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10

이은선 - 한일관계와 한국여성신학- 오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이은선 - <한국信연구소 오늘, 23.07.10(월)> -한일관계와 한국여성신학- 오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 Facebook

7 h 
<한국信연구소 오늘, 23.07.10(월)>
-한일관계와 한국여성신학-
오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미쓰비시 일제 징용 배상 문제 등, 윤정부 들어서 한일관계가 다시 가장 핵심적인 관건이 되는 것을 봅니다.
2015년 박근혜 정부 당시도 유사했는데, 지금은 더욱 심각합니다. 당시 한국여성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놓고 한국여성신학 1세대들이 시작했던 한국, 재일본, 일본 여성들의 신학포럼을 다시 시작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코로나 등으로 또 중단되었고, 오늘 여신협에서 포럼을 또다시 새롭게 이어간다고 합니다. 오늘 상황이 결코 변하지 않았고 더욱 심각해진 것을 생각하면 다행입니다.
2015년 박근혜 정부 당시 저는 왜 삼자 여성신학자들이 포럼을 이어가고자 하는지 썼고, 거기서 다케우치 요시미 등을들면서 그가 서양 제국주의를 되감자고 한 것의 의미를 살폈는데, 오늘 다시 보니 그때 저의 생각들이 그렇게 낡지 않은 것을 봅니다. 아니 오히려 다시 더 정치하게 살피고 돌아보아야 할 관점들이 있어서 여기 다시 가져옵니다.
2020년에 낸 제 책 <동북아 평화와 聖,性,誠의 여성신학>에 부록으로 싣기도 했습니다. 어제 안동 도산서원에 다녀오는 길 고속버스에서 이 서두글을 썼는데, 휴대폰 밧데리가 다되서 못올리고 오늘 올립니다. 혹 관심 있으신 분의 일독을 권합니다. 몇년 전 손주들 예쁜 사진도 만나서 올립니다. 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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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19-21 한국․재일․일본 여성신학포럼을 다시 시작하기 위한 준비모임
<왜 여신협은 한국․재일․일본 여성신학 포럼을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가?>
1.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총리와 빌리 브란트 서독수상의 무릎사죄
올해(2015년) 광복절 70주년을 이틀 앞둔 8월13일 한국의 아침신문은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유관순 열사 등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수난 장소로 유명한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해서, 당시 희생당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민족의 혼 그릇’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을 크게 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 장면을 본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곧장 예전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자기 조국의 죄를 무릎 꿇고 깊게 사죄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1970년 12월에 있었던 이 서독 수상의 ‘무릎 사죄’를 통해서 유럽인들을 포함한 세계는 독일인들에게 다시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그 한 해 전에 당시 적대에 있던 동독을 하나의 나라로 인정하는 선언을 한 빌리 브란트 수상은 그와 같은 일들을 통해서 유럽에서 독일통일의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1990년 독일은 통일국가가 되었고, 그 통일국가 독일은 다시 ‘유럽연합’(EU)을 탄생시켰으며, 지금 유럽은 이 지구촌에서 가장 풍성한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곳이 되었다.
2. 독일 통일과 유럽연합(EU)의 평화와 번영
당시 세계의 언론들은 빌리 브란트의 이 무릎사죄를 보고서 “무릎을 꿇은 것은 빌리 브란트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전체였다”라고 썼다. 이후 독일은 말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폴란드 등에 대해서 엄청난 손해배상금을 마련했고, 한반도의 반 정도에 해당하는 국토를 폴란드에 돌려주었으며, 올해 1월 현 메르켈 총리가 또 다시 깊이 있는 언어로 언급하고 고백했듯이 독일은 지난 시간의 전쟁 범죄를 결코 잊지 않고 계속 사죄하겠다고 공표한다. 이러한 이웃나라의 진정성 있는 사죄를 받은 폴란드도 주변의 다른 이웃 나라인 프랑스 등과는 달리, 미국조차도 의심스러워했지만, 독일이 다시 통일되고자 했을 때 기꺼이 함께 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거리의 폴란드인들에게 물어보면 하나 같이 과거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일을 더 이상 두 나라 사이의 특별한 일이라기보다는 인류 전쟁범죄의 일로 보면서 현재의 독일인들에게 그들 부모세대의 죄과를 계속 물을 수 없다고 대답한다고 한다. 독일은 지난 시간의 잘못을 깊이 사죄하며 자신들의 책임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면서 계속 언급하고, 그런 과정에서 스스로의 통일을 이루어내면서 다시 유럽의 리더가 되었고, 이웃나라들은 그런 독일을 용서하고, 그 나라가 다시 유럽을 이끄는 것을 용인하면서 서로의 윈윈(win-win)을 구가하고 있다.
