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0

학교서 농사짓고 명상하는 학생·교수들···‘과도한 합리성’서 탈출할 대안을 일구다 - 경향신문



[세계 지성과의 대화 ⑤]학교서 농사짓고 명상하는 학생·교수들···‘과도한 합리성’서 탈출할 대안을 일구다 - 경향신문



세계 지성과의 대화 ⑤
학교서 농사짓고 명상하는 학생·교수들···‘과도한 합리성’서 탈출할 대안을 일구다


영국 데번주 다팅턴에 있는 슈마허대학은 규모는 작지만 특별한 커리큘럼, 뛰어난 교수진 등으로 최근 주목받고 있는 ‘순환경제’ ‘로컬경제’ ‘생태경제’ ‘가이아경제’ 등 새로운 경제담론들의 중심에 서 있다. 사진은 역사를 자랑하듯 고색창연한 슈마허대학의 강의동이다. ⓒ안희경
안희경 | 재미 저널리스트2019.03.06 22:17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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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경의 ‘세계 지성과의 대화’ - ‘가이아 이론의 산실’ 슈마허대학보살핌의 경제로

“여러분, 취직에 매달리지 마세요. 삶의 의미를 채워낼 수 있는 당신의 일을 창조합시다. 그대들 앞에 놓일 대부분의 일자리는 정신을 채워주지 못할 것이며, 이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지도, 지구의 환경을 지속 가능하도록 지켜내지도 못할 겁니다. 단지 청구서를 납부할 수 있는 돈을 그대 손에 쥐여줄 뿐입니다. 우리는 온갖 청구서를 납부하러 이 땅에 오지 않았습니다. 보다 위대한 목표를 향해 그 일을 합시다. 우리의 목표는 이 지구를 보살피는 인간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영국 데번주 다팅턴의 슈마허대학(Schumacher College) 학위 수여식에서 창립자 사티시 쿠마르는 졸업생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순환경제, 로컬경제, 생태경제 등 새로운 경제담론들이 주목을 받으며 점차 주류로 진입하고 있다. 지속 가능한 경제를 표방하며 인간만이 아닌 수만의 종과 함께 문명의 수명을 연장하고자 한다. 이 새로운 길을 앞장서 내며 진득하게 걸어온 많은 ‘지구의 일꾼’들이 바로 이 작은 슈마허대학에서 탄생해왔다. 그들은 자신의 행복과 번영을 성공이라는 허명 아래 저버리지 않는다. 타인의 행복을 밟고 일어서려 하지도 않는다. 지구별을 하나의 유기체로 생각하고 감각하며 유지할 ‘가이아경제’를 추구한다. 슈마허대학에는 홀리스틱 사이언스(Holistic Science), 생태적 디자인 사고(Ecological Design Thinking), 전환을 위한 경제학(Economics for Transition) 등 3개의 대학원 과정이 있다. 이 중 전환을 위한 경제학에서 배출한 졸업생만 18년 동안 1500여명이다. 모두들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캐나다의 대표적 환경 싱크탱크인 데이비드 스즈키재단을 비롯, 영국과 미국·포르투갈은 물론 아시아·남아메리카의 다양한 싱크탱크와 비정부기구(NGO), 교육기관, 지방정부 등에서 정책가·활동가로 활약하는 것이다. 또 윤리적 농장이나 레스토랑·가게를 열어 들판의 클로버처럼 풀뿌리로 지구별의 지표면을 메워가고 있다.


영국 데번주 다팅턴에 위치
반다나 시바·프리초프 카프라 등
저명 운동가·학자들 강의로 유명
세계 90여개국에서 학생들 모여



슈마허를 처음 찾은 날은 작년 11월25일이다. ‘안희경의 세계 지성과의 대화-보살핌의 경제로’의 첫 인터뷰이인 헬레나 노르베르-호지를 스페인에서 만나고 런던으로 돌아가 다시 기차로 4시간 달려 다다랐다. 사실 슈마허에 궁금증을 품었던 것은 이미 2012년이다. 환경 분야의 거장이자 세계화 경제에 맞서 소농 중심의 유기농 농민운동을 이끄는 반다나 시바를 만나고자 하던 중 그의 강의가 슈마허대학에서 잡혔다. 1980~1990년대 초 기존의 인식 틀을 뒤흔들던 물리학자 프리초프 카프라를 좇다가도 슈마허대학을 만났다. 이 두 거장뿐이 아니다. 당대의 사회운동가나 경제학자, 생태와 경제의 새로운 가치를 설파하는 심리학자, 과학자, 예술가들이 슈마허대학 방문교수 명단에 올라 있었다. 헬레나 노르베르-호지 또한 국제경제를 강의했다. 지난해 ‘도넛 경제학’으로 자본주의 한계를 돌파하는 담론을 제시한 경제학자이자 활동가인 케이트 레이워스 역시 이곳의 교수였다.




