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 비폭력과 종교평화...해강스님(10월첫주 서원법회)
작성자 실상사 11-11-15
10월 첫째주 서원법회
비폭력과 종교평화선언
해강스님 (지리산 실상사 주지)
정토사에서 사찰 순례 겸 우리 법회에 함께 하셨습니다. 정토사에서 오신 분들께 환영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짝짝짝”
반갑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만, 늘 법회 할 적마다 법당이 좁아 이렇게 밖에 앉으시게 해서 주지 소임자로서 면목이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법당이 좁아서 한데 나 앉은 신도님들에게 제가 미안해하고 면목 없어 할 이유가 없더라고요.^^* 절 불사는 즉 도량을 만들고 법당을 짓는 역할은 원래 스님들의 일이 아닙니다. 재가자들의 역할이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언제부터 그랬는지 절을 짓고 가꾸고 하는 일이 스님들의 역할이 되고 재가자들은 스님들이 절 짓고 관리하는데 동참이나 하는 것으로 되어 버렸고 우리는 대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에 맞게 엄밀히 따져 보지요. 불교에서 최초의 사찰이 무슨 절인 줄 아세요? 그렇습니다. 죽림정사입니다.
그런데 죽림정사 지을 때 부처님이 불사 기획하고 화주 다녔다는 이야기 들어보셨어요? 못 들어봤지요? ^^*
죽림정사 지을 때 부처님이 벽돌 나르고 신도들에게 “우리 절 지으려니까 시주하시오, 뭐 하시오” 그런 적 있어요? 그런 적 없어요.
절이란 본래 재가자들이 스님들의 수행처로 만들어주셨던 것이고, 그래서 스님들은 그런 수행처를 주시면 거기 살고 없으면 말고 그런 겁니다. 죽림정사도 그렇고 기원정사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바로 말하자면은 지금 우리 실상사는 법당이 좁아서 의식을 할 때는 밖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런 것들을 빨리 벗어나기 위해 그럴만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역할은 주지인 저 같은 출가자들의 역할이 아니고 재가자의 역할입니다. 또 재가자들이 판단해서 ‘뭐, 난 한 데 앉는 것이 좋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 사실은 주지인 제가 법회 때마다 기도 때마다 신도님들이 밖에 앉으신 것에 대해 미안해 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렇죠? (...) 동의를 안 하시나봐요? 대답 소리가 별로네요.
실상사는 지금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천일기도도 두 번째 하고 있습니다.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기획을 하고 불사세미나를 하고 한지가 벌써 4~5년 쯤 됩니다. 그런데 불사한다고 4~5년 쯤 이러고 있는데 뭐 하나 지어 놓은 것이 없어요. ^^
그렇지만 실상사 불사는 눈에 보이는 형이하학적인 건물 불사 이전에 이미 불사를 발원하고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불사를 많이 해 왔습니다. 그런 정신의 불사를 바탕으로 그런 정신을 담고 키울 수 있는 건물은 금방 이루어지리라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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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서원법회에서는 불자들의 가장 중요한 수행 덕목인 불살생에 대해서 계속 말씀을 드려왔습니다. 불살생이란 단지 산목숨을 죽이지 않는 것만이 아니고 더 나아가서 비폭력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불살생이라고 말씀 드렸었지요. 그런데 ‘비폭력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불살생의 계를 지키는 것이고 또 불제자로서의 부처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행덕목이다’ 라고 알고만 있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실현해 내기 위해서 서원법회 때 함께 하시는 분들과 공동의 서원을 세웠었습니다.
‘불살생을 실천하는 하나의 구체적 수행방법으로써 육식을 줄이고 채식하기, 채식을 늘려가기, 그리고 더 나아가서 마지막에는 육식하지 않는 채식주의자가 되기’ 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서 ‘모피라든지 가죽 제품 등을 사용하지 않겠다’라는 서원을 함께 세웠었습니다. 서 너 차례에 걸쳐서 육식의 문제와 그리고 모피라든지 가죽제품의 사용 문제 등등에 대해서 말씀 드렸고 우리 함께 서로 약속했고 그 약속을 부처님 전에 절을 세 번 하면서 서원을 세우고 약속을 했었습니다.
어때요? 벌써 상당 기간이 지났는데 그 약속, 그 서원 잘 이행하고 계신가요? (대중: 네..) 정말이요? (대중: 부족해요.) 부족해요? 그런 겁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본래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공부도 하고 그런 게 수행이에요. 마치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다시 넘어지고 또 일어섰다 다시 넘어지고 또 일어서고... 넘어질지라도 반드시 일어서겠다는 그 마음만 잊지 않고서 계속 일어서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넘어지는 횟수가 줄어들고 넘어져서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점점 잘 일어서게 되고 잘 걷게 됩니다. 이게 수행이에요. 수행은 다른 것 없습니다. 잘 안 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 그 가치를 잊지 말고 계속 시도하고 또 하고 또 하는 것, 이것이 수행입니다.
