지고, 장마가 졌다가 개고, 시든 열매가 다 익어 떨어지는 동안 아무도 오지 않 았다. 누가 조금 부축만 해주면 꼭 일어설 것 같은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원망은 아니하기로 힘썼다. 십자가도 거짓말이더라. 아미타불도 빈말이더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 여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도 공연한 말뿐이더라.7)
칼릴 지브란의 글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으며, 힘써 번역한 <<예언자>>, <<사람의 아 들 예수>>가 함석헌에게 신생의 빛을 비춰 주었다면, 1961년 겨울, 한국의 첫 퀘이커 이윤구님의 권유로 퀘이커 서울모임에 출석하기 시작한 것이 또 하나의 출구였습니 다. 훗날 영국과 미국 퀘이커 친우봉사회로부터 노벨 평화상 후보로 두 차례나 추천 받은 사실을 보더라도, 함석헌의 평화운동이 세월을 딛고 끝내 촛불 혁명으로 이어져 왔다는 역사적 사실에 우리는 숙연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5) 위 책, 219~220
6) <<퀘이커 300년>>, 함석헌전집15, 352
7) <<예언자>>, 함석헌전집16. 213
2. 퀘이커(Quaker)신앙과 함석헌
1956년 1월호 ‘사상계’에 실린 함석헌의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 는 외침은, 2천 년 전 예언자 요한이 빈 들에서 외친 소리의 데자뷰로 들려옵니다. 오늘의 한국은 어떻습니까? 비만해질 대로 살찐 초대형교회의 행태가 이를 잘 보여주 고 있지 않습니까?
“퀘이커는 개방적이야요, 극단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기독교란 말을 꼭 해야 되나 하 고 주장하기도 하지요” 1983년 봄, 함선생님이 어느 잡지기자와 인터뷰에서 하신 말 씀입니다. 저는 1979년 매주 함석헌의 <노자 모임>을 다닌 인연으로 퀘이커 모임이 한국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따른 기간은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이었습니다. 서울 신촌에 자리한 ‘퀘이커 모임’에서 선생님과 함께 예배드린 시간이 지금도 그립습니다. 고요예배(silence)가 시작되면 선생님은 늘 꼿꼿 이 앉은 자세로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에 젖어 계십니다. 함께하던 이들 모두 고요 속으로 흐를 무렵, 선생님은 특유의 나지막한 음성으로 감화(vocal ministry)를 하셨 습니다.
어느 날 명상에 관해 일러주신 도움말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눈을 감고 오래 있다 보면 잡념이 끼어들어 방해를 하니, 그럴 땐 넘어가는 해를 연상하면 도움 이 될 거요.” 선생님은 예배를 마치면 당시 어지러웠던 시국에 관련해서 성경말씀 풀 이를 해주심으로써 모임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이제 퀘이커 신앙에 관해 간략히 설명해 보렵니다.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Voltaire)는 영국에 머물렀던 기간(172728)에 작성한 서신 가운데에, 퀘이커에 대한 인상이 깊었던지 무려 네 차례나 퀘이커에 관한 편지(On the Quakers)를 모국의 지 인들에게 보냈습니다.
퀘이커 같은 특수한 집단의 교리와 역사는 생각 있는 사람의 호기심을 끌만한 가치가 있는 것 으로 내게 여겨졌다. 나는 이것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하여 영국 내에서 널리 알려진 퀘이커 한 사람을 만나보러 갔다. 나는 우선 가톨릭 신자들이 신교도들에게 늘 해온 질문부터 던졌다. “선생님, 세례는 받으셨습니까?” “아니오. 나의 친우들도 모두 받지 않았어요.”라고 그 퀘이커 는 말했다.
“저런, 그렇다면 당신들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기독교 신자이고 또 좋은 신자가 되려고 애쓰고 있지요. 하지 만 기독교가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고 소금을 약간 뿌리는 것에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아 요.”
나는 이 불경한 말에 화가 나서,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잊 어버리셨나요?”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 퀘이커교도는 온화하게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요한 의 세례를 받았지만, 그는 결코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는 않았지요. 우리들은 요한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8) 이미 여러분들이 보았겠지만, 퀘이커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그리스도야말로 그들에 의하면 첫 퀘이커라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종교가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부패하 기 시작하여 천 육백 년 동안 타락한 채로 남아 있었으나, 이 세상 어딘가에 늘 소수의 퀘이 커들이 은거하면서 신성한 불꽃을 보존해오다가, 마침내 1642년 영국으로 이 빛이 퍼져나갔다 는 것이다.9)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종교가 지나치게 형식화하고 낡은 제도에 붙들려버린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함선생님과도 인연이 깊은 미국의 퀘이커 신학자 하워드 브린튼(H. Brinton)은 교회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의미 깊은 주장을 펼칩니다. ‘내적 체험에 근 거를 둔 신앙 신비주의’와 ‘교리와 상징으로 신앙을 표방하는 신학자’ 간의 싸움이라 는 것입니다. 그는 <<퀘이커 3백년>>에서 ‘미래에 살아남을 종교가 있다면 그래도 퀘 이커와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라고 예견하였습니다. 17세기 영국에서 조지 폭스(G. Fox, 1624-1691)를 선두로 퀘이커 신앙이 싹틀 무렵 신비주의는 초미의 관심사였습 니다.
