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평화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_2 ... 도법스님
작성자 실상사 10-10-30
79회 다운로드 DATE : 2010-10-30 01:3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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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승불교의 수행
1) 대승불교의 기본 사유 방식
붓다, 그는 고통으로부터 해탈한 사람, 탐진치가 소멸되어 열반에 도달한 사람이다. 그는 어떻게 해탈했는가? 붓다, 그는 오랜 사유 끝에 붓다의 출현, 붓다의 깨달음 여부와 관계 없이 본래부터 있는 보편적 진리를 발견했고 그 진리를 연기법이라고 했다. 내용을 보면 서로 의지하여 서로 존재하게 하고 서로를 빛나게 하는 사랑의 법칙이다. 붓다 그는 우주의 보편적 진리의 길을 발견하고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감으로써 고통으로부터 해탈하고 궁극의 열반에 도달했다. 우리는 그의 가르침을 불교라고 한다. 붓다의 가르침은 팔만 사천 법문이라고 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다. 왜 그렇게 많은 것일까? 붓다의 가르침은 논리적 정합성을 갖는 단일한 체계의 이론서가 아니고 병에 따른 처방전이기 때문에 병의 수만큼이나 처방도 많다. 또는 그 때 그 때 사람의 수준이나 문제에 따른 해결책으로 내놓은 것이기 때문에 사람 수만큼 많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팔만 사천 법문을 종합하여 그 사유방식의 본질적 핵심을 간단하게 함축하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작자수(自作自受) ”이다. 풀어보면 “자신이 행위 하는 대로 그 삶이 이루어진다. 자신이 만든 것은 자신이 받는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체적이고 자립적이고 창조적으로 살아야 한다.”이다. 부처, 부모 그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죽으나 사나, 좋으나 궂으나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살아야 한다. 아무리 길이 잘 닦여져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주체적으로 가야만 그 길이 자신의 길이 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여실지견(如實知見. 연기법 즉 사랑의 법칙을 아는 것 - 지혜의 길) 여실지견행(如實知見行. 사랑의 법칙대로 실천하는 것 - 자비의 길)”이다. 풀어보면 “현실적으로 직면한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 그리고 그 내용(사랑의 법칙)에 따라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라. 그러면 삶이 편안하고 자유롭다”이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직면한 존재의 실상을 떠나서는 어디에서도 길을 찾을 수 없다. 왜 그런가? 다른 데에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바로 지금 여기 직면한 존재의 실상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왜 그런가? 그 곳에 길이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를 좀 더 간추려 정리하면 하나는 주체적인 삶만이 그 삶이 참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 사실과 진실, 즉 직면한 실상에 근거하여 삶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를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면 언제나 그대가 직접(自歸依) 법의 길(法歸依)을 가면 그 길을 가는 만큼 해탈 열반이 바로 그대의 삶이 된다는 뜻이다.
2) 대승불교 수행의 기본 관점과 태도
대승불교 수행론의 기본 관점과 태도는 청매선사의 십무익송(十無益頌)을 참고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사료된다. 십무익송의 핵심은 보편적 진리에 입각한 올바른 방향과 길을 모르고 수행을 하면 아무리 용맹정진을 해도 이익이 없다는 것이다. 방향을 잘못 잡을 경우 마치 가야 할 목적지가 동쪽인데도 불구하고 서쪽을 향하여 줄기차게 달려가는 것처럼 된다는 뜻이다.
다음은 십무익송이다.
○ 삶(마음)과 직결시켜 살피지 않으면 경전을 보아도 이익이 없다.
○ 바른 법에 대한 이해와 믿음에 근거하지 않으면 고행을 해도 이익이 없다.
○ 원인을 가볍게 여기고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기면 도를 탐구해도 이익이 없다.
○ 마음(삶)이 진실하지 않으면 교묘하게 말을 잘 해도 이익이 없다.
○ 존재의 본질이 실체없음(空)을 달관(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인정하고 받아들임)하지 않으면 좌선을 해도 이익이 없다.
○ 아만심을 극복하지 않으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다.
○ 스승이 될 덕이 없으면 대중을 모아도 이익이 없다.
○ 뱃속에 교만이 꽉 차 있으면 유식해도 이익이 없다.
