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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당 (2009년 4월호)
동서문명의 만남과 융합
다석연구의 부흥
이정배 교수가 “다석 르네상스 시대”라고 말한 것처럼 다석 사상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늘고 있다. 2006년 봄에 『다석강의』(현암사)가 출판된 이래 2008년 8월에 세계철학대회에서 20명의 학자들이 유영모·함석헌의 철학을 발표했다. 그 무렵 필자는 다석의 삶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다석 유영모』(현암사)를 2008년 7월에 냈고 다석의 제자 박영호가 다석의 삶과 사상을 쉽게 풀이한 『다석 류영모』(두레)를 2009년 2월에 냈다. 바로 이어서 이 교수가 무게 있는 학술연구서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을 펴냈다.
일본의 대표적인 철학연구기관인 교토포럼에서 발행하는 『공공적 양식인』에 다석의 사상이 소개됨으로써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서구철학에서는 ‘생각’이 이성의 추리와 사고(思考)를 뜻하는데 다석은 ‘생각’이 생명의 주체인 ‘나’의 행위일 뿐 아니라 ‘나’를 생성하고 전진향상시키는 생명행위라고 보았다. 더 나아가서 ‘생각’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영적 행위라고 하였다. 이성의 틀에 갇힌 서구철학이 출구를 찾지 못하는데 다석은 ‘생각’을 생명을 살리는 행위, 하나님과 소통하는 행위로 봄으로써 철학적 사유의 새 지평을 열고 있다. 일본의 철학자들이 이러한 다석의 철학에 주목하고 있다. 올해 7월과 12월에는 한국과 일본에서 한일철학대화마당을 열어서 다석의 사상을 집중적으로 논의할 예정이다. 올 3월 20일에는 씨 학회가 창립되어 한국의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유영모·함석헌 철학의 연구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교수의 다석 사상연구서가 나온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다석 사상연구를 위한 이정배 교수의 자격
다석 사상연구를 위한 특별한 자격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석의 사상을 연구하는데 두 가지 이유에서 자격이 필요하다. 첫째 다석의 신학과 철학이 창조적이면서 깊고 넓은 정신세계를 담고 있지만 다석이 남긴 글과 자료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둘째 다석의 삶과 정신이 매우 높고 깊기 때문에 그의 사상과 깨달음의 경지를 헤아리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다석 사상에 매력을 느끼고 연구하려고 하지만 쉽게 다석 연구에 뛰어들지 못한다.
이 점에서 이 교수는 선택받은 사람이다. 이 교수는 변선환의 애제자이다. 변선환이 다석의 제자인 김흥호를 감신대에 초빙하였다. 김흥호의 연구실과 이 교수의 연구실이 이웃하고 있어서 13-4년 동안 이 교수는 김흥호를 통해서 다석의 정신과 사상에 대한 가르침을 직접 받았다. 필자는 이것이 우연히 이루어진 게 아니라 변선환의 깊은 배려로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로써 이 교수는 누구보다 다석연구를 위한 준비를 갖춘 셈이다.
이 교수가 변선환으로부터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이어서 스위스에서 유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것도 다석 연구를 위한 준비였다고 생각된다. 그 동안 문화신학에 대한 연구에 앞장서면서, 국내에서는 최초로 다석사상을 연구한 박사제자를 길러냈다. 몇 해 전에는 김흥호와 함께 다석사상연구논문집을 펴내기도 했다.
책의 구성과 내용에 관하여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다석 신학의 본질과 구조를 다룬 4편의 논문이 실려 있고 2부는 다석 신학의 세계사적 의미와 보편적 적용에 관한 4편의 논문이 실려 있다. 3부에는 천부경과 동학에 비추어서 다석의 기독교 이해를 다룬 논문을 영역한 글이 실려 있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저자가 말하듯이 동도동기론의 관점에서 쓰여졌다. 한국의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서구의 전통과 주제를 서구의 관점에서 다룬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이다. 또한 동양의 문화전통과 주제를 서구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이른바 오리엔탈리즘과도 다르다. 이교수는 “한국을 위시한 동북아시아 문화전통을 서구적 잣대로서가 아니라 한국적·아시아적 시각에서 이해해야 하는 소위 동도동기론적 해석학”을 말한다.(94쪽) 이로써 학문의 주체적 자립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교수는 한국과 동아시아의 틀 안에 갇혀 있지 않다. 1부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서구의 학문이론과 관점과의 비판적 대화를 시도한다. 동도동기론의 관점을 견지하면서 서구신학과의 긴밀한 대화를 통해서 다석의 신학을 보다 풍성하고 정밀하게 다듬고 표현한다. 가다머의 지평융합이론, 판넨베르그의 아래로부터의 기독론, 서구의 에코페미니즘 등을 끌어들여 다석신학의 한국적 아시아적 정체성을 뚜렷이 확립하면서도 다석신학에 대한 논의와 이해를 더욱 풍성하게 하고 있다. 2부에서 “다석신학의 세계사적 의미와 보편적 쓰임”을 말하듯이, 저자는 다석신학의 논의를 세계적 지평에서 전개한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을 실증하는 것이다.
