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가 본 일본불교&문화 목록( 총 :1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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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일본인의 일상주의 〈끝〉 이미지기사 기획특집 금강신문 2008.11.21 10:17
⑪ 사무라이 문화와 불교 이미지기사 기획특집 금강신문 2008.10.24 09:34
⑩ 형식은 불교, 내용은 유교 이미지기사 기획특집 금강신문 2008.09.26 10:03
⑨ 일본 마츠리와 한국 불교 이미지기사 특집기사 금강신문 2008.08.29 09:45
⑧ 일본의 그리스도교와 불교 이미지기사 기획특집 금강신문 2008.08.01 13:46
⑦ 신불습합을 넘어 일본적 불교로 이미지기사 기획특집 금강신문 2008.07.04 10:43
⑥ 일본의 장례문화와 불교 이미지기사 기획특집 금강신문 2008.06.05 10:56
⑤ 기성종교와 신종교, 그 이후 이미지기사 기획특집 금강신문 2008.05.07 10:28
④ 일본의 법화계 신불교들 이미지기사 기획특집 금강신문 2008.04.11 10:43
③ 일본 불교를 세운 이들 이미지기사 기획특집 금강신문 2008.03.14 10:58
② 일본 문화의 다른 이름, 신도(神道) 이미지기사 기획특집 금강신문 2008.02.15 10:59
① 총론-韓 반감 日 무관심, 불교 통해 상호이해 계기 삼길 이미지기사 기획특집 금강신문 2008.01.1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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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총론-韓 반감 日 무관심, 불교 통해 상호이해 계기 삼길
기자명 금강신문
입력 2008.01.1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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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1월 2일 새해 복을 빌기 위해 가마쿠라(鎌倉) 츠루가오 카하치만구(鷄岡八幡宮)라는 신사에 몰려든 인파.
우리는 흔히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부른다. 하지만 역사를 되짚어보면 삼국시대 백제가 일본에 불교와 각종 신문명을 전하는 등 한국과 일본은 유사한 문화를 가진 매우 가까운 나라다. 1910년부터 35년간의 일본 식민통치가 양국을 가깝고도 먼 나라로 만든 것이다. 일본불교계의 도움으로 1년 동안 일본에서 종교학을 연구하게 된 이찬수 전 강남대 교수를 통해 ‘가깝고도 먼’ 일본의 불교와 문화를 소개한다. 편집자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한국과 일본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다. 실제로 사람들의 생김새, 생활수준 등에서 한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는 일본이다. 언어의 문법이나 구조, 종교 문화 등 비슷한 부분을 상당히 많이 공유한다. 특히 종교적인 차원에서 유교와 불교문화는 두 나라 사회 질서와 세계관의 근간이다. 그것만으로도 한일 양국은 서로에게서 비슷한 체취를 느낄 수 밖에 없다.
물론 차이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일단 서로에 대한 감정이나 정서가 다르다. 일본의 피식민지 경험으로 인해 한국인은 일본에 대한 반감이 큰 편이다. 그에 비해,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정서는 다양하지만, 요약하면 무관심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한국의 반감과 일본의 무관심은 서로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좋은 일이 아니라면 당연히 극복되어야 하며, 제대로 된 상호 이해를 통해서만 이러한 극복이 가능하다. 특히 미래를 내다보건대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제까지 ‘반감’ 수준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타국을 보는 창, 종교
일본을 내다보게 해주는 창문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 중에서도 지난 십 수 세기에 걸쳐 한국과 일본이 맺어온 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종교문화라는 창문이야말로 일본을 이해하게 해주는 가장 깨끗하고 큰 창문이다. 종교문화야말로 다양한 문화 형태의 총체이며, 개인 또는 사회의 가장 깊은 부분을 반영해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특히 불교문화를 중심으로 일본의 종교문화 전반을 짚어보고자 한다. 일단은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이지만, 자연스럽게 한국인 자신을 반추하는 시간도 되리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일본의 불교문화를 살펴본다고 해서 일본이 유례없는 불교국가라는 뜻은 아니다. 현대 일본인은 불교를 비롯하여 종교 현상 전반에 관심이 없다. 불행하게도 일본에서 불교는 문화유적으로서의 의미 내지는 ‘장례식장’ 내지 ‘납골당’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살아있는 생활불교의 모습은 한국에 미치지 못한다. 그저 종교는 노약자에게나 필요한 것이라는, 다소 구태의연하고 세속적인 사고방식이 주를 이룬다.
현재 일본의 탈종교적 상황은 멀든 가깝든 한국의 앞날을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으며,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그 자세도 고민하게 해준다.