이 이야기는 회주스님 역시 법회 할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또 하고, 또 하고 어떻게 ? 밥 먹듯이, 죽어라고 ”
그러다보면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정말로 내 삶이 아름다워지고 깨끗해지고 향기로워져 갑니다.
그게 수행입니다. 길가다 어느 날 갑자기 번갯불 펑 터지듯이 그렇게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가 옆길로 샜네요.
제가 그동안 여러분께 불살생의 정신으로 수행하는 것, 그것도 우리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법들로써 채식하기와 모피나 가죽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것 등등을 말씀을 해 왔는데, 오늘 역시 그러한 일환으로 다른 관점에서 불살생의 문제, 비폭력의 문제를 다뤄봤으면 합니다.
인류가 생겨나면서, 종교라는 것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생겨났지요. 종교라는 것이 인간들에게 생겨난 가장 큰 이유가 뭘까요? 불안해서? 그런 분들도 있지요. 불안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 맞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어떤 종교든지 간에 인간의 삶을 보다 더 평온하게 보다 더 행복하게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지요.
“내 종교 믿으면 삶이 고달파진다. 내 사상, 내 가르침을 따르면 인생이 불행해진다”
이렇게 가르치는 종교 보셨나요? 없지요. “내 종교를 믿으면, 내 가르침을 따르면 삶이 진정 행복해 질 것이다” 모두 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거짓은 아니지요.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바로 그러한 것이니까요. 모두 ‘인간 삶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사를 들여다보면 그렇게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펼쳐 진 가르침의 종교들이 안으로는 서로 싸우고 밖으로 다른 종교와 부딪히고 싸움으로 인해서 인류 사회의 불행을 만들어 내는 데 큰 몫을 차지합니다.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지요. 다양한 종교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나라인데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종교가 서로 다르다고 해서 사상의 대립으로 인해서 크게, 민족의 운명이 걸릴 정도로 크게 또는 그것으로 인해 사람이 죽어가고 하는 그러한 분쟁은 없었습니다. 새로운 종교가 자리 잡는데 있어서 정치적 문제나 탄압을 받은 적은 있어도 종교 간의 대립을 통해서 사람이 죽어가거나 피의 대립과 파탄의 갈등은 아직은 없었습니다만, 현재 소소하게 일어나는 종교간의 문제를 보며 많은 이들이 염려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간과하고 그대로 놔뒀다가는 앞으로 다른 나라에서 보듯이 피의 전쟁과 대립을 불러올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도 이제 종교 간의 화합과 화해 또 서로 공존을 도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현실에 당면해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조금 정치적 색깔을 띨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서 조금 언급하기가 그렇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 그러한 문제들이 계속 수면에 잠재되어 있다가 현 정부 들어와서 표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우려를 표하고 근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또는 각 종교 안에서도 건전하고 바른 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바라는 것은 종교 간의 화합과 화쟁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대한불교조계종단의 화쟁위원회에서 조계종 종단의 이름으로 ‘종교평화선언’을 발표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종교 간의 평화를 이루어 내는 것은 오늘날 우리 현실 삶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또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실천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동안에는 간과되어 있다가 다행이도 늦게나마 조계종단 화쟁위원회에서 ‘종교평화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 ‘종교평화선언’이 발표되어지자 세간에서 아주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아마 신문이나 뉴스 매체를 꼼꼼하게 잘 보시는 분들을 접하셨을 텐데 여러 신문과 텔레비전 매체에서 조계종단의 ‘종교평화선언’을 매우 크게 다뤘습니다. 중앙일보의 경우 전면에 다루고, 주요 일간지에서는 사설에서도 다루고 텔레비전에서는 9시, 8시 뉴스가 메인 뉴스라던데, 거기서도 다루고 그랬습니다.
오늘 아침 스님들 차담시간에는 이 문제에 대해서 서로 토론하고 함께 대화를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온 얘기인데, 일제 해방 이후에 한국 불교계가 새롭게 정비를 하고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 역사가 5~60년 되지요. 5~60년 역사에서 불교계가 사회 문제를 가지고 즉, 다시 말해서 자신들의 이해득실과 관련되지 아니한 사회 공통의 문제를 가지고 불교계의 목소리를 내어서 사회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또 좋은 평가를 얻고 또 큰 반응을 일으킨 것이 없었습니다.
