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0

正名(정명)과 正命(정명)/姑息之策(고식지책)

 



正名(정명)과 正命(정명)/姑息之策(고식지책) : 네이버 블로그

正名(정명)과 正命(정명)/姑息之策(고식지책)





오늘 들어가기 冒頭(모두) 강의는 

正名(정명)과 正命(정명)의 차이입니다.

正名(정명)과 正命(정명), 발음은 같지만 의미는 다르지요.


효자로도 유명한 曾子(증자)가 병으로 누웠습니다.

증자의 제자 樂正子春(악정자춘)이 병상 가까이 앉았고 아들인 曾元(증원)과 曾中(증중)이 먼 발치에 앉아 모셨으며 시중드는 童子(동자)가 구석에 앉아 있습니다.

갑자기 동자가 말합니다.

" 대부의 삿자리군요"

제자 악정자춘이 말합니다.

"그쳐라!"

증자가 혼미한 가운데서도 그 말을 듣고 "아아~"하고 탄식합니다.

제자 악정자춘이나 아들들은 그 동자가 한 말을 알았을 것임에도 '어린것이 무얼 안다고 나서느냐'하는 식으로 입을 막았습니다. 

다시 동자가 

"아름답고 곱습니다. 대부의 싯자리군요" 합니다. 



실은 증자가 깔고 누웠던 삿자리는 대부가 증자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노나라의 최고 실권자이잔 고관인 대부 계손이 선물한 삿자리는 함부로 깔고 누울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마치 임금이 잉어를 선물하면 삶아 먹는 것이 아니라 기르듯이 선물받은 주군의 물건은 가보로 그저 간직하는 것이었나 봅니다. 

증자가 병이나 위독하자 제자들이 그를 곱고 푹신한 대부가 선물한 삿자리에 뉘었던 듯 싶습니다. 



증자는 동자의 이 말을 듣고 탄식하며 

"그렇구나 이것은 대부 계손이 나에게 선물한 것이다. 元(원)아! 이 삿자리를 얼른 바꾸어라!"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증원이 

"아버님 병환이 위중하시어 지금 바꿀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내일 아침에 바꾸겠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증자는 말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함이 저 동자만도 못하구나, 
군자는 남을 사랑하기를 德(덕)으로 하지만
 細人(세인-소인이라는 말)은 남을 사랑하기를 姑息之策(고식지책)으로 한다. 
내가 어느것을 택하겠느냐? 
나는 바른 이름을 얻고(정명) 바른 죽음을 얻겠다(정명). 
그것을 원할 뿐이다."



하는 수 없이 삿자리를 바꾸어 눕히자 증자는 곧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대부가 아니면서 대부의 삿자리를 사용하는 것이 예가 아님을 안 증자는 즉시 예를 택하여 바름 이름을 얻고 바른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증자의 한 말의 요지는 
군자는 잘못을 알았을 때는 즉시 그것을 고치지만 
소인을 자신의 잘못을 알았을 때에도 구차히 당장 면피하려는 고식지책(姑息之策)을 쓴다는 점입니다. 

고식지책, 또는 고식지계는 " 잠시 모면하는 일시적인 계책이라는 뜻으로 근본 해결책이 아니라 임시방편이나 당장에 편안한 것을 취하는 꾀나 방법을 말합니다.

이 용어에 대한 좀 나은 고전해설은 《시자(尸子)》에 "은나라 紂(주)왕이 장노의 말을 버리고 부녀자나 아이의 말만 사용하였다[紂棄老之言而用故息之語]"라는 구절에 유래하는데 증자는 병이 위중한 경각의 즈음에서도 예가 아니면 취하지 않고 즉시 시정하므로 소인들의 고식지책과는 다름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현실의 정치나 기업의 문화에서 우리는 영정치원(寧靜致遠-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야 원대한 포부를 이룰 수 있음)한 정책이나 지과필개(知過必改-잘못을 알면 반드시 고쳐야 함)하는 정신이 꼭 필요한 현실이라고 봅니다. 