○ 한평생 괴각으로 사는 사람은 대중과 함께 살아도 이익이 없다.
○ 안으로 참다운 덕이 없으면 밖으로 점잖은 행동을 해도 이익이 없다.
우선 참선 ․ 구도 ․ 고행 등에 관계된 것을 살펴 보는 것이 좋겠다.
“보편적 진리인 정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확신이 없으면 목숨 걸고 고행을 해도 이익이 없다. 존재의 본질이 실체 없음을 달관하지 않으면 밤낮으로 좌선을 해도 이익이 없다. 원인과 과정을 소홀히 하고 목적과 결과 만을 중요하게 여기면 용맹심으로 도를 구해도 이익이 없다.” 등 아주 중요한 내용들이다. 십무익송의 내용으로 보면 그냥 치열하게 참선을 한다고 해서, 고행을 한다고 해서, 도를 구한다고 해서 수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과 길, 즉 본래부처의 길을 따라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방향과 길이 없이 맹목적으로 수행을 하면 당사자의 의도나 바람과는 정반대로 소유심, 소구심, 소득심, 속효심이라는 고질병 또는 기복주의,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농후하다. 명심해야 할 일이다.
3) 대승불교 사유로 본 본래부처와 대승불교 수행론
오늘의 한국불교 현실은 비연기적 사고인 실체론적 불교관과 이분법적 실천론인 비중도적 수행론에 빠져 매우 혼란스럽다. 초기불교다, 대승불교다, 교학불교다, 참선불교다 하고 비연기적 사고로 서로를 분리시켜 선후, 경중, 우열을 따지는 왜곡된 불교관으로 인해 참불교, 정법불교가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이론(앎)과 실천, 수행과 일상의 삶, 수행과 깨달음, 자리행과 이타행, 개인 수행과 현실 참여, 자기 완성과 사회 완성 등을 이분법적으로 분리시키는 비중도적인 양극단의 수행론으로 인해 수행자들의 회의와 갈등과 방황이 확대 심화되고 있다. 이에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교학불교와 참선불교, 앎과 실천, 수행과 일상의 삶, 수행과 깨달음, 자리행과 이타행, 개인 수행과 현실 참여, 자기 완성과 사회 완성이 연기 중도적으로 통일되는 길을 열어가고자 본래부처와 대승불교 수행론을 모색해보려고 한다.
우선 불교가 어떤 가르침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불교란 고통에 찬 삶을 살아야 하는 나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내 생명은 어떤 존재인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인류의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화두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는 가르침이다. 그 해답을 초기에는 유아독존, 화엄에서는 본래부처, 선가에선 본래면목이라고 했다. 잘 알다시피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은 본래부처론이다. 따라서 본래부처라는 개념에 담긴 의미를 좀 더 세밀하게 따져보는 것이 좋겠다.
본래부처에 담긴 뜻을 간추려 보면 다섯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다.
첫째는 천하에 제일 귀한 존재임을 뜻한다. 온 우주 그 어디, 그 무엇도 내 생명보다 더 귀한 존재는 있지 않다. 천하의 그 무엇으로도 비교하거나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가치의 존재인 것이다.
둘째는 천하에 제일 주체적인 존재임을 뜻한다. 그 누구, 그 무엇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죽으나 사나 자기 삶은 자기 스스로 살아야 하는 매우 주체적인 존재인 것이다.
셋째는 천하에 제일 완성된 존재임을 뜻한다. 그 누구, 그 무엇도 자기 필요대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는데, 생명의 존재인 나는 자유자재로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대단히 완성된 존재인 것이다.
넷째는 천하에 제일 창조적인 존재임을 뜻한다. 자신의 행위대로 그 삶이 창조된다. 스스로 중생의 삶을 살면 중생의 삶이 창조되고 부처의 삶을 살면 부처의 삶을 이루는 매우 창조적인 존재인 것이다.
다섯째는 천하에 제일 고마운 존재임을 뜻한다. 연꽃은 연못에 의지하여 생명을 갖고, 연못은 연꽃에 의지하여 생명을 갖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의 의지처요, 뿌리요 모체이다. 마찬가지로 온 우주의 낱낱 존재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을 낳고 길러주는 너무나 고마운 존재인 것이다.
