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떠나서야 나를 사랑하게 됐다” K-딸들의 이야기 - 민중의소리“집을 떠나서야 나를 사랑하게 됐다” K-딸들의 이야기
강석영 기자 getout@vop.co.kr
발행 2020-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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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불을 지를까?’ 조제 씨는 집이 싫었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인 그는 집을 안식처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가족들은 가해자이자 방관자였다. 30여 년 만에 집을 떠난 조제 씨에게 사람들은 말했다. ‘그래도 가족인데…’ 폭력을 경험한 그의 존재는 지워졌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족을 우선하는 가족주의 사회에서,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정상 가족’만이 존재했다.
구타하고, 차별하는
‘그런 가족은 필요 없다’(2018년 한국여성의전화 캠페인)라며 집을 떠난 딸들이 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최근 ‘딸이 집을 떠나기까지’ 캠페인을 통해 가장 안전해야 할 집에서 딸들이 어떤 폭력을 경험했는지 드러냈다. 아내폭력, 아동학대보다 비교적 덜 알려진 성인 딸들의 피해에 주목하자는 취지였다. <민중의소리>가 만난 다섯 딸은 “집을 떠나서야 나를 사랑하게 됐다”라며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비판했다.
내겐 가해자였는데, 엄마에겐 아들이었다
어린 시절 조제 씨는 마루에 발소리가 들리면 잠에서 깼다. 누군가 자신을 해칠까 봐 무서웠다. 문을 잠그고 문고리를 꼭 잡았다. 발소리가 멀어지기만 빌었다. 작은 오빠는 9살인 조제 씨가 14살이 될 때까지 성폭력을 저질렀다. “끔찍한 괴물이었어요” 아무도 그를 보호하지 않았다. 아빠는 알코올중독자였다. 엄마는 생계부양자였고 우울증 환자였다. 큰 오빠는 자기 일로 바빴다. 사랑과 돌봄은 없었다. 아프면 혼났고, 울어도 혼났다. 폭력, 방치, 학대만 있었다. “가족이라는 말 자체가 싫었어요”
엄마에 대한 죄책감이 조제 씨를 붙잡았다. ‘나 때문에 이혼 못 한 거야. 늦둥이로 나를 안 낳았다면…’ 엄마가 불쌍했다. 26살이 돼서야 엄마에게 성폭력 피해를 말한 이유다. ‘오빤데 어떡해’. 마구 때려줄 줄 알았는데, 엄마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조제 씨에게 가해자였는데, 엄마에겐 아들이었다. “그때 엄마를 엄마로 생각하지 않게 됐어요” 엄마가 당해봤냐고 악을 썼다. 그날 엄마는 처음 털어놨다. 자신도 친족 성폭력 피해자라고. “엄말 이해는 했지만, 용서하고 사랑할 순 없었어요”
‘나라도 살자’는 마음에 조제 씨는 집을 나왔다. 그는 엄마를 조현병 걸린 작은 오빠와 둘이 살게 할 수 없어 30대까지 떠나지 못했다. 조제 씨는 그날 밤이 생생하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작은방에 이불도 없었어요. 그런데 너무 조용하고 아무도 저를 괴롭히지 않는 게 생소하면서 행복했어요. 내 집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족들이 눈에 안 보이니 살 것 같았다. 항상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숨만 쉬어도 나가는 월세 걱정에 외로움까지 더해졌다. “사람들은 돈 없고 외로우면 가족에게 간다는데, 저는 절벽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이었어요”
혼란을 뚫고 나가자!
그래도 ‘집 밖’은 조제 씨가 숨 쉬고 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동화와 소설, 수필을 쓰고 있다.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시작한 글쓰기였는데, 위로받았다는 댓글이 이어졌다. “제 이야기를 하는 게 힘들지 않아요. 제 잘못도 아니고 제가 부끄러운 일도 아니잖아요. 제 아픔을 형상화해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에게 힘이 되고 싶어요” 조제 씨는 특히 아이들을 돕기 위해 동화를 선택했다. “우리 집만 이런가 해서 어린 시절이 너무 외로웠어요” 그는 자신이 쓴 <엄마아빠재판소>를 읽은 아이들이 작가를 꿈꾼다며 메시지를 보낼 때 기쁘다고 했다.
