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5

이황과 이이 성리학의 차이 극복을 위한 고찰(Ⅰ) 유지웅 2010

이황과 이이 성리학의 차이 극복을 위한 고찰(Ⅰ)

이황과 이이 성리학의 차이 극복을 위한 고찰(Ⅰ)
A Study on How to Overcome the Difference of Neo-Confucianism System between Lee Hwang and Lee Yi(Ⅰ)
동서철학연구

약어 : S.P.E.W

2010, vol., no.57, pp. 287-310 (24 pages)

발행기관 : 한국동서철학회

연구분야 : 인문학 > 철학
유지웅 /Yoo, Jiwoong 1
1전북대학교

초록

이황과 이이의 성리학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주로 이론의 논리적 정합성 여부를 판단하고 또한 이론상의 차이점을 설명하는데 주안점을 둔 측면이 강하다. 그 결과 그들은 한국 성리학사에서 대립과 갈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그들이 서로 다른 성리학 체계를 형성하는 가장 큰 이유는 리기(理氣) 개념의 이해와 상호 기능에 대한 해석의 차이 때문이다. 아울러 그들이 경험한 시대상황과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이러한 종합적인 요인들로 인해 그들은 서로 다른 성리학 체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단칠정의 리기론적(理氣論的) 해석인데, 이황은 ‘리기호발(理氣互發)’을, 이이는 ‘기발리승(氣發理乘)’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이들이 논쟁에 가담 하면서 길고 긴 대립이 시작된다. 하지만 길게 이어질 것만 같던 대립도 결국 최종목표에서는 합의를 이룬다. 

그들이 지향하는 것은 일신(一身)을 주재하는 마음을 잘 다스려 성인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인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들 공히 ‘경(敬)’과 ‘성(誠)’을 제시함으로써 합의를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따라서 필자는 이황과 이이 성리학을 중심으로 그들의 대립과 갈등의 원인, 그리고 대립을 종식하고 합의를 이루는 일련을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경(敬), 성(誠)의 마음수양을 통한 성인지향이 그들 성리학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음을 살펴보려 한다. 결국 필자의 본 논문은 이황과 이이 성리학의 정합성을 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성리학의 차이 극복을 위해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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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어: 이황, 이이, 리기론, 사단칠정, 성인, 경, 성, 차이,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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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성리학이 조선 기에는 비 안목 없이 답습하는 차원에 머물 다면 16세 기 조선 성리학계는 성리학에 한 비 고찰이 일순간에 폭발한 시기 다. 그리고 이때부터 성리학 이론에 한 정반(正反)의 립과 갈등이 시작된다. 그 에서도 조선 성리학에서 이론 으로 립과 갈등을 가장 상징 으로 표하는 인물은 李滉(退溪, 1501-1570)과 李珥(栗谷, 1536-1584)이다.
지역 으로 남지방은 이황의 성리학(嶺南學派)을, 기호지방은 이이의 성리 학(畿湖學派)을, 정치 으로 남인(南人)은 이황을 주자학의 정통으로, 서인(西人)은 이이를 주자학의 정통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조선 성리학에서 논의의 심에 있던 사단칠정의 리기론 (理氣論的) 해석에서도 이황은 ‘리기호발(理氣互發)’을(退溪學派), 이이는 ‘기발리승(氣發理乘)’을(栗谷學派) 주장한다. 이토록 그 들 성리학은 지역, 정치, 그리고 철학 으로도 확연히 구분된다.1)
이황과 이이 성리학이 확연히 분개되는 가장 근본 인 원인은 朱熹(晦庵, 1130-1200)가 완성한 리기 개념의 이해와 상호 기능에 한 해석 차이에서 비 롯된 것이다.2) 이와 더불어 체험을 통해 형성된 서로 다른 시 인식도 그들의 성리학 형성에 많은 향을 미친다. 철학은 철학자의 체 인 경험, 그리고 시 를 바라보는 안목 속에서 우러나오는 사고의 장(場)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 다. 이러한 복합 인 요소들로 인해 그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두 성리학자를 립, 갈등 인 측면으로만 바라보기 보다는 립과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안을 찾고자, 그들 성리학 체계 내에 있는 합 의 에 주목하려 한다.
그들은 모두 성리학의 최종 목표인 성인이 되기를 열망하 다. 그들의 성리 학, 특히 인간 심성에 한 해석이 립과 갈등으로 일 되더라도 결국 그들이 지향하는 바는 마음 수양을 통해 구나 요순이 되기를 열망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론으로써 공히 경(敬)과 성(誠)을 제시한다.
이에 본 논문은 이황과 이이 성리학이 립 구조 속에서도 종국(終局)에 가 서는 갈림길을 지나 하나의 길로 어들 것이라는 인식 아래, 그들 성리학의 합의 을 살펴보려 한다. 이는 그동안 한국 성리학사에서 갈등과 립의 양축
 
1) 한 학진 원 학연 실, 韓國儒學思想大系Ⅱ․哲學思想篇(上) , 원, 2005, 342 쪽 참조.
2) 에 해 는 상 , 「朱子 理氣論 三重構造」, 「理氣一元論과 理氣二元論 思想的 特性」( 畿湖性理學硏究 , 한울아카 미, 1998) 참고 할 것.
인 이황과 이이 성리학을 재검토 해 으로써 기존의 갈등, 립 을 극복하고 그들 성리학의 새로운 지향 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의 개는 먼 이황과 이이가 왜 서로 다른 리기론, 사단칠정론 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는지 그들이 살았던 시 상황과 연결시켜 살펴 볼 것이다. 그리 고 그들이 갈등과 립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경(敬)과 성(誠)의 마음수양 을 통한 성인지향이 그들 성리학의 차이 을 극복할 수 있는 기 를 제공할 수 있음을 밝힐 것이다.
결국 본 논문은 이황과 이이 성리학, 특히 사단칠정의 리기론 해석의 이론 정합성 여부 )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이황과 이이가 서 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는지에 해, 그리고 그들이 서로 다른 길 속에서도 하 나의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려는 것이다.
2. 이황과 이이 성리학의 갈등
1) 갈등의 원인 : 리기론