이 서평에서는 이 책에 실린 논문들 가운데 3개를 소개하고 평가함으로써 서평의 책임을 가름하고자 한다.
첫 번째 논문 “동서신학의 사조에서 본 다석의 얼 기독론”에서 저자는 판넨베르그의 미래적 기독론과 힉의 신중심주의적 기독론을 서구의 대표인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으로 규정하고 이와 관련해서 다석의 얼 기독론을 설명하고 있다. 존 힉의 기독론은 판넨베르그의 기독론을 좀더 철저화하고 발전시킨 형태인데 저자는 힉이 “궁극적 신비(실재)와 종교체험의 다원성(문화적 해석의 상대성)을 분리”하는 것을 양자의 상호연관성을 근간으로 하는 동양종교의 관점에서 비판한다. 더 나아가 “신중심적 기독론의 결정적 문제점은…기독교 안에서 이미 그리스도로 고백된 예수가 아시아적 심성 속에서는 어떻게 해석되고 언표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46쪽)
같은 논문에서 저자는 교토학파의 선불교적 그리스도 이해를 다룬다. 선불교철학의 즉비(卽非) 논리에 따르면 서로 다른 개별자와 초개별자, 현상과 본체가 ‘하나’이다. 본래의 자기는 “주객도식이 난파된 공(空)으로서의 근원저(根源底)에로의 자기초월”을 뜻한다.(49쪽) 선불교 신학자들은 “절대 무(無)를 근간으로…성육신, 십자가…부활을 해석”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보편성 속에 해소시킴으로써, “십자가 사건 속에 포함된 당파적 연대성으로서의 참된 종교적 관용성을 숙지하지 못한 것이다.”(57쪽)
저자에 따르면 일본 교토학파의 그리스도 이해가 선불교에 근거를 둔 것과는 달리 유영모는 불교적 토대에 유교적 내용으로 살을 붙임으로써 기독교 이해를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들었다.(63쪽) 유영모는 “불교의 무아(無我), 곧 인간의 자기의식을 철저히 폐기시키는 자기부정의 원리 속에 유교적 살신성인의 실천원리를 채워 넣음으로써 동양적 정신을 지평융합”시킨다.(65쪽)
저자는 유영모가 “몸으로서의 예수를 철저하게 비신성화시켰다.”는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의 철저화된 형태”라고 생각한다.(73쪽) “예수의 얼을 그리스도, 곧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리얼리티로 인정하는 점에서 유영모의 기독론은 하느님과 예수의 존재론적 차이에 관심을 집중하는 아리우스주의의 신중심주의적 입장과도 분명히 구별된다.”(75쪽)
저자는 신중심주의를 표방하는 서구 종교다원주의신학과 유영모의 기독론의 차이를 밝힌다. 서구 종교다원주의신학은 “하느님과 공(空), 예수 그리스도와 부처 또는 공자…간의 유비적 관계에 주목”한다. 이에 반해 유영모의 얼 기독론은 “‘얼의 몸 입음’을 모든 사람의 공통된 일로 이해하면서, 성육신의 의미지평을 더욱 급진적으로, 더욱 보편적으로 넓혀 주었다.”(79쪽) 또한 선불교신학자들은 십자가 사건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또는 무아란 이름 하에 탈역사화시켜…그 사건이 생성된 역사적 원의미를 탈각시킨 한계를 드러낸다.”(85쪽) 그러나 유영모는 예수의 십자가를 “몸의 나를 버리고 얼의 나로 솟아오르기 위해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친 사건으로 이해한다.”(86쪽) 유영모의 기독론은 서구의 종교다원주의신학자들에 비해서 성육신의 의미지평을 더욱 보편적으로 확대하고 일본의 선불교신학자들과는 달리 예수사건의 역사성을 살려내고 있다.