지난달 다시 일주일 일정으로 슈마허대학을 찾았다. 토트네스 기차역에서 강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다팅턴홀 입구가 나온다. 데번주에 남은 유일한 철새 도래지인 호수 주위로 잿빛 왜가리가 먹이사냥을 하고 있다. 다팅턴홀이 1925년 새 주인을 만나면서 생태를 보전, 철새들이 모여드는 것이다. 영국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전원도시인 토트네스는 다팅턴홀 입구로 접어들자 더 아름다운 풍광으로 펼쳐졌다. 강 너머 초록 언덕은 거침없이 하늘로 내달리다 구름과 맞닿은 지점에서 시야 저편으로 사라지고 하얀 양떼들이 넘어왔다. 새들은 숲이 있음을 알리듯 저마다의 언어로 노래를 불렀다.


명저 <작은 것이 아름답다>로도 유명한 에른스트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슈마허 이름 따 1991년 설립
숲·농장으로 이뤄진 교정서 숙식
‘온몸으로 배운다’를 직접 실천


학교명 슈마허대학의 슈마허는 명저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에른스트 슈마허다. 슈마허대학은 1980년대 세계화가 태동되던 순간부터 신자유주의의 위기를 경고해온 불교경제학자·생태학자인 에른스트 슈마허의 이름을 교명으로 삼아 1991년 1월에 문을 열었다. 사실 슈마허대학의 태동은 훨씬 이전으로, 인도의 교육자이자 시성(詩聖)인 타고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에게는 레너드 엠허스트라는 영국인 제자가 있었다. 성공회 신부의 아들로 케임브리지에서 신학과 역사를 공부하던 가난한 청년 엠허스트는 인도에서 타고르를 만나 깊은 가르침을 받고 개인 비서 역할을 할 정도로 각별하게 지냈다. 그는 농업을 배우고자 미국 코넬대로 갔고, 그곳에서 억만장자 아버지의 부를 상속받은 도로시 휘트니 스트레이트를 만나 결혼한다. 이 소식을 듣고 타고르는 “이제 영국으로 가 드넓은 대지를 구입해 진보적인 학교를 설립해라. 사람들이 자연과 음악과 공예를 누리고, 바른 삶을 위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라”고 엠허스트에게 당부했다. 타고르가 가리킨 곳은 지금의 슈마허대학에서 멀지 않은 토키였다. 타고르가 한때 휴가차 방문했던 곳이다. 엠허스트는 1923년 부동산중개인을 만났는데 당시 다팅턴홀이 매물로 나와 있었다. 14세기에 지어진 성으로 16세기부터 소유해온 샴페논경이 내놓은 것이다. 건물은 낡고 부서졌으며, 중심인 그레이트홀은 지붕마저 내려앉아 가축들이 어슬렁거렸다. 다팅턴홀의 전체 면적은 500에이커(약 62만평)로 끝없이 펼쳐지는 구릉지대를 거느린다. 마치 가야산을 품고 있는 해인사와 비슷하다.


엠허스트는 모든 성채를 재건했다. 산업화로 무너져가는 농업을 유기농으로 지켜내고, 아트센터를 열어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세계적 작가 올더스 헉슬리를 비롯해 나치를 피해온 독일의 예술가들이 많았다. 예술가들과 영국 노동당 정치인들은 자주 모임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전 국민 의료보험이 제도로 구현되도록 인큐베이터되기도 했다. 다팅턴홀이라는 외떨어진 시골 안전지대에서 예술적 상상과 사회적 이상의 융합이 일어난 것이다. 엠허스트는 타고르의 제자답게 교육에 열정을 품었다. 다팅턴학교는 급진적 교육을 펼쳐갔다. 라틴어 수업을 폐지하고, 남녀 성차별을 없앴으며, 계급차별을 무너뜨리고, 예술과 동서사상을 청소년에게 불어넣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사고가 일어나며 학교는 문을 닫고 만다. 이에 다팅턴홀 재단의 이사들은 새로운 교육공간을 모색했고, 그중 사티시 쿠마르와 존 레인, 모리스 에시를 중심으로 슈마허대학이 탄생하게 됐다.