전체적으로 정리하면 생명 자체는 천하에 제일 귀중하고 거룩하고 신비한 존재이다. 세상에 생명을 낳고 살게 하는 일보다 더 거룩한 일, 신비한 일, 위대한 일, 중요한 일, 불가사의한 일은 없다. 매 순간순간 우주의 낱낱 존재들이 사랑의 법칙에 따라 서로가 서로의 생명을 낳고 살게 하는 신비한 기적, 불가사의한 기적을 일으키고 있다. 얼마나 대단한가. 우리 모두는 존재 자체가 신비의 존재, 불가사의의 존재, 기적의 존재이며 동시에 매 순간 순간 신비 속에, 기적 속에, 불가사의 속에 살고 있다. 또는 언제 어디에서나 항상 신비, 기적, 불가사의를 일으키는 주체로 살고 있는 것이다.
매일매일 만나고 있는 존재 하나하나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그대와 나의 생명을 낳고 길러주는 너무나 귀하고 고맙고 대단한 존재들인데 어찌 지극히 모시고 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견문각지에 만나는 존재 그 누구나 할 것 없이 본래부처이므로 지극히 잘 모시고 섬겨야 할 일이다. 바로 대자대비의 보살행이다. 당연하고 좋은 일이다. 너무나 본래부처다운 행주좌와라고 하겠다. 스스로 천하에 거룩하기 그지없는 원만구족한 본래부처인데 어찌 무한한 자부심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스스로 그 무엇 하나 부러울 것도 부족할 것도 없는 원만구족한 본래부처이므로 행주좌와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져야 마땅할 일이다. 바로 대무심행이다. 당연하고 멋진 일이다. 너무나 본래부처다운 행주좌와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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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승불교의 수행
1) 대승불교의 기본 사유 방식
붓다, 그는 고통으로부터 해탈한 사람, 탐진치가 소멸되어 열반에 도달한 사람이다. 그는 어떻게 해탈했는가? 붓다, 그는 오랜 사유 끝에 붓다의 출현, 붓다의 깨달음 여부와 관계 없이 본래부터 있는 보편적 진리를 발견했고 그 진리를 연기법이라고 했다. 내용을 보면 서로 의지하여 서로 존재하게 하고 서로를 빛나게 하는 사랑의 법칙이다. 붓다 그는 우주의 보편적 진리의 길을 발견하고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감으로써 고통으로부터 해탈하고 궁극의 열반에 도달했다. 우리는 그의 가르침을 불교라고 한다. 붓다의 가르침은 팔만 사천 법문이라고 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다. 왜 그렇게 많은 것일까? 붓다의 가르침은 논리적 정합성을 갖는 단일한 체계의 이론서가 아니고 병에 따른 처방전이기 때문에 병의 수만큼이나 처방도 많다. 또는 그 때 그 때 사람의 수준이나 문제에 따른 해결책으로 내놓은 것이기 때문에 사람 수만큼 많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팔만 사천 법문을 종합하여 그 사유방식의 본질적 핵심을 간단하게 함축하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작자수(自作自受) ”이다. 풀어보면 “자신이 행위 하는 대로 그 삶이 이루어진다. 자신이 만든 것은 자신이 받는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체적이고 자립적이고 창조적으로 살아야 한다.”이다. 부처, 부모 그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죽으나 사나, 좋으나 궂으나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살아야 한다. 아무리 길이 잘 닦여져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주체적으로 가야만 그 길이 자신의 길이 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여실지견(如實知見. 연기법 즉 사랑의 법칙을 아는 것 - 지혜의 길) 여실지견행(如實知見行. 사랑의 법칙대로 실천하는 것 - 자비의 길)”이다. 풀어보면 “현실적으로 직면한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 그리고 그 내용(사랑의 법칙)에 따라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라. 그러면 삶이 편안하고 자유롭다”이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직면한 존재의 실상을 떠나서는 어디에서도 길을 찾을 수 없다. 왜 그런가? 다른 데에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바로 지금 여기 직면한 존재의 실상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왜 그런가? 그 곳에 길이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를 좀 더 간추려 정리하면 하나는 주체적인 삶만이 그 삶이 참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 사실과 진실, 즉 직면한 실상에 근거하여 삶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를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면 언제나 그대가 직접(自歸依) 법의 길(法歸依)을 가면 그 길을 가는 만큼 해탈 열반이 바로 그대의 삶이 된다는 뜻이다.