‘가족한테 어떻게 그래?’ 조제 씨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가족을 욕하면 자기 얼굴에 침 뱉기라고 하잖아요. 그거 아니거든요. 가족이랑 나랑은 별개예요. 가족에 대해 욕할 만큼 해야 좀 나아져요” 그의 발목을 붙들던 엄마에 대한 죄책감과 의무감은 ‘세뇌’ 때문이라고 조제 씨는 말했다. “부모님의 은혜, 효도란 말은 폐기돼야 해요. 저는 낳음 당했어요” 조제 씨는 집을 떠날 준비를 하는 딸들에게 밖에서 어떻게 살지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겁 때문에 나오는 걸 망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건 ‘사랑’이 아니다
김민희(가명·28) 씨 가족은 완벽했다. 수도권 자가 주택과 차 한 대 이상 보유한 중산층 4인 가족, 조건만 보면 말이다. 어린 시절 김 씨는 하루도 안 맞는 날이 없었다. 완벽주의자였던 엄마의 요구는 과도했다. 기대만큼 따라오지 않는 김 씨를 무차별적으로 때렸다. 김 씨는 엄마와 밥만 먹으면 체했다. 언제 날아들지 모를 폭언과 폭행에 늘 긴장 상태였다. 그에게 집은 안식처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주어진 환경이란 생각이 강했어요” 장기간 폭력에 노출된 김 씨는 깊은 우울증에 빠져 완전히 무기력해졌다.
우울과 불안, 망할 놈의 이중주
엄마는 ‘사랑’이라고 했다. 자신을 돌본다는 생각으로 김 씨를 키웠다고 했다. “엄마는 저와 자신을 분리하지 못한 것 같아요. 육아 중 빠지기 쉬운 오류라고 하더라고요” 전업주부로 김 씨와 동생만 바라보며 살았던 엄마다. 아빠만 보고 상경했는데, 아빠는 잦은 출장으로 집에 없는 시간이 많았다. “아빠는 방관자로서 아무것도 안 했죠. 엄마는 의지할 사람 없이 저희만 키우다 보니 더 뒤틀렸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 씨가 자기객관화를 한 건 독립 이후다. “맥락에 대한 이해와 별개로 폭력 자체는 잘못이에요”
20살이 되길 간절히 기다렸다. 아무도 김 씨의 권리를 대행할 수 없는 나이였다. 취업해서 독립할 때까지 거리 두기를 해왔다. ‘이 사람들은 날 낳아줬지만 내 가족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내 가족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라고. 대학 생활 내내 온갖 핑계로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주변에 비슷한 ‘딸’들이 많았다. “가정폭력은 슬픈 이야기지만, 한국 사회에서 너무 흔한 비극이었던 거죠.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독립을 꿈꿀 수 있었어요. 전 운 좋게 좋은 공동체를 만났지만, 그렇지 않은 딸들을 더 많이 봤어요”
직업인으로 홀로 살던 여자 선생님은 김 씨의 롤 모델이었다. 청소년기 그는 결혼해야만 집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자 혼자 사는 건 상상도 못 했다. “선생님을 보고 ‘여자도 독립할 수 있구나, 무서운 일이 아니구나’ 알게 됐어요” 아빠-엄마-자녀의 화목한 가족만 강요하는 사회는 다른 형태의 가족을 상상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정상에 부합하기 위해 가족 내 얼마나 폭력이 있는지 사회는 알려고 하지 않아요. 다양한 가정폭력이 개인사라는 문제로 덮여 사라지고 있어요”
오늘 하루의 잠깐
혼자 살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는 김 씨다. 20년 동안 엄마의 감정과 취향에 맞춰 살았다. 자신의 취향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던 어린이였지만, 한편으로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엄마의 말에 수긍했다. 살이 쪘네, 가슴이 쳐졌네, 끊임없는 외모 지적에도 시달렸다. “혼자 지내며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어떤 걸 하면 즐거운지, 화가 나는지, 슬픈지 생각할 시간이 많아졌어요. 이젠 거울을 보며 ‘좀 귀여운데? 괜찮은데?’ 이런 생각도 들어요 하하”
배고프고 추워도 집만 아니라면
박서린(16) 씨는 ‘집 밖’ 생활 7개월 차다. 새아빠의 폭력을 피해 지난 10월 집을 나왔다. 경찰에 신고했을 때 격리된 건 박 씨였다. 새아빠는 상담받고 집에 돌아갔다. 일해야 하는 가장이라는 이유였다. “나가야 할 사람은 아빠잖아요. 자존심 상하고 기분 나빠서 더는 신고하고 싶지 않았어요” 아픈 엄마를 보며 참아도 봤다. 엄마는 아이를 5명 낳아 몸이 안 좋다. 새아빠의 폭력으로 마음에도 병이 왔다. 엄마도 주물러줘야 하고 4살짜리 막내도 돌봐야 하는데, 무작정 나가라는 새아빠의 엄포에 떠밀려 나왔다.