‘우리에게는 지구의 자원을 낭비하는 경제시스템을 탐구할 새 길이 필요하다. 왜 서구사상은 숲을 함부로 대하는가? 우리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슈마허대학 설립자의 질문은 일종의 인도 아슈람 모델인 타포바나에서 답을 찾는다. 타고르는 고대 인도의 현자들이 숲에서 지혜를 얻었다고 믿었고, 자연이 없다면 지혜를 얻을 수 없다고 설파했다. 그는 제자들과 숲으로 들어가 함께 살며 교육했다. 바로 아슈람이다. 그 수행의 숲을 타포바나라고 한다. 아슈람의 학생들은 밭을 갈고, 나무를 하고, 스승과 함께 먹고 자며 스승의 인격과 정신이 온몸에 배어들게 했다. 슈마허대학 또한 ‘온몸으로 배운다(Learning by Doing)’를 실천한다. 모든 학생과 일부 교수진은 학교에 거주한다. 대학원생뿐 아니라 3주, 1주 단기코스 수강생들도 숙식하며 요리를 하고 농사를 지으며 명상을 즐긴다. 6에이커(약 7천평)의 교정이 숲과 농장으로 가꾸어지고 있다. 슈마허는 ‘21세기 타포바나’다.


1991년 첫 학기 학생은 25명이었다. 시골마을 신생 학교에 모이기엔 놀라운 숫자였다. 이유는 제임스 러브록의 강의로 문을 열었기 때문인데, 그는 과학자·환경운동가·미래학자로 지구는 스스로 조절하는 하나의 유기체적 시스템으로 이뤄졌다는 가이아 이론을 제창한 인물이다. 러브록이 합류하게 된 배경과 에른스트 슈마허가 슈마허대학을 대표하게 된 아이디어의 바탕에는 사티시 쿠마르의 삶이 있다. 쿠마르는 아홉 살에 자이나교로 출가했고, 열여덟 살에 환속한 후 반핵평화운동을 이끌었으며, 인도를 떠나 영국에서 오랫동안 생태잡지인 리서전스 매거진(Resurgence magazine) 편집장으로 일했다. 에른스트 슈마허, 이반 일리치, 달라이 라마, 토머스 베리, 프리초프 카프라, 웬들 베리, 반다나 시바, 제임스 러브록, 조각가 안토니 곰리는 모두 쿠마르의 절친한 친구들이며, 대부분은 슈마허대학 강의진에 합류했다. 이러한 저력에 힘입어 슈마허에는 지금도 세계 90여개국의 학생들이 모이고 있다.


슈마허대학 토대를 다진 타고르와 엠허스트.

핵심 커리큘럼 ‘가이아 이론’은
자연의 직관성 연결된 ‘합리’ 추구
기존 ‘이기적 선택 이론’ 반박
상호 작용 유기체인 인간 강조


슈마허대학의 교육 내용은 두 가지 요소로 대표된다. 하나는 가이아 이론이며, 다른 하나는 홀리스틱(전체적인) 사고다. 가이아 이론은 개교 때부터 함께한 생태과학자 스테판 하딩 교수와 10년 뒤 합류한 경제학자 조너선 도슨에 의해 커리큘럼의 틀로 구축됐고, 대안적 실천원리로써 교실을 넘어 지역 현장에서 적용되고 있다. 하딩이 슈마허에 둥지를 튼 이야기 속에서 1990년대 초 가이아 이론을 향한 학계와 대중의 기대감을 엿볼 수 있다. 1980년대 초부터 티베트불교에 심취해 있던 하딩은 마침 옥스퍼드에 온 린포체가 데번주의 티베트불교센터를 방문하고자 운전사를 구하는 데 자원한다. 다팅턴홀 이사인 대부호 모리스 에시가 개설한 티베트불교센터로 가는 여행이다. 하딩은 그곳에서 모리스 에시와 쿠마르를 만난다. 쿠마르는 당시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던 생태학자 하딩에게 슈마허대학 교수 자리를 제안했다. 하딩은 환호하며 런던을 떠났다고 한다.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학과에서 서로 다른 과제를 연구하던 때였고, 당시 동물생태학의 관점이 ‘이기적 유전자’로 쏠리는 상황을 불편해한 그는 스스로에게 외쳤다. ‘드디어 과도한 합리성으로부터 탈출한다! 이제 나는 이기적인 유전자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겠구나!’ 하딩의 철학은 자연의 직관성과 연결된 합리성을 추구하자는 쪽이었다. 그리고 슈마허에서 제임스 러브록과 함께 연구하며 ‘이기적인 유기체는 이기적이기 때문에 외부에 흥미를 갖지 않고, 그러하기에 지구에 이익을 주는 작업을 해오지 않았다. 유기체는 상호 작용한다’는 가설을 증명해갔다.


