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02

어느 유물론자와의 대화, 인권운동가 서준식 2003

어느 유물론자와의 대화 < 사회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어느 유물론자와의 대화
10년 전 기독교세계관학교에서 만난 인권운동가 서준식
기자명 김세준  승인 2003.03.15 


무심코 정리하던 서랍에서 테이프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그 테이프는 10여 년 전 기독교세계관학교를 운영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 논하였던 것을 녹음한 테이프 중 하나였다.

이 글은 그 테이프를 녹취한 것이다. 이 테이프에는 내가 경실련 기독교청년학생협의회 대표로 있던 시절, 감옥에서 17년간 비전향장기수로 출소하여 인권운동을 하고 있던 서준식과의 대화가 들어 있다. 서준식은 재일교포 2세로,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인 1971년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연루되어 처음 7년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 형량이 늘어나면서 17년간 감옥에서 보내고 1988년 출소하게 된다.

당시 복음주의 계열에서 기독교학문연구회의 한 교수를, 진보쪽에서 민중신학자인 임태수 교수(현 호서대 구약학), 박성준 선생(목사이자 현 퀘이커교도), 그리고 유물론자인 서준식을 초청해서 강좌를 개최하였다. 테이프를 다시 돌리며, 오늘날에도 이 대화는 시기적으로 적절하며 듣는 이로 하여금 신앙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였다.

서준식은 당시 유명한 유서대필 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수배된 강기훈의 무죄를 주장하며 동시에 유서대필의 허구적 조작을 밝히기 위해 강연하였다. 그 말미에 그의 사상의 한 자락인 '유물론과 신앙'이란 대목의 대화가 있었다 이 글은 그 당시의 강연을 녹취한 것이다.

............................................................................................

김세준 서준식 선생님의 서간문과 선생님의 이야기를 모델로 쓴 [금단의 땅]이라는 소설을 보면, 휴머니즘과 민족주의가 선생님의 세계관적인 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 모인 청년들은 특별히 기독청년학생들인데, 저희가 갖고 있는 세계관과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무엇이 다른지 혹은 선생님께서 평소 생활이나 삶에서 가지고 있는 가장 주된 가치 기준이란 것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서준식 저는 20대에 휴머니즘과 과학사상에 심취했습니다. 저는 20대에 마르크스를 알았습니다. 우리가 대학 다닐 때는 우리 나라에는 사회과학서적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종로2가에 종로서적 있죠?! 그 종로서적 전체 크기가 이 방만한 크기였습니다. 그때 거기에 사회과학서적이라는 것이 없고 그냥 거기에 이만한 공간에 문학서적·관광서적·잡지, 그런 것들이 전부다 있는 거죠. 사회과학코너라고 해서 서가가 하나 있는데, 거기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말하는 의미의 그런 사회과학서적이 아니었습니다. 사회학개론이라든가 하는 대학 교과서가 전부였습니다. 따라서 60년대 말, 70년쯤까지는 우리 나라에 사회과학서적이라는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근데 그런 속에서 있으면서도 저는 사회과학서적을 그 당시 대학생들 수준치고는 아마 가장 선진적인 책을 읽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러냐, 방학 때 일본에 가서 지냈기 때문에, 일본에 가서 같은 값이면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책을 보자,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책은 학기 때 가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하는 생각으로 골라서 보다 보니까 그 당시 우리 나라 기준에서 저는 불온서적만 보고 방학 때를 지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대학 1학년 때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라던가 [경제학 비판]이라던가 엥겔스의 [반듀링론] 뭐 그런 것들을 쭉 보게 됩니다. 필수적인 사회과학서적인 것들을. 근데 그것을 읽게 된 동기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도 읽으려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살았고 일본에는 얼마든지 지천에 깔려 있으니까. 그런데 그것을 읽게 된 것은, 아까 맨 처음 강의를 시작하면서 잠깐 말씀드렸듯이 우리 나라에 와서 굉장히 비참한 동포들의 모습, 이런 것들에 충격을 받고, 또 어떤 민족적인 감성이 새롭게 형성되면서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점점 달라진 거죠. 아까 제 말로는 사회의식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속에서 자꾸만 호기심이 생겨서 그런 책을 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서간집이 저의 사상이라…. 저는 제 사상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나의 주장'이라는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옥중에서 법원에 제출하기 위해서 쓴 건데, 거기에 제 주장의 알맹이를 민족주의와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민족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건 변함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사랑이나 민족에 대한 사랑이나 그 감성만 가지고 무엇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과학이라야 합니다. 저는 과학이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과학사상에 심취했습니다. 그리고 아까 이야기했듯이 굉장한 딜레마에 휩싸인 거죠. 과학을 가지고 인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대로 해결을 하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 바로 이웃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려는, 그리고 그 이웃에 대한 사랑이 축적되지 않는, 구체적인 사랑이 축적되지 않는 사상이 무엇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그런 회의를 느꼈던 것입니다.

지금은 어떠냐? 지금은 그 회의를 해결하지 못한 채 일에 쫓겨 사고의 진전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일에 쫓겨 가지고 진전이 전혀 없다는 것이 저는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빠서 이런 논쟁을 할 시간이 없다” 할 때가 저는 대단히 행복한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구체적인 일에 열심히 몰두를 하면 회의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일이 쌓여 가는 과정에서 뭔가 세상을 보는 눈이 성숙되어가고, 그리고 사람이 일한 것이 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뭔가 실천적으로 쌓아지는 사상이 형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런 사상을 형성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저는 그런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 사상 혹은 생각에 녹아 있는 어떤 알맹이가 뭐냐 하는 질문을 받으면 아마 3-4년까지만 해도 민족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대답을 했겠는데요. 지금은 그렇게 대답을 할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바빠서 그저 최소한 먹고 살 것만 털어놓고 이 열심히 이것(인권운동)을 하고 있다, 이 속에서 뭔가 내가 젊었을 때 가졌던 생각이 그런 경험의 축적 속에서 방향이 수정되어갈지도 모르고 혹은 더 성숙되어갈지도 모른다, 하는 말씀밖에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가 기독교세계관학교인데요. 저는 중요한 것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먼 데를 바라보지 않고 가까운 일만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잘못 빠질 수 있습니다. 어떤 길이든 말입니다. 그런데 먼 데를 바라보는데 가까운 일을 열심히 하게 되면 먼 데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특별히 고민하지 않아도 회의는 생기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하고 저하고 생각이 다를지도 모릅니다. 물론 신앙은 다릅니다. 그러나 저는 입장이 얼마든지 다른 사람, 아주 멀리 떨어진 사람, 사상이 다른 사람, 신앙이 다른 사람과도 얼마든지 공감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어떤 때 공감을 느끼느냐 하면, 구체적인 일에 대해서 구체적인 하나의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구체적인 하나의 일에 대하여 분개할 줄 알고 구체적인 하나의 일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사람하고도 사상이 다르고 신앙이 다른 사람하고도 동질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분명히 저는 그렇습니다. 오늘 어떤 세계관에 대해 이야기할 자신도 없거니와, 그런 이야기를 피하고 인권에 관한 구체적인 했던 것은 그런 이유도 있다고 이해해주십시오.

김세준 선생님께서는 앞에서 '나는 유물론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옥중에서 어떤 인간적 예수의 만남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셨구요. 저는 그것에 대해서 알고 싶었거든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이 하나고, 또 선생님께서 발견하신 예수상과 우리가 기존의 보이는 교회들이 생각하고 있는 예수상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차이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예수상.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어떤 반성을 할 수 있는 기회로, 어떤 정체성을 더욱 살필 수 있는 그런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거든요. 그래서 그 두 가지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서준식 김세준 씨의 질문은 말하자면 젠장맞을 욕심이라는 겁니다.(웃음) 엄청난 욕심을 부리셨습니다. 어쩌다 제가 이런 자리에 나오게 되었는지 후회스럽기만 합니다. 저는 다음 번에 강의를 하시게 될 박성준(당시 목사, 현재 퀘이커 교도) 선생님과 제가 굉장히 친한 사이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입장은 제가 잘 이해 못 합니다. 그분보다도 어쩌면 제가 더 신앙적입니다. 그분은 신앙은 제가 뭐 깊이 그분의 사상을 연구해 본 것은 아니지만, '신앙은 생활의 문화다' 그렇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신앙은 생활의 문화여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신앙이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유물론적인 유물론자였다가 유물론에 대해 회의를 느낀 이유,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에 제가 공부하고 아는 한 마르크스주의 속에 인간애, 바로 이웃에 있는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을 다뤄주는 장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남성적인 기질만 있습니다. 여성들에게는 미안합니다. 왜 남성적이냐 하면, 어떤 섬세한 부분이 없는 겁니다. 섬세한 부분이 없고 과학적으로 딱딱 들어맞으면서 다이나믹하게 다이나믹하게 빨리 전개되는 사랑입니다. 사회변혁사상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그리고 또 아주 철학적으로도 그런 성격을 갖고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이 쌓이지 않으면 그런 사회변혁사상이라는 것이 뭔가 무서운 것이 될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됐습니다. 제가 마르크스처럼 지적인 대인이 아니라 소인이기 때문에 아마 그럴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을 생각 안 했던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남긴 서간집이라던가 그런 것에서 단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봐도 분명합니다. 마르크스는 분명히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 자신이 그런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서 저 자신의 성격으로 봐서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서 마르크스주의를 따라가면 저 자신이 큰일 나겠다 싶었기 때문에 회의를 느꼈던 것입니다. 다만 단지 이 차이가 있었을 뿐입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인간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된다고 생각을 했나하면요, 간단하게 설명해서 이렇습니다.

어떤 사회적인 조건이 성숙되는 시기에 인간은 사회를 변혁시킵니다. 사회구조의 질이 달라지는 거죠. 그러면 인간이 또 새로워진 질의 사회를 끌어당깁니다. 인간이. 근데 또 쭉 살다보니까 또 어떤 성숙된 조건에 의해서 다시 사회를 변혁시킵니다. 다시 인간이 또 새로운 사회를 당깁니다. 인간이 어떤 사회를 당길 때마다 인간이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유물론이라는 것은 인간을 저 의식을 규정하는 것은 전제이지 의식이 전제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전제가 있습니다. 유물론에는. 아주 통속적으로 이야기해서 환경이 인간을 만든다, 하는 것이 유물론의 사상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가 환경이 아닌 인간이 의식적으로 노력해 가지고 환경을 만든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적으로 볼 때 가장 근본적인 것은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이 주위의 환경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세의 농경사회에는 농경사회적인 삶의 의식구조가 있고 행동양식이 있고, 그런 것들이 지금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사회에 와서는 사람의 의식이 달라진다는 것이죠 가령 예를 들어서 제가 고민했던 것은 이기주의의 문제입니다. 사회주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는데, 사회주의라는 것은 고도로 도덕적인 사람이라야만 그 속에서 적응할 수 있고 지탱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가지면 안 되는데, 욕심 부리면 안 되는데, 욕심을 부리면 사회주의적인 체제가 무너집니다. 그것은 요즘 동부라던가 소련 중국 그런데서 자꾸만 무너지는 것, 그것을 봐도 알 수가 있을 겁니다.

인간의 이기심이 없어질 수 있는가? 그런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면서도 만만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의 이기심이 버릴 수 있다, 다만 제로가 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변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변하는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도 변하지만, 그러나 노력에 의해서 변하는 부분은 미미한 부분이다. 사회 구조가 변함으로써 인간의 이기심의 정도가 변한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통속적으로 중세 농경사회에 사는 사람의 이기심과 그리고 지금 고도로 발달된 이 산업문명에 사는 사람들의 이기심을 비교해봐도 이해가 될 것입니다. 또 산골 인심과 도시 인심이 다르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생각해도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기심이 제로가 될 것인가, 이기심이 사회가 변하면 어느 정도 속도로 이 사회의 변화를 따라올 수 있는가, 그런 문제가 의문스러울 뿐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분명히 마르크스의 문제, 변혁이론을 지지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충족된 조건 속에서 인간이 사회를 변혁시킨다. 인간이 그 속에 담기면 과거에 있던 인간과 다른 인간이 됩니다. 조금이지만, 눈에 거의 띄지 않을 정도지만. 그리고 또 인간이 사회변혁을 합니다. 사회에 스스로 변혁하는 사회에 스스로 담기면, 담기고 또 오래 동안 가면 인간이 또 변합니다. 이런 과정을 수없이 거쳐 가지고 이 땅의 문제가 해결되어 가는 것이다. 저는 이것을 기본적으로는 지지합니다.

그러나 저는 지지하면서도 불안한 겁니다. 그런 이론만 믿고 거기에 덮어놓고 따라가기가 불안한 겁니다. 말하자면 아까부터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바로 이웃에 있는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쌓아가지 않는 그런 방식으로 이론만 따라가다가는 나 자신이 뭔가 무서운 사람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시각에서 저는 예수를 보았습니다. 예수는 사람이냐 신의 아들이냐 하는 문제는 저도 워낙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저는 모르겠습니다. 모르지만 그러나 적어도 자기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상대화해야 한다. 겸손이라던가 이웃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은 자기 자신이 절대적인 존재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한때 바로 저의 옆에 있는 사람을 왜 이렇게 미워해야 하는가, 왜 이런 것 때문에 고민을 해야 하는가, 이런 것 때문에 굉장히 고민을 했습니다. 바로 이웃에 있는 사람,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같이 아껴야 할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사랑할 자신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많이 고민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요, 제 경우에는 옥중에서 같이 사는 동지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옥중에서 같이 사는 동지들을 저는 그렇게 썩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완전히 이거 뭐 고해성사처럼 되어버렸네요(웃음). 왜 그러냐면요, 옥중에서 같이 사는 동지들은 거의 다 저하고 세대가 다른 사람들입니다. 장기수들입니다. 30년, 40년을 감옥에서 사는 사람들이예요. 그 사람들은 일제시대 때 사회주의자가 됐거나 아니면 해방 직후에 사회주의자가 됐거나 전쟁의 와중에서 사회주의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사회주의자가 된 시기는 스탈린 시기입니다. 그리고 전쟁의 와중에 사회주의자가 된 사람들은 저처럼 인간에 대한 사랑 같은 그런 것 때문에 고민하면서 사회주의자가 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사회주의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전쟁의 와중에서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죽는 상황 속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도, 바로 앞에 있는 인간에 대한 미움이 앞섰을 것은 분명할 것입니다. 저 자신도 그랬을 것입니다. 분명히 제가 만약에 전쟁 때 살았으면 말입니다. 그런 분들하고 정서가 안 맞고, 안 맞는 과정에서 굉장히 고민을 했고, 그런 분들을 사랑하지 못했고, 그리고 무의식 대중, 교도소에서 무의식 대중은 누구냐, 교도소에서 무의식 대중은 말단 간수와 그리고 청소를 하러 왔다갔다하는 잡범들입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간수들은 우리에게 해코지를 합니다. 빨갱이라고 해서 해코지를 합니다. 빨갱이 아닌 사람도 빨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간수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 간수들이 적이냐 대중이냐 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고민했습니다.