처음 기독교는 사도행전에 보이듯이 오순절 성령과 더불어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퀘 이커 신앙이 단지 신비주의에만 머물렀다면 ‘기독교 제3의 형태’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비주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쿰란공동체처럼 세상 사람들을 떠나 사막이나 산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소통하며 새 힘과 빛을 얻는 신비체험을 긍정적 측면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런 소중한 체험이 개인에게만 머물러 버 린다면 그리 바람직한 결과는 아니리라 봅니다. 대승적 차원으로 나아가야지요. 그래 서 퀘이커 신앙은 개인 신비주의를 넘어 단체 신비주의(group mysticism)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조지 폭스는 말합니다. “참 신앙이란 각 개인의 체험이자 모험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보다 더 큰 영과 만나는 일입니다.”
사실 퀘이커 신앙 가운데 ‘그리스도의 빛이 유사 이래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진 것’ 이란 주장처럼 반대를 받아 온 것은 없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뱅(J. Calvin)의 예정설 과는 서로 상치됩니다. 퀘이커 반대자들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 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행 4:12)”고 하면서 반박했지만, 18세기 가장 탁월한 퀘이커 신학자 로버트 바클레이(R.Barclay)는 “나도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것이 없는 줄을 압니다. 그러나 구원은 문자에 있지 않고 오히려 체험에 의한 깨달음에 있습니다.”라고 변호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이때에는 ‘깨달음’의 복음인 <도마복음>을 모르던 시절입니다.
8) Voltaire, Philosophical Letters, (New York : The Liberal Arts Press,1961), 3~4 9) 위 책, 11
우리는 빛을 따라 살아갈 수도 있고, 단순히 본능적 욕망에 따라 살아갈 수도 있습니 다. 몸은 동물적이고, 마음은 이성적이나, 속에 있는 빛은 신(神)적 입니다. 진리의 빛 은 그 이성을 지도해야 하고, 이성은 본능을 도와 올바르게 정돈된 살림을 하도록 해 야 한다는 것이 초기 퀘이커 신앙의 꽃이라 하겠습니다.
‘속 빛’(light within, inner light)은 화해와 일치의 근원입니다. 이 내면의 빛은 모든 사람 안에 있는 것이며, 이 빛에 가까이 이를수록 사람들은 서로서로 가까워지는 것 입니다. 조지 폭스의 이상은 평화와 조용함(quietness) 이었습니다. 퀘이커 평화사상 의 토대는 어디까지나 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요한 14:27). 퀘이커들은 두 길을 통해서 평화주의의 입장에 도달했는데, 하나는 우리 양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빛이 며, 또 하나는 신약성경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세상 많은 힘 가운데 한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여러 힘을 하나로 통일하는 근원으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의 힘으로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일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이 땅 위에 실현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퀘이커 신앙의 또 하나의 특징은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의 종교적, 도덕적 진리를 알고 있다는 보편 성에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신학적인 추상론도 띠지 않은 단순성에 있습니다. 이 단 순성을 바탕으로 한 평화주의에 최근 서양 또는 아시아 지역에서 특정 종교의 벽을 넘어선 이들(가톨릭 퀘이커, 불교인 퀘이커)이 함께 평화를 위하여 애쓰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 매우 영향력이 컸던 신학자 폴 틸리히(P. Tillich)는 조지 폭스 시대의 퀘이커 운동이 탈자적(ecstatic), 신비적 운동으로서 시대를 가로지른 급진적인(radical) 종교개혁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10)
이젠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수년 전 저는 한국 기독교회에 관한 우울한 기사 하나를 읽었습니다. ‘가나안 기독교인’이라는 제하의 글이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성 서 지명의 ‘가나안’이 아니라 ‘안 나가’를 거꾸로 쓴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원조가 놀랍게도 함석헌이라는 사실을 얼마 전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지 모르게 현상유지를 원하는 기풍이 교회 안을 채워버렸고 그러니 가나안의 소망이 ‘안 나가’의 현상 유지로 타락해버렸다. 이상하게도 ‘가나안’이 거꾸로지면 안 나가가 되지 않나?11)
10) Paul Tillich,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New York : Simon and Schuster) 315
11)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함석헌전집3. 33~34
종교는 비판을 거부한다. 비판을 초월하기 때문에 종교이기도 하나 그렇지만 신성불가침은 비 판받아야 한다.