3. 동아시아의 경우와 다시 고조되는 긴장과 갈등
이러한 용서와 화해, 번영과 평화가 유럽 땅에서는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묻게 된다. 왜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가를. 왜 우리 동아시아에서는 그러한 용서와 회복이 일어나지 않고, 대신에 일본은 다시 우경화의 길을 가고, 과거에 했던 사과조차도 번복하려고 하며, 역사수정주의와 더불어 평화헌법 9조를 무화시키려는 군국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가를. 한반도는 그보다 더 비참하게도 광복과 더불어 야기된 분단이 여전히 지속되어서 동시에 분단70주년을 맞이하고 있고, 남북한의 갈등과 긴장은 수그러들 줄 모르고 통일 대신에 한반도 주변의 군사적 긴장 상태는 더욱 고조되고 있는가를.
일본은 현재 남한과 북한뿐 아니라 중국과도 과거사 문제로 위험하게 갈등하고 있고, 그 사이 세계 양대 헤게모니 중 하나로 떠오른 중국은 미국․일본과 대치하면서 동아시아에서의 긴장은 날로 더 심각해져서 세계의 화약고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이번에 일본 미쓰비시사의 과거사 청산 노력과 관련해서도 미국과 중국의 피해자들에게는 심심한 사과와 보상을 하면서도 가장 큰 희생을 치르고 피해를 본 한국인들은 외면하는 것을 보면서, 다른 모든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들이 최소한 인간적인 양식과 상식만이라도 가졌다면 어떻게 그러한 낯간지러운 유아적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묻고 싶었다. 그렇게 동아시아에서의 이웃 간의 우애와 평화는 가능하지 않은 것인지, 유럽인들과 아시아인들은 본래적으로 그렇게 다른 것인지, 그 핵심 이유가 무엇인지 등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번 하토야마 전 총리의 무릎 사죄의 순간이 “일본의 가장 존엄한 순간”이라는 평이 나왔는데, 독일과 유럽의 경우처럼 그것이 한반도에서의 남북의 통일과 동아시아에서의 평화와 화합의 시점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래본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4. 한국여신학자협의회 <한일관계문제연구반>의 시작과 1년간의 일본 공부
지난 해 봄(2013.5.31(토))부터 우리회의 <한일관계문제연구반>이 천착해온 물음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의 존경하는 선배 정숙자 목사님이 여신협이 지난 1988년부터 2011년까지 23년간 20회를 이어오던 <한국․재일․일본 여성신학포럼>을 이어서 계속해 줄 수 없겠는가고 물어 오신 것을 계기로 <한일관계문제연구반>은 구성되었고, 우리는 우선 이웃나라 일본에 대해서 좀 더 공부하는 일부터 시작하자는 취지로 모였다.
첫 책으로 성공회대 일문과 교수인 권혁태의 <일본의 불안을 읽다, 2010>를 읽었는데, 그는 오랜 동안의 일본사회 경험을 토대로 왜 전후 일본 사회가 점점 더 우경화되어가고, 불안 ‘증후군’에 시달리는지에 대한 나름의 사회심리학적 분석을 해주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 일본사회의 여러 구체적인 문제들을 좀 더 가까이 알아볼 수 있었는데, 히로시마 체험, 일본 천황제 문제, 작은 나라 콤플렉스와 ‘일본 침몰’의 두려움, 오키나와, ‘위험한 북한’ 이야기 등 다양했다. 이 즈음해서 나카츠카 아키라가 지은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이라는 책도 접하면서 <언덕 위의 구름>이라는 일본 근대사 역사소설을 지은 시바 료타로의 ‘조선관’과 그의 ‘메이지 영광론’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되었고, 21세기 오늘날 다시 그러한 제국주의적 정신이 일본사회를 유혹하고 있다는 저자의 고발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유사한 맥락에서 한국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지은 <일본산고日本散考>라는 책을 읽었는데, 거기서 앞으로 한국사회가 당면할 가장 위험한 두 가지 일로 환경․생태훼손의 문제와 더불어 죽음의 일본문화의 유입일 것이라고 말하는 박경리 선생이 지금까지 반성 없이 이어져온 일본의 역사의식이 얼마나 반생명적인가를 고발하는 것을 들었다. 박경리 선생은 심지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본을 이웃으로 둔 것은 우리 민족의 불운이었다. 일본이 이웃에 폐를 끼치는 한 우리는 민족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피해를 주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민족을 떠나 인간으로서 인류로서 손을 잡을 것이며 민족주의도 필요 없다.”
