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04

希修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 #19. 無常, 苦, 無我는 절대적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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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220602

 
<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 #19. 無常, 苦, 無我는 절대적 진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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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발견한 것을 숲 전체의 나뭇잎에 비유할 때 손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나뭇잎 몇 장 만큼의 분량만 일단 가르치겠다고 부처님은 애초부터 말씀하셨다. 그것이 바로 '고와 고의 소멸' ('인과'라 부르든 '업과 윤회'라 부르든 '4성제'라 부르든 '12연기'라 부르든 마찬가지)이고, 사람들을 해탈로 이끌기 위한 이 프로그램 안에서 보조적으로 쓰인 도구가 무상, 고, 무아라는 perceptions (想, 인식)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이것들을 언급하시는 맥락은 언제나 오온 또는 선정의 행복에 대한 집착을 경계하실 때였다 (AN 9:36, AN 10:60, AN 11:17, MN 14, MN 35, SN 22:59, SN 22:97, SN 22:122). 윤회계 안에서는 감각적 즐거움과 수행의 행복 포함 모든 물질적 정신적 현상이 계속 변해 가고 (inconstant) 그래서 의지할 만하지 않으며 결국 수고스러움으로 귀결되니 (stress, suffering), 그 무엇에 대해서도 '나'라는 정체성을 발달시키지 말라는 (not-self) 얘기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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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희노애락이 집착할 가치가 없는 일시적인 것이며 삶 자체가 수고'라는 인식 (a)도 가능하고 '삶은 기적이고 모든 변화도 그 자체로 아름다우니 매순간 지금 여기에서의 소확행을 최대로 누려야 한다'라는 Carpe Diem 식의 인식 (b)도 가능하다. 관점의 차이일 뿐 이 둘 중 하나는 거짓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이고 그런 게 아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입장에서 (b)는 '어리석은' 관점이고, 그렇기에 완전한 자유=행복인 해탈에 이르게 하려는 의도에서 부처님은 반복적으로 (b) 아닌 (a)의 인식! 방법!으로 유도하셨으며, 그러기 위해 개발된 도구가 無常 (inconstancy), 苦, 無我 (not-self, '나 없다'가 아님)일 뿐이다. (상품화된 마음챙김은 부처님의 의도와 정반대로 (b)의 경향이 강하므로 주의 필요.) '허상'이니 버리고 '실체'를 추구하라는 뜻이 아니라, 알고 보면 비용이 훨씬 더 큰 단기적 행복에 애착/집착하지 말고 해탈하여 영원한 행복을 얻으라는 취지에서 부처님이 사용하신 "value judgment (가치 판단)" 또는 "strategy (전략)"이라고 타니사로 스님이 설명하시는 것도 이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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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無常, 苦, 無我의 perceptions 없이는 선정의 행복에 집착해 머물기가 쉬운데 (AN 9:36, AN 11:17), 그러므로 모든 종류의 想, 사유, 분석 등을 무조건 내려놓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오히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상을 짓고 매사를 분석, 사유해야만 해탈할 수 있는 것이다. AN 10:60에서도 부처님은 苦의 최소화에 도움되는 10개의 perceptions ("the perception of inconstancy, the perception of not-self, the perception of unattractiveness, the perception of drawbacks, the perception of abandoning, the perception of dispassion, the perception of cessation, the perception of distaste for every world, the perception of the undesirability of all fabrications, mindfulness of in-&-out breathing")를 언급하셨는데, 여기서도 無常과 無我는 나머지 8개와 같은 위치일 뿐 이것들이 우주의 진리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런데 후대로 오면서 많은 분들이 무상, 고, 무아를 절대화하고 선정 (지혜 개발의 조건!에 불과한)이 그 자체로 지혜 혹은 해탈인 양 오해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 자체로 사실인 4성제와 12연기까지 하나의 관점이자 부분적 도구에 불과한 이 perceptions의 프레임 안에서 이해하려는 도착(倒錯)이 일어났으며, 역시 그 자체로 사실인 윤회를 오히려 단순 방편으로 인식하거나 "고통/번뇌도 공하므로 벗어나려고 너무 노력할 것도 없다"는 등의 오류들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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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를 없애려 할 것도 없고 그저 알아차리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이건 "선업을 증장시키고 불선업을 제거하는 것이 Right Effort"라는 SN 45:8의 정의에 대한 무시일 뿐 아니라, 개개의 번뇌 현상!은 조건이 다 하면 '저절로' 사라지는 '것 같이' 보여도 번뇌를 반복적으로 일으키는 원인!인 탐진치의 제거와 해탈은 저절로 성취되는 게 결코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몰이해이기도 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거짓도 전혀 없지만 그렇다고 사실/진리에 대한 기술만으로 이루어진 무더기인 건 아니고 무상 고 무아 같은 관점도 포함되어 있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은 해탈의 성취라는 기능!을 수행하는 프로그램!인지라 마치 비행기 조종사처럼 이해도 실천도 정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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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 #12. 부처님은 언어/논리를 중시 않으셨다'
'번역의 문제 1. Anattā (아나따): '無我' 아닌 '非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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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updated her cover photo.