거리는 청소년들에게 더욱 혹독했다. 돈이 가장 문제였다. 돈 벌 방법이 없었다. 아르바이트는 주로 성인 대상이었다. 집 나왔냐며 색안경부터 끼기도 했다. 청소년지원기관보다 성매매 알선자의 손길이 더 빨랐다. 박 씨는 단칼에 거절했지만, 가끔 후회도 됐다. 당장 잘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찜질방, PC방은 밤 10시 이후 청소년 출입 금지다. 거리에서 잔 적도 많다. 박 씨는 일주일간 잠을 안 자기도 했다. ‘죽데리아’(죽친다+24시 롯데리아)에 있거나 친구들 따라 놀러 다녔다. 신고를 주저하는 거리 청소년들에게 폭력과 강간의 위험은 잦았다.
추운 도시의 밤거리를 헤매다
박 씨의 몸은 두 달 만에 망가졌다. 배부르게 밥을 먹은 적이 없었다. 컵라면과 삼각김밥 살 돈도 없을 땐 시청에서 물배를 채웠다. 그런데도 박 씨는 살이 20kg 넘게 쪘다. 먹을 게 생기면 새벽이라도 일단 먹었다. 생활 패턴이 바뀌면서 이상 증세가 나타났다.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잠을 자도 계속 잠이 왔다. 생리가 불규칙해졌다.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다. 하지만 박 씨는 돌아가지 않았다. “새아빠가 눈앞에서만 사라져도 마음이 놓여요. 밖이 집보다 더 힘들었다면 돌아갔을 거예요”
마음의 상처도 깊어졌다. 아는 사람들의 집을 떠돌며 박 씨는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잘 지내다가도 마음이 바뀌면 나가라고 했다. 서울 방방곡곡을 뱅글뱅글 돌았다. 거리 청소년을 위한 쉼터에선 적응이 쉽지 않았다. 통제도 심했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한방에서 지내는 게 불편했다. “처음 본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고, 경계 대상이에요. 섣불리 다가갔다가 이용만 당하고 상처받아요” 거리에서 배운 사회였다. 박 씨는 월세 내고, 눈치 보고, 밥도 해야 했지만, 아는 사람 집을 선택했다.
“제가 행복하면 그게 가족이고 집이죠” 조부모 가정, 한 부모 가정, 재혼 가정 등 다양한 가족을 경험한 박 씨는 가족의 의미를 일찍 깨달았다. 그의 목표는 검정고시 합격이다. “저를 아껴주는 사람들을 위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물질적으로 해줄 수 있는 게 적으니 마음으로라도 보여줄 거예요” 박 씨는 거리 청소년에게 낙인을 찍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배경은 모르고 집 나온 행동만 보고 안 좋게 생각해요. 집이 힘들어서 나왔는데 사회에 나오니 낙인이 더 큰 장벽으로 느껴져요”
생동감
가정폭력과 빈곤 그리고 성 노동
왹비(활동명·24) 씨는 성 노동자다. 가정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몰래 돈을 모아야 했다. 가해자는 돈으로 왹비 씨를 협박하고 통제하려 했다. 통장으로 월급이 들어오는 아르바이트는 불가능했다. 기초 생활수급에 반영돼 가해자에게 들키기 때문이다. 자금원이 불분명한 성 노동이 적합하다고 왹비 씨는 생각했다. 룸메이트에겐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잘 안 꾸미던 그가 화장하자 애인이 생겼냐고 물었다. 왹비 씨는 화장품과 홀복을 챙겨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일할 준비를 했다.