2) 대승불교 수행의 기본 관점과 태도
대승불교 수행론의 기본 관점과 태도는 청매선사의 십무익송(十無益頌)을 참고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사료된다. 십무익송의 핵심은 보편적 진리에 입각한 올바른 방향과 길을 모르고 수행을 하면 아무리 용맹정진을 해도 이익이 없다는 것이다. 방향을 잘못 잡을 경우 마치 가야 할 목적지가 동쪽인데도 불구하고 서쪽을 향하여 줄기차게 달려가는 것처럼 된다는 뜻이다.
다음은 십무익송이다.
○ 삶(마음)과 직결시켜 살피지 않으면 경전을 보아도 이익이 없다.
○ 바른 법에 대한 이해와 믿음에 근거하지 않으면 고행을 해도 이익이 없다.
○ 원인을 가볍게 여기고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기면 도를 탐구해도 이익이 없다.
○ 마음(삶)이 진실하지 않으면 교묘하게 말을 잘 해도 이익이 없다.
○ 존재의 본질이 실체없음(空)을 달관(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인정하고 받아들임)하지 않으면 좌선을 해도 이익이 없다.
○ 아만심을 극복하지 않으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다.
○ 스승이 될 덕이 없으면 대중을 모아도 이익이 없다.
○ 뱃속에 교만이 꽉 차 있으면 유식해도 이익이 없다.
○ 한평생 괴각으로 사는 사람은 대중과 함께 살아도 이익이 없다.
○ 안으로 참다운 덕이 없으면 밖으로 점잖은 행동을 해도 이익이 없다.
우선 참선 ․ 구도 ․ 고행 등에 관계된 것을 살펴 보는 것이 좋겠다.
“보편적 진리인 정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확신이 없으면 목숨 걸고 고행을 해도 이익이 없다. 존재의 본질이 실체 없음을 달관하지 않으면 밤낮으로 좌선을 해도 이익이 없다. 원인과 과정을 소홀히 하고 목적과 결과 만을 중요하게 여기면 용맹심으로 도를 구해도 이익이 없다.” 등 아주 중요한 내용들이다. 십무익송의 내용으로 보면 그냥 치열하게 참선을 한다고 해서, 고행을 한다고 해서, 도를 구한다고 해서 수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과 길, 즉 본래부처의 길을 따라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방향과 길이 없이 맹목적으로 수행을 하면 당사자의 의도나 바람과는 정반대로 소유심, 소구심, 소득심, 속효심이라는 고질병 또는 기복주의,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농후하다. 명심해야 할 일이다.
3) 대승불교 사유로 본 본래부처와 대승불교 수행론
오늘의 한국불교 현실은 비연기적 사고인 실체론적 불교관과 이분법적 실천론인 비중도적 수행론에 빠져 매우 혼란스럽다. 초기불교다, 대승불교다, 교학불교다, 참선불교다 하고 비연기적 사고로 서로를 분리시켜 선후, 경중, 우열을 따지는 왜곡된 불교관으로 인해 참불교, 정법불교가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이론(앎)과 실천, 수행과 일상의 삶, 수행과 깨달음, 자리행과 이타행, 개인 수행과 현실 참여, 자기 완성과 사회 완성 등을 이분법적으로 분리시키는 비중도적인 양극단의 수행론으로 인해 수행자들의 회의와 갈등과 방황이 확대 심화되고 있다. 이에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교학불교와 참선불교, 앎과 실천, 수행과 일상의 삶, 수행과 깨달음, 자리행과 이타행, 개인 수행과 현실 참여, 자기 완성과 사회 완성이 연기 중도적으로 통일되는 길을 열어가고자 본래부처와 대승불교 수행론을 모색해보려고 한다.
우선 불교가 어떤 가르침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불교란 고통에 찬 삶을 살아야 하는 나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내 생명은 어떤 존재인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인류의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화두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는 가르침이다. 그 해답을 초기에는 유아독존, 화엄에서는 본래부처, 선가에선 본래면목이라고 했다. 잘 알다시피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은 본래부처론이다. 따라서 본래부처라는 개념에 담긴 의미를 좀 더 세밀하게 따져보는 것이 좋겠다.