교회는 사람의 양심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절대권을 대표하느니만큼 도리어 끊임없는 자기반 성이 필요하다. 종교는 믿는 자만의 종교가 아니다. 시대 전체, 사회 전체의 종교이다.12)
예수가 오늘 오신다면 그 성당, 예배당을 보고 ‘이 성전을 헐라!’ 하지 않을까? 석조 교회당이 일어나는 것은 결코 진정한 종교부흥이 아니다. 그 종교는 일부 소수인의 것이지 민중의 종교 가 아니다. 지배하자는 종교지 봉사하자는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지나가려는 보수주의자들이 뻔히 알면서도 아니 그럴 수 없어 일시적이나마 안전을 찾아보려는 자기 기만적인 현상이 다.13)
이런 연유로 선생님은 종교도 늘 거듭나야 한다며, 새 종교를 소망하셨던 겁니다. 끝으로, 새겨둘 만한 퀘이커 일화 한 토막을 올리며 마칩니다. 미국 초창기 펜실베이 니아 지역을 거룩한 실험(HolyExperiment)으로 이끌었던 장군 윌리엄 펜(W. Penn) 이 어느 날 퀘이커 집회를 마치자 조지 폭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답니다. "내가 칼 을 차고 집회에 참석하고 있는데, 보기에 어떻습니까?" 폭스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전해집니다. “장군께서 불편하다고 느낄 때까지만 차십시오.”
12)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함석헌전집3. 35~36 13) 위 책, 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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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열린강좌 제6강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2021.9.30.(목) 논평자 이수호
“퀘이커를 기다립니다.”
오늘 훌륭한 강의를 해 주신 장영호님께 감사드립니다. 먼저 제 소개를 간 단히 드리면, 저는 초등학교 교사로 지난 2015~2016년에 한국교원대학교 대 학원에 연수파견을 갔었는데, 지도교수님의 조언으로 함석헌에 대한 연구를 시 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나름 교 회와 사회 개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았지만 좀처럼 깔끔하게 해소되지 않 는 갈증과 의문을 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함석헌의 글은 몇십년의 간격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고백이자 절절한 외침으로 다가왔습니다. 논문 준비를 위해 자료를 모으면서 함석헌의 궤적을 따라 자연스럽게 무교회와 퀘이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함석헌기념사업회 와 도봉구 함석헌기념관을 방문하면서 앞서 퀘이커를 경험하신 정지석 목사님, 김조년 교수님 등을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퀘이커 예배에는 대전에 몇 번, 신촌에 한 번 정도 밖에 참석해 보지 않았으나, 기회가 된다면 퀘이커를 집중 적으로 알아보고 싶은 마음은 늘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에 대해 핵심을 잘 소개해 주신 장영호님 의 강의에 대한 분석이라기 보다는, 평소에 궁금했던 점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먼저, 함석헌이 민주화 투쟁에 직접 나섰던 인생 후반기의 기간이 퀘이커를 만나 도움을 받고 교제했던 시기와 겹친다는 점입니다. 김성수 박사님은 “한국 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3호, 2005.09.)”라는 논문을 통해서 아래와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1960년대부터 1989년까지는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 받던 시기였고, 동시에 그가 가장 직접적이고 왕성하게 남한의 정치 사회적 민주 화와 씨알의 인권향상을 위해 일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그는 군사정권에 온몸으 로 저항하는 한편, 사상적으로는 열렬히 퀘이커주의에 심취하였고, 월간 〈씨의 소리〉를 창간하였다. 무엇이 1950년대 후반 처절한 낙심에 빠진 ‘죄인’ 함석헌을 ‘지칠 줄 모르는 자유의 투사’로 변모시켰을까?
함석헌이 사회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직접 남한의 현실문제에 참가하게 된 경위의 배후에는 퀘이커주의가 있다.
함석헌이 당시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어 이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 전 세계가 하나의 전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아무 나 누릴 수 없었던 해외여행을 통해 서구 사회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미국 펜 들힐과 영국 버밍험 우드브룩 연구소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 일 것입니다. 함석헌이 투옥되었을 때에도 석방을 위해 한국정부에 압력을 가 해 주었고,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해 주는 등 아무도 함석헌을 함부로 대할 수 없도록 위상을 높여준 것이 영미 퀘이커입니다.
