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04

오강남 - 무아無我를 중심으로 > 월간고경

무아無我를 중심으로 > 월간고경 | 백련불교문화재단

[심층종교와 불교의 미래]

무아無我를 중심으로
 
오강남 / 2023 년 2 월 

지난 호에서 모든 종교에는 표층이 있고 심층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표층 종교와 심층 종교의 차이점 몇 가지를 예거했습니다. 차이점의 첫째는 표층 종교는 탐진치로 찌든 지금의 이기적인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종교인 반면 심층적 종교는 지금의 내가 본래적인 내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려는 종교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불교와의 관계에서 이 문제를 좀 자세하게 논의해 보고자 합니다.

무아사상의 보편성

지금의 이기적인 자기를 최고의 가치로 떠받들면 희망이 없다고 하는 가르침은 사실 거의 모든 종교의 심층에 깔려 있는 기본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비우는 것, 자기를 없애는 것, 자기에게서 해방되는 것, 자기를 잊는 것, 자기를 부정하는 것 등으로 표현되는 “자아로부터의 해방”이 종교적 삶의 기본 태도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경우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향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은 이기적인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뜻입니다. 중세의 많은 그리스도인 사상가들은 종교적 목표가 ‘신화(deification)’ 곧 ‘신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이 된다고 해서 교만이나 신성 모독의 극치라고 여기기 쉬우나 여기서 신이 된다고 하는 것은 내가 없어진다는 것, 나의 모든 것은 모두 신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진 1. 노자老子.

도가道家의 노자老子도 『도덕경』 제7장에, “하늘과 땅은 영원한데 하늘과 땅이 영원한 까닭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인도 마찬가지. 자기를 앞세우지 않기에 앞서게 되고, 자기를 버리기에 자기를 보존합니다.”고 했습니다. 같은 도가 사상가 장자莊子도 ‘오상아吾喪我’라고 하여 ‘나를 여읨’ 곧 지금의 나와 사별하는 것을 수행의 이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유교의 경우에도 공자孔子님은 나이 70이 되었을 때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라고 하여 “마음이 가는 대로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나’라고 하는 것이 없어진 상태에서나 가능한 경지입니다.

신유학에서는 만유일체萬有一體, 혼연동체渾然同體를 주장하는데, 개체로서의 나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만물과 하나된 나를 상정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유교에서 전반적으로 말하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세를 취하라고 하는 것도 결국 지금의 나에게서 해방되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진 2. 공자孔子.

그러나 지금의 ‘자기’란 정말로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 꾸며놓은 허구요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가장 힘있게, 체계적으로 설파하는 종교는 불교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성불하시고 녹야원으로 가셔서 다섯 수도승에게 처음으로 가르치신 것이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와 무아無我의 가르침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anātman)

그러면 부처님은 왜 처음의 가르침으로 이런 무아의 가르침을 가르친 것일까요? 부처님 당시 힌두교에서는 영원히 변치 않는 실체로서의 나我(atman)를 최고의 실재인 브라흐만(梵, Brahman)과 동일시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를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표층 종교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의 나, 이 썩어질 나, 현실적인 나, 이기적인 나(self, ego)를 가장 중시하고 이를 떠받드는 우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나’, ‘아트만’을 불변의 영원한 실체로 여기는 오해로 인해 여러 가지 부정적인 부작용이 발생한다고 보고, 이런 자아라는 망상을 타파하기 위해 ‘무아無我’, 내지 ‘비아非我’를 가르친 것입니다. 이런 무아의 가르침에는 두 가지 이론적 근거가 있습니다.


사진 3. 초전법륜상. 법륜에 손을 얹어 첫 설법을 하는 부처님(간다라, 2세기, 미국 트로박물관). 사진: 유근자.