엄밀히 보면 이 ‘종교평화선언’이 최초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조계종에서 내 놓은 ‘종교평화선언’은 사회에서 큰 관심과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불교계 내에서는 몰라요. 관심도 없어요. 겨우 몇몇 분들이 거기에 대해서 말할 뿐이고 또 몇몇 분들이 거기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할 뿐입니다. 정작 불교계 내에서는 그런 것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또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더라’하고 넘어가 버립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그동안에 비폭력 문제를 다뤄왔었는데 비폭력 문제를 다루는 일환으로 조계종의 ‘종교평화선언’에 대해서 함께 공유를 했으면 하는 생각에서 들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말씀드렸듯이 조계종의 ‘종교평화선언’을 준비한 단체가 화쟁위원회입니다. 화쟁위원회를 이끌고 계신 분이 우리 절에 회주로 계시는 우리가 스승으로 모시고 함께 사는 도법스님이십니다. 일단 우리가 스승으로 모시고 함께 사는 스님이 리더가 되어서 만들어낸 작품이 ‘종교평화선언’이고요. 그리고 그것이 조계종의 역사, 한국 불교의 역사에서 사회에서 최초로 ‘아! 정말 불교가 멋있다! 정말 잘 한다!’ 요즘의 속된 말로 ‘한방 쐈다!’ 이렇게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킨 사건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분을 모시고 사는 우리 절의 신도님들이나 우리 안의 식구들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 또 그것이 무엇인지, 별 관심도 없어요. 그래서 제가 오늘 바로 이것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한번쯤 내용을 살펴봤으면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내용이 엄청 깁니다. 밥 먹기 전까지 법회를 마쳐야 되는데 어렵겠습니다. 누가 그러대요. 서원법회 때 주지스님 법문이 회주스님 법문보다 훨씬 좋대요. 내용이 좋아서가 아니고 짧게 해서. 하하하!.....
짧게 해서 좋다고 그러는데, 배고프지 않게 밥 시간에 맞춰 마쳐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 전문을 축약해 놓은 줄임본을 살펴보겠습니다. 괜찮겠지요? 싫으시다면 딴 이야기 하고요.
서문을 잠깐 읽어 드릴게요.
<지금 우리사회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다인종, 다문화 사회입니다. 이와 함께 한국사회는 다종교 사회입니다. 기독교, 불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천주교, 민족종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가 한국사회에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믿음과 진리관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연기적 세계관은 서로 다른 인간들이 상호 존중하고 상생할 수 있는 평화적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연기적 세계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돼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과 ‘저것’ ‘나’와 ‘남’은 서로 별개의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연관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연기적 세계관으로 본다면 반목과 대립은 바람직한 생존의 방식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저것’을 부정하는 것은 ‘이것’ 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남을 부정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남을 인정해야 하고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남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 연기적 세계관의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웃종교는 ‘이웃’에 있는 나 자신의 종교이며, 내 종교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연관된 존재일 뿐 아니라 서로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 나의 종교가 우주 전체를 담고 있듯이 상대의 종교 또한 우주 전체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 인연의 차이일 뿐입니다. 각자의 다른 인연이 만들어내는 다양성은 ‘있는 그대로’ 세계의 실상이며 아름다움입니다. 바로 이러한 세계관이 불교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다원적 상황을 이해하는 관점이며, 이웃종교와 관계 맺기를 원하는 바탕입니다.>
이웃종교에 대한 관용과 열린 정신은 기원전 3세기 중엽 인도의 아쇼카왕이 남긴 새김글에도 잘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선언문의 부제가 ‘21세기의 아쇼카 선언’입니다.
잠시 아쇼카란 인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넘어가야 이해하는데 보탬이 될 것 같습니다. 아쇼카란 인물은 인도사람입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5~600년이 지난 다음에 태어난 사람인데요. 인도는 땅덩어리가 큽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마 우리나라 남북한 합한 것의 열배도 넘을 거예요. 인도 땅이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동에서 서로 기차를 타고 가도 30시간 이상 넘어 가야니까요. 부럽지요? 인도가면 제일 부러운 것이 땅덩이 큰 것입니다. 그렇게 큰 땅덩어리니까 당시 인도는 여러 국가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인도를 최초로 거대한 통일 국가로 만든 것이 바로 아쇼카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역사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듯이 다양한 국가들을 하나로 통일 시키는데, “통일 시키자” 하니까, “그러자” 하며 합해졌을까요? 아니지요. 다양한 여러 국가를 하나로 통일시키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할까요? 엄청난 피의 살육 전쟁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지요.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통일시키겠다는 이름으로 전쟁을 벌여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인물이 바로 아쇼카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렇게 하면 좋겠다는 욕망에 의해서 뭔가 기대하고 뭔가 이뤄놓고 보면, 막상 이뤄놓고 보면 어때요? 허무하지요. 별거 없습니다. 해 놓고 보면, 허망하고 허무합니다. 그리고 냉정하게 자신이 했던 행위를 돌아보게 됩니다. 아쇼카 역시 그러했지요. 통일시키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수많은 나라들을 전쟁을 통해 복속 시켜서 대통일 국가를 만들었는데 막상 만들고 보니까 허무하고 그래서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니 너무도 많은 피의 살육을 벌였던 거예요.
