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라는 공동의 운명 - 서양 지구인문학의 흐름 -
기자명 조성환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입력 2021.11.26
공공학/ 공공철학
우리가 지구상에서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을 잘 관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구 안에서 생명을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땅을 잘 관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구 안에서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생명을 잘 관찰했기 때문이다.
- 에드가 모랭, 『지구는 우리의 조국』 -
위험의 지구화
1990년을 전후로 서양 학계에서는 종래와는 다른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다. 제목이나 본문에 ‘지구(Earth)’라는 말이 들어간 학술서가 우후죽순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면, 토마스 베리의 『지구의 꿈』(1988)이나 제임스 콜론의 『우리 시대를 위한 지구이야기』(1990), 에드가 모랭의 『지구는 우리의 조국』(1993)이나 데이비드 오어의 『작은 지구를 위한 마음』(1994) 등이 그것이다. 이 현상이 시사하는 바는 서양 인문학자들의 관심이 ‘국가’에서 ‘지구’로 이동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편의상 ‘지구학’ 또는 ‘지구인문학’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1990년 전후에 ‘지구인문학’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보면, 당시의 ‘세계화’(globalization) 열풍과 무관하지 않다. 세계화로 인해 세계가 하나 됐지만, 그만큼 위험도 공유하게 됐기 때문이다. 가령 미세먼지나 지구온난화는 국경을 넘어 온 나라와 전 지역에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이것을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의 지구화’라고 했다.
생태적인 위기의식은 공포와 히스테리로 분출되면서 (…) 하나의 〈공동운명〉이라는 의식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이러한 공동운명은 인간, 동물, 식물 사이의 한계마저도 지양하는 세계시민적인(코스모폴리탄) 일상 의식을 각성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위험이 사회를 구축하고 (…) 전 〈지구적 위험〉이 〈지구사회〉를 구축하는 셈이다.
- 조만영 옮김, 『지구화의 길』, 거름, 2000, 81쪽
(강조는 인용자의 것. 이하도 마찬가지) -
여기에서 울리히 벡은 생태위기와 같은 ‘지구적 위험’이 역설적으로 인류로 하여금 하나의 ‘공동운명체’라는 의식을 갖게 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나아가서 그것은 지역사회나 국가사회를 넘어선 ‘지구사회’를 구축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지구사회나 지구공동체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기후변화나 팬데믹 상황을 생각하면 낯선 얘기도 아니다. 지구인문학은 이러한 위기와 불안에서 탄생한 학문이다.
한나 아렌트의 지구소외
20세기의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1950년대에 이미 이런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다. 1957년에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을 발사하자, 이듬해에 “인간들이 지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경고한 것이다. 그것을 개념화한 것이 ‘지구소외(Earth alienation)’이다.
인간의 조건 때문에 여전히 지구에 구속돼 있는 우리는 마치 외부, 즉 아르키메데스적 점으로부터 지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양, 지상에서 (…) 행동하는 방식을 발견했다. (…) 근대 자연과학 발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지구소외(earth alienation)〉는 (…) 근대 과학의 기호가 됐다. (…) 근대수학은 인간을 지구에 묶인 경험의 한계로부터 해방시켰으며 인식능력을 유한성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다.
- 이진우 옮김, 『인간의 조건』, 한길사, 2020, 373~376쪽 -
여기에서 아렌트는 ‘근대성’의 본질을 ‘지구학’의 관점에서 포착해 내고 있다. 즉 근대라는 시기는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을 지구라는 속박에서 해방시켜 줬지만, 거꾸로 자신이 딛고 있는 삶의 조건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동아시아의 철학 용어로 표현하면, ‘천인분리天人分離’에 의한 ‘천인불화天人不和’의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가 인류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지구와의 조화를 지향하던 천인공화天人共和의 삶과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D.H. 로렌스의 우주상실
아렌트 이전에도 비슷한 통찰을 한 사상가가 있다. 우리에게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저자로 유명한 소설가 D.H 로렌스(1885~1930)이다. 로렌스는 1931년에 간행된 『계시록(Apocalpse)』에서 “현대인들은 우주를 상실했다”고 진단했다.
