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16

希修 我 vs. 無我

希修

23 h  · Shared with Public

< 我 vs. 無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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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힌두교의 영향이 우선 섞이고, 그 후 각 지역마다 현지 철학 및 토속 신앙들이 스며든 대승불교의 어떤 개념/이론들은 초기경전에 나오는 애초의 부처님 가르침과는 좀 다를 수가 있다. 慈悲와 無我도 그런 예에 속하는데, 박원순 시장 문제와 연결되는 지점 (3번)도 있고 해서 무아에 대해 수다를 떨어 보려고 한다. (공부삼아 가끔 써 보는 것일 뿐 초보 수준의 이해에 불과함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아래에 단계를 나눈 것은, 타니사로 스님의 가르침과 아비담마에 대한 저의 얕은 이해에 근거하여 편의상 나름대로 도식화해 본 것입니다. 제 자신의 이해가 1~3단계의 순서를 따르기는 했지만, 1~3단계가 서로 다른 '측면'들로서 동시에 고려되는 것이 이상적이기는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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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단계: '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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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불교는 업에 의한 윤회를 전제한다. 이승의 모든 디테일들이 세세하게 다 예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마치 어떤 방송국에서 TV 연속극 제작을 시작할 때는 대충의 플롯만 있고 스토리의 디테일은 시청자 반응을 보면서 전개해 가는 것처럼, 또 삶의 큰 윤곽은 四柱八字에 나오지만 그 구체성은 스스로 완성해 가는 것처럼, 그런 대충의 밑그림만 그려져 있는 정도라고 얘기할 수 있을 듯. 물론 그 '윤곽' 자체가, 삶을 일정 방향으로 흐르게끔 하는 모멘텀을 이미 갖고 있기는 하며, 그걸 바꾸는 게 쉽지도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내 삶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나의 의지와 노력. 나의 현재 생각/말/행동이 얼마나 'skillful'/'wholesome'한가 (貪瞋痴가 적은가)?에 따라, 이것이 새로운 업으로서 전생/과거 업과 상호작용을 계속하면서 나의 삶을 확정해 나간다.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신의 쾌락/이익만 좇는 이기적인 사람은 1단계의 날라리, 바른 과정/방법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1단계의 모범생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암튼 이 삶의 '책임'( ≠'탓')은 오로지 '나'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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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단계: '나'라는 사람에 대한 규정이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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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영원불변하는 그런 '영혼'을 불교에선 인정하지 않는다. One and the same 영혼이 옷갈아입듯 몸을 바꾸는 것이 힌두교의 윤회 (reincarnation)이고, 한 양초의 불로써 다른 양초에 불을 붙이듯 그렇게 불=업이 다음 양초=생으로 넘어간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윤회 (rebirth). 힌두교의 윤회와 다른 점은, 불교의 윤회에서는 이전 양초의 불과 이후 양초의 불이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말하기가 애매하다는 것이다. 전생의 철수가 남긴 업이 물질을 끌어 와 영희라는 이승의 육체를 형성하며, 이 때 철수의 업이 영희에게 상속된다 - 부모님의 재산을 상속받을 때 채무도 함께 상속되듯이. 상속받은 업을 요리할 책임은 영희에게 있고, 그 요리의 결과가, 영희의 미래 and/or 영희의 업을 상속할 내세의 미경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어떤 업이 이승의 영희 자신에게 결과를 가져오고 어떤 업이 내세의 미경에게 갈지 알 수 없기에, 영희로서는 그저 요리에 최선을 다 할 밖에. 이것이 업과 윤회의 과정이며, 해탈로써 정지시키지 않는 한, 이 과정은 영원히 무한히 반복된다. 겉모습으로만 철수-영희-미경 '세 사람'인 것이지 업은 그렇게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한 생 안에서도 새로운 업에 의해 매 순간 계속 '만들어져 가는' 영희를 딱히 규정할 방법 또한 없다. 이 내용을 표현한 개념이 바로 '無我'.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영희가 생각하는 '나'라는 것은, 1단계에서의 자기중심성 혹은 소위 말하는 ego에 대한 환상 내지 집착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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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서 머무르면, 종교에 중독된 좀비 혹은 '道士입네' 하는 사이비가 된다. 어떤 사무라이가 적을 죽이면서 "오늘 내가 너의 목을 베는 것은 내 자신의 목을 베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이 하나일 뿐 너도 따로 없고 나도 따로 없는데, 누가 누구를 죽인다는 말인가?"라고 했다는 일화처럼. 온갖 비리와 탐욕에 절어 사는 스님들도 전부 이런 '논리'를 자기합리화로 악용하면서 선악을 초월한 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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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부처님은 "'나'라는 것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Yes/No 대답을 아예 거부하셨다!!! "니 몸도 니 마음도 100% 통제 못 하면서 니 몸이나 마음에 집착하는 게 무슨 의의가 있느냐?"라며 지나친 애착/집착을 경계하거나, "Self라는 관점에서도 not-self라는 관점에서도, existence의 관점에서도 non-existence의 관점에서도 생각하지 마라"고 하셨을 뿐. 사람들이 여기서 'not-self'라는 부분만 뽑아내어 확대해석하고 과장하고 또 오염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 그러므로 기억할 것은 오로지, 부처님이 말씀하신 이 마지막 문장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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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단계: 가방의 브랜드 대신 재료, 디자인, 바느질 하나 하나를 보라