그래서 아쇼카대왕은 참회하는 마음에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하고서 매우 독실한 불교신자가 됩니다. 매우 독실한 불교신자가 된 다음에 아쇼카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립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 뭐가 있냐면... 인류 역사에 보면 동서고금에 많은 통치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서로 인정하고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실제로 구체적으로 행동하고 매우 강력하게 실천해 옮긴 인물은 없습니다. 아쇼카왕 이전에 전무하고 아직까지도 후무합니다.
실제로 아쇼카왕은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다 보니까 불교가 정말 불교답기 위해서는 다른 종교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고 그래서 아쇼카왕은 국법으로 모든 종교를 자신의 종교인 불교와 평등하게 대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법을 만들어서 그것을 직접 실천했고 그 법령을 돌기둥에 세워서 곳곳에다 모셔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부처님의 성지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쇼카왕 덕분이에요. 아쇼카왕이 부처님의 성지를 순례하고 부처님 성지 마다 큰 돌기둥을 세워서 ‘이곳이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이다, 이곳이 부처님께서 초전 법륜을 굴리신 곳이다.’ 이렇게 돌기둥에 새겨 놓았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발견 되어서 ‘아! 이곳이 부처님의 탄생지이고, 이곳이 열반지이구나!’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이 여러 종교의 존중 원칙에 관한 법령을 아쇼카왕이 돌 기둥에다 새겨 세워놨지요.
여담입니다만, 아쇼카왕의 석주의 꼭대기에는 사자가 있습니다. 사자머리가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에도 인도의 나라를 상징하는 상징입니다. 인도의 국기, 인도의 돈, 인도의 문양, 이런 모든 것에 다 들어갑니다. 어쨌든 그만큼 인도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인데 그분이 석조에다 뭐라고 적어 놨느냐면 “저 아쇼카왕은 모든 종교의 신자들, 그들이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모두를 존경합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스님만 존경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종교의 성직자들도 나는 불교 신자이지만 다 존경하겠다는 것입니다.) 각 종교마다 기본 교리는 다를 수 있으며 자신의 종교를 선전하느라 남의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어떤 의도에서든 자신의 종교에 오히려 더 큰 해악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조화가 최선입니다.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존경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자신의 종교도 발전하게 되고 진리도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다른 종교도 차별 없이 공평하게 법으로 보장해서 대우를 했습니다. 인류사에서 동서양을 통틀어 종교에 관한 다른 왕들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엄청난 사건이고 대단한 일인 것입니다. 아쇼카왕의 석조의 문언을 인용해서 서문의 내용이 계속되는데, 조금만 더 읽어보고 내용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우리 불교인은 이 내용을 역사적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소중하게 실천해야 할 가르침으로 받아들여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이와 함께 우리 불교인은 오늘날 종교 간의 갈등상황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반성합니다. 연기적 세계관은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부처님의 관점이며, 불교가 세상과 관계 맺기를 원하는 방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불교인들은 이웃종교를 진정으로 ‘이웃’으로 생각하는데 충분하지 못했으며 이웃종교인의 허물을 내 허물로 여기고 그들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는데 충분하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이웃종교를 질시하거나 경쟁하는 상대로 여겼던 적은 없었는지 반성합니다. 그리고 이웃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귀 기울여 배우려는 노력이 충분하지 못하였음을 반성합니다. 이런 반성과 참회 위에서 우리 불교인은 한국사회의 종교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불교적 입장과 실천을 다음과 같이 천명합니다.>
‘종교평화선언문’은 이렇게 말하고서 다섯 가지의 자기 약속을 내 놓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서 ‘연기’라는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서로가 서로에 의지해서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결국, 제가 누차 우리 신도님들에게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만, 내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흔히 내 아버지 어머니만 있으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생각하지요. 어머니 아버지가 나를 낳으셨다고 생각하는데 천만에. 세상에 어머니 아버지만 있으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가깝게는 어머니 아버지를 포함해서 이 세상에는 크던 작던 간에 수많은 존재들이,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한다면 이 세상에 나를 제외한 모든 존재들이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나를 이 세상에 살아가게 하는데 모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입니다. 힘을 보탰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바로 나를 낳은 어머니이고 나를 기르는 아버지인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바라봐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 ‘연기’입니다. 이것이 불교가 세상을 바라보는, 불제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세상이 모든 존재, 우리 절의 꽃님이 까지도 나를 낳고 기르는 어머니이고 아버지인데, 종교가 다른 사람은 어떨까요?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나와 정말 무관하고 종교가 다르니까 저 놈은 확 쥐어박아야 하는 놈일까요? 아니라는 것이지요.
정말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가 다른 이와 어떤 차이가 있던지, 어떤 다름이 있던지 간에 그 차이와 다름은 결국 나에게 보탬이 되는 나를 낳고 나를 성립시키고 살아가게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세상에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생겼다고 보세요. 그러면 세상에 남자는 남자만 있고 여자는 여자만 있을 것 아닙니까? 세상이 되겠어요? 안됩니다. 달라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달라야 되요.