성리학에서는 이 세계의 사사물물(事事物物) 모두를 리와 기로써 해명하려 한다. 즉 리기는 성리학자들의 철학 기 개념이며, 이것으로 각자의 철학 체계 를 확립하고 있는 것이다. ) 하지만 같은 성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라 할지라도 리기의 개념 그 계에 해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개개의 철학 성격 은 달라진다.
주희는 이 세계 모든 존재의 생성과 변화는 리와 기의 결합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 이때 리는 형이상(形而上)의 도(道), 기는 형이하(形而下)의 기(器)를 가리킨다. 즉 리는 형이상의 도로서 만물을 생성하는 원리, 근원이며 기는 만물 을 생성 하는 도구, 재료이다. ) 이때 모든 존재의 생성, 변화를 해서는 리 와 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계(理氣不相離)이나 ) 그 존재에서 각자 나름 로의 역할과 기능이 있기에 구별(理氣不相雜)이 있을 수 있다.  ) 그리고 리와 기는 서로 상반되는 특성을 가진 것으로 리는 무정의(無情意), 무계탁(無計度), 무조작(無造作)하며, 기는 응결하고 조작하여 존재를 생성하는 특성을 가진다.9) 한 리와 기는 선(善)과 악(惡), 존(尊)과 천(賤), 천리(天理)와 인욕(人欲) 등과 같이 가치론 으로도 구별을 하는 것이 성리학의 특성이다.
그런데 리기론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 바로 리와 기가 성리학에서 다루어지 는 존재론, 심성론 등에 용 될 때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리와 기는 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기본 구도하에 살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원리(所以然)와 상(所然)으로서의 리기, 두 번째는 형상(形相, 本)과 질료(質料, 具)로서의 리기, 세 번째는 도의(道義)와 형기(形氣)로서의 리기이다. 이러한 세 가지의 구도 속에서는 리기 개념의 미묘한 차이 가 있다. 그리고 세 가지 구도하의 리기는 존재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할 때에 는 리기불상리(理氣不相離)로, 인간 심성을 설명할 때에는 리기불상리와 리기불 상잡(理氣不相雜)의 계가 복잡하게 얽 있다. ) 따라서 주희가 완성한 리기 개념 계는 존재론, 심성론 등 에서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는 을 염두에 두어야만 하며, 바로 이러한 들이 주자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어렵게 만든다. 결국 조선시 에 일어난 사단칠정, 인심도심과 같은 논쟁도 이와 같이 리기 개념 계가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는 것에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이황과 이이의 리기 개념 계에 한 해석 차이는 주희 리기론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이 성 뿐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시 상황과도 한 연 이 있다. 사림(士林)들이 조정에 본격 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때는 成宗(재 14571494) 훈구(勳舊)세력의 견제를 해 金宗直(佔畢齋, 1431-1492) 등의 남 사림들이 거 등용되기 시작하면서이다. 하지만 사림들은 네 번의 사화(士禍) 를 거치면서 크고 작은 타격을 입게 된다. 그리고 사화의 심에 서 있던 인물 이 바로 이황이다.11)
이황은 성년기에 어들면서 두 차례의 큰 사화12)를 겪었으며, 을묘사화(乙巳士禍, 1545) 때에는 직을 당하는 고 를 겪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 의 형 李瀣(溫溪, 1496-1550)가 반 세력의 모함을 받아 귀양 가는 도 에 사사 (賜死)되는 장을 목격한다. 이처럼 이황은 권력의 풍 속에서 삶의 비애와 不正義한 실을 직 으로 체험했다. 이러한 시 상황과 직 경험한 사건들 은 그의 성리학 형성과도 매우 한 연 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다면 이황이 이처럼 살인과 배신이 난무하는 不正義한 실에서 가장 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회 장치인 법을 더 공고히 하여 어지 러운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 을까? 이건 유학의 본래 이념과 상충한다. 일단 성즉리(性卽理)라면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인데 어찌하여 토록 음모와 배신, 그리고 살인이 난무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일까?
시 상황이 어떻든 간에 이황은 성리학의 이념(성즉리의 실 )을 충실히 따 라야만 했다. 그는 자신에게 진리 그 자체인 성리학 체계를 가지고 험악한 세 상을 바꾸려고 했다. 그리고 그 변 의 심에 리기론이 자리 잡고 있다. 이이가 학문 성숙을 이룩하기 시작한 시기의 조선사회는 사화(士禍)의 풍
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된 상태 다. 조정 권력의 핵심은 훈구 신들이 아니라 사 림들의 손에 넘어간 상태 다. 일단 사림들이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하 다면 다 시 한 번 성리학의 이념을 내세울 수 있는 호의 기회다. 그리고 이때 이이의 물음은 “왜 피비린 내 나는 살육이 빚어진 것일까?” 을 것이다. 성즉리로서의 리가 인간의 마음 안에 내재해 있는데, 실 세계는 왜 不正義 한가? 성즉리로
 