우리가 같이 읽은 책 중에는 한국으로 귀화한 일본인인 호사카 유지 교수의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라는 책도 있었다. 거기서 그는 선비의 ‘문(文)’ 문화와 사무라이의 ‘무(武)’ 문화의 차이로 한국과 일본 문화를 특징지으며 그 명암을 밝혔다. 그러면서 청일과 러일, 태평양 전쟁 등 아시아와 세계에서 군사행동을 일으켜온 일본이 인간심성에 대해 보다 더 관심을 가질 때 아시아와 세계평화에 대한 믿음을 비로소 가지게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 우리는 또한 이찬수 전 강남대 교수가 지은 <일본정신>이라는 책을 통해서 짧게나마 <일본서기>에서부터 최근의 신영성운동까지 일본 종교문화의 뿌리와 핵심을 살펴볼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근대 일본의 신도(神道)와 야스쿠니 신사 등의 정신적 배경을 엿볼 수 있었다. 일본 종교의 현세 중심주의가 어떻게 일본인 개개인의 삶과 문화 속에 깊이 뿌리내려있어서 세속주의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보면서 일본 천황제와 같은 국가신도, 조상숭배와 관련한 죽음과 혼령에 대한 의식, 마쯔리라고 하는 축제 등의 배경을 잠깐 배울 수 있었다. 저자는 한국의 경우 무속이나 유교를 모르고서 한국 문화를 안다 할 수 없듯이 신도(정령숭배, animism)를 모르고서 일본을 안다 할 수 없다고 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에게 깊은 상처가 되는 야스쿠니 신사(神社)가 메이지 유신 직후인 1868년 건립되어 8만여 개가 넘는 일본 전역의 신사들 가운데서 가장 방대하여 제2차 세계대전 전범 등 2004년 기준 246만 6532위에 달하는 혼령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5. 타께우치 요시미의 동아시아 이해와 한중일 삼국
그동안 우리가 읽은 책 가운데 특히 나 개인에게 깊은 인상을 준 책은 대안지성공동체 ‘수유너머’의 일원이었던 동아시아 연구가 윤여일 선생이 저술한 <사상의 원점-동아시아에서 동아시아를 생각하다>이었다. 그 책을 통해서 나는 일본의 중국문학가 다께우치 요시미(竹內好, 1910-1977)를 알게 되었고, 타께우치가 어떻게 중국의 루신(魯迅, 1881-1936) 이해를 통해서 중국과 일본 두 나라의 근대화 과정의 차이를 밝히면서 근대 일본의 식민지성과 그와 연결된 침략성을 해석해내는지를 보았다.