그렇듯이 너와 나는 달라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다른 점이, 너와 내가 다르기 때문에 헤어지고 대립해야 되는 것이 아니요, 다르기 때문에 비로소 만나야 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똑같으면 만날 수도 없어요. 서로 다르기 때문에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부처님의 진리를 부처님의 가르침이 존재한다면 다른 종교에 대해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는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평화를 위한 종교인의 선언(21세기 아쇼카 선언)에서
첫 번째로 선언한 것은 ‘열린 진리관’입니다.
대체로 많은 종교인들은 자기 종교의 사상만이 진리라고 이야기 합니다. 대부분의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그러한 성향이 강합니다. 그러면 불교는 안 그럴까요? 천만에, 많은 불교인들도 불교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여기서 불교가 최고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 '발' 들어보세요? ^^ 아무도 발 안 드네.(웃음) 보세요. 여러분도 다 불교를 최고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정말 불교가 최고일까요? 천만에요. 불교는 최고 아닙니다. 왜? 불교는 최고가 아님으로써 비로소 최고가 됩니다.
최고라는 것이 뭘까요? 다른 것과 다른 것입니다. 너보다 내가 잘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부처님의 연기적 세계관이 ‘어떤 존재가 어떤 존재보다 더 잘난 놈이 있다.’ 이렇게 바라보는 세상이 아니란 것이지요. 불교는 절대 그렇게 세상을 보도록 가르치지 않습니다.
세상에 최고는 없습니다. 최고가 없으니까 가장 못난 놈도 없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잘나고 못난, 최고 최저의 차이가 아니라 서로 다를 뿐입니다. 다름이 있을 뿐이고 우린 그 다름으로서 비로소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종교도 다른 종교대로 그들의 진리를 믿기에 그렇게 인정하고 존중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열린 진리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고 불교만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이웃종교 나름의 진리가 있다고 인정해준다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가 불교의 진리를 인정하든 말든 그것은 그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불제자는 불제자의 마음으로, 부처님의 법에 의해서 다른 종교나 다른 사람의 존재와 그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이 ‘진정 불제자다운 태도요, 마음 씀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가 ‘종교 다양성을 존중하겠다.’라는 것입니다.
한국사회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큰 종교, 작은 종교 등 다양한 종교가 있는데 만약에 세력이 큰 종교만을 종교라고 인정한다면 그것이 옳은 태도일까요? 세상을 그렇게 한번 봅시다. 힘 센 놈만 사람인가요? 힘 센 놈만 한국 사회에 권리가 있나요? 힘 센 놈만 대접 받아야 됩니까? 마찬가지잖아요. 힘없는 종교는 종교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세상살이에서도 힘 있는 사람만 존중하고 힘없는 사람은 핍박 받아야 한다는 논리와 뭐가 다릅니까? 똑같은 거지요.
종교는 큰 종교든 작은 종교든 어떤 식의 종교이든 간에 그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해줘야 합니다. 불교는 내 종교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종교 또한 소중하게 대해주고 여겨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니까, 현재 상황이 그러니까 그렇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 아까도 말했듯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연기적 세계관에서 본다면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이도 소중한 것입니다. 다른 이를 소중하게 여겨야 비로소 자신이 소중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셨어요. 이렇게 가르치셨는데 ‘불교만이 최고다. 다른 종교는 우스워, 안 소중해! 다른 데는 별 볼일 없어! 종교로 인정할 수 없어! 진리를 인정할 수 없어!’ 이런 태도는 불교로 살아가는 태도가 아닙니다. 불제자의 태도가 아니고 불교를 모르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세 번째, ‘전법과 전교의 원칙’입니다.
믿음을 전하는 일은 곧 자신의 믿음을 다듬어 가는 과정이지요. 서로 다른 믿음을 지닌 이들과 어우러지면서 큰 조화를 이뤄가는 과정이 즉 ‘포교’입니다. 전도와 전법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전도와 전법이라는 것이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야! 그 종교 별 볼일 없어!, 그것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 절 좀 봐봐. 훨씬 더 좋아! 이리로 와!’라고 개종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아쇼카 선언, ‘종교평화선언’이 나오고 난 뒤에 불교계 안에서 일부 불자들이 가장 문제 삼는 이슈 중에 한 가지가 바로 이 점입니다. 그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도하는 것이 개종으로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교를 또는 포교를 포기하는 일이다’라고 얘기합니다.