아마도 우리와 이교도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우주(cosmos)에 대해 서로 다른 관계를 맺는 점에 있는 듯하다. 우리에게는 모든 점이 다 개인적이다. 경관과 하늘, 이들은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 달콤한 배경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그 이상은 아니다. 과학자가 바라보는 우주는 우리의 개인성을 연장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교도들에게 우주는 경관이나 개인적인 배경이 아니었다. 〈우주는 살아 있었다.〉 인간은 우주와 함께 ‘살았으며’ 우주를 자신보다 위대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 김명복 옮김, 『로렌스의 묵시록』, 나남출판, 1998, 51~52쪽 -
로렌스에 의하면 현대인들에게 우주는 더 이상 경이로운 세계도 신비한 세계도 아니다. 전통 시대 사람들처럼 우주와 교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우주는 단지 자신을 둘러싼 배경이자 탐구의 대상일 뿐이다. 현대인들이 고독을 느끼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들은 우주와의 관계를 끊고 개인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외롭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안다. 그들은 우주(cosmos)를 잃어버렸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인간적이고 사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결여된 것은 〈우주적 삶(cosmic life)〉이다.
- 『로렌스의 묵시록』, 59쪽 -
(고대인들에게) 태양은 멋들어진 생명체였으며, 사람들은 그 생명체로부터 힘과 영광을 끌어내어, 그것에 경의와 영광과 감사를 보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와서 그 관계를 깨어지고 (…) 태양은 이제 훨씬 더 보잘것없는 것으로 돼 버렸다. (…) 우주와의 교감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자 우리는 우주를 잃었다.
- 『로렌스의 묵시록』, 53~54쪽 -
여기에서 로렌스는 현대인의 문제를 ‘우주상실’로 진단하고 있다. 마치 아렌트가 인간과 지구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우려했듯이, 인간과 우주의 관계가 끊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인의 고독과 불안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치 17세기의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이 『팡세』에서 “신과 함께하지 않는 불행”을 말했듯이, 로렌스는 현대인들의 “우주와 함께 하지 않는 불행”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의 일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로렌스는 우주와의 관계를 회복할 것을 제안한다. 아렌트식으로 말하면 ‘인간의 조건’을 되찾는 것이고, 동양철학적으로 말하면 ‘천인합일’의 삶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우리와 우주는 하나다. 우주는 거대한 생명체이고 우리는 그것의 일부이다. 태양은 커다란 심장이고, 그 진동들은 우리의 핏줄을 관통한다. 달은 환하게 빛나는 커다란 신경중추이고, 우리의 떨림은 거기에서 온다.
- 『로렌스의 묵시록』, 57쪽 -
내가 지구의 일부임을 나의 발은 안다. (…) 나의 개인주의는 실로 환상이다. 나는 거대한 전체의 일부이다. (…)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의 거짓되고 비유기적인 관계, 특히 돈과 관련된 관계들을 파괴하고, 그리고 우주와, 태양과 지구와, 인류와 민족과 가족과 살아 있는 〈유기적 관계〉를 새로이 정립하는 것이다. 태양과 함께 시작하라.
- 『로렌스의 묵시록』, 235쪽 -
로렌스에 의하면 우주는 단순히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물체’가 아닌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거대한 생명체 안에서 살아가는 우주의 일부이다. 우리는 태양의 열을 받아 몸을 덥히고, 달의 빛을 따라 밤길을 거닌다. ‘혼자 산다’고 하는 ‘개인주의’는 허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항상 우주와 ‘함께’ 살고 있다. 이 ‘함께’를 회복하는 것이 현대인의 불행을 극복하는 길이다.