다께우치에 따르면 중국과 일본은 서구 근대의 출현 앞에서 자신들의 전근대성과 더불어 고통스럽게 씨름했지만, 중국은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면서 절망에 대해서도 절망하는 회심을 거쳐서 주체적인 혁명을 이루어냈지만 일본의 근대는 오히려 부단히 밖으로 향하는 ‘노예문화’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처지까지 연결해서 살펴보면, 메이지유신 시절 일본은 서구의 식민지가 되지 않으려고 나섰던 길에서 아시아의 ‘식민자’가 되었고, 패전으로 식민자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러나 다시 미국의 ‘(준)식민지’가 되었다고 한다. 즉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겪고서도 일본은 역사적 사실 앞에 바로 서지 못하면서, 예를 들어서 원폭을 오로지 피해자의 입장에서만 강조한다거나 천황제를 폐지하지 못한 점, 그리고 오늘 아시아의 전쟁 위안부 문제에 서 드러나듯이, 그것은 ‘주체성의 확립’이라는 근대의 일에서 일본이 실패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본이 오늘날 다시 미국이라는 서양 강대국과 안보조약을 체결하면서 아시아를 얕보는 행위야말로 서구 제국주의에 여전히 종속되어 있는 식민지성을 드러내주는 일이라고 평가한다. 다께우치는 「근대란 무엇인가」에서 말하기를,
“노예는 자신이 노예라는 자각을 거부하는 자이다. 그는 자신이 노예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 진정으로 노예다. 노예는 자신이 노예의 주인이 되었을 때 완전한 노예근성을 발휘한다.”(윤여일, 289쪽)
일본 노예근성이 발휘되는 패권의 장이 아시아였고, 21세기 오늘날 평화헌법을 고치고 다시 전쟁이 가능한 나라로 가려는 아베정권의 일본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서 이웃 나라 한국은 자신의 형제자매와 싸우느라고 자기 군대의 통수권까지 맡아달라고 미국에 사정하면서 그 군대를 주둔시키기 위해서 매년 약 10조원에 상당하는 전쟁 대금을 치루고 있다면, 미국의 반(半)식민지인 일본보다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을 지적할 수 있겠다. ‘동아시아’라는 개념 자체가 미국의 지역정책에 따른 필요성에서 등장한 것이고, 미국중심적 지식권력구조로 전이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윤여일, 222쪽)
6. ‘방법’으로서의 아시아와 마츠이 야요리의 사랑, 분노, 저항
다께우치는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라는 말을 한다. 그것은 식민지성을 뼛속까지 가지고 있는 아시아가 그 경험을 토대로 해서 자신의 주체성을 형성하는 “방법”으로 아시아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자신의 식민지성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더불어 자신의 ‘식민자’에 대한 단순한 대치나 대립을 넘어서 그 식민자를 “되감는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아시아에게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이거나 한국의 경우에는 일제강점 36년도 그 대상이 되겠다. 나는 이러한 이야기가 자칫하면 작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와 같은 방식으로 전락할 위험도 가지고 있는 것을 본다. 하지만 우리가 ‘주체성’과 ‘주체형성’을 한편으로 인간 누구나가 보편적으로 성취해야 하는, 그래서 부인할 수 없는 존재원리의 하나로 인정한다면 우리의 식민 경험(아시아)을 결국 우리 주체형성의 통로와 방법으로 써서 노예성의 상황을 넘어서야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한 구체적인 예의 하나를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 저널리스트, 여성운동가, 평화주의자, 아사히신문사의 정년을 채운 최초의 여기자 등으로 소개되는 마츠이 야요리(1934-2002)의 자서전을 통해서 볼 수 있었고, 우리 선배와 동료들이 지난 20여 년 동안 20회를 거듭하면서 기적적으로 모여왔던 <한국․재일․일본 여성신학포럼>도 다른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일본을 공부하는 기간 중에 우리가 이번 준비모임의 번역가와 통역자로 수고하는 김선미 선생의 번역으로 마츠이 야요리의 생명의 기록 <사랑하라 분노하라 용기 있게 싸워라>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마츠이 야요리는 일본 사회에서 소수자였던 목사의 딸로 태어나서 스스로가 여러 가지의 차별과 소외를 경험한 것을 보았다. 동지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아사히신문사에 들어가서 여기자로서 많은 제약과 차별을 받았지만 당시 고도성장의 일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이면의 문제들을 파헤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후 활동영역을 아시아와 세계로 넓혀서 공해수출과 기생관광 등을 고발했다. 특히 70년대 한국이 박정희 독재정권 아래에서 시달릴 때 1977년 3월1일 유관순 열사를 기억하면서 3․1독립운동의 날에 <아시아 여성들의 모임>을 발족시켜서 이후 동일방적의 여성들, 광주사건의 희생자들, 조화순 목사나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 한명숙 씨 등과 함께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 이러한 일들로 그녀는 80년대 후반까지 한국행 비자를 얻을 수 없던 유일한 일본 기자였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에게 항상 가해자의 나라이기만 했던 일본의 여성을 통해서 그 일본에서의 일련의 사람들이 전쟁에 반대하고, 시장폭력에 저항하며, 과거 자신의 나라가 저지른 죄악을 들추어내면서 역사를 바로잡고자 하고, 이웃 나라와 아시아와 세계의 약자들과 더불어 생명과 정의, 평화를 위해서 싸워나가는 건강한 주체성의 사람들인 것을 보며 나는 많이 배웠고, 나의 좁은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7. <한국․재일․일본 여성신학포럼>의 지난 20여년의 발자취