그럼 self나 existence 말고 어떤 관점에서 생각해야 하느냐? '너', '나', 이렇게 패키지로서의 '사람' (1단계에서의 주체)에 촛점을 두지 말고 그 패키지의 구성요소인 낱낱의 생각/말/행동에 어떤 탐진치가 얼마나 들어있는가?에만 집중하라는 것. (물론 낱낱의 생각/말/행동이 쌓여 패키지가 되는 것이니, 결과/포장보다 과정/내용에 집중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을 듯.) 이렇게 살면, 자존심, 체면, 열등감, 자괴감, 우월감 등 때문에 서로 에너지 소모할 필요가 없어진다 - 이론적으로는. 부처님은 무조건 온화하고 자상하기만 하셨을 거라고, no judgment를 가르치셨을 거라고 흔히 추측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그건 너무나 멍청한 소리다", "이 쓸모 없는 인간아" (누군가가 매우 위험한 가치관을 갖고 있을 때) 같은 말씀들도 종종 하셨고, 타인의 생각/말/행동 속에 어떤 탐진치가 작용하고 있으며 어떤 단기적 그리고 장기적 결과를 낳는지를 늘 주의깊게 관찰, 분석하라고 하셨다. 그런 능력이 먼저 생겨야만 자기 자신의 생각/말/행동도 판단, 교정해 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 서로 서로를 비판해 주라고 (물론 방법이 중요), 공동체의 화합!을 위해서는 비판!이 필요하니 (비판을 통한 조율이 불가능하다면 서로간의 '다름'은 억압될 수밖에 없는데, 억압 속에서 무슨 '화합'이 가능하겠나? 동양 특유의 공동체주의는 합리적 비판을 억압하려고만 하는데, 최소한 초기불교는 그러지 않는다) 분쟁시에는 제 3자를 동석시켜 토론하라고 초기경전은 가르친다. (부처님이 비판/논쟁을 안 하실 때는, '겸손' 때문도 아니고 상대를 '존중'하셔서도 아니고, 상대가 너무 수준이하이거나 배울 자세가 안 되어 있을 때였다.) 또, 비판을 잘 못 하거나 잘 못 받아들이는 사람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까지 초기경전은 말한다. 자존심이나 체면 등의 사적인 감정 때문에 판단이 흐려지는 사람이라면 그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라는 메세지라고 나는 이해한다. (그리고, 이렇듯 생각/말/행동 속에서 12연기를 파악하려는 impersonal한 노력이, 칸트의 '보편적 입법원리'와 좀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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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예를 들어 보자. 어떤 명품 가방은 가격이 무려 천만원에 이른다. 재료, 디자인, 바느질 등에 대한 세심한 공이 쌓여 그 브랜드의 유명세가 생겨난 것이지만, 나중에는 그런 퀄리티 자체보다 브랜드가 더 중요해진다. 그런데 그 회사에서 어떤 신상품 하나를 인조 가죽으로 만들면서 진짜 가죽을 사용했다고 광고하다 들통이 난다면, 다른 모든 제품들이 완벽해도 그 브랜드는 더이상 이전의 명성을 유지하지 못 할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브랜드 아닌 실제 재료, 디자인, 바느질에만 근거해서 구매를 결정한다면, 허위광고 이전에 천만원을 받을 수도 없을 테고, 허위 광고 이후에도 다른 상품들은 여전히 제 가치대로 팔릴지도 모른다 - 가격이 실제의 물리적 가치를 투명하게 반영하므로. 사람도 마찬가지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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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 여럿을 우리는 자살로 잃었다. 어떤 정치인에 대한 팬덤이 열광적일수록, 그 정치인이 느끼는 '브랜드 수호' 부담감은 무거워질 것이고, 이미지와 실제 자신 사이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할 때 즉시 인정하고 바로잡기보다는, 위에서 언급한 사무라이나 일탈 스님들처럼 자기합리화를 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기가 100배 쉬운 것이 인간의 본성인 듯. 그렇게 문제가 곪다가 어느 날 터지는 것이고. 