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1
김규항 - <소꿉>은 우리가 잃어버린 노는 아이들의 모습
(4) 김규항 - [2010년에 쓴 글. 어느덧 우리는 이런 질문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먼 산 <소꿉>은...
김규항
16 hrs ·
[2010년에 쓴 글. 어느덧 우리는 이런 질문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먼 산
<소꿉>은 놀이운동가 편해문 씨가 인도와 네팔을 오가며 놀이에 빠져있는 아이들을 담은 사진집이다. 작년에 책을 내고 나서 몇몇 사람들의 항의 메일을 받았다. 책엔 그저 무표정하게 가만있는 아이들 사진이 꽤 들어있는데 이게 무슨 놀이 사진이냐는 거였다. 그러나 내가 그런 사진들을 포함하여 책을 발간한 이유는 그 또한, 아니 우리 현실에선 그것이야말로 중요한 놀이 사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놀이동산이니 놀이캠프니, 놀이도 상품화하다보니 적어도 눈과 입을 찢어져라 벌리고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 정도는 지어야 노는 아이들이구나 싶다. 그러나 빠르고 센 놀이가 있듯 느리고 부드러운 놀이도 있다. 혼자, 혹은 동무와 함께 가만히 앉아 별다른 목적도 내용도 없이 느리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노는 아이들의 모습인 것이다.
며칠 전 충청도 어느 시골 고개를 넘다 눈에 들어온 풍경에 가슴이 저렸다. 외딴집 툇마루에 두 아이가 나란히 걸터앉아 땅에 채 닿지 않는 다리를 까닥거리며 먼 산을 보고 있었다. 먼 산 보는 아이를 본 게 대체 얼마만인지. 만일 아이가 아파트 베란다에 앉아 한참 먼 산을 보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까? 그 평화로운 풍경을 훼방할세라 조용히 미소 지으며 지나칠까?
사람이 복잡한 존재인 건 사람에겐 영혼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영혼은 언어로 표현할 수도 수치로 계량할 수도 없는 참으로 참 모호한 것이지만, 영혼이 없으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며 행복이라는 것도 결국 영혼의 상태로 좌우된다는 걸 우리는 안다. 아무리 초라한 처지라 해도 영혼이 충만한 사람은 아랑곳없이 행복하다. 그러나 행복의 조건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갖추어도 영혼이 결핍된 사람은 외롭고 허무해서 더는 살고 싶지 않다.
몸이 아이 시절에 성장하듯 영혼의 크기와 깊이도 아이 시절에 성장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종교활동을 하거나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햄버거를 고르듯 이런저런 영성 프로그램을 구매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들은 영혼의 결핍으로 인한 고통을 잠시 위무할 순 있으되 영혼의 크기와 깊이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영혼은 아이 시절의, 상업적으로 프로그램화할 수 없는 놀이 시간에, 느리고 의미 없는 시간에, 그윽하게 먼 산 보는 시간에 성장한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이명박이니 반이명박이니 수구니 개혁이니 꽤나 치열하게 미래를 도모하는 듯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아이들이 일찌감치 영혼을 거세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 지구를 휘감은 신자유주의 정신은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통해 경쟁할 것을 요구하고, 그 승리의 요건은 삶을 경제적 기준으로 얼마나 효율화하는가, 즉 삶에서 영적 시간을 얼마나 도려내는가에 있다. 그러나 그런 요구를 아이들에게 이토록 철저하고 잔혹하게 적용하는 사회는 없다.
아이들은 놀 시간의 대부분을 사교육 자본가들에게 빼앗기며, 참으로 눈물겹게 확보한 자투리 시간들마저 교활한 연예산업 자본가들과 게임산업 자본가들과 통신산업 자본가들에게 모조리 빼앗긴다. 한국인들을 소를 잡아 그 고기는 물론 머리끝에서 꼬리 끝까지 한 군데도 빼놓지 않고 먹어치우는 걸로 유명한데 한국 아이들이 바로 그 짝이다. 한국에서 교육이란 아이들의 영혼이 성장할 시간을 1분 1초도 허용하지 않는 노력을 뜻한다.