11) 보다 35 나 어린 는 사 한 직접적 피해는 없었다. 4 사  가 마지막에 어나 사사 는 가 과 9살  어난 다.
12) 생애동안 사 가 어났지만 사 (1504)는 매우 어    어난 에 그가 직접적 체험 하 다는 것 리 다. 하지만 갑 사 (1519), 사사 (1545)는 그 학 적 숙 피어나 시 절정에 다다
어난 사건 경험 그 리학 에 지 한 향 끼쳤 것
다. 특 사사 해  직접적 피해 었 뿐 아니라 얼마 지 않아 그  함 당해 사사당하는 사건  리학 과 절 하지 않다. 철학 철학 전체적 경험, 그리고 시 라보는 안 에 우러나 는 사고  (場) 라 할 수  다.
서  리가 인간의 마음 안에 내재해 있다는 것을 인간은 왜 자각하지 못하는 것일 까? 그 다면 성즉리로서의 리가 인간 마음 안에 내재해 있다는 신념은 잘못된 것일까? 하지만 이는 성 의 말 이며, 성리학의 존재이유이다. 성즉리를 버려서 는 안 된다. 반드시 성즉리를 구 해야만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이 이는 다시 한번 성리학 이념을 조선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기 해 이황과는 다 른 체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 역시 변 의 심에 리기론이 자리 잡고 있다. 이황과 이이 모두 주희의 완성한 리기론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므로 기본 인
리기 에서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황은 리에 더 가치를 둔다.
“옛날과 지 사람들의 학문과 道術이 다른 이유는 단지 이 ‘리’자를 알기 어렵 기 때문이다. 이른바 ‘리’자를 알기 어렵다고 하는 것은 충 안다는 것을 어렵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眞之妙解하여 十分處에 이르는 것을 어렵다고 한 것이다.”13)
이황은 리와 기 에 리에 더 심을 두고 있었던 것이며, 주희의 설(說)을 두고 사람들이 왈가불가하는 이유는 리에 한 투철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황의 리기론에서 주목할 것은 리를 이고 월 인 것으로 규정하여 실체화 시킨다는 것이다. 리는 지극이 높 아 상 할 것이 없는 것이며, 만물에 명령을 내리는 것이지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다. ) 그리고 보통 성리학에서 리는 작용의 기능이 없는 것으로 악하지 만, 그는 리에 체용(體用) 계가 있다는 설명을 들어 리가 발(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이러한 그의 리기론은 사단칠정, 인심도심에서 ‘리기호발’을 주장하 기 한 제가 된다. 물론 이황 역시 존재론 으로 리와 기 어느 하나라도 결 여된 사물 )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 하지만 이황이 주목한 것은 존재론 인 구성 개념으로써의 리와 기가 아니라 가치론 으로 선과 악의 의미를 함의 한 리와 기에 있다. 즉 이황은 존재론 으로 어떠한 사물, 상을 리와 기로 해 명하고자 하는 철학이기보다는 피비린내 나는 실에서 인간성의 상실을 막고 자 인간의 도덕규범을 해명하는 것에 리와 기를 용한 철학이라고 보아야 한 다. ) 그리고 그 심에 선의 세계 리가 있는 것이다.
반면 이이는 리는 형이상자(形而上者)요, 기는 형이하자(形而下者), ) 리는 무형무 (無形無爲)요, 기는 유형유 (有形有爲) )라는 기본 인 리기 개념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리고 존재론 으로 리 없는 기, 기 없는 리를 로 상 정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이이는 이를 이기지묘(理氣之妙)로써 표 하는데, 이 때 단지 존재론 으로 리와 기는 역할과 구별만이 있을 뿐 언제 어디서나 리와 기는 항상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 그리고 이이 역시 리를 선으로서 악함 은 이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리는 본래 선한 것 )으로 더 이상 수 (修爲)가 필요 없는 것이다. ) 따라서 리(性)는 인간이 선을 실천 할 수 있는 내 근거 가 된다. 하지만 실 인 상황에서 인간은 악으로 빠질 험성을 가진다. 이이 는 악의 근거를 기로써 설명한다. 기의 특성은 유 한 것이다. 따라서 기는 항 상 변화하는 작용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악으로 빠질 가능성이 있는 불완 한 것이다. 이이의 이런 리기 개념을 살펴보더라도 존재론 인 리기 개념에 서 가지고 있는 특성이 인간의 선악 문제에도 그 로 용됨을 알 수 있다. 즉, 기의 유 한 속성을 악을 유발시킬 수 있는 가능성으로 설명한다. 다만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기 자체가 악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이이가 기의 맑고 상태 인 본연지기(本然之氣) )를 상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 그는 항 상 기를 맑게 하여 본연의 기 상태로 되돌아가자는 기질변화(氣質變化)를 끊임 없이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이는 이황과는 다르게 성즉리로서의 리를 모르 는 바 아니지만, 선과 악은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악 은 인간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선을 유지하거나 악을 선하게 바꿀 수 있는 것은 무 기에 명령을 하달하는 지령본부(理)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에서 직 발로 뛰는 형사(氣)에게 있다. 다시 말해 리를 실에서 잘 실 시킬 수 있는 것은 기에 있다는 것이다.
결론 으로 이황은 리를 더 근원 이고, 인 것으로 악한 반면 이이 는 리 뿐만 아니라 기를 리와 동등한 선상에서 악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체계가 도출된 이유는 주희 리기론에 다분히 이 인 함의가 존재 하지만, 그들이 체험한 시 인식과도 매우 한 연 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직까지 이 두 거유의 갈등이 표면 으로 확실히 나타나지는 않았다. 하지 만 다음에 나오는 사단칠정에 한 논의에 가서는 그 갈등이 표면화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2) 갈등의 쟁: 사단칠정의 해석