그렇다면 단지 이미 성숙기에 이르렀던 함석헌의 씨사상과 300년 전통의 퀘이커 신앙이 서로 깊이 공감하고 공명하였다는 차원을 넘어서, 씨사상과 전체론의 깊이가 완성되는 데 서구 퀘이커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지 않을 까요?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그 함석헌을 만든 것은 사실상 퀘이커였다고 하 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둘째, 함석헌 사후 한국 퀘이커의 현황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보수교회에서 도 중고생과 청년들이 사라지고 있어 10여 년 후에는 문을 닫는 교회들이 많 은 것으로 예상됩니다. 퀘이커도 새로운 회원들이 증가하기보다는 기존 회원들 이 고령화되는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중한 신앙 유산을 우리 자녀들과 후대에 전승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찾고 있는지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함석헌에 대한 물심 양면의 지원이 가능했던 것은 일부 부유한 퀘이커 회원만의 노력이 아닌 소박하고 가난하게 사는 보통 회원들의 관심과 정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도 도움 이 절실한 이들을 찾아 지원하려면 어느 정도의 규모와 최소한의 조직은 갖추 어야 하지 않을까요?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나고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시대 에 퀘이커를 찾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또 해외 퀘이커의 현황은 어떠한지 최근의 기록과 통계를 알 수 있을까요?
셋째, 누가 퀘이커인가, 퀘이커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퀘이 커모임을 후원했다거나 펜들힐에 다녀온 분들이 있었다는 소식은 간간히 들을 수 있으나, 내가 퀘이커라고 직접 말씀하시는 분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퀘이커 회원이지만 지금은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지 않거나, 자신이 퀘이커라는 정체성을 굳이 외부에 드러내고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퀘이커는 과연 누구인가 하는 궁금함이 생깁니다.
퀘이커 신앙에는 공통적인 신조나 교리가 없고 다양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자신이 체험하고 이해한 만큼에서만 퀘이커를 설명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퀘이커주의에 공감하고 혼자서도 나름대로 사회 참여를 실천하고 있다면 나는 퀘이커라고 스스로 생각해도 되는 것인지요? 세계의 다른 퀘이커들과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일은 부차적인 것일까요? 가나안 성도가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지만 여전히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마 찬가지일까요? 씨사상에 공감하면 함석헌을 기리고 계승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일까요?
이상 제가 가지고 있던 소소한 생각을 질문의 형식으로 나누어보았습니다. 이 자리에 참여하신여러분들과 함께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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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 장영호 친우님의 강의에 대한 논평 -
김말순
먼저 논평을 맡은 제 소개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학자도 연구원도 사상가도 아닙니다. 그냥 모태신앙으로 초대 교회 신앙인 창조의 하나님,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죄사함에 대해 성경을 아주 단순하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글이나 강의를 접해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신촌 퀘이 커모임집에 살게 되면서 예배모임에 참석하고 퀘이커에 대한 공부 를 하게 되었고 [함석헌기념사업회]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기념사업 회에 나오게 된 것도 선생님을 좀 배워서 알아야겠다는 욕심으로 2016년부터 모임이나 강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누구의 글이나 강의에 대해 논평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서울종교친우회(퀘이커) 회원이라는 이유로 이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강의 내용을 읽으면서 논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함 석헌 선생님에 대해 많은 서적들을 통해 여기 모인 분들은 이미 다 알고 계실 것이고 장영호 친우님의 강의 내용에도 잘 설명되어 있 기 때문입니다. 단지 선생님의 진면목이 늘 궁금했었습니다. 그래서 “함석헌은 누구인가?” 하고 인터넷에 물어봤습니다. 아주 명쾌한 답을 알려 줬습니다.
“취래원 농사꾼 황보윤식 농부(함석헌평화연구소 소장)”님의 “함석 헌 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 9. 1) “함석헌은 누구인가?”라는 주제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 함석헌의 사상은 무지개 사상이다 무지개는 -빨.주.노.초.파.남. 보-로 색의 경계가 분명치 않다. 색의 경계를 고집하지 않는다. 그 게 무지개의 본질이다. 함석헌은 무지개처럼 뚜렷한 한 가지 사상 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함석헌은 분명 우리 시대에 “사상의 무지 개”를 놓고 간 분이다. 다양해져 가는 열린 시대에 필요한 융합철학의 무지개를 놓고 간 사상가다.
▷서양의 그리스도 사상(퀘이커) 을 기본으로 동양의 불교사상, 공맹사상, 노자사상, 양명사상 그리 고 다시 서양의 실존주의 사상과 아나키즘까지 융합하였다.
그래서 함석헌은 무지개 사상을 만들어냈다. 함석헌의 무지개 사상은 문화 의 다양성 강조와 하나의 인류를 지향해 가는 곧 미래사회의 세계 주의로 귀결되었다. 그래서 그는 지행합일의 귀감을 보이면서 세계 주의를 실천해갔다.
세계주의는 곧 평화주의 사상이다. 세계평화는 전쟁이 종식 되어야만 가능하다 전쟁종식을 위하여 합법을 가장한 국가폭력을 반대해야 한다. 곧 국가(정부)지상주의에 대한 반대이다.
