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02

유영모와 함석헌의 같음과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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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과 함석헌
2013.11.05 04:15
 참도
유영모와 함석헌의 같음과 다름| 숨은 예수의 골방
늦빔 | 조회 27 |추천 0 | 2013.10.06. 08:32
유영모와 함석헌의 같음과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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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빔 안창도

"내가 이 학교에 오게 된 것은 함 자네 한 사람 얻으려고 했나봐." 늘 그렇듯이 이야기한 사람은 잊어버리는데 듣는 사람은 두고 두고 잊혀지지 않는 말이 있다. 함석헌에 게 이 말은 평생 잊지 못할 말이 되었다.

유영모는 일제 시대 오산학교 교장 시절부터 함석헌의 선생님이 었다. 오산학교에 쟁쟁한 인재들이 많았다. 교장으로는 조만식, 홍명희, 이승훈은 물론 교사로도 이광수 같은 사람이 있었으니 또한 학생들도 민족의식이 높은 자들이 모여들었다. 6.25 이후 남한에서 가장 큰 영락 교회를 세운 한경직 목사, 화가 이중섭, 독립군 출신 김홍일 장군 등 패기있고 리더십이 출중하고 걸출한 학생들 사이에 함석헌은 내성적인 성미에 남 앞에 나서는 성품이 못되었다. 학과 시간에도 묻고 싶어도 남 앞에서 자기를 내세우는 것 같아서 질문도 못하던 사람이었다.

그래도 유영모 교장이 오산학교를 떠날 때 배웅을 해드린 학생은 함석헌 혼자였다. 일제가 부임 허가를 내주지 않아서 결국 1년만에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학생 함석헌이 유영모 선생님의 짐보따리를 들고 정거장까지 배웅을 해드렸나보다. 교장 유영모는 학생 함석헌을 남다르게 보았던 것같다. 그래서 다른 이들을 마다하고 함석헌에게 자신의 짐을 부러 맡긴 것이 아닐까?
내성적이고 소심한 함석헌에게 교장 선생님이 '나에겐 오직 너뿐이다.'라는 말을 하였을 때 인간 함석헌에게 미친 영향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나는 젊은 시절 함석헌이란 이름을 들어 보았어도 유영모란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왜 갑자기 유영모란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는가? 너무 세상을 앞서 살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까? 기독교내에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유영모에게서 그 원류를 발견한 것일까? 그는 누구일까? 그리고 그의 제자 함석헌은 유영모의 가르침이나 사상을 얼마나 체화했는가? 함석헌의 제자 박재순은 유영모를 딱 한번 본 적이 있었는데 그에게서 비범한 풍모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유영모의 구기동 자택에서 뵌 팔십이 넘은 노인의 얼굴은 희었고 입술은 붉었다고 전했다.

