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09

[등현스님의 초기불교에서 禪까지] 연재를 시작하며 - 불교신문

[등현스님의 초기불교에서 禪까지] 연재를 시작하며 - 불교신문

[등현스님의 초기불교에서 禪까지] <1>연재를 시작하며
등현스님 고운사 화엄승가대학원장
승인 2019.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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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통해 받아들인 불교, 과연 참인가

“격의불교·교상판석으로 인해
중국 대승 초기불교와 멀어져
원전 토대로 사상 역사 재정립”

한국불교는 지금까지 중국의 문화와 사상, 언어의 영향 속에서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21세기를 맞아 그동안 중국을 통하여 받아들인 불교가 과연 참인지 아닌지 한번쯤은 검토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첫째, 번역문의 한계성과 모호함 때문이다. 즉, 한문은 고착어이고 인도어와 한글은 굴절어이기 때문에 직접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의미가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둘째, 중국의 격의불교에서 시작된 법의 변질성이다. 이 문제는 이미 많은 일본 학자들에 의해서 지적된 바가 있다. 셋째, 지의와 현수대사의 교상판석 때문에 인도불교는 중국불교의 하위에 위치하게 되었고, 더불어 불교의 전통성을 중국에 두려고 하는 중국학자들의 의도 때문에 오늘에 와서는 중국의 대승불교가 초기불교의 본질과는 너무나 멀어지게 된 점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고,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등의 원전을 직접 접하여 볼 수 있는 시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원어인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그리고 티베트어를 통하여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는 불교를 다시 사상적으로, 역사적으로 재정립해 보려 한다.

불교란 팔리어로는 붓다 사사나(Buddha sasana) 또는 붓다 담마(Buddha dhamma)이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내용 그것이 불교인데, ‘부처님은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부처님이 가르치시려고 했던 불교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일단 역사적으로 관찰해 보자. 부처님께서 성도하신지 채 3개월도 되지 않아서 콘단냐 등 5비구와 야사와 그의 친구들, 3가섭과 그들의 제자들, 모두 1100여명의 제자들을 제도하셨다. 제자들이 법을 증득한 후에 그들을 향하여 “가라 비구여 둘도 말고 혼자서, 많은 생명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생명들의 행복을 위하여”라고 전법선언을 하셨던 것이다. 그들이 법을 깨달은 것은 불과 3개월 사이였다. 그동안에 그들이 듣고 깨달은 법, 전하라는 법,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법이라 할 수 있다. 3가지 초기경전을 순서대로 듣고 이들이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기록되어지고 있다.

그 중 첫 번째 <초전법륜경>에서는 쾌락은 무상하고, 고행은 무익하므로 정견 등의 팔정도를 기본으로 한 고락 중도를 강조하였고, 두 번째 <무아상경>에서는 고통 받는 자의 주체 없음을 오온무아(인무아)를 통해서 설파하셨고, 세 번째 <불타오름의 경>에서는 삼계화택의 비유를 통해서 마음이 인식 대상 그 어느 곳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는 법무아를 가르치셨다. 그 다섯 비구들은 이 세 가지 초기 경전의 가르침을 듣고 수행하여 모두 아라한과를 얻은 것인데, 정견 등을 비롯한 팔정도의 수행으로 아(我)와 법(法)에 집착하지 않게 되어 해탈을 성취하는 것이 이 가르침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초기경전들의 가르침이 대승불교의 핵심인 <금강경>에서도 그대로 보여 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모든 중생을 구제하되 한 중생도 구제한 바가 없다는 인무아(人無我)와 대승 수다원과 아라한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대상과 그 어떤 법에도 집착함이 없다는 법무아(法無我)의 수행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르침들은 <구사론>과 <유식론>에서 다시 인무아는 견도(見道), 법무아는 수도(修道), 해탈은 무학도(無學道)라는 이름의 언어로 재 강조되어졌다. 이들은 다시 중관학파에서 아공(我空), 법공(法空)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다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불교신문3455호/2018년1월12일자]
[등현스님의 초기불교에서 禪까지] <2>연재를 시작하며 ②
등현스님 고운사 화엄승가대학원장
승인 2019.01.17 