현재 가이아 이론은 과학계에서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이는 합리성을 강조한 호모 이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를 주장해온 주류 경제학이, 심리학자와 뇌과학자·행동경제학자의 경제활동 연구를 통해 기존에 알려진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합리성과 이기적 선택은 현실 경제활동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증명들과 마주하는 상황과 같다. 치타보다 덜 발달한 다리 근육과 호랑이보다 약한 턱으로 생존해온 인간의 진화 열쇠는 사회를 이루는 협력 본성에서 비롯된다는 설명이 점점 더 주목받는다.



■“생각이든 느낌이든 한쪽 치우친 문화는 위험” 이 대학선 무엇이든 머리·가슴·손으로 배운다


주류 경제에 맞서 지속 가능한 삶과 대안적 경제를 추구하는 슈마허대학의 정신을 보여주듯 슈마허대학의 교수진과 학생들은 강의실·도서관에서의 치열한 ‘머리 공부’는 물론 농장에서 온몸으로 땀 흘려 농사를 짓는 ‘몸 공부’를 병행하고 있다. 사진은 악기를 연주하며 휴식을 즐기는 학생들. ⓒ안희경

스테판 하딩, 조너선 도슨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며, 기존에 사전적 의미로 알고 있던 홀리스틱 사고에 대해 그들의 해석을 들었다. 홀리스틱 사이언스와 생태적 디자인 사고 과정을 총괄하는 하딩의 말이다. “우리는 여러 문화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인식함에 있어 네 가지 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생각과 느낌은 서로 대립적이죠. 감각과 직관이 대립하고요. 홀리스틱 과학에서 저는 이 네 가지 인식 방식을 모두 동원해 대상을 경험하도록 안내합니다. 매우 어려운 작업이죠. 우리가 삶 전반에 걸쳐 가져가야 할 알아차림이니까요. 이 시대는 ‘생각’이 지배합니다. 너무 생각에 집착하기에 느낌의 가치를 잃었습니다. 이는 위험합니다. 느낌에 매달려 사고가 부족한 문화 역시 위태로워요. 그 무엇이라도 균형을 잃은 문화는 위험합니다. 생각하는 시간, 느끼는 시간, 감각하는 시간, 직관하는 시간, 이 네 인식 능력을 활용하는 홀리스틱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균형감각은 숲에서 자연과 연결될 때 보다 자연스레 키워질 수 있습니다.”