"류달영(柳達永)이 말하기를 “함석헌 선생님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류영모 선생임을 닮으려고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함석헌이 몸살림으로는 한복을 입고, 하루 한끼를 먹고, 걸어다니고 하는 것이 모두 류영모의 삶을 본받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무교회 신앙인인 이찬갑(李贊甲)은 “어찌하여 함석헌은 류영모를 닮아가는가?”라고 불만을 털어놓았다."(진리의 사람 다석 유영모, 박영효)그러나 불행히도 이 두 사람은 나중에 갈라지게 된다. 무엇이 이 둘을 갈라놓았는가? 표면적으로는 함석헌의 여성 편력이 문제가 되었다. 함석헌은 자신의 여성편력을 유영모에게 괴테의 경우에 견주어 말했다. 함석헌이 유영모에게 ‘톨스토이를 두고 괴테를 읽어 보았다’라고 한 것은 워낙 동서고전에 통달한 그이니만치 괴테의 여성편력을 모를 리 없을 터이고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괴테라는 대문호에 견주어 합리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석은 처음에는 함석헌의 잘못을 덮어 주고자 하였으나 나중에는 세간에 이런저런 얘기가 자꾸 흘러나오니 공개석상에서 면박을 주게 되었다. 다시 유영모의 제자 박영효가 전하는얘기를 옮겨 본다.
"함석헌은 모임에 스승 류영모가 들어오자 하던 말을 멈추고 류영모를 모인 사람들에게 소개하였다. 함석헌은 소개말을 하기를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모르시는 분은 모르실 줄 알고 말씀드립니다. 정주(定州) 오산학교 학생 때 저를 가르쳐 주신 은사님이신 류 영모 선생님께서 방금 이곳에 오셨습니다. 제가잘못한 것이 많아 한 서울에 있으면서 도 찾아뵙지 못하였는데, 오늘 여기까지 오신 것은 저의 잘못을 용서하신 것으로 알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때 함석헌이 발행하는 잡지「씨알의 소리」편집장으로 있는문대골이 자리에서 일어나 류영모를 환영한다는 인사말을 하였다. 문대골은 일찍 어버이를 잃은 사람이라 언제나 함석헌을 정신적인 아버지로 생각하였다. “이 자리에 선생 님의 선생님께서 오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오늘처럼 사진기를 갖지 못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두 분 선생님께서 한 자리에 계신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어서입니다. 선생님의 선생님께서도 한 말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
는 구원이란 사랑과 죄악이 뒤범벅이 된 것이라 믿습니다."라고 하였다.
문대골의 인사말을 듣고 있던 류영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이제 구원은 사랑과 죄악이뒤범벅이 된 것이라고 말한 이는 나가시오. 사랑과 죄악으로 뒤범벅이 된 것이 어찌 구원이 된다는 말이오. 구원이란 탐진치의 삼독의 욕심에서 벗어나 진리로 자유(해탈)하는 것이 구원일 것이요. 그래서 예수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였어요. 일찍 석가는 말하기를 '온갖 걸림에서 벗어나라'고 했습니다. 온갖 유혹에서 벗어나 헤메지 않으려면 자각(自覺)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진리의 나를 깨달으려면 먼저 모든 욕심을 절제해야 합니다. 절제하는 데 제일 힘드는 것이 식색(食色)입니다. 색(색)이 강한 듯하지만 사실은 더 강한 것이 식(食)입니다. 색욕은 60살이 지나면 저절로 물러서지만, 식욕은 숨질 때까지 끌고 갑니다. 그래서 더 어려운것입니다. 그런데 함은 60이 지났는데도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아직도 젊은 여자를 찾아다니는 모양이니 어찌 그렇소. 함은 죄가 많은 사람이요.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이렇게 여러 사람 앞에 나서                                                                                                                                                                                                                                                                                                                                                                                                                                                                                                               
서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성경까지 가르치다니 어떤 의미에서는 참 축복받은 사람이요. 함은 허리가 아프지 않소…. "(다석 류영모 ,하권. 291쪽)
"함은 허리가 아프지 않소?" 무슨 소린가. 오입을 많이 해서 허리가 아플 것이란 비아냥인가. 박영호는 위의 책에서 군자만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미워할 수 있다는 공자의 말로 유영모의 태도를 변호했지만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같다. 유영모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것을 함석헌에 대한 책선(責善)이었다고 변호할 수는 있다. 후에 유영모는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그가 헤맬 사람으로 보지 않았는데. 벗이여 갔는가. 오랜 벗이여 아주 갔는가. 다시 돌아올 길은 없는가.나는 허전하구나. 한 사람 봤구나 터니 본 처음이 잘못이 던가?"
유영모와 함석헌의 자속론대속론과 자속론은 장로교와 감리교의 교파 논쟁에서도 드러나고 있고, 개신교와 가톨릭의 ‘믿음이냐 공로사상이냐라는 해묵은 교리논쟁이기도 하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예수’라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인가? 자신의 의지는 철저히 무시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어떤 의지적 수행도 필요치 않는 것인가? 이정배 감리교 교수도 그의 책 “없이 계신 하나님, 덜 없는 인간”에서 유영모의 신앙을 유교적 기독교론으로자리매김하면서 유영모의 자속론을 강조하였다. 한마디로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시는 것은 그의
그리스도됨에 이르고자 함을 배우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거기에는 독생자 교리가 서 있을 자리가 없다.
누구도 예수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키우면 그처럼 성령충만한 그리스도 의식(얼나)을 공유할 수있다.