가해자는 엄마였다. 왹비 씨는 할머니와 엄마랑 셋이 살았다. 욕설과 폭력은 일상이었다. 엄마는 냄비를 집어던졌다. 칼을 들고 그의 손을 자르겠다고 협박했다. 월세는 밀렸는데 돈 나올 구석이 없던 어느 날 엄마는 같이 죽자며 동반자살을 권유했다. “엄마가 악마라서 그런 건 아니에요” 생계부양자이자 돌봄 노동자였던 엄마는 왹비 씨와 치매에 시각장애를 앓는 할머니를 돌봤다. 엄마는 가정폭력 피해자기도 했다. “스무 살이 되자 혼자 생활한 엄마에게 폭력은 습관처럼 베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가해를 정당화할 순 없죠”
상처받은 마음들
첫 번째 탈출은 20살의 고시원이었다.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업을 가지면 탈 가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4년 동안 그가 입시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다. “헛된 희망이었죠” 그는 우울증과 함께 고시원을 나왔다. 두 번째 탈출은 23살의 고시원이었다. 엄마가 폭력을 저지르던 날 충동적으로 나왔다. ‘이런 곳에선 못 산다’라는 친구의 손에 이끌려 고시원에서 벗어났다. 친구의 집은 깨끗이 정돈돼 있었다. 소리 지르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평생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걸 저 친구는 처음부터 얻었구나’, 슬픈 평화였다.
독립한 왹비 씨는 전입신고를 하지 않았다. 엄마가 찾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한 세대일 경우 주민등록표를 열람하면 언제든 새 주소를 알 수 있다. 안전한 공간을 위해 왹비 씨는 세입자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현재 그는 자신을 존중하고 아껴주는 애인과 행복하게 살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안정감이다. 모든 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자책하는 일도 줄었다. 자기혐오를 줄여 정신적 건강을 되찾았다. “탈 가정 이후 저란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됐어요. 해낼 수 있다는 확신도 생겼죠”
왹비 씨는 폴리아모리(다자 간 사랑) 공동체를 꿈꾼다. “다양한 주거공동체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살고 싶어요. 정상 가족에서 벗어나도 서로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잖아요” 퀴어인 그는 탈 가정을 ‘도전’이라고 말했다. “소수자들에게 집은 가장 위험한 공간이에요. 소수자들이 삶의 주체성을 되찾는 도전으로 자립을 시도하길 바라요. 성공하든 실패하든 시도 자체가 용기를 주고 많은 변화를 가져올 거예요. 너무 이것저것 재지 말고 일단 지르면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어요”
회복
정상성에서 벗어나자 밀려온 자유와 해방감
은영(활동명·28) 씨는 동물권 운동을 통해 ‘정상 가족’에서 해방됐다. 남존여비는 은영 씨 집의 질서였다. “폭력적인 부계는 저란 존재 자체를 싫어했어요” 아빠는 은영 씨를 보면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없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했다. 살금살금 걸었고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한숨 소리가 더 커지면 물소리가 날까 봐 씻지 못하고 잠들어야 했다. 친구 집에서 씻고 집에 들어가는 날이 늘었다. 그는 먹고, 씻고, 자는 일에도 큰 용기가 필요했는데, 남동생은 방문을 활짝 열고 큰 소리로 욕설하며 게임하느라 바빴다.