첫째는 윤리적 근거입니다. 이런 피상적인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종교, 일상적인 나를 영구불변의 실재로 보고 떠받드는 종교는 집착, 욕심, 증오, 교만, 이기주의 등 윤리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 보았습니다. ‘나’라는 생각, 나를 떠받들려고 애쓰는 것이 결국 괴로움으로 이끄는 근본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일상의 사소한 분쟁에서부터 국가 간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작용은 바로 나에 대한 오해와 집착,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기주의적 사고라고 본 것입니다. 부처님은 다섯 수도승에게 “[지금의 나에 대해] 염증을 느껴야 거기서 물러설 수 있고, 물러서야 참으로 자유스러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무아의 가르침은 윤리적 ‘요청(postulate)’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논리적 근거입니다. 논리적 근거의 첫째는 오온五蘊입니다. 오온이란 ‘나’라고 하는 것은 영원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다섯 가지 요인의 일시적인 가합假合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마차가 실제로는 하나의 독립적 실체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결국 판자, 바퀴살, 심보, 밧줄 등으로 이루어진 결합체에 붙여진 하나의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그 자체로 독립적 실체일 수 없다는 논리적 근거 둘째는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연기緣起’ 사상입니다. 연기란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다.”는 기본 원칙으로서, 세상의 모든 사물은 예외 없이 다른 무엇에 의해 생겨난다는 가르침입니다. 모두가 상호의존, 상호연관의 관계에서 생겨나고 존재할 뿐 독자적으로 일어나거나 존재하는 실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독립적 실체로서의 ‘나’는 성립할 여지가 없어집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자아란 이처럼 실체가 없기에 거기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 우리는 그만큼 자유스러워지고, 세상도 그만큼 더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연기 사상은 자아가 궁극적으로 허상이라는 것을 형이상학적 이론으로 뒷받침해준 셈입니다.

불교에서는 개인의 자아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물도 그 자체로는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고 하는 것까지 이야기합니다. 무아를 영어로 ‘noꠓself(자아 없음)’이라고만 번역하지 않고 ‘no-substance(실체 없음)’이라고 번역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물이 그 자체로 궁극적 실체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하는데, 
  • 이것은 모든 것이 덧없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 
  • 모두가 괴로움이라는 일체개고一切皆苦와 함께 
  • 전통적으로 불교의 핵심 사상이라고 하는 삼특상三特相, 곧 모든 사물이 생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 가지 공통적 모습’이라 봅니다.

무아사상의 난점

무아의 가르침을 논리적 귀결이라 볼 수 있지만, 엄격히 따져 보면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업(karma)’의 원리대로라면 내가 지금 한 행동에 대해서 나중 내가 책임을 진다는 이야기인데,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나’가 없다면 내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은 누구일까? 그뿐 아니라 ‘나’가 없다면 내가 행동한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누구일까? 하는 문제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문제는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나’를 상정해도 쉽게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무아 같은 가르침이 이론적으로 일관성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화급한 문제가 아닙니다. 부처님이 했다는 독화살을 맞은 젊은이의 비유에서 이런 생각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어느 청년이 독화살을 맞았는데, 사람들이 달려와 독화살을 빼려고 하자, 그 청년은 독화살을 빼기 전에 독화살과 그것을 쏜 사람 등에 대한 정보를 먼저 알아야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아라는 허상에 사로잡혀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그런 허상을 깨는 것이 급선무이지, 그것이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있는가 없는가 따져 묻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부처님은 사변이나 이론을 위한 이론을 경계했습니다. 어느 제자가 세상이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하는 등의 14가지 질문을 했을 때 침묵했습니다. 이른바 무기無記입니다.

나가면서

어찌 보면 이렇게 자기를 부정하는 것, 자기를 잊는 것, 자기와 사별하는 것이 ‘희생의 길’, ‘고난의 길’ 심지어 ‘바보의 길’이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길에서 이런 심층에 이른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묶고 있는 목줄에서 벗어나는 자유와 해방의 길이요 창조와 발견, 자각과 성장, 평화와 기쁨의 길, 더할 수 없이 아름답고 보람된 길이라 증언합니다. 이제 우리도 불교를 나의 이기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비는 수단으로만 여기는 대신, 이렇게 나를 비움으로 얻을 수 있는 청복을 약속하는 심층 종교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