토마스 베리의 위대한 과업
로렌스나 아렌트와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지구소외와 천인분리에 대한 인문학적 대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사상가가 토마스 베리(1914~2009)이다. 가톨릭 신부인 베리는 로렌스나 아렌트가 그랬듯이, 근대에 대한 성찰에서 자신의 논의를 시작한다.
산업시대 이전의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던 때에는 (…) 원시 장엄의 현시로서 우주는 궁극적인 전거로 인식된다. 모든 존재는 우주와의 긴밀한 제휴 관계 속에서 이해될 때 존재의 완전한 정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 그 시기에 우주란 의미의 세계였고, 사회 질서, 경제적 생존, 질병 치유의 근본적인 틀이었다. (…) 그러나 산업사회의 사람들은 더 이상 우주와 더불어 살고 있지 않다.
- 이영숙 옮김, 『위대한 과업』,
대화문화아카데미, 2009, 29~30쪽 -
문제는 근대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우리가 우주를 주체들의 영적 교섭이라기보다는 객체들의 집합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 더 중요한 현실은 우리가 〈우주 그 자체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 『위대한 과업』, 32쪽 -
여기에서 베리는, 로렌스가 그랬듯이 “현대인들이 우주를 상실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근대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우주가 더 이상 의미 있는 주체로 다가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로 인해 인간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치유의 근거를 상실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로렌스가 그랬듯이, 베리 역시 지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안한다.
우리가 태어났고 우리를 양육하고 인도하고 치유해준 행성 지구. 그러나 산업에 의한 착취가 이뤄졌던 지난 2세기 동안 우리가 지나칠 정도로 남용했던 행성 지구에 마음을 쓰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 맹영선 옮김, 『지구의 꿈』,
대화문화아카데미, 2013, 29쪽 -
지구를 단지 인간을 위한 도구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주며 치유해주는 고마운 존재로 보자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죽어있는 사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으로 지구를 대하자는 제안이다. 그 이유는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주는 존재가 바로 지구이기 때문이다. 마치 19세기의 동학사상가 해월 최시형(1827~1898)이 “천지天地가 만물의 부모”라고 했듯이, 토마스 베리도 지구를 인간의 부모로 보고 있는 것이다.
만물이 어우러지는 지구공동체
지구가 만물의 부모라고 한다면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는 한 부모에서 나온 친척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친교親交 관계를 형성하며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공간이 지구라는 행성이다.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 개념은 여기에서 도출된다. 울리히 벡이 ‘위험의 지구화’에 의한 ‘지구사회’ 개념을 제시했다면, 토마스 베리는 정반대로 ‘친교의 지구화’를 통한 ‘지구공동체’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우주의 일부이며, 전체로서의 통일체를 형성하기 위해 서로 연결돼 있다.
- 『위대한 과업』, 32쪽 -
지구는 지금보다 인간과 더 친밀한 존재였다. 동물과 인간은 〈친척관계〉였다.
- 『위대한 과업』, 40쪽 -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모든 것은 〈지구의 구성원들〉이며, 실상 그들을 아우르는 단 하나의 통합된 지구공동체가 있을 뿐이다. 〈지구공동체〉 안에서 모든 존재는 자신의 역할, 존엄성, 자생성自生性을 갖고 있다.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목소리를 지닌다.
- 『위대한 과업』, 17쪽-
지구공동체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만물은 모두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동료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이제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는 지구가 인간의 집이고 만물이 인간의 동료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들과의 ‘친밀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지구와 만물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대전환을 베리는 ‘위대한 과업(Great Work)’이라고 부르고 있다.
에드가 모랭의 지구문명론
울리히 벡이 ‘지구사회’를, 그리고 토마스 베리가 ‘지구공동체’를 강조했다면, 프랑스의 철학자 에드가 모랭(1921~)은 ‘지구문명(Planetary Civilization)’ 개념을 제시했다. ‘지구문명’ 개념은 ‘지구시대’(Planetary Era)나 ‘지구의식(Planetary Consciousness)’과 더불어 모랭의 지구학을 구성하는 세 가지 주요 개념이다.