하지만 그렇게 온세상이 무너지는 듯 느껴질 때 "지금 이 순간 어떤 생각/말/행동을 하는 것이 가장 skillful/wholesome 한지, 오로지 이 하나만을 impersonal 하게 생각해라", "칭찬이나 비난 같은 브랜드 이미지의 문제에 휘둘리지 마라", "'너', '나' 이런 패키지의  차원이 아닌 낱낱의 생각/말/행동 차원에서 생각해라", "후회나 자책으로 괴로와하지 말고, 잘못을 인정하고 반복 않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하는 그 선택을 매 순간 갱신함으로써 자긍심을 쌓아라".. 부처님의 이런 말씀들을 누군가 그들에게 해 주었다면,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와 처벌을 감수하며, 더 나아지고자 노력하는, 그런 용기있고 책임있는 훌륭한 모델을 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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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회적 인사가 그 명성에 못 미치는 행동을 할 때, 人情 때문에, 내가 '아랫사람'이라서, 상대방의 체면을 생각해서, 조직의 '화합'을 위해, 우리 진영에 흠이 갈까봐, 남의 허물 특히 지인의 허물은 무조건 덮어만 주는 것이 '미덕'이라 배웠기에, 이런 온갖 이유들, '브랜드 이미지'로 수렴되는 그 잡다한 구실들 때문에 덮고 덮다가, 살이 썩어 고름이 나고 악취가 나도 반창고만 덕지덕지 붙이며 지내다가, 결국은 조직이 괴사하거나 심지어 생명까지 잃는 경우들을 우리는 무수히 보아 왔다. 적당히 '융통성있게' 넘어가지 않고 매 순간 그 하나의 생각/말/행동에만 집중했다면, 그렇게 매 순간 순간을 고지식하게! 산다면, 단기적으로는 혹 '피할 수 있었던 손해'를 보더라도 장기적으로는 훨씬 오래 '진실만이 줄 수 있는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으련만.. 그러니 '고인에게 불리한 진실은 가급적 은폐하여 고인의 명예를 최대한 지키는 것이 내가 존경하던 분에 대한 나의 도리다'라고 혹 착각하는 이가 단 한 분이라도 계신다면, 그건 1단계의 자기중심적 '아름다운 의리'일 뿐 사실은 惡業 (남의 악행을 돕는 것도 악업이다)임을 이해하셨으면 좋겠다. 탐진치를 줄이는/없애는 善業이라는 것은, 그저 교과서적인 얘기가 아니라 실제로 가장 큰 '이익'( =행복)을 가져오는 가장 현명한 '투자'임을 부디 기억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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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단계: 모든 것을 초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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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을 하려면, 八正道의 8요소 모두를 순서대로 만랩으로 계발하고 균형을 이룬 후, 모든 생각과 관념과 노력을 놓아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생각/관념에는 '나', '수행', '해탈' 등이 모두 포함된다고 한다. "相/想에 집착하지 마라", "모든 것을 내려 놓아라", "생각 많이 하지 마라" 등의 얘기가 모두 이런 의미인데, 문제는, 이건 해탈 직전이나 가서 걱정할 일이라는 것. 지구상 80억 인구 중 이 걱정을 해야 하는 경지에 있는 사람은 아마 80명? 8명?도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니, 4단계도 아니면서 심오한 척하느라 4단계의 얘기를 주문처럼 읊조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integrity와 의도에 주의해야 하고, 2단계의 '무아'에 취해 있는 사람은 3단계의 skillful vs. unskillful 사고를 '수준 낮은 이분법'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종교/영성에 관심있는 이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도 바로 2단계의 '무아'니 'oneness'니 하는 것들에 대한 집착인데, 초기불교는 이 oneness마저 특정 단계에서의 명상 경험일 뿐 truth/reality는 아니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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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無我之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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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작품/활동에 푸욱 빠져 잠시나마 '나'를 완전히 망각할 때 '무아지경'이라는 표현을 쓰고, 이걸 바람직한 상태로 오해하기에 그래서 심지어는 섹스를 '수행'으로 삼는 '탄트라'라는 것도 생긴 것이지만, 이런 해석은 초기경전의 관점과는 무관하다. 