▲ 2007년 10월 7일 재가불교단체 리쇼코세이카이에서 주최한 축제(마츠리)의 한 장면. 수천명의 신도가 참여해 거리를 행진하면서 밤 늦게까지 진행됐다.
종교는 일본인의 삶
이처럼 일본인은 지극히 세속적인 듯 하면서도, 다른 한편 인생의 주요 통과의례의 순간만큼은 종교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가령 일본의 갓난 아이는 저도 모른 채 부모 품에 안겨 신사(神社)의 신들에게 신고되고, 성인이 되어 결혼식은 그리스도교 교회나 호텔에서 올리지만, 결국 죽어서는 불교 사찰에 묻힌다.
이것이 일본인이며, 이러한 현상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앞에서 본 대로 현대 일본인의 기복성과 세속성이지만, 다른 차원에서 보면 일본인은 삶의 중요한 순간만큼은 종교적 상징체계에서 의미를 찾고 방향을 잡아가는 사람들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후자이다. 거기서 일본적 정신의 뿌리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새해가 되면 전국의 유명 신사에는 사람들이 몰려든다. 신사에 모셔진 신령 앞에서 일 년 간 살아갈 힘을 얻고 복을 비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이다. 짧은 기도의 시간을 얻기 위해 말 그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신사 안에 차례로 줄을 선다. 한국의 사찰에는 사월초파일에 가장 많은 신도들이 모여들듯이, 새해 첫날 일본인은 신사에 모여든다. 이러한 현상이 일본적 종교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신도(神道)이며, 일본의 종교문화를 알아보려면 제일 먼저 신도에 대해 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신도야말로 일본 종교의 영원한 고향과도 같다. 일본인의 집단주의적 일체감은 신도적 분위기 안에 드러나 있고, 또 그 분위기가 여전히 일본적 일체감을 이루는 결정적인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인 차원에서 보면 오늘날과 같은 신도의 형성에 불교가 끼친 영향이 적지 않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다음에는 신도 및 불교와의 관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일본의 고승과 사상
이어서 호넨(法然), 도겐(道元), 신란(親鸞), 니치렌(日蓮) 등 일본 불교의 사상적 기초를 놓은 이들에 대해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원효, 의천, 지눌, 보우, 서산, 만해 없는 한국 불교를 상상할 수 없듯이, 이들 없는 일본 불교를 상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소카가카이(創價學會), 리쇼쿄세이카이(立正成會) 등 근대 일본의 신불교 운동 및 텐리교(天理敎), 퍼펙트리버티(ペ一ヘエクト·リバテイ一) 등 일본 신종교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신종교는 종교가 어떤 상황 속에서 생겨나 어떻게 성장해가는지를 알려주는 생생한 척도라는 점에서 중요한 연구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어서 엔랴쿠지(延曆寺), 산주산겐도(三十三間堂), 호류지(奈郞), 엔가쿠지(圓覺寺) 등 일본의 의미있는 유명 사찰 및 불교 유적에 대해서도 정리해보고자 한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이 아니라, 일본인의 삶과 관련된 부분, 특히 일본인의 사생관(死生觀)에 대해, 일본의 전통적인 지역 축제인 마츠리에 대해, 그리고 마츠리와 불교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아보고자 한다. 특히 전국민적 축제 내지는 지역사회의 공동 축제가 사라진 한국의 불행한 현실과는 달리, 마츠리를 통해 지역적 공동체성을 유지해가는 일본 사회를 비교해보는 일은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넓게는 한국에, 좁게는 특정 교단에 공동체적 의례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떤 형식으로 자리잡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기독교가 번창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왜 기독교인이 거의 없는지도 풀어야 할 숙제이다. 물론 여기에는 조선왕조의 멸망이라는 거국적 불행을 경험한 한국과 달리, 일본은 한번도 국가적 멸망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는 정치, 사회적 이유가 있다.
일본 불교의 역할
나라의 멸망, 전통의 단절을 경험하면서 외세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던 한국에 비해, 일본은 비교적 안정적인 흐름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 일본에서의 기독교 문화 및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도 갖고자 한다.
이것은 동서양이 어떤 식으로 만나는지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뒤 마지막으로는 현대 일본 사회의 세속성과 그곳에서의 불교의 역할과 전망에 대해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기회를 봐서 종교와 경제의 관계, 종단들은 어떻게 재정을 마련하고 유지해가는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도 한 번 짚어보고자 한다. 짧은 지면이지만, 앞으로 일 년 간 독자의 애정 어린 관심과 질정을 바라 마지 않는다.