“함석헌은 누구인가?”를 검색했을 때 위의 글을 읽고 깜짝 놀 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맞아! 바로 이런 분이었구나!!!’ 했습니다. 저는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을 좀 더 깊이, 많이 알고 논평 을 맡은 입장에서 답해야 할 것 같아서 선생님이 엮으신 [현대의 “선”과 퀘이커 신앙] -삼민사-를 읽었고 [퀘이커 300년]의 옮긴이의 말을 읽었습니다. 어느 한 구절도 빼놓고 요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퀘이커 300년”의 옮긴이의 말]을 전해 드리는 것으로 논 평을 대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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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 9~12 9)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10)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 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12)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 을 주셨다
※ 요한복음 15: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 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종교친우회=퀘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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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300년]을 옮긴이의 말
처음에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기 시작한 것은 나 스스로 퀘이커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내가 퀘이커에 대해 흥미를 느 끼게 된 것은 1947년부터입니다. 그해 3월 나는 이북에서 공산주의의 사납게 구는 것을 못 견디어 38선을 넘어 서울로 왔습니다. 그 때 사람 들은 아직도 군정 밑에 있어서 해방의 감격이 채 사라지지 않은 가슴을 안고 새 역사의 나갈 방향을 더듬고 있는 때였습니다. 간 곳 마다 활발 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때 서울에 온지 얼마 아니 되어, 지금은 이 땅위에 있지 않은 현동완 선생이 주장해 하시는 목요 모임에 나갔는데 그 때 그는 미국 여 행을 마치고 갓 돌아온 뒤였기 때문에 여행 선물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중에 미국 퀘이커들의 “평화운동”,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말을 하셨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람 죽이기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에는 같이 곁들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징 병령을 반대하고 나서 즐겨 감옥에 들어가고 남아 있는 교도들은 책임을 지고 그들의 뒤를 돌봐주며 운동을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그 뜻을 이해하고 정말 종교적 양심 때문에 하는 것이 분명하면 군대 복무를 면제하고 대신 다른 평화적인 사업으로 돌려 주는 법령을 만드는데 까지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처음 듣는 소식이었습 니다. 이때까지 기독교에서 자랐으면서도 전쟁은 온전히 잘못이라는 이 야기는 못 들어봤습니다. 전쟁은 당연한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무교회에 서조차도 전쟁 반대를 힘써 부르짖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우찌무라 선생이 러일전쟁을 반대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개인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그 쳤지 감히 국가에 대해 항쟁하는 사회적 역사적 운동으로 전개되지는 못 했습니다. 선생의 위대한 것을 칭찬하고 성령을 받아야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쳤지 아무도 나도 그래야 한다 하고 실천의 태도로 나간다든지,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으냐 하고 용 감히 주장하거나 권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퀘이커의 그 이야기를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애 서양 책을 더러 읽노라면 ‘퀘이커’라는 이름이 나오는 수가 있었는 데 그것은 언제나 테두리 널따란 모자에 허술한 옷을 입고 좀 괴상한 사 람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괴상한 사람이 괴상 정도로 그 치는 것이 아니라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만났던 길손 모양으로 어둑한 어스름 빛 밑에서 자꾸 내게 말을 걸어오는 형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말을 걸어오기는 하지만 그 영상은 아직 태평양 건너편에 서 있는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 형상이 태평양을 건너와서 서울에서 그들 을 만나는 날이 왔습니다,
무슨 팔자로 그랬는지 은혜로 그랬는지 나라가 망하는 시기에 태어났 으면서도 이날 껏 전쟁을 몸으로 당해 보지는 못했는데 6・25전쟁이 터 져 3년 동안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먹고 손으로 만지며 그 악독하고 끔찍한 맛을 속속들이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다시 돌아오니 내 한 말이 나를 채찍질했습니다. 전쟁 전 YMCA 큰 강당에서 주일마다 말을 했는데 언젠가 똑똑한 내 정신을 가지고 “이놈의 서울이 남대문서 동대문까지 환히 내다뵈도록 확 타버렸음 좋겠다.” 한 일이 있 었습니다.
그 말을 스스로 잊을 수 없는데 이제 정말 그대로 된 꼴을 보니 부 르르 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 말이 꼭 그대로 들어맞을 만한 무 슨 힘이 있다는 생각은 감히 터럭만큼도 있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말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정수리에 칼이 박히듯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수복 이후에는 김명선 박사의 고마운 뜻으로 지금은 없어진 세브란스의 에비슨관을 빌려서 주일 모임을 계속했는데 그 어느 날 거기 퀘이커가 한 사람 찾아왔습니다. 아더 미첼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이 내가 퀘이커를 본 처음입니다. 그는 그 때 우리 모임에 나오던 이윤구 님의 소개로 나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보다 전에 미국 퀘이커 봉사회에 서 전쟁 후의 한국을 돕기 위해 30명 가량으로 된 구호대를 보내어 군 산 도립병원의 복구 사업을 맡아서 했는데 그 때에 이윤구 님은 그들을 만나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퀘이커가 되었고 자기 생각에 나와 서로 통하는 점이 많을 것이라 해서 내게 소개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레지 날드 프라이스, 플로이드 슈모어 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제 나는 평화주의나 양심적 거부만이 아니라, 퀘이커라는 사람들을 ‘친구(friend) 로 사귀게 되었습니다.