사단칠정 문제는 인간의 선악 문제와 직 으로 연 되어 있기 때문에 이에 한 리기론 해석은 조선 성리학에서 매우 요한 작업이었다. 특히 사단칠 정의 리기론 논쟁을 계기로 퇴계학 ․ 남학 , 율곡학 ․기호학 등과 같은 문제 심의 학 (學派)가 형성되었다는 요한 사 (史的) 의의(意義)도 지니고 있다. ) 따라서 이황과 이이의 사단칠정 해석은 향후 조선 성리학의 분 개 을 확인 할 수 있게 해주는 요한 단서가 된다.
이황이 사단칠정을 리기호발로 주장하는 이유는 먼 그의 리기론을 통해 살 펴볼 수 있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어디까지나 성리학에서 리는 작용의 기능이 없는 형이상자(形而上者)이다. 하지만 이황은 리에 체용 계를 입하여 리가 능 히 발(發)할 수 있는 실체로 본다.  ) 앞서 밝혔지만 이황에게 리는 극존(尊貴) 그 자체이다. 리는 만물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지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다.27) 아울러 리를 설명하면서 장수로, 기를 병졸로, ) 리는 귀하고, 기는 천한 것으로 까지 구별한다. ) 이 게까지 리는 만물에 명령을 내리는 월자로, 병졸을 부 리는 장수로, 천한 것에 비되는 귀한 것으로 명명된다. 이러한 이황의 리 (理觀)으로 말미암는다면 리가 어찌 피동 인 것으로 치부될 수 있겠는가? 이황이 리발을 주장하는 이유는 바로 리에 한 그의 신념으로 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황이 사단칠정을 리기호발로 주장하는데 가장 크게 역 을 두는 방법은 ‘소지(所指)’와 ‘소종래(所從來)’에 따른 분류방법이다.
이황은 먼 성(性)에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구분이 있 는 것과 같이 정(情) 역시 사단과 칠정의 구분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는 자사와 맹자가 말한 천명지성(天命之性)과 성선지성(性善之性)은 리기의 합 (合)이지만 이 둘은 리의 본연처(本然處)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천명지성과 성선지성은 가리켜 말한 바가 순선한 리에 있는 것이지 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성을 기와 섞어 논한다면 성이 본래 선함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질지성이 후에 나와 이에 한 혼란이 있으나, 이는 태어 난 후에 기의 향을 받은 것으로 본연지성과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러한 에 따라 성에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구분될 수 있듯이 사단과 칠 정도 가리키는 바에 따라 구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이황의 논지이다. ) 이 것이 바로 가리키는 바(所指)에 따른 사단칠정의 분류방법이다. 이는 이황이 사 단칠정의 리기호발이라는 논지를 주장 했다기 보다는 사단을 리, 칠정을 기에 분속시켜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는 사단칠정의 리기호발 성립을 한 사 작업이기도 하다. 그 결과 사단칠정의 소종래가 다르다는 이황의 주장 은 리기호발을 성립시키는데 기를 박는다.
이황은 사단은 순선, 칠정은 선악혼재라고 논하고 있다. 순선인 사단, 선악 혼재인 칠정 모두 성을 매개로 하여 나타난 정(性發爲情)이다. 이황은 순선한 사단은 인의 지의 단서가 되므로 그 소종래를 따지면 성즉리의 본연지성에서 근원하여 나타난 정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칠정은 인의 지의 본성에서 발 된 것이 아니라, 형기(氣質之性)가 외물(外物)에 동(動)하여 나타난 결과물이기에 순선이 아닌 선과 악이 아직 결정되지 미완성체  )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32) 따라서 소지와 소종래를 통하여 보더라도 사단과 칠정을 리기에 분속시켜 설 명할 수 있으며, 여기에 더 나아가 사단은 리발, 칠정은 기발이라는 리기호발이 성립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사단의 선과 칠정의 선은 상이 다른 것이다. 이황에게 사단은 인간 의 본성인 인의 지의 단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칠정의 선은 윤리도덕 인 의미의 선 보다는 상황에 따라 하게 표 된 정서의 의미가 강하다. 를 들어 로, 감사, 기쁨, 슬픔 등과 같은 것을 말한다. 따라서 사단은 이러한 정 서들을 모두 포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강한 도덕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에 상을 달리 한다는 것이 이황의 논지이다.
이황의 이와 같은 입장에 해 이이는 리의 무 한 특성을 들어 사단과 칠정 모두 기발리승일도(氣發理乘一途)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이의 리기론에서 발(發)하는 것은 기이며, 발(發)하는 소이(所以)는 리이다. 따라서 기가 아니면 발(發)할 수 없고, 리가 아니면 발(發)할 근거가 없다. 이때 리기는 선후(先後)도, 이합(離合)도 없는 불상리(不相離)한 것이므로, 로 호 발(互發)은 불가하다는 것이 이이의 입장이다. ) 만일 리가 발(發)할 수 있는 것이라면 리는 유 한 것이기에 형이상 인 원리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 더 구나 호발은 리기에 이합(離合)과 선후(先後)가 있게 되며, 동정(動靜)에 단서 (端緖)가 있게 되고, 음양(陰陽)은 시작이 있게 되기에 호발은 그릇된 것이라고 말한다. ) 따라서 이이는 이황의 호발설에 해 리기를 이물(二物)로 보아 이를 마음에도 그 로 용함으로써 사단은 리발이요, 칠정은 기발이라는 오류가 생 기게 된 것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이다.
이이가 호발을 부정하고 기발리승일도만을 주장하는 다른 이유는 자연의 변화와 인간 마음의 변화를 동일한 선상에서 악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의 변화를 설명하면서도 기화리승(氣化理乘)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자연에 한 리기론 해석이 인간의 마음 변화에도 그 로 용된다고 본다. ) 따라서 자연 변화에 두 가지 근원이 없듯이 인간의 마음에도 두 가지 근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
다른 이유는 그의 성론(性論)과 한 연 이 있다. 이이는 실 으로 존재하는 성은 오직 기질지성일 뿐 본연지성과의 구분은 기를 겸하느냐 겸하지 않느냐에 따른 개념 구별일 뿐이라고 말한다. ) 따라서 기질지성에서 기를 겸하지 않는 성을 가리켜 본연지성이라 할 뿐이며 기질지성은 본연지성을 포함 하는 계에 있다. 그래서 이이는 사단과 칠정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계 와 같은 것으로 보기에 기질지성이 본연지성을 포함하듯이 칠정 역시 사단을 포함하는 계라는 것이다. ) 이는 ‘성발 정(性發爲情)’의 명제를 용해도 이 해 할 수 있다. 이황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구분하여 바라보기에 본연지성 에 근원하여 드러난 것은 사단, 형기(氣質之性)가 외물(外物)에 동(動)하여 드러 난 것은 칠정으로 악한다. 하지만 이이는 실 으로 존재하는 성은 오직 기 질지성이기에 성에 의해 발 되는 정 역시 칠정일 뿐이다. 다만 성이 발(發)하 여 정이 되었을 때 사단은 정(칠정)의 오직 선한 부분만을 말한 것이며, 칠정은 선과 악을 모두 포함하기에 사단과 칠정의 구분이 생길 뿐이다. 이토록 같은 성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라 할지라도 그들이 바라본 리기 개념 계에 한 해석 차이에 따라 사단칠정 문제는 이하게 나타난다. 이황의 성리학에서 가장 특징 인 것은 형이상자인 리가 능히 발(發)할 수 있는 실체라는 데 있다. 아울러 사단칠정을 각각 리발과 기발에 분속시키는 것 은 마음에 두 가지의 각기 다른 작용이 있다는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킨다. 기 승과, 이이 모두 이 두 측면을 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황이 논리 인 부정합성을 감수하면서 까지도 이러한 비 에 끝내 굴복하지 않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그것은 바로 가치이다. 사실 에서 본다면 사물의 생성 변화 에서 리와 기는 떨어질 수 없는 것이며 기가 없이 홀로 리가 발(發)할 수 있는 것이 아님40)은 이황 역시 말하고 있다. 분명 이러한 말은 본래의 논지와 모순이 되는 듯하다. 하지만 다음에 나오는 이황의 말을 토 로 본다면 그는 리와 기를 어떻게 해서든지 가치 구별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리는 끝내 기와 挾雜하지 않으나, 한 기와 分離되지도 않는다.”41)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리는 끝내 기와 잡하지 않는 것이라는데 있다. 이황에게 리는 만물에 명령을 내리는 월자이며, 존귀 그 자체이며 선이 다. 그런데 명령을 받는 것, 천한 것, 그리고 악의 기미가 보이는 기와 섞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리기론에 한 이황의 견해도 견해이거니와 그가 사 단을 리발로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편 한 기와 섞이지 않은 선의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기 함이며, 그 세계에서 사단이 발출되어 나온다는 것 을 말하기 한 것이다. 이황은 사화의 정기를 체험한 장본인이다. 不正義가 난무하고, 모함으로 그의 형 뿐 아니라 동학들이 죽어나가는 실에서 무엇보 다도 이고, 당 인 선이 인간의 마음에 내재해 있음을 밝 야만 했다. 그리고 선의 단서인 사단은 더럽고, 추악한 기와 섞이지 않은 맑고 깨끗 한 것이어야만 했다. 비록 사단을 리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라 하여 기와의 불상리(不相離)를 논하고는 있지만 사단은 리가 기를 이겨서 나타난 상태이다. 그 만큼 이황은 리의 가치를 상지우고 싶어 했던 것이다. 반면에 이이가 사단칠정에 해 기발리승의 한가지 길 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할 때 사단의 근원이 리(善)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리가 실 으로 드러날 수 있는 방법은 기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그리고 리와 기는 각각 무 , 유 한 것이기에 사단칠정은 기발리승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즉리의 리가 우리 마음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면 인간은 항상 선한 존 재이다. 그러나 이이가 본 실의 사람들은 그 지가 않았다. 피비린내 나는 권
 