저는 생각을 달리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그 종교를 버리고 이 종교로 오라고 꼬드겨 내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떤 종교, 어떤 신앙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본인의 판단에 의해서입니다. 단, 불제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른 이에게 전하는 목적은 뭔가 하면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녹야원에서 교진여 등 다섯 명의 비구에게 가르침을 처음 굴리시고 그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깨닫고 난 뒤에 부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이제 전법의 길을 떠나라. 다섯 명이 함께 몰려다니지 말고 (몰려다니면 아마 일 저지를까봐 그랬나 봐요.(웃음)) 각각 다섯 군데로 흩어져서 가라. (그래야 여러 군데를 갈 것 아닙니까? 뭐 하러 가?) 가서 나의 가르침을 전하라. (무엇을 위해서?) 세상 사람들의 행복과 안락을 위해서.”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세상의 평화와 안락을 위해서 가르침을 전하라" 하셨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그 종교는 몹쓸 종교니까 따르지 말고 내 불교로 끌어와라", "개종시켜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내가 좋은 것을 가졌으면 다만 내 좋은 것을 드러내면 됩니다. 드러내면 다른 사람이 들여다보고 아 좋으면 다른 사람이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교를 포교하는 전법하는 가장 좋은 자세는 불제자가 불제자답게 모범적으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모범적으로 마음 쓰고 모범적으로 말하고 불제자답게 행동하면, 누가 봐도 그 모습이 좋으면, 그리고 그 사람이 그렇게 아름답게 생활하고 아름답게 마음 쓸 수 있는 근거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다고 알게되면,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자는 당연히 따라 올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지나가다가 개똥을 보면 어때요? 찡그리지요. 그렇지요? 개똥을 보고서 코를 들이미는 사람 봤습니까? 우리 꽃님이가 막 싸 놓은 따끈따끈한 개똥에 코를 들이미시는 분, 두 종류이지요. 변태거나 또는 그것을 특별하게 연구하시는 분 아니면 안 할 겁니다.
그런데 요즘 가을에 저 뒤로 가면 소국이 많이 핍니다. 지나는 길에 노란 국화가 피어있으면 어때요? 예쁘잖아요. 자기도 모르게 눈이 뻥 뜨이고 코를 갖다댈 수밖에 없습니다. 기분이 좋지요. 그렇잖아요. 이런 겁니다.
이런 거예요. 내가 세상에서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면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는데 그 거름이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거름삼아서 세상의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서 향기를 풍기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요? 나비가 날아들고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집니다. 그러면 당연히 따라와요.
여러분, 아침에 집에서 나오면서 옷매무새도 가다듬고 화장도 하고 그러죠. 왜 하셨어요? 스스로의 만족도 있지만, 다른 이를 배려하는 마음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다른 이를 배려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만약에 전법이라는 것이 다른 종교인들의 개종을 목적으로 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투쟁입니다. 이것은 평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싸움질을 하자는 것입니다. 일부 종교에서 오랜 종교적 전통을 가진 나라로 전도를 하러 가고 포교를 하러 갑니다. 그게 잘 될까요? 잘 안되지요, 그게 바른 태도일까요? 세상으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잖아요. 그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그렇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해 봐도 그렇고 부처님 가르침의 전도와 전법과 포교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개종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고 바로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더 확고히 하고 다듬어 가는 과정일 뿐이고 다른 종교를 가졌던 사람이 불교로 개종하는 것은 그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거시적인 것입니다.
네 번째, ‘공적 영역에서의 종교 활동’입니다.
국가와 종교는 분리되어 있지요. 정교분리는 늘 이야기 하지만 인류역사에서는 정교분리가 제대로 된 적이 없어요. 지금도 그렇지요. 엄밀하게 말해서 종교와 정치는 한 뿌리입니다. 태어난 것이 옛날에 한 뿌리였어요. 그러다보니까 나눠 가지고 제 역할을 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종교대로, 정치는 정치대로 나눠져야 한다는 판단을 바꿀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공적영역, 다시 말해서 사회의 정치인이나 관리라든지 아니면 어떤 집단에 공공의 책무를 맡은 사람이 자기의 직책과 자기의 이해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을 이용해서 자기 종교를 펼치고 다른 종교를 탄압하고자 하는 것은 옳지 않은 태도라는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불교는 한국사회에서 그런 부분에 취약하기 때문에 두 말할 필요도 없겠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우리가 가장 좁은 단위인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 아버지가 절에 다닌다고 자식들에게 절에 다닐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강요해서는 안 되고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아까 전법에서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 부모님이 정말 잘 산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면 자식들은 당연히 따라오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되는데 아버지라는 권리와 권력을 내세워서는 자신의 신념을 가족들에게 강요하는 것, 이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사회에서 나름대로 자기 위치가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소단위일 수도 있고 때로는 더 큰 집단에서 높은 위치에 있을 수도 있는데 바로 그런 것을 이용해서 종교나 포교활동을 하는 것, 다른 이의 믿음을 강요하는 그리고 술수를 부리는 행위는 옳지 않다는 이야기이지요. 결국은 그것 때문에 종교가 대립하게 되고 결국은 비극을 불러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 ‘종교평화선언’에서는 ‘우리 불교인들은 공적영역에서 그런 식으로 종교를 강요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다.’ 라는 그런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평화를 통한 실천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세상사와 종교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종교가 생겨난 이유도 세상사를 평안하기 위한 목적을 걸고 나왔기 때문에 더욱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살이는, 현실의 삶은 종교 이상을 실현해내는 좋은 자리이고 종교 이상을 판단해내는 좋은 잣대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이 세상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올바른 가르침을 판별하는 기준을 어디다 둘 것인가?