먼저 ‘지구시대’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신대륙의 탐험에 의해 “지구가 하나의 행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인류가 지구 전체를 무대로 활동”해 “지구의 일부분들이 서로 소통”하기 시작한 시대를 말한다. 시기적으로는 대략 15세기 무렵에 해당하고, 이 시기의 주체는 서부유럽의 국가들이다. 이 시기는 역사에서 흔히 말하는 ‘근대’ 시기에 상응한다.
지구시대는 인류에게 ‘지구의식’이라는 새로운 의식을 싹트게 해준 시대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됨에 따라 국경을 넘어서 하나의 ‘지구인’이자 동일한 ‘지구시민’이라는 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지구의식’을 고조시킨 것은 ‘지구적 문제들(problems of a global nature)’의 출현이다. 지구적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느낌이 구체화되면서 지구에 대한 의식도 발전됐다(이상, 『지구는 우리의 조국』, 49~51쪽). 울리히 벡식으로 말하면 “지구적 위기”가 지구 의식을 고조시킨 것이다.
근대적 사고에서 지구적 사고로
모랭에 의하면 이와 같은 ‘지구적 위기’를 초래한 것은 다름 아닌 근대의 과학기술문명이다. 그런 점에서 과학기술문명은 ‘야만화된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야만화된 문명을 다시 문명화해야 하는데(civilizing of civilization), 그것이 바로 ‘지구문명’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지구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모랭은 먼저 우리의 사고방식이 ‘근대적’에서 ‘지구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분되고 구획화되고 축소된 기계론적이고 분리된 지성은 〈세계의 복합성〉을 깨트려서 분리된 단편들로 만들고, 문제들을 분할하며, 이어져 있는 것을 나누고, 다차원적인 것을 일차원적인 것으로 만든다. (…) 그렇기 때문에 문제들이 다차원적인 것이 되면 될수록 그것들의 다차원성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점점 더 약해지게 된다. 위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그 같은 위기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역시 점점 더 약해지게 된다. 문제들이 점점 더 지구적인 것이 되면, 갈수록 그 같은 문제들은 점점 더 생각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맥락과 〈지구의 복합성〉을 고려할 만한 능력이 없는 맹목적 지성은 분별도 없고 책임감도 없게 돼 버린다.
- 『지구는 우리의 조국』, 227쪽 -
근대적 사고의 특징은 구분 짓고 분할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적 사고방식만으로는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지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분리된 것들을 서로 잇고, 맥락과 전체를 볼 줄 아는 사고의 개혁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지구적 사고’다. 그러나 전체를 본다고 해서 부분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개별적인 것은 그것이 그 맥락으로부터 고립될 때, 그것이 속해 있는 전체로부터 고립될 때 추상적인 것이 된다. 전체적인 것은 그것이 그 부분들과 유리된 전체에 불과할 때 추상적인 것이 돼 버린다. 지구적 복합성의 사고는 우리를 끊임없이 부분에서 전체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보낸다.
- 『지구는 우리의 조국』, 231쪽 -
이에 의하면 모랭이 말하는 ‘지구적 사고’란 부분을 무시하고 전체만 보는 전체주의적 사고도 아니라, 전체에서 부분을 보고 부분에서 전체를 볼 줄 아는, 불교적으로 말하면 ‘화엄적 사고’이자 ‘상즉적 사고’를 말한다. 그래서 엄밀히 ‘지구지역적 사고’(glocal thinking)라고 할 수 있다. 지구지역적 사고는 전체와 부분, 부분과 전체를 넘나드는 사고를 말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모랭의 지구학은 올해 오스트리아에서 시민운동의 형태로 부활했다. “오스트리아 평화와 갈등해결 연구센터(Austrian Study Centre for Peace and Conflict Resolution)”에서 「지구적 연대를 위한 선언문」(A Manifesto for Planetary Solidarity)을 선포하고 <조국지구 캠페인>(A Campaign to Promote Planetary Awareness)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조금씩 쌓여 간다면 모랭의 바램대로 인류의 인식이 ‘지구적’으로 확장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조성환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우리가 지구상에서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을 잘 관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구 안에서 생명을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땅을 잘 관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구 안에서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생명을 잘 관찰했기 때문이다.
