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09

“개인의 하느님에서 공동체의 하느님으로”...곽건용



“개인의 하느님에서 공동체의 하느님으로”...곽건용




“개인의 하느님에서 공동체의 하느님으로”...곽건용
우리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그가 내 이웃? 내가 그의 이웃?”
2019-03-08

[삶과 영성]

“그가 내 이웃? 내가 그의 이웃?”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12번째 강론문

March 07, 2019

지난 주일(3/3) 강론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열두 번째이자 '개인의 하느님에서 공동체의 하느님으로' 첫 번째 설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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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3일 / 주현절 후 여덟째 주일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12

“그가 내 이웃? 내가 그의 이웃?” (누가 17:20-21)

설교: 곽건용 목사

20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을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습니다. 21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보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습니다."(누가 17:20-21)

해묵은 논쟁,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오늘은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열두 번째이고 다섯 번째 소주제 ‘개인의 하느님에서 공동체의 하느님으로’ 첫 번째 설교가 되겠습니다. ‘개인의 하느님’이냐 ‘공동체의 하느님’이냐 하는 주제는 한국교회에서 쉰내가 날 정도로 오래된 논쟁의 주제입니다. 사실 개인의 하느님, 공동체의 하느님이란 말보다는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이란 말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 바로 그 주제입니다. 이 논쟁 역시 기독교인이 술 담배를 해도 되느냐 아니냐를 두고 벌여온 논쟁처럼 제가 어렸을 때부터니까 거의 50년 동안 벌어지고 있는 고리타분한 논쟁입니다. 이게 과연 그 정도로 오래 논쟁할만한 주제가 되는지는 의문입니다.

전에는 개인구원 아니면 사회구원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대개의 경우 양측 모두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논쟁은 합의에 이르지 않고 끝나곤 했습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개인구원을 택했고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사회구원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논쟁이 벌어지면(이 주제로 논쟁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졌지만) 결론은 ‘둘 다 있어야 한다.’로 내려지곤 합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이라도 사회구원을 전혀 무시하지는 않으며 진보적인 기독교인이라도 개인구원이 불필요하다고 도외시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둘 다 필요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뭐 하러 논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둘 다 필요하다면 하나마나한 논쟁 아니냐는 겁니다.

저도 이 논쟁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이유가 다릅니다.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보수기독교인이나 진보기독교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둘 다 필요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구원’(salvation)에 대한 양쪽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논쟁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개인구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은 ‘죽은 다음에 사람이 염원하는 모든 것이 보장된 저 세상에 가서 영원히 사는 것’을 가리키는 반면 사회구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은 ‘살아 있는 동안 이 세상에서 충만한 생명의 삶을 누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양편 모두 사람마다 구원을 바라보는 시각에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개인구원파는 ‘이 세상’에서의 삶보다 ‘저 세상’에서의 삶에 더 중점을 두는 반면 사회구원파는 반대로 ‘저 세상’에서의 삶보다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더 중요시한다는 겁니다.

이렇듯 구원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 거기 도달하는 길이 같은지 다른지를 따지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예컨대 한 사람은 부산을 가려고 또 한 사람은 광주를 가려고 하는데 서로 자기가 탈 기차를 타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게 말이 됩니까.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를 두고 벌여온 논쟁은 이처럼 서로 다른 목적지로 가려고 하면서 자기가 가는 방향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질문을 이렇게 바꿔야 합니다. 개인구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거기 이르기 위해 자기들이 택한 방법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져야 하고 마찬가지로 사회구원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거기 다다르기 위해 스스로 택한 길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곧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은 동일한 차원의 얘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걸 동일한 차원으로 간주하고 둘 중 하나를 택하자고 논쟁을 해왔으니 이 논쟁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이 논쟁이 별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리즈 설교를 하는데 동기를 제공한 호세 마리아 마르도네스는 둘을 같은 차원으로 간주하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그와 생각이 달라서 이 주제에 관해서는 그의 책에서 크게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장이 바로 여기입니다. 그래서 이 주제는 건너뛸까도 생각해봤지만 돌아보니 제가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에 대해서 지금껏 한 번도 제대로 설교하지 않았기에 이번 기회에 비록 시대에 뒤떨어진 주제이긴 했지만 한 번쯤 제대로 다뤄봐야겠다 싶어서 선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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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국가’라고?