< 번역의 문제 1. Anattā (아나따): '無我' 아닌 '非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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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N 2 (사진)는 "'나' 있다"도 "'나' 없다"도 둘 다 잘못된 견해라고 못 박으며, '나'라는 게 있느냐 없느냐 묻는 질문에도 부처님은 대답을 거부하면서 오직 12연기로만 매사를 파악하라고 하셨다 (SN 12:12, SN 12:15, SN 12:48).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없다'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완전히 착각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정말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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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계 안에서는 감각적 즐거움을 포함하여 모든 물질적 정신적 현상이 계속 변해 가고 그래서 의지할 만하지 않으며 결국 수고/고통으로 귀결되니 그 무엇에도 '나'라는 정체성을 발달시키거나 집착하지 말라고 (“‘나’라는 건 어차피 한 줌의 흙에 불과”도 여전히 정체성), 주체/객체 중심의 사고 대신 동사 중심의 사고를 하면서 매사를 take impersonally 하라는 게 아나따 가르침이다. 선정의 행복을 알아야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을 놓을 수 있으나 결국은 선정에조차 집착하면 안 된다는 의미 (SN 22:97, AN 9:36, MN 14)에서 언급하신 게 바로 aniccā (inconstancy, 無常), dukkha (stress, 苦), anattā (not-self, 非我)이건만, 한자로는 非我로 번역하는 게 최선이었을 anattā를 無我로 옮기면서, 온갖 오해가 일어났다. 초기경전을 전혀 읽지 않으니 無我를 아무 검증 없이 받아들이고, 그렇기에 anattā를 '나 없다'로 착각하며, 그러고 나니 '이승의 나도 없는데 전생의 나 혹은 내세의 나는 무슨 멍멍 소리인가?' 헷갈리게 되면서, 그래서 "윤회는 방편설" 운운하며 윤회를 완전히 부정하게 된 것. 탐(貪) 진(嗔) 치(癡) 중 가장 해로운 것은 치라고 AN 3:68은 명시하고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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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하고 이타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이 anattā의 취지라고 대개 오해하지만, 자신을 남 위에 놓든 남 아래에 놓든 자신과 남이 동등하다 생각하든 똑같이 conceit=자만이라고 초기불교는 가르친다 (Sn 4:5, 4:9, 4:14). 또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법이라고, 그건 너무나 당연한 거라고 정작 부처님은 말씀하셨으며 (SN 3:8, Ud 5:1), 실은 수행조차 고의 원인인 탐진치를 분별, 제거함으로써 고를 끝장내고 완전한 행복, 영원한 자유인 해탈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을 보호/사랑하는 마음이나 분별 없이는 수행의 시작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얘기. 그런데 이 논리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모두 부정만 하는 것이 無我이며, '참 나 (眞我)' 운운은 브라만교의 아트만 사상일 뿐이다. 또 어떤 분은 "'나 없다'는 '나'라는 것에 실체가 없이 환상이라는 얘기"라고도 하시는데, '나'가 실체가 아닌 환상이라면 서로를 해치는 일이 죄가 될 이유가 없으며, 우리가 느끼는 윤회의 고통도 환상일 것이므로 해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고통을 끝내는 해탈을 가르치신 건, '나 없다'와 '모든 게 공하다'만 외운다고 해서 윤회의 고통이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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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the owner of my actions, heir to my actions, born of my actions, related through my actions, and have my actions as my arbitrator. Whatever I do, for good or for evil, to that will I fall heir." -- AN 5:57
"If one holds oneself dear, one should diligently watch oneself." -- Dhp 157
“One truly is the protector of oneself; who else could the protector be? With oneself fully controlled, one gains a mastery that is hard to gain.” -- Dhp 160
"By oneself is evil done; by oneself is one defiled. By oneself is evil left undone; by oneself is one made pure. Purity and impurity depend on oneself; no one can purify another." -- Dhp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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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문제 4. 자비희사' (2022.5.13)
'번역의 문제 3. Saṅkhāra (상카라)' (2022.5.11)
'번역의 문제 2. Papañca (빠빤쨔): '대상화'' (202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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