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자의 한국학 산책] 왜 오늘날 한국학인가
기자명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입력 2023.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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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 인류는 문명의 대순환주기와 자연의 대순환주기가 맞물리는 시점에 와 있다. 세계는 지금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기후행동 1.5℃ 실천 운동에 나서고 있으며 생존 모드로의 대전환이 촉구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생명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MIT 연구팀이 로마클럽에 제출한 연구보고서 『성장의 한계』가 50여 년이 지난 현재 과학계의 연구 결과와도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영국의 수학자 어빙 존 굿이 예단했듯이 인공지능 기계가 일단 튜링 테스트(Turing test: 인간과의 대화를 통해 기계의 지능을 판별함)를 통과하면 기계가 더 똑똑한 기계를 설계하게 되고 최초의 초지능 기계는 인간이 만든 마지막 발명품이 될 것이기 때문에 미래의 지능폭발에 대비하는 순전히 기술적인 전략이란 없다. 지구는 지금 누가 누구를 지배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공존이냐 공멸이냐’ 택일의 기로에 섰다. 인공지능 기술에 대한 사회적 제어력을 높이는 것은 결국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가능하다.
인간의 마음이 밝아지지 않으면 세상이 밝아질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수천 년 동안 국가 통치 엘리트 집단의 통치 코드로 삼았던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다. 한국학 고유의 생명 코드는 우주 자체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본다는 점에서 양자역학으로 대표되는 포스트 물질주의 과학의 코드와 본질적으로 상통한다. 따라서 한국학 코드는 낡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 사조(思潮)의 대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에 재음미되고 재해석되어야 하는 ‘가장 오래된 새것’이다. 우리 고유의 코드는 만물이 만물일 수 있게 하는 제1원인인 ‘생명’에 대한 개념적 명료화를 통해 종교와 과학과 인문, 즉 신과 세계와 영혼(천지인 삼재)의 통합성을 자각하게 함으로써 그것이 곧 인류의 ‘보편 코드’이며 오늘날 ‘통합학문’의 시대를 여는 단초가 되는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오늘날 한국학 코드의 부상은 한국의 국제위상 강화와 한류 현상, 그리고 현대과학이 주도하는 포스트휴먼학에 의한 생명의 재발견에 따른 것이다. 동아시아 문명의 새벽을 열었던 한국학 코드의 현재적 의미와 가치는 한마디로 생명의 네트워크적 본질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생명 위기에 대응하고 인공지능 윤리와 생명 가치가 준수되는 새로운 규준의 휴머니즘을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계몽의 시대를 여는 ‘마스터 알고리즘’이라는 데 있다. 우리가 새로운 규준의 휴머니즘에 주목하는 것은, 한국학 코드가 인류 사회와 기술혁신의 새로운 규범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미래적 비전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벨기에의 과학자이자 사상가이며 ‘카오스이론’의 창시자인 일리야 프리고진은 개체가 무질서해도 집단으로는 규칙과 질서를 가지고 있으며 바로 그것을 찾고자 하는 것이 카오스이론이라며, 이는 위기의 시대에 새로운 질서의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자연의 물리현상에서 카오스(혼돈)와 불안정성이 진화를 가져오는 필요조건이라고 보고, 카오스이론이 갖는 문명사적 의의는 바로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했다. 혼돈 속에는 창조성의 원리가 내재해 있다. 동이 트기 전 어둠이 가장 짙은 것과 같은 이치다. 한반도에 지선(至善)과 극악(極惡)이 공존하는 것은 지금이 소멸기이고 새로운 문명의 꼭지가 여기서 열리기 때문이다.
한국학 고유의 생명 코드는 서양의 이원론이 초래한 생명의 뿌리와 단절된 꽃꽂이 삶, 그 미망의 삶을 끝장낼 수 있는 마스터 알고리즘이다. 상고시대 우리나라가 세계의 정치적·종교적 중심지로서, 사해의 공도(公都)로서, 세계 문화의 산실(産室) 역할을 하게 했던 이 생명 코드로 동아시아 최대의 정신문화 수출국이었던 코리아의 위상을 되살리고 세계시민사회가 공유하는 새로운 규준의 휴머니즘에 입각한 새로운 계몽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정사(正史)인 『신지비사』에서 ‘영혼을 잃고 땅에 뿌리박혀 울던 자가 영혼을 찾으면 그것이 개벽의 시작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는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다시개벽’이다.
새로운 문명이 열리기 위해서는 배타적 민족주의나 국가주의가 아니라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 DNA를 가진 민족의 역할이 요구된다. 우주만물이 생성·변화하는 원리를 함축하고 있는 태극기는 ‘생명의 기(旗)’이고, 우리는 태생적으로 ‘생명’을 문화적 유전자로 이어받은 민족으로서 21세기 생명시대를 개창해야 할 내밀한 사명이 있음을 인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녕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운명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mzchoi3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