저는 간수들은 대중이라고 봤습니다. 무의식 대중이라고 봤습니다. 우리가 무의식 대중은 정치의식이나 사회의식이 없는 대중인데,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해방되고싶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고난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박해를 가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되느냐, 저는 이런 사람들을 어디까지나 대중이라고, 마지막 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제가 살고 있던 다른 사람들하고 생각이 달랐던 것입니다. 얼마나 외로운 일입니까? 그 같이 사는, 그 징역을 같이 사는 사람, 같이 고생하는 사람이랑 사람들과 정서가 맞지 않는다는 것, 이런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대중들 앞에서 왔다갔다하면서 청소하면서 해코지하고 욕이나 하는 그런  잡범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 그 얼마나 괴로운 것입니까

이 부분에서 저는 인간적인 한계, 벽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벽 같은 것을 느끼고 이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나는 실천가가 되든 혁명가가 되든 무슨 주의자가 됐든, 이건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거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되는가? 나 자신을 상대화해야 하는데, 나 자신을 상대화할 무언가가 없었습니다. 무언가가 있어야 상대가 되는 거죠. 나 혼자만 있으면 상대화가 될 수 없죠. 그러기 위해서 신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신은 우리를 상대화해주는 하나의 기준입니다. 우리가 신이 없으면 자기가 절대자입니다. 그리고 신이 있으면 신과 비교하면서 자기가 상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저는 신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신앙은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신앙도 역시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예수가 신의 아들이었는지 아니었는지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어찌됐든 예수는 항상 신을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을 상대화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분명히 유물론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께서 알 수가 있을 겁니다.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을 다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신앙적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이것은 유물론적인 것하고, 그러니까 객관주의하고 주의적인 것 주관적인 것, 이것이 절묘하게 예수 속에서 혼재하고 있습니다.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통속적인 유물론에 빠지지 않고 그렇게 그 어떤 인간해방운동 속에서의 실존입니다. 하나의, 거의 완벽한 실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모습일 수가 있는가! 그것은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를 생각했을 때 예수는 신 때문에 그랬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에게 만약에 신이 없었더라면 예수는 그렇게 절묘한 조화를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신 없이 반쪽으로 살았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굉장히 추상적으로 되었는데요. 저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가 시간도 아깝고 또 구체적으로 설명할 시간도 없습니다. 예수의 어떤 부분이 유물론적이었는가 하는 이야기는 그런 어려운 문제는 저한테 묻지 마시고 다음 번에 강의하실 박성준 선생님한테 물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고민을 하면서 신앙을 가지려면 유물론을 포기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저는 저를 키워준 것이 유물론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를 키워주었고 그리고 제가 그 비참한 사회 상황 속에서 그  불행한 사람들, 즉 핍박받고 힘든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동정심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사람들 편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유물론 철학 덕분입니다. 저를 키워준 그 유물론 철학을 지금 내가 신이 필요하다고 해서 내팽개칠 수가 있는가. 이런 문제가 굉장히 고뇌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러면 어떻게 했는가. 유물론도 잡고 신도 잡을 수 있지 않느냐, 신앙도 잡을 수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유물론자도 신앙을 잡을 수가 있을 것 같다는데서 제 사색은 끝났습니다. 이 유물론의 반대개념은 관념론입니다. 그리고 무신론의 반대개념은 유신론입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유물론으로 있으면서도 신앙은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을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어디서 차이가 나는가, 가령 신의 은총이라던가 섭리라던가, 그런 부분은 제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려고 하다하다 안되니까 신을 잡으려고 했던 것이지, 신의 은총이라던가 섭리 그것을 느끼는 단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비슷한 것은 느껴봤습니다. 제가 감옥 안에서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해방신학이라던가 민중신학 같은 그런 계통의 책을 모두 불허 당했기 때문에 감옥 안에서 전혀 못 봤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 덕분에 많은 사색을 했다는 것, 가령 예를 들어서 예수복음서를 읽으면서 뭐가 딱 느끼는 거 올 때 “아, 기독교인들은 이런 것을 은총이라고 하는구나” 하는 그런 느낌은 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은총인지 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는 세리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세리를 왜 사랑해야 합니까. 세리는 여러분께서 알다시피 로마제국의 세금징수인인데, 로마제국의 따까리입니다. 말하자면 하수인입니다. 세리를 유태인이 했다는 말이죠. 근데 그 당시 세리들은 민족반역자 아닙니까? 일제 시대 우리 나라에서 보면 일본순사가 되었던 조선 사람 같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세리가 그런 역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세리를 사랑해야 하느냐 . 아마 그 당시 유태인들 중에는 거의 다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롯당이던가. 그런 사람들이 굉장히 정치적인 래디컬적 운동을 시도했는데요. 그런 사람들은 아마 정치적인 문제가 깨어져 버리면 예수처럼 강하지 못했을 겁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 예수처럼 그 단단한 것을 안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쨌든 제롯당은 세리를 증오했을 겁니다. 우리 나라 독립운동가들이 친일파 순사나 경찰들을 데려다가 처단했듯이, 그 처단하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처단은 아주 악질은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증오를 하면서 처단하는 것과 그리고 우리 뭔가 깊은 역사적인 인식 아래 처단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왜 세리를 사랑하라고 했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감옥에서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교도관들, 간수들, 불쌍합니다. 간수들은 항상 우리를 핍박합니다. 우리를 끌어다가 두들겨 패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들과 관련한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서대문구치소가 독립문에 있는 데에, 제가 미결 때 거기 살았습니다. 거기서 간수가 아래 위층에서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야간 근무할 때 심심하니까. 죄수들은 전부 다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잠자고 있지 않은 사람만 아래 위층에서 근무하는 간수가 두 사람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것이죠. 근데 한 간수가 말하기를 다른 간수에게 '자네는 바깥에서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래?' 그랬다구요. 그러니까 '그런 거 뭐라고 묻느냐' 하니까, 그거 물었던 사람이 항상 남편 직업을 사람들이 물어봐서 아주 곤란하다고 그러더라. 그러니까 위층에 있는 간수가 뭐라고 그랬냐 하면, 우리 마누라는 누가 남편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아, 법무부에 근무합니다' 그렇게 대답한데요. 그러니까 '법무부에서 어떤 직책에 있습니까?' 하고 묻는데요. 그러니까 '한 250명 데리고 있습니다'라고 한데요. 거기에 간수들의 애환 같은 것이 그대로 스며 있습니다. 저는 이 사람들이 굉장히 불쌍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불쌍하다기보다도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자꾸만 이 사람들이 무의식 대중이라는 겁니다

제 이야기는, 무의식 대중이라고 생각한 이 사람들이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간수들에 대한 측은함이 뭔가 가슴에 와 닿을 때, 이 때 저는 예수가 세리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했던 뜻을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아마 같은, 비슷한 뜻일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비슷한 느낌 딱 올 때 이럴 때, 말단 간수들에게 얼마나 잘해줘야 하는가 새삼 깨닫게 되고, 그런 때 뭔가 제가 한 사람의 사회운동가로서 조금 성장했다 하는 느낌이 오고, 이런 것들이 따뜻한 교도소 운동마당을 비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운동마당에서 이런 사실을 홀연히 느꼈을 때 '아, 이거 은총이다' 하는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은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참, 저는 기독교인이 아니니까 은총이 뭔지 배운 바가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예수를 많이 배웠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들을 많이 배웠습니다. 누가복음 마태복음 마가복음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차이들, 이러한 차이들에 대해 사색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일일이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가령 마태복음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하고, 마가복음에서는 그런 건 없고, 누가복음에서는 단순히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합니다. 그럼 예수가 어느 말을 했는가? 예수가 마태복음에서 했던 말이 옳은가 누가복음에서 한 말이 옳은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마태복음에서는 산꼭대기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누가복음은 편지를 통해 복음을 썼습니다. 이런 차이에 대해서 우리는 알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냥 신앙이니까 그냥 믿어버리면 된다는 생각, 저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저는 신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이 자기가 뭔가 알려고 노력해야 하고, 신앙으로 행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지 실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지 이런 문제를 알려고 하는데, 머리로만 알려고 하지 말고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경험, 그리고 신앙의 경험, 역사적 경험, 사회적 경험, 그런 것들을 가져다가 전력으로 그 안에 투입해야 합니다. 복음서 속에 나 같으면 어떻게 이야기했을 것인가? 예수가 만약에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야기했겠는가? 그런 것을 알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은 제가 살아온 모든 지금까지 살아온 45년간을 축적한 치열한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는 마음이 아니라 그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렇게 외쳤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교도소에 있을 때 그렇게 느꼈습니다. 저는 무조건 뭔가 덮어놓고 '나는 이 사람들 편이 되고 싶다' 하고 느낄 때가 있는 것입니다. 뭔가 너무나도 비참한 사람들을 볼 때 이건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덮어놓고 이 사람들 편이 되고 싶다 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저 나름대로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할 필요 없고 또 두서도 없으니까. 너무 곤란한 질문은 하지 마십시오

김세준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리스도인이 되실 것 같습니다.

서준식 김세준 씨는 아직도 꿈에서 못 깨어나는군요.(모두 웃음)

이웃과 세상에 대한 경청(敬聽) / 박성준(성공회대 교수) 불교신문

이웃과 세상에 대한 경청(敬聽) / 박성준(성공회대 교수) < 신행 < 수행·신행 < 기사본문 - 불교신문



==
이웃과 세상에 대한 경청(敬聽) / 박성준(성공회대 교수)
신행
입력 2003.06.25 13:02
호수 152

“불교의 좋은 점?” 우선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면, -‘도그마’가 없다.-인간을 신이라 하지 않는다.-현대 과학의 지식과 융화한다.-다른 종교에 대해 관대하다.-사람마다 저 나름의 방식으로 깨달음과 해탈의 길을 추구할 수 있다.-불교에서는 깨달은 사람을 ‘부처’라 한다. 누구라도 존재의 실상을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불교에 대해 대강 이러한 호감을 가진 지는 오래됐다. 그런데도 불교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나는 대학 재학 중 군에 입대하여 병영생활 틈틈이 영어 성경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인간 예수의 인품과 매력에 이끌려 기독교신자가 되었다. 그 후 40여년의 세월동안 기독교 신앙으로 인한 마음의 갈등과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구나 역사와 사회에 대한 맑스주의적 해석에 눈떴던 나는 서구 기독교세계의 폭력성과 제국주의적 성격에 대해 예민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따금 내 마음속을 파고드는 ‘부끄러움’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인막?태어난 내가 서양종교인 기독교인이 되어 기독교에 대해서는 좀 안다고 하면서도, 우리 조상들이 삶의 근거로 삼아왔던 종교와 사상과 문화 전통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자각이었다. 나는 그래서 나름대로 노력해 보았다. 특히 불교의 경우 제법 많은 시간을 들여 불교의 골자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나의 이런 시도들은 한마디로 실패였다.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에 깊이 물들어 있었던 탓인지 한문투로 표현되어 있는 불교의 언어들이 쉽게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러던 중 1998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3년간 공부하게 되었는데 필라델피아 근교에 있는 펜들 힐(Pendle Hill)이라는 퀘이커의 작은 학교에서 내가 존경하게 된 퀘이커들 가운데 불교에 깊이 심취해 있는 분들을 만났다.그들은 베트남 출신의 승려 틱낫한스님의 책들을 읽어보라고 권해 주었다. 쉬운 영어로 읽기 때문에 한문 투의 추상적 언어에 부딪치지 않아 좋았고 적절히 예화를 섞어 친절하게 풀면서도 시적(詩的) 여운을 풍기는 틱낫한 스님의 문체는 신선했다. “아, 드디어 나도 불교 서적을 재미를 느끼며 읽을 수 있게 되었구나!” 나는 오랜만에 만족했고 행복을 느꼈다. 나는 이 책과 또 내가 접한 그의 모든 다른 책들에서 ‘mindfulness’가 불교적 수행의 ‘심장’에 해당할 만큼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mindfulness’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이 말을 우리말로 옮기고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나는 ‘mindfulness’를 ‘깨어있는 가득한 마음’, ‘따뜻한 마음으로 깨어있기’ 등으로 옮긴다. 그리고 ‘mindfulness’를 풀어서 설명하기를, ‘깨어있는 가득한 마음’은 “어느 한 구석도 이지러짐이 없는 보름달처럼 가득하게 따뜻한 마음으로 나 자신과 이웃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깨어있는 것을 말한다”고 설명하곤 한다. 나의 이런 이해는 “참다운 불교수행은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이루어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실상사 도법스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결과이기도 하다.나는 ‘mindfulness’를 퀘이커의 ‘고요한 귀기울임’(listening)에 접맥시켜 경청(敬聽; mindful listening)’ 이라는 말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경청’은 “공경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임”이다. 마음을 열고 자기를 온전히 내맡겨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통째로 듣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청(敬聽)’을 ‘움직이는 학교’(이것은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만남의 방법론이다)의 원리로 삼고 있다. <사진제공 열림원>

한국신학/종교학 - 21세기의 문턱에서 民衆神學을 다시 생각한다 / 박성준 2005

한국신학/종교학 - 21세기의 문턱에서 民衆神學을 다시 생각한다 / 박성준

21세기의 문턱에서 民衆神學을 다시 생각한다 / 박성준민중신학조회 수 1923 추천 수 221 2005.11.26 12:48:11
허호익*.218.50.53http://theologia.kr/board_korea/27585







“21세기의 문턱에서 民衆神學을 다시 생각한다.”


--‘民衆’ 理解의 새 지평을 모색하며--


박 성 준


1999. 11. 3


一. 문제제기


서남동은 한국민중의 ‘恨’을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심 주제로 삼는 독특한 기여를 했다. 나는 ‘한’을 민중신학의 핵심 주제로 설정하는 데 대하여 서남동에게 확고한 지지를 보내왔고 그 점에 있어서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민중이 ‘자기 안에 모시고 있는 한울님’(동학=崔水雲) 또는 ‘내재하는 빛’(the Light within) (퀘이커=George Fox)을 민중신학적 성찰의 중심에 놓는, 그래서 ‘한’과 더불어 또 하나의 핵심되는 주제로 삼는 민중신학의 새로운 얼개를 구상해 보게 되었다. 민중의 ‘한’이라는 하나의 핵심에 편중되면 역사창조 주체로서의 민중의 생명력(자율성, 자주성, 창조성, 자기 구원의 주체성)이라는 다른 하나의 핵심이 가려지거나 약화될 우려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민중 안에 있는 ‘恨’은 보면서 민중이 자기 안에 모시고 있는 ‘빛’(=그리스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민중의 일면 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서남동이 지배자의 언어인 ‘죄’에 대해서 민중의 언어인 ‘한’을 제시한 것은 옳다. 그러나 이제는 지배자의 언어인 ‘죄’에 대해서 민중 안에 있는 ‘빛’을 제시할 차례이다. 민중의 ‘한’과 함께 ‘빛’을 보고 그 상호관계를 알아내려고 노력하면서 그 양자를 민중신학의 중심에 역동적으로 위치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남동의 신학에서 민중의 ‘한’과 ‘고난’이 민중의 ‘메시아성’으로 연결되는 통로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능력’이라는 기독교의 正統 敎義에 있었다. 민중의 메시아성을 이렇게 대속적 능력 쪽으로만 치우쳐 이해할 것이 아니라 민중이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빛과 창조력에도 동시에 주목하면서 그 메시아성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안병무가 이따금 언급하며 경탄해 마지않았던 민중의 자기초월의 능력은 ‘초월’이면서 동시에 민중에게 본래 ‘내재’하는 생명력에 다름 아니다. 이제 우리는 씨(함석헌)인 민중의 속 깊이 숨겨져 있는 무궁무진한 잠재 가능성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씨의 살아 숨쉬는 보배로운 생명력, 그 경이로운 역동성에 새삼 눈뜨고 이를 주목하고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21세기와 새 천년(the New Millenium)의 ‘새 민중신학’을 힘차게 열어가야 한다.