저자는 “다석 유영모가 본 한글 속의 기독교”에서 동도동기론의 해석학적 관점을 가지고 다석의 한글 신학을 밝히고 있다. 다석에 따르면 언어는 “모두 하느님이 주신 것이며,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글을 통하여 하느님을 찾아 나설 수 있다.”(97쪽) 다석은 겨레의 얼이 담긴 한글 속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보고 한글로 하느님 말씀을 풀어내고자 노력하였다. 다석은 하느님의 말씀을 겨레의 언어인 한글로 이해하여 자기 말로 바꾸는 것을 성육신이라고 불렀다.(97쪽)
유영모에 따르면 모음은 “우주의 아버지이며 어머니이신 하느님이 인류를 부르는” ‘계소리’이고 자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아는 인간이 자신의 몸을 들여 하늘의 소리에 응답하여 하늘에 이르는 길”이고 ‘제소리’이다.(110쪽) 다석은 10글자의 모음을 “ㅏㅑ 아해들아 ㅓㅕ 어서 ㅗㅛ와요, ㅜㅠ우흐(위)로 ㅡㅣ세상을 꿰뚫고 곧이 곧장.”으로 풀이한다. 모음은 이 세상을 꿰뚫고 하느님 계신 곳으로 인간을 부르고 계신 하느님의 사랑을 계시하는 언어이다.(111쪽)
모음의 기본은 천지인 삼재를 나타내는 ·ㅡㅣ이다. ㅡ는 세상이며 ㅣ는 세상을 꿰뚫고 곧장 올라가는 ‘고디 신’이고 ·는 태극의 신학적 풀이로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평등, 박애의 상징이다. 다석은 천지인 삼재의 순서를 바꾸어서 ‘으이아’(ㅡ ㅣ·)로 부른다. ‘으이아’는 우주의 원음으로서 세상의 탐진치를 끊고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인간의 힘씀을 나타낸다. ㅡ ㅣ·를 겹쳐놓으면 십자가가 되고 십자가는 인간의 마음과 세상을 한 점으로 찍고 세상 죄의 수평선을 뚫고 하느님께 올라가는 가온찍기(點心)가 이루어지는 자리이다.(111-2쪽)
다석은 자음을 변형시키거나 의미를 부여해서 자음이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구체적인 길을 제시한다.”고 보았다.(113쪽) 또한 ㄱㅋㅎ, ㄴㄷㅌ, ㅁㅂㅍ, ㅅㅈㅊ, ㅇㆆㅎ이 삼단계의 변증법적 발전을 보이고 있는 것은 한국적인 천지인 삼재관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다석은 ㅁㅂㅍ이 물불풀로서 땅에서 물이 올라오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이 땅 위에 풀(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114-5쪽) 다석의 한글이해는 단순한 말놀이나 사변적인 유희가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깨닫고 체득하는 행위였다. 그의 한글이해는 “몸으로 캐내는 생각”이다.(116쪽)
그러면 그의 한글이해와 그리스도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저자에 따르면 다석과 김흥호에게 그리스도는 “시간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참나를 만나는 일, 몸 속에서 정신이 터져 나온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의 자리”이며, “계소리와 하나 되는 제소리를 내게 하며, 없이 계신 그분에게로…우리를 이끄시는 분”이다.(118쪽)
여기서 소개할 셋째 글은 “천부경을 통해서 본 동학과 다석의 기독교 이해”이다. 이 글은 부제 “기독교의 토착화/세계화를 위한 수운과 다석의 한 접점 모색”이 시사하듯이 천부경이라는 한국고유의 종교철학사상의 빛에서 동학과 다석사상의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의미를 밝히려 한다.
저자는 천부경의 삼재사상의 틀에서 동학과 다석사상의 상관성을 드러내려 한다. 수운은 『천주실의』의 자극 내지 도움으로 민족 고유한 『천부경』의 하느님을 재발견하였다. 다석도 유불선을 회통시키며 『천부경』의 삼재론을 민족문화의 원형으로 보았다.
