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06

니토베 이나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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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토베 이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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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토베 이나조(1862-1933)
니토베 이나조(일본어: 新渡戸 稲造にとべ いなぞう, 1862년 9월 1일 ~ 1933년 10월 15일)는 일본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시대에 걸쳐 활동했던 사상가이자 기독교인, 농업 경제학자, 작가, 교육가, 외교가, 정치가이다.

경력[원본 편집]

그는 국제연맹의 사무차장을 역임하였고 삿포로 농업대학교, 교토 제국대학교, 도쿄 제국대학교, 다쿠쇼쿠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또한와세다 대학교버클리 대학교스탠포드 대학교컬럼비아 대학교, 미네소타 대학교, 해버포드 대학교, 브라운 대학교, 버지니아 대학교, 일리노이 대학교, 제네바 대학교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객원교수 및 명예교수를 지냈다.
그는 도쿄 여자대학교를 창립한 초대 학장이기도 하다.

학문과 사상[원본 편집]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로는 《무사도》가 있으며 일본 화폐 5000엔(円)권에는 한때 그의 초상이 실려 있었다. 그는 당시에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국제주의자였고, 오늘날까지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1880년대 중반 존스 홉킨스 대학원에서 허버트 백스터 애덤스(Herbert Baxter Adams)에게 국제정치학을 배우며 스스로 계몽된 사회라고 자부하던 나라들이 내세우던 야만인을 문명화해야한다는 사명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일본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문명국 대열에 합류하도록 만들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1885년 삿포로에 사는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이를 밝혔다. 그는 토마스 아놀드(Thomas Anold)가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삿포로의 아놀드 박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포부를 전했다.
그는 일본의 식민정책연구를 통해서 당시 일본인들에게 식민지 정책과 제국에 관한 지식을 가르쳤다. 니토베가 일본에서 개척한 이 학문분야는 일본이 시행하고자하는 국제 정책에 대해서 일반 국민들과 공직에 진출하려는 젊은 관료들이 꼭 공부해야할 분야였다. 그의 연구를 통해서 일본에서 '보호국'이나 '병합'과 같이 일본제국을 규정한 국제용어들이 학문적으로 설명되고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1910년 한국 병합무렵 도쿄의 대학과 직업학교 그리고 고등학교에서는 모두 식민 정책 분야를 가르쳤고 이를 통해 일본인들은 한일병합이 제국주의 정치라는 보다 넓은 국제적 문맥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배웠다. 이렇게 함으로 일본은 미국이 필리핀을 통치하고 프랑스가 베트남을 통치하는 방식과 유사하게 일본제국도 식민지를 통치한다는 상식을 전파했다. 그는 1910년 도쿄대학에서 식민정책과목을 가르칠 때 항상 칠판에 "식민지화는 문명을 전파하는 일이다"라는 글귀를 써넣고 강의를 시작했다. 니토베는 한국인들이 일본 식민주의자들이 자신을 개화시켜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1932년 일본의 만주침략을 논리적으로 옹호했으며, 여름 동안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일본의 행동을 설명했고 미국 CBS 라디오 방송에서 많은 미국 청중을 대상으로 일본의 행동을 정당화했다.[1]