본래부처에 담긴 뜻을 간추려 보면 다섯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다.
첫째는 천하에 제일 귀한 존재임을 뜻한다. 온 우주 그 어디, 그 무엇도 내 생명보다 더 귀한 존재는 있지 않다. 천하의 그 무엇으로도 비교하거나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가치의 존재인 것이다.
둘째는 천하에 제일 주체적인 존재임을 뜻한다. 그 누구, 그 무엇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죽으나 사나 자기 삶은 자기 스스로 살아야 하는 매우 주체적인 존재인 것이다.
셋째는 천하에 제일 완성된 존재임을 뜻한다. 그 누구, 그 무엇도 자기 필요대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는데, 생명의 존재인 나는 자유자재로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대단히 완성된 존재인 것이다.
넷째는 천하에 제일 창조적인 존재임을 뜻한다. 자신의 행위대로 그 삶이 창조된다. 스스로 중생의 삶을 살면 중생의 삶이 창조되고 부처의 삶을 살면 부처의 삶을 이루는 매우 창조적인 존재인 것이다.
다섯째는 천하에 제일 고마운 존재임을 뜻한다. 연꽃은 연못에 의지하여 생명을 갖고, 연못은 연꽃에 의지하여 생명을 갖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의 의지처요, 뿌리요 모체이다. 마찬가지로 온 우주의 낱낱 존재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을 낳고 길러주는 너무나 고마운 존재인 것이다.
전체적으로 정리하면 생명 자체는 천하에 제일 귀중하고 거룩하고 신비한 존재이다. 세상에 생명을 낳고 살게 하는 일보다 더 거룩한 일, 신비한 일, 위대한 일, 중요한 일, 불가사의한 일은 없다. 매 순간순간 우주의 낱낱 존재들이 사랑의 법칙에 따라 서로가 서로의 생명을 낳고 살게 하는 신비한 기적, 불가사의한 기적을 일으키고 있다. 얼마나 대단한가. 우리 모두는 존재 자체가 신비의 존재, 불가사의의 존재, 기적의 존재이며 동시에 매 순간 순간 신비 속에, 기적 속에, 불가사의 속에 살고 있다. 또는 언제 어디에서나 항상 신비, 기적, 불가사의를 일으키는 주체로 살고 있는 것이다.
매일매일 만나고 있는 존재 하나하나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그대와 나의 생명을 낳고 길러주는 너무나 귀하고 고맙고 대단한 존재들인데 어찌 지극히 모시고 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견문각지에 만나는 존재 그 누구나 할 것 없이 본래부처이므로 지극히 잘 모시고 섬겨야 할 일이다. 바로 대자대비의 보살행이다. 당연하고 좋은 일이다. 너무나 본래부처다운 행주좌와라고 하겠다. 스스로 천하에 거룩하기 그지없는 원만구족한 본래부처인데 어찌 무한한 자부심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스스로 그 무엇 하나 부러울 것도 부족할 것도 없는 원만구족한 본래부처이므로 행주좌와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져야 마땅할 일이다. 바로 대무심행이다. 당연하고 멋진 일이다. 너무나 본래부처다운 행주좌와라고 하겠다.
본래부처론으로 보면 수행해서 다시 부처되려고 하는 이분법적인 어리석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이미 본래부처인데 다시 부처되려는 어리석은 짓을 해야 할 까닭이 없다. 절집에는 자신 또는 존재 자체가 부처임을 모르고 특별히 따로 부처를 찾아 천하를 헤매고 다니는 무지한 중생을 비유해서 “소를 타고 있으면서 다시 소를 찾는 사람과 같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본래부처인데 어디에 가서 다시 부처를 찾을 것이며, 본래부처인데 수행한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다시 부처가 이루어지겠는가? 한갓 부질없는 헛수고요 전도몽상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본래부처임을 알고 믿고 지금 당장 부처로 사는 것이다.