- 에드가 모랭, 『지구는 우리의 조국』 -
위험의 지구화
1990년을 전후로 서양 학계에서는 종래와는 다른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다. 제목이나 본문에 ‘지구(Earth)’라는 말이 들어간 학술서가 우후죽순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면, 토마스 베리의 『지구의 꿈』(1988)이나 제임스 콜론의 『우리 시대를 위한 지구이야기』(1990), 에드가 모랭의 『지구는 우리의 조국』(1993)이나 데이비드 오어의 『작은 지구를 위한 마음』(1994) 등이 그것이다. 이 현상이 시사하는 바는 서양 인문학자들의 관심이 ‘국가’에서 ‘지구’로 이동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편의상 ‘지구학’ 또는 ‘지구인문학’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1990년 전후에 ‘지구인문학’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보면, 당시의 ‘세계화’(globalization) 열풍과 무관하지 않다. 세계화로 인해 세계가 하나 됐지만, 그만큼 위험도 공유하게 됐기 때문이다. 가령 미세먼지나 지구온난화는 국경을 넘어 온 나라와 전 지역에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이것을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의 지구화’라고 했다.
생태적인 위기의식은 공포와 히스테리로 분출되면서 (…) 하나의 〈공동운명〉이라는 의식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이러한 공동운명은 인간, 동물, 식물 사이의 한계마저도 지양하는 세계시민적인(코스모폴리탄) 일상 의식을 각성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위험이 사회를 구축하고 (…) 전 〈지구적 위험〉이 〈지구사회〉를 구축하는 셈이다.
- 조만영 옮김, 『지구화의 길』, 거름, 2000, 81쪽
(강조는 인용자의 것. 이하도 마찬가지) -
여기에서 울리히 벡은 생태위기와 같은 ‘지구적 위험’이 역설적으로 인류로 하여금 하나의 ‘공동운명체’라는 의식을 갖게 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나아가서 그것은 지역사회나 국가사회를 넘어선 ‘지구사회’를 구축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지구사회나 지구공동체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기후변화나 팬데믹 상황을 생각하면 낯선 얘기도 아니다. 지구인문학은 이러한 위기와 불안에서 탄생한 학문이다.
한나 아렌트의 지구소외
20세기의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1950년대에 이미 이런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다. 1957년에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을 발사하자, 이듬해에 “인간들이 지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경고한 것이다. 그것을 개념화한 것이 ‘지구소외(Earth alienation)’이다.
인간의 조건 때문에 여전히 지구에 구속돼 있는 우리는 마치 외부, 즉 아르키메데스적 점으로부터 지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양, 지상에서 (…) 행동하는 방식을 발견했다. (…) 근대 자연과학 발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지구소외(earth alienation)〉는 (…) 근대 과학의 기호가 됐다. (…) 근대수학은 인간을 지구에 묶인 경험의 한계로부터 해방시켰으며 인식능력을 유한성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다.
- 이진우 옮김, 『인간의 조건』, 한길사, 2020, 373~376쪽 -
여기에서 아렌트는 ‘근대성’의 본질을 ‘지구학’의 관점에서 포착해 내고 있다. 즉 근대라는 시기는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을 지구라는 속박에서 해방시켜 줬지만, 거꾸로 자신이 딛고 있는 삶의 조건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동아시아의 철학 용어로 표현하면, ‘천인분리天人分離’에 의한 ‘천인불화天人不和’의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가 인류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지구와의 조화를 지향하던 천인공화天人共和의 삶과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D.H. 로렌스의 우주상실
아렌트 이전에도 비슷한 통찰을 한 사상가가 있다. 우리에게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저자로 유명한 소설가 D.H 로렌스(1885~1930)이다. 로렌스는 1931년에 간행된 『계시록(Apocalpse)』에서 “현대인들은 우주를 상실했다”고 진단했다.