*시자(尸子)-尸佼(시교-기원전 390년—기원전 330년의 전국시기 유명한 정치가이자 도가적 사상가 )가 찬한 책.


[출처] 正名(정명)과 正命(정명)/姑息之策(고식지책)|작성자 고은글씨

----------------------------------------

안티들 때문에 믿음이 흔들려요... 2012.07.12.

차이
⑤ 정명(正命)-올바른 생활. 곧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고 내 손으로 일해서 생계을 유지함
⑥ 정정진... 정명(正名) ⑷ 덕스러운 힘을 나타내는 덕(德) ⑸ 행실의 기준이 되는 예(禮) 

===


정명(正命)  마음 밭   
2015. 10. 6. 10:31
https://blog.naver.com/jys0655/220500804539


정 명(正名) [?]

정명(正命)의 반대인 사명(邪命)이란 ?

팔정도의 다섯번째 덕목인 정명은 '바른생활'로 많이 번역된다.



바른 직업을 택하고 바르게 일을 하여 생계와 생활을 올바로 꾸려 나가라는 가르침이다.
이를 확대하면 의(衣), 식(食), 주(住) 속의 생활, 곧 옷차림, 식사예절, 수면운동
휴식중에 대한 바른 생활태도 까지도 모두 포함된다.



이 정명의 핵심을 한마디로 꼬집으면 '목숨명(命)' 하에 있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 '나의 생명'이다.
천만금을 준다 한들 목숨을 이어줄 사람은 결코 없다.
정명은 바로 가장 귀한 나의 목숨을 올바로 유지하다는 가르침이다.

올바른 직업과 생활관을 통하여 '나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살려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소중한 나의 생명력을 살려가는 삶이 아니라 죽이는 삶을 사는 이들이 있다.

눈앞에 이익에 사로잡혀 그릇 된 길로 나아가며 스스로의 생명력을 죽여가는 사람들,
그들을 부처님께서는 사명외도(邪命外道)라고 하셨다.


사명(邪命)은 정명(正命)의 반대이다.
사명에 따르지 않으면 정명의 바른 길로 들어서서 '나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살려낼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대사십경(大四十經)에서 이에 관해 말씀하셨다.

사명(邪命)이 무엇인가?
사기, 공갈, 점복(占卜) 등을 업으로 삼거나 이익을 지나치게 탐하는 것이 사명(邪命)이다.
이러한 삿된 생활법을 버리고 바른일을 통하여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정명(正命)이라 한다.
이 가르침 가운데 '이익을 지나치게 탐하는 것이 사명(邪命)'이라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깊이 새길줄 알아야 한다.

​지나친 이익을 추구하다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사람들을 자주 접하게 보인다.
명품을 즐기다가 카드을 긁었고 카드 빛을 막기 위하여 '쉽게 돈을 벌겠지' 하는 생각으로
롬싸롱의 접대부로 나갔다가 돈은 커녕 더 큰 빛에 몸도 마음도 망가 뜨려 버린 여대생
이야기를 집중하는 TV , 그녀들은 '죽고 싶을 뿐' 이라고 하였다.
과연 그 누가 그녀을 '죽고 싶은' 상태로 몰아 넣었는가 ?
그것은 남이 아니다.

​지나친 욕구 충족, 지나친 이익 추구가 원흉이다.
명품을 가지고 싶어하고 명품을 지니는 것을 누가 나쁜 짓이라 하냐 ?
욕망을 못이겨 갚을 방법을 생각하지 않은 채 신용카드를 사용했고 카드 빛을 감당할 수 없자
'쉽게 돈을 벌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롬싸롱을 찾아간 것이 결정적인 화근 이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에서는 이를 냉철하게 꼬집고 있다.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분에 넘치는 이익을 바란다면 반드시 어리석은 마음이 요동하게 되고,
어리석는 마음이 요동치면 반드시 추악한 이익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헤손 되느리라.
사화가 자본주위에 물이 들수록 분에 넘치게 이익을 바라는 이들이 많아진다.
쉽게 돈을 벌려는 사람이 많아지고 한탕주위로 떼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리고 주위에서도 그와 같은 조건을 제시하며 유혹의 손길을 뻗친다.
물론 본에 넘치는 이익에 눈이 멀어 가진 돈과 몸과 마음을 내 맡기면 특별한 요행수가 없는 한 결과는 뻔하다.