그럼 본래부처로 사는 삶은 어떤 것일까? 초기에는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라고 했고 화엄불교에서는 동체대비(同體大悲)라고 했고, 선가에서는 행역선 좌역선(行亦禪坐亦禪) 또는 대무심(大無心)이라고 했다. 풀어 보면 “뭇 생명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내가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겠다.”, “뭇 생명들을 내 생명처럼 모시고 섬기는 삶에 나의 전 존재를 바치겠다.”, “움직일 때에도 대자비의 본래부처로 움직이고, 앉을 때에도 대자비의 본래부처로 앉는 대무심행의 삶을 사는데 전심전력하겠다.”이다. 그 가운데에서 본래부처행인 보현 십대 행원을 간단히 간추려 함께 할 필요가 있겠다. 다만 보현행원을 보다 더 역동적으로 접근하도록 하기 위해 원래 사용해온 부처, 여래라는 인격적 개념을 여기에서는 인드라망 존재라는 개념으로 바꾸어서 재구성해본다.
첫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께 예경 올립니다.
둘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를 찬탄합니다.
셋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께 공양 올립니다.
넷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에 대한 무례의 업장을 참회합니다.
다섯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의 공덕을 함께 기뻐합니다.
여섯째, 모든 인드라망 법의 바퀴 굴리기를 간청합니다.
일곱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들이 온전히 머물기를 청합니다.
여덟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를 따라 배웁니다.
아홉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에 수순합니다.
열 번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에 회향합니다.
조금 더 첨언한다면 본래부처인데 괜히 다시 부처를 구하고 찾고 이루려는 헛고생하지 말고 지금 당장 본래부처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온 존재를 다 바쳐 보현행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본래부처로 사는 참 보살행이요 참 정진이다. 그야말로 행역선 좌역선(行亦禪坐亦禪)이다. 본래부처이니 지금 바로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할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해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본래부처답게 살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대승불교 수행론의 진면목이 이러함을 분명하게 직시할 일이다.
4) 하나의 길로 만나는 대승불교(본래부처)와 초기불교 수행론(팔정도)
대승불교 수행론의 기본은 본래부처와 동체대비행이다. 대승불교 수행자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과 길의 기본은 바로 본래부처와 보현행이다. 본래부처로 사는 것을 화엄에서는 보현행이라 했고 선가에서는 대무심행이라 했다.
부처님께서 가르쳐준 초기불교 수행론의 기본은 사성제 팔정도이다. 내용을 단순화시켜보면 직면한 일상의 삶을 법의 정신에 맞게 마음쓰고 말하고 행동하고 살면 그 자체가 해탈이요 열반의 삶이라는 가르침이다.
서두에 이야기 했던대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교학불교와 참선불교, 수행과 일상의 삶 등이 하나의 불교 수행으로 통일되는 길을 열어가는 차원에서 본래부처와 팔정도를 접목시켜 보려고 한다.
본래부처와 동체대비행에 대해서는 대승불교 수행론에서 이미 설명했으므로 여기에서는 팔정도에 대해서만 설명을 하겠다. 팔정도가 특별하고 여러 가지 어렵게 보이지만 내용을 사실적으로 간추려보면 오히려 매우 평범하고 현실적이다. 그러니까 팔정도라는 것이 다른게 아니고 바로 자신의 삼업활동을 법과 교법에 맞게 하라는 것이다. 즉 지금 당장 자신이 법에 맞게 마음을 쓰고 법에 맞게 말을 하고 법에 맞게 행동을 하고 사는 것이 팔정도요 초기불교의 기본수행이라는 의미이다. 같은 맥락에서 초기불교 시대에 사용해 온 법이라는 논리적 개념을 대승불교 시대에 사용해 온 본래부처라는 인격적 개념으로 바꾸어 본래부처와 팔정도 즉 본래부처와 삼업활동의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첫째가 정견(正見)이다. 지금 직면한 존재의 실상, 법의 실상인 본래부처를 사실대로 보고 이해하는 견해가 바로 정견이다. 정견이 그대로 부처의 견해이다. 대부분 정견을 거친 다음 더욱 향상 발전해서 부처의 견해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정견 자체가 부처의 견해이다. 그 밖에 부처의 견해가 따로 있지 않다. 만일 정견 말고 부처의 견해가 따로 있다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전도몽상의 견해일 뿐이다. 수행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지금 여기 현장의 일상적 삶에서 매 순간순간마다 직면한 존재의 실상인 본래부처를 사실대로 보고 이해하는 견해를 바르게 갈고 다듬고 적용시켜 실천하는 것이 정견 수행이요 깨달음의 수행인 것이다.