우리가 이번 <한국․재일․일본 여성신학포럼>의 재개 탐색을 위해서 한 일 중의 하나는 지난 2011년 2월 제20회를 마지막으로 마무리된 23년간의 자료들을 두루 살펴보는 일이었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축적이었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것들이 선취되어서 다루어진 것을 보았으며, 출발의 문제의식과 진행된 과정의 주제들과 서로 공유한 문제점들이 결코 오늘날도 빛바랜 것이 아님을 보았다. 참으로 다양하고 핵심적인 사항들이 다루어졌는데, 제1회의 ‘권위와 영성’이라는 주제 아래서 일본 천황시스템과 한국 측의 민족 문제가 다루어졌고, 이후 동북아시아의 평화, 여성의 인권 문제와 더불어 정신대 문제, 매매춘, 재일 한국인들의 반인권적 상황, 1910-1935년 일제 강점기 하의 한일여성사, 일본 제국주의와 한국 교회와 여성의 수난사, 성벽을 넘어서서 연대하는 여성의 역할, 기독교와 가족제도, 대안공동체, 한국인 피폭 피해자 문제와 재일교포 차별과 인권문제 등이 다루어진 레이시즘, 새로운 기독교여성문화, 동성애, 기독교의 부권제, 폭력과 기독교 등이 주제들이었다.
21세기 오늘날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그리고 인간다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누구나 보편적으로 나름대로 답을 구하며 살아야 한다고 지적되는 세 가지 물음, 즉 ‘국가(민족)’, ‘소유(경제)’, ‘성(가족)’에 대한 물음이 그곳에서 잘 선취되어 다루어 진 것을 보았고, 이러한 문제들의 배경에 어떤 종교적, 신학적 배경들이 있는지, 신론과 기독론, 인간이해, 교회론 등이 세 주체의 시각에서 탐색되었으며, 특히 재일한국인의 입장과 상황들을 들을 수 있었다. 여기서 알게 되어서 감동한 것 중 하나는 마츠이 야요리가 일본군 ‘위안부’의 문제와 관련하여 2000년 도쿄에서 열었던 ‘여성국제전범 법정’이 바로 이 <한국․재일․일본 여성신학포럼>에서 먼저 얘기되었다는 것이고, 어느 여성은 이 포럼을 참가한 것을 계기로 신학을 공부하여서 목사가 된 경우도 있고, 특히 재일한국인 여성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장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지난 23년간 이 일을 가능하게 한 모든 분들과 참석자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왔다.
8. <한국․재일․일본 여성신학포럼>의 재개를 위한 새로운 주제들
이후 시간이 또 흘렀다. 그리고 세계와 동아시아, 우리 각자의 삶의 정황은 매우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 사이 세계화는 더욱 진행되어서 이제 ‘지구인’이라는 말이 전혀 생소하지 않게 되었고, 동아시아에서의 중국의 급속한 부상은 세계의 정치 판도를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또한 중국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라 하더라도 자본과 돈을 제일의 가치로 삼는 경제제일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이를 통한 환경파괴와 생태문제는 크게 두드러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 나는 지난 포럼의 마지막 회차에서 재일측의 신영자 목사가 그 20여년을 정리하며 되돌아보는 자리에서 결국 자신들이 깨달은 것은 ‘개(個)의 확립이 급선무다라는 자기 확인일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는 사실을 정숙자 목사님이 <한일관계문제연구반> 첫모임을 위해서 발제하신 “한국․재일․일본 여성신학 포름의 역사와 현안”( 2014.5.31, 여신협 사무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 안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을 보고, 특히 우리가 신앙인과 종교인으로 모이고자 할 때는 이 언술에서의 의미를 결코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말은 결국 우리 삶은 그 정황이 어떻게 변하든 관건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고, 우리의 신앙과 신념, 우애와 결단으로 좌우된다는 믿음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되어서 그것은 다시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한 우리들의 건강한 ‘주체성’, ‘주체형성’의 물음과 다른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하게 한다. <한국․재일․일본 여성신학포럼>의 재개가 어떻게 한국과 재일, 일본의 사람들이 지금까지의 여러 차원에서 놓여있었던 노예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주체로 거듭날 수 있을까의 물음이 되어야 하는가를 지시한다.