아마도 우리와 이교도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우주(cosmos)에 대해 서로 다른 관계를 맺는 점에 있는 듯하다. 우리에게는 모든 점이 다 개인적이다. 경관과 하늘, 이들은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 달콤한 배경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그 이상은 아니다. 과학자가 바라보는 우주는 우리의 개인성을 연장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교도들에게 우주는 경관이나 개인적인 배경이 아니었다. 〈우주는 살아 있었다.〉 인간은 우주와 함께 ‘살았으며’ 우주를 자신보다 위대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 김명복 옮김, 『로렌스의 묵시록』, 나남출판, 1998, 51~52쪽 -
로렌스에 의하면 현대인들에게 우주는 더 이상 경이로운 세계도 신비한 세계도 아니다. 전통 시대 사람들처럼 우주와 교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우주는 단지 자신을 둘러싼 배경이자 탐구의 대상일 뿐이다. 현대인들이 고독을 느끼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들은 우주와의 관계를 끊고 개인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외롭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안다. 그들은 우주(cosmos)를 잃어버렸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인간적이고 사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결여된 것은 〈우주적 삶(cosmic life)〉이다.
- 『로렌스의 묵시록』, 59쪽 -
(고대인들에게) 태양은 멋들어진 생명체였으며, 사람들은 그 생명체로부터 힘과 영광을 끌어내어, 그것에 경의와 영광과 감사를 보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와서 그 관계를 깨어지고 (…) 태양은 이제 훨씬 더 보잘것없는 것으로 돼 버렸다. (…) 우주와의 교감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자 우리는 우주를 잃었다.
- 『로렌스의 묵시록』, 53~54쪽 -
여기에서 로렌스는 현대인의 문제를 ‘우주상실’로 진단하고 있다. 마치 아렌트가 인간과 지구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우려했듯이, 인간과 우주의 관계가 끊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인의 고독과 불안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치 17세기의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이 『팡세』에서 “신과 함께하지 않는 불행”을 말했듯이, 로렌스는 현대인들의 “우주와 함께 하지 않는 불행”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의 일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로렌스는 우주와의 관계를 회복할 것을 제안한다. 아렌트식으로 말하면 ‘인간의 조건’을 되찾는 것이고, 동양철학적으로 말하면 ‘천인합일’의 삶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우리와 우주는 하나다. 우주는 거대한 생명체이고 우리는 그것의 일부이다. 태양은 커다란 심장이고, 그 진동들은 우리의 핏줄을 관통한다. 달은 환하게 빛나는 커다란 신경중추이고, 우리의 떨림은 거기에서 온다.
- 『로렌스의 묵시록』, 57쪽 -
내가 지구의 일부임을 나의 발은 안다. (…) 나의 개인주의는 실로 환상이다. 나는 거대한 전체의 일부이다. (…)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의 거짓되고 비유기적인 관계, 특히 돈과 관련된 관계들을 파괴하고, 그리고 우주와, 태양과 지구와, 인류와 민족과 가족과 살아 있는 〈유기적 관계〉를 새로이 정립하는 것이다. 태양과 함께 시작하라.
- 『로렌스의 묵시록』, 235쪽 -
로렌스에 의하면 우주는 단순히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물체’가 아닌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거대한 생명체 안에서 살아가는 우주의 일부이다. 우리는 태양의 열을 받아 몸을 덥히고, 달의 빛을 따라 밤길을 거닌다. ‘혼자 산다’고 하는 ‘개인주의’는 허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항상 우주와 ‘함께’ 살고 있다. 이 ‘함께’를 회복하는 것이 현대인의 불행을 극복하는 길이다.
토마스 베리의 위대한 과업
로렌스나 아렌트와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지구소외와 천인분리에 대한 인문학적 대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사상가가 토마스 베리(1914~2009)이다. 가톨릭 신부인 베리는 로렌스나 아렌트가 그랬듯이, 근대에 대한 성찰에서 자신의 논의를 시작한다.