나는 결코 민중에 대한 美化나 낭만화(romanticize)를 찬성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실의 있는 그대로의 민중을 말해야 한다. 낭만화된 관념 속의 민중, 비현실화되고 박제화된 민중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민중, 질긴 생존력으로 일상의 삶의 터전에 뿌리내린 ‘생활하는 주체’로서의 민중을 있는 그대로 다루어야 한다. 자기 속에 ‘한’을 품고 살지만 ‘빛’도 품고 살아가는 온전한 민중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서남동, 안병무의 민중이해에 다음과 같은 점들을 보완하거나 새롭게 추가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첫째로, 함석헌의 민중 이해로부터 ‘씨’을 받아들이되 <ㅇ  ㄹ>의 각 요소를 적극적으로 深化 發展시킨다. 즉 <ㅇ>은 초월적인 하늘을, <  >는 내재적인 하늘을, <ㄹ>은 활동하는 생명을 나타낸다고 그가 스스로 설명해 놓은 그 각 項을 적극적으로 탐구해서 한층 더 심오하고 풍부하게 전개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제를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들이 지원받을 수 있는 사상적 源泉(resources)으로서는, 한쪽으로는 東學이라는 큰 사상의 젖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함석헌 자신이 훗날 그 멤버가 되었던 퀘이커의 사상, 그 중에서도 특히 초기 퀘이커 사상(Early Quakerism)이라는 큰 광맥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둘째로, 민중의 목마름의 重層구조를 천착하는 것이다. 민중이 갈구해 마지않는 구원과 해방에의 타는 목마름 곧 민중의 영성은, 예컨대 민주주의와 사회정의, 日常의 안전과 편안함, 경제적 안정 등에의 갈망이라는 層位가 있는가 하면, 우정과 고독, 사랑의 아픔과 번뇌, 인간관계의 어려움에서 오는 고민 등의 層位가 있으며, 영혼의 虛飢, 생애를 통해 지속되는 인격의 성숙과 자기완성에의 渴求, 진실과 진리를 향한 목마름, 疾苦와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등의 層位, 이렇게 複雜하고 重層的이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이 목마름을 ‘민중의 거룩한 갈망’(the holy longing of minjung) 또는 ‘민중 영성’(minjung spirituality)이라는 범주로서 다루어 볼 수 있다.


셋째로, 민중신학은 ‘사건’의 신학을 보완하기 위해 ‘사건’과 ‘日常’을 손의 앞뒤면 처럼 설정하여, 사건과 일상이 갖는 각각의 의미와 함께 둘 사이의 긴밀한 상호관련성을 올바르게 밝힐 필요가 있다. 민중은 1970년대, 8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연쇄적으로 분출하는 활화산 기슭에서, 또는 언제 터질지 모르게 꿈틀대는 화산맥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민중은 아마도 더 많은 일상의 시간을 너른 들녘을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갈 수도 있으며 때로는 여름 한철 가뭄에 강바닥으로 스며들어 소리 없는 지하수로 흐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땅 속으로 흐르는 지하수가 없다면 장대비가 아무리 퍼부어도 샘의 분출은 있을 수 없다. 물이 콸콸 솟는 샘은 실은 땅 속을 흐르는 저류(the underground stream)와 연결되어 그것에 의해 지탱되고(sustained) 있는 것이다. 사건과 일상의 관계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사건’의 신학에 균형을 가져다주는 ‘민중적 일상’의 신학화가 요청된다.


넷째로는, 민중 공동체 운동이다. 이거, 저 70년대, 80년대부터 귀가 아프게 들어왔던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 해 아래 새 것은 없다. 그러나 질적으로 다른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민중이란 무엇인가? 공동체란 무엇인가? 운동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근본적으로(radically) 다시 묻고, 다시 시작해야 하겠다.






二. 민중 이해의 새 지평


1. 민중신학의 先驅: 함석헌의 씨 사상


함석헌은 씨의 은유로 역사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根幹이 되는 사람, 곧 민중을 나타내고자 했다. 민중은 씨이다. 태어난 그저 그대로인 씨, 풀씨 같은 존재. “씨이란 다른 거 아니고 자연이지요. 문명은 결국은 자연에서 멀어져 가는 방향이고(참 문명이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러니깐 지금은 사람의 큰 잘못이 자연을 잊어버리고 자연에 반항하고 하는 건데, 근본의 절대적인 의지랄까 그게 곧 자연인데, 자연 속에 있는 건데----”(“씨의 소리, 씨의 사상” <씨의 소리> 76년 9월호)


씨은 이 끝에서 보면 있는 그대로인 ‘나’이고 저 끝에서 보면 하나님이라고 한다. 결국 민중 곧 씨과 하나님은 이 끝과 저 끝으로 서로 연결된, 둘이 아닌 한 <>이다.


“민중이 뭐냐? 씨이 뭐냐? 곧 나다. 나대로 있는 사람이다. 모든 옷을 벗은 사람, 곧  사람이다. 은 실(實), 참, real이다.............정말 있는 것은, 은, 한  뿐이다. 그 한 이 이 끝에서는 나로 알려져있고, 저 끝에서는 하나님, 하늘, 브라만으로 알려져 있다.”(“씨의 설음”, 함석헌 전집 제4권, 66면)


나아가, 함석헌은 씨의 속에 있는 것 곧 씨의 ‘혼’을 불러내자고 한다. 그렇게만 하면 산을 옮기고 바다를 메우는 것 같은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속에 있는 것을 어떻게 불러내느냐가 문제다. 속에는 다 개인의 행위와 역사의 사건으로 영향을 입지 않는, 입힐 수 없는 혼이 잠자고 있다. 그것을 불러내기만 하면 된다...........씨 속에 잠을 자고 기다리고 있는 나라가 있다. 그것은 일할 터를 찾고 일할 거리를 기다린다. 그것을 능히 알아 불러내어 동원하면 산을 옮길 수 있고 바다를 메울 수 있을 것이다.”(“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함석헌 전집 제4권 129면)


이와 더불어, 씨은 마땅히 ‘남의 종교’가 아닌 ‘내 종교’를 가져야 한다. “(불교와 기독교가) 다 위대한 종교지. 하지만 남의 고래등같은 기와집은 우리 초가삼간 보다 작은 집이다. 내 종교가 큰 종교지, 내 것이 되지 못한 종교...........종교의 허울이 무슨 위대한 종교일 수 있을까? 제 종교만이 큰 종교다. 제 종교를 가진 한 사람만 있어도 온 세상이 다 구원될 것이다.”(“씨의 설음”, 전집 제4권 65면)


“큰 것은 하나님이요, 큰 것은 나다. 하나님과 직접 연락된 내가 ‘한’ 곧 큰 것이요, 그 직선을 종축으로 삼으면 온 우주를 돌릴 수 있다. 그러니 나에게까지 뚫리지 못한 종교, 나와 하나님을 맞대주지 못하는 종교는 참 종교 아니다. 나의 종교가 종교다. 교도(敎徒)가 있는 것은 종교 아니다. 참 종교는 한 사람의 신자를 가질 뿐이다...........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하라..........아무도 이 결혼의 중간에 서지 마라.”(“씨의 설음”, 전집 제4권, 65면)


민중은 자기 속 깊이에 계신 하나님, 그 창조적인 생명과 무한한 힘의 源泉에 깊숙이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민중 곧 씨은 자기 속의 하나님을 직접 만나야 한다. 그 하나님을 모시고 섬겨야 한다. 내 안의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해답을 간절히 구하고 거기에 맞추어 각자 자기의 삶의 방향과 목적을 재정립하고 자신의 생애를 통해 이를 관철해야 한다.


씨 속에, 곧 내 속에 잠을 자고 기다리고 있는 나=하나님(‘나라’, I am.)을 일깨우고 ‘불러내자.’ 그리하여 하나 하나의 씨은 함께 새 시대, 새 나라를 바로 지금 새 천년의 시작과 함께 힘차게 열어가야 한다.






2. 퀘이커 사상과 민중신학의 만남의 가능성


퀘이커는 17세기 중엽 영국에서 일어났다. 그 시대는 종교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격동의 시대, 혁명과 변화의 시대였다. 당시 영국 국교회에서는 외적인 종교의식에 중점을 두고 있었고, 국교에 반대하는 침례파와 장로회파의 교회들은 신앙을 성경의 권위나 공식적 신조와 대체로 동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종교의식이나 신조에 염증을 느끼게 된 수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갔다. 혹은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사람들은 개인적 체험의 종교,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갈구하고 있었다.


죠오지 폭스(George Fox, 1624-1689)도 그런 사람들--당시 영국에서는 그들을 ‘구하는 자들’(seekers)이라고 불렀다--중의 하나였다. 어릴 적부터 그는 매사에 진지하고 성실했다. 製靴工의 徒弟, 소먹이 목동 등으로 지내는 동안 홀로 고요한 묵상에 잠기는 습관을 익혔고, 성경을 읽고 깊이 생각에 잠겼으며, 온 피조세계의 오묘하고 미세한 소리에도 예리하게 반응하곤 했다. 열 아홉 살 때에 집과 부모의 곁을 떠나 절절한 목마름으로 진리를 찾는 영적 여행(spiritual journey)에 나섰다. 4년간의 영혼을 달구는 숱한 시험과 연단 끝에 Pendle Hill이라는 작은 山頂에서 그는 드디어 진리를 깨닫고 환상(vision)을 보았다. 그때의 경험을 그는 이렇게 썼다:


“그들(성직자들)에게 걸었던 나의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그리하여 외적으로는 내가 의지할 아무 것도 없게 되었을 때, 내가 어찌 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게 되었을 때, 바로 그때 나는 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 예수가 계시니, 그는 너의 처지에 맞게 말씀하신다.’(‘There is one, even Christ Jesus, that can speak to thy condition.’)라는 것이었다. 이 소리를 듣자 내 가슴은 歡喜雀躍하였다. ........ 주님을 향한 나의 갈구,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지식에의 열망은 더욱 거센 불길로 타올랐다.” (Fox, 11)


그가 얻은 다음과 같은 진리는 재래적이고 인습적인 신조들(creeds)과 날카롭게 충돌하는 것들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하나님의 그것을 지니고 있다.”(that of God in everyone) 이것이 퀘이커 신앙의 精髓이다. 우리 각자의 깊은 속에 하나님의 씨앗(the Seed), 하나님의 영(the Spirit), 그리스도(the Christ), 내면의 빛(the inner Light)을 지니고 있다는 것,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 직접--즉 성직자나 교회의 儀式이나 어떤 다른 매개 없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역사적인 예수가 기름부음을 받아 (신적인) “그리스도”가 되었듯이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 계시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고 영속된다는 것(the continuing revelation). 이것이 그의 새로운 깨달음의 내용이었다. 자기 자신 속에 불타오르는 이 깨달음(revelation)을 지니고서, 죠오지 폭스는 세상를 향해서 힘차게 선포하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회개하고 돌아섭시다. 자기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을 스스로 발견하고 그러한 (즉 하나님을 모신) 존엄한 존재로서 살아갑시다.”라고.


그 깨달음을 근거로 그는 오늘날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Quaker는 별명이다.)로 알려진 신앙적 結社의 기치를 올렸다. 죠오지 폭스는 거듭 거듭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들을 몸소 가르치시기 위해 오셨다.”(Jesus Christ is come to teach his people himself.)라고 외쳤다. 이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이 ‘the Second Coming of Christ'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가 하시 하처에 육신적으로(physically) 재림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민중의 마음 속에 이미 ‘내면의 빛’, ‘씨앗’, ‘하나님의 영’이 들어있음으로 해서 이미 ‘그리스도’가 와 계신다는 것을 알리려 했던 것이다.


죠오지 폭스의 새 진리를 따라 새 사람으로 변화된(transformed)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는 것, 그리스도가 그 시대와 사회의 불의와 폭력에 도전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내면의 빛과 씨앗, 영을 통한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단지 私的인 내면의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변화된 남녀들이 새 삶의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때, 밖으로 사회와 역사 속으로 나아가는 종말론적 운동을 뜻했다. 초기 퀘이커들(Early Friends)은 당대의 사회에 불을 지피는 불씨의 전령이었다. 그들은 만나는 모든 사람, 온갖 종교집단, 모든 사회조직에 불을 붙였다.


죠오지 폭스는 17세기 영국인이었지만 오늘의 우리들과 우리 시대를 위해서도 빛을 던져주는 사람이다. 그는 과거의 사람만이 아니라 현재의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깊은 개인적 경험과 메시지, 그리고 초창기 퀘이커들의 묵시록적인 삶과 행동은 우리 시대의 긴박한 필요에도 절실하게 말을 걸어오는 보편적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함석헌은 1970년대 초 미국 필라델피아 근교의 펜들 힐(Pendle Hill; A Quaker Center for Study and Contemplation)에서 퀘이커의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씨 사상을 전개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지만, 나 자신이 비교 검토해 본 바로는 그의 씨 사상의 핵심 내용은 퀘이커 사상과 酷似하다. 민중신학의 창시자 격인 서남동과 안병무에게 미친 씨 사상의 영향을 생각할 때, 민중신학과 퀘이커사상의 만남은 일찍이 이뤄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민중신학이 민중의 ‘恨’과 더불어 민중 한 사람 한 사람 속의 ‘빛’, ‘영’, ‘그리스도’에 주목할 수 있다면 주체로서의 민중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민중을 세계와 역사의 중심에 세우는 데 새로운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3. 동학의 전통으로부터 배우기:


우리는 이제 19세기 말엽 한반도에서 출현한 동학운동, 그 중에서도 1860년-98년의 水雲 崔濟愚와 海月 崔時亨, 그리고 갑오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난 후 동학의 재건을 의도했던 甑山 姜一淳의 사상과 실천에 주목할 차례다.


동학은 19세기말, 조선의 봉건제가 한계에 도달, 근대사회로 이행되기 시작하는 세기말적인 일대 전환기에 피어난 한국사상문화종교의 꽃이고, 조선의 근대역사가 시작되는 發源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1) 동학이 창시되던 1860년 당대의 조선의 현실에 대한 수운의 인식은 개인과 사회, 국가와 세계 질서의 모든 차원에서 총체적 위기 그것이었다. 조선왕조는, 지배층의 부패와 타락, 신분제의 문란(紊亂), 도탄(塗炭)에 빠진 민중의 잦은 봉기와 사회적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몰락의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서양세력의 동아시아 침략으로 과거의 중국 중심의 질서가 무너지고 구미제국의 근대문명이 압도해오는 가운데, 전통적 종교인 儒佛仙은 정신적 지주나 새로운 사회이념의 기능을 이미 상실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윤리와 가치규범의 붕괴, 사상의 혼돈, 민중의 정신적 방황이 극도에 달한 시대였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조선사회에는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여 민중은 불안과 공포에 떨고있었다.


절망과 암흑의 시대, 바로 그 한가운데서, 수운은 先天문화 질서의 종말과 후천개벽의 새 문화, 새 시대의 도래를 예감했다. 수운은, 동양문명의 해체와 몰락, 서양문명의 침략적 폭력성을 확인하면서, 전통적 지배이념인 朱子學을 대체할 새로운 道學을 갈구했다. 그는 前人未踏의 새 길, 동서양의 기존의 종교와 사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원리를 찾아내어 新天地, 新文明을 구현하고자 고난에 찬 구도의 길을 홀로 걸었다.