초기불교는 섹스, 도박, 권력, 쇼핑, 예술, 여행, 우정/사랑, 심지어 학문마저도 모두 '감각적 즐거움을 위한 feeding'이라 간주한다. 물론 도박보다는 예술이 건전하고 인간관계보다는 자연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건강하지만, 가장 이상적인 즐거움은 명상을 통해 자가발전하는 것이라고. 또, 예술이든 뭐든 그런 외부 활동/즐거움에 distract되지 않기 위해 일상생활 중에도 늘상 '자신의 호흡에 대한 관조를 anchor로 삼으'라고 (바로 이것이 'centered'의 의미) 초기불교는 가르친다. 그러니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무아'/'무아지경'은, 실은 부처님의 실제 가르침에서는 아주 많이 벗어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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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1단계에서 평생을 보낸다. 2단계의 '무아'도 저 사무라이나 일탈 스님들처럼 그저 '겉멋'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3단계를 실천하는 것은 말보다 훨씬 어렵고 특히 인간세상에적용되기엔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측면도 있지만.. '사람'이라는 패키지 혹은 브랜드가 아니라 그 패키지를 구성하는 낱낱의 생각/말/행동에 집중하라는 원칙은, 자괴감/자책으로 괴롭거나 혼란스러울 때 특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유명하신 분들일수록 이 점을 기억하시어, 외부에 보여지는 브랜드 이미지 때문에 연기를 하다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마는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인 아닌 개인으로서의 본인도 지켜 내시기를 바란다. (행/불행을 결정하는 업이 되는 것은 낱낱의 구체적 생각/말/행동이므로, 또 브랜드 이미지에 신경쓰는 자체도 실은 이미 욕심이므로, '자신을 지키'려면 결국은 3단계를 잘 실천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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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崔明淑

3단계는 자기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상태이겠네요.. 인간의 행복감을 느끼는 상태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과문하여 글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네요.ㅜㅜ 그래서 좋습니다.

 · Reply · 22 h · Edited

希修

네,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에 너무 신경쓰며 살면 오히려 불행해지죠. 남들의 시선에만 연연하다가 정작 자신은 방치/무시하게 되구요. 3단계에서 살면 남들 반응에 훨씬 덜 예민해지고 자신에게도 좀더 진실할 수 있고.. ^^

 · Reply · 21 h

崔明淑

希修 1-4단계가 단계별 성장을 나타내는 것이 클리어하게 이해되지가 않아요. 글을 좀 더 잘 읽어봐야겠지요.

 · Reply · 21 h

希修

앞머리에서 언급했듯이, 단계를 나눈 것은 설명의 편의상 임의적으로 나눈 것이고, 제가 이런 순서로 이해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3단계가 결국은 서로 다른 '측면'으로서 동시에 고려되는 것이 이상적일 것 같기는 합니다.

 · Reply · 21 h · Edi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