산업시대 이전의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던 때에는 (…) 원시 장엄의 현시로서 우주는 궁극적인 전거로 인식된다. 모든 존재는 우주와의 긴밀한 제휴 관계 속에서 이해될 때 존재의 완전한 정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 그 시기에 우주란 의미의 세계였고, 사회 질서, 경제적 생존, 질병 치유의 근본적인 틀이었다. (…) 그러나 산업사회의 사람들은 더 이상 우주와 더불어 살고 있지 않다.
- 이영숙 옮김, 『위대한 과업』,
대화문화아카데미, 2009, 29~30쪽 -
문제는 근대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우리가 우주를 주체들의 영적 교섭이라기보다는 객체들의 집합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 더 중요한 현실은 우리가 〈우주 그 자체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 『위대한 과업』, 32쪽 -
여기에서 베리는, 로렌스가 그랬듯이 “현대인들이 우주를 상실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근대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우주가 더 이상 의미 있는 주체로 다가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로 인해 인간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치유의 근거를 상실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로렌스가 그랬듯이, 베리 역시 지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안한다.
우리가 태어났고 우리를 양육하고 인도하고 치유해준 행성 지구. 그러나 산업에 의한 착취가 이뤄졌던 지난 2세기 동안 우리가 지나칠 정도로 남용했던 행성 지구에 마음을 쓰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 맹영선 옮김, 『지구의 꿈』,
대화문화아카데미, 2013, 29쪽 -
지구를 단지 인간을 위한 도구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주며 치유해주는 고마운 존재로 보자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죽어있는 사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으로 지구를 대하자는 제안이다. 그 이유는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주는 존재가 바로 지구이기 때문이다. 마치 19세기의 동학사상가 해월 최시형(1827~1898)이 “천지天地가 만물의 부모”라고 했듯이, 토마스 베리도 지구를 인간의 부모로 보고 있는 것이다.
만물이 어우러지는 지구공동체
지구가 만물의 부모라고 한다면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는 한 부모에서 나온 친척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친교親交 관계를 형성하며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공간이 지구라는 행성이다.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 개념은 여기에서 도출된다. 울리히 벡이 ‘위험의 지구화’에 의한 ‘지구사회’ 개념을 제시했다면, 토마스 베리는 정반대로 ‘친교의 지구화’를 통한 ‘지구공동체’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우주의 일부이며, 전체로서의 통일체를 형성하기 위해 서로 연결돼 있다.
- 『위대한 과업』, 32쪽 -
지구는 지금보다 인간과 더 친밀한 존재였다. 동물과 인간은 〈친척관계〉였다.
- 『위대한 과업』, 40쪽 -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모든 것은 〈지구의 구성원들〉이며, 실상 그들을 아우르는 단 하나의 통합된 지구공동체가 있을 뿐이다. 〈지구공동체〉 안에서 모든 존재는 자신의 역할, 존엄성, 자생성自生性을 갖고 있다.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목소리를 지닌다.
- 『위대한 과업』, 17쪽-
지구공동체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만물은 모두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동료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이제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는 지구가 인간의 집이고 만물이 인간의 동료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들과의 ‘친밀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지구와 만물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대전환을 베리는 ‘위대한 과업(Great Work)’이라고 부르고 있다.
에드가 모랭의 지구문명론
울리히 벡이 ‘지구사회’를, 그리고 토마스 베리가 ‘지구공동체’를 강조했다면, 프랑스의 철학자 에드가 모랭(1921~)은 ‘지구문명(Planetary Civilization)’ 개념을 제시했다. ‘지구문명’ 개념은 ‘지구시대’(Planetary Era)나 ‘지구의식(Planetary Consciousness)’과 더불어 모랭의 지구학을 구성하는 세 가지 주요 개념이다.