이찬수(일본·成學林 객원강사)
이 찬 수
1962년생.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거쳐 동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불교학과 신학으로 각각 석사학위를 받은 뒤, 같은 곳 신학분야에서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강남대 교양학부 교수를 지내다가 불상 앞에 절했다는 이유로 해직되었다.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일하면서, 지금은 WCRP 평화연구소 객원연구원 및 일본 교성학림 객원강사 자격으로 일본에 체류하고 있다. 〈인간은 신의 암호〉, 〈생각나야 생각하지〉,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등 다수의 책을 썼고, 〈화엄철학〉,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다〉, 〈지옥의 역사〉, 〈절대 그 이후〉 등 여러 권의 역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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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총론-韓 반감 日 무관심, 불교 통해 상호이해 계기 삼길
기자명 금강신문
입력 2008.01.1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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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1월 2일 새해 복을 빌기 위해 가마쿠라(鎌倉) 츠루가오 카하치만구(鷄岡八幡宮)라는 신사에 몰려든 인파.
우리는 흔히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부른다. 하지만 역사를 되짚어보면 삼국시대 백제가 일본에 불교와 각종 신문명을 전하는 등 한국과 일본은 유사한 문화를 가진 매우 가까운 나라다. 1910년부터 35년간의 일본 식민통치가 양국을 가깝고도 먼 나라로 만든 것이다. 일본불교계의 도움으로 1년 동안 일본에서 종교학을 연구하게 된 이찬수 전 강남대 교수를 통해 ‘가깝고도 먼’ 일본의 불교와 문화를 소개한다. 편집자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한국과 일본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다. 실제로 사람들의 생김새, 생활수준 등에서 한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는 일본이다. 언어의 문법이나 구조, 종교 문화 등 비슷한 부분을 상당히 많이 공유한다. 특히 종교적인 차원에서 유교와 불교문화는 두 나라 사회 질서와 세계관의 근간이다. 그것만으로도 한일 양국은 서로에게서 비슷한 체취를 느낄 수 밖에 없다.
물론 차이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일단 서로에 대한 감정이나 정서가 다르다. 일본의 피식민지 경험으로 인해 한국인은 일본에 대한 반감이 큰 편이다. 그에 비해,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정서는 다양하지만, 요약하면 무관심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한국의 반감과 일본의 무관심은 서로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좋은 일이 아니라면 당연히 극복되어야 하며, 제대로 된 상호 이해를 통해서만 이러한 극복이 가능하다. 특히 미래를 내다보건대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제까지 ‘반감’ 수준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타국을 보는 창, 종교
일본을 내다보게 해주는 창문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 중에서도 지난 십 수 세기에 걸쳐 한국과 일본이 맺어온 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종교문화라는 창문이야말로 일본을 이해하게 해주는 가장 깨끗하고 큰 창문이다. 종교문화야말로 다양한 문화 형태의 총체이며, 개인 또는 사회의 가장 깊은 부분을 반영해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특히 불교문화를 중심으로 일본의 종교문화 전반을 짚어보고자 한다. 일단은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이지만, 자연스럽게 한국인 자신을 반추하는 시간도 되리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일본의 불교문화를 살펴본다고 해서 일본이 유례없는 불교국가라는 뜻은 아니다. 현대 일본인은 불교를 비롯하여 종교 현상 전반에 관심이 없다. 불행하게도 일본에서 불교는 문화유적으로서의 의미 내지는 ‘장례식장’ 내지 ‘납골당’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살아있는 생활불교의 모습은 한국에 미치지 못한다. 그저 종교는 노약자에게나 필요한 것이라는, 다소 구태의연하고 세속적인 사고방식이 주를 이룬다.
현재 일본의 탈종교적 상황은 멀든 가깝든 한국의 앞날을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으며,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그 자세도 고민하게 해준다.
▲ 2007년 10월 7일 재가불교단체 리쇼코세이카이에서 주최한 축제(마츠리)의 한 장면. 수천명의 신도가 참여해 거리를 행진하면서 밤 늦게까지 진행됐다.
종교는 일본인의 삶
이처럼 일본인은 지극히 세속적인 듯 하면서도, 다른 한편 인생의 주요 통과의례의 순간만큼은 종교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가령 일본의 갓난 아이는 저도 모른 채 부모 품에 안겨 신사(神社)의 신들에게 신고되고, 성인이 되어 결혼식은 그리스도교 교회나 호텔에서 올리지만, 결국 죽어서는 불교 사찰에 묻힌다.