40) 退溪集 (Ⅱ), 卷25, 「答鄭子中別紙」, 98쪽: “蓋有理便有氣, 有氣便有數, 理不能遺氣以獨行.”
41) 退溪集 (Ⅲ), 續集 卷8, 「天命圖說圖與序見文集」, 210쪽: “以示理終不雜乎氣而亦不離乎氣也.”
력 암투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 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인데, 왜 실은 그 지 못한 것인가? 그 다면 선한 행동을 할 수 있 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그래서 이이가 생각한 것은 바로 기에 의한 변화이다. 따라서 사단칠정을 기발만으로 주장하는 이유는 바로 기에 있다. 기는 항상 변 화하는 것이다. 그 변화가 선이든, 아니면 악이든지 항상 변화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은 기이다. 유 한 기를 잘 다스린다면 맑은 기질지성에 근원하여 나타 나는 정 역시 선한 사단이 발출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이이 가 기질을 변화시켜 리를 잘 실 시킬 것을 강조하는 역시 사단칠정의 기발 리승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까지 이황과 이이가 사단칠정을 리기론 으로 해석함에 있어서 리와 기
가운데 어디에 더 주안 을 두고 있으며, 그 가치의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에 해 살펴보았다. 이황은 실에서 윤리도덕이 실 되기 해서는 무엇보다도 인 간의 윤리도덕 실천 가능 근거를 확립하는 것이 요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사 단과 칠정을 리발과 기발로 악하여 논의를 진행시킨다. 하지만 이이는 인간의 윤리도덕 실천의 근거로서 리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어디까지나 이이가 심을 가진 것은 실 으로 그 리가 어떻게 선으로 실 될 수 있는가에 있었다.42) 아직까지도 그들의 성리학은 립, 갈등 구조이다. 하지만 이황과 이이 성리 학의 최종목표는 인간 모두가 요순(堯舜)이 되는 꿈, 즉 성인으로의 멀고먼 여 정이다. 이황과 이이는 성인이 될 수 있는 주체인 인간을 이해하면서 윤리도덕 문제, 특히 사단칠정을 서로 다른 방식을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그 다면 갈등 의 합은 그리 멀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다음 장에서 바로 이 갈등의 합 에 기 가 되는 그들 성리학의 공통지반(共通地盤)을 살펴 볼 것이다.
3. 이황과 이이 성리학의 공통지반(共通地盤)
1) 성인지향(聖人志向)․마음 다스림

이황과 이이가 아무리 립과 갈등을 상징하는 조선 성리학의 표 인 인물 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공통 으로 지향하는 바는 성인이 되기 한 것이다. 따 라서 학문의 처음과 끝은 모두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일 되어
 
42) 경 , 「栗谷 李珥 心性論에 한 硏究」, 고 학 철학과 학원 사학
2002, 101-102쪽 참조.
있어야만 한다.
“먼 모름지기 뜻을 세워서, ‘순임 은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생 각하니, 노력하는 자도 이와 같이 될 수 있다.”43)
“무릇 사람은 모름지기 성 과 같이 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야 할 것인데, 많은 세상 사람들이 성 은 높고 자신은 낮다고 여기기 때문에 나아가기를 즐기지 않는다. 이는 개 타고난 성품은 성인도 보통사람과 같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 문이다. 어찌 성 과 같이 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44)
이처럼 이황과 이이는 모두 학문의 처음과 끝을 공히 성인이 되기를 다짐해 야 함을 강조한다. 구나 요순이 될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실천할 수 있는 곳으로 성리학에서는 마음을 주목한다.
성리학의 주된 심은 마음을 잘 다스리는 방법에 해 항상 탐구한다. 마음이 란 모든 행 의 근본이 된다. 따라서 성리학에서는 마음이 항상 치 화(致中和)의 상태를 유지해야 함을 강조한다. 마음의 치 화 상태는 개인 스스로의 수양을 통 해 이루어지며, 수양의 궁극 목 은 성인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수양을 해서는 먼 마음에 해 치 한 지 인 이해가 필요하다.45) 왜냐하면 부분의 성리학자들이 인간의 마음에 해 먼 이해 한 후 이를 토 로 다양한 수양방법 을 제시하 기 때문이다. 때문에 조선시 성리학자들이 모두 사단칠정, 인심도심 등과 같은 마음의 리기론 해석에 해 그토록 열의를 보 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 성리학만의 특수한 경향은 이황과 이이도 외가 아니었다. 이황 과 이이가 주목한 것은 인간의 마음에 있었다. 이는 주희 역시 마찬가지 다. 주 희는 “심의 체는 본래 맑고 텅 비어 밝아서 온갖 이치를 갖추고 있는 것”46)이 라 하여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모든 일은 심이 하는 바가 아닌 것이 없으며,47) “심은 지극히 신령스러워 지나간 것을 감추고 이제 올 것을 미리 안다”라고 하
 
43) 退溪集 (Ⅰ), 卷7, 「進聖學十圖箚」, 199쪽: “先須立志, 以爲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
44) 栗谷全書 (Ⅰ), 卷20, 「修己第二上․立志章第二」, 431쪽: “凡人須以聖賢爲己任, 世人多以聖賢爲高, 而自視爲卑, 故不肯進. 抑不知稟性與常人一同, 安得不以聖賢爲己任.” 45) 정 , 「入學圖說 통해 본 權近 性理學」, 한철학」 제26 , 한철학 , 2002, 
105쪽 참조.
46) 性理大全 , 卷33, 「性理 5」, 551쪽: “心之全體, 湛然虛明, 萬理具足.” 【 性理大全  性理大全 , 保景文化社(1984)에 나 는 원  하 다.】
47) 朱子語類 (上), 卷13, 「學7 · 力行」, 238쪽: “凡事莫非心之所爲.”

다. ) 이와 같은 주희의 말을 근거로 본다면 마음의 기능은 무한한 것이다. 인간의 생각, 행 에서 마음이 하는 바가 없는 것이 없다면 마음은 인간의 도덕 인 행 의 주체가 되는 곳이며, 한 감각 이고, 육체 인 욕망의 주체가 되 는 곳 역시 마음이다. 그러므로 성리학에서는 마음의 치 화의 상태를 유지해 감각 이고, 육체 인 마음이 되지 않게 잘 다스릴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황과 이이 역시 마음에 한 태도는 주희와 다를 바가 없다. 이황과 이이 는 마음에 해 일신(一身)의 주재자로 악한다. ) 마음이 일신(一身)을 주재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마음의 기능인 의식작용을 통해서 나오 는 모든 생각, 행 등을 통솔한다는 뜻이다.   ) 따라서 마음은 인간의 삶에서 매우 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 기에 이황과 이이에게 마음을 잘 다스 리는 것이야 말로 성인에 도달하기 한 제이자 결론이 된다.
선과 악의 통로는 이 마음에 근원하고 있다. 그리고 선을 표 할 수 있는 곳 도, 악을 표 할 수 있는 곳도 마음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황과 이이 공히 마음의 다스림을 학문의 요체로 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자신의 마 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성인이 될 수도, 그 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다. 그리고 그들은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의 핵심으로 경(敬)과 성(誠)을 말한다.
2) 경(敬)과 성(誠)51)