핵심 철학인 ‘홀리스틱 사고’
생각·느낌·감각·직관 활용한
‘균형 잡힌 인식’의 방식 가르쳐
이 균형감은 자연 연결될 때 발달


슈마허대학에서는 머리(Head), 가슴(Heart), 손(Hand)을 강조한다. 일하며 온몸으로 배우는 그들의 일상뿐 아니라 수업에서도 이 셋은 학습의 주요 요소다. 인지적인 학습 방식에 집중하는 주류 대학의 태도와 크게 차별되는 점이다. 모든 학생들은 11월, 노란 자작나무 잎이 교정을 뒤덮을 때면 인디언의 북을 들고 다트무어 국립공원으로 나간다. 가을 학기 동안 기후변화와 생태학에서 배운 탄소순환을 몸으로 느끼기 위한 것이다. 교실에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학습하고, 테스트를 마친 내용을 거대한 화강암으로 뒤덮인 다트무어 암석 위에서 느껴보는 시간이다. 화강암은 지구의 기후에 매우 중요한 물질이다. 그러하기에 다트무어에서 나뭇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피우고 다 같이 대지에 눕는다. 하딩의 주술사 친구가 북을 울리고, 북소리에 맞춰 하딩은 하늘에 고하듯 명상을 이끌어간다. “우리는 이제 탄소 원자가 되었다. 대기로 날아오른다. 화강암의 탄소 원자가 되고, 강물에 어우러진 탄소 원자가 돼 바다로 흘러간다. 바닷물 속 탄소 원자로 가라앉는다.” 빨라지는 북소리를 따라 하딩의 말도 신탁한 주술사의 주문처럼 질주한다. “작은 해초 코카리페포라에 숨이 막혀 심해로 내려앉는다. 우리는 거대한 석회암 퇴적물이 되었다. 가라앉고 가라앉는다. 대륙 저 밑바닥으로 내려간다. 판구조론의 지질 현상에 따라 우리는 다시 이산화탄소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이 대기로 돌아온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진다. 바위 위에서 젖은 몸을 말리는 바다코끼리처럼 학생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바위 사이에 있던 풀이 일어나듯 학생들은 고요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하나둘 모닥불가로 모여들었다. 깊은 경험이 남긴 진동의 마지막까지 온몸으로 감각하고자 그들은 바람과 새의 언어만을 허용하였다. 하딩은 그 순간을 일러 ‘가이아 되기(Being Gaia)’라고 불렀다. 실제 살아 있는 고귀한 존재로 거대한 행성의 일부가 돼 지구 자체가 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하나의 고대 물질이 수천만년의 시간 동안 진화하며 점점 더 복잡해진 생명체로 거듭나 마침내 인간의 의식을 갖춰 그 바위 위에 존재하는 긴 시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하딩은 과학이라는 통로 덕분에 그 깨우침의 순간을 모두 함께 인지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들에게 있어 깨달음은 곧 생태다.


생태학서 배운 탄소순환 익히려
숲에 누워 탄소원자 되는 상상…
‘가이아 되기’라는 수업 과정 통해
‘왜 여기 인간으로 있는가’ 깨달아


“맞아요. 깨달음의 순간이죠. 깨달음은 생태입니다. 생태학 없이 깨달음은 없습니다. 붓다가 깨달으셨을 때 왜 땅을 짚었겠어요? 이 모든 것의 목격자가 되기 위해서죠. 대지 전체와 맞닿으며 붓다는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마침내, 인간이구나’ ‘이는 모두 하나의 전체적인 의미이자 정신체계이며, 기적적인 진화의 과정이로구나’. ‘왜 우리가 여기 인간으로 있는가’를 인간 최초로 깨우친 거죠. 바로 가이아를 사랑하기 위해서, 이 진화의 전체적인 장엄함을 사랑하고, 이 행성만이 아니라 우주를 사랑하고자 그는 이 모든 것이 무언가를 위해 더 나아가려는 시도라는 것을 안 겁니다. 가이아를 위한 길, 인류를 위한 길, 이 모든 변화를 위한 길이죠. 제가 저의 학생들과 함께 나아가려는 그 길입니다.”


전환을 위한 경제학을 배우는 대학원생 에밀리 스웨인(23)은 전날 있었던 수업을 들려주었다. 그는 켄트대학교에서 성장 중심의 주류 경제학을 배우며, 윤리적인 갈등을 겪었기에 1년 동안 한 회사를 다니며 돈을 모아 슈마허에 입학했다. “이전에 저는 머리를 이용해 배웠어요. 오로지 생각하는 것으로요. 하지만 지금은 온몸으로 배웁니다. 우리는 꽤 자주 몸으로 하는 경제를 해요. 어제는 그룹을 이뤄 수업을 했어요. 몸으로 자신이 맡고 있는 경제 요소를 표현하는 수업이었죠. 제가 정부를 표현한다면, 한 친구는 기업을, 다른 친구는 공유재를, 또 한 명은 가정을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시장활동을 몸으로 시뮬레이션했어요. ‘정부인 나는 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 미래를 위해 저는 공유재와 좀 더 가까워지고 싶었는데, 갑자기 그 친구가 쓰러지듯 누웠어요. 저는 머리로는 공유재를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반사적으로 그 친구를 발로 밀치고 말았습니다. 현실의 영국 정부는 공유재를 별로 반가워하지 않죠. 오히려 기업과 가깝습니다. 가정경제는 신경 쓰지도 않고요. 저는 생각과 현실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온몸으로 고민하게 됐습니다.” 그는 공유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막상 몸이 정부라는 규격에 갇힌 다음엔 정부가 주저앉아서는 안된다는 강박에 자기도 모르게 발로 차듯 공유재를 밀어냈다. 그 수업 이후로 그는 공감력을 더욱 동원해 사고한다. ‘어떻게 하면 머릿속에 자리 잡은 가치를 현실에서 탄력 있게 구현해낼까?’를 고민하며.