우리는 아이들을 매일같이 그 잔혹극 속으로 밀어 넣으며 말한다. "이 무한경쟁의 세상에서 나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 우리에겐 아직 영혼이 남아 있는 걸까? (한겨레 2010. 3. 3.)
274Park Yuha, 김재형 and 272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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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석 무한 비교 무한 경쟁을 통한 기술적 효율성을 지고의 선으로 삼는 메리토크라시가 우리의 사회 기율이자 지배 정서로 강고하게 고착화된 나머지.
소위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각 진영 내에서 사회경제적 자본을 틀어쥔 엘리트 패권주의 세력들과 그 맹목적인 추종자들이 스스로의 삶을 콘트롤하는 내재적 기율로 삼고 살아온 덕분에 초래된 금번의 조로남불 파동(진짜 질 나쁜 블랙 코메디) 한 편과. 우정이든 사랑이든 진정한 관계 맺기를 회피하며 서로의 사회경제적 자본을 견주어보는 간보기에 맛 들린 '썸 타기'가,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마치 시대적 대세인양 횡행하는 막장 드라마들을 연신 목도하면서.
일종의 동양 판 빅 데이터이자, 삶의 정향을 궁구하는 데 여러모로 도움이 될 사주 명리학에 대한 배움의 과정에서 얻게 된 "귀한 가르침"에 대해 다시금 곱씹어 보게 됩니다.
본인의 타고난 자질을 제대로 깨닫고 그를 부단히 연마해 얻게 된 재물은, 오직 타인과의 올바른 관계이자 인연 맺음을 통한 영성(인성) 수양에 쓰여질 때에만. 진정으로 그 삶에 유의미하고 유익한 선 순환적 운명을 선사해준다는 원리를 내포한 "식상 재생 관인 상생"의 함의에 대해서. 선생님의 뼈아픈 지적대로, 인간다움의 본질인 인성이자 영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얻게 될 세상의 부귀영화가 대체 무슨 소용이 있고 의미가 있을까 싶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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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h
· Edited
모하비 글 잘 읽었습니다. '그윽하게 먼 산을 보는 시간에 성장한다' 란 말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자본가와 산업이 밀집된 도시의 아이들도 그윽하게 도시의 풍경을 보는 시간에 성장할테니까요. 저는 먼 산에 관한 부분은 하이엔드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오지를 여행하는 어른 여행자들의 근사한 개인적 만족이라고 봅니다. 오래전 박노해씨의 이란 이라크 개인 사진전에서 박노해씨는 무표정의 아랍아이들을 불행의 주제로 전시한 것이 김규항님의 생각과 대치되는것같아 그렇습니다. 결국 먼 산에 관한 개인적 감흥을 자본가와 산업시스템의 문제로 결론을 돌리셨는데 내용에는 동감하나 순서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의 무지가 먼저야겠죠. 자유시장경제에서 자본과 산업기득권이 어떤 폐해를 부리던 그것은 자연스런거라 봅니다. 그 와중에도 영혼이 올바르게 자라난 아이들도 여전히 있으니까요. 해외 오지가 아닌 자유문명국가 아이들의 영혼을 살찌우는 구체적 서술을 기대했다가 자본주의와 산업, 계급의 탓으로 시선을 돌린 본문의 글을 읽으며 글쓴 분의 정치이념적 신념만이 읽힐뿐이며 그래서 다시한번 우리 각자의 부모의 무지와 인성과 영혼이 문제의식의 첫번째 순서여야겠다는 배움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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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h
모하비 replied · 5 replies 9 hrs
김규항 덧붙여, 이 글 이후 강연 등에선 ‘영혼의 성장’을 ‘영혼의 그릇의 성장’이라고 고쳐 표현해왔습니다. 그게 말하려는 바에 좀더 부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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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