이황 성리학의 종합이자 완성인 聖學十圖 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十圖가 모두 敬을 주로 하고 있다.”52)
이황은 자신의 학문 결론을 경(敬)의 철학으로 종결짓는다. 그 기에 경(敬)은 성학(聖學)의 처음과 마지막을 일 되게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53) 한 경(敬) 은 마음을 다스리는 주재이며, 만사(萬事)의 근본이 된다고 하 다.54) 즉 경(敬)은 마음이 선(善)으로 잘 드러나게 해 수 있는 주체 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 개 사람이 학문을 하는데 일이 있을 때나 없을 때, 뜻이 있을 때나 없을 때 를 막론하고 오직 마땅히 敬으로써 주를 삼아야 한다. 움직일 때이든 고요할 때 이든 敬을 잃지 않으면, 思慮가 아직 싹트지 않았을 때는 心體가 虛明하여 本領이 깊이 순수해지고, 思慮가 이미 發했을 때는 義理가 밝게 드러나고 物欲이 물러나게 된다. 이러한 능력이 쌓여서 성숙함에 이르게 되니, 이것이 학문의 요법이다.”55)
이 듯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것이 경(敬)이며, 항상 경(敬)을 주로 모든 일에 임하여만 한다고 강조한다. 즉, 이황에게 경(敬)은 마음공부의 처음과 끝 을 일 되게 이끌어주는 근거이자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그 다면 경(敬)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성리학에서 경(敬)을 마음 수양 의 핵심으로 처음 언 한 인물은 程頤(伊川, 1033-1107) 다. 정이는 경(敬)에 해 ‘주일무 (主一無適)’56)으로 설명한다. 이때 ‘주일(主一)’은 경(敬)에 의해서 마음의 본래성, 즉 성즉리(性卽理)로서의 성(性)을 잘 보존한다는 의미이다. 그 리고 경(敬)에 의해 ‘주일(主一)’하면 마음이 ‘무 (無適)’인 상태, 즉 어느 쪽으 로도 치우치지 아니한 中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57) 따라서 이황이 정이 나 주희가 말한 ‘주일무 (主一無適)’의 경(敬)을 강조하는 것은 그의 심성론과 매우 한 연 성 있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이황은 리를 선으로, 기를 악의 기미로 악하며, 사단은 선, 리가 발(發)하는 것으로 칠정은 선과 악, 그리고 기가 발(發)하는 것인데 칠정에서 발(發)이 (中節)한 경우에만 선이 될 뿐 이다. 이러한 그의 리기론 사단칠정론은 인간의 윤리도덕과 연 될 때 이미 선과 악은 근원에서부터 층차를 달리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 듯 선과 악이 이
 
53) 退溪集 (Ⅰ), 卷7, 「進聖學十圖箚」, 204쪽: “吾聞敬之一字, 聖學之所以成始而成終者也.” 54) 退溪集 (Ⅰ), 卷7, 「進聖學十圖箚」, 205쪽: “敬者一心之主宰, 而萬事之本根也.”
55) 退溪集 (Ⅱ), 卷28, 「答金惇敍」, 154쪽: “大抵人之爲學, 勿論有事無事有意無意, 惟當敬以爲主. 而動靜不失, 則當其思慮未萌也, 心體虛明, 本領深純, 及其思慮已發也, 義理昭著, 物欲退聽. 分數積而至於有成, 此爲要法.”
56) 二程全書 , 卷15, 「伊川語錄․入關」, 115쪽: “所謂敬者, 主一之謂敬; 所謂一者, 無適之謂一( 二程全書 , 보경 사, 1988).” 주 역시 경(敬)에 해 정 가 말한 ‘주 적(主一無適)’ 미 계승한다(“敬 한 가지에 집 하는 것 니   하 다시 다  하지 않는 것 다. ‘無適’ 나아가지 않 다.” 朱子語類 (下), 卷96, 「程子之書2 」, 1126쪽: “敬主於一, 做這件事更不做別事, 無適, 是不走作.”).
57) 하마 아키라, 주 보는 주 학 , , 원, 1999, 235쪽 참조.
분법 으로 구별되어 질 때, 사단이 발(發)하기 해서는 발(發)하기 이 의 상 태(未發, 性)를 매우 시할 수밖에 없다. 즉, 선의 근원(本然之性)을 잘 보존해 야만 순선한 사단이 발 되어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마음공부로써 이 황이 제시한 것이 바로 경(敬)이다. 한 이황은 경(敬)을 미발(未發)과 이발(已發), 체(體)와 용(用)을 통하는
수양방법으로도 제시한다.
“그러나 마음의 이치는 매우 방 하여 잡을 수가 없고, 매우 넓어서 그 끝을 볼 수 없으니 진실로 敬으로 일 하지 않는다면 어찌 性을 보존하여 體를 확립할 수 있겠는가? 이 마음의 發함은 터럭 끝을 살피기 어려운 것처럼 미미하고, 구덩 이를 밟기 어려운 것처럼 태로우니, 진실로 敬으로 일 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 기미를 바르게 하여 用에 통달하게 하겠는가? 그리하여 군자의 학문은 이 마 음이 아직 發하지 않았을 때는 敬을 주로 하여 存養공부를 하고, 이 마음이 이미 發하 을 때도 한 敬을 주로 하여 省察공부를 한다. 이것이 바로 敬이 학문의 처음과 끝이 되고 體와 用을 통하는 까닭이다.”58)
여기서 이황은 경(敬)을 성(性)이 이미 발하기 (未發) 뿐 아니라, 이미 발
하 을 때(已發)의 마음 수양방법으로 일 되게 설명한다. 이황은 사단이 발 되어 나오도록 그 근원을 잘 보존하는(存養) 수양법이 경(敬)일 뿐 아니라, 이 미 발 하 을 때 이를 잘 살펴서 (中節)할 수 있도록 하는 성찰(省察)의 공부 방법 까지 경(敬)으로써 일 되게 설명하는 것이다. 이는 사단을 잘 드러 내기 해서는 체(性)를 잘 보존하는 존양공부와, 기질지성에서 연유하는 칠정 이 악으로 흐르지 않기 한 성찰공부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으로 이는 모름지 기 경(敬)을 바탕으로 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59) 따라서 마음 이 작용하기 (未發) 뿐만 아니라 마음이 작용한 후(已發)에도 일 되게 경 (敬)을 유지해야 하며, 마음을 경(敬)으로 일 되게 유지하게 된다면 학문하는 것의 목표인 성인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황이 경(敬)을 성리학의 처음과 끝으로 일 시키고 있다면, 이이 성리학에
서는 성(誠)을 처음과 끝으로 일 시키고 있다.
 