​스스로를 실패의 구렁텅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지게 만들 뿐이다.
왜, 냉정하게 생각하면 어떠한 결과가 돌아 온다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알 수 있는 일에
왜, 불나비가 불에 뛰어들듯이 하는가 ?

​치심(癡心) : 곧, 어리석움 때문이다.
'나의 이익'에 집착하는 어리석움 때문이다.

​왜 어리석다고 하는가 ?
그렇게 괴겠끔 되어 있는 법칙을 모르기 때문에 어리석다고 하는 것이다.
뿌린 결실 거두고 한것만큼 돌아온다는 세상사의 기본을 모르기 때문에 어리석다고 하는 것이다.
치심(癡心은 달리 무명심(無明心)이려고 하는데 무명심 밝음이 없는 어두운 마음이다.
어둡기 때문에 갈 길을 볼 수가 없고, 길을 보지못하기 때문에 어둠속에서 방황하면서
두려움에 떨고 수많은 고초를 격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나'의 이익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마음 : 이것을 우리는 이기심(利己心) 이라고 하며
이 이기심은 잠깐동안 우리를 만족 시켜준다.

​그 넘치는 이익이 '나'의 마음에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만족은 오래가지 않는다. 어느 순간이 되면 분수에 넘치는 이익을 추구하는
그 이기심이 '나'를 어둠속에 가두워 버린다.


이기심을 진하게 가질수록 밝은 빛을 차단하는 막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지기 때문이다.
'나'의 어리석움, '난'의 밝지 못함을 상징하는 이기심 껍질이 단단해지면 딴딴할 수록 남과의
분리감이 강해지고 분리감이 커지면 자신도 모르게 주변 사람이나 사회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며, 두려움이 심해지면 대인 기피증 뿐만 아니라, 자기를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속에서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무의식 충동까지 느끼게 된다.



또한 지나친 이익추구와 이기심에 사무친 삶은 정신적인면 뿐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굳고 경직되게 만든다.

이기심으로 인해 육체의 여러부분에 긴장감이 생겨나고 몸 전체는 위축이 된다.
건강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생명 에너지가 크게 줄어들어 알 수 없는 병을 부르고
수명까지도 좌지 우지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부처님께서 강조하신 '이익을 지나치게 탐하는 사명(邪命)의 길을 택하게 되면
그 사명(邪命)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갖가지 문제를 일으켜 '나'를 살리는 생활이 아닌
'나'를 죽이는 생활속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다.

실로 인생살이에 있어 이익은 올만큼 오는 것이다.
일도할 만큼할 만큼 할 수 있고 이익도 한 만큼 나오는 법이다.

'나'의 마음가짐과 노력에 맞게 이익이 다가오는 법이다.
바란다고, 욕심부린다고 일을 많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이익이 많이 다가오지를 않는다.

오히려 지나치게 탐하면 번뇌만 커질 뿐이다.
일단 이익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해 보라 이익이 아니라 번뇌가 '나'의 중심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치심이나 이기심이 끊임 없이 의견을 내어 '나'로 하여금 좋아하고 싫어하고 주측하고 비교하고
판단하고 불평하는 각종 번뇌물을 가득 불러 일으켜 놓는다.

정령 번뇌에 휩쌓여 사는 생활보다 더 비참한 삶이 어디에 있는가 ?
지나친 '이익추구'라는 첫 번째 번뇌가 수많은 번뇌를 일으켜 결국은 우리를 번뇌속에서 죽어가는 존재로 만들어가는 것 : 그리고 이것이 '나'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사명(邪命)의 속성이라는 것을 깊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

  
[출처] 정명(正命)
|작성자 장명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