먼저 ‘지구시대’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신대륙의 탐험에 의해 “지구가 하나의 행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인류가 지구 전체를 무대로 활동”해 “지구의 일부분들이 서로 소통”하기 시작한 시대를 말한다. 시기적으로는 대략 15세기 무렵에 해당하고, 이 시기의 주체는 서부유럽의 국가들이다. 이 시기는 역사에서 흔히 말하는 ‘근대’ 시기에 상응한다.
지구시대는 인류에게 ‘지구의식’이라는 새로운 의식을 싹트게 해준 시대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됨에 따라 국경을 넘어서 하나의 ‘지구인’이자 동일한 ‘지구시민’이라는 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지구의식’을 고조시킨 것은 ‘지구적 문제들(problems of a global nature)’의 출현이다. 지구적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느낌이 구체화되면서 지구에 대한 의식도 발전됐다(이상, 『지구는 우리의 조국』, 49~51쪽). 울리히 벡식으로 말하면 “지구적 위기”가 지구 의식을 고조시킨 것이다.
근대적 사고에서 지구적 사고로
모랭에 의하면 이와 같은 ‘지구적 위기’를 초래한 것은 다름 아닌 근대의 과학기술문명이다. 그런 점에서 과학기술문명은 ‘야만화된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야만화된 문명을 다시 문명화해야 하는데(civilizing of civilization), 그것이 바로 ‘지구문명’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지구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모랭은 먼저 우리의 사고방식이 ‘근대적’에서 ‘지구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분되고 구획화되고 축소된 기계론적이고 분리된 지성은 〈세계의 복합성〉을 깨트려서 분리된 단편들로 만들고, 문제들을 분할하며, 이어져 있는 것을 나누고, 다차원적인 것을 일차원적인 것으로 만든다. (…) 그렇기 때문에 문제들이 다차원적인 것이 되면 될수록 그것들의 다차원성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점점 더 약해지게 된다. 위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그 같은 위기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역시 점점 더 약해지게 된다. 문제들이 점점 더 지구적인 것이 되면, 갈수록 그 같은 문제들은 점점 더 생각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맥락과 〈지구의 복합성〉을 고려할 만한 능력이 없는 맹목적 지성은 분별도 없고 책임감도 없게 돼 버린다.
- 『지구는 우리의 조국』, 227쪽 -
근대적 사고의 특징은 구분 짓고 분할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적 사고방식만으로는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지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분리된 것들을 서로 잇고, 맥락과 전체를 볼 줄 아는 사고의 개혁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지구적 사고’다. 그러나 전체를 본다고 해서 부분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개별적인 것은 그것이 그 맥락으로부터 고립될 때, 그것이 속해 있는 전체로부터 고립될 때 추상적인 것이 된다. 전체적인 것은 그것이 그 부분들과 유리된 전체에 불과할 때 추상적인 것이 돼 버린다. 지구적 복합성의 사고는 우리를 끊임없이 부분에서 전체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보낸다.
- 『지구는 우리의 조국』, 231쪽 -
이에 의하면 모랭이 말하는 ‘지구적 사고’란 부분을 무시하고 전체만 보는 전체주의적 사고도 아니라, 전체에서 부분을 보고 부분에서 전체를 볼 줄 아는, 불교적으로 말하면 ‘화엄적 사고’이자 ‘상즉적 사고’를 말한다. 그래서 엄밀히 ‘지구지역적 사고’(glocal thinking)라고 할 수 있다. 지구지역적 사고는 전체와 부분, 부분과 전체를 넘나드는 사고를 말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모랭의 지구학은 올해 오스트리아에서 시민운동의 형태로 부활했다. “오스트리아 평화와 갈등해결 연구센터(Austrian Study Centre for Peace and Conflict Resolution)”에서 「지구적 연대를 위한 선언문」(A Manifesto for Planetary Solidarity)을 선포하고 <조국지구 캠페인>(A Campaign to Promote Planetary Awareness)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조금씩 쌓여 간다면 모랭의 바램대로 인류의 인식이 ‘지구적’으로 확장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조성환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