나도 그때 서울에 있는 그들의 집에서 모이는 모임에 몇 번 나간 일이 있었고 아주 나가게 된 것은 1960년 나의 주일 모임을 그만두게 된 후부터였습니다, 그래도 나는 퀘이커가 될 생각은 없었습니다. 매우 좋다 생각했지만 나는 나의 생각하는 바를 고쳐야 할 어떤 필요도 아직 느끼지 않았고, 서로 통하는 점이 많지만 반드시 그들에게 배워야겠다는 무슨 특별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다가 1962년 미 국무성 초청 케이스로 시찰 여행을 하게 됐으므로 마침 기회가 좋다 해서 필라 델피아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퀘이커 수양기관인 펜들힐에 요청해서 공식 여행을 마친 후 6월 부터 연말까지 일곱달을 머물러 있으면서 공부를 했 습니다. 그리고는 밝는 해 1월부터 석 달을 또 영국 버밍햄에 있는 같은 성질의 학교인 우드브룩대학으로 가서 지냈습니다. 그래서 퀘이커의 대 체의 모습을 좀 짐작하게 되었고 흥미를 더욱 느껴 돌아올 때는 책도 더 러 구임해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퀘이커가 되자는 생각은 역시 없었습 니다. 나는 어느 기성교파에 속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퀘이커의 회원이 되기로 결심한 것은 1967년 태평양 연회의 초청으로 노드캐롤라이나 길포드대학에서 열렸던 제 4차 세계퀘이커대회 와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렸던 태평양 연회모임에 참석하고 난 다음이었습 니다. 그런 변동의 동기는 본래 말로는 못하는 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도 “퀘이커가 됐음 어떻고 안됐음 어떠냐?” “그렇다. 퀘이커가 됐담 된 것이고 안됐담 안된 것이다.” 합니다마는 그 중의 중요한 점을 말한 다면 나는 그들의 우의(friendship)에 대해 책임감을 느껴서 그렇게 결 정했습니다. 나 자신으로 하면 새삼 교파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요 회원 이 되고 아니 된 것을 따라 다름이 조금도 있을 것 없이 나는 나지만 그 들이 나를 대해주기를 아주 두텁게 대해주는데 내가 언제 까지나 옆에서 보는 사람으로 참고하는 사람으로 있는 것은 너무도 의리상 용납될 수 없는 일, 너무도 무책임하고 잔혹한 일이라 생각 됐습니다. 그들은 아주 넓은 마음으로 누구나 용납합니다.
퀘이커라는 안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기본 신앙의 극단적인 보수주의로부터 유니테리언, 불교도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넓으면서도 회원이라 할 때는 크게 책임감을 가집니다. 절대로 회원 되는 것을 권하는 일 없습니다. 퀘이커 는 전도 아니하는 종교입니다. 그 점은 다른 종교와 참 다릅니다. 그것 은 그들의 직접적임과 체험과 자유를 극단으로 주장하는 데서 오는 것입 니다. 나도 처음에는 회원됨을 그렇게 중대하게 생각하는 데 반대하는 생각이었습니다. 회원과 참석자를 그리 구별할 것이 무엇이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별이나 차별을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회원이 되는 데는 크게 책임감을 가집니다. 강권하지 않으니만큼, 차별 하지 않으니만큼, 도리어 더 스스로 책임을 집니다. 나도 후에는 그 생 각이 옳다 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정말 자유요 참 민주주의며 그들이 신 비파 운동에서 일어나기는 하면서도 다른 모든 신비파들이 빠지는 극단 의 주관주의에도 빠지지 않고, 그렇다고 다른 모든 큰 교파들이 하는 것 처럼 권위주의에 되돌아가지도 않고 비교적 건전히 중간노선을 걸어오게 된 까닭이요, 또 미래에 대해 누구보다도 발언권을 가지는 까닭입니다.
하여간 나도 그들의 그 생각에 동의했기 때문에, 시비를 들을 각오를 하고 퀘이커의 회원이 됐습니다. 퀘이커가 완전한 종교란 말은 아닙니 다. 가장 훌륭한 종교란 말도 아닙니다. 내가 지금 나가는 방향에 있어 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 다음은 모릅니다. 적어도 지금은 마 땅하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길은 인간관계에 있습니다. 눈은 별을 보 지만 가는 것은 땅을 디디는 발입니다.