58) 退溪集 (Ⅲ), 續集卷8, 「天命圖說(圖與序)」, 213-214쪽: “然此心之理, 浩浩然不可模捉, 渾渾然不可涯涘, 苟非敬以一之, 安能保其性而立其體哉. 此心之發, 微而爲毫釐之難察, 危而爲坑塹之難蹈, 苟非敬以一之, 又安能正其幾而達其用哉. 是以, 君子之學當此心未發之時, 必主於敬而加存養工夫, 當此心已發之際, 亦必主於敬而加省察工夫. 此敬學之所以成始成終而通貫體用者也.”
59) 병도, 韓國儒學史 , 아 아 사, 1987, 214쪽 참조.

이이 성리학에서 마음 작용은 기발리승이다. 리는 더 이상의 수 (修爲)가 필 요하지 않지만, 기는 유 한 속성을 가지기에 항상 변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이 성리학에서 수양해야 할 상은 바로 기이다. 이이가 항상 기질을 변화 시 켜야 함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기질변화의 핵심으로 이이 는 성(誠)을 제시한다. 성(誠)은 바로 정성스럽게 함, 성실히 함 등과 같은 의미 를 함의한다.60) 기가 발(發)할 때가 바로 선악의 분기 이다. 선과 악은 근원에 서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선과 악은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달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악의 기미가 일어날 때 이를 잘 살펴 인간의 극 인 의지가 개입되어야 한다.
“誠意는 修己治人의 근본이다. 지 비록 별도로 一章을 만들어 그 강을 진열 하 지만, 誠之의 의미는 사실 상․하 여러 장을 통하는 것이다. 를 들어 誠이 아니면 뜻을 세울 수 없으며, 誠이 아니면 이치를 깨달을 수 없으며, 誠이 아니면 氣質을 변화 시킬 수 없는 것이다. 나머지의 것들도 모두 미루어 알 수 있다.”61)
이이는 성(誠)을 수양의 처음과 끝을 통하는 핵심으로 악한다. 성(誠)으 로 학문의 뜻을 세워야 하며, 성(誠)으로 인간 본성의 선함을 깨달아야 하며, 성(誠)으로 기질을 변화 시켜 순선한 마음이 발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誠)의 의미인 성실함은 바로 인간의 극 인 도덕 실천 의지로 체 될 수 있다. 사단은 기질지성에 의해 발 된 순선한 마음 발 상이다. 이 기질지성 의 본체는 성즉리로서의 리(本然之性)가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이 리(性)는 기질지성에 내재되어 있기에, 기질지성에 의해 표 된다. 그러나 기는 항상 가 변 인 것이다. 청기(淸氣)가 될 수도 있고 탁기(濁氣)가 될 수 도 있다. 하지만 탁기를 청기로 변화 시킬 수 있는 힘은 인간의 의지 노력에 있다. 따라서 이이 는 항상 마음 자세를 성실하게 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지 까지 이황과 이이가 수양의 근본으로 요하게 제시한 경(敬)과 성(誠) 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황이 경(敬)만을 강조한 것도 아니고, 이이 역 시 성(誠)을 그의 수양론 체계 체로 포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그들의
 
60) 朱子語類 (上), 卷6, 「性理三․仁義禮智等名義」, 201쪽: “誠, 實理也, 亦誠慤也. 由漢以來, 專以誠慤言誠. 至程子乃以實理言, 後學皆棄誠慤之說不觀. 中庸亦有言實理爲誠處, 亦有言誠慤爲誠處.”
61) 栗谷全書 (Ⅰ), 卷21, 「修己第二中․誠實章第五」, 466-467쪽: “誠意爲修己治人之根本. 今雖別爲一章, 陳其大槪, 而誠之之意, 實貫上下諸章. 如志無誠則不立, 理無誠則不格, 氣質無誠則不能變化, 他可推見也.”
성리학, 특히 사단칠정의 발 과정을 달리 설명하는데서 오는 것에 기인하는 것일 뿐, 경(敬)과 성(誠) 모두 이황과 이이가 시하는 것이다. 이황은 “성(誠) 이라고 하는 자는 단지 진실무망(眞實無妄)을 일컫는 것으로써 조화의 차원 에서는 실리(實理)라 할 수 있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실심(實心)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 다. 이황은 실심을 성(誠)이라 표 하고 있다. 이황 역시 진실 되고 성실함이 바로 선이 발 되어 나오는 실심이라고 표 한 것이다. 즉, 실심은 이 성(誠)을 통해서 구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이 역시 성(誠)의 수양 못지않게 경(敬)을 요하게 생각한다. 심지어 이이 는 경(敬)을 “성학의 시작과 끝” )이라고 까지 말한다. 그리고 이황이 강조했던 미발이발(未發已發)의 수양방법으로써 경(敬)을 이이도 강조하고 있다.   ) 즉, 이 이에게 경(敬)은 선한 마음을 잘 보존하고 마음이 발(發)하 을 때 그 선악의 기미를 잘 살펴 선이 잘 드러날 수 있게 하는 수양방법을 말한다. 그리고 이황과 이이에게 경(敬)과 성(誠)은 서로 유기 인 연 성을 가지고 있다.
“誠은 天道이고 誠之는 人道이다.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스스로 힘써야 한다. 스스로 힘써 誠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어찌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역시 오직
敬에 힘쓸 따름이다.”65)
“誠이란 하늘의 실제 인 리요 마음의 本體이니, 사람이 그 本心을 회복할 수 없는 것은 사사로움과 삿됨이 있어 그것을 가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敬으로써 주를 삼아 사사로움과 삿됨을 다 없애면 本體는 곧 완 하게 된다. 敬은 用功의 요 체가 되는 것이요, 誠은 收功의 바탕이니, 敬으로 말미암아 誠에 이르게 된다.”66) 이황과 이이 모두 경(敬)과 성(誠)을 서로가 서로를 이끌어주는 수양 방법으
로 연결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경(敬)은 성(誠)을 토 로 해서 존재하고, 성 (誠)은 경(敬)을 통해서 실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경(敬)이란 자신이 학문 이나 수양을 닦은 후에 도달하게 되는 경지 는 목표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 서 경(敬)이라는 방법을 통해 성(誠)이라는 다른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을 그 들은 말하는 것이다. 다만 이황이 경(敬)을, 이이가 성(誠)을 시하는 것은 그 들의 성리학에서 즉, 마음의 발 상을 해석하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일 뿐 종국에는 성인에 이르기 함이다. 뿐만 아니라 둘은 모두 경(敬)과 성(誠)을 수양의 근본으로 하고 있다.
4. 결론