‘사람은 섬으로 살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무인도에 던져진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이상, 2차 대전이 끝난 줄도 모르고 필리핀 정글 속에서 수십 년을 살았던 사람이 아닌 다음에는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어떤 모양으로든 ‘더불어’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현대사회에서 한 개인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스스로 삶의 모든 일들을 혼자 해결하면서 살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 개인은 현대사회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난 주간에 베트남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이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끝났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이 회담의 성공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목소리를 높였는데 아쉽게도 만족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습니다. 그 때문에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낙망한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그럴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실망스러운 결과인 것 맞지만 이런 중차대한 일이 어떻게 첫 술에 배부르겠습니까. 앞으로 갈 길이 머니 기운 내서 다시 시작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정상회담 보도를 보면서 상당히 불만스런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고국 언론들이 ‘정상국가’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보수언론이든 진보언론이든 차별 없이 북한이 정상국가가 되어야 한다느니 정상국가로 이끌어야 한다느니 하는 식으로 얘기하는 게 저는 매우 불편했고 화가 나기까지 했습니다. 이번 회담이 북한이 ‘정상국가’로 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동안 북한은 ‘비정상국가’였다는 말입니까? 어엿이 유엔에 가입한 나라가 정상국가가 아니라면 어느 나라가 정상국가란 말입니까?

저는 그들이 사용하는 ‘정상국가’라는 말은 미국과 유럽 중심의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통합되고 흡수되어 있는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니까 북한이 정상국가가 아니란 말은 그 체제에 통합되어 있지 않은 나라라는 뜻이겠지요. 1980년대 말이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동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급속하게 미국과 유럽 중심의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됐습니다. 러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리고 중국조차 이른바 ‘개방’이란 이름으로 이 체제와 교류하면서 서서히 통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체제는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지난 수십 년 동안 강도 높은 경제제재와 압박을 통해서 북한을 자본주의 체제에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그들 표현을 따르면 ‘정상국가’를 만들려 했던 겁니다. 게다가 미국은 다른 한편으로는 1990년대 이후 줄곧 북한을 폭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 동안 북폭 위기도 여러 번 겪었습니다.

이런 변화에 대해 북한은 어떻게 대처했나요. 북한은 구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지고 연방 해체되고 동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독립하면서 급속히 자본주의 체제에 통합되고 중국마저 개방의 길을 가게 되자 그만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미국은 경제제재 이외에도 무력을 써서라도 북한을 굴복시키고 자기가 맹주 자리에 앉아 있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흡수하려 하자 생존을 위해 핵개발을 했던 겁니다.

하지만 북한도 언제까지 고립된 채 살아갈 수 없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와 무관하게 고립되어 지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북한은 자주를 외치지만 세계체제와는 무관하게 완전히 자주적이고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국가로 남아 있을 수 없음을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자주성을 유지하며 서서히 개방하려 했습니다. 결국 북한도 개인이 섬으로는 살지 못하는 것처럼 국가도 그렇다는 것을 인정했던 겁니다.

‘개인’의 등장

‘개인’에 대해서 얘기하다가, 그리고 지난 주간에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이 열렸기에 그 얘길 하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개인의 독자성과 독립성과 자주성을 본래 주어진 걸로 당연하게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근대적인 현상입니다. 곧 근대 이전에는 ‘개인’이 강조되거나 ‘개인’의 가치나 중요성이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근대 이전에는 개인보다는 집단, 곧 공동체가 더 중시됐습니다. 아니, 공동체와는 무관한 개인의 가치는 인정받지 못했다고 해야 맞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인류는 언제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왔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사람들이 벌거벗고 돌도끼 들고 채집하고 사냥하던 시대에 사람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힘이 약했기 때문에 무리를 이루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했습니다. 그 옛날뿐 아니라 얼마 전까지만 사람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은 공동체적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시골은 말할 것도 없었고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도 같은 아파트 사람끼리도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사람이 죽어도 모른다지 않습니까.