한번 결정하고 나니 퀘이커를 더 잘 알아보도록 해야겠다 하는 생각 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태평양 연회 초청여행으로 태평양 연안 산디에이 고에서 포틀런드에 이르는 여러 퀘이커 모임과 가정방문을 마친 다음에 다시 5년 전에 일곱 달 동안을 이날까지의 내 생애에 가장 행복스런 대 목이라고 하면서 지났던 그 자유와 평화의 동산을 다시 봤을 때의 감격 을 나는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영어를 잘 할 줄 몰라 누 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내 의사를 충분히 발표도 못하 면서도 아무 부자유도 불안도 부끄럼도 느끼지 않고 조용히 맘대로 생각 하고 거닐었던 것입니다. 5년 전이나 5년 후나 아무 변함이 없었습니다. 도서실의 책이 그 자리에 그대로 꽂혀있고 강당 구석에 있던 어항이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나갔던 아들이 어머니 품 으로 돌아온 양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내가 머물러 있던 방에 가니 바로 어제 있었던 듯했습니다. 5년 전 내가 그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창 밖 능 금나무 가지에 철새란 놈이 둥지를 틀고 새끼를 쳐서 손으로 만질 거리 에 있어서 날마다 대화를 했었는데 그 새둥지가 비바람에 부서는 졌지만 그대로 옛 모습을 짐작할 만큼 그냥 남아 있었습니다. 나 자신이 나갔던 새끼인 듯 했습니다. 알에서 깨어 나갔던 새끼가 돌아온다면 자라서 올 것인데 나도 자랐을까? 가지가지 생각이 풀려나는 내 가슴속에서는 용천 옛 집에서 어머님이 넘어가는 저녁볕 밑에서 잣던 물레에서마냥 평화의 음악이 들려왔습니다.
그러한 속에 있으면서 아침으로 저녁으로 한 것이 이 책 읽기와 우리 말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5년 전에 왔을 때 이 책을 저자인 선생님 손 에서 받았고 때마침 그 일본말의 번역자인 다까하시 여사도 있어서 그 일본말 판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읽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때도 선생님을 존경아니한 것 아니었습니다. 그는 훌륭하신 분입니다. 그의 사상・지식에 관해서는 이 책을 읽으면 알 것이니 설명이 필요없습 니다. 그 인격과 믿음도 여러 십년을 미국, 독일, 일본에서 가르치고 봉 사하고 한 경력을 살펴보면 자연 짐작할 수 있습니다. 5년 전에 왔을 때 도 이미 여든이 넘은 늙은이였지만 아주 건강해 깊고 조리 있는 강의를 했고 아침 예배시간이면 그 허연 머리털과 길다랗게 뻗친 흰 눈썹 밑에 광채를 쏘는 눈을 빛내며 앉은 모습이 성자다왔고 이따금은 뜻 깊은 감 화를 주곤 했었습니다. 5년 후 이제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와서 각별한 결심으로 그의 책을 읽기 시작할 때 나는 그가 아버지처럼 생각됐습니다. 책을 읽어감에 따라 그것은 꼭 내 이야기같이 생각됐습니다. 어쨌든 내 생각의 역사를 다 알기나 하는 듯해서 어떻게 내 소리를 썼을까 싶었 습니다. 그래서 나는 몇 번이고 선생님을 뜰에서 만나면 “선생님, 그거 제 이야기 같습니다”했습니다. 나만 그렇겠습니까? 남도 그런 사람이 많 을 것입니다. 그만큼 참입니다.
그래서 첨에는 내 공부를 위해 시작했던 것이 다시 생각하니 서울 있 는 모임의 벗들에게 이것을 읽도록 해야겠다, 그뿐 아니라 일반 다름 사 람에게도 읽게 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드시 퀘이커주 의만 아니라 일반 신앙의 참고로도 꼭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퀘이커는 본래 식학이 없지만, 이 책도 신학 토론은 아닙니다. 그보다도 실지로 신앙 살림을 해가는 데 많은 지침이 될 수 있는 책입니다.