슈마허대학에는 교정에도 강의동에도 명상실이 있다. 조너선 도슨 교수의 수업 또한 명상 종을 울리며 시작한다. 카펫이 깔린 강의실이기에 모두들 신발을 벗으며 몇몇은 교실 가운데에 놓인 방석에 가부좌를 틀고 수업을 듣는다. 교수와 학생은 온몸을 깨워 지구 생존 연장을 위한 탐험으로 나아간다. 에밀리 스웨인이 만약 켄트대 경영대학원에 진학했다면, 남보다 훨씬 많은 보수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졸업 후엔 시골 고향으로 가 자신의 진로를 탐색할 예정이라고 한다. 산업화와 자본에 밀려 농사를 그만뒀던 아버지가 다시 지역 농부들과 농사를 시작하고 싶어 하기에 지역 경제와 유기농 먹거리를 지속적으로 길러낼 길을 함께 찾을 생각이다. 바로 온몸으로 익힌 ‘전환을 위한 경제학’을 동원해 이웃의 삶이 나아지는 데 함께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만족감은
시장경제와 연결돼 있지 않아
인간이란 종이 성공한 건
자비와 사회적 참여 때문”


슈마허대학이 집중하는 또 다른 대안은 생태적 지역 경제 시스템이다. 지역 공동체마다 공적 기능을 하는 기관들이 있다. 병원, 대학, 학교, 프로스포츠팀, 공공기관 등이다. 급식, 가구, 유니폼, 세탁 서비스 등은 대부분 입찰을 받을 때 가격을 먼저 따진다. 하지만 선정기준에 생태적 영향을 포함시킨다면? 종업원이 지역에 사는 사람인가, 환경 영향이 최소화된 생산체계인가, 기업 윤리나 노동자의 노동조건, 지역 제품 비율 등에 따른 기준이 포함되면 지역 경제는 달라진다. 지구도 보다 지속 가능하게 될 것이다. 국가적인 단위에서는 예를 찾기 힘들지만, 지방 공동체 단위에서는 이런 체제가 확산되고 있다. 대표적 모델이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에버그린 협동조합 네트워크다. 이 네트워크는 지역 노동자들이 소유하는 협동조합에 우선권을 줬고, 이는 지역 일자리를 창출했을 뿐 아니라 시민의 건강 상태까지도 변화시켰다.


슈마허대학 구성원들이 직접 농사를 짓는 농장.

슈마허의 경제학 수업은 ‘보살핌의 경제로’라는 이번 기획시리즈에서 다뤘던 고민과 대안들을 중심에 놓고 있다. 노동생산성 혁신을 통해 인간 노동이 기계로 대체돼가는 시대, 세금을 노동에서 자원으로 옮기자는 요구와 기업 경영집단에 대한 법적 의무를 가져오는 제재, 단기투자로 주주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관행 제한 등에 집중한다. 여기에 경제적 인간에 대한 진실을 잊지 않는다. 아프리카와 남아시아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조너선 하딩은 여러 데이터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가 느끼는 만족감은 시장경제와 연결돼 있지 않습니다. 우리 종(種)이 성공해온 이유는 자비와 사회적인 참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원천은 시장에서 구입하는 물질에 있지 않아요. 우리의 문화, 우리의 정신에 있습니다. 한국 사회와 서구 사회를 들여다봅시다. 자살·우울·불행의 정도나 스모그로 인한 호흡곤란 등의 관련 수치는 몇몇 개발도상국들보다도 낮아요. 소득과 웰빙 지수가 어느 지점까지는 함께 갑니다. 하지만 영국이나 한국은 그 지점을 한참 전에 지났어요. 이제 우리의 조건에서는 장수, 웰빙, 건강, 교육을 측정하는 데 시장 중심의 관점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국민소득 1만5000달러가 넘어가면 상관관계가 사라집니다. 우리는 주체의 변화, 생각의 변화를 통해 인간다운 정이 소통하는 경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슈마허대학에서 쿠마르를 비롯한 석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바보 같은’ 질문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 작은 학교가 무얼 할 수 있다 생각하는가?” 누군가는 웃음으로 넘겼고, 누군가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가장 긴 답을 내놓은 것은 스테판 하딩이다. “우리는 매우 심각한 기후변화, 종 멸종, 문화 멸종, 언어 멸종, 정신적인 멸종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46억만년 만에 맞는 가장 큰 위기일지 모릅니다. 그 속에서 슈마허대학은 차이를 만들어왔어요. 왜냐하면 우주가 의미 없는 어떤 물질의 축적이 아니라 그 스스로 생명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단지 한 명이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전체는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스웨덴, 벨기에, 일본, 멕시코 등에서 온 슈마허대학 사람들의 미소는 쿠키를 굽는 시간에도, 기타를 치는 시간에도, 농기구를 정리하는 시간에도 계속 피어났다. 그래서 나의 입꼬리도 내려올 줄을 몰랐다. 그 시간 동안 지구 전체의 행복도는 나의 웃음이 더해진 만큼 올라갔을 것이다. 연결된 유기체는 작은 울림으로도 전체가 출렁인다. 가이아경제도, 성장중심경제도 맨 처음은 한 명의 상상에서 나왔을 것이다.