이황과 이이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 상황, 그리고 그 시대인식을 통해 서로 다 른 리기론 체계를 형성한다. 그 기에 그들이 바라보는 인간 심성의 문제도 달 라질 수 밖에 없다. 특히 사단칠정의 리기론 해석에서 이황은 리를 가치론 으로 기와 구별시켜, 작용의 능력이 없는 리를 체용(體用) 계에 입시켜 신묘 (神妙)한 작용의 능력이 있는 것으로 승격시킨다. 따라서 사단을 선, 리발로, 칠 정은 선악 혼재, 기발로 설명한다. 반면에 이이는 리와 기는 사물 생성변화에 있어서 어느 한쪽이라도 결여되어 있어서는 안 되기에 사단칠정 모두 기발리승 으로써 설명한다. 그리고 칠정 밖에 사단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단은 칠정 에 선한 부분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이 두 거유가 공히 주희의 학을 종주로 삼으면서도 게 다른 길을 선택한 이유는 다양한 리기 개념 상호기능에 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기 때 문이라고 앞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른 이유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 인식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다. 이황은 사화의 심기에 서 있던 인물이다. 그가 바라본 세상은 부정의가 물든 세상이다. 그 不正義한 세상을 만든 장본인은 인간이다. 그 다면 인간부터 개조시켜야 한다. 인간에게는 선의 세계가 있으며,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할 당 규범이 있음을 알려야 한다. 선의 근거인 사 단은 선의 세계(本然之性, 性卽理)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칠정 과는 근본부터 다른 것이다. 그래서 이 근원을, 근본을 잘 보존해야만 한다. 그 래야만 순선의 세계가 펼쳐질 수 있다.

반면에 이이는 지난날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성즉리의 구현은 이론상의 문제 가 있다. 성즉리로서의 리가 마음 안에 내재해 있는데 왜 지난날은 不正義로 물들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 않다는 것인가? 아니다. 그 래도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 역시 형기에 내재된 것 일 수밖에 없다. 즉 기에 의해 표 될 수밖에 없다. 그 기에 사단칠정 모두 기발리승 뿐이다. 그렇 다면 사단이 발현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 은 기를 변화시켜야 한다. 기는 현실에서의 능동 힘이다. 기가 작용할 때 리 를 성실히 잘 살펴야만 사단이 발 될 수 있다.

하지만 이황과 이이가 리기를 다르게 악하고, 그로 인해 사단칠정을 리기호 발, 기발리승으로 해석한다 해도 그들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는 일신(一身)을 주 재하는 마음을 잘 다스려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 마음을 다 스리는 주된 방법을 경(敬)과 성(誠)으로써 주장하나 그들 성리학 체계에서 경 (敬)과 성(誠) 어느 하나라도 버려서는 안 될 심법(心法)의 요체가 되는 조목들 이다. 그리고 경(敬)과 성(誠)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항상 유기적인 연 성을 맺 고 있다. 다만 이황은 경(敬)을 강조하고, 이이는 성(誠)을 강조함으로써 수양론 에서도 분명한 차이 이 존재하지만, 이는 이론상에 따른 구별일 뿐 그들 성리 학에서는 항상 경(敬)과 성(誠)을 요한 수양방법으로 거론한다. 이를 통해 본 다면 비록 리기심성에서 이황과 이이의 주장이 갈라지게 되나 이는 어디까지나 철학 논의의 대립일 뿐 종내 이 두 거유는 성인으로 가기 해 경(敬)과 성(誠) 으로써 합의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경(敬), 성(誠)의 마음수양을 통한 성인지향이 그들의 차이를 극복 할 수 있는 기 역할을 할 것이다. 

물론 이황과 이이가 성리학자라는에서 공통지반이 없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며, 이황이 경(敬)을 강조한 것은 그의 리발이라는 독특한 심성론에 근거하기 때문이고, 이이가 성(誠)을 강조한 것은 기발리승이라는 심성론 에 근 거하고 있기에, 이러한 에서 볼 때, 그 두 사람의 수양론이 목표하는 것은 같 지만 결국 심성론을 토 로 한 세부 인 수양의 방법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 다. 이는 필자가 본 논문에서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다른 차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문제일 수 있다. 즉, 필자가 다소 원론적 인 수준에서 그들 성리학을 한 데 묶으려는 무리수를 범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해 큰 틀에서 그들 성리학의 공통지반을 찾고자 한 것이며, 그것을 경(敬), 성(誠)의 마음수양을 통한 성인지향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를 토대로 다음 연구에서는 그들 심성론의 서로 다른 체계로 인해 이황은 경(敬), 이이는 성(誠)을 강조했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황의 수양론에서 성(誠)의 공부는 반드시 왜 필요한지, 이이의 수양론에서 경 (敬)의 공부는 반드시 왜 필요한지를 고찰할 것이다. 그리고 경(敬)과 성(誠)은 독립 인 것이 아니라, 항상 상호 보완 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구체 으로 밝힐 것이다. 즉, 경(敬)은 성(誠)을 토 로 해서 존재하고, 성(誠)은 경(敬)을 통해서 실 될 수 있는 것이기에 경(敬)과 성(誠)의 유기 연 성을 통해 그들 성리학의 최종 합의에 도달하고자 한다.
필자의 이러한 이 그들 성리학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시발 이 되기 를 기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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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stract 】
A Study on How to Overcome the Difference of
Neo-Confucianism System between Lee Hwang and Lee Yi(Ⅰ)
Yoo, Ji-Woong (Jeonbuk National University)
Lee Hwang(李滉) and Lee Yi(李珥) was a important Neo-Confucianist of the 16th century in Chosun period. They had systematically contributed to theorizations of Neo-Confucianism. The two representatives succeed to Neo-Confucianism theory of Zhu Xi(朱熹) and each of them formulated a distinct system of thoughts of
Neo-Confucianism.
According to Sadan-Chiljung(四端七情), Lee Hwang had mostly focused on the theory of Ligihobal(理氣互發) and Lee Yi had emphasized theory of Giballiseung(氣發理乘).
As they explained all phenomena on the basis of ideology of Li(理) and Gi(氣) from a different angle, they get diverse point of view. In other words, they lived in the process of recognizing at that times.
However, the ultimate principle is focused on Human being as be a Saint(聖人), and they suggested that a different ways could be a Saint like Jing(敬) and Cheng (誠). They tended to emphasize that Neo-Confucianism is not unfolded as a adversarial system but ended as Jing and Cheng, after all.
Keywords: Lee Hwang, Lee Yi, Ligi, Sadanchijung, Sain, Jing, Cheng, Difference, Agreement
□ 이 논문은 2010년 8월 12일 수되고 2010년 9월 15일 심사 완료되어 2010년 9월 20일 게재가 확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