“庚申年에 이르러 전하여 오는 말을 들으니 서양사람들은 한울님을 위한다는 뜻으로 부귀는 취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천하를 쳐서 빼앗아 그들의 교회당을 세우고 그들의 교를 널리 퍼뜨린다는 것이므로, 나는 과연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되었느니라.”<東經大典, 前編 五>


“서양사람들은 전쟁을 하면 이기므로 쳐서 빼앗아 그들의 뜻대로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 이리하여 천하가 다 멸망한다면, 어찌 입술이 상하여 없어지면 이가 시려 견디기 어려운 것과 같이 되지 아니하겠는가.” <東經大典, 前編 九>





본격적인 구도의 길을 걷기 시작한지 6년째 되던 1860년 음력4월, 그의 나이 37세 때 그는 결정적인 종교적 체험을 통해 得道에 이른다. 그의 신비체험은 한울님 마음과 하나가 된 경지에서 ‘天語’를 듣게 된 것이었는데 그것은 한울님과의 사이에 문답 형식으로 여러 달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 내용을 냉철히 반성 체득하면서 일년 여에 걸쳐 동학의 신관, 세계관, 인간관, 修行法 등을 글로 체계화해 나갔다. 득도한 이듬해(1861년) 6월부터 그는 布敎에 나섰다. 득도로부터 체포되기까지 불과 2년 6개월 사이에 수운은 漢文體의 <東經大典>과 한글로 된 <용담유사(龍潭遺詞)>를 저술하여 후세에 전하게 되었다.


수운의 가르침은 고통과 시련에 찬 현실을 극복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역사를 이 땅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씨앗을 그 시대의 민중들의 가슴에 심었다. 사방에서 그의 소문을 듣고 그의 거처인 경상북도 慶州 龍潭亭으로 찾아오는 민중들이 줄을 이었다. 그들은 수운의 가르침을 듣고 바로 그 자리에서 그를 따랐다.


1864년 3월 수운은 41세의 나이로 斬首刑에 처해졌는데, 세상을 어지럽게 한 邪術의 傀首라는 죄목이었다.


수운의 제자이자 동지였던 해월은 道統 承繼 후 殉道할 때까지 30여년 간 가시밭 길을 걸으며 조선 땅에 동학을 뿌리내리게 하는 데 헌신했다. 그는 ‘人乃天’, ‘事人如天’의 교의로써 교도들을 지도하는 한편, 지배권력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接’조직을 확장해나가다가 1898년(72세) ‘左道亂正’의 죄목으로 스승 수운의 뒤를 따라 교수형에 처해졌다.


2) 동학의 인간 이해의 핵심은, 사람은 한울님의 신령한 본성을 몸 안에 모시고 있는 신령하고 존엄한 존재라는 데 있다. 사람이 곧 한울님, 한울사람, 섬김 받아야 할 신령한 존재이다. 사람은 자신이 이러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될 때 자기 자신과 타인을 지극히 공경(敬人)하게 되고 한울님을 공경(敬天)하게 되며 한울님의 뜻을 이 세상 속에서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주체로서 바로 서게 된다. 즉 현재의 일상생활 속에서 그분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사는 신령한 인격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한울사람(God's person)을 통해서만 사회와 세상의 聖化(한울나라의 실현)가 가능해진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주체성은 우주 가족의 일원으로서 더 큰 생명인 우주를 어버이로서 섬기며(敬物), 우주 자연계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어 相生(서로 살림)의 삶을 살아야 하는 책임적 존재이다.


동학에서는 지금까지 저 밖에 있는 신(God without)을 향해 놓았던 祭床과 位牌를 나를 향해(向我) 돌려놓도록 하는 새로운 祭祀法을 창안했다. 이것을 ‘向我設位’라고 하는데, 저 밖에 있는 초월적 신을 상정한 인류 문명 문화 樣式의 일대전환과 정신개벽을 이로써 상징한다.


또한 ‘同歸一體’라고 하여 후천개벽운동의 동반자들의 공동체, 새 인간(한울사람), 새 천지(한울나라)의 비전을 가지고 인류문명사의 새 지평을 열어가고자 하는 신령한 도덕적 주체들의 공동체를 제시한다. 이 공동체는 타종교 공동체의 전통을 존중하며 관용의 정신과 개방적 태도로써 후천개벽의 역사를 창조해나가는 길동무(道伴)들의 공동체이다. 동학에서는 특히 생활의 주인이자 新天地 창조의 주역으로서의 여성의 지위가 강조된다.


3) 강증산은 스무 살 무렵에 동학당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甲午동학혁명이 실패한 뒤, 시체가 가득 널려진 폐허의 강산을 여러 해에 걸쳐 편력했다. 그때에 그는 구천에 사무치는 울부짖음과 살을 저미고 뼈를 깎는 민중의 고통을 보았으며 민중이 그 얼마나 절실하게 생명의 회복을 바라고 있는가를 사무치게 절감했다. 따라서 간증산은 자기의 목표를 동학의 동세개벽 실패 이후의 민생의 재건과 활인(活人)에 두게 되었다.


갑오동학혁명이 민중반란의 조직적 확대를 통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혁파함으로써 후천개벽을 실현하려 했다면, 강증산의 실천은 하나 하나의 이름 없는 민중들의 그날 그날의 먹고, 살고, 입고(衣食住), 고통받고, 병들고, 죽고, 두려움과 굶주림과 죽임 당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구체적인 삶, 곧 민중생존을 중심으로 하여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매일 매일의 自助 自活의 작은 공동체 건설과 협동생활의 조직을 통해 후천개벽을 실천해 나가는 방향이었다.(김지하 사상기행, 2권, 206-9면 참조)


그렇다면 강증산의 사상과 실천은 ‘민중적 일상’의 신학화를 꾀하려는 우리들의 작업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사람은 한울님의 신령한 본성을 몸 안에 모시고 있는 신령하고 존엄한 존재라고 하는 동학의 인간관은, 매개 사람 속의 빛, 영,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퀘이커 사상과도 일맥 상통하는 바가 있다. 민중신학은 퀘이커 사상의 인간이해로부터 배움과 동시에 동학의 인간관을 민중이해에 적극 도입함으로써 민중의 대상화, 객체화를 극복하고 민중의 ‘주체화’에 진실로 기여하는 큰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三. 민중적 영성론의 가능성:


1. 영어권에서도 spirituality란 말이 등장한 것은 지난 30년 어간의 일이라 한다. 이렇게 새로운 말이고 보니 한국에서는 그 용법이나 의미를 둘러싸고 적잖은 오해와 혼선이 있기 마련이었다. 처음에는 이 말이 카리스마 집회나 성령파 교회들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연유로 해서 민중신학자들은 애써 이 말을 기피했고 금기시하는 경향마저 있었다. 80년대에 들어와 남미 해방신학 쪽에서 spirituality라는 범주를 사용하여 심도있는 신학작업을 전개하는 것은 보고서야 새로운 관심과 눈으로 이 말을 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중신학 내부에서 spirituality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는 아직 드문 것 같고, 여전히 개념의 혼란이 가셔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나 자신 아직 본격적인 공부가 부족하여 spirituality의 정의조차 내리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지만, 민중적 영성론의 필요성과 가능성의 예감만은 절실하다.


2. 함석헌은 씨의 속에 있는 것 곧 씨의 ‘혼’을 불러내자고 했다. 그렇게만 하면 산을 옮기고 바다를 메우는 것 같은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씨의 혼’이라. 혹시 이것이 바로 민중의 영성 아닐런지? spirituality는 사람의 존재 깊은 곳에서 그 존재를 관통하고 그 존재를 떠받치고 그 존재를 推動하는 영적 힘, 에너지, 불꽃과 같은 그 무엇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던 원치 않던 간에, 우리가 종교적이든 아니든 간에,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spirituality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spirituality는 기독교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다. 따라서 불교인의 영성, 무신론자의 영성도 있을 수 있다.(나는 사실 감옥에서 무신론자들의 심오한 영성에 무수히 접했다.)


3. 민중이 갈구해 마지않는 구원과 해방에의 타는 목마름이 바로 민중의 영성 아닌가. 나는 앞에서, 민중신학은 민중의 이 목마름을 ‘민중의 거룩한 갈망’(the holy longing of minjung) 또는 ‘민중 영성’(minjung spirituality)이라는 범주로서 다루어 볼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민중신학이 민중의 ‘恨’이라는 범주로 다루어온 영역과 크게 겹치는(overlap) 영역이어서 민중의 恨과 민중 spirituality의 관계와 구조는 무엇인가 라는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4. spirituality는 우리의 日常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의 욕망과 애정, 고통과 슬픔, 고독, 야심과 좌절감, 불안과 초조, 공포와 희망 등등, 이 하나 하나가 spirituality와 깊이 관련된다. 어떤 사람의 영성은 그가 자기 속의 그 영적 에너지 혹은 불꽃을 가지고 실제로 현실 속에서 무엇을 행하는가와 깊이 관련된다. 즉 spirituality는 신앙이나 종교성과 관련된 것 이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매일 매일의 일상과 관련된 것이다. 사랑(compassion)과 자비(mercy), 평화와 화해를 간절히 구하는 마음, 참된 민주주의와 사회적 정의를 갈구하는 정치적 각성, 깨어있는 양심, 도덕적 민감성 등은 민중적 영성의 불가결한 요소들(integral elements)이다.


5. spirituality는 개인적인 것 만이 아니다. 개인적인 것임과 동시에 사회적, 공동체적인 것이다. ‘나의 영성’과 동시에 ‘우리의 영성’이 존재한다. 개인주의에 물든 사회와 그 문화(individualistic culture)에서는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에 촛점이 맞춰지기 쉽다. 그래서 개인적 영성은 자칫하면 ‘개인주의적 영성’으로 頹落할 수 있다. 개인적 영성에만 집착하거나 매몰되면 영적 개인주의와 영적 이기주의에 빠질 수 있고 영적 우상숭배의 위험에 떨어질 수 있다. 반면에 공동체적 영성의 경우에는, 개인의 영적 생활(personal spiritual life)에 기울이는 집중력이 떨어질 때, 영적 메마름과 세속화라는 또 다른 위험이 있다.


개인의 영적 체험과 공동의 영적 수련은 상호 의존적이다. 서로 보완하고 서로 북돋아 준다. 민중신학은 개인의 영적 체험 또는 개인적 영성수련과 공동체적 영성 또는 영적 공동 생활(spiritual life together)에 같은 비중을 두어 이 양자 사이의 조화와 균형을 도모해야 한다.


공동체적 영성은 함께드리는 예배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된다. 각자가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바친 영적 생활의 밀도는 함께 드리는 예배의 質을 좌우한다.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이는 고요한 묵상과 기도가 쌓이고 쌓여서 깊이를 더해갈 때, 개인과 공동체의 영성을 고양시켜주는 높은 질의 예배를 드릴 수가 있다.


6. 밥상(식탁)공동체는 공동체적 영성의 실천 모델이 되며 민중적 영성의 엣센스를 집약한 것이다. 민중신학은 해월의 밥 사상과 향아설위의 밥상 차리기로부터 배우면서 다음과 같이 相生의 식사예법을 고안할 수 있을 것이다.


(1)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한다. (2)원을 그리고 둘러앉는다. (3)기쁨과 감사에 넘치는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 손을 잡고 잠시 묵상(또는 짧게 한마디씩 기도)한 후 함께 담소하며 서두르지 않고 즐겁고 느긋하게 식사한다. (4)설거지도 음식을 만드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참여한다. (5)음식찌꺼기는 버리지 않고 따로 모아서 거름으로 쓴다.


7. 민중적 영성은 서로 모시고 섬기는 相生의 영성이다. 그 엣센스는 겸허하게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깊이 귀기울여 듣는 데(敬聽, mindful listening) 있다. 나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열어 놓고 하나님에게, 자연에게, 그리고 사람에게 고요히, 정성을 다해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민중신학에는 이 敬聽의 영성이 부족하지 않은가 여겨진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서 억눌린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증언자의 역할을 자임하다보니 민중, 씨에게 귀기울여 듣는 마음의 餘白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말하는’(preaching) 종교지 ‘듣는’(listening)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큰 약점의 하나다. 하나님과 자연과 사람이 관계의 그물에 얽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상호의존하고 있는 이 우주와 세계 공동체 안에서 ‘敬聽의 spirituality’가 없이는 相生의 관계를 창조해나갈 수가 없다. 이제 21세기와 새 천년의 입구에서 기독교는, 그리고 민중신학은, 말하는 ‘입’으로부터 듣는 ‘귀’로의 radical한 파라다임 전환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된다.


8. 예언자적 선포(prophetic speaking)는 중요하다. 그러나 예언자적 경청(prophetic listening)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예언자적 경청은 권력과 富에 억눌리고 빼앗겨온 자연과 민중, 곧 씨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씨에게 경청한다 함은 하나님께 경청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된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것 같을 때, 더 깊숙이 귀를 기울여 고요히 기다려 보라. 소리 아닌 소리가 내 마음의 귀에 들려오지 않는가. 민중인 씨(들)에게 말과 설교를 가지고 가는 대신에 마음의 귀를 가지고 가본 사람은 안다. 경청하는 사람이 자신의 계획이나 용건, 판단이나 충고 따위를 완전히 접어놓고, 오로지 상대방에게 전적으로 나를 내맡기는 방법으로 귀를 기울일 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관계가 둘 사이에 싹튼다는 것을.


듣기에만 길들여져 있는 것으로 보였던 씨이, 그래서 자기 주견이나 이야기 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듯이 보였던 민중이 비로소 가슴을 열고 이야기 꾸러미를 풀어놓기 시작할 때, 그(들) 자신 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던 놀라운 지혜와 꿈과 비전이 엉킨 실타래 풀리듯 술술 풀려 나오지 않던가. 이 새로운 관계, 새 카이로스 속에서 상처가 아물고 한풀이가 시작된다. 씨이 제 이야기에 스스로 격려를 받고 힘이 북돋아져 현재의 곤경을 박차고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열리고 문제에 해답이 주어진다. 이것이 바로 함석헌이 말한 “씨의 혼(魂)을 불러내는” 방법이 아닐까.





四. 21세기, 새 천년기에 민중은 어떻게 살 것인가?


-- 민중적 삶의 양식으로서의 ‘살림 공동체’ --


공동체 운동은 개인과 민족의 생존(survival)을 위해, 우리들의 문화와 지구 자체의 존속을 위해 비상히 중요하다. 현대 사회와 현대적 생활양식은 자연적 내지 가족적 공동체를 해체한 결과이다. 현대인의 삶은 파편화되었고 공동체 감각을 잃어버렸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고립되어 있고 까닭 모르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갖고 있다. 한편 그들은 사랑받고 싶어하고 함께 살아갈 동반자를 찾고 있으며, 꿈과 理想을 서로 나눌 친구를 필요로 한다. 한마디로, 현대인은 공동체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절실히 필요한 공동체, 그 중에서도 민중적 삶의 양식으로서의 공동체는 어떤 내용, 어떤 모습의 공동체일까? 우리는 김지하가 먼저 주목해서 그의 생명사상 체계 속에서 중요하게 사용하기 시작했던, 그리고 안병무가 몹씨도 아꼈던 아름다운 우리말 ‘살림’을 붙여 ‘살림공동체’를 구상해 볼 수 있다. ‘살림’이란 무엇인가?


살림은 相生 즉 서로 살리기, 살림은 生命敬畏, 살림은 죽임의 반대, 살림은 물질의 나눔, 살림은 상호존중, 살림은 차이와 다양성의 존중, 살림은 거룩한 경청, 살림은 섬김, 살림은 그저 우리네 살림살이. 그럼 살림공동체는?


나는 살림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다음의 7가지 원리로 정리해 본다.


첫째로,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균형과 조화이다.


김지하식 표현을 빌리면, “개별 인격들의 자유로운 전체인 민중”의 공동체이다.