오늘 우리가 건강한 주체가 되는데 있어서 더 이상 예전처럼 국적이나 성별, 신체나 가족형태 등이 큰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또한 우리의 종교적 물음에 있어서도 기독교의 배타적 그리스도론이나 신론은 많이 극복되었고, 종교적 이중국적의 시대도 멀지 않고 새롭게 열리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변하면서 예전에 우리를 죽도록 힘들게 하던 많은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풀리는 것을 본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한국․재일․일본 여성신학포럼>을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면 그 주제도 많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 나에게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동아시아의 평화가 점점 더 크게 위협받고 있는 사실이 제일 중하게 다가온다. 한미일 동맹은 중국과 북한을 자극하고 이곳에서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켜서 언제 사용될지도 모르는 상상의 무기인 사드(Thaad) 미사일 등을 구입하고 유지시키는데 수조 원을 쓰게 하면서 이곳 민중들, 여성들의 삶을 더욱 심하게 옥죄어 온다. 따라서 이 땅의 평화와 군비축소 등의 문제는 우리의 긴급한 주제가 될 것이다.
이렇게 여전히 동아시아가 메여있는 서구 제국주의는 그 사상적 뿌리로서 유대 기독교 가부장주의적 신론을 그 극점에 가지고 있다. 우리 세 주체가 공동으로 기반으로 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가부장성과 전통적 배타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그에 대한 대안과 보완을 우리가 동아시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웃 종교 전통들에서 찾을 수 있는지, 한국과 일본에서 절대적 실체론으로 굳어져 있는 쇼비니즘적 민족주의와 천황제 시스템은 어떻게 해체해 나갈 수 있는지 등이 중요한 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삶에서의 개(個)와 공(公)의 관계,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관계를 어떻게 새롭게 맺을 수 있는가, 우리 모두가 철저히 노예화 되어있는 경제제일주의, 그와 더불어 생존을 찾아 떠도는 세계 무국적자의 문제, 우리 곁의 이주노동자들의 인권과 정의의 문제 등을 우리는 피할 수 없다. 더불어 핵에너지 문제와 생태위기는 우리의 전통적인 국적과 민족의 문제를 무색하게 하면서 우리 모두의 공동책임을 촉구한다.
9. 마무리하며-우리 시대의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끈질기게 묻는 한/재일/일본의 여성신학
일찍이 한국의 안중근 의사는 이또 히로부미를 내세워 점점 더 죄어 오는 이웃 일본 제국주의의 총칼 앞에서도 그들도 본래적으로 평화를 원하고 세계 평화와 안녕을 바랄 것이라는 일본 민족의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다. 일제 초기 무단 통치시기에 그 한국적 특성으로 인해서 가장 큰 희생을 치룬 한국 대종교의 초대 교주 나철(羅喆, 1863-1916)은 1904년 을사늑약 등으로 조선을 강점하려는 일본에 대해서 자신이 전라도 벽지의 한 선비에 불과하지만 일본의 정치가와 직접 대면하여 대화하면 그러한 침략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1904년 일본으로 직접 건너가는 일을 용기 있게 감행하기도 했다. 오늘 우리 시대의 포스트모던적 상황에서 종교와 신앙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 즉 신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면, 우리가 <한국․재일․일본 여성신학포럼>을 다시 시작하면서 동아시아에서 모두를 위한 건강한 주체성을 세우고, 이곳에서의 평화와 안녕으로 세계 인류의 삶에 기여하는 일을 소망하며 꿈꿀 때, 그것은 또 하나의 불가능한 것을 이루려는 신앙적 열정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리라. 전쟁과 무력과 물질의 힘으로 이웃나라를 침략하고, 빼앗고, 예속시키려는 제국주의의 욕망 대신에 그러한 불의와 폭력에 분노하며 사랑하면서 용기 있게 싸웠던 우리 선배들을 따라서 우리도 같이 그러한 신앙의 길로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소망하고 기도한다. 우리 그리스도 예수의 영과 하나 되게 하는 자매애가 우리의 인도가 되실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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