저자는 먼저 동학과 다석사상의 근본토대로서 삼재론을 『천부경』을 중심으로 논의한다. 81자로 이루어진 『천부경』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하나(一)로부터 천지인 삼극(三極)이 갈라져 나오지만 그 근본은 소진되지 않고 영원함을 말한다.”(134쪽) 또 『천부경』은 대우주인 하나와 소우주인 인간의 일치를 말한다. “우주생성의 근원인 하나가 바로 참나이기에 참나를 찾는 일이 바로 하나(一)로 돌아가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이다.(136쪽) ‘내 마음이 곧 네 마음’(吾心卽汝心)이라는 수운의 말과 ‘하느님은 종당에 참나’라는 다석의 말은 천부경의 내용과 통한다고 저자는 말한다.(136쪽) 저자는 서구 기독교의 충격으로 생겨난 동학은 “기독교 토착화의 맹아를 지녔다.”고 보았다.(136쪽)
저자에 따르면 다석은 천부경의 ‘한’ 사상에 근거해서 토착적으로 예수를 이해한다. 예수는 “우주의 절대 생명인 하나(一)가 자신을 아들 삼은 것을 느끼고 그 ‘하나’의 아들 노릇을 하려고 자신의 바탈을 불사른 존재”이다.(143쪽) 예수만이 아니라 누구나 자신이 ‘하나’의 아들임을 깨닫고 “절대 생명을 살아낼 수 있다면 독생자가 될 수 있다.”(143쪽)
다석의 얼 기독론은 성령과 인간을 직결시킴으로써 종래의 배타적, 타력적 대속(代贖)사상을 수정한다. 다석은 “동양의 수행적 전통에서 예수의 십자가를 자속(自贖)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146-7쪽) 예수뿐 아니라 누구나 다 자속의 길을 가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도 예수 자신에게 있어서 자속의 길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자속은 우리에게 자속의 길을 요구함으로써 오히려 대속으로 역할을 한다.(147쪽)
저자는 토착(土着)과 토발(土發)을 구별한다. 토착은 “유입된 서구사조 자체를 완제품으로 여겨 그것을 우리 토양에 맞게 표현한, 일명 뿌리내리기”를 일컫는다. 이에 반해 토발은 “밖에서부터의 자극을 통해 자생적 토양에서 그것을 능가하는 보편적 담론 생산을 이름”한다.(158쪽) 저자는 동학과 다석사상을 토발된 사상으로서 매우 유사한 것으로 파악한다. “유불선을 운이 다한 종교로, 서구 천주학을 이치에 맞지 않는 종교로 평가하면서 그의 극복을 잊혀젼 신, 곧 천부경의 귀일사상 속에서 찾았던 동학과 유불선을 배경으로 기독교를 탈서구적, 비정통적으로 이해한 다석 사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158쪽)
저자는 동학의 ‘하늘로써 하늘을 먹임’(以天食天)과 다석의 보편적 대속론이 일치한다고 보았다. 다석은 “먹고 먹히는 세상사가 대속 아닌 것이 없다”고 했다.(163쪽) 다석의 보편적 대속사상은 “이천식천의 빛에서…인간과 기독교라는 울타리를 넘어 우주의 비인격적 생명마저 에두르는 신적 관계성의 새 차원을 들어내는 기독교 생태담론이 될 수 있다.”(164쪽)
다석은 기독교를 수행적 종교로 재해석한다. 그에게 십자가는 “자신의 밑둥(속알)에서 하느님을 찾고 참나로 돌아가기 위한 수행적 방편일 뿐이다.”(166쪽)
문제와 평가
이정배 교수는 이 책에서 서구의 신학과 철학, 일본 교토학파의 선불교 신학을 끌어들이고 천부경을 바탕으로 동학과의 비교연구를 통해서 다석신학의 한국적 의미와 세계적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이런 폭넓은 비교연구는 다석사상의 창조적 특성과 사상적 보편성을 밝혀준다. 이 교수의 이러한 다석사상연구는 한국의 학자들뿐 아니라 서구와 일본의 학자들이 다석사상을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중요한 안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동서양의 신학과 철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통찰은 가지고 다석사상을 깊고 총체적으로 파악한 진지한 연구서이다. 이 교수의 다석연구에 경의와 공감을 표하면서 다석사상연구자로서 필자가 이 책을 읽으며 생겨난 물음과 생각을 몇 가지 덧붙이려고 한다.
1) 다석의 기독론을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으로 규정한 것은 다석이 몸을 가진 예수의 신성을 부정했다는 점에서 타당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내려와 하늘로 가는 길을 연 이”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위로부터의 기독론’으로 볼 여지가 있다. ‘아래’와 ‘위’를 구별하는 서구신학의 관점 자체가 다석의 그리스도 이해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2) 다석의 속죄론을 자속으로만 표현할 수 있을까? 다석 자신도 대속이라는 말을 쓴다. 주체의 자리에서 보면 자속이고 전체의 자리에서 보면 대속이 아닌가?
3) 동학과 다석사상의 유사성을 강조하는데 차이도 있다고 본다. 다석사상에서는 ‘생각’이 중심에 있는데 동학에서는 주문과 부적의 사용에서 보듯이 비합리적 성격이 보인다. 다석은 자아와 세상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말했는데 동학은 정치현실에 휩쓸리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이천식천과 대속이 같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천식천은 먹고 먹히는 것을 전체 생명의 자리에서 이해한 것이라면 대속은 자기희생을 통해서 주체와 주체의 죄와 더러움을 씻어주는 행위로서 차이가 느껴진다.
다석사상은 동서문명의 만남과 융합의 과정에서 생성된 한국적이고 세계적인 사상이며, 심오할 뿐 아니라 삶과 실천에서 우러나오는 힘과 지혜를 지니고 있다. 다석사상연구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이 교수는 몇 안 되는 진지하고 열정적인 다석연구자의 한 사람이다. 이 교수가 다석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기를 기대하고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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