살림 공동체 안에서는 개인의 인격과 존엄성이 존중된다. 개인의 자율성과 창조성이 진정으로 존중된다. 그러나 그 개인들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전체를 형성하되 그 전체가 또한 자유와 창의성이 넘치는 탄력적인 전체를 이룬다. 이 자유로운 전체인 살림 공동체 안에서는, 개인의 창의성(individual initiative)과 공동생활(corporal life)의 규율이 조화를 이루며 개인적 생활영역과 공동 생활영역이 공존하고 균형을유지한다.


둘째로, 다양성과 차이가 존중된다. 인종, 성, 피부색, 민족, 종교, 사상, 문화, 언어, 음식, 관습 등에 있어서의 차이와 다양성이 권장되고 존중된다.


셋째로, 깊은 영성적 修行(spiritual practices in depths)과 활발한 사회적 관심과 행동(social concern and action) 간의 균형이 가능하다고 믿으며 이 균형을 강조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 예를 들면, 영성적 수행을 통해 사회적 불의와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에 의해 야기되는 고통에 대해 민감해지도록 노력하면서,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동참하고 그들을 돕기 위해 일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배우려고 노력한다. 또한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이나 지구상의 다른 種(species)의 고통을 이용해서 이익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며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힘쓴다.


넷째로, 일의 평등성(equality at work)을 추구한다. 공동체 내에서 일과 역할의 기능적 분화가 인정되나 신분이나 지위의 개념은 인정되지 않는다. 역할의 기능적 분화가 가져올 수 있는 공동체 성원간의 평등성의 저해 또는 약화를 방지하기 위한 방도가 강구되며 평등성을 높이기 위한 다방면적인 노력이 경주된다.


다섯째, 공동체성원 간의 인간관계는 동학의 ‘侍’(모심)을 기본정신으로 한다. 즉 누구든지 사람을 대할 때 그 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과 자세로써 대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에 통하고, 베트남 출신의 스님 Thich Nhat Hanh이 강조해 마지 않는 ‘정념’(正念; ‘mindfulness’)와 일치하는 것이다.


여섯째로, 質素한 삶(plain life)을 산다. 질소한 삶이란 (1)자원과 물자를 아껴 쓰고 사치를 하지 않으며, (2)경제적 정의에 우선적 관심을 갖고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의 편에 서려고 노력하며, (3)기도와 묵상을 생활화한 삶의 방식을 말한다. 질소한 삶은 단순함(simplicity)을 소중히 여기고 餘白이 있는 삶을 사랑한다. 여기서 여백이라 함은, 일을 너무 많이 하거나 너무 바쁘게 살지 않고, 남을 위해 일하면서도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알맞게 남길 줄 아는 여유를 말한다. 또한 너무 많이 말하지 않고 남이 말할 여지를 남기며 언제나 상대방에게 조용히 귀를 기울일 줄 아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현대인의 삶의 병적 奔忙을 경계하면서 우리는 이따금 물어야 한다. “말씀이 들릴 만한 고요함이 있는가?”(Are there enough silence for the Word to be heard?)


일곱째로, 축제가 있는 공동체를 가꾼다. 축제(festival)와 祝賀(celebration)는 공동체 생활의 한 中心軸이다. 축제와 축하는 우리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생활의 시련과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힘을 북돋아준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유한 나라 사람들 보다 축제를 더 사랑한다. 부유한 나라 사람들은 축제의 감각과 기술을 상실했다. 그것은 공동체의 전통을 상실한 것과 관계가 있다. 축제는 음식을 나누는 것과 함께 공동체 성원들에게 공동체의 참 의미를 손으로 만지듯이 구체적으로 느끼게 해 준다. 축제는 생활 속에 일어나는 마찰과 사소한 분쟁의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내는 청량한 바람이 된다. 축제 속의 환희와 엑스타시(ecstasy)의 요소는 생명의 흐름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성원을 관통해서 흐르게 해주며 우리들의 가슴을 하나로 묶어 준다. 축제는 육체와 감각의 기쁨을 영의 기쁨에 연결시켜 주는 경이로운 시간이다. 따라서 축제는 공동체 생활에 필수적 요소이다.


살림 공동체는 대안적 문화로서의 음악, 詩, 춤, 노래, 이야기, 연극 등을 적절히 생활 속에 도입한다. 노약자나 장해자 등 누구나 쉽게 배워서 출 수 있는 춤(universal dances)을 개발하고 쉬운 춤사위에 공동체의 정신을 나타내는 소박한 말을 붙여(곡에 가사를 붙이듯이) 일하는 틈틈이 함께 추기도 한다.





五. 에필로그


나는 미국 펜실바니아주에 있는 Pendle Hill이라는
이 게시물을
엮인글 :
목록


허호익

November 26, 2005
*.218.50.53
五. 에필로그
나는 미국 펜실바니아주에 있는 Pendle Hill이라는 퀘이커의 공동체에서 지난 한해를 보냈다. 위에서 제시한 공통체像은 그 Pendle Hill을 모델로 하여 대체적인 윤곽을 그려본 것이다. 다만 Pendle Hill을 좀 더 민중적인 쪽으로 끌어당겼다고 할 수 있겠다.
살림공동체의 7가지 원리 하나 하나를, 구원과 해방을 절절히 갈망하는 민중의 가슴과 눈으로 읽으려고 노력하면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원리들을 구체적인 공동체운동에 응용할 때에는 내가 몸담고 사는 사회현실과 자신의 문화전통, 그리고 공동체의 조건에 맞추어 창조적으로 적용해야 할 것이다.
세계의 중심부가 아닌 아시아 대륙의 동쪽 한 주변부에 떨어진 작은 씨들의 눈이 지금 터지고 있다. 민중이라고도 불리는 이름 없는 사람들, 그들이 자신 속에 모시고 있는 하나님에 눈떠 깨어나고 있다. 그들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의 근본이다. 씨들은 자신의 문화와 사상과 전통에 돌아가 그 토양에 튼튼히 뿌리를 내릴 것이다. 나아가 그들을 에워싼 동양과 서양의 온갖 문화, 문명, 사상, 전통들로부터 자양분을 흡수하여 그들 자신의 잠재력, 생명력을 꽃피워 나갈 것이다.
바야흐로 21세기, 새 천년의 새 문명, 새 문화, 새 인류의 도래를 예비하는 새로운 삶의 양식, 곧 ‘살림 공동체’의 창조라는 가슴 뿌듯한 과제가 아시아의 민중에게 맡겨져 있다. 이 창조에서 민중신학의 몫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이 민중신학의 새로운 전개 가능성의 단초만이라도 전달할 수 있었다면 다행이겠다.



<참고 문헌>
*Larry L. Rasmusen, ‘Earth Community Earth Ethics’, 1996, Orbis
*Ed. by Martin O'Connor, ‘Is Capitalism Sustainable?’, 1994, The Guilford Press
*Helena Norberg-Hodge, Ancient Futures, -Learning from Ladakh-, 1991, Siera Club Books. (한국어역: ‘오래된 미래’, 녹색평론사)
*Jean Vanier, ‘Community and Growth’, 1989, Paulist Press
*‘Faith and Practice’, 1997, Philadelphia Yearly Meeting
*Thomas R. Kelly, ‘A Testament of Devotion’, 1941, Harper Collins
*John Punshion, ‘Encounter with Silence’, 1996, QHS
*C. G. Jung, ‘Memories, Dreams, Reflections’, 1973, Vintage
*Douglas Gwyn, ‘The Covenant Crucified -Quakers and the Rise of Capitalism-’, 1995, Pendle Hill
*Edited and Introduced by Douglas V. Steere, ‘Quaker Spirituality, selected writings’, 1984, Paulist Press
*Patricia Loring, ‘Listening Spirituality’, 1999, Loring
*Ed. by David Cren and Eric & Helen Ebbeson, ‘Living Simply’, 1981, The Seabury Press
*Mark A. Burch, ‘Simplicity’, 1995, NSP
*Grace Kuto, ‘Harambee, African Family Circle Cookbook’, 1995, Book Partners
*Thich Nhat Hanh, ‘The Miracle of Mindfulness', 1975, Beacon Press
*Thich Nhat Hanh, ‘Living Buddha, Living Christ’, 1995, Riverhead Books
*咸錫憲全集, 1987, 한길사
*김지하전집(5), ‘생명, 이 찬란한 총체’, 1991, 동광출판사
*한글 東經大全, 1991, 동학연구원
*金芝何 思想紀行, 전2권, 1999, 실천문학사

[추적] 韓明淑과 남편 朴聖焌은 통혁당 당원이었나? : 월간조선 05 2006

[추적] 韓明淑과 남편 朴聖焌은 통혁당 당원이었나? : 월간조선

[추적] 韓明淑과 남편 朴聖焌은 통혁당 당원이었나?
「朴聖焌은 통혁당 소조책」(당시 中情 발표) 韓明淑, 통혁당 사건으로 실형

[지금까지의 해명]
박성준 :『통혁당 같은 조직에 가입한 적 없다』
한명숙 :『남편 옥바라지만 했을 뿐 (통혁당 사건을) 알지 못한다』

통혁당은 북한 조선노동당의 지시를 받는 지하당이었다. 金鍾泰·金瓆洛·`李文奎는 越北해 조선노동당에 입당했고, 통혁당원 이진영·오병헌은 1968년 4월22일 越北해 교육을 받던 중 1968년 6월 말 통혁당 사건이 발생하자 북한에 머물렀다. 통혁당 서울시당 위원장 金鍾泰는 4차례에 걸쳐 북한을 왕래하면서 金日成을 면담하고 美貨 7만 달러, 韓貨 3000만원, 日貨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고 A-3지령을 167회 수신했다.
그동안 통혁당 사건에 대해서는 수사·공판과정이나 그 이후에도 별다른 고문·조작 시비가 없었다. 이 사건은 2005년 2월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우선 조사대상 사건으로 선정한 7개 사건(KAL858기 폭파, 민청학련·인혁당 사건, 동백림 사건, 김형욱 실종사건, 金大中 납치 사건, 정수장학회, 중부지역당 사건)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金成昱 미래한국신문 기자
엇갈리는 朴聖焌의 해명
2001년 박성준 교수의 61회 생일을 맞아 생일 케이크에 불을 붙이는 한명숙 총리지명자 부부.
열린당 의원 韓明淑(한명숙)씨가 국무총리에 지명된 후 남편 朴聖焌(박성준)씨의 사상편력이 화제가 되자, 朴씨는 과거 통혁당 가입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그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선노동당이나 통혁당 같은 조직에 가입한 적도 없고 포섭된 적도 없다』(4월3일 동아일보), 『사건에 연루된 申榮福(신영복)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 본 게 전부다』(3월27일 오마이뉴스), 『나는 통혁당과 관련이 없고, 사건에 연루된 申榮福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본 게 전부다』(3월27일 조선일보) 『申榮福 선생으로부터 책을 빌려 받은 것이 전부인데 15년형을 받았다』(3월25일 문화일보)고 밝혔다.

朴聖焌씨의 이 같은 해명은 자신이 이전에 한 설명과 다르다. 2001년에 발간된 季刊(계간) 「새길이야기(3호)」의 박성준 인터뷰 기사는 「마르크스 경제학 책을 번역, 그가 조직한 경제복지회 회원들에게 유포해서 옥살이를 했다」고 보도했다.

관련 부분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기자: 박성준 선생님 이력을 보면, 서울大 경제학과 졸업, 릿쿄오(立敎)대학 신학박사…, 그런데요, 감옥엔 왜 이렇게 오래 계셨어요?

박성준: 함석헌의 표현을 빌면, 하나님의 발꿈치에 채여서랄까…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이지요. 한편으론 우리의 역사 속에서, 한반도의 운명이 감옥에 쉽게 갈 수 있는 환경이었다고도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까지 쓸 필요가 있을까요? 기사의 분량이 어느 정도 되나요?

그는 한국전쟁 통에 부모를 잃고 두 살 아래인 동생과 함께 고아가 됐다. 그의 나이 열 살 때였다. 책을 살 돈이 없어, 친구들 교과서를 빌려 헌 종이 묶음에 베껴 쓰면서, 그에겐 무슨 책이든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생겨났다.

대학 시절, 그는 성서를 읽기 시작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경제학도로서 여러 경제학 책을 섭렵했다. 미국 경제학은 사회의 모순을 설명해 내지 못했다. 「함께 잘사는 세상」, 복음과 사회과학을 결합시키는 대안을 모색하던 그는, 당시 금서였던 마르크스의 경제학을 읽기 위해 일본어를 공부했고, (어릴 때부터 익힌, 「빌린 책을 단숨에 베끼는」 재주를 발휘해) 일어로 된 책들을 번역, 그가 조직한 「경제복지회」 회원들에게 유포했다. 이는 당시, 국가보안법 1조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그는, 같은 서클 후배였던 한명숙과 결혼한 지 7개월 만에 투옥, 13년 반 동안 옥살이를 했다>



ADVERTISING



2005년 6월14일 오후 평양 개선문거리에서 열린 민족통일대행진에 참가한 한명숙 총리 지명자.



재판정에 선 통혁당 사건 관련자들. 가장 오른쪽이 주범 김종태, 그 옆이 김질락.


「朴聖焌은 비밀 지하당 소조 조직책」



한명숙 총리 지명자의 남편 박성준 교수.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발표에 따르면, 朴聖焌(당시 서울大경제학과 4년. 25세)씨는 1967년 6월 申榮福에게 포섭된 「黨 小組責(당 소조책)」으로서 妻 韓明淑 및 朴璟鎬(박경호), 金國柱(김국주) 등을 黨 小組로 포섭했다.

중앙정보부는 그가 『서울 商大를 위시한 각 대학 출신 및 재학 중인 기독교계 학생을 모체로 결성된 「기독청년 경제복지회」를 주도하여 資本主義(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비판하고 소위 사회주의적 복지경제를 주장하면서 북괴의 경제제도를 찬양, 이를 연구 보급했다』고 했다.

중앙정보부는 朴聖焌씨가 주도한 「기독청년 경제복지회」 등 8개 서클을 통혁당의 「민족해방전선」 산하 조직 가운데 하나라고 발표했다.

당시 수사발표에 따르면, 통혁당은 金鍾泰(김종태)를 黨首(당수)로 하여 「민족해방전선」과 「조국해방전선」의 양대 조직으로 지도부가 구성됐었다. 「민족해방전선」은 金瓆洛(김질락)이 책임비서, 申榮福이 조직책임비서, 이진영이 교양책임비서를 맡았고,「조국해방전선」은 李文奎(이문규)가 책임비서, 尹相煥(윤상환)·吳炳哲(오병철)이 교양책임비서를 맡았다.

「민족해방전선」은 다시 「기독청년 경제복지회」를 비롯해 「새문화연구회」, 「청년문학가협회」, 「불교청년회」, 「동학회」, 「민족주의연구회」, 「경우회」, 「청맥회」의 8개 서클을 조직했다. 8개 서클은 대중조직으로서, 서클의 책임자들은 서클 속에서 쓸 만한 사람들을 포섭해 黨 小組로 조직해 갔던 것으로 알려졌다.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신영복(現 성공회大 교수).
당시 수사발표를 정리하면, 朴聖焌씨는 「민족해방전선」 산하 「기독청년 경제복지회」라는 서클의 책임자이자, 「黨 小組責」, 즉 小組책임자라는 통혁당 간부로서, 「기독청년 경제복지회」 소속 회원 중 韓明淑, 朴璟鎬, 金國柱 등을 「黨 小組」로 포섭 또는 포섭을 시도했다는 것이 된다.