슈마허대학을 키우는 사람들



국제 환경교육 주도 쿠마르
가이아 커리큘럼 확립한 하딩
‘지속 가능 경제’ 연구한 도슨




사티시 쿠마르(83·Satish Kumar)는 슈마허대학 공동창립자이며 개교 때부터 2010년까지 프로그램 총책임자를 지냈다. 환경운동가로 ‘향후 50년을 위한 글로벌 어젠다’ 제정을 주도했으며, 국제사회에서 환경교육의 장을 연 인물로 손꼽힌다. 20대에는 인도를 시작으로 모스크바·런던·파리, 미국으로 이어지는 8000마일 세계평화순례를 이끌며 반핵운동을 확산시켰다. 1973년 영국에 자리 잡으며, 30여년간 생태잡지 ‘리서전스 매거진’ 편집장으로 서구 지식인 사회의 인식을 전환시켜왔다. BBC방송은 사티시 쿠마르를 중심으로 <지구 순례자>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 의존선언문> <붓다와 테러리스트>, 자서전 <운명은 없다> 등이 있다.

스테판 하딩(66·Stephan Harding)은 생태학자다. 옥스퍼드대학에서 문자크 사슴의 행동생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옥스퍼드와 코스타리카국립대학이 주도하는 열대우림 생태연구를 진행했다. 1990년 슈마허대학 개교 준비 과정에서 교수로 부임했다. 이후 그의 연구는 가이아 이론 아래 진행됐으며, 가이아 교육 커리큘럼을 확립했다. 저서로 <살아있는 지구: 과학, 직관과 가이아> <지구의 노래> 등 다수가 있다.




조너선 도슨(64·Jonathan Dawson)은 경제학자이자 교육자이며, 전 글로벌 에코빌리지 네트워크 대표다. 슈마허대학에 오기 전 20여년 동안 아프리카·남아시아에서 연구자, 프로젝트 관리자로 현장 활동을 겸하며 저서를 집필해왔다. 가이아 교육에서 지속 가능한 경제 커리큘럼을 확립했고, 유네스코에 의해 유엔 지속 가능 개발을 위한 교육 기여자로 선정됐다. 저서로 <가이아 경제학: 행성의 한계 속에 추구하는 행복> <신용 너머를 지향하다: 소규모 생산자들의 혁신과 개발> <공동체 개발을 위한 기술> 등이 있다.



▶안희경은




재미 저널리스트다. 2002년 미국으로 이주, 서구의 문명사적 성찰과 대안 모색 등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다. 세계적 마음 전문가들의 인터뷰집 <사피엔스의 마음>, 레베카 솔닛 등 세계 여성 지성들과의 대화를 엮은 <어크로스 페미니즘>, 재러드 다이아몬드 등 세계 지성 11명과의 대담집 <문명 그 길을 묻다>, 놈 촘스키 등 세계 석학 7인과의 대담집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윌리엄 켄트리지 등을 인터뷰한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 등의 저서와 다수의 번역서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