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02

0729 Hojae Lee [근본주의적 맹신(盲信), 현실주의적 과신(過信) , 혁신주의적 정신(正信)]

Hojae Lee
Hojae Lee
29 July at 06:23 ·



[근본주의적 맹신(盲信), 현실주의적 과신(過信) , 혁신주의적 정신(正信)]

1. 근본주의와 근본주의자는 어느 종파종교에도 있다. 또한 현실주의와 현실주의자도 어느 종파종교에도 있다. 그리고 늘 혁신주의와 혁신주의자도 있다. 근본주의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형태로 드러나며, 현실주의는 타협적이며 세속영합적인 형태로 나타나며, 혁신주의는 포월적이며 자기희생적으로 나타난다. 근본주의는 조직의 윗자리에 있지만 썩어버리며, 현실주의는 인기영합적이기에 주류를 이루지만 열매가 거의 없고, 혁신주의는 창조적 소수로서 시대를 이끌며 열매를 맺는다. 이를 근본주의적 맹신, 현실주의적 과신, 혁신주의적 정신이라 불러본다.

2. 근본주의는 1) 늘 '나만이 진리다'라는 독단에 빠져 배타적인 주장을 한다. 2) 또한 내가 속한 공동체만이 타 공동체보다 우월하다고 맹신한다. 3) 그리고 다른 세상은 '덜 떨어진 그 무엇'이라고 과소평가한다.
예를 들면 근본주의는 전통에뿌리를 박고 자신이 '정통'임을 내세운다.

주역이 동아시아의 사유를 지배할 때 비행기가 중국에 소개되었을 때 그들은 주역에 비행가 어디있느냐고 찾느라 소동을 빚었다. 예수가 탄생했을 때 어디에서 탄생했냐고 타냑에서 그 마을을 찾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기독교에서 새로운 성경해석을 한 개인이나 종교단체가 나타나면 '서구신학'을 표준삼아 '이단'을 정죄하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늘 강조하지만 거시적 역사흐름에서 불교에서 새로움을 볼 수 없는 것은 중국 불교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고, 천주교는 로마교황청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유교는 공맹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개신교는 바울서신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뿌리내린 그 곳의 변화'가 없이는 주체적으로 현실과 타협도 못하고 새로운 혁신도 못하는 상태에 빠진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지금 한국 종교의 상태가 바로 '이 꼴'이다. 
식민사관과 종교제국주의에 물들어 있기에 아무튼 혁신주의과 현실주의는 고사하고 근본주의만 판 치는 곳이 한국 종교의 실태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래샴의 법칙이 작동하고 있다. 아닌가? 양심에 물어보시라.


3. 우리 페북은 요즘 주로 기독교에 대한 얘기를 중심으로 전개하였기에 그 맥락에 따라 전개해 보자. 66권의 성경텍스트안에 예수 사후에 '정경안에 정경'역할을 한 것은 다음과 같다고 요약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학을 하기 위해 효과적인 신약성서 정경은 마 16, 17-19와 목회서신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단순화가 아니다. 개신교 신학을 위한 정경은 분명히 (초기의) 바울의 편지들이었다. (중략) 반면에 개신교주의는 사도행전에서 그 인증을 구한다. 또한 19세기의 진보적 개신교주의를 위한 정경은 (소위) 역사적 예수였으며,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후 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권위의 촛점은 '케리그마'가 되었던 반면에 보다 최근에는 다른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태도를 '사도적 증거'와 관련해서 분명하게 하려도 노력하였다.
(제임스 던. 김득중, 이광훈 편역, "신약성서의 통일성과 다양성". 1993. 580-581)이다.

근본주의자들은 그 뿌리를 텍스트와 종교조직의 발상지의 발언이 곧 자신들의 신앙의 전통이자 정통이고 신앙의 촛점이다. 그 말만이 자기세계이며, 그 세계가 언어로 표현되니 '앵무새소리'만 내고 '자기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일 수도 있지만 '진리의 수호자, 파수꾼'으로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조차 못하는 상태에 빠져버린다.

4, 자신의 신앙의 뿌리를 역추적 보라. 언제 '주체적 나'와 자신이 신앙하는 '경전'과 자신이 신앙하는 '궁극적 실재'와 만난 적이 있는지를 말이다. '주체적 나'가 없는 자의 신앙은 구름과 같이 바람에 흩날리는 부평초의 믿음이며, '주체적 나'와 '경전'과 만나지 못한 자는 맥락도 없는 특정한 성구를 암송하며 남을 후리며 천국과 해탈의 문을 막고 시공우주에서 종교장사를 하기 마련이다. 또한 '주체적 나'와 '경전'과 '궁극적 실재'가 만나는 체험을 하지 못한 자는 세속적인 종교권위로 거룩한 '직업종교인'의 분장을 하고 그 신앙대상의 지상 대리인으로 '정통과 전통'을 강조하며 한평생 신도를 '죄인과 중생'으로 부려먹는다. 거듭난 형제자매라면 건물교회에 있을 리가 없고, 깨달은 보살이라면 건물사찰에 있을 까닭이 없다. 건물성전은 텅텅비고 보살과 형제자매는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그들의 '자비와 사랑'을 나누고 있을 것이다. 가야할 곳은 건물성전이 아니다.

5. 신앙인, 글쓴이가 창안한 영성생활인靈聖生活人은 늘 혁신주의의 입장에 서야한다. 하나님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즉 '영원한 현재'에 존재하기에 영성생활인은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냐 한다. 영원에서 영원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기독교라는 제도종교, 특정 교단과 교파에 구원이 있다는 것은 중세시기의 믿음이다. 지구촌 시대가 합류하고 모든 종교정보가 공개되어 있는 지금! 우리의 믿음은 빛의 속도보다 빠른 '바른 생각의 속도'로 영원한 하나님의 처소를 향하여야 한다.

6. 종의 신앙 즉 노예신앙에서 벗어나라. 주체적 나로서 '예수를 참으로 믿는 이에게 주는 예수의 복음'이다. '예수가 주"요, '예수밖에 구원이 없고',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근본주의는 정통과 전통을 근거로 한다)는 아래 성구를 증명해 보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요한복음 14장 12)

7. 밥 한끼 먹으면서 '작은 행복'을 느끼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도 있지만,
역사의 광장에서 사회구조적 문제로 '항거조차 못하는 사회적 약자'에게로 달려가자.
국제관계의 엄연한 힘의 질서에서 '강함에도 아직도 식민사관에 빠진' 우리의 모습을 직시하고
'경제한일전'에 온 국민이 동참하여 승리의 나팔을 울리자. 
그 보다 더욱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혁신주의로 거듭난 뜻 있는 이들은 연대하여 새 문명의 사유체계를 우리가 만들어 내자! 꿈을 꾸자, 엄청난 큰 꿈을 꾸자.




89Yuik Kim, Sunghwan Jo and 87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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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 참 신앙인은 예수의 진리의 복음을 어떤 종교보다 더 생명을 걸고 삶에서 실천하면
세상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영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경험을 하게 되면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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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봉석 어떻게 될 것인가? 미래가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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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봉석 replied · 2 repl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