모든 법에 자성 있을까 없을까


모든 바닷물 하나의 짠 맛이듯
부처님 가르침 해탈 자비 귀결
학파 간 언어 철학 차 고려해야

선종에서 신수대사와 혜능대사의 오도송에서 보이듯 오온무아는 돈오(頓悟)해야 할 대상으로, 법무아는 점수(漸修) 또는 돈수(頓修)해야 할 대상으로 표현됐다. 이것은 욕망의 여읨에서 발생한 정생희락(定生喜樂)과 주관과 객관 그 어느 곳에도 마음이 집착할 바가 없다는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공통적 가르침을 담고 있다. 화엄의 <십지경>에서는 6지에서 인무아와 법무아를 통달하고, 10지에서 부처님의 유훈인 전법을 완성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혹자는 아라한이 되면 모든 일을 마친 것인데 굳이 전법이라는 실천이 아라한의 필수 조건이냐고 질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비희사를 실천할 때 비로소 참된 아라한, 또는 대승 아라한이라 할 수 있다. <금강경>과 <십지경>에서도 이같은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초기불교와 중관, 유식, 화엄, 선종 등이 모두 같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는 것을 불자들은 유념해야 한다. <마지마 니까야>에서 보이듯이 모든 바다의 맛은 짠맛으로 귀결되고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해탈과 자비로 귀결된다.

물론 우리는 여러 불교학파가 각 시대에서 각기 다른 언어라는 그릇과 과학, 철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조금씩 다르게 표현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한 그 다르다는 부분도 인도의 철학사적 발달이란 측면에서 고찰돼야만 할 것이다.

‘다른 언어’의 일례로 대ㆍ소승에서 가장 오해돼 쓰이는 ‘자성(自性)’이라는 용어가 있다. 설일체유부는 모든 법에 자성이 있다 했고, 용수보살을 위시한 중관학파에서는 모든 법에 자성이 없다고 천명하면서 설일체유부를 법에 집착하는 소승이라고 폄하했다. 그렇다면 구사론의 ‘법자성설’과 중관학파의 ‘법무자성설’은 서로 상충되는 전혀 다른 개념인가? 지금까지 많은 불교학자들은 그 둘이 전혀 다르다고 믿어왔지만, 필자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일단 이 부분은 상좌부와 설일체유부의 법에 대한 분류방법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설일체유부의(유위) 법에 대한 설명에 의하면 물질이 가지고 있는 스스로의 성질이 서로 다르고 선과 악, 무기의 심소(心所) 역시 성질이 각각 다르다. 예를 들어 불의 성질과 물의 성질은 다른데 불은 태우는 성질, 물은 젖게 하는 성질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화내는 마음과 자비로운 마음의 성질 역시 분명히 다르다. 부파불교와 아비담마에서 모든 법에 자성이 있다는 것은 이와 같이 물과 불, 화와 자비처럼 각각 성질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승, 반야부에서 말하는 법무아와 법공(svabhava sunya)은 이러한 상식에 해당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인가? 그것은 그렇지 않다. 중관학파에서 다루는 법은 무집착의 법, 즉 무위법을 다룬다. 그 무위법은 열반의 다른 이름이며 아비담마에서의 무위의 진제 또는 해탈이라 이름한다.

법무아라는 것은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대상에 대한 무집착을 말하는 것이고, 존재론적인 측면에서는 탐진의 소멸로 인해 물심(物心) 양면이 적멸에 든 상태이므로 법공 즉 법무아는 대상에 대한 탐진치의 소멸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사에서 말하는 법의 자성(sabhava)은 현상계(유위법)의 자성이고, 중관에서 말하는 무자성은 절대계(무위법), 열반계에서 법의 무자성이다. 서로 다른 차원을 말하기 때문에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

이처럼 자성이란 단어 하나도 서로 다른 학파에서 다른 차원에서 사용했고, 그로 인해 서로가 돌이킬 수 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됐다. 이런 오해를 원전을 통해 재해석함으로써 불교역사 속에서 발달한 모든 사상들이 바다처럼 하나의 맛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또한 한국불교는 그동안 선종이 주축을 이루어 왔었다. 근래에는 위파사나 등이 보급돼 자칫 서로 다른 전통의 수행법이 얽혀 오해와 상충이 일어날 수도 있을 듯하다. 이쯤해서 각각의 수행법이 어떠한 교학과 연결돼 있으며, 각 수행법과의 관계가 어떤지 정리해 보고자 한다.

[불교신문3457호/2019년1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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