대부분의 불교 신도들은 스님을 따릅니다. 이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 생겨난 불교집단에 와서는 부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스님을 따라요. 우습지 않아요? 우습잖아요. 그래서 ‘어느 스님 유명하다더라.’ 우~ 몰리고 ‘어느 스님 기도 발이 잘 받는다더라.’ 우~ 몰리고 그러지요. ‘어느 스님은 텔레비전 나왔었다더라.’ 또 그리로 모이고 무슨 신앙도 유명세를 따라 무슨 연예인들 팬클럽 같이 쫓아다닌다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 실망할 일도 많이 생깁니다. 지난 번에 뉴스 보니 어느 연예인이 탈세로 뉴스에 났던데, 겁나게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연예인이라면서요? 그런데 탈세했다고 하루아침에 야단 났데요. 그런 거예요. 사람을 믿으면 늘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연애를 해봐서 알잖아요. 아니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도 어느 순간에 실망을 주잖습니까? 아닌가봐? 이분들은 사랑을 아직까지 만족스럽게 하시는 분들인가 봐. 저는 그렇더라고요.(웃음) 그러니까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게 됩니다.
그럼, 뭘 믿어야 될까요? 그렇지요. 법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에다 법을 클로즈업 시켜서 사람을 봐야하는 것이지 법에다 사람을 갖다 붙여서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그러셨지요. 나를 믿지 말고 법을 믿어라 그러셨습니다. 심지어 부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법을 따르게 했는데 아무리 후대 스님이 잘 나고 훌륭하더라도 부처님만 하겠어요? 그렇잖아요. 법에 의지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고 본다면 세상의 어느 종교가 다른 종교 믿는 사람은 싹 죽여 버려라! 이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러대요. 이슬람교가 한 손엔 코란, 한 손엔 칼 들고 믿을래? 죽을래? 그랬다고 하는데, 그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 전해진 것입니다. 이슬람교 사상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불교보다도 훨씬 더 평화주의입니다. 뭐 한 손엔 코란, 한 손엔 칼 들고 안 믿으면 죽인다? 이것 전혀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다. 코란의 가르침에는 그런 것 없습니다. 코란의 가르침을 보면 ‘아하! 진정한 보살행의 구체적인 묘사가 바로 이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종교든지 다 세상사람들의 평화와 행복을 애기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종교를 신앙하는 집단에서 보여주는 행위는 좀 다릅니다. 내가 다른 종교는 언급하지 않겠는데요. 우리 종교만 놓고 보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에서 보면, 주지 자리 놓고 싸움하는 것이 나와요? 안 나오잖아요. 그렇지요? 신도 많이 끌어들이기 위해서 다른 절과 경쟁하라는 말이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없어요. 자꾸 이런 이야기 하면 자기 얼굴에 침 뱉기이니까. 대충 눈치 빠른 분들은 이해하시지요? 그런 이야기 없습니다. 그런데 집단에서는 더러 그렇게 행합니다. 불교라는 이름으로 행합니다. 불교라는 포장지를 씌워서 합니다.
그러나 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믿어야 할 것이 사람이 아니고 따라야 할 것이 사람이 아니고 법입니다. 바로 평화를 통한 실천이라고 하는 것은 법에 의해서 생각하고 법에 의해서 행동한다고 한다면 종교 간의 갈등 상황도 충분히 해소될 수 있는 것이고 아예 생겨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 간의 갈등과 대립도 법에 의해서 진리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루어진 집단, 즉 사람의 문제입니다. 진리와 법의 문제가 아니고 사람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즉, 평화적인 가르침에 의해서 다른 종교와 함께 하겠다는 태도를 선언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그러셨지요? 미움은 미움으로써 절대 해결할 수 없다고 그러셨지요? 미움을 해소하는 방법, 법구경에 나오지요? 미움은 오직 사랑으로써 없앨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양한 신념을 가진 다양한 존재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불교가 아무리 포교를 열심히 하고 아무리 훌륭한 스님이 많이 나오신다고 해도 이 세상사람 모두가 불교신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더불어서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과 대립하지 않고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평화로써 대해야 합니다.
설령 문제가 생겼더라도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아니고 평화로써, 미움이 아닌 사랑으로써 그리고 대립과 갈등이 아닌 자비로 대할 때만이 비로소 문제는 해결되어진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불교요, 그것이 바로 불제자로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부처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다섯 가지 선언을 해 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다섯 가지 선언을 하고, 마지막으로 평화를 위한 불교인의 서원을 세웠는데요.