집 밖에서 은영 씨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았다. “부계의 폭언으로 절 규정할 수 없었어요. 제 존재는 집이 아니라 사회에서 구성된다고 생각했죠” 집 밖으로 눈을 돌리니 ‘집은 가장 안전한 공간’이라는 사회적 정의가 폭력적으로 다가왔다. “행복한 척 역할놀이라도 하라는 명령이잖아요. 분명히 존재하는 고통을 지워버렸어요” 그는 자신이 겪은 폭력과 사회에서 발생하는 폭력이 매우 맞닿아있다는 걸 느꼈다. “근본적으로 폭력적인 명령이 있는 사회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마음속의 수많은 나
은영 씨는 물리적인 탈출에 열을 올렸다. 집에서 쏟는 에너지가 소모적으로 느껴졌다. 졸업, 취업 준비에 매달렸다. 하지만 ‘나는 왜 집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계속됐다. 은영 씨는 동물권 활동의 한 장면에서 답을 찾았다. 집채만 한 도살장 트럭에 돼지들이 비참한 모습으로 갇혀 있었고, 한 활동가는 이를 막고 서있었다. “분명히 고통스러워하는 돼지가 있는데,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겨진다는 점에서 저와 비슷하다는 강한 연결감을 느꼈어요. 트럭을 가로막은 활동가는 사회의 정상성에 온몸으로 맞선 거죠”
그를 옥죄고 있었던 건 정상성이었다. “정상 가족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정상성을 쫓고 있었던 거죠. 사회가 요구하는 자격을 갖춰서 독립하려고만 했어요. 사회의 기본 토대라는 가족에서 박탈당한 제가 사회의 정상성에 맞춰 산다면, 집에서 나온다고 해도 폭력적인 구조에 가담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어요” 은영 씨는 폭력적인 구조에서 버티기보다 그 구조가 틀렸다고 말하는 운동에 자신을 맡기기로 했다.
그는 단숨에 집을 떠났다. 독립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박탈감은 과장된 것이었다. “권리 운동으로 느낀 자유와 해방감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었어요” 자신과 비슷한 ‘딸’들에게 은영 씨는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고 전했다. “커다란 사회에서 내팽개쳐져 외롭다는 생각이 들 텐데, 가진 게 없어도 다른 삶을 상상해볼 수 있어요. 정상성 앞에 두려워 마세요. 아무것도 없이 저항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사회 전체를 보면 작은 부분이겠지만, 티끌 같은 부분이 지난 삶을 단숨에 소생시키는 힘이 될 수 있어요”
가슴속에 휘몰아치는 나의 에너지
“사회 중심을 가족에서 개인으로 바꾸자”집을 떠난 딸들은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어렵다며 지원정책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정샘 한국여성의전화 기획조직국장은 “가정폭력 피해자들은 범죄 때문에 급하게 집을 나와서 스스로 경제적 기반을 꾸릴 여유가 없다. 생애 주기에 따라 쉼터 입소도 쉽지 않다. 가해자에게 노출될 위험이 있어 피해자들의 경제활동,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 사용 등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을 경험한 성인 자녀들의 집담회에서도 지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컸다”라고 말했다.지원정책 대다수가 가족 단위다. 최근 전 국민 대상이라던 긴급재난지원금은 세대주에게 지급됐다. 모든 가족이 정상 가족이라는 전제 아래 시행된 정책이다. 가족에서 이탈한 이들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가정폭력 피해자 등을 대상으로 이의신청을 받기도 했으나, 세대주가 속한 주민센터로 돌아가야 하는 등 어려움은 여전했다. 정샘 국장은 “신체적·정서적 폭력이 있는 가정에서 경제적 폭력 비율도 높다. 집을 나오지 않은 딸이라도 가정폭력 가해자에게 지원금을 분배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지적했다.
가족 중심 지원정책이 딸들을 가족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든다고 정샘 국장은 비판했다. 그는 “청년 지원정책에서도 부모 재산이 함께 고려된다. 청년들은 실제로 가진 소득이나 누릴 재산과 별개로 지원을 못 받는 경우가 많다”라며 “현재 구조는 폭력을 감내하는 게 더 이득인 상황이다. 사회의 중심 단위를 가족에서 개인으로 바꿔야 한다. 가정폭력처벌법에서 가족 구성원의 인권보다 가정 유지가 우선되는 목적 조항부터 개정돼야 한다. 이것이 가족 단위 정책에 대한 기조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강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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