개인이 강조되기 시작한 때는 근대에 들어와서이고 더 정확히 말하면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부터입니다. 신앙은 단순히 신앙적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도 일종의 사회현상이고 문화현상이므로 사회의 변화와 무관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가르침 역시 시대정신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사회학의 조상들 중에 막스 베버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정말 다방면에 걸쳐서 엄청난 연구를 수행한 르네상스적인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사회학자로서 당시의 사회현상을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유대교 역사까지도 연구한 학자입니다. 그의 주요 저서들 중에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개신교 윤리, 특히 깔뱅주의(칼빈주의) 개신교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사이에는 뗄 수 없이 깊은 관련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책인데 대략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베버는 유럽에서 개신교 특히 예정조화설을 믿는 깔뱅주의 개혁교회가 지배적인 지역에서 자본주의가 일찍 발달했다는 데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뭔지를 사회학적으로 연구한 책이 바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입니다. 깰뱅주의 개혁교회 교인들이 믿는 예정조화설은 사람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느님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정해져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구원받기로 정해져 있는 사람은 아무리 악하게 살아도 결국에는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반면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리 잘 믿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개개인은 자기가 구원을 받기로 되어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은 알 수 없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구원받도록 선택됐음을 확신하기 위해 열심히, 성실하게 일을 한다는 겁니다. 영어로 ‘calling’은 하느님의 부름을 뜻하기도 하고 직업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구원에로의) 부름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하기 위해 사람은 ‘직업’으로서의 calling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고 이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이 지역에서 일찍 자본주의가 발단하게 됐다는 겁니다. 지금 이런 주장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베버의 연구는 사회학 초기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는 베버의 주장의 다른 면을 봅니다. 예정조화설을 믿는 사람들의 성실성 덕분에 자본주의가 일찍 발달했다고는 저도 믿지 않지만 그의 논의에서 드러난 또 다른 사실은 당시 유럽사회에서 신앙은 이미 공동체의 일이 아니라 개인의 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입니다. 과거에는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현상이던 신앙이 베버의 연구 당시에는 개개인 각자의 일이 되어버렸던 겁니다.

어떻게 이리 야속할 수 있나…….

앞에서도 말씀했지만 저는 개인구원이니 사회구원이니 하는 말들이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저는 기독교인이 된 이후 상당히 오랫동안 개인구원주의자였습니다. 물론 이는 어렸을 때 교회에서 받은 주입된 교육 탓이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성서를 읽고 연구하다가 저로서는 매우 놀라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분명 오랫동안 그 구절을 읽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던 점을 발견한 겁니다. 제게는 이 발견이 개인구원이니 사회구원이니 하는 논쟁과 무관하지 않으면서 그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시각을 갖게 해줬습니다. 그건 이런 겁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유랑에 종지부를 찍고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가 마지막으로 백성들에게 연설한 내용을 전합니다. 이미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모세는 비스가 산정에 올라가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거기서 죽습니다. 성서는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모세는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하느님의 백성을 거기서 이끌어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는 사명을 야훼 하느님에게 받았습니다. 그 일은 그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그는 자기가 도망쳤던 바로 그 땅 이집트로 돌아가서 파라오와 실랑이를 벌인 끝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광야 길이 생각보다 훨씬 길어졌습니다. 직선거리로는 불과 일주일이면 갈 길을 40년 동안 유랑해야 했습니다. 그 동안 백성들을 그에게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이집트에 있었더라면 고기 가마 옆에서 배불리 먹고 있었을 텐데 공연히 자기들을 이끌고 나와서 생고생을 시킨다고 말입니다. 세상에 이런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노예들에게 고기를 배불리 먹인 노예주가 어디 있습니까. 이들은 말도 안 되는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모세에게 불평을 늘어놓은 겁니다. 오죽하면 모세가 하느님에게 “이 자들을 제가 낳았습니까!”라고 하소연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좌우간 우여곡절 끝에 이들은 광야 생활을 마치고 이제 막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물론 이들도 이유는 잘 몰랐겠지만 자기들을 40년 동안 이끈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함을 알았을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백성들은 모세가 자기들과 함께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데 대해서 일언반구 말하지 않습니다. 마치 그런 일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들은 모세에게 아무 관심도 없어 보입니다. 그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자기들이 오랜 유랑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저는 이 점이 궁금하고 의아했습니다. 왜 이럴까? 왜 이들은 자기들을 40년 동안이나 인도해온 자기들의 지도자가 정작 그렇게도 그리던 약속의 땅에 함께 들어가지 못하는 데 대해 한 마디의 아쉬움도 표현하지 않을까? 왜 이들은 모세에게 이토록 무관심할까 말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자기들밖에 모를까. 자기들만 행복하고 자기 욕구만 채워지면 남은 어찌 되든 상관없나…….