잠깐 읽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의 서원 □
우리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와 안락을 얻고자 하듯이
이웃종교인들도 그들이 믿는 종교를 통해 평화와 안락을 구하고 있습니다.
길은 다르지만 우리가 이르고자 원하는 바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이웃종교의 가르침도 소중하게 여기겠습니다.
내 종교의 관점과 언어로 이웃종교를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입장과 언어로 그들의 종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웃종교인과 더불어 고통 받고 소외된 모든 생명들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겠습니다.
그들과 함께 지구촌 곳곳의 가난과 질병을 퇴치하고 전쟁과 폭력을 방지하며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환경파괴를 막아
모든 생명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것이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의 서원입니다. 제목은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의 서원’이라고 했지만 안으로 들여다보면 내 삶의 평화를 위한 나의 서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비춰보고 나의 삶을 다듬어보고 다른 이, 다른 종교, 나와 다른 존재들을 대한다면 바로 내 안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내 주변의 평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제가 대충대충 징검다리 건너 뛰 듯이 말씀드렸지만 이 선언문의 전문은 조계종 홈페이지에 들어가시면 볼 수 있습니다. 또 실상사 홈페이지에도 올려놓겠습니다. 인터넷 하시는 분들은 들어가 보시고요. 혹여 필요하신 분들은 다음에 오시면 자료를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직 초안입니다. 완성본이 아니라는 겁니다.
초안을 발표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불교는 어떠한 것을 만들어 갈 때 대중이 함께 논의해서 만들어가는 전통이 있습니다. 초안을 내어놓고 대중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종교평화선언도 앞으로 대중들의 다양한 의견을 통해서 다듬어진 완성본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도 여러분께서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시고 좋은 의견도 내 놓으시고 그랬으면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바로 ‘종교평화선언’은 다른 종교와의 평화를 위함일 뿐만 아니라 ‘ 내 안의 내 삶의 평화를 위한 수행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것이 나온 다음 불제자들 사이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왔느냐면,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전도, 개종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포교를 포기하는 것이냐?’는 이야기가 나왔었습니다. 또 하나는, 실상이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언급을 하지요. 기독교 같은 경우 불교에 대해 아주 공격적인데 불교는 그것에 대해 ‘때려라!’ 하고 열린 자세로 나가면 얻어맞기만 하고 결국은 우리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냐? 이런 염려를 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의견들이 있습니다. 의외로 많은 것 같아요. 더 나아가 ‘이렇게 한 들, 저쪽에서 안 받아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쪽에서 막 때리면 맞고만 있을 것인가? 결국은 그러다 다 놓쳐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런 염려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료집에 바로 그런 염려들에 대한 답으로 써 놓은 것이 한 가지 있는데 제가 그것을 인용해서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해인사에 머무셨던 성철스님 법문을 인용해서 말씀을 해 놓았어요. 성철스님이 뭐라고 하셨냐면,
“상대가 나를 해롭게 하면 할수록 더욱더 상대를 받들어 섬겨라. 우리 부처님을 우리 불교를 제일 욕하고 스님들을 제일 공격하는 그 사람들이 극락세계에 가도록 제일 먼저 기도하고 축원하고 절 합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다른 종교인들이 불교를 비방하고 공격 할수록 자꾸 절하고 기도하고 축원하는 그런 사상과 태도로 모든 사람들에게 불교를 선전하고 그런 사상으로 일상생활을 실천해보십시오. 그러면 불교는 바닷물이 밀려들듯이 온 천하를 덮을 것입니다. 그것이 생활화 되면 모든 사람들이 불교에 대해서 감동하고 감복해서 불교가 그런 것인가 해서 불교를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누가 성철스님한테 물어 봤었나 봐요. 여기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저쪽에서 아무리 큰 불을 지르더라도 이쪽에서 자꾸 물을 들이붓는다면 그 불은 결국 꺼지게 될 것입니다. 저쪽에서 큰 불을 지른다고 나도 같이 불을 지른다면 너와 나를 함께 태우게 되는 것이니까 그쪽에서 아무리 불을 지른다고 해도 우리 쪽에서는 자꾸 물을 붓는다면 결국 불은 물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싸우자고 덤벼드는 사람과 싸우지 않고 평화를 이루는 방법인 것이고, 또 불교적으로 생각해봐도 불제자가 능히 취해야 할 태도와 마음 씀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여러분께서 좀 더 마음과 관심을 내셔서 ‘종교평화선언’을 한번쯤 접해보시고 읽어보시고 새기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것이 곧 내 안의 평화를 이뤄내는 것이고 다른 존재를 비폭력으로 대하고 비폭력으로 대함으로써 다른 존재와 더불어서 함께 평화를 만들어내는 진정한 불제자의 수행이요 방법인 것입니다.
오늘 법문은 ‘종교평화선언’을 공유하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