공안전문가 A씨는 小組의 개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의 지하당에서 入黨(입당)한 黨員(당원) 중 최소 조직을 세포라 칭한다. 일반적으로 3명의 黨員이 1개 세포를 이루며, 3개 세포가 1개 小組를 이룬다. 小組와 세포는 지하당 활동의 최소 조직을 가리킨다』

그는 『지하당의 小組와 세포였다는 것은 당연히 지하당에 입당한 黨員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黨 小組責이란 이러한 小組와 세포를 관리하는 간부급 당원』이라고 말했다.

중앙정보부는 朴聖焌씨를 서클 회원들을 「통혁당 黨員」으로 포섭한 黨 小組責, 즉 「통혁당 간부」로 판단했고, 법원 역시 이를 받아들여 1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에서 朴聖焌씨가 포섭했다는 黨 소조원 朴璟鎬씨는 2심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고, 金國柱씨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부인 韓明淑씨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실형을 살았다.

韓총리지명자는 여성부 장관 시절이던 2003년 月刊朝鮮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中情 발표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면서, 『남편이 연루돼 있었기 때문에 아내로서 옥바라지한 것뿐이다. 알지도 못하고, 평가하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었다



통혁당 사건 관련자들. 가장 오른쪽이 주범 김종태, 그 옆이 김질락.


고문·조작 시비 없던 통혁당 사건

통혁당 리더들 가운데 북한에 다녀온 金鍾泰·金瓆洛·李文奎는 사형을 당했다. 申榮福·李在學(이재학)·吳炳哲·申光鉉(신광현)·鄭鍾韶(정종소)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金鍾泰의 아내 林寧淑(임영숙)은 12년형을 선고받았으며 기타 인물들은 5년 이하의 형을 선고받았다. 朴聖焌씨는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중앙정보부는 당시 통혁당이 합법·`非합법, 폭력·`非폭력의 배합투쟁을 통해 1970년까지 소위 「결정적 시기」를 조성, 민중봉기함으로써 공산정권 수립을 획책해 왔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통혁당 사건에 대해서는 수사·공판과정이나 그 이후에도 별다른 고문·조작 시비가 없었다. 이 사건은 2005년 2월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우선 조사대상 사건으로 선정한 7개 사건(KAL858기 폭파, 민청학련·인혁당 사건, 동백림 사건, 김형욱 실종사건, 金大中 납치 사건,정수장학회, 중부지역당 사건)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金瓆洛, 『통혁당은 北 지령받는 지하당』

통혁당은 중앙당인 북한 조선노동당의 지시를 받는 地下黨(지하당)이었다. 金鍾泰·`金瓆洛·`李文奎는 越北(월북)해 조선노동당에 입당했고, 통혁당원 이진영·`오병헌은 1968년 4월22일 越北해 교육을 받던 중 1968년 6월 말 통혁당 사건이 발생하자 북한에 머물렀다.

통혁당 서울시당 위원장 金鍾泰는 4차례에 걸쳐 북한을 왕래하면서 金日成을 면담하고 美貨 7만 달러, 韓貨 3000만원, 日貨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고 A-3지령만 167회를 수신했다.

그는 민중봉기, 간첩의 무장집단 유격투쟁을 통한 수도권 장악, 북한으로부터 무기수령을 위한 揚陸(양륙)거점 정찰, 특수요원 포섭, 월북 등 14개 항목의 공작임무를 띠고 있었다.

북한은 통혁당에 대한 검거망이 좁혀오자 金鍾泰 등을 구출하기 위해 무장공비를 남파하기도 했다. 북한 753부대 소속 무장 공작선은 1968년 8월20일 제주도에 도착했으나, 우리 軍警(군경)과의 교전 끝에 14명 중 12명이 사살되고 이관학, 송승환 등 2명은 체포됐다.

이들 무장공비들은 金鍾泰를 구출하여 월북시킨 뒤, 북한정권 수립 20주년 기념일인 9·`9절에 남한대표로 金日成 앞에서 연설하게 할 예정이었다.

주범 중 한 명인 金瓆洛은 옥중 遺稿(유고) 「주암산」에서 『통일혁명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비밀지하당 조직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리 없고, 통혁당의 조직상황과 활동상황이 金日成에게 직접 보고됐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고 썼다.

그는 같은 책에서 越北 당시 『중앙당인 조선노동당에게 우리 통혁당은 남조선 혁명을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地下黨임을 자처하고, 「남조선 혁명은 남조선 인민의 힘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각계각층에 대한 군중공작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고 기록했다.

康仁德(강인덕) 前 통일부 장관은 자신의 저서 「공산주의와 통일전선」에서 조선노동당과 통일혁명당은 指令(지령)을 내리고 받는 中央黨(중앙당)과 地下黨 관계라고 규정했다.

『통일혁명당은 출발부터 북한 중앙당의 하부조직으로 발생한 것이다. 통일혁명당 창건의 필요성, 그리고 조직적 사상적 준비는 모두 북한 조선노동당이 계획한 것이다.…당원은 제각기 독립된 인자로서 핵심을 유지하며 평양에서 발신하는 지령에 따라 단독으로 활동하면서 그 경과를 중앙당 對南사업담당부서에 보고하는 형태이다. 따라서 남한 내 지하당은 「남조선 혁명의 참모부」가 아니며 한낱 「말단 초소」에 불과하다』



한명숙 총리 지명자의 전과 조회서.




통혁당은 공산혁명 조직

中央黨 조선노동당의 통제를 받았던 地下黨 통혁당은 당연히 共産혁명 조직이었다. 金瓆洛의 수기 中 1965년 11월초 통혁당 준비위원회 결성 당시 金鍾泰의 제안 설명 중 일부를 인용해 보자.

<우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하여 反帝·`反봉건·`反식민의 민주사회를 거쳐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며…우리의 당은 비단 이북의 노동당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공산당과도 형제당이 되는 것이며 국제 공산당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남반부를 불법 강점하고 조국통일을 방해하는 원수 미제와 그 走狗(주구)들을 몰아내고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함에 있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으로 무장하고 中央黨의 지도 아래 혁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통일혁명당 창당을 선언한다>

통혁당의 이 같은 성격은 1968년 공판당시 언론에도 일부 보도됐다.

金瓆洛은 1968년 11월30일 공판정에서 『反美·`反제국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공산주의자의 ABC이다. 나는 「청맥」의 지면을 통해서 광범한 인민대중의 反美·`反괴뢰 투쟁을 선동했다』고 말했다.

金瓆洛은 그러나 1968년 12월18일 공판정에서 『지은 죄가 얼마나 큰지를 뉘우칠 뿐이며 정당함을 주장할 것이 없다』고 변호인 신문을 거부한 뒤 『그동안 공산주의를 위해 싸워 왔으나 이제는 공산주의자로서 죽고 싶지 않으며 순수한 인간으로 돌아가 죽고 싶다』고 후회했다.



북한에서는 통혁당 사건 이후에도 통혁당(한민전을 거쳐 현재는 反帝민전으로 개칭)이 한국 내에 실존하고 있는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사진은 통혁당 기관지라는「혁명전선」.


통혁당 잔존세력, 黨 재건 기도

통혁당은 1968년 조직원 대부분이 검거됐지만, 북한과 연계된 잔존세력은 이후에도 地下黨 활동을 계속했다.

1969년 8월에는 통혁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통혁당 선언·`강령이 공식 채택되기도 했다. 당시 선언과 강령을 채택한 통혁당 중앙위원회의 실체에 대해서는 異論(이론)이 있다.

통혁당 잔존세력들은 당 재건을 기도하다가 1969~1979년간 9차례나 검거됐다. 1969년 9월 경남 통혁당 재건 사건·`1969년 10월 통혁당 재건 간첩사건·`1971년 5월 호남 통혁당 재건 간첩사건·`1971년 통혁당 조직 사회혼란사건·`1971년 통혁당 재건 3개 망 간첩사건·`1972년 지하 통혁당 조직 거물간첩사건·`1975년 학원 간첩 침투사건·`1979년 삼척 고첩단 사건 등이 그것이다.

당시 공안당국은 이 사건들을 북한과 연계한 잔존세력의 통혁당 재건 사건으로 규정했다.

1969년 이후 등장한 통혁당 재건 조직들은 金日成주의 내지 主體思想(주체사상)을 내걸기 시작했다.

1969년 발표된 통혁당 선언·`강령 역시 소위 『金日成 원수의 위대한 혁명사상, 主體思想을 지도적 지침』으로 삼고 있다.

선언은 『통혁당의 지도이념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현 시대와 우리 조국현실에 독창적으로 구현한 金日成 동지의 위대한 주체사상이다. 주체사상은 40여 년간의 험난한 혁명의 폭풍우 속에서 완벽함을 과시한 우리 시대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이다』고 주장했다.

선언은 또 『우리 당은 바로 이 위대한 主體思想을 지도이념으로 삼고 있기에 불패이다. 우리 당의 최고 목적은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인류의 세기적 숙명이며 최고 이상이다』며 『미군 침략군을 격퇴하고 괴뢰정권을 타도하여 자주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인민의 정권을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북한의 對南 선전매체 「反帝민전」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한국전위조직운동사」는 『1968년 통혁당 金鍾泰, 李文奎 등 지도 핵심들은 「金日成 선집」, 「金日成 전기」와 평양방송의 방송강좌 등을 이용하여 지도사상을 교양학습하고 지도사상을 조직원 및 대중에게 선전, 유포하면서 생활의 전반에 걸쳐 실제투쟁과 조직생활을 통해 핵심으로의 단련을 거듭해 갔다』고 적고 있다.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삼다

서울시 은평구 대조동에 소재한 도서출판 「대동」의 1989년 출간서적 「통혁당」은 1968년 金鍾泰의 통혁당에 대해『主體思想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남조선의 혁명적 당』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책은 통혁당이 1967년 발간한 비합법 기관지 「혁명전선」을 싣고 있는데 이 중 일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1964년 3월15일. 역사적인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약속장소에 와서 보니 이미 金瓆洛·李文奎 동지가 와 있었다. 申榮福 동지가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전보다도 훨씬 고조되었다. 金鍾泰 동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전원 모이셨습니다. 민족의 태양 金日成 장군께서 교시하신 주체의 당 창건 방침을 받들고, 그 사이 동지들께서 필사의 노력으로 분투하신 결과 오늘로서 우리는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의 결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임시투쟁 강령과 행동목표에 대한 심의에 들어갔다.

『통일혁명당은 민족의 태양, 金日成 동지의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지도적 지침으로 하는 한국 근로민중의 전위조직이다』

▲어디까지나 우리 당이 민족의 태양, 金日成 장군의 혁명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한국혁명의 전위당인 만큼 당원과 각계의 애국민중을 하나의 혁명전선으로 결속해야 할 것이라는 정치활동의 목표로부터 출발하여 우리 당 기관지를 「혁명전선」이라고 하면 어떤가 하고 생각합니다.

金鍾泰 동지의 제안에 申榮福 동지가 우선 찬동하였다.

『조국통일과 한국혁명이라는 우리 당의 과제도 함축되어 있고 통일혁명당이라는 우리 당의 이름도 반영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좋다고 생각합니다』

전원이 찬성하였다.…철필로 긁은 등사판으로 인쇄된 수십 부밖에 안 되는 신문이었지만 한국에서 발간된 최초의 金日成주의 출판물에 접했던 순간 편집위원 전원의 눈이 잠시 뜨겁게 빛났다.

흥분하여 눈물을 머금은 목소리로 金鍾泰 동지가 입을 열었다.

『동지들, 기관지 창간으로 우리들도 바야흐로 진리의 불모지인 이 한국 땅에 영생불멸의 金日成주의 사상이론을 정력적으로 보급할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통혁당의 이름과 함께 역사에 남을 하나의 거대한 사건입니다. 우리들은 이 힘 있는 정치선전 수단으로 보다 많은 金日成주의자를 육성하고 각계각층 애국민중을 하나의 혁명전선, 통일혁명의 깃발 아래 강고하게 결집시키도록 합시다!』〉

통혁당과 같은 지하당 입당절차는 文件(문건)이 아닌 口頭(구두)로 이뤄진다. 地下黨은 보안상 문건을 일절 작성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이다.



中情, 『地下黨 입당은 中央黨에 등록』

중앙정보부가 1973년 펴낸 「북한대남공작사」에 따르면, 『地下黨 입당은 혁명을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을 맹세하는 형식으로 이뤄지며, 비준은 中央黨인 조선노동당으로부터 당원 비준의 권한을 위임받은 공작원만이 할 수 있고, 최종 결정은 역시 中央黨인 조선노동당에 보고했을 때 이뤄진다. 지하당은 보안상 당증을 발급하지 않지만 中央黨인 조선노동당에 등록돼 있는 일정한 번호를 수여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설명에 따르면 地下黨인 통혁당에 입당했던 이들은 中央黨인 조선노동당의 관련 담당부서에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1974년 金正日이 후계자가 된 후 中央黨인 조선노동당은 노동당旗(기)·`金日成·`金正日 초상화를 걸고 충성맹세를 하는 형식으로 입당절차가 정립됐고, 단순한 충성맹세에 불과했던 남한內 地下黨 입당절차도 中央黨 입당절차를 모방하게 된다.

2004년 말 파문을 일으켰던 李哲禹(이철우) 前 열린당 의원의 1991년 「민족해방애국전선」이라는 地下黨 입당도 이 같은 절차를 따랐다. 李哲禹 의원 파문 당시 기자는 1997년 黃長燁(황장엽) 前 조선노동당 비서와 함께 脫北한 金德弘(김덕홍) 前 여광무역 대표와 장시간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金씨는 『한번 入黨을 하면 영원한 고리가 된다』며 入黨의 개념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다.

『입당 기록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당원등록과에 등록이 됩니다. 특히 남한內 地下黨 입당은 對南공작활동에 해당하기 때문에 조선노동당 비밀문서과·`해당 공안부서 담당과 등에 기록돼 영구 관리되죠. 아마도 金正日 정권이 무너지면 이 같은 기록들은 모두 공개될 것입니다』

기자는 현재 성공회大 NGO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인 朴聖焌씨와 인터뷰를 시도했다. 통혁당 사건과 관련, 事實(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기자의 요청에 대해 朴聖焌 교수는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이 언론에 보도돼 예기치 못했던 오해가 생기고 있다. 인터뷰는 사절한다』고 했다.

朴교수의 거듭된 固辭(고사)로 인터뷰가 어려워져서, 『팩스로 질문지를 보낼 테니 가능한 범위內에서 답변해 달라』고 요청했다. 朴교수는 『보내 주십시오. 그러나 답변 여부는 제가 판단하겠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라며 통화를 끝냈다.

통혁당 입당 여부, 마르크스 서적 번역 여부 등을 팩스와 이메일로 보냈지만 기사 마감일인 4월16일까지 朴교수의 답변은 오지 않았다.



북한의 영웅이 된 통혁당 인사들



북한에서는 통혁당 사건의 주범 김종태를 영웅시하고 있다. 김종태의 이름을 딴 작업소조.
1969년 1월25일 金鍾泰와 李文奎에게 사형이 확정되자 평양 모란봉극장에서는 金鍾泰와 李文奎를 지지하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다.

金鍾泰는 1969년 7월10일 사형집행이 된 후 金日成으로부터 영웅칭호를 받았다. 1969년 7월12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는 「金鍾泰 추도 결의문」을 채택했고, 같은 해 7월13일부터 19일까지 북한 전역에서 金鍾泰 추도기간이 설정됐다. 평양대극장을 비롯해 각 시·`도·`직할시·`區분대·`區분대당위원회·`공업기업소 등에 이르기까지 대대적 추도식이 거행됐다.