개인이 구원받는지 사회가 구원받는지를 따지기 전에, 어느 편이 옳은지 판결하기 전에 먼저 적어도 한 번쯤은 ‘저 사람의 눈으로 보면 어떨까?’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저 매사를 내 눈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남의 눈으로 보면 어떨지, 이 일이 남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만일 내가 저 사람이라면 이 일을 어떻게 볼지를 생각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겁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에 40년 광야를 헤매면서 가나안에 들어가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우고 훈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광야 유랑 기간을 당신 백성을 훈련하는 기간으로 삼았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결과가 좋았느냐 하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들은 합격점을 받지 못했습니다. 자기들과 같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에 대한 이들의 태도에서 저는 그걸 봅니다.

저는 그 동안 숱하게 이 구절을 읽었는데 이런 점을 깨닫지 못하다가 어느 날 문득 이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모세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철저한 무관심에서 신앙은 나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고 행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눈으로도 세상을 보고 판단하고 행할 줄 아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민하게 타인의 눈으로 삶을 보셨던 분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에게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하는 문제는 논쟁의 주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개인이 구원의 대상이냐 사회(공동체)가 구원의 대상이냐 하는 문제는 눈곱만큼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개인과 공동체가 문제였다면 예수님에게는 ‘누가 하느님과 손을 잡고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었습니다. 곧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동반자로서의 개인과 공동체가 문제였다는 겁니다. 그 얘기는 다음 주일에 하도록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


*곽건용 목사

곽건용 (kwakgunyong)목사는 서울에서 태어나 중학생 시절에 기독교인이 됐고 고등학생 시절부터 서서히 목회자의 길을 가리라고 마음을 정하고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결정적으로 마음을 굳혀 신학교에 진학하면서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이후에 곽 목사는 몇 차례 위기 겸 기회를 맞았다. 곽 목사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다니던 교회가 속해 있던 교단의 신학대학원에 별 고민 없이 진학했다가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그 교단의 신학이 맞지 않아 고민하다가 곧 휴학을 하고 혼자 신학서적을 읽으며 신학과 신앙, 그리고 기독교 사회윤리에 대해서 공부하였다.

3년 간 서울 용산의 한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일하며 독학하던 곽 목사는 1985년 한국기독교장로회로 소속을 옮기고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새로운 환경에서 신학공부와 목회를 재개했다. 곽 목사는 이 시점에서 자신의 신학과 목회에 있어서 중요한 영향을 미친 스승들을 만나게 된다. 당시 한신대 교수였던 고 안병무 박사와 향린교회 담임목사인 홍근수 목사가 그분들이다. 곽 목사는 한국의 대표적인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로부터 아래로부터 성서를 읽는 시각과 서재가 아닌 삶의 현장에서 신학하는 방법을 배웠고, 홍근수 목사로부터 해방의 복음에 충실한 설교와 교인들과 더불어 목회하는 민주적인 목회정신을 배웠다. 곽 목사는 서울 향린교회에서 1985년부터 1993년까지 전도사와 부목사로 목회하며 사회선교, 특히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선교를 중심으로 다양한 목회경험을 쌓았다.

곽 목사는 1993년 말에 나성 선한사마리아인교회(현 나성 향린교회)의 청빙을 받아 미국에 온 이후 현재까지 같은 교회에서 인간 해방의 복음 선포,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선교, 모든 차별을 거부하는 민주적인 교회, 다문화 목회, 종교간의 대화를 추구하는 목회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클레어몬트 대학원(Claremont Graduate University) 박사과정에서 구약신학을 공부를 하며 학문적 성과를 목회와 삶에서 활용하는 목회를 추구하고 있다.

곽 목사는 1982년에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고 1988년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가족으로 소셜워커로 일하는 아내 (윤)경혜와 두 아들 인걸(Jason), 인선(Justin)이 있다. 저서로 설교집 『길은 끝나지 않았다』(한울출판사, 1993년)가 있다.


LA 향린교회 주소:

540 S Commonwealth Ave, Los Angeles, CA 9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