이것이 일본인이며, 이러한 현상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앞에서 본 대로 현대 일본인의 기복성과 세속성이지만, 다른 차원에서 보면 일본인은 삶의 중요한 순간만큼은 종교적 상징체계에서 의미를 찾고 방향을 잡아가는 사람들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후자이다. 거기서 일본적 정신의 뿌리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새해가 되면 전국의 유명 신사에는 사람들이 몰려든다. 신사에 모셔진 신령 앞에서 일 년 간 살아갈 힘을 얻고 복을 비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이다. 짧은 기도의 시간을 얻기 위해 말 그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신사 안에 차례로 줄을 선다. 한국의 사찰에는 사월초파일에 가장 많은 신도들이 모여들듯이, 새해 첫날 일본인은 신사에 모여든다. 이러한 현상이 일본적 종교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신도(神道)이며, 일본의 종교문화를 알아보려면 제일 먼저 신도에 대해 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신도야말로 일본 종교의 영원한 고향과도 같다. 일본인의 집단주의적 일체감은 신도적 분위기 안에 드러나 있고, 또 그 분위기가 여전히 일본적 일체감을 이루는 결정적인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인 차원에서 보면 오늘날과 같은 신도의 형성에 불교가 끼친 영향이 적지 않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다음에는 신도 및 불교와의 관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일본의 고승과 사상
이어서 호넨(法然), 도겐(道元), 신란(親鸞), 니치렌(日蓮) 등 일본 불교의 사상적 기초를 놓은 이들에 대해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원효, 의천, 지눌, 보우, 서산, 만해 없는 한국 불교를 상상할 수 없듯이, 이들 없는 일본 불교를 상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소카가카이(創價學會), 리쇼쿄세이카이(立正成會) 등 근대 일본의 신불교 운동 및 텐리교(天理敎), 퍼펙트리버티(ペ一ヘエクト·リバテイ一) 등 일본 신종교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신종교는 종교가 어떤 상황 속에서 생겨나 어떻게 성장해가는지를 알려주는 생생한 척도라는 점에서 중요한 연구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어서 엔랴쿠지(延曆寺), 산주산겐도(三十三間堂), 호류지(奈郞), 엔가쿠지(圓覺寺) 등 일본의 의미있는 유명 사찰 및 불교 유적에 대해서도 정리해보고자 한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이 아니라, 일본인의 삶과 관련된 부분, 특히 일본인의 사생관(死生觀)에 대해, 일본의 전통적인 지역 축제인 마츠리에 대해, 그리고 마츠리와 불교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아보고자 한다. 특히 전국민적 축제 내지는 지역사회의 공동 축제가 사라진 한국의 불행한 현실과는 달리, 마츠리를 통해 지역적 공동체성을 유지해가는 일본 사회를 비교해보는 일은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넓게는 한국에, 좁게는 특정 교단에 공동체적 의례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떤 형식으로 자리잡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기독교가 번창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왜 기독교인이 거의 없는지도 풀어야 할 숙제이다. 물론 여기에는 조선왕조의 멸망이라는 거국적 불행을 경험한 한국과 달리, 일본은 한번도 국가적 멸망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는 정치, 사회적 이유가 있다.
일본 불교의 역할
나라의 멸망, 전통의 단절을 경험하면서 외세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던 한국에 비해, 일본은 비교적 안정적인 흐름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 일본에서의 기독교 문화 및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도 갖고자 한다.
이것은 동서양이 어떤 식으로 만나는지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뒤 마지막으로는 현대 일본 사회의 세속성과 그곳에서의 불교의 역할과 전망에 대해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기회를 봐서 종교와 경제의 관계, 종단들은 어떻게 재정을 마련하고 유지해가는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도 한 번 짚어보고자 한다. 짧은 지면이지만, 앞으로 일 년 간 독자의 애정 어린 관심과 질정을 바라 마지 않는다.
이찬수(일본·成學林 객원강사)
이 찬 수
1962년생.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거쳐 동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불교학과 신학으로 각각 석사학위를 받은 뒤, 같은 곳 신학분야에서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강남대 교양학부 교수를 지내다가 불상 앞에 절했다는 이유로 해직되었다.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일하면서, 지금은 WCRP 평화연구소 객원연구원 및 일본 교성학림 객원강사 자격으로 일본에 체류하고 있다. 〈인간은 신의 암호〉, 〈생각나야 생각하지〉,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등 다수의 책을 썼고, 〈화엄철학〉,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다〉, 〈지옥의 역사〉, 〈절대 그 이후〉 등 여러 권의 역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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