북한 내각은 金鍾泰에게 영웅 칭호와 북한 최고훈장인 금성메달과 국기훈장 제1급을 추서하고 평양 전기기관차 공장을 「金鍾泰 전기기관차 공장」으로, 해주사범대학을 「金鍾泰 사범대학」으로 개명했다. 평양 시내에는 金鍾泰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겨났다.

1969년 11월6일 李文奎가 사형당하자 북한은 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그러나 죽기 직전 공산주의자였던 것을 뉘우친 金瓆洛은 북한정권에게 변절했다는 이유로 외면당했다.

살아남은 최고위급 통혁당 간부인 申榮福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1988년 특사를 받아 출감했다. 그는 1989년 이래 성공회大 사회과학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朴聖焌씨는 1981년 출소 후 일본과 미국에서 神學(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언론 인터뷰 등에서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 「평화주의자」, 「퀘이커」 등으로 소개해왔다. 朴씨는 前述한 「새길이야기」 인터뷰에서 출소 후 神學을 한 이유에 대해 『마르크시스트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관련 부분을 인용해 보자.

『1994년 처음으로 여권이 나온 후 3년간 일본에 가서 공부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본에서 「크리스천을 찾아서」라는 글을 연재하면서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참다운 크리스천을 만나고 다닌 것이 준비단계였던 것 같습니다. 「마르크시스트 크리스천」으로서 저를 보완할 수 있는 영적 눈이 필요했지요. 그리고 나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유니언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처음에 일주일 코스로 펜들 힐 영성 프로그램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철두철미한 反美



법정에 선 통혁당 주범 김질락.
朴씨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戰·`이라크戰·`북한제재 등에 반대하는 反戰平和(반전평화)운동을 벌여 왔다.

그는 미국의 이라크戰은 『군수산업의 이익을 도모하고, 석유이권과 中東패권을 노려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제물로 삼는 전쟁이 아닌 침략』(2003년 3월25일 「한겨레신문」과 인터뷰)으로, 아프가니스탄戰은 『최첨단 신무기를 대거 동원하여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삶의 터전으로부터 내몰고 그 나라의 자연을 마구 짓밟고 완전초토화하는 것』(「연두빛 평화의 물결로 한반도를 감싸자」등)으로, 1991년 걸프戰은 『수십만의 젊은 이라크 병사들이 미국의 융단폭격으로 사막에서 살육되고, 미국이 이라크 사회의 인프라 구조를 파괴해 버렸고 생필품의 수입마저 막는 경제제재를 지금도 풀지 않아서 100만 이상의 이라크 어린아이들이 영양실조 등 병으로 죽어 갔다(「폭력의 골짜기를 넘어 평화의 너른 들녘으로」 등)』고 주장해 왔다.

그는 특히 미국의 對北제재가 한반도에 전쟁을 부른다며, 金正日 정권의 不法행위를 어떠한 형태로도 제재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펼쳐 왔다.

그가 2002년경 쓴 「연두빛 평화의 물결로 한반도를 감싸자」는 글의 일부다.

『설마설마 하다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한반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남북한 민중이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만에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경각심을 드높여 예의 주시하자.

부시 대통령과 미국 정부에게 화해와 평화를 향한 우리 겨레의 역사적 행보를 방해하지 말라고 단호히 경고하자. 만에 하나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덮쳐 온다면 우리는 휴전선 일대에 평화의 천막을 치고 평화를 호소하는 갖가지 이벤트를 벌인다. 평화음악회, 평화단식·농성 등 행사를 벌이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발산하자』

그는 같은 글에서 『우리의 평화와 우리의 안전을 남의 손, 外勢·`强大國 미국에 맡겨 놓고 안전을 보장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야 한다. 미국의 부당한 간섭과 개입에 맞서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며 미국의 한반도 전쟁 책동을 막고 평화를 지켜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朴聖焌씨는 이슬람의 지하드(聖戰)는 『미국이 아랍세계에 가해 온 폭력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통제된 폭력』이라고 했고, 9·`11 테러에 대해서는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미국이 당해 싸다」, 「통쾌하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편이었다(논문 「폭력의 골짜기를 넘어 평화의 너른 들녘으로」 中)』고 말했다.

같은 글에서 일부를 인용해 보자.

『우리가 이번의 사태(9·`11 사태)를 보면서 「오만한 미국의 콧대를 꺾었다!」, 「미국도 당해 봐야 한다」는 정서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이 무슨 짓을 했기에 테러리스트들이 그토록 처참한 보복을 생각해 내게 되었는지, 그들의 사무친 한과 절망과 증오의 뿌리가 무엇인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알게 합시다』

朴聖焌씨의 反美는 反戰(반전) 평화를 축으로 하고 있지만, 테러 행위나 金正日·`후세인 등 독재자에 대한 비판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 그의 주장에는 金正日 정권을 제재하는 미국에 대한 비판만 있을 뿐, 金正日 정권의 심각한 인권 탄압과 테러, 마약·핵무기 개발 등에 대한 비판은 찾을 수 없다.



韓明淑씨의 일관된 反美 친북 입장



2004년 7월 열린당 국가보안법 폐지 간담회에 참석한 한명숙 총리 지명자.
『남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해 온 韓明淑 총리 내정자의 이념성향도 「反美 親北」이라는 점에서 朴聖焌씨와 크게 다르지 않다. 韓총리내정자는 17代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소속 의원으로 일하면서 金正日 정권을 옹호하고, 美國을 비판하는 일관된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2004년 11월17일 국회에서 盧대통령의 『북한의 核 개발도 일리 있다』는 LA 발언을 지지한 이래, 金正日 정권의 주장을 사실상 대변하는 태도를 보여 왔다.

그녀는 2005년 6월27일 국회에서 북한의 核무기 보유에 대해 『북한 나름대로의 국익이 있기 때문』이라며 『미국에 對北 체제보장과 경제지원을 요청하라』고 정부 측에 촉구했다.

국회 속기록에 기록된 그녀의 발언이다.

『北은 北 나름대로의 국익이 있고 미국은 미국 나름대로의 국익이 있기 때문에 北核문제가 쉽게 해결되리라고 보지 않는다.…北核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미국이 동시 제안이라든지 對北 체제보장과 경제지원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진전된 案을 내놓도록 우리가 요청한다든지 제안을 강력하게 정부가 해야 한다』

韓총리내정자는 2005년 9월22일 『러시아 핵무기 폐기時 미국이 수십억 달러를 지원했던 前例에 따라 北核 폐기 비용을 미국이 주도적으로 부담해야 한다』고 했다. 같은 해 10월11일에는 북한의 「先경수로 제공」 주장을 지지한 뒤, 『對北 경수로 건설시점에서 요구되는 미국의 역할은 경수로 제공비용의 분담과 핵심기술 및 설비제공』이라며 미국에 「先핵무기 폐기」 요구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했다.



라이스의 北 위폐 문제제기에 美 비난



수감되는 한명숙.
韓총리내정자는 지난 2월13일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미국이 제기한 북한산 슈퍼 노트 문제에 대해 『미국은 6者회담의 성사 이후 모처럼 마련된 평화정착의 기운에 증거 없이 찬물을 끼얹고 있다』고 비난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美 국무장관이 『(폭정의 전초기지라는) 북한 정권의 성격은 자명하다』고 발언한 직후인 2005년 6월21일 『라이스 장관의 발언은 모처럼 조성된 6者회담 재개의 긍정적 분위기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적절한 행동이다. 韓美 외교채널을 통해 적극적인 시정을 요구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은 6者회담 복귀 자세를 갖춘 북한에 또다시 찬물을 끼얹는 발언이자, 韓美 정상 간 합의정신에도 반하는 것이다. 국내적으로도 장관급회담 북한 대표단이 들어올 때 보수단체가 자극적인 플래카드를 붙이고 시위를 했는데, 우리 국민도 예의를 지키고 南北관계가 발전할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金正日 정권을 규탄하는 보수단체를 『예의 없다』고 했다.

韓총리내정자는 1968년 통혁당 사건 이외에도 1979년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으로 反共法을 위반했다.●

사랑하는교회 ‘평화’를 내 건 박성준씨의 반미(反美)주의 2006

사랑하는교회

  
  ‘평화’를 내 건 박성준씨의 반미(反美)주의는 인류보편의 범죄로 규정되고 있는 ‘테러리즘’에 대한 우호적(?) 판단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슬람의 지하드[소위 ‘성전(聖戰)]는 “미국이 아랍세계에 가해온 폭력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통제된 폭력”이라며 심지어 9*11테러에 대해“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미국이 당해 싸다, 통쾌하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편이었다(以上 ‘폭력의 골짜기를 넘어 평화의 너른 들녘으로’논문 中)”고 말했다. 
  
  같은 글에서 일부를 인용해보자.
  
  “한반도는 위험을 안고 있는 불안한 지역입니다. 그 중심에 언제나 미국이 있지요. 우리가 이번의 사태(9*11사태)를 보면서 ‘오만한 미국의 콧대를 꺾었다!’‘미국도 당해봐야 한다’는 정서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미국이 무슨 짓을 했기에 테러리스트들이 그토록 처참한 보복을 생각해내게 되었는지, 그들의 사무친 한과 절망과 증오의 뿌리가 무엇인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알게 합시다.”
  
  박성준씨의 반미(反美)주의는 반전론(反戰論) 또는 평화론(平和論)의 외양을 띄고 있지만 테러행위나 김정일*후세인 등 독재자에 대한 비판은 찾기 어렵다.   


(김성욱 /2006, 조갑제닷컴 기자 )

경복궁 옆 책방 ‘길담서원’ 여는 박성준 교수? 2008

책읽는사회문화재단


  • 2009-05-06
    [경향신문 08-02-18] “고전 소리내어 몸으로 읽는 현대판 서당

  • [경향신문 2008-02-18]
    “고전 소리내어 몸으로 읽는 현대판 서당 만들 것”?
    경복궁 옆 책방 ‘길담서원’ 여는 박성준 교수?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려 2번 출구로 나가면 자하문으로 향하는 큰 길이 나타난다. 그 길을 따라 걷다보면 왼쪽에 인왕산, 정면에 북악산이 보인다. 이따금 지나는 곳이라 새로울 것도 없지만 이날 따라 저 산들의 나이는 얼마나 됐을까 궁금해진다. 그렇게 200~300쯤 걸었을까. 우리은행 주차장을 끼고 왼쪽으로 들어가는 작은 길. 그 ‘길’ 끝은 옛 서울의 모습을 간직한 한옥집 ‘담’으로 막혀 있다. 통인동 155번지. 이곳이 바로 책방 ‘길담서원’이 터를 잡은 곳이다. 평화운동가인 박성준 성공회대 겸임교수(68)는 기자를 보자 면구스러워했다. 찾아오는 사람을 막지는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인터뷰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탁자 위에는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 놓여 있었다.



    “그냥 작은 옹달샘 하나 판다는 생각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직 문도 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성공회대 NGO대학원에서 ‘평화학’을 강의하는 박교수는 이달 25일 인문학 책방을 열기 위해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인 그는 소문대로 자상했다. “제가 끓이는 커피 맛있습니다”라며 손수 커피를 끓여 내왔다. 책방은 아직 어수선했다. 집에서 가져온 그의 책장과 책들이 한쪽 구석에 쌓여 있었고, 내부 수리가 진행 중이었다. 책방 이름이 왜 ‘길담’일까.?

    “‘길’이는 우리 아이 이름이고, ‘담’이는 제 친한 후배의 아이 이름입니다. 둘을 합한 거지요. 그 댁에서 먼저 제안했고 ‘길담서원’이라고 소리내 불러보니 울림이 좋아서 동의했습니다. 다양한 의미로 읽히더군요. ‘길에 관한 담론’ 또는 길(吉)한 이야기(談), 즉 ‘굿 뉴스(복음)’로도 읽히더군요. 오시면서 보셨겠지만 이 동네엔 ‘길’과 ‘담’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경복궁 담을 따라 가면 ‘길’은 자하문 밖으로 열립니다. ‘길‘과 ‘담’은 떠남과 머무름, 열림과 닫힘, 비움과 채움입니다. 우리는 길을 떠나야 하지만 언제나 길 위에서만 살 수는 없고 담으로 둘린 안식처가 필요하지요. ”?

    길담서원에서는 인문·사회과학과 문학, 예술, 아동 분야의 책들을 다룰 생각이다. 생태, 생명, 우정과 자치를 강조하는 책들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비치해 둘 생각이라고 했다.?

    “물론 제가 좋아하는 책만 취급할 순 없겠죠. 전문 연구자들의 자문을 받아 좋은 책을 선별하고, 특별히 ‘이달의 책’ 코너를 운영할 생각입니다. ‘책방 하면 망한다던데…’라며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지인들이 많지만 아름다운 가게의 박원순 변호사, 원불교 서울교구장 이선종 교무, 녹색평론의 김종철 대표, 창비의 백낙청 교수, 김지하 시인 같은 분들께 책방 일을 의논드렸고 따뜻한 격려를 받았습니다.”

    박교수는 이곳을 단순한 서점으로 운영할 생각이 아니다. 대화가 있는 공부방, 그리고 차와 음악이 있는 문화공간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우리 조상들이 했던 것처럼 고전을 소리내 몸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문리(文理)가 트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체득할 수 있는 현대판 서당이 될 겁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영어교육만 하더라도 생활영어, 영어회화가 마치 영어교육의 본령인 것처럼 여기는데, 고전적 가치가 있는 인문·사회과학의 양서를 풍부하게 읽는 가운데 덩달아 귀도 열리고 입도 열리고 생각도 깊어지는 공부가 진정한 영어공부가 돼야 합니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책방 주인이 된 것은 어쩌면 그에게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는 전쟁통에 부모와 헤어져 남의 책을 베끼며 독학으로 공부해 대학에 진학했다. 1968년에는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돼 13년 반 동안 감옥살이를 하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그렇게 지난한 세월을 보내는 동안 ‘책’은 늘 인생의 동반자였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수업 도중에 영양실조로 쓰러졌습니다. 학교의 보호를 받으며 심부름 하는 아이로 일하면서 겨우 졸업했어요. 중학교 진학은 못했어요. 어느 여자중·고등학교의 급사로 일하며 숙직실에서 기거했지요. 남의 책을 빌려 밤새워 베꼈어요. 그런 식으로 내가 만든 책들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 틈틈이 공부했습니다. 4·19 나던 해에 대학에 들어갔는데요, 금지된 사회과학 책들을 접하며 충격을 받았어요. 그 책들도 베끼기 시작했어요. 저는 책을 베끼는 데 비범한 능력이 있었거든요(웃음). 그러다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니까, 내가 베껴 쓴 책들이 모두 증거품이 됐어요. 그래서 과도하게 무거운 15년형을 받았죠. 감옥에 있을 때에도, 출옥한 후에도 책을 벗삼아 살았어요. 그러니 책방주인이 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합니다.”?



    3년 전부터 그는 책방을 여는 꿈을 실행에 옮기려 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실현되지 않았다. 한번은 계약금을 치렀다가 돈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다 지난해 12월 심한 감기를 앓은 것이 결심을 굳힌 계기가 됐다.?