내가 이 글을 읽는 동안에 새로 얻은 것 중의 가장 큰 것은 공동체 (community)에 관한 이론입니다. 나는 이날까지 대체로 자유주의 속에 서 살았으니만큼,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 고 교만하게도 세상이 다 없어져도 나 혼자만으로도 기독교는 있을 수 있다 했습니다. 못할 말이었습니다. 이제 전체를 떠난 개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천재, 영웅, 이상, 로맨티시즘, 개인, 예언자의 시대는 지나갔 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잘났어도, 아무리 못났어도, 개인의 뒤에는 늘 전 체가 있어서 그 하나하나의 행동과 사상을 규정하고 있는 것을 과학적으 로 밝히고 있습니다. 나만 아니라 넓게 말하면 오늘날 되어 있는 종교가 다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퀘이커들이 말하는 단체적 신비주의는 깊이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담 또 한 가지는 퀘이커들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누구나 현 대 사람인 담에는 역사적인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지만 퀘이커처럼 역 사 더구나도 미래에 대해 진지하고 용감한 태도를 가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적으로 예를 하나 든다면 필라델피아에 있는 가장 오랜 모임집에 가보았는데 모일 때마다 기록한 회록이 300년 전 시작하던 맨 첨에서부 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체제에 같은 글씨로 기록되어 그대로 보존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가 변해가는 세상바다의 거친 파도에서 제 자신을 가누어가기에 미처 다른 생각이 없는데 이들 얼마 아니 되는 퀘이커만이 수세가 아니라 공세입니다. 자기 걱정이 아니라 세계 걱정을 하기에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자 선생님 말씀대로 미래의 종교가 반 드시 퀘이커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미래를 건져가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 은 퀘이커 같은 이러한 방식의 생각을 하는 종교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 됩니다.
펜들 힐에 있을 때 이미 거의 절반이 옮겨졌었는데 그 후 나라에 돌아와서 게으름을 피워 이제 와서야 겨우 인쇄에 부치게 돼서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선생님은 지난 해에 부인을 앞서 보내셨고, 건강도 한때는 퍽 걱정들 을 했는데 요새 많이 회복되셨다는 소식이 와서 기쁩니다. 다만 진심으 로 사죄하고 용서를 빌고 싶은 말씀은 한국판이 나오기를 위해서 내가 감히 말씀도 드리기 전에 선생님이 자진 노력하시어서 출판자금을 얻어 주셨는데 이날까지 이렇게 무책임하게 늦게 만들었고, 더구나 한마디 편 지도 직접 못 드려서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영어를 자유로 쓸 줄 알았다면 벌써 몇 십 장도 편질 드렸겠습니다. 영어로는 도저히 제 마음을 그릴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럼 이 옮겨놓은 글도 의심하실는지 모르나 읽기와 쓰기는 다릅니다. 읽는 것은 어느 정도 자신 가지고 했으 니 안심하시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본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 지 않았나 해서 두려운 마음 많습니다. 있거든 알려지는 대로 고치겠습니다.
이 책이 보시는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또 우리미래 역사의 설계와 작업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참고가 되는 점이 있으 시다면 고마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1970년 5월 9일 함 석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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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2
Using restorative approaches for sexual and domestic abuse: A personal choice — Why Me? Restorative Justice
Using restorative approaches for sexual and domestic abuse: A personal choice
Published: Thursday, September 30th, 2021
Why me? have published a new paper – Using restorative approaches for domestic and sexual abuse: A personal choice.
This builds on academic research, the testimony of Why me? ambassadors, and existing good practice to unpick the benefits, concerns and best practice for using restorative approaches in cases of domestic and sexual abuse.
If you have heard from survivors who have benefited from Restorative Justice, you cannot fail to feel moved.
It was the beginning of the rest of Lucy’s life.
It was the key that unlocked Janika’s future.
It allowed Rosalyn to regain her sense of power and control.
It made Wendy feel like a totally different person.
It gave Teresa a different picture of herself, which benefits her whole life.
In a world where survivors of sexual and domestic abuse are so often silenced, doubted and retraumatised, Restorative Justice can make them feel empowered, listened to and able to move forward. This is too big a prize to set aside because it is too challenging or complicated. Every survivor should be able to speak to a restorative provider if they want to.
However, using restorative approaches for sexual and domestic abuse should not be taken lightly. The risks to the physical and emotional safety of participants need to be considered and managed by restorative facilitators alongside specialists in sexual and domestic abuse. Communicating with the perpetrator won’t be possible or practical for everyone, and it is important to manage expectations so that people know what to expect from the process. While restorative providers across the country do fantastic work with people affected by a wide range of crimes, there is not always the expertise needed to handle sexual and domestic abuse – as these offences require specialist knowledge and understanding of subjects such as coercive control and consent. This needs to change so that more people who were harmed can get the support that they need.
We are calling on the Government to fund training of restorative facilitators; ensure restorative services are available to anyone affected by crime; and empower more survivors to experience the benefits that our ambassadors have shared.
Why me? are holding an online seminar on November 25th to share the findings of this work, discuss best practice, hear from survivors directly and facilitate conversations about the benefits and challenges of working restoratively in cases of sexual and domestic abuse.
RSVP for our seminar: Working restoratively with cases of domestic and sexual abuse.
Download our paper Using restorative approaches for domestic and sexual abuse: A personal cho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