대속론과 칭의론

통합심리학자로서 동서양, 근대주의와 탈근대주의의 장점을 취합하여 보편적 다원주의를 주창한 바 있는 켄 윌버는 성장발달론에 치우쳤다. 어린아이가 스스로 성장하는 과정의 수행적 차원을 강조한 것이다. 켄 윌버 본인도 수행적 삶을 실천했다. 루소와 같은 이는 인간의 발달은 자연 그대로의 어린아이의 본성을 되찾아주는 자연주의적 입장, 자유주의적 입장에 서 있었다. 이처럼 발달심리학적 측면에서 성장주의는 엘리트주의나 보수주의 입장을, 자연주의는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자유주의 입장을 갖는다. 유영모가 함석헌보다 우측에 서게 되는 것도 그러하다. 이것은 흔히 함석헌의 제자들이 유영모를 비판하는근거이기도 하다.
이에 대하여 바울이나 현대의 교부 칼 바르트의 대속론은 대중적이고 민중적이라는 점에서 자유주의자로서의 경향성을 갖는다. 예수를 구원자로 믿으면 성령에 의해서 모든 대중, 민중이 죄에서 벗어나서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대속론은 업적 위주의, 성공지향적인 현대사회에서도치유적인 효과를 가져온다.(칭의와 치유, 최영/한신대 강사)
이처럼 수행과 믿음은 자속론과 대속론으로, 성장주의와 자연주의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로 자리를 달리한다. 수행 (보수주의)과 믿음론(자유주의)은 둘다 장점과 약점을 가진다. 켄 윌버는 각 사상, 주장에 서 좋은 점을 취해서 보편적 다원주의로 가는 것이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갖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켄 윌버의 보편적 다원주의는, 알랭 바디우의 보편적 개별성과는 다르다. 공산주의자로서의 알랭 바디우는 그의 책 <바울>에서 부활신앙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된다.
유영모가 자속론자라고 해서 그가 예수의 대속론을 전적으로 부인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지은 시에서 <믿음에 들어간 이의 노래>나 찬송 가사 등에서 그는 예수의 그리스도됨을 노래하고 있기때문이다. 물론 그런 글에서조차 예수의 신성을 불인정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다만, 예수가 그리스도됨을 인정한 그 지점이 정통 기독교 교리로서의 대속론과 유영모의 자속론이 만날 수 있는 부분이다. 특히 김흥호가 편찬한 <다석강의>를 읽어보면 첫 페이지부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그의 말과 글에 절절히 넘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효(孝), 예수 그리스도에대한 충(忠)과 절절한 사랑을 보면 그의 신앙을 ‘대속론이냐 자속론이냐?’, ‘믿음이냐 수행이냐?’, ‘정통이냐? 종교 다원주의냐?’라는 이분법적 논리로 섣불리 재단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글
유영모, 함석헌에 대한 접근과 이해는 요즘 새롭게 대두되는 평신도 중심의 이머징처치 운동과 연결지어서 종교개혁에 버금가는 새로운 정통(새종교)으로서, 초대교회적 영성과의 연관성을 탐구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할만하다.
함석헌의 스승 유영모는 철저히 자속론적인 수행을 실천하였다. 그는 비록 집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했지만 수도사적 금욕주의로 일관한 삶을 살았다. 반면에 함석헌은 그의 인생 후반기에 이르러 기독교적인대속론에 좀더 다가간 듯하다. 그분의 여성편력로 인한 참회적 심정에서 그러한 측면이 도드라지 않았을까를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노년에 기독교 교파의 일종인 퀘이커교도가 된 것도 자신의 실존적 고뇌, 내면적 모순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러한 십자가 신앙과 은총론인 대속론에 의지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장기려 박사가 복음적인 성경공부 모임에 함석헌을 출석시키면서 함석헌에게 거듭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론을 환기시키고자 하였을 때, “나에겐 예수님 혼자만이 주님이시지요”라고 해서 장기려가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다는 예화가 있었듯이 함석헌 또한 예수님의 주 되심, 은총으로의 구원론을 어찌 철저히 거부하였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유영모는 철저하게 자속적 수행을 관철하고 대속론을 거부하였다고 한다.(진리의 사람 다석 유영모, 박영효) 그의 자속론은 유교적 인격함양론, 수신제가적인 전통에서 기인한 것인 듯하다. 비록 그의사상이 불교적인 절대공(空)의 세계, 일미(一味)의 지경, 천지인 합일(유목민적 신앙)로서 하나됨(歸一,一者)을 추구하였다고 하지만 그의 기독교 사상을 유교적 기독교라고 하는 이들의 지적에서도 증명이 되고있다.(이정배) 그런 수행의 최고 경지를 얼나로서 그리스도 의식을 가진 성인, 군자로 ‘거듭나는 것’으로이해해서 예수의 십자가의 희생양론을 인정치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문제와 맞닿은 부분으로서 유영모의 기독교 사상이 정통기독교 사상과 분리되는 가장 중요한 경계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다석일지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이 끝났다. “예수 그리스도이시여, 내가 걸어야 할 길이시여.” 이 일기글은 유영모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토로한 것으로 봐야 하는가? 철저히 수행적 롤모델로만 봐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