    “한달 가까이 감기에 걸려 외출도 못하고 누워만 있었어요. 오직 할 수 있는 건 책 읽기뿐이었습니다. 그때 주로 읽은 책들이 녹색평론의 책들이었습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미숙 선생의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호모 쿵푸스’ 같이, 공부에 대해 쓴 책들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고요, 부산의 ‘인디고서원’에서 매달 추천하는 책들도 봤습니다. ‘아, 참 좋구나, 감기를 앓는 것도 이렇게 좋을 수가 있구나’ 생각했어요.”?

    감기가 낫자마자 녹색평론의 ‘이반 일리치 읽기모임’에도 가보고, 부산의 인디고서원과 ‘수유+너머’를 찾아갔다. 부산에만 3~4차례 내려갔고, ‘수유+너머’에 가서 젊은 사람들과 탁구를 치며 어울렸다. 그러다가 결국 아내인 한명숙 전 총리에게 ‘책방 개업’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렇게 작은 책방이지만 돈이 드는 일이죠. 빚을 얻었는데 저의 신용만으론 어렵고 그 사람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도 처음엔 가뜩이나 어려울 때 하필이면 장사도 안 되는 책방이냐고 했지만, 제가 행복해하니까 싫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그는 13년 넘는 복역기간 중 문학, 역사, 철학, 종교 등 다방면의 독서 편력을 거쳐 차츰 신학에 집중했고, 이 공부가 기반이 돼 81년 출소 후 일본에서 민중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으로 가 유니언신학교와 퀘이커 공동체 ‘펜들힐’에서 ‘평화’를 화두로 공부하고 수행에 정진했다. 그는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가, 이제야말로 진정한 공부가 필요할 때”라고 말했다.?

    “민주정부 10년의 경험 이후 우리는 이제 재충전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생각이나 지혜가 동날 때도 됐어요. 진정한 공부가 없이는 이제 안 됩니다. 독서가 없는 마음공부는 공허합니다. 인문학적 책읽기가 정말 필요한 때입니다. 논어 위정편에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무의미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子曰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는 말이 나옵니다. 옳은 말입니다. 90년대 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면서 사람들이 사회과학책을 손 놓아버렸지요. 명상, 영성, 마음공부 이런 쪽으로 기울어지는 사람들이 생겨났어요. 그것은 당시로서는 의미있는 일이었고 자기 성찰이라는 점에서 일면 발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릇’만 있고 ‘내용’이 없으면 진정한 성찰이 아닙니다. 그게 바로 ‘사이불학(思而不學)’에 가까웠습니다. 그런 유행에 편승해 요즘 처세술이나 명상법 같은 책들이 범람하는데, 그런 책들만 읽으면서 독서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한바퀴 돌아서 다시 원점으로 왔다고 봅니다. 개인의 삶도 그렇고 우리 사회도 그렇습니다. 숭례문이 불 타버린 것이 ‘때의 징조’를 나타내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박교수는 ‘길담’이 위치한 통인동을 “서울에서도 기운이 좋은 곳”이라고 했다. 환경운동연합, 참여연대,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 등 주요 시민단체뿐 아니라 청와대, 정부종합청사를 비롯한 주요 관공서들도 모두 걸어서 5~10분 거리에 있다. 그는 “이 좋은 기운에 가장 어울리는 게 바로 책방”이라며 웃었다. 대학가에서도 사라져가는 인문사회과학 책방을 경복궁 근처에 내는 그의 의중이 읽히는 대목이다.?

    “그분(공무원)들인들 어찌 목마름이 없겠습니까. 저는 그분들을 존중하고 신뢰합니다. 우리 시대가 경박하고 오염됐다면 저도 그 한 부분입니다. 큰 강물도 시원(始原)은 산속에 숨겨진 작은 옹달샘이거든요. 목마른 길손이 우연히 찾아왔다가 목을 축이고, 잠시 쉬었다 돌아가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고, 그 길을 지날 때 다시 들르고 싶어지는 곳. 그런 곳이 됐으면 합니다. 부산에 ‘인디고서원’이 있다면 서울에는 ‘길담서원’이 있습니다. 다른 곳에는 그 지역 특색에 맞는 또 다른 ‘서원’들이 생겨나길 기대합니다.”?

    박성준 교수는
    1940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때 부모와 생이별한 그의 어릴 적 소원은 “밥 한 그릇 배불리 먹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급사생활을 하며 독학으로 서울대 상대에 입학, ‘경제복지회’라는 동아리를 만들었다. 김근태 의원과 부인 한명숙 전 총리가 동아리 후배다. 67년 한전총리를 미팅으로 만나 결혼한 박교수는 결혼 6개월 만에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됐다. 출소 후 신학박사 학위를 받아 2001년부터 성공회대에서 ‘평화학’ 강의를 해오고 있으며 비폭력평화물결과 아름다운가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글?손제민·사진?우철훈기자?

퀘이커-박성준 강연 2006

퀘이커-박성준 강연 : 네이버 블로그

퀘이커-박성준 강연

산지니

2006. 4. 27

박성준 교수 -또다른 통영 선배 | 통영, 東湖文化 2006/04/17 


http://blog.naver.com/buttrace/150003532050


총리 지명자 남편분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에 대하여 말들이 많다.
지난 토요일 나의 주례선생님으로부터 박성준 교수가 통영출신이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고아로 내버려다 시피 통영에서 지내고, 강원룡 목사가 진행했던 크리스찬 아카데이미에서의
이야기를 간간히 전해져 온다.

아래 이야기에서 확인되는 대로, 사회주의자였던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동 시대 또 다른 통영 선배이다.

[CBS 뉴스] 파워인터뷰 박성준교수


"폭력에 비폭력으로 맞서는 평화실천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힘"
CBS노컷뉴스 권혁률 기자  2015-12-10 16:33
[파워인터뷰] 평화운동가 박성준 교수 "평화시위 통해 도덕적 우위 확보해야"

최근 개봉된 영화 ‘프리덤’을 통해 퀘이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평화운동가인 박성준 교수를 통해 퀘이커의 비폭력 평화사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권혁률 기자가 만났습니다.


권: 박선생님 반갑습니다. 퀘이커, 어떤 신앙단체인지 간단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박: 퀘이커는 17세기 영국에서 생긴 기독교의 소종파 운동입니다. 교리가 없고요. ‘각 사람 안에 빛이 있다’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하나님 앞에서의 관계는 대등하다고 해서 평등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등한 사람들이 자연 속의 뭇 생명체들과 함께 사는 평화롭게 사는 그런 평화로운 삶을 추구하고 그래서 전쟁을 반대합니다. 그래서 적극적인 평화사상을 가지고 있고요.


그리고 일반적으로 퀘이커에 대한 하나의 오해가 있는데요. 무교회주의라는 오해가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그렇지가 않고 교회라는 이름을 쓰기로 하고 안 쓰기도 하지만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교회 같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죠.

권: 최근 개봉한 영화 ‘프리덤’을 보면 퀘이커신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흑인 노예들의 탈주를 돕는 장면이 나옵니다. 실제로 이런 일들이 많았나요?

"인권과 평화위해 위험 무릅쓰고 행동"
박: 그런 민권, 인권, 평화 이런 가치를 위한 헌신적인 노력, 자기들의 목숨을 때로는 희생하기까지 하는 행동에서 아마도 퀘이커는 굉장히 선구적인 역할을 해온 것으로 압니다. 그러니까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퀘이커는 전쟁의 위험 속에 있는 지역에 복음을 가져가서 봉사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 있는 곳에 퀘이커가 있다고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권: 전쟁터에서 인도주의적 노력을 하신거죠?

박: 인간 장벽을 만들어서 보호해야 될 사람들을 보호한다거나 또는 그분들에게 식량이나 의료를 지원하거나 또 그 어려운 지역에서 학교를 만들어서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해오고 있습니다.


권: 박선생님께서는 미국에서 퀘이커를 처음 접하셨다죠?

박: 네. 그렇습니다. 제가 미국 뉴욕에 있는 유니온신학대에서 한 3년을 공부했는데요. 그 시기에 퀘이커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결국에 나중에는 필라델피아 근교에 있는 펜들힐이라고 하는 세계적으로 아주 알려진 퀘이커학교이자 명상센터인 곳에서 한 2년간 생활까지 했죠.

권: 한국에서는 고 함석헌 선생님이 잘 알려진 퀘이커신자시죠?

박: 그렇습니니다. 아무 저명한 퀘이커시죠.

폭력에 희생되는 사람위한 적극적 보호활동 앞장
권: 퀘이커하면 비폭력평화사상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어떤 내용입니까?

박: 일체 생명체에 대항해서 폭력을 쓰지 않는다는 입장이죠. 그러다보니깐 폭력이 있는 곳에 폭력에 희생에 되는 사람들 또는 생명체를 보호하는 그런 활동들을 많이 해오고 있습니다.

비폭력사상과 겨룰 수 있는 퀘이커의 아주 중요한 특징으로써는 침묵 예배를 들 수 있죠. 침묵 속에서 묵상하면서 말씀을 기다리는 방식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을 의미하죠.


권: 그렇다면 우리 현실에서 비폭력 평화사상을 어떻게 실현시켜야한다고 생각하시는지?

박: 우리가 자칫 폭력이 힘이 세고 비폭력은 힘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퀘이커들은 비폭력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하다고 생각하죠. 그러니깐 우리가 어떤 사회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 어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나섰을 때 폭력에 편승하기 보다는 오히려 비폭력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감명을 주고 특히 정신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비폭력 평화적 노력이 가장 효율적인 실천
권: 방법으로서의 비폭력, 내용으로서의 평화, 우리가 추구해야할 평화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박: 21세기에 지구촌 사람들이 당면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문제들 가운데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죠. 그 중 최근에 후쿠시마의 핵발전소 참사라든지 또는 최근에 프랑스 파리에서 있었던 폭력 사태까지 있습니다. 수많은 그런 어려운 난제들을 풀어가기 위해서 퀘이커들은 평화와 비폭력의 방법이 아주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이러한 방법이 평화적인 방법의 노력을 해본 결과 이것이 어떤 다른 수단보다도 더 효율적이라고 하는 것을 역사적으로 경험했던 것 같아요.

저는 우리 한국에서도 우리가 이런 방법을 한번 실현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권: 역사적으로 경험한 비폭력 평화 실천, 구체적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박: 미국에서는 마틴 루터 킹 목사님과 함께했던 유색인들과 시민권 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고요. 그리고 미국이 관여했던 여러 전쟁들이 있습니다. 양차 대전을 비롯해서 근래는 베트남 전쟁, 최근에는 이라크 전쟁이 있죠. 그런 사례들에서도 퀘이커들은 위험한 지역에 가서 평화를 위해 일을 했죠.

그분들을 보호한다건가 그분들과 동행한다던가 또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인간 띠를 만들어서 어떤 보호해주고 마을을 지킨다던가 또 그 지여그이 아이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거나 학교를 만들거나 하는 일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권: 한국사회에 이런 비폭력 평화실천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생각하시는 바가 있으신가요?

"한국사회에서도 비폭력 평화적 노력 시도했으면"

박: 저는 이것이 신념이기도 한데요. 우리가 최근까지 하나의 방법으로 채택해왔던 시위 방법에서 우리가 한 번도 실천해보지 못했던 경험해보지 못했던 아주 좋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걸 우리가 꼭 좀 해봐야 하는게 그것이 무엇이냐하면 퀘이커적인 평화 시위 방법입니다. 저는 이것이 가장 강력한 힘을 낳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평화적인 시위죠. 폭력을 쓰지 않는 거에요. 진압하는 쪽에서 폭력을 쓰더라고 말하자면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엄청난 도덕적인 힘을 갖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폭력을 쓰는 상대방에 대해서 그들이 양심에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게 하는 도덕적인 회의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권: 우리사회에 비폭력평화의 물결이 넘쳤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박성준>
비폭력평화물결 대표
아름다운가게 공동대표
성공회대 교수
현)길담서원 대표

2023/09/01

이은선 - TV인터뷰와 책출판-

이은선 - <한국信연구소 오늘, 23.09.01(금)> -8월의 춤학교, TV인터뷰와 책출판- 8월 1일부터... | Facebook

<한국信연구소 오늘, 23.09.01(금)>
-8월의 춤학교, TV인터뷰와 책출판-

8월 1일부터 15일까지 유럽 오스트리아 린츠, 불가리아 플로브디브에서 열린 '아코섬머 댄스학교(최보결 춤의 학교)'에 놀라운 즐거움으로 참여하고 16일에 귀국했습니다.
오자마자 가기 전에 결정되어 함께하게된 '백낙청TV 기독교초대석' 인터뷰를 두 주에 걸쳐 두 번에 나누어 찍고 드디어 어제 마무리했습니다.
참 진한 경험들이었습니다. 몸의 직접성의 문제, 진실(truths)로 받아들이기 위한 사실(facts)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더 배우고자 춤을 경험 하고자 했습니다.
다녀와서 백낙청 교수님과의 인터뷰를 위해서 다시 신앙이 무엇인지, 왜 여전히 기독교 신앙인이고자 하는지, 민족적 국가적 자각 내지는 정체성이라는 것이 믿음과 나의 종교적 사유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특히 유교문명과의 대화를 통해서 한국여성신학자로서 무슨 의미를 던지고자 하는지 등, 많은 질문을 받았고, 거기에 적실하게 답하기 위해서 2주간 힘들었습니다.
백낙청 선생님의 우리시대 이중과제에 대한 답으로서 그분의 인문학과 분단에 대한 사유, 서구의 개벽사상가로 보시는 D.H. 로런스, 20세기 한국 개벽사상의 꽃으로 여기시는 원불교의 일원상의 진리를 만나면서 또다른 도전과 응전이 함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남편 이정배 교수와 함께 '개벽적' 기독교 신앙의 변증자로서 역할하기도 했지만 두 남성학자에 대한 여성학자로서의 독자성 유지를 위해서도 쉽지않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유럽가기 전에 서문을 쓰고 간 <한국페미니스트신학자의 유교읽기>가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의 수고로 출간되었습니다. 그 서문에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리되어 드러났지만 인터뷰에서 정제된 언어로 다시 서술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의 한국여성신학의 현재적 열매로서 '神學에서 信學으로'의 전환 의미를 밝히는 설명을 마무리로 대담을 끝냈습니다.
오늘은 일본 관동대지진 참사 100주년의 날입니다. 거기서 일본인들의 거짓되고 조작된 말소리를 통해 희생된 조선인들이 공식된 집계만으로 6616명이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씨알재단 함인숙 목사님이 단장이 되서 심우성 민속학자 기원의 넋전 리추얼이 오늘 일본에서 행해진다고 합니다.
사실과 몸과 이미 혼이 흩어진 시신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한국 전래의 장례와 제례 문화를 통해서 희생되신 분들을 기억하고 위로하려는 이 소수분들의 수고, 그를 통해서 오늘 가상현실과 챗지피티 시대에 더욱 중요하게 된, 넋이 깃들어있던 장소와 사물에 대한 인간적 믿음이 지켜지는 것에 깊이 감동하고 감사드립니다.
저의 책 <한국폐미니스트신학자의 유교읽기>는 그런 몸과 삶의 정신을 한국 유교전통이 어떻게 이어오고 전개시켜왔으며, 오늘 기독교가 그 본래의 생명성과 진실성, 영성을 다시 회복하고 찾는데 그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그리고 동시에 한국의 유교는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새로운 또는 개벽적 유교읽기를 통해서 어떻게 다른 유교이해를 만날 수 있는지를 살폈습니다.
오늘 출판계가 많이 어렵고 사람들이 책을 안읽는다고 매번 책낼때마다 듣지만, 그래도 저는 다시 일독을 부탁합니다. 책의 종말이라면 인간문명의 귀하고 뛰어난 많은 부분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May be an image of t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