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1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참 사람으로 산다는 것 : 님과 함께 노닐다 가는 것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참 사람으로 산다는 것 : 님과 함께 노닐다 가는 것 - 금강일보

금강일보
승인 2019.09.09 



한남대 명예교수



어느 누구나 다 참답게 살고 싶어 할 것이다. 아주 형편무인지경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남들이 평가하는 사람일지라도, 가만히 그를 만나 이야기를 진정으로 나누다보면, 그도 역시 참답게 살고 싶은 맘이 깊은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라야 사람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사람이 사람답게 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몸부림치면서 살아간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송기득 선생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신학자요 철학자다. 신학 중에 그는 민중신학에 집중한 이로 분류된다. 그는 신학을 ‘인간화신학’ 즉 ‘인간에 대한 신학적 연구’로 축소하여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신의 이름으로 포장되고, 기독교란 이름과 제도와 교리로 포장된 것들을 벗기려는 노력을 일생 동안 하였다. 그와 같은 노력을 예수도 꼭같이 하였다고 그는 본다. 그래서 오랜 세월 연구한 것이 ‘역사의 예수’였다. 실제 살았던 예수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관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참 삶을 말하는 신학을 정리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로 얻은 것이 온갖 신화와 거짓을 벗겨 낸 ‘인간화신학’이라는 것이다. 그 안에서 그는 신학은 곧 인간에 대한 학문이면서 인간이 함께 꾸리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학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한 평생을 ‘하느님 없이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 삶이라고 평가한다. 이렇게 사는 데 그는 참 귀한 길잡이들을 만난다. 그 삶의 길은 평탄하지가 않았다. 병마, 가난, 불의, 부조리 따위와 만나는 고통과 고난의 길이었다. 불교의 가르침을 모르더라도 삶은 고통이라는 것을 그는 젊어서 깨달았다. 그런 고통의 길에서 만난 김하태, 유영모, 함석헌, 안병무, 서남동, 유동식 등은 매우 놀라운 사상의 눈을 새로 뜨게 한 이들이다. 그것보다도 더 훨씬 전에 그의 육신의 삶을 살게 하여준 어머니, ‘간호 천사’ 김정숙, 결핵 의사 여성숙, 사랑하는 아내 정순애 등은 바로 가장 힘든 시절 그를 일으켜 세운 천사들이었다. 그의 일대기를 들으면 참으로 놀라운 부러움이 있다. 그렇게 긴 세월 그가 살아가는 굽이굽이마다 만난 참으로 귀한 스승들이 그에게 그렇게 많이 있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삶을 통하여 그는 아주 놀라운 신학과 신앙을 펼친다. 사람의 신학과 감사와 사랑의 신앙이다.

특히 유영모, 함석헌, 안병무와 교류하면서 민중(씨???)을 알고, 동학의 수운, 해월 선생의 글을 통해서 신이 어떻게 사람 속에서 활동하는가를 정리하고 살아간다. 틸리히와 불트만은 통하여 사람 예수와 궁극의 실재를 정리한다. 사람은 하느님을 모신다(侍天主). 그 하늘, 즉 하느님을 속에서 잘 길러야 한다(養天主). 그렇게 된 하느님을 살려내고 살아야 한다(生天主). 그것이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의 자세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이것을 살아가는가 하는 일이다. 그것을 그는 하느님과 함께 노니는 것(遊天主)이라고 한다. 하느님은 엄하고 위대해서 두려워하고 공경해야만 하는 대상은 아니다. 사람을 지옥과 천당에 보내려고 판단하는 재판관이 아니다. 그는 권위를 상징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사랑과 구원을 뜻하는 어머니라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모든 아들 딸들은 다 사랑하고 살려줘야할 존재지, 처벌과 응징의 대상은 아니다. 그래서 지옥은 없다고 믿고 말한다. 모두가 다 구원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라면, 참 사람이라면 감사하는 일 뿐이다. 서로 사랑하는 일 뿐이다. 그것은 곧 하느님과 함께 거닐면서 노는 일이다. 노래하고 춤추고 기뻐하고 시를 쓰고 함께 어울려 감사하고 사랑하면서 사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그에게는 실제로 참 큰 고통이 일생 동안 따랐다. 젊어서 결핵을 깊이 앓게 된 이후로 세상 끝날 때까지 그와 함께 한 고통은 불면증과 두통이었다. 이 두 병을 없애달라고 하느님께 수도 없이 많이 기도했단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또는 두통이 심할 때마다 그는 무섭게 글을 썼다. 이상하게 그렇게 잠을 자지 못하였고, 머리가 아파서 몽롱한 상태에서도 생각은 명료하였고, 논리가 정연하게 잡혔으며, 참을 펼치기에 적절한 비판력이 발동하였다. 그래서 타협하지 않는 문장이 나왔다. 쉴 사이 없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글은 그를 삶이 고통이 아니라 고통 그 자체, 고해 그 자체가 곧 삶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깨달음에 이르게 된 것을 그는 참으로 고마워하면서 살았다.

70세가 다 되어 시작한 잡지 《신학비평》과 《신학비평너머》를 통하여 참 인간의 삶을 신학적으로 탐구하고, 감추는 것 없이 그대로 펼쳤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매일 아주 간절하고 절절한 편지를 써서 열권이 되는 책으로 만들어 냈다. 그러면서 사랑하고 아끼는 제자들과 아는 이들을 죽기 전에 만나 미리 살아 있을 때 장례를 치렀다.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 오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세상을 뜨기 한 주 전 사랑하는 제자들이 찾아와 모인 자리에서 3시간 이상의 열띤 강의를 펼쳤고, 그가 봉직했던 목원대학교에 삼천만원의 장학금을 냈고, 북한의 결핵환자들을 돕는 유진벨 재단에 이천만원을 후원하였다. 그리고 스승 김하태로부터 물려받은 강의의자를 사용하다가, 대를 이을 아끼는 제자 이정순 교수에게 물려주었다. 하느님과 함께 노니는 삶에는 고통과 영광과 아픔과 치유가 차이가 없음을 증명하고 그는 훨훨 춤추듯이 날아갔다. 그는 그렇게 사랑하는 아내 곁에 누워 ‘없는 하느님’과 영원히 춤추며 노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