둘째는 정사유(正思惟)이다. 정견의 경우처럼 본래부처를 사실대로 거듭 사유 음미하는 것이 바로 정사유요, 그대로 부처의 사유이다.
셋째는 정어(正語)이다. 마찬가지로 본래부처답게 말하는 것, 즉 여어(如語) 실어(實語) 불이어(不異語) 불광어자(不誑語者)로 사는 것이 바로 정어요, 그대로 부처의 정어이다.
넷째는 정업(正業)이다. 본래부처답게 행동하는 것이 바로 정업이요, 그대로 부처의 행위이다.
다섯째는 정명(正命)이다. 본래부처답게 의식주 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정명이요, 그대로 부처의 생활이다.
여섯째는 정정진(正精進)이다. 본래부처답게 살려고 줄기차게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정정진이요, 그대로 부처의 정정진이다.
일곱째는 정념(正念)이다. 본래부처임을 항상 잊지 않고 분명하게 알아차림이 바로 정념이요, 그대로 부처의 정념이다.
여덟째는 정정(正定)이다. 본래부처에 대한 이해와 확신이 언제나 흔들림 없이 확고부동함이 바로 정정이요, 그대로 부처의 정정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본래부처의 삶인 팔정도를 더 단순화시키면 한 마디로 칠불통게(七佛通偈)의 내용이 전부라고 해도 괜찮다고 본다. “죽을 힘을 다해 나쁜 짓 하지 않고, 지극정성을 다해 좋은 일을 실천한다. 그리고 나쁜 일 하지 않고 좋은 일을 하는 그 마음을 오염되지 않고 청정하게 하는 것, 그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불교 수행론이 천 가지 만 가지 같지만 실상은 어떤 불교 수행론도 칠불통게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칠불통게 내용대로 일상의 삶을 가꾸어간다면 그 삶이 본래부처의 삶이다. 그 삶이 행주좌와에 온전히 젖어들어 무르익을 경우 그것을 완성된 깨달음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거듭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본래부처가 있어야 할 곳과 때는 언제, 어디일까? 바로 지금 여기 현장이다. 본래부처가 행동하고 살아야 할 곳과 대상은 누구일까? 바로 두 발을 딛고 있는 그 자리요, 만나고 있는 그 사람이다. 따라서 현장이 도량이요, 만나는 사람사람이 본래부처이므로 매 순간, 매 상황마다 만나는 그 사람을 본래부처로 잘 모시고 섬기는 것이 참된 수행이요 본래부처다운 행동이다. 팔정도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하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교학불교와 참선불교, 수행과 일상의 삶이 저절로 하나의 길로 통일된다.
서로 분리시키고 서로 다르다고 우열을 다투어야 할 까닭이 어디에도 있지 않다. 중생의 병을 치유하는데 적절한 처방이라면 그 이름이 초기불교면 어떻고 대승불교면 어떤가. 불교면 어떻고 기독교면 어떤가? 참선불교라고 특별대접하고 교학불교라고 푸대접하는 것이 과연 불교적이겠는가. 수행 따로, 일상의 삶 따로라면 그것이 선방에 있든 법당에 있든, 산중에 있든 도심에 있든 참된 불교 수행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직하게 물어보고 겸손하게 돌아볼 일이다.
3. 맺음글
생명 평화 운동 진영에서 사용하는 언어, 대승불교 수행론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서로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보면 ‘우주의 존재 법칙인 보편적 진리 즉 사랑의 법칙에 따라 살면 고통으로부터 해탈한다. 또는 행복한 삶이 이루어진다. 사랑의 법칙에 따라 가정과 사회를 가꾸고 운영하면 화목한 가정, 평화로운 세상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므로 굳이 결론짓는다면 대승불교 수행론을 현대화, 대중화, 일상화 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생명 평화 운동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한국 불교가 자신의 존재 의미를 빛나게 하고자 한다면 하루 빨리 적극적으로 나서서 신대승불교운동으로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생명 평화 